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8

일본군 6·25참전 비사 첫 공개 : 데이터베이스 : 한겨레모바일

일본군 6·25참전 비사 첫 공개 : 데이터베이스 : 한겨레모바일
일본군 6·25참전 비사 첫 공개

등록 1994-03-16 00:00

미 장성 요청으로 원산 앞바다 등 기뢰제거/1천여명 미군함 승선도… 재군비 촉진 역할
일본의 전후역사에서 공식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 사건중에 소해정부대의 한국전
쟁참전이 있다. <산케이신문>은 15일자보도에서 그동안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
지 않았던 일본의 한국전쟁참전사실을 전하면서 참전이 일본의 재군비를 촉진한 것
으로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0년 10월2일 초대 해상보안청장관인 오쿠보
다케오는 미 극동해군 부참모장인 알레이 버크 소장으로부터긴급히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 오쿠보는 "원산상륙작전을 위해북한이 원산항에 부설한 기뢰를 제
거해야 하니 해상보안청의 소해부대를출동해달라"는 요청에, 혼자서는 답변할 수
없어 요청을 문서화해달라고했다.
버크가 문서로 할 수는 없다고 거절하자, 오쿠보는 당시 외상을 겸하고 있던 요시다
시게루 총리를 찾아가 이를 보고했다. 요시다는존 덜레스 미 국무부 대일강화담당
고문이 와 강화조약의 교섭에 들어간 마당에 요청을 거절하면 강화의 기회를 놓치
게 된다고 말하고, 소해작업을 하는 것이 밝혀지면 국내적으로 문제가 되므로 극비
에 하라고지시했다.
당시 해상보안청에는 미군이 태평양전쟁중 투하한 기뢰를 제거하기 위해 1백척의
소해정으로 구성된 "항로계개부"란 소해부대가 있었다. 이 부대를 지휘하는 옛 일본
제국 해군의 장교들은 공직추방의 대상에서 제외돼 있었다.
오쿠보는 10월6일 밤 원산에 파견되는 21척의 소해정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시모노
세키를 방문해"일본이 독립하기위해서는 여러분의 활약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오
늘은 일장기를 흔들며환송해주는 사람도 없지만, 30년 뒤에는 국민들이 환호의 소
리로 여러분을 기릴 것"이라고 연설했다.
10월17일에는 소해작업을 하던특무정 202호가 기뢰에 충돌해 폭발, 침몰하면서 1
명이 죽고 18명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또한 해상보안청 소속과는 별도로 미군

40,50여성..집에서 시술없이…
에고용돼 미군 함정에서 소해작업을 하던 일본인 2명도 사망했다. 당시미군 함정에
승선해 지원활동을 한 일본인은 1천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의일부는 인천, 원산, 포항
상륙작전 등에 참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쿠보는 당시 사망한 해상보안청 승무원의 유족에게는 사실을 얘기했지만, 정부의
다른 부처에는 세토나이해에서 소해작업중 사망한 것으로 보고했다.버크 소장은 소
해작업이 끝난 뒤 "이것으로 일본의 독립은3년 빨라졌다"며 감사장을 오쿠보에게
전했다고 한다.
소해부대의인원을 중심으로 52년 해상경비대가 발족했으며, 54년에는 현재의 해상
자위대로 이어져, 소해부대의 활동은 일본의 재군비를 앞당겼다는 평가를받고 있다.
<도쿄=김효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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