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6

약산 김원봉 평전

[eBook] 약산 김원봉 평전 - 개정판 



김삼웅 (지은이) | 시대의창 | 201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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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평전. 약산 김원봉은 남한과 북한 정권으로부터 ‘반역자’ 취급을 받고 철저히 배척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적인 의열투쟁과 관련된 일반적인 기록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약산 김원봉을 다룰 때는 보통 ‘픽션’ 형태를 취하거나 추측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김삼웅은 30여 년간 수집한 각종 자료를 토대로 약산 김원봉의 삶을 가장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의열단 창단의 의의, 단재 신채호의 <의열단선언> 집필 배경, 조선의용대 창설과 한국광복군에 합류하게 된 실질적인 동기 그리고 월북과 그의 의문의 죽음 등 역사적인 사실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재조명한 것이다.



이 책에는 일본 정보기관의 기록, 각종 증언록 등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때문에 기존의 어떤 책보다도 약산 김원봉을 심도 있게 다룬 평전다운 최초의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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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약산 김원봉 회견기(가상)



제1장

‘떡잎’부터 남다른 어린 시절

체 게바라와 호세 리잘

‘그림자’ 같은 사나이

밀양에서 열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망국소년이 된 김원봉

전홍표 교장과 평생동지 윤세주 만나

독립운동의 묘판, 밀양

평생 동지들 만나 의기투합하다



제2장

조국독립의 꿈을 그리며

무장투쟁의 꿈을 안고 중국으로 망명

파리강화회의에 자객 보내

비폭력 3.1운동 소식 듣고 실망

무장부대 대신 폭렬투쟁론 정립

신흥무관학교 입교, 폭탄제조법 배워



제3장

폭렬투쟁의 의열단 창단

‘의열단’이라는 고유명사

혈연적 운명공동체 ‘의열단’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



제4장

식민통치 기관을 파괴하라

폭렬투쟁에 생명 걸어

부산경찰서 폭파 작전

밀양경찰서 폭파 작전

조선총독부 폭파 작전

자금 조달과 폭탄 반입의 어려움

아나키즘에 매료되기도

아나키스트 유자명과의 만남

의열단, 임시정부와는 거리 두다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 지원받아

일본 육군대장 처단 시도

단재 신채호의 <의열단선언>

<의열단선언>은 어떤 내용인가

의열단 총회 열어 결의 다짐

‘불멸의 문헌’에 대한 역사적 평가



제5장

황포군관학교 입교 전후

의열단의 시련과 세력 확장

임시정부에 실망한 세력 의열단 가담

의열투쟁자금 마련에 고심

김지섭의 이중교 투탄 의거

확고한 민족주의 신념

황포군관학교에 입교

유오한국혁명동지회 결성

군관학교에서 얻은 인적 자산

김성숙의 김원봉 회고담



제6장

중국혁명전선에 서다

의열단의 개조운동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발전

무창혁명청년회 결성

장개석의 북벌에 참전

살육의 현장을 뒤로하고 상해로

남창봉기에 직접 뛰어들어

광주봉기에는 참가하지 않아

시련을 딛고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발돋움



제7장

독립운동진영 통합운동에 앞장서다

공산주의 이론가 안광천과의 만남

상해에서 새 활로 모색

대표자대회 열어 강령 · 슬로건 채택

창립 9주년과 3.1운동 10주년 성명

레닌주의정치학교 개설

사회주의사상에 깊이 빠져들어



제8장

독립군전사들의 용광로 조선혁명간부학교

세계 대공황과 파시즘 체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우기까지

‘남의사’통해 중국정부로부터 재정 지원 받아

황포군관학교 동기생들의 협력

남경 교외 탕산에 훈련소 개설

조선혁명간부학교 운영에 열정을 바쳐

치열한 혁명계급론 분석

백범 김구의 격려 방문

졸업생들, 특수임무 띠고 적 후방으로

혁명음악가 정율성 배출

독립운동진영의 지도자로 우뚝 서다

“왜노 몰아내는 조선독립의 역군이 돼라”



제9장

사랑과 혁명의 합주곡

북경에서 만난 여성 혁명가 박차정

젊은 혁명가들의 사랑과 조국해방투쟁

노신과 허광평의 사랑과 혁명운동

남경조선부녀회 조직, 운영지도

불꽃처럼 살다간 소피아 코발렙스카야처럼



제10장

민족혁명당 창당 총서기에 취임

국제정세의 변화를 지켜보며 통합정당을 지도

단일대당 운동에 임시정부는 불참

민족 · 민주혁명이념 제시

당권 장악했으나 이청천 계열 이탈

《민족혁명당보》 발행에 심혈을 기울여

민족혁명당 창당의 ‘실천적 의의’

