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31

회고록 (9) ‘제 100 부대’ 배속 … 남원에서 화천으로 | Ilpyong Kim



회고록 (9) ‘제 100 부대’ 배속 … 남원에서 화천으로 | Ilpyong Kim



회고록 (9) ‘제 100 부대’ 배속 … 남원에서 화천으로
By ilpyongkim on June 22, 2012


우리 연락장교 7기생의 대부분은 임관 직후 육군 「제 100부대」에 배속 받았다. 육군 제1군단장이었던 白善燁 장군이 사령관으로 임명됐기 때문에 ‘야전 전투사령부’를 100부대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는 설도 있다. 백장군이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내가 겪은 6·25전쟁과 한국군」에 의하면 6·25 전쟁 이전에 한국군 제2군단이 창설돼 있었는데 6·25 전쟁의 와중에서 거의 해체되다시피 산산조각 나 흩어지고, 제1군단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제3군단을 새로 조직하기 전에 제2군단을 다시 창설하고 제2군단장으로 역임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194-197)은 <중앙일보> 2010년 10월 18일 부터 27일에 연재된 내용인데, 이 내용에 거론된 시기는 내가 대한민국 육군중위로 6·25전쟁에 참여해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을 창설할 때 참여한 나의 경험과 똑 같은 시기이기 때문에 매우 흥미 있게 읽을 수 있었다.


제1사단장 시절의 백선엽 준장. 김일평 교수는 바로 그와 관련된 ‘제100부대’에 배속돼 연락장교로서 군생활을 보냈다.

백선엽 장군의 6·25 전쟁 회고록은 자화자찬이 매우 심한 부분도 있다. 백 장군의 통역장교를 역임한 임석두 중위의 통역이 없었다면 미군 고문관 사이의 의사소통은 전혀 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 당시 참전했던 장교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그가 통역장교의 역할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지 매우 궁금하다). 우리 연락장교 7기생은 대구 육군본부에서 100부대에 배치됐다. 이 무렵 송요찬 장군이 이끄는 수도사단과 최영희 장군의 8사단이 지리산의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가 배속된 ‘100부대’는 대구를 출발해 대전에 도착했다. 자동차길 2km 정도는 지프차와 스리코터, 트럭에 실려 갔다. 대전에서는 기차 편으로 전주에 도착했다. 전주역에 내렸을 때 3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철도역 직원이 지리산 토벌에 참전하는 우리 장교들을 겁에 질리게끔 말을 했다. 그 사내는 “전주와 남원부근에는 빨치산들이 아직도 우글우글해서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고, 낮에는 대한민국의 세상이 된다. 세상이 또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니 당신들 주의하시라”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전주 북중학교(전주고등학교의 전신) 校舍의 교실에 짐을 풀고 5~6일 밤을 지낸 뒤 남원으로 떠났다. 남원에 도착한 우리 100부대는 남원국민학교 校舍를 사령부로 정하고 그곳에 주둔했다. 남원은 우리나라의 고전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이가 나온 곳이 아니었던가? 나는 기억해 보았다(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60년」, 회고록(190), <중앙일보>, 2010.10.11. 참조).

