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7

『십오만원사건』 김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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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원


『십오만원사건』 김준 지음

박환 해제, 변형문고판, 양장, 420쪽.358쪽
중앙아시아 고려인 최초의 장편 소설집


한국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큰 스릴과 감동을 주는 군자금 모집 의거인 십오만원 사건을 소재로 하여 작가 김준에 의해 1964년에 쓰여진 소설이다.

이 소설은 십오만원 사건의 주역 6명 가운데 당시 일제에 체포되지 않고 러시아 연해주에서 계속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7년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과정에서 카자흐스탄 침켄트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던 최봉설과의 직접 인터뷰를 기반으로 창작되었다.

그의 소설과 시는 당시 소련 극동 지역이나 연해주 지역을 배경으로, 독립군의 활동이나 지주 계급을 타파한 사회주의를 다루었다. 특히 『십오만원사건』은 모두7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920년 1월 4일에 애국청년인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최계립), 한상호, 박웅세, 김준 등이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북간도 용정지점으로 운송되던 일화日貨 15만원을 탈취하였지만, 20여 일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되어 처형된 사건을 배경으로 삼았다.

※ 자세한 내용은 이 책과 민속원 홈페이지 (http://www.minsokwon.com/) 참조.



광주고려인마을, 고려인 첫 한글소설 원본 공개

김성대 기자 news@seoulilbo.com
승인 2019.04.15
http://www.seoul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62953



'연해주 항일독립운동 전시회'…철혈광복단 '십오만원 탈취사건'
철혈광복단의 '십오만원 탈취사건'을 다룬 고려인의 첫 한글 소설의 원본.

(김성대 기자) 일제 강점기던 1920년 만주에서 일제의 철도부설금을 빼앗아 독립군을 무장하려 한 철혈광복단의 '십오만원 탈취사건'을 다룬 고려인의 첫 한글 소설의 원본이 광주고려인마을이 진행하는 '연해주 항일독립운동 전시회' 에서 국내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영화 '좋은 놈, 나쁜놈, 이상한놈'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십오만원 탈취사건'은 그동안 수기 등으로 국내에 이야기가 전해져 왔으나 사건 전말을 다룬 소설의 원본이 전시되는 것은 처음이다.

특히 이 책은 실존인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여져 당시 우리나라 항일 운동사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강제이주된 고려인이 쓴 첫 소설인'십오만원사건'은 1964년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알마티주 주도 알마티의 옛 이름)의 카자흐 국영 문화 예술 출판사에서 출판됐다. 저자인 김준(1900~1979)은 카자흐스탄 공화국 크질오르다 시에서 창간된 한글신문 '레닌기치'(현 고려일보)의 기자였다.

김준은 1955년 '십오만원사건' 집필을 위해 이 사건 인물들이었던 윤준희, 림국정, 최봉설, 한상호, 박웅세, 김성일 중 유일한 생존자인 최봉설(최계립으로 개명)을 만나 당시의 전말과 인물들을 취재했다.

만주 와룡촌에서 성장한 최계립이 동지들을 만나 '십오만원탈취사건'을 기획, 실행하고 이후 살아남아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활약상이 담겼다. 최계립은 1919년 3월 13일 간도 용정 3.1만센운동 적극가담자였다.

1920년 1월 4일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등과 함께 일제가 회령에서 용정으로 호송하던 15만원(독립군 5천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현재 시가 150억)을 탈취 후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에 갔다가 엄인섭의 밀고로 체포되어 이듬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최계립은 체포과정에서 중상을 입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했다. 1621년 12월에는 한운용 중대의 이만전투에 참가해 605명의 백위파군을 궤멸시키고 중대원 51명중 49명이 전사했는데 그때 최계립은 몸 3곳에 관통상과 42곳에 총검자상을 입고 기절했다가 다음날 구조됐다.

