알라딘: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 신좌파 · 자유주의 · 신유가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 신좌파 · 자유주의 · 신유가
조경란 (지은이) | 글항아리 | 201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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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 지식계의 동향과 복잡한 사상분화의 과정을 최근거리에서 밀도 깊게 들여다본 국내 학자의 저서가 출간되었다. 오랫동안 중국의 현대사상과 지식지형 문제를 연구해오고 많은 조경란 교수의 저작이다. 이번 책에서는 신좌파, 자유주의, 신유가라는 큰 틀 안에서 지식인들의 유파가 현재 어떻게 펼쳐져 있는지를 매우 세밀하게 집중적으로 다룸으로써, 중국 지식인들의 사유양식과 행동양식을 충분히 이해하고자 했고, 지금 이들의 사유가 어디까지 와 있는가를 가감 없이 확인하고 있다.
그것은 제3장 ‘최근 주요 학파와 주장들’ 70~73쪽에 실려 있는 도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저자는 이 도표에서 국내 최초로 현대 중국 지식인들을 신좌파, 자유주의파, 문화보수주의파, 사회민주주의파, 구좌파(포퓰리즘파), 대중민족주의파, 신민주주의론파 등 7개의 유파로 나누고 각 유파마다 대표인물, 출현시기, 마오쩌둥시대와 문혁시대에 대한 입장, 자본·전지구화에 대한 입장, 국가와의 관계, 서구 근대성을 보는 시각, 중국 현대화 방안은 15가지 항목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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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숭중崇中과 혐중嫌中을 넘어 연중硏中과 비중批中으로
서론
중국의 지식(인)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제1장 중국 사상 구도와 지식인의 분화 : 신이행기new transition period의 관전 포인트 _035
제2장 좌와 우의 교차, 국가 그리고 지식공동체 : 진보와 보수의 아포리아
제3장 최근 주요 학파와 주장들 : 현대 지식 지형과 분류 기준
제4장 중국의 유학 부흥의 조건과 태도 : 대륙 신유가와 모더니티의 문제
1. 유학은 사상계 전체의 공통 배경이 되었는가 | 2. 유학 관련 두 가지 사회적 ‘사건’
3. 대륙 신유학의 대표적 인물과 그 주장들 : 유교, 유학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4. 신좌파와 자유주의의 유학에의 접목 | 5. 유학 부흥의 여러 조건 : 태도의 문제
6. 유학 부흥에 대한 기대와 우려 : 비판 담론으로서의 유학
제5장 중국 자유주의와 그 변화 가능성 : 위기와 기회의 변증법
1. 중국 자유주의의 위기와 쟁점 | 2. 1990년대 중국의 자유주의 : 자유주의 계보와 국가와의 관계
3. 자유주의의 중국화? | 4. 중국 자유주의의 한계와 역할 그리고 변화 가능성
제6장 신좌파와 비판적 지식인의 조건 : 신좌파의 국가주의화와 ‘중국모델론’
1. 신좌파는 비판적 지식인인가? | 2. 1990년대 신좌파의 역할과 사상 배경
3. 신좌파의 중국모델론 구상과 국가주의화 비판
4. 중국모델 담론 안에서의 정치개혁 구상과 그 비판 : 군중 노선과 ‘응답형 민주’
5. 신좌파의 충칭모델 구상과 그에 대한 비판들
6. 중국 신좌파 상상력의 귀결 : 권력과 ‘급진’의 결합?
제7장 현대 중국 지식 지형의 전망 : 공공성의 지식, 지식의 공공성
1. 서양 근대 초월과 문명모델의 전환 : 중화성의 재구축?
2. 새로운 질서의 재구축과 지식인의 역할 : 제도와 가치의 재건
3. 비판적 지식인의 조건 : 국가와 ‘거리두기’
[부록] 중국 개혁개방 30년의 사상과 지식 지형 : 1980~1990년대를 중심으로
1. 개혁개방 30년 : ‘계급중국’에서 ‘문명중국’으로?
2. 1980년대 : 신계몽운동의 출현과 사상의 공공성- 탈문혁, 문화열 그리고 허상 현상
3. 1990년대 : 6·4사건과 지식계의 보수화 | 4. 20세기 중국의 두 차례 이행기
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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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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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국가, 유학, 지식인>,<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한국 문화전통과 배려의 윤리> … 총 18종 (모두보기)
소개 :
성균관대학교에서 〈진화론의 중국적 수용과 역사의식의 전환〉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공회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 홍콩 중문대학교와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연구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중국의 현대 사상과 지식인 문제, 동아시아 근대 이행기에 대해 연구해왔다. 저서로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전통?근대?혁명으로 본 라이벌 사상사》(2015),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신유가, 자유주의, 신좌파》(2013),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2003), 《보수주의와 보수의 정치철학》(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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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고우면에 처한 혹은 경제적 굴기에 올라탄
중국 현대 지식인의 복합적 자화상과 그 지형
왕후이는 비판적 지식인일 수 있는가?
중국은 왜 루쉰 지우기에 열중하는가?
