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20

이영훈 - 이승만의 독립운동 (1/2)



(11)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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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학당 #펜앤드마이크 #3.1운동

이승만학당 & 팬앤마이크 공동주회 “3·1절100주년기념심포지움” 2019.2.25 프레스센터

💥이승만의 독립운동 (1/2)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독립운동의 정의

먼저 제목에 나와 있는 ‘독립운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이란 다른 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해방) 자기 나라를 세우는(건국) 운동이다. 그러니까 독립운동의 두 요건은 해방과 건국이다.

이런 시각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기존 방대한 분량의 책이나 논문을 일별하면, 한 마디로 “이건 온전한 독립운동사가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것들 모두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것뿐이다.

1945년 8월의 해방은 완전한 해방이 아니었다. 조선인의 힘으로 이룬 해방이 아니었다. 미국이 일제를 해체한 결과 그로부터 분리되었을 뿐이다. 이후 3년간 조선인은 미국과 소련이란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야 조선인은 자기 나라를 세우고 다른 나라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다시 말해 해방과 건국의 종합으로서 독립이 이루어진 것은 남한의 경우 1948년 8월이었다. 북한은 9월이었다. 조선인의 옛 나라 조선왕조가 망한 것은 1910년 8월이다. 그러니까 조선인의 독립운동사는 1910년 8월에 시작하여 1948년 8월 또는 9월에 막을 내렸다.

1945년 8월까지가 독립운동의 전반전이라면 그때부터 1948년 8월까지는 독립운동의 후반전이다. 아니 전자가 예선전이라면 후자야말로 결승전이다.

그런데 독립운동에 관한 기존의 모든 연구는 1945년 8월에 독립운동이 끝이 난 것처럼 서술하였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독립의 성취로 보았다. 그것은 또 다른 종속의 출발이었다.

조선인이 상이한 방향의 건국으로 향하는 갈라지는 과정이었다. 어쨌든 독립은 미성취 상태였다. 그럼에도 1945년 8월의 해방을 독립의 성취로 간주하고 그 대목에서 책을 덮었다. 책을 쓴 독립운동가나 역사가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해마다 광복절을 맞아 정부는 광복을 해방과 독립으로 알고 그렇게 경축해 왔다.

光復의 원래 뜻은 나라를 되찾는 것, 곧 건국을 말하였다. 그런데 이 민족은 그 뜻을 잊어버렸다. 미국이 안겨 준 해방이란 점도 진작에 잊었다. 마치 제힘을 해방하고 즉시 독립한 듯이 으스댄 지가 벌써 오래다. 그렇게 독립운동사를 엮음이 민간이나 정부에서 굳은 전통이 되고 말았다.


위임통치 청원

독립운동을 올바로 정의하지 않으니 독립운동의 주역 이승만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올바를 수 없다.

100년 전 3·1운동이 일어났다. 조선왕조의 신민이던 조선인이 개인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사유재산이 무엇인지, 독립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그리고 근대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서 봉기한 것이 3·1운동이다.

그 이틀 후 1919년 3월 3일 미국에 망명 중인 이승만은 3·1운동의 소식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장차 성립할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통치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평화회의에 모일 연합군 측이 한국의 장래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에서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두고 현 일본의 통치에서 해방하는 조치를 취해 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미국과 같은 ‘중립적 상업지역’으로 변하여 모든 나라가 혜택을 받게 되고, 특정 국가, 곧 일본의 확장을 막아 극동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나아가 세계 민주주의가 발전하리라는 취지였다.

윌슨 대통령은 이승만의 청원을 묵살하였다. 그렇지만 역사는 이승만의 청원대로 흘렀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국제연맹이 아니라 미국이 조선을 일본의 지배로부터 분리하여 3년간 통치하였다. 국제연맹이 아니라 국제연합의 결의와 승인으로 대한민국이란 독립국가가 건립되었다.

어쨌든 이승만의 청원은 이후 거의 그대로 실현되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정당한 주문이었다.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정당한 명령이었다. 조선을 해방시킨다는 미국의 도덕적 책무감은 그때부터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대중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시비하고 있다. 그 청원이 결국 조선의 독립을 성취한 역사의 정의였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 衆이 어리석어서 그런가, 아니면 사악해서 그런가.