1922년 2월에는 혁명국 제6한인연대 6중대장이 되어 영하 40도의 혹한속에서 연해주 내전사상 가장 치열했던 블로차엡카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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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북간도 연대기

만주 15만원 탈취사건…'무장투쟁' 신호탄을 쏘다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2019-09-24
https://www.nocutnews.co.kr/news/5217331

[북간도 연대기 ⑦] 항일운동 근거지 역할 '북간도' 독립전쟁史
독립군자금 마련 위해 일제 자본 탈취…후속 무장투쟁에도 영감
기독교 뿌리내린 한인사회 큰 축…한 손엔 총, 다른 손엔 십자가
한반도와 맞닿은 '민족독립 전쟁터'서 청산리대첩 등 승리의 역사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지난 1920년 1월 14일, 만주에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만든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조선은행이 일제 경찰을 대동한 채 회령지점에서 용정출장소로 옮기던 거금 15만 원을 탈취당한 것이다. 조선은행 용정출장소는 일제가 대륙 침략을 목적으로 꾸린 금융창구였다. 이 돈 역시 만주 철도 건설 등에 쓰일 예정이었다.

해당 탈취사건을 일으킨 이들은 항일 무장 독립운동단체 '철혈광복단' 소속 독립운동가 윤준희(1892~1921), 임국정(1894~1921), 한상호(1899~1921), 최봉설(1897~1973) 등이었다. 그들은 당대 북간도에서 가장 번성했던 한인 기독교 공동체인 명동촌 등지에서 교육받은 인재였다.


이 15만 원은 독립전쟁을 치를 군자금으로 쓸 계획이었다. 그 시절 총 한 자루 값이 20~30원이었다니, 15만 원이면 적게는 5000명, 많게는 7500명이 무장할 수 있는 금액인 셈이다.

철혈광복단은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러시아로 향했지만, 당대 악명 높은 밀정 엄인섭(1875~1936)의 배신으로 결국 일제에 체포된다. 이때 붙잡힌 4명 가운데 최봉설을 제외한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한날 한시에 순국한다.

이들 세 사람 유해는 서울 북쪽 산기슭에 아무렇게나 매장됐다가, 해방 뒤인 1966년에서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당시 추모예배를 집전했던, 과거 북간도 명동촌 지도자 출신 문재린(1896~1985, 문익환·동환 목사 부친) 목사는 생전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

"한상호라고 하는 사람은 명동학교 졸업생이고, 최봉설이라는 사람은 내 동서 되는 사람이다. 그 다음에 윤준희라고 하는 사람하고, 임국정이라고 하는 사람 등 다섯 사람이 명동 앞에서 일이 나면 (일제 눈에 띄기 때문에) 안 되겠으니까, 거기서 한 15리 정도 내려와서 개천 옆에 숨어 있다가 (15만 원 탈취사건을 실행에 옮겼다)."

이는 향후 북간도에서 항일 독립 무장투쟁이 본격화하는 데 촉매로 작용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렇게 한반도와 맞닿은, 민족 독립 전쟁터였던 북간도에서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 승리의 역사로 이어지는 독립전쟁 서막이 오른다.

◇ 독립운동 숨통 조인 일제 무단통치 아래 번진 '혁명적' 만세운동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일찍이 1910년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시점을 전후로 독립운동 세력은 북간도에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 간다. 당시 북간도는 독립운동의 '근거지' '활동지' 등으로 불렸다. 이곳에 뿌리내린 한인 사회가 독립운동 세력의 병참기지로서 인적·물적 자원은 물론 군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 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간도 내 명동촌 역시 학교를 세우고 후손을 가르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키웠다. 그렇게 독립운동 세력은 북간도를 중심으로 향후 펼쳐질 치열한 무장 독립투쟁을 차근차근 준비해 간 셈이다.

같은 시기 한반도 정세는 북간도와 180도 달랐다.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해 독립운동가 105명을 체포한 '105인 사건'을 일으키는 등 무단통치로 국내 독립운동 세력의 숨통을 조였다. 이로 인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해 항일 독립운동을 이어가기에 이른다.