중일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



제11장

조선의용대 창설, 총대장이 되다

중일전쟁, 한국독립 절호의 기회

조선의용대 창설

기독청년회관에서 결성식 가져

의용대원들의 회고

핵심대원들로 의용대 편제

일본인 반전운동가들과 연계투쟁

한국광복군 창설에 자극제 역할

강도 일본을 타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 발행

후방지역 전지공작에 투입

중국 문인 곽말약과 김성국의 회고

의용대원 김학철의 회고

의용대원 유자명의 회고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결성



제12장

조선의용대의 활동과 화북이동 전후

조선의용대의 선전공작과 유격전

“모든 반일 역량을 단결시키자”

다양한 대적선전활동 전개

일제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

일본 반전단체의 축하 메시지

조선의용대의 미래 활동 지침

조선의용대 주력 화북으로 이동

중국공산당, 김원봉의 화북행 차단

중국인 사마로의 증언

“망명자 가족 생계유지를 위해”

〈연안송〉을 지은 정율성은 조선의용대원



제13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

국권침탈기 무력항전의 전통

한국광복군의 결성과 성격

한국광복군의 역할과 사명



제14장

좌절과 민족해방의 중경 시절

잔류대원 이끌고 중경으로 이동

장개석 정부의 통합 압력

임시정부에 참여하기까지의 좌우 갈등

“배운 것 적어도 도량 큰 인물”

소절에 구애받지 않는 혁명가의 풍모

임시정부에서 소외당해

3.1 소년단장 최동선과 재혼



제15장

광복의 깃발 들고 27년만에 환국

일제 패망의 날, 중경

제2진으로 12월 초 환국

일제 패망과 조국독립의 의미

환국 순위 양보

소용돌이치는 정국의 한복판에서

비상국민회의 탈퇴 선언

임시정부와 결별, 민전의장 맡아

28년만의 귀향, 대대적인 환영받아

친일경찰에 붙잡혀 수모 당해

3일간 통곡, 그 눈물의 사연

친일파들이 활개치는 기막힌 ‘해방조국’

이현상의 글, 〈혈투의 30여 성상〉



제16장

단정반대 월북 그리고 의문의 죽음

일관된 통일정부수립 노선

테러위협으로 인한 긴장된 생활

4월 9일 북한으로 가다

월북 동기와 배경

북한정권수립에 기여, 국가검열상 취임

월북, 납북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재북 독립운동가들과 평화통일기구 만들어

풀리지 않는 ‘퇴장’의 진실

그림자 사라져도 존재는 남아

혁명시인 마야꼽스끼처럼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부록1 민족혁명당 당의 · 당강 · 정책 · 당장

부록2 우리 운동의 새 출발과 민족혁명당의 창립

김원봉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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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자신의 생애에서 두고두고 잊지 못할 제1기생 졸업식에서 목 메이는 어조로 “강도 왜노를 몰아냄으로써 조선의 절대독립과 동삼성의 탈환을 기하자”고 역설했다. 1기생 졸업식에서 행한 김원봉의 훈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지들은 졸업 후에 차차 개별적으로 행동해야 하지만 입교 시기의 혁명적 정신을 잊지 말고 조국을 위해 크게 투쟁할 뿐 아니라, 6개월 동안 받은 교육을 기초로 삼아 공부와 연구를 거듭하여 진취적인 정신을 기르고 결사적인 투쟁을 계속하여 우리들의 강토에서 강도 왜노를 몰아냄으로써, 조선의 절대독립과 동삼성의 탈환을 기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혁명투쟁을 위해 헤어진 동지들이 최후에는 반드시 목적을 달성하고 기쁜 얼굴로 서로 만나기를 기대한다.

<8장 중에서>





1938년 10월 10일 오전, 한구 중화기독청년회관에서 조선의용대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결성식에는 100여 명의 대원이 자리잡았고 각 지역에서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한국인과 중국의 군·정 관계 요인들이 참석했다. 대장으로 추대된 김원봉은 제1지대와 제2지대의 지대장에게 각각 군기를 수여하고 ‘朝鮮義勇隊조선의용대’라는 한자 다섯 자와 ‘Korean Volunteer한국의용군’라는 영문이 새겨진 배지를 대원들에게 나눠주었다.