임시정부의 분열

3·1운동 이후 여러 지역에서 임시정부가 발족하였다. 그 모든 정부에서 이승만은 최고지도자인 국무총리, 집정관 총재, 대통령으로 받들어졌다. 이승만은 이미 다른 사람과 겨루기 힘든 카리스마의 지도자로 부상해 있었다.

배재학당 졸업, 최초의 언론인, 만민공동회의 열혈 청년지도자, 고종황제 폐위 음모 연루, 한성감옥 수감, 탈주와 체포, 사형 위기, 옥중 개종과 전도, 독립청원의 밀사로 도미, 미국 하원 의장과의 접견, 미국 대통령과의 접견, 프린스턴대학 철학박사 학위 취득, 한성 YMCA 한국인 총무, 미국 윌슨 대통령과의 개인적 교분 등등, 이승만의 화려한 이력은 그를 벌써 “신화에 가린 인물”로 만들어 놓았다.

그렇지만 후술하듯이 그 신화에 적대감을 품은 세력 또한 부풀고 있었다.

1919년 9월 상해에서 발족한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1년부터 심각한 분쟁에 휘말려 들었다. 국무총리 이동휘가 소련의 레닌에서 받은 독립운동자금을 자당 고려공산당의 경비로 유용한 것이 한 가지 빌미였다.

다른 한 가지 빌미는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이었다. 임시정부 각부의 차장들이 연합하여 이승만 임시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였다. 신채호 등 54명은 이승만을 탄핵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위임통치 청원을 ‘매국매족’ 행위라고 성토하였다.

“이승만은 10년의 식민지 통한을 잊었던가. 遽然히 조선을 미국의 식민지로 삼아 달라고 청원하였다.” “이는 禍心을 품은 역적이 아니면 구차하게 녹을 구하는 鄙夫라.”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았도다.”

그들은 이승만이 작성한 청원서를 읽지 않았다. 아니 읽더라도 그 뜻을 이해할만한 지성의 소지자들이 아니었다. 적대감은 소문과 선동으로 퍼져나갔다. 이승만은 사과를 거부하였다. 애당초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어리석은 衆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찌할 수 없는 무지와 편견은 더없이 과격한 분노와 비난으로 표출되었다. 아! 그 언사는 어찌 그리도 독살스러웠던가. 사람들은 그 영혼에서 서로를 저주하였다. 차라리 독립하지 않을지언정 함께 할 수 없는 군상이었다. 임시정부는 결국 분열하고 말았다.

자유의 길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저술한 『독립정신』은 자유와 독립이 무엇인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한국사 최초의 정치철학서이다.

인간은 편안하고 행복하고자 하는 본성을 지닌다. 인간 본성에 대한 그 같은 소묘는 동양의 철학사에서도 낯설지 않다. 그것을 神의 황금률로 정립하여 인간의 신체는 누구에게도 소유될 수 없으며, 그 노동의 성과는 국가도 범할 수 없는 권리임을 선언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의 서유럽 계몽주의였다.

거기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출현하였다. 거기서 자유는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었다. 또한 하나님은 이 천지 만물을 기기묘묘한 쓰임새로 창조하여 인간의 공유로 주셨다. 그것은 인간들이 서로 개방하고 통상하고 나누어 쓰라는 조물주의 섭리였다. 분업하고 경쟁하고 학문하여 날로 부강하라는 하나님의 계시였다.

요컨대 자유와 독립은 개방이요, 통상이요, 분업이요, 경쟁이요, 학문이요, 기술진보요, 四海同胞였다. 이 교리에 따라 종교개혁 이후의 서양이 맨 처음 개화를 성취하였다. 종이가 물에 젖듯이 이 원리를 거역할 수는 없다.

내 것이 최고라 하여 문호를 걸어 잠그고, 오는 손님을 배척하고, 내 백성을 못 나가게 가두는 종족은 결국 소멸할 것이다. 아, 불쌍하게도 우리 조선이 그러한 지경에 빠졌구나. 나라의 원기가 해체되었다. 사회가 분열하였다. 도덕이 타락하였다. 조선은 다시 홀로 설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러운 가운데 소멸하는 중이다. 어찌하면 좋을꼬.

이제라도 자유와 독립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기독교 입국의 길이다. 미국이 중심이 될 세계 자유연합에 동참하는 길이다. 세계 자유가족의 일원이 되는 길이다. 개방하고 통상하고 경쟁하고 학문하고 근로하고 저축하고 신뢰하고 협동하는 자유인의 공화국을 건설하는 길이다.