이러한 현실에서 1919년 3·1운동은 말 그대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덕주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는 "일본으로서는 이제 드디어 한반도는 완전히 자기 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3·1운동이) 터져나온 것이다. (일제의) 충격이 굉장히 컸을 것"이라며 "가물었을 때는 시냇물이 지하로 흐르듯이, 포기할 수 없는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가 잠복했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초창기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시키는 구심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3·1운동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 대표다. 서울 외 지방에 가면 대부분 기독교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3·1운동 당시인 1919년) 3월에서 5월까지 통계를 보면, 잡혀 들어온 사람을 조사하는데 22%가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전체 기독교인 수가 20만 명 조금 넘었다. 당대 우리나라 인구가 1600만 명을 오갔다. 1600만 명의 20만 명이라고 한다면 1.5% 내외다. 기독교인 수가 1.5% 내외인데,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정도는 17~22%이니 기독교인의 참여도가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 "스스로 쟁취하겠다"…북간도 독립운동 '무장투쟁' 진화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북간도를 위시한 국외 독립운동 세력에게 이러한 한반도 정세는 커다란 영감을 줬다.

1919년 3월 13일 중국 지린(吉林)성 용정시에 있는 서전대야 터에서 독립선언포고문이 뿌려졌다. 수만 명이 모인 가운데 어떤 이는 손에 태극기를, 어떤 이는 손에 십자가를 쥐고 독립을 외쳤다. 이른바 '3·13만세운동'이다.

서굉일 한신대 명예교수는 "(1919년 3월 13일 용정 서전대야에서는) 명동학교와 정동학교의 군악대가 북 치고 소고 치면서 학생들을 맨 앞에 이끌고 운집했다"며 "각 지역 종교 지도자들이 시교당이나 교당, 교회의 교인들을 중심으로 그 운동에 참가했다. 일제는 기록에 1만 명이 모였다고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이 써놓은 기록에는 3만 명 내외가 모였다"고 전했다.

나라 밖에서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저항운동인 3·13만세운동으로 만주에서는 평화로운 시위가 이어졌지만, 일제는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가뒀다. 이를 계기로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은 보다 체계적이고 적극적이고 투쟁적으로 진화해 간다. 일제에 대항하려면 마찬가지로 투쟁력을 길러 독립을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의지였다.

이미 북간도 한인 사회에서는 종교와 사상을 떠나서 많은 젊은이들이 일본 군대와 맞서 싸울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3·13만세운동은 그 때를 알리는 기폭제였다.

1910년대가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하는 시기였다면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 수많은 국내 진공이 이뤄졌다. 지린성 왕청시에 있는 라자구(羅子溝) 군관학교, 십리평(十里坪)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등에서 키워낸 독립군은 그 선봉이었다.

지린성 왕청시 라자구 태평촌을 찾은 역사학자 심용환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곳 첩천산중 가파른 절벽에 새겨진 태극기와 여러 이름들을 봤기 때문이다.

청산리대첩 이후 보복 만행을 벌인 일제는 북간도 한인 사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학살마저 자행했다. 명동촌 등 한인 사회가 속한 용정은 일본 지배를 받는 만주국이 됐다.

이로 인해 독립군은 북간도를 떠나 중국 내륙과 러시아로, 일부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무장투쟁을 지속했다. 이들 독립운동 세력은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30년대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협력해 독립전쟁을 계승했다.