대원들은 태극기와 군기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김원봉 앞에 도열했다. 김원봉은 대원들에게 “중국혁명이 완성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한국에 대한 압박과 착취가 날로 심하며, 한국민족이 해방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이 더욱 포악해졌음이 사실이다. 조선의용대의 기치를 높이 들고 중국 형제들과 굳게 손잡고 최후의 일각까지 분투하자”고 역설했다. 또 “우리의 역량이 작다고 깔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 3000만 민중은 모두 우리의 역량”이라는 김원봉의 연설은 대원들의 가슴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날 조선의용대 대원들이나 내빈 그리고 주역인 김원봉에게 무장부대의 창설은 생애를 두고 잊을 수 없는 감격적인 행사가 되었다. 비록 남의 나라 땅이지만 당당하게 무장한 군사력을 갖춘 조선의용대가 출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1장 중에서>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김원봉의 존재가 대단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김원봉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 했다”는 황용주(전 MBC 사장)의 증언 등을 종합할 때 두 사람의 사이, 그 내면의 관계는 ‘빙탄불상용’과 같았을 것이다. 김일성은 이미 남로당계 인사들과 연안파 독립운동가들을 숙청한 바 있다. 이제 김일성의 절대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인물은 연부역강한 김원봉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숙청되었을지 모른다.

숙청 과정에서 자결이냐 살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은밀하게 살해됐을 수도 있고 옥중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자살을 택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살해한 뒤 자살로 위장되었을 수도 있다.



<16장 중에서>















저자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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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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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해방’되지 못한 20세기 최고의 독립운동가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약산 김원봉 선생. 그는 일제 관헌이 그 이름만 들어도 오금을 저렸다던 의열단을 창단하고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한 20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의열단장,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장, 조선민족혁명당 당수, 조선민족전선연맹 대표, 조선의용대 총대장,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인민공화당 대표,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 그가 역임한 직위만도 10개가 넘는다.

광복 뒤 환국한 조국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테러의 위협과 정치적인 모략이었다. 그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좌우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었고, 이승만 세력에 빌붙은 친일 세력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는다. 결국 김원봉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월북을 감행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1958년 이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남과 북 어디에도 그의 설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우파의 김구 선생과 함께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역사 속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60여 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남한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북한에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정치적 모략 속에서 그를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어왔기 때문이다.



약산 김원봉에 대한 평전다운 최초의 평전

약산 김원봉은 남한과 북한 정권으로부터 ‘반역자’ 취급을 받고 철저히 배척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적인 의열투쟁과 관련된 일반적인 기록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약산 김원봉을 다룰 때는 보통 ‘픽션’ 형태를 취하거나 추측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김삼웅은 30여 년간 수집한 각종 자료를 토대로 약산 김원봉의 삶을 가장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의열단 창단의 의의, 단재 신채호의 <의열단선언> 집필 배경, 조선의용대 창설과 한국광복군에 합류하게 된 실질적인 동기 그리고 월북과 그의 의문의 죽음 등 역사적인 사실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재조명한 것이다. 이 책에는 일본 정보기관의 기록, 각종 증언록 등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때문에 기존의 어떤 책보다도 약산 김원봉을 심도 있게 다룬 평전다운 최초의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광복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김원봉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할 때다. 김원봉의 월북과 의문의 죽음을 비롯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이 책은 김원봉이란 존재를 진정으로 ‘해방’시키고 한국현대사의 전면으로 이끌어내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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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잘 생긴 얼굴과 젠틀한 언행을 보면 어떻게 피의 무장투쟁을 이끄는 리더로서의 힘이 나올수 있었을까? 의문이다.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굽히지 않는 열정이 그 힘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sprenown ㅣ 2017-07-20 l 공감(1) ㅣ 댓글(0)  







  분단과 이데올로기로 역사도 반편만 배우는 슬픔을 느끼네요. 일제시기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사는데... 일제청산을 못한건 우리의 치욕인 역사네요.  

pada ㅣ 2016-01-15 l 공감(1) ㅣ 댓글(0)  







  약산의 삶을 읽어가면서 왜 나는 엉엉 울.. 아니 통곡했는지. 얼마든지 타협하고 부와 영화를 얻을 수 있었지만 초개처럼 스러져간 동지들이 눈에 밟혀서 버텨왔던 약산이 노덕술에게 그 모욕을 당했을때.. 그는 정말 어떤 심정이었을까. 대상을 모르는 분노가 가슴에서 쳐받아오른다. 

랄프로렌 ㅣ 2015-09-28 l 공감(1) ㅣ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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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 2편



 





 김원봉 평전 히버드  ㅣ 2016-12-09 ㅣ 공감(0) ㅣ 댓글 (0)





의열단으로 인해 알게 된 독립투사. 자세히 알고 싶어 평전도 구매해봤다. 의외로 복잡다단하신 분이라 놀랐고...해방 후에 무려 일제 부역자에게 심문까지 당한 치욕(이건 이 책 전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은 다시 봐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며...역사에서 지워지다시피 했다는게 안타깝다. 여러 복합적인 사상을 가지셨던 분인데 어느 한쪽으로만 단정지을 수도 없는 거고.