“신좌파 지식인 왕후이가 정치협상위원政治協商委員이 되었다는 뉴스는 나에게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의 충격이었다. 물론 혹자는 왕후이가 정협위원이 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고 할지 모른다.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환경을 고려하면 왕후이의 기존 위상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좀 달리한다. 일단은 그 자신이 어떤 발언을 하고자 할 때나 글로 쓸 때, 정협위원이 되기 전과 후에 일관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 _ 서론
“신좌파의 귀착점인 중국모델론은 서구의 대안으로서 서양 신좌파의 바람이 투영되어 있으며 일정한 군중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정치적 명분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의 가장 큰 문제는 중국중심주의와 제휴하고 있다는 것이고 집권당인 공산당 및 중국 정부의 희망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_ 6장 ‘신좌파와 비판적 지식인의 조건’
국내 최초로 중국 현대지식인 유파별 분류·평가
지금 중국 지식인들을 “무엇을” 사유하고 있는가
중국은 하나의 국민국가이지만 또한 ‘문명’을 담지한 하나의 제국이다. 이미 우리에게 중국과 중국 지식인들은 중화주의적 대국주의 경향과 ‘문명 제국 재구축’에 합세하고 있으며 나아가 서구 19세기 이후 형성된 사회과학 지식에 대한 해체까지 시도하려 하고 있다. 동북공정과 같은 노골적인 정치적 색채의 역사작업과는 또 다르게 근본적인 차원의 세계 인식론적 전환이 막후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중국 지식계의 동향과 복잡한 사상분화의 과정을 최근거리에서 밀도 깊게 들여다본 국내 학자의 저서가 출간되었다. 오랫동안 중국의 현대사상과 지식지형 문제를 연구해오고 많은 조경란 교수의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다. 이 책은 신좌파, 자유주의, 신유가라는 큰 틀 안에서 지식인들의 유파가 현재 어떻게 펼쳐져 있는지를 매우 세밀하게 집중적으로 다룸으로써, 중국 지식인들의 사유양식과 행동양식을 충분히 이해하고자 했고, 지금 이들의 사유가 어디까지 와 있는가를 가감 없이 확인하고 있다. 그것은 제3장 ‘최근 주요 학파와 주장들’ 70~73쪽에 실려 있는 도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저자는 이 도표에서 국내 최초로 현대 중국 지식인들을 신좌파, 자유주의파(자유주의 좌파 포함), 문화보수주의파, 사회민주주의파, 구좌파(포퓰리즘파), 대중민족주의파, 신민주주의론파 등 7개의 유파로 나누고 각 유파마다 대표인물, 출현시기, 마오쩌둥시대와 문혁시대에 대한 입장, 자본·전지구화에 대한 입장, 국가와의 관계, 서구 근대성을 보는 시각, 중국 현대화 방안은 15가지 항목을 밝혔다. 이로써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 대표 지식인들의 활동양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은 이 책의 가장 빛나는 공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서론에서 책 전체의 주요 얼개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서론만 읽어봐도 책의 핵심 내용이 전부 파악된다. 그런 뒤 1장부터 7장에 걸쳐서 지식지형을 두텁게 그려내고 있다. 1~3장에서는 가파르게 변화해가는 현실에 적응하는 지식사회의 분위기를 전한다. 중국 사상 구도와 지식인의 분화, 좌와 우의 교차 속에서 국가와 지식공동체 문제, 최근 등장했거나 변화를 모색 중인 주요 학파와 주장들의 면모를 살펴본다. 그리고 4~6장에서는 중국의 3대 지식유파라 할 수 있는 신좌파, 자유주의, 신유가를 다뤘다. 대륙 신유가와 모더니티의 문제, 중국 자유주의와 그 변화 가능성, 신좌파와 비판적 지식인의 조건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7장에서는 현대 중국 지식 지형을 전망했다. 물론 그 전망은 결코 밝다고 볼 수 없으며 저자는 최대한 근거를 들어 객관적인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중국 지식담론의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부록으로 ‘중국 개혁개방 30년의 사상과 지식 지형 : 1980~1990년대를 중심으로’의 글을 별도로 수록했다.
현 중국 지식계 -- 낙관론 vs. 비관론
지금 중국의 지식계는 중국 문명에 대한 낙관론과 비관론으로 갈리고 있다. 도식화하면 낙관론은 ‘유럽적 보편주의’ 또는 ‘미국적 보편주의’에 대한 대안과 연결된다. 낙관론은 중국의 경제성장을 토대로 한 체제에 대한 자신감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GDP 등 ‘총체로서의 중국’에 더 관심이 많다. 따라서 중국의 헤게모니, 중국 중심주의와 제휴하기가 쉽다. 반면 비관론은 중국 경제성장의 근거와 과정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부작용의 가공할 측면에 좀더 주목한다. 물론 지금은 전자가 대세다. 하지만 수는 적더라도 비관론이 존재하며, 이들은 오히려 중국의 굴기 현상에 대해 거리두기를 하면서 그 역설적인 측면에 주목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관적이라고 하여 대안 제시의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좀더 근본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질의의 방식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첸리췬은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중국 인민은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자신의 과오로 초래된 몇 천만 명의 죽음을 포함하여 자연의 대파괴, 집정당의 부패,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 총체적인 정신적 위기 등 참담한 대가를 지불했다. 성취한 만큼 문제 또한 거대하다. 모든 사람이 함께 성취를 경축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처럼 정치, 경제, 생태, 사회, 사상, 도덕 등 모든 면에서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으니 중국식으로 가겠다?