이상이 『독립정신』의 요지라면, 이승만이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 제출한 학위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은 독립 이후 중립국으로서 미국이 중립의 의무를 다하는 한 交戰國 어디와도 자유롭게 통상할 권리를 국제 공법으로 성취해온 역사를 추적한 것이었다. 거기엔 장차 세계 자유연합을 이끌 미국의 역할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었다.

미국은 자유통상의 원리로 세계를 번영과 영구평화로 인도할 터이다. 동시대 세계의 지성이 공유한 역사관이자 미래 전망이었다. 조선의 부활은 마땅히 그 길을 따라야 한다. 러시아에서 발생한 공산주의는 나아갈 길이 아니다. 그 길을 따르면 문명이 중지한다.

1923년 이승만은 임시정부에서 그를 그렇게 괴롭힌 공산주의자들을 향해 그러한 취지의 글을 발표하였다.「共産黨의 當不當」이 그것이다. 세계가 그에 현혹할 때 공산주의는 반문명의 길이라고 일갈한 사람이 몇이나 되었던가. 이승만은 세계의 지성이었다. 동포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의 지성이었다.


독립의 정세와 방략

이승만은 조선의 독립은 미국과 일본이 충돌하는 ‘그날’에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이승만은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된 1905년부터 그러한 주장을 펼쳤다.

동년 미국은 일본과 밀약을 맺어 일본의 조선 보호를 승인하였다. 밀약이 세간에 공개되는 것은 1924년이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1905년부터 조선의 멸망이 미국, 영국, 일본 등 열강의 공조 하에 이루어진 일임을 알았다.

일본은 조선 민족은 독립할 능력이 없다고 선전했으며, 미국이 그에 동의하였다. 그러한 국제적 편견이 깨지지 않은 한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 공조체제는 언젠가 깨어지고 말 것이다. 일본은 미국과 같은 자유인의 공화국이 아니다. 자유통상의 나라가 아니다. 스스로를 신의 나라로 여기는 가운데 아시아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나라이다.

그래서 언젠가 미국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날’이 언제인가. 내 생전에 ‘그날’이 올 것인가. 그것은 알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지만 ‘그날’은 반드시 온다. 그렇게 믿고 기도할 일이다. 독립의 정세에 관한 이승만의 판단은 이와 같았다.

그럼 ‘그날’이 오기까지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는 국제회의나 언론이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일이다. 망국의 백성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세계로부터 잊히는 것이다. 잊혀선 그야말로 절망이다. 줄기차게 일본의 조선 병합과 그에 협조한 미국의 외교가 저지른 불의와 불공정을 고발해야 한다.

“저 국무성의 창고엔 아직도 유효한 한 조각의 조약문서가 있다. 1882년에 맺어진 양국의 영구평화를 천명한 조선과 미국의 우호통상조약이다. 미국은 그 영구평화의 정신을 저버렸다. 미국은 전쟁의 나라 일본을 지원함으로써 장차 미국도 태워버릴 수 있는 화근을 만들었다. 조선의 독립은 그 불씨를 차단하여 동양의 평화와 세계의 번영을 초래할 축복이다.” 이승만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 같은 선전과 선동으로 미국인의 마음을 두드렸다.

둘째는 조선인이 합심 단결하여 실력을 양성하는 일이다. 동포를 교육하여 동포사회가 부강해진 가운데 장차 ‘그날’이 오면 “우리의 대포와 우리의 군함으로 왜적에 선전포고하는 것은 만국공법이 허락하는 우리의 권리이다.”

때가 되지 않았는데, 한두 사람이 권총과 폭탄으로 적의 수괴 몇 사람을 상해한다고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제사회의 여론을 악화시켜 독립의 정세를 조장하는 데 지장을 초래할 뿐이다. ‘그날’을 위해 우리는 군대식 규율로 뭉치지 않으면 안 된다.

각인이 보유한 민주적 발언권은 잠시 유보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독립 이후의 일이다. 이승만은 이 같은 취지로 美洲의 교민들을 同志會로 조직하였다. 이 같은 취지에 동조하지 못하는 사람은 동지회에서 나가라고 소리쳤다. 이승만은 동지회의 종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상과 같은 독립의 방략에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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