이덕주 전 교수는 "'그 종이(독립선언문) 하나 냈다고 해서 독립시켜줄 것 같냐?' '시기상조다' '어리석다'라는 비판에 내로라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렇게 대답했다더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이른 줄은 안다' '그러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30배, 60배, 100배 결실을 맺는다' '자기가 살려고 하면 그냥 하나로 끝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 도장 찍고 감옥에 들어갈 터인데, 독립을 거두러 들어가는 게 아니라 독립을 심으러 가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래서 위대한 것이다. 우리가 3·1운동을 거룩한 운동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심는 것이 필요한 때다. 다른 사람들은 다 거두려고, 기쁨만 누리려고 한다. 심는 자의 눈물은 모른다. 누군가의 심는 아픔과 외로움이 있으면 훗날 그것을 거두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면서 민족운동과 기독교를 결합시킨 남다른 문화를 뿌리내리죠. 이는 당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뒤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칩니다. 10월 17일 개봉을 앞둔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바탕으로 북간도와 그곳 사람들의 숨겨진 가치를 조명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나라 잃은 그들에게 '북간도'는 약속의 땅이었다
② 1백년 전 만주서 '간도 대통령'으로 불리운 한국인
③ 인삼밭 들어서 잊힌 '청산리대첩' 최대 격전지
④ 윤동주는 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나
⑤ 북간도 넘어간 카메라…조선족 너머 겨레를 담다
⑥ 딸 그만 낳으라고 '고만녜'가 북간도서 되찾은 꿈
⑦ 만주 15만원 탈취사건…'무장투쟁' 신호탄을 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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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만원사건(十五萬圓事件)
현대문학문헌 1964년 김준이 
연변에서 일어난 ‘15만원 탈취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장편소설·해외한인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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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2254

분야

현대문학유형문헌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성격

소설, 장편소설, 해외한인문헌편저자김준

제작시기

1964

간행

자카사흐국영문학예술출판사(사수식). 1964. 알마아타.

1964년 김준이 연변에서 일어난 ‘15만원 탈취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장편소설·해외한인문헌.


개설
연변지역 항일독립운동에서 큰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십오만원 사건’을 소재로 하여 작가 김준에 의해 씌어진 소설이다.