‘문명중국’의 논리가 갖는 허구성 분석
이어서 저자는 중국 굴기와 공산당의 흥망을 자기 자신의 흥망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살펴본다. 이들은 주로 ‘중국모델론’과 ‘유교중국’ 구상에 여념이 없으며 사상 유파로는 신좌파와 대륙 신유가가 이에 해당된다. 그랜드한 ‘문명중국’의 모델을 구상하는 데는 왕후이를 비롯한 신좌파가 훨씬 적극적이다. 중국은 유학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의 고전 문명 전통과 현대 사회주의 전통을 연성권력soft power의 양대 자원으로 삼고자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좌파가 구상하는 중국모델론의 내용이다. 이러한 중국모델론을 구상하고 있는 철학자 간양甘陽은 2012년 출판한 책 『문명·국가·대학』에서 20세기와 21세기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서두를 연다. 그에 따르면 현대 민족-국가nation-state를 세우는 것이 20세기 중국의 중심 문제였다면, 21세기 중국의 핵심 문제는 ‘민족-국가’의 논리를 초월한 문명-국가civilization-state의 틀을 제시하는 것이다. “중국의 ‘문명’은 중국이 현대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어 거대한 부담이고 장애가 되기 때문에 ‘천하’에서 ‘국가’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던 레벤슨의 말은 20세기 중국에 해당되는 분석이었다고 간양은 본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 강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민족-국가에 대비되는 문명-국가는 과연 무슨 의미일까 하는 것이다. 특히 그것은 현대사회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유학이 표방하는 핵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천하-문명 개념틀이 중국 현실사회의 층위에서 실현되는 구체적인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 구체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위의 주장은 이제 세상이 바뀌었으니 중국식으로 가겠다는 정치적 헤게모니 선언으로만 보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천하-문명은 원래 규모나 지리 공간 개념일 뿐 아니라 역사와 가치 개념을 포괄한다. 전근대 중화문명 체제 아래에서는 주권, 영토, 민족 개념이 선명하지 않았고 화이의 구분 의식 또한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화와 이의 기준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유학으로 교화되거나 동화되는 것에 따라 정해졌다. 인仁에 바탕을 둔 가족윤리가 천하를 향해 한정 없이 확장되는 세상, 그것이 천하이며 문명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좀더 엄정한 평가와 서술이 있어야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근대 국민국가 개념이,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개념이 개입되기 전에는 (민족을 초월한) 이러한 문명과 천하라는 개념 자체가 의식되지도 않은 채 중국의 통치 방식과 생활 방식을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천하-문명 개념은 전근대 중국인에게 있어 정치, 경제, 문화를 망라한 총체적인 운영 메커니즘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간양이 말한바, 문명-국가가 21세기 중국의 핵심 개념이라는 것을 국가와 ‘공모’한 정치적 헤게모니가 아닌 인문학적 통찰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신좌파는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지금 중국의 국가와 인민 생활의 면모가 다른 나라의 것과 얼마나 다르고, 가까운 미래에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합리적 예측을 가능케 하는 어떤 단서를 제시해야 한다. 더구나 중국 자본주의가 ‘괴물자본주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현실이기에 더욱 그렇다. 현실로 엄존하는 민족-국가 지배체제와 자본의 이중지배, 그리고 그 아래에서 어느 때보다 주변화되고 있는 민民과 이夷(소수민족)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현재 중국 자본주의의 문제를 유럽이나 그 외 앞서간 자본주의 사회와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자본주의의 천박성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양 유럽에서도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 노골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서 지젝Slavoj ?i?ek은 ‘시간’의 문제를 지적한 것인데, 민주주의가 하층계급의 길고 힘든 투쟁을 거쳐 획득될 수 있었다는 것은 거칠 것은 모두 거쳐야 시민계급이건 근대의 도덕질서이건 성숙될 수 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주장은 중국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변형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 자본주의를 시간의 문제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경험에 대한 평가와 연동되기 때문이다. 신좌파가 구상하는 중국모델론의 핵심적 구성 요소 중 하나가 사회주의 경험이라고 한다면, 이들은 앞의 지젝의 입장과 정면 대립하는 것이다. 즉 이들은 중국 사회주의를 반反근대성의 한 형태로 인식한다. 이들이 이렇게 인식하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새로운 대안을 내놓기 위해서는 ‘구대안’으로서의 중국 사회주의의 문제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질의는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현실에 대한 진단’을 누락시키고 문명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공허한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주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중국의 ‘좌파’를 단순히 인정 또는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역사적 공과와 의미에 대해 본원적이며 발본적으로 다시 보기를 통해 냉정하게 평가하고 이들의 ‘실상’을 반성적으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현실에 대한 진단’이란 신좌파가 문명-국가의 논리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국가와 자본의 지배를 극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민과 이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주변화를 차단시킬 것인가에 대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대안을 말하지 않고 문명과 천하의 논리를 중국의 특수성과 연결시켜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인 듯 반복하는 것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국가가 처한 합법성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전략의 한 차원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중국 내부의 다양한 문제를 은폐해주는 기능을 하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유럽의 진보가 중국에서 진보가 아닌 이유
지젝, 스티글리츠 등 서구 좌파와 왕후이 등 중국 신좌파의 관계
최근 중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책 가운데 하나는 마틴 자크Martin Jacque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때』다. 여기서 자크는 중국이 세계의 주도 역량이 되는 것뿐 아니라 중국은 특수하여 서양이 상상한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중국의 굴기는 ‘서방세계의 종결’(영국판 부제목)을 의미하고, ‘신지구 질서의 탄생’(미국판 부제목)을 의미한다. 마크 레너드Mark Leonard도 2005년 이후 세계에는 적어도 세 개의 모델이 출현했으며 중국모델은 비서방 국가들에게는 미국모델과 유럽모델보다 훨씬 흡인력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왕후이에 따르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실패한 신자유주의 개혁과 비교하여 중국의 성공을 독자적인 아시아적 모델에 준거한 데서 찾는다고 한다. 그는 글로벌화하는 신자유주의에서 중국을 예외적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기대하고 있는 이러한 서구 좌파들은 중국의 신좌파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긴밀한 관계는 중국 신좌파로 하여금 서구 좌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의식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작용한다.