여하간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긴 했으나 약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책이 괜찮을듯 싶다. 다소 지루한 부분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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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렬한 정의의 불꽃 삶을 살고 간 김원봉 hikelly ㅣ 2014-05-13 ㅣ 공감(8) ㅣ 댓글 (0)





김원봉 이름 석자를 아는 사람은 많이 드문 편이다. 그러나 역사를 좋아하는 나느 김원봉 이름 석자는 들어보았다. 하지만 디테일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 김원봉과 관련되어서는 의열단의 이름 정도만 들어본 정도.







역사 팟캐스트 이작가와 이박사의 이이제이를 좋아한다. 어느 날 이이제이에서 약산 김원봉을 다루는 편이 방송되었다. 당연히 들어보았겠지. 소감은? 우~~~~~와~~~~~~! 이런 분의 생애와 업적이 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 왜 우리 교과서는 김원봉에 대하여서 한 줄도 다루지 않았을까? 내 기억속에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 나석주는 국사교과서에서 독립투장부분에서 윤봉길과 같이 이름 정도 언급된 정도였다. 그런데 나석주열사외 활동이 의열단 활동이었고 김원봉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니!







언젠가 꼭 김원봉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김삼웅씨의 약산 김원봉 평전을 접하였다. 느낌은? 또 다른 우~~~~~와~~~~~!



간략하게나마 그의 생애를 풀어보자면,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0대에 벌써 항일 의식을 가지고 19세에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투쟁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으로 군사학으로 배우기 위해 당시 군사학에서 독보적 존재였던 독일로 가기 위해 중국의 독일 대학 덕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비록 곧 독일이 1차 대전에 패전하여 4개월만에 그만두게 되었지만 이 후 김원봉은 상해에 계속 머무르면서 뜻 있는 사람들과 '정의'의 의과 '맹렬'의 열의 더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그야말로 정의가 맹렬히 살아숨쉬는 일제를 향한 폭렬 투쟁을 시작한다. 일제 시대에 이루어진 웬만한 폭탄 투척 사건의 대부분 김원봉의 주도하에 의열단에서 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단지, 해방 후 보수 우익 및 민족주의 진영의 논리에 의하여 이 사실이 후대에 부각되지 않았을 뿐.







당시 다른 독립투사들과는 달리, 김원봉은 외교니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이니 이런 것들은 독립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로지 정신 무장되고 실력이 있는 군대를 통한 무장 투쟁만이 독립의 지름길이라 굳게 믿었다. 그리하여 초기 폭렬 투쟁은 종국에는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조선 의용대는 당시 3천만 동포의 염원에 맞추어 임시정부에 소속되었고 이는 임정의 한국광복군 청설에 밑거름이 되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김구보다도 김원봉의 활약 및 존재감이 더 컸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 왜 지금에는 김구의 존재와 비중에 비하여 김원봉은 철저히 무시당하여왔을까? 바로 그가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한 부분때문이다. 그러나, 이 평전을 보면, 그가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고 사회주의사상을 공부한 것은 그야말로 단지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공산주의자들이 독립보다 사상을 더 우선시 한다고 생각했을때는 가차없이 그들과 결별하였다.



36년 일제 치하에서 독립 투쟁(그렇다. 김원봉의 활약은 독립 운동이 아니라 그야말로 투쟁이다.)중에 오로지 나의 뜻과 꼭 맞는 사람, 조직과만 일을 한다고 하면 과연 독립 투쟁이 제대로 운영되겠는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런 조직 저런 조직 어울려가며, 논쟁도 해가며 양보도 해가며 한 판 흐드러지게 어울려야 결국 합이 될것이 아닌가?



그러나 해방 후 우리의 지도층 및 지식인들은 철저하게 민족주의의 논리만을 교육시켰다. 그 외 다른 진영의 활동과 영역은 아예 다루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이런 훌륭한 족적을 남긴 위인이 실로 조국에서 외면당하는 쓰라린 현실이 남은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이 들어온 현실에서, 김원봉은 1947년 친일 경찰에게 체포당하고 만다. 급기야 친일 경찰에게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데, 김원봉을 고문했는 군정경찰이 바로 최고로 악독한 친일 경찰 노덕술이다! 이 때 체포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서 3일 동안을 엉엉 울었다고 한다.



독립 투쟁을 할 당시에도 민첩한 행동과 철저한 보안으로 단 한번도 일제에 잡히지 않고 일제를 파멸시키고자 목숨까지 내놓았던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경찰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그가 진실로 독립시키고자 했던 조국의 모습은 이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가 느꼈을 분노와 억울함이 그대로 내 속에 전해야 나도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극도의 실망감을 갖고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 차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는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친일을 한 인간들과는 같은 하늘에서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잘못된 꿰어진 역사의 첫 단추는 위대한 우리 독립 투사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때 잘못 꿰어졌던 단추는 그 후 여러번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잔재들이 남아있으니, 김원봉은 하늘에서 어떤 심정으로 이 땅 남한을 내려다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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