편찬/발간 경위
김준은 이 소설의 창작을 위해 ‘십오만원 사건’의 주역 6명 가운데 당시 일제에 체포되지 않고 소련 영내에서 계속 한인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7년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과정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되어 쉼켄트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던 최봉설과의 직접 인터뷰를 기반으로 창작되었으며, 1964년에 알마아타에서 단행본 소설로 출판되어 당시 소련(특히 중앙아시아 지역)의 한인 독자들이 접할 수 있었던 한글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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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흐국영문학예술출판사(사수식). 1964. 알마아타 출간. 반국판. 정가 77코페이끼. 7500부 발행. 편집주간 남해룡, 그림 김형윤, 편집 한혜원, 교정 박추옥
7장으로 구성된 반국판 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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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 연변을 발칵 뒤집은 전대미문의 사건인 ‘15만원 탈취사건’은 당시 무장독립조직인 “북로군정서” 소속 철혈광복단 단원 6명이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참에 조선총독부가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룡정출장소로 “반일투쟁탄압경비”조로 15만원을 수송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면서, 이들은 1920년 1월 4일 오후 8시 용정의 동량어구에 매복하고 있다가 현금수송마차를 습격하여 5명의 무장 호송대를 사살하고 지폐 15만원을 탈취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최신 소총 한정이 30원이였다고 하니 15만원은 독립군 5000명을 단번에 중무장시킬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었는데, 이들은 즉시 돈짐을 메고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무기구입 원정길에 나선다. 당시 볼세비키 혁명 직후인 소련은 볼세비키 혁명을 지지하는 적군과 이에 반대하는 백군이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 원정에 나선 체코군단은 패배를 직감하고 헐값에 무기를 처분하려고 서두르던 시점이었다. 이들 철혈광복단은 총을 구매하는 계약 직전단계까지 갔는데, 여기서 엄인섭이라는 뜻밖의 인물과 부닥치게 된다. 그런데 무기구입을 위해 내세웠던 엄인섭은 일제의 앞잡이였는데, 그는 최봉설등이 지닌 거금을 보고 즉각 일본군에 밀고하고, 이로 인해 이들 가운데 4명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체포되어, 청진으로 압송되었으며, 이후 이들은 일제로부터 사형을 구형받고 1921년 8월 25일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을 당했다. 이들 중 유일하게 붙잡히지 않은 최봉설은 “적기단”을 조직해 로씨야 중국 등지에서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이후 최봉설은 1922년 러시아 백파와 일본군의 전투에 참가했으며, 이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후 카자흐스탄 침켄트시에 살다가 서거했다.
소설 ‘십오만원 사건’은 바로 이러한 1920년 연변에서 일어난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소재로 군자금을 조달하려는 항일운동 지사들의 행적과 활동을 재구성한 일종의 실화소설로, 민족의식이 희박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던 1960년대 소련 한인사회의 민족의식 부활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1919년 만주 간도에서 최봉설, 김성일, 림국정 등의 여섯 사람이 한국의 독립군 자금 마련을 위해 만주 철도부설에 필요한 자금을 운반하는 길목에서 일본의 은행 돈을 탈취했던 실화를 다룬 실명소설이다. 구소련의 소비에트 고려인 사회에서는 최초의 한글 장편소설로서 항일적인 면이 짙다.
의의와 평가
김준은 십오만원 사건 발간 이전에 조선시집을 펴냈는데, 이는 고대시조, 현대시, 재소고려인의 시까지 망라한 종합시집이었다. 십오만원 사건은 장편소설을 담았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김준은 서문에서 이 소설을 1955년 시작해서 1960년 탈고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고려인 소설의 특징 중에 하나는 사실에 근거한다는 점인데, 김준은 이 소설을 실제 십오만원 사건의 주도자였던 최봉설의 증언에 의해 사실 위주로 집필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하며, 1920년대 연해주 지역 항일운동의 주요 사건 가운데 하나인 ‘십오만원 사건’이 한국사회에서는 당시 간도의 한인 젊은이들이 끓어오르는 애국심으로 감행한 무모한 도전이자 국외 항일투쟁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구소련 사회에서 이 사건은 소련 공민자격 획득에 필요한 조국해방 전쟁 참여 경력과 항일 투쟁의 이념을 동시에 쟁취한 1920년대 극동지역 조선인 빨치산의 위대한 대서사로서 오랫동안 전설로 전해져왔다고 작가 김준은 1964년 출간된 소설의 ‘저자의 말’에서 언급하였다.
소설이 발간된 1964년 시점에서 김준이 소설을 통해 재구성한 애국청년들의 삶은 이후 같은 고려인 작가 김세일이 대하장편 ‘홍범도’를 발간하기 이전 당시 고려인 내에 있었던 고려인의 역사복원 의지와 자존심 회복을 문학작품을 통해 표출하였다. 역사소설이며 실화소설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이 작품의 집필을 위해 김준은 실제로 최봉설을 만나 그의 회고를 듣고 사실의 충실한 고증과 재현을 기반으로 문학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소설의 허구성이 사실에 앞서는 위험을 피하고자 했다.
그의『십오만원사건』창작은 당시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1963년 1월부터 2월까지 당시 고려인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었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의 고려인 집단농장들에서 독자들인 집단농장원들과의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이 만남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작품창작과정과 주요 내용에 대해 소개하였으며, 이 방문의 성과로 집단농장에서 십오만원 사건이나 다른 잡지가 작가동맹 조선어분과에서 한국어로 발행된다면 7,300권을 구독하겠다는 약속을 받기도 했다. 1964년 9월 30일자 레닌기치에서 고려인작가 강태수는 이 소설을 ‘소비에트 문학에서 처음 조선말로 씌여진 조선작가의 큰 작품이다’라고 평가하며, 소설 구성상 문제점으로 소설에서의 사건 발생과 전개 과정에서 작가 자신이 너무 부각된 점, 전체소설에서 사투리의 사용 문제에 대한 지적을 하였다.

참고문헌
『소비에트중앙아시아 고려인문학사(1937-1991)』(김필영,강남대학교출판부. 2004)
십오만원 사건 (김준, 카자흐 국영 문예서적 출판사 알마아타, 1964)
「국제주의와 유교적 지사의식의 결합-김준의 작품세계」(김주현,『억압과 망각,그리고 디아스포라–구소련권 고려인 문학』,한국문화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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