이들은 모두 중국에서 매우 환영받는 지식인들이다. 하지만 이들 서구 좌파가 중국에 대해 어떤 학문적 근거를 가지고 중국이 서양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 전망 안에는 서구사회에 대한 비판의 맥락과 그 연장선상에서 대안이 중국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담겨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희망 안에는 다분히 ‘자기목적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하지만 자기 사회의 현상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최소한의 도덕적 명분은 존재한다. 그렇더라도 다른 지역의 연구를 ‘자국의 문제(학문)’를 ‘해결’ 또는 ‘풍부히 하기 위해’ 진행한다고 하는, 어찌 보면 공리적으로 접근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적지 않은 실천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 대상이 연구자의 목적성과 계획성의 구도 안에서 왜곡될 소지를 안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곤혹스런 것은 이들이 좌파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대안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할 때, 앞에서 서술한 중국 굴기의 그늘진 측면에 대해 눈을 감아야 하는 매우 모순적인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거기다가 조금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이들의 이러한 정치적 바람의 근원에는 여전히 동서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론이 깔려 있다고 파악한다. 이 이분법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서양과 동양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는 어떤 문명에는 여하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고유의 속성이 있다고 보는 문명본질주의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수입산이든 국산이든 최근 중국특수론 또는 중국예외론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는 근원에는 이분법과 문명 본질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 좌파가 지지하는 중국특수론은 은밀한 방식으로 중화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있다고 저자는 결론낸다.
동서를 이분법으로 보려는 세력은 그 어느 쪽이든 학문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서구 좌파만이 아니라 중국 내부에도 이러한 중국특수론을 활용하여 입지를 강화하려는 세력이 있음은 잘 알려진 바다. 그 가시적인 사상 유파는 사상 구도에서 좌와 우에 위치하면서도 ‘결과적으로’ 협력관계가 이뤄진 신좌파와 신유가라 할 수 있다. 유가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고대 문명과 현대 중국의 사회주의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중국모델론’의 구상(극좌)과, 유학의 민본 사상을 근간으로 한 ‘유교중국’의 구상은 사실 중국 정부의 미래 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여기서 중국 정부의 마르크스주의 국가 통합 이데올로기가 이미 1980년대에 한계에 이르렀고, 이것의 대체물로 유학을 찾아냈으며, 2000년대 들어와 유교적 개념의 화和가 현재 공산당 정권의 공식 슬로건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양 유파의 주장이 이분법적 인식틀에 근거해 있고 정부와 유착해 있는 한 이들의 구상은 분석적이 될 수도, 윤리적이 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진정한 변혁을 기대한다고 보기도 힘들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월러스틴이 말한 ‘보편적 보편주의’보다는 세계의 위계 구도의 전도를 의도하고 있다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 왜냐하면 현재의 중국특수론은 기본적으로 가치의 다양성에 토대를 둔, 또는 약자로서의 자기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저항성에서 온 것이기보다 조만간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임박한 체제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온 것으로, 서구적 가치보다 훨씬 ‘우월한 보편성’을 호소하는 쪽이기 때문이다.
중국모델론이 진정 대안이고자 한다면 현대사회의 인간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있어 국가와 자본의 본질적인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이 말은 중국모델론의 주요 구성 부분인 유학과 사회주의가 왜 중국의 현대사회에서 ‘거부’당했거나 ‘실패’한 경험을 갖게 되었는지를 근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실패 원인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전제로 재구성된 ‘중국모델론’이어야지, 경제성장에 편승하여 비판이 ‘봉인’된 형태의 그것은 경제성장이 주춤하면 그 지속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의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자유와 민주에 대한 이성적 고뇌를 차단하려는 정부 아래에서
중국의 사유 방식에 근거한 ‘새로운 모더니티’는 어떻게 가능한가
서론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깨어난 노예가 노예의 주인이 되는 길을 거부한다는 선택, 중국은 이제 이 선택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적어도 이런 성격의 고민이 있어야만 문명-국가를 통한 민족-국가의 극복을 운위할 수 있다. 루쉰은 어디에선가 “중국의 문명이란 부유한 자들에게 마련해준 인육의 연회다. 중국이란 인육의 연회를 마련해주는 부엌이다”라고 했다. 이는 물론 중국 문명의 본질이 이렇다기보다는 중국 문명의 허구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중국의 현실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함축적으로 말한 것이다.