1951년에 릿지웨이 미8군 사령관이 일본 동경의 맥아더 극동사령관의 후임으로 떠난 후 그의 후임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이가 바로 제임스 벤플리트 장군이다. 한국전쟁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파면하고 퇴역 조치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 작전에 성공한 후 그의 기세가 등등함에 따라 미군부대를 38선을 넘어서 38선 이북의 북한을 해방시키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이 약세에 몰리면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주저했다. 따라서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이 북한군을 추적하는 작전을 38선으로 제한하고, 6·25전쟁 이전의 영토에 한해서만 원상회복하는 범위에서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38선 이북의 북한 지역을 해방시키는 것이 그의 전략 목표라고 주장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에 정면으로 맞섰다. 트루먼 대통령과 안보담당 보좌관은 중공군의 개입에 대해 우려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반면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했다. 트루먼 정부의 한국전쟁 전략은 전쟁을 국지전(Limited War)으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맥아더 사령관은 중공군이 개입하는 경우가 생겨도 미군은 중공군을 격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맥아더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한이 있을지라도 38선 이북의 북한을 해방시키고 한반도의 남북통일을 무력으로 실현시키겠다는 전략을 주장했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과 백악관 안보담당 참모들은 한국전쟁에서 중공이나 쏘련이 북한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한국전에 개입하게 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한국전쟁을 확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맥아더 장군과 트루먼 대통령과의 전략적 견해 차이로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은 제한된 전쟁 (Limited War)’이라고 결정을 내리고 맥아더 극동사령관을 하극상의 죄목을 씌워 파면했다(6·25전쟁 중 트루먼-맥아더 사이의 의견 차이와 논쟁은 맥아더 극동사령관이 1951년 미공군 전투기로 하여금 중국본토를 폭격하는 전략으로 발생한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공군 전투기가 중국본토를 포격하게 되면 중공의 맹방인 소련이 참전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을 막기 위해 맥아더 극동사령관을 해임한 것이다(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d the Korean War by John W. Spanier, 1965). 나는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인디애나 대학(Indiana University) 에서 국제정치개론을 학부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반드시 한국전쟁 당시의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사이의 논쟁을 강의했다. 국제정치 개론 교과서에도 깊이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18일 서울이 수복되고 미군이 38선을 넘어서 北進할 당시 미 육군 제8군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은 전방을 시찰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전사했다. 때문에 그의 후임으로 주한 미8군사령관으로 매듀 릿지웨이 장군이 부임해 왔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 임명돼 동경으로 떠나게 됐다. 맥아더 극동사령관이 왜 해임됐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증가했다.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됐다.

맥아더 장군은 미국군 총사령관인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것이다. 하극상이었는지 아니면 한국전쟁을 확대해 중공과 전쟁을 확대하겠다는 맥아더 사령관의 입장과, 그 반면에 한국전쟁을 확대하고 중공군과 전쟁한다는 것은 무모한 모험이라며 반대하는 트루먼 행정부의 입장, 그리고 이러한 팽팽한 두 입장간의 견해 충돌과 논쟁은 미국의 정치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토론 대상이 되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the Korean War by David Halberstam, 2007 참조). 그러나 논쟁은 상당히 장기간 계속됐다. 내가 1957년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대학원 강의에 등록했을 때 리처드 뉴스태트 (Richard Newstadt) 교수의 ‘대통령의 권력’ (Presidential Power)라는 대학원 강의를 들을 때 트루먼-맥아더 논쟁을 케이스 스터디로 매우 심도 있게 다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와중에 릿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벤플리트 장군이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왔던 것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그리스(희랍)의 군사지원단장으로 그리스군을 도와서 그리스의 공산게릴라를 토벌하는데 공헌이 많은 게릴라 전문장군으로 이름이 알려진 장군이다. 벤플리트 장군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 그리스를 거쳐 미 8군사렁관으로 부임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짐으로써 한국전선의 전방에서 싸우던 북한군은 동부전선의 태백산맥을 타고 북한으로 도망친 부대도 있었다. 그러나 서부전선에서 싸우든 인민군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산속에 깊숙이 들어가서 남한 출신 의용군과 합류해 게릴라 작전을 지속하고 있었다. 때문에 민가의 피해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미군과 유엔군에게는 아주 큰 위협이 됐다.


1951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훈련장을 찾아 제임스 벤플리트 미 8군사령관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당시 <라이프>지에 실렸던 사진이다.

우리 연락장교 7기생은 육군본부에 가서 임명장을 받고 지리산의 100부대 전투 사령부에 배속을 받았다. 남원에 도착한 우리 한국육군 100 부대는 남원국민학교 교사를 사령부로 정하고 그곳에서 먹고 잤다. 백선엽 장군은 그의 저서 『軍과 나』라는 6·25전쟁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남원의 야전전투사령부 시대를 회고했다.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미8군 작전참모 메제트 대령이 남원의 사령부에 은밀히 나타났다. 메제트는 나에게 ‘벤픓리트 사령관으로부터 한국군에 제2군단을 창설하겠다는 內命을 받고’ 찾아온 것이라고 말했다.”(231쪽) 한국 육군 제2군단을 창설하기 위해 한국군 100 부대는 1951년 3월 남원을 출발해 미육군 제9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화천군 북방의 泉田里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미군이 벌써 천막을 치고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다 끝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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