인문학적 지식인이라면 이것이 중국사회에서 기각되어가는 것에 격렬하게 저항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중국의 현실은 이와 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루쉰 지우기가 한창이다. 아니, 루쉰뿐 아니라 1919년 5·4운동 이후 사회주의 건설기까지 진행되었던 중국 지성의 자유와 민주에 대한 이성적 고뇌의 모든 사상 흐름을 차단하려는 무서운 기운이 맴돌고 있다. 그것은 2000년대 들어 경제대국의 위상이 확실해지면서 좀더 뚜렷해진 상황이고,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시진핑習近平 정부로 진입하면서 훨씬 강화되고 있는 추세다.
루쉰은 동아시아 지성 확산의 근본 처소다. 한국의 리영희, 중국의 첸리췬, 일본의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등 ‘동아시아 3대 지성’은 루쉰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사유하는 방법에서 이들은 루쉰을 가장 잘 계승했으며 우상 파괴와 형해화된 사유를 비판하는 데서 이들은 가히 ‘루쉰 식의 좌익’이라고 할 만하다. 동아시아의 진보가 어느 때보다 위기 상황인 지금, ‘진보의 재구성’을 위해서는 처절하리만큼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 루쉰은 사실 자유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회의했지만 생활세계와 정치에서는 철저하게 ‘이성’과 ‘자유’를 추구했다. 그냥 자유주의가 아닌 자유주의를 회의하는 ‘이성’과 ‘자유’를 말이다. 동아시아 3대 지성은 이성과 자유를 위해서는 타인(세상)을 욕하는 것도 타인에게 욕을 먹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국면에서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지식인 본연의 책임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해냈다는 뜻이다.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21세기 들어 자기 고유의 문명질서를 회복하는 국면에서 동시에 봉건성으로 회귀하려는 매우 강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봉건성과 근대성의 동시 극복이 20세기 중국의 화두였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격세지감이다. 루쉰 식의 문명의 재해석이란, 한 문명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나 다른 문명에 대한 전적인 긍정이 아닌, 모든 문명에 대하여 분석적이고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그런 태도를 의미한다. 문명 그 자체가 아니라 문명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중국의 사유 방식에 근거한 ‘새로운 모더니티’ 그리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창출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곧 이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태도가 내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보편적 보편주의’ 또한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뤄질 수 있을까?
간디가 살아 있다면 “간디 씨, 중국 문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무어라 대답했을까. 앞에서와 같이 “그런 게 있다면 좋겠지요”일까? 아니면 “그래도 아직은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요?”일까.
좌고우면에 처한 혹은 경제적 굴기에 올라탄
중국 현대 지식인의 복합적 자화상과 그 지형
왕후이는 비판적 지식인일 수 있는가?
중국은 왜 루쉰 지우기에 열중하는가?
“신좌파 지식인 왕후이가 정치협상위원政治協商委員이 되었다는 뉴스는 나에게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의 충격이었다. 물론 혹자는 왕후이가 정협위원이 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고 할지 모른다.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환경을 고려하면 왕후이의 기존 위상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좀 달리한다. 일단은 그 자신이 어떤 발언을 하고자 할 때나 글로 쓸 때, 정협위원이 되기 전과 후에 일관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 _ 서론
“신좌파의 귀착점인 중국모델론은 서구의 대안으로서 서양 신좌파의 바람이 투영되어 있으며 일정한 군중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정치적 명분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의 가장 큰 문제는 중국중심주의와 제휴하고 있다는 것이고 집권당인 공산당 및 중국 정부의 희망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_ 6장 ‘신좌파와 비판적 지식인의 조건’
국내 최초로 중국 현대지식인 유파별 분류·평가
지금 중국 지식인들을 “무엇을” 사유하고 있는가
중국은 하나의 국민국가이지만 또한 ‘문명’을 담지한 하나의 제국이다. 이미 우리에게 중국과 중국 지식인들은 중화주의적 대국주의 경향과 ‘문명 제국 재구축’에 합세하고 있으며 나아가 서구 19세기 이후 형성된 사회과학 지식에 대한 해체까지 시도하려 하고 있다. 동북공정과 같은 노골적인 정치적 색채의 역사작업과는 또 다르게 근본적인 차원의 세계 인식론적 전환이 막후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중국 지식계의 동향과 복잡한 사상분화의 과정을 최근거리에서 밀도 깊게 들여다본 국내 학자의 저서가 출간되었다. 오랫동안 중국의 현대사상과 지식지형 문제를 연구해오고 많은 조경란 교수의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다. 이 책은 신좌파, 자유주의, 신유가라는 큰 틀 안에서 지식인들의 유파가 현재 어떻게 펼쳐져 있는지를 매우 세밀하게 집중적으로 다룸으로써, 중국 지식인들의 사유양식과 행동양식을 충분히 이해하고자 했고, 지금 이들의 사유가 어디까지 와 있는가를 가감 없이 확인하고 있다. 그것은 제3장 ‘최근 주요 학파와 주장들’ 70~73쪽에 실려 있는 도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저자는 이 도표에서 국내 최초로 현대 중국 지식인들을 신좌파, 자유주의파(자유주의 좌파 포함), 문화보수주의파, 사회민주주의파, 구좌파(포퓰리즘파), 대중민족주의파, 신민주주의론파 등 7개의 유파로 나누고 각 유파마다 대표인물, 출현시기, 마오쩌둥시대와 문혁시대에 대한 입장, 자본·전지구화에 대한 입장, 국가와의 관계, 서구 근대성을 보는 시각, 중국 현대화 방안은 15가지 항목을 밝혔다. 이로써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 대표 지식인들의 활동양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은 이 책의 가장 빛나는 공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서론에서 책 전체의 주요 얼개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서론만 읽어봐도 책의 핵심 내용이 전부 파악된다. 그런 뒤 1장부터 7장에 걸쳐서 지식지형을 두텁게 그려내고 있다. 1~3장에서는 가파르게 변화해가는 현실에 적응하는 지식사회의 분위기를 전한다. 중국 사상 구도와 지식인의 분화, 좌와 우의 교차 속에서 국가와 지식공동체 문제, 최근 등장했거나 변화를 모색 중인 주요 학파와 주장들의 면모를 살펴본다. 그리고 4~6장에서는 중국의 3대 지식유파라 할 수 있는 신좌파, 자유주의, 신유가를 다뤘다. 대륙 신유가와 모더니티의 문제, 중국 자유주의와 그 변화 가능성, 신좌파와 비판적 지식인의 조건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7장에서는 현대 중국 지식 지형을 전망했다. 물론 그 전망은 결코 밝다고 볼 수 없으며 저자는 최대한 근거를 들어 객관적인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중국 지식담론의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부록으로 ‘중국 개혁개방 30년의 사상과 지식 지형 : 1980~1990년대를 중심으로’의 글을 별도로 수록했다.
현 중국 지식계 -- 낙관론 vs. 비관론
지금 중국의 지식계는 중국 문명에 대한 낙관론과 비관론으로 갈리고 있다. 도식화하면 낙관론은 ‘유럽적 보편주의’ 또는 ‘미국적 보편주의’에 대한 대안과 연결된다. 낙관론은 중국의 경제성장을 토대로 한 체제에 대한 자신감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GDP 등 ‘총체로서의 중국’에 더 관심이 많다. 따라서 중국의 헤게모니, 중국 중심주의와 제휴하기가 쉽다. 반면 비관론은 중국 경제성장의 근거와 과정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부작용의 가공할 측면에 좀더 주목한다. 물론 지금은 전자가 대세다. 하지만 수는 적더라도 비관론이 존재하며, 이들은 오히려 중국의 굴기 현상에 대해 거리두기를 하면서 그 역설적인 측면에 주목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관적이라고 하여 대안 제시의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좀더 근본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질의의 방식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첸리췬은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중국 인민은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자신의 과오로 초래된 몇 천만 명의 죽음을 포함하여 자연의 대파괴, 집정당의 부패,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 총체적인 정신적 위기 등 참담한 대가를 지불했다. 성취한 만큼 문제 또한 거대하다. 모든 사람이 함께 성취를 경축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처럼 정치, 경제, 생태, 사회, 사상, 도덕 등 모든 면에서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으니 중국식으로 가겠다?
‘문명중국’의 논리가 갖는 허구성 분석
이어서 저자는 중국 굴기와 공산당의 흥망을 자기 자신의 흥망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살펴본다. 이들은 주로 ‘중국모델론’과 ‘유교중국’ 구상에 여념이 없으며 사상 유파로는 신좌파와 대륙 신유가가 이에 해당된다. 그랜드한 ‘문명중국’의 모델을 구상하는 데는 왕후이를 비롯한 신좌파가 훨씬 적극적이다. 중국은 유학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의 고전 문명 전통과 현대 사회주의 전통을 연성권력soft power의 양대 자원으로 삼고자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좌파가 구상하는 중국모델론의 내용이다. 이러한 중국모델론을 구상하고 있는 철학자 간양甘陽은 2012년 출판한 책 『문명·국가·대학』에서 20세기와 21세기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서두를 연다. 그에 따르면 현대 민족-국가nation-state를 세우는 것이 20세기 중국의 중심 문제였다면, 21세기 중국의 핵심 문제는 ‘민족-국가’의 논리를 초월한 문명-국가civilization-state의 틀을 제시하는 것이다. “중국의 ‘문명’은 중국이 현대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어 거대한 부담이고 장애가 되기 때문에 ‘천하’에서 ‘국가’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던 레벤슨의 말은 20세기 중국에 해당되는 분석이었다고 간양은 본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 강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민족-국가에 대비되는 문명-국가는 과연 무슨 의미일까 하는 것이다. 특히 그것은 현대사회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유학이 표방하는 핵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천하-문명 개념틀이 중국 현실사회의 층위에서 실현되는 구체적인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 구체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위의 주장은 이제 세상이 바뀌었으니 중국식으로 가겠다는 정치적 헤게모니 선언으로만 보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천하-문명은 원래 규모나 지리 공간 개념일 뿐 아니라 역사와 가치 개념을 포괄한다. 전근대 중화문명 체제 아래에서는 주권, 영토, 민족 개념이 선명하지 않았고 화이의 구분 의식 또한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화와 이의 기준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유학으로 교화되거나 동화되는 것에 따라 정해졌다. 인仁에 바탕을 둔 가족윤리가 천하를 향해 한정 없이 확장되는 세상, 그것이 천하이며 문명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좀더 엄정한 평가와 서술이 있어야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근대 국민국가 개념이,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개념이 개입되기 전에는 (민족을 초월한) 이러한 문명과 천하라는 개념 자체가 의식되지도 않은 채 중국의 통치 방식과 생활 방식을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천하-문명 개념은 전근대 중국인에게 있어 정치, 경제, 문화를 망라한 총체적인 운영 메커니즘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간양이 말한바, 문명-국가가 21세기 중국의 핵심 개념이라는 것을 국가와 ‘공모’한 정치적 헤게모니가 아닌 인문학적 통찰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신좌파는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지금 중국의 국가와 인민 생활의 면모가 다른 나라의 것과 얼마나 다르고, 가까운 미래에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합리적 예측을 가능케 하는 어떤 단서를 제시해야 한다. 더구나 중국 자본주의가 ‘괴물자본주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현실이기에 더욱 그렇다. 현실로 엄존하는 민족-국가 지배체제와 자본의 이중지배, 그리고 그 아래에서 어느 때보다 주변화되고 있는 민民과 이夷(소수민족)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현재 중국 자본주의의 문제를 유럽이나 그 외 앞서간 자본주의 사회와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자본주의의 천박성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양 유럽에서도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 노골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서 지젝Slavoj ?i?ek은 ‘시간’의 문제를 지적한 것인데, 민주주의가 하층계급의 길고 힘든 투쟁을 거쳐 획득될 수 있었다는 것은 거칠 것은 모두 거쳐야 시민계급이건 근대의 도덕질서이건 성숙될 수 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주장은 중국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변형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 자본주의를 시간의 문제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경험에 대한 평가와 연동되기 때문이다. 신좌파가 구상하는 중국모델론의 핵심적 구성 요소 중 하나가 사회주의 경험이라고 한다면, 이들은 앞의 지젝의 입장과 정면 대립하는 것이다. 즉 이들은 중국 사회주의를 반反근대성의 한 형태로 인식한다. 이들이 이렇게 인식하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새로운 대안을 내놓기 위해서는 ‘구대안’으로서의 중국 사회주의의 문제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질의는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현실에 대한 진단’을 누락시키고 문명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공허한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주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중국의 ‘좌파’를 단순히 인정 또는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역사적 공과와 의미에 대해 본원적이며 발본적으로 다시 보기를 통해 냉정하게 평가하고 이들의 ‘실상’을 반성적으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현실에 대한 진단’이란 신좌파가 문명-국가의 논리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국가와 자본의 지배를 극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민과 이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주변화를 차단시킬 것인가에 대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대안을 말하지 않고 문명과 천하의 논리를 중국의 특수성과 연결시켜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인 듯 반복하는 것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국가가 처한 합법성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전략의 한 차원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중국 내부의 다양한 문제를 은폐해주는 기능을 하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유럽의 진보가 중국에서 진보가 아닌 이유
지젝, 스티글리츠 등 서구 좌파와 왕후이 등 중국 신좌파의 관계
최근 중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책 가운데 하나는 마틴 자크Martin Jacque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때』다. 여기서 자크는 중국이 세계의 주도 역량이 되는 것뿐 아니라 중국은 특수하여 서양이 상상한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중국의 굴기는 ‘서방세계의 종결’(영국판 부제목)을 의미하고, ‘신지구 질서의 탄생’(미국판 부제목)을 의미한다. 마크 레너드Mark Leonard도 2005년 이후 세계에는 적어도 세 개의 모델이 출현했으며 중국모델은 비서방 국가들에게는 미국모델과 유럽모델보다 훨씬 흡인력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왕후이에 따르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실패한 신자유주의 개혁과 비교하여 중국의 성공을 독자적인 아시아적 모델에 준거한 데서 찾는다고 한다. 그는 글로벌화하는 신자유주의에서 중국을 예외적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기대하고 있는 이러한 서구 좌파들은 중국의 신좌파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긴밀한 관계는 중국 신좌파로 하여금 서구 좌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의식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작용한다.
이들은 모두 중국에서 매우 환영받는 지식인들이다. 하지만 이들 서구 좌파가 중국에 대해 어떤 학문적 근거를 가지고 중국이 서양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 전망 안에는 서구사회에 대한 비판의 맥락과 그 연장선상에서 대안이 중국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담겨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희망 안에는 다분히 ‘자기목적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하지만 자기 사회의 현상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최소한의 도덕적 명분은 존재한다. 그렇더라도 다른 지역의 연구를 ‘자국의 문제(학문)’를 ‘해결’ 또는 ‘풍부히 하기 위해’ 진행한다고 하는, 어찌 보면 공리적으로 접근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적지 않은 실천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 대상이 연구자의 목적성과 계획성의 구도 안에서 왜곡될 소지를 안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곤혹스런 것은 이들이 좌파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대안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할 때, 앞에서 서술한 중국 굴기의 그늘진 측면에 대해 눈을 감아야 하는 매우 모순적인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거기다가 조금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이들의 이러한 정치적 바람의 근원에는 여전히 동서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론이 깔려 있다고 파악한다. 이 이분법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서양과 동양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는 어떤 문명에는 여하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고유의 속성이 있다고 보는 문명본질주의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수입산이든 국산이든 최근 중국특수론 또는 중국예외론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는 근원에는 이분법과 문명 본질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 좌파가 지지하는 중국특수론은 은밀한 방식으로 중화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있다고 저자는 결론낸다.
동서를 이분법으로 보려는 세력은 그 어느 쪽이든 학문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서구 좌파만이 아니라 중국 내부에도 이러한 중국특수론을 활용하여 입지를 강화하려는 세력이 있음은 잘 알려진 바다. 그 가시적인 사상 유파는 사상 구도에서 좌와 우에 위치하면서도 ‘결과적으로’ 협력관계가 이뤄진 신좌파와 신유가라 할 수 있다. 유가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고대 문명과 현대 중국의 사회주의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중국모델론’의 구상(극좌)과, 유학의 민본 사상을 근간으로 한 ‘유교중국’의 구상은 사실 중국 정부의 미래 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여기서 중국 정부의 마르크스주의 국가 통합 이데올로기가 이미 1980년대에 한계에 이르렀고, 이것의 대체물로 유학을 찾아냈으며, 2000년대 들어와 유교적 개념의 화和가 현재 공산당 정권의 공식 슬로건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양 유파의 주장이 이분법적 인식틀에 근거해 있고 정부와 유착해 있는 한 이들의 구상은 분석적이 될 수도, 윤리적이 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진정한 변혁을 기대한다고 보기도 힘들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월러스틴이 말한 ‘보편적 보편주의’보다는 세계의 위계 구도의 전도를 의도하고 있다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 왜냐하면 현재의 중국특수론은 기본적으로 가치의 다양성에 토대를 둔, 또는 약자로서의 자기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저항성에서 온 것이기보다 조만간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임박한 체제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온 것으로, 서구적 가치보다 훨씬 ‘우월한 보편성’을 호소하는 쪽이기 때문이다.
중국모델론이 진정 대안이고자 한다면 현대사회의 인간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있어 국가와 자본의 본질적인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이 말은 중국모델론의 주요 구성 부분인 유학과 사회주의가 왜 중국의 현대사회에서 ‘거부’당했거나 ‘실패’한 경험을 갖게 되었는지를 근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실패 원인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전제로 재구성된 ‘중국모델론’이어야지, 경제성장에 편승하여 비판이 ‘봉인’된 형태의 그것은 경제성장이 주춤하면 그 지속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의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자유와 민주에 대한 이성적 고뇌를 차단하려는 정부 아래에서
중국의 사유 방식에 근거한 ‘새로운 모더니티’는 어떻게 가능한가
서론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깨어난 노예가 노예의 주인이 되는 길을 거부한다는 선택, 중국은 이제 이 선택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적어도 이런 성격의 고민이 있어야만 문명-국가를 통한 민족-국가의 극복을 운위할 수 있다. 루쉰은 어디에선가 “중국의 문명이란 부유한 자들에게 마련해준 인육의 연회다. 중국이란 인육의 연회를 마련해주는 부엌이다”라고 했다. 이는 물론 중국 문명의 본질이 이렇다기보다는 중국 문명의 허구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중국의 현실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함축적으로 말한 것이다.
인문학적 지식인이라면 이것이 중국사회에서 기각되어가는 것에 격렬하게 저항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중국의 현실은 이와 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루쉰 지우기가 한창이다. 아니, 루쉰뿐 아니라 1919년 5·4운동 이후 사회주의 건설기까지 진행되었던 중국 지성의 자유와 민주에 대한 이성적 고뇌의 모든 사상 흐름을 차단하려는 무서운 기운이 맴돌고 있다. 그것은 2000년대 들어 경제대국의 위상이 확실해지면서 좀더 뚜렷해진 상황이고,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시진핑習近平 정부로 진입하면서 훨씬 강화되고 있는 추세다.
루쉰은 동아시아 지성 확산의 근본 처소다. 한국의 리영희, 중국의 첸리췬, 일본의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등 ‘동아시아 3대 지성’은 루쉰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사유하는 방법에서 이들은 루쉰을 가장 잘 계승했으며 우상 파괴와 형해화된 사유를 비판하는 데서 이들은 가히 ‘루쉰 식의 좌익’이라고 할 만하다. 동아시아의 진보가 어느 때보다 위기 상황인 지금, ‘진보의 재구성’을 위해서는 처절하리만큼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 루쉰은 사실 자유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회의했지만 생활세계와 정치에서는 철저하게 ‘이성’과 ‘자유’를 추구했다. 그냥 자유주의가 아닌 자유주의를 회의하는 ‘이성’과 ‘자유’를 말이다. 동아시아 3대 지성은 이성과 자유를 위해서는 타인(세상)을 욕하는 것도 타인에게 욕을 먹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국면에서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지식인 본연의 책임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해냈다는 뜻이다.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21세기 들어 자기 고유의 문명질서를 회복하는 국면에서 동시에 봉건성으로 회귀하려는 매우 강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봉건성과 근대성의 동시 극복이 20세기 중국의 화두였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격세지감이다. 루쉰 식의 문명의 재해석이란, 한 문명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나 다른 문명에 대한 전적인 긍정이 아닌, 모든 문명에 대하여 분석적이고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그런 태도를 의미한다. 문명 그 자체가 아니라 문명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중국의 사유 방식에 근거한 ‘새로운 모더니티’ 그리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창출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곧 이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태도가 내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보편적 보편주의’ 또한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뤄질 수 있을까?
간디가 살아 있다면 “간디 씨, 중국 문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무어라 대답했을까. 앞에서와 같이 “그런 게 있다면 좋겠지요”일까? 아니면 “그래도 아직은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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