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8

유일하게 가치 있는 우리 학자의 연구는 윤명숙,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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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연 논란을 보며 요즘 드는 생각 몇 개.
1. 지켜야 할 것과 철폐되어야 할 것의 경계가 불분명해 보일 때 그 경계의 역할을 분명히 해 주는 것이 학문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2. 최근에 살펴보다, 우리나라 연구자 손으로 이루어진 위안부 연구가 생각보다가 아니라, 거의 없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랐다. 왜 연구가 없었는지 그 이유부터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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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용환 (Yong Hwan Shim)
선생님의 추천으로 보게 되었는데 도서관에서 다른 자료를 살펴 보아도 이 분야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우리 학자의 연구는
<윤명숙,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 이라는 생각이다.
나머지는 거의 일본인 연구자들이 한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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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범[
Hyuk Bom Kwon
]선생님께서, 안연선,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 강력 추천해 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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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워들은 이야기가 난무할 때, 사실에 기반해 만들어지는 역사의 의미는 엉망이 된다. 그 주워들은 이야기가 교묘히 역사투쟁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더 그러하다. 일부 언론에서 주워들은 이야기, 페북에서 본 이야기를 들고 위안부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할 수도 있는 것들을 기사로 만들어 내는 걸 보니 조금은 안타깝다. 알게 모르게 언론도 역사를 기록하는 일부일 수 있다는, 소명의식을 발휘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4. 다시 학문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주워들은 이야기가 역사투쟁의 수단이 되는 것을 방지하려면 이 사안을 이해하는 개념적 틀이 분명해야 한다. 오랜 동안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이어져 왔음에도, 이 사안을 이해하는 분명한 틀이 공유되지 못한 것에는 학문적 책임도 분명히 있다.
5. 내가 마음대로 결정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운영위원들과 의논하여 참여사회연구소에서 뭔가 이런 시작을 할 수 있도록 기획해볼 필요가 있겠다. 역량을 가진 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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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Hyuk Bom Kwon and 79 others
9 comments

Kwanhu Lee
한국에서 무엇이든 필요한 관련 연구가 없는 경우에 이유는 크게 세가지인데, 
취업이 안되고,
지속적인 연구비 지원이 없고, 
한국사례를 학계에서 비하하기 때문입니다. 

기획을 저도 안해 본 것은 아닌데 일회성에 그치고 말더라고요. 5.18도 비슷..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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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 증언은 인간 용기의 최대치"
입력 2018.03.30. 10:17 수정 2018.03.30. 20:16 댓글 1개

서울대 인권센터 위안부 연구팀
피해여성 16명 생애구술사 펴내
증언과 관련자료 접목 첫 사례
이야기 이어가는 전승자 의미도

[한겨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자료집을 펴낸 정진성 서울대 교수(가운데)와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왼쪽), 박정애 동국대 연구교수가 27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 인권센터에서 자료집과 함께 펴낸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란 제목의 ‘위안부’ 피해 여성 구술생애사 사례집을 보며 <한겨레> 취재진과 이야기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1, 2
-사진과 자료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이야기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 지음/푸른역사, 각 권 1만5000원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이 분들이 감당해야 했던 삶을 이보다 더 간명하고 웅숭깊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낱말들 앞에 다른 어떤 수식어가 필요할까? 앞의 두 낱말 ‘끌려가다’와 ‘버려지다’는 피동형 동사다.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이뤄진 상황들이다. 마지막 문장의 ‘서다’는 행위자의 의지가 개입한 자동사다. 단순히 문장부호 쉼표로 시간의 흐름이 구별된 세 낱말 사이의 간극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거기엔 오랜 세월 흩어져 떠돌았으되 잊히지 않는 기억, 저마다의 아픈 서사, 정치적 무관심과 사회적 편견, 꿋꿋한 삶의 의지가 응축돼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다.

1940년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10대 소녀들을 납치하다시피 끌고 가 자국 군인들에게 ‘위안부’라는 이름의 성 노예로 ‘제공’했다. 파릇한 청춘을 끔찍하게 유린당하고 망가진 삶을 평생토록 속앓이하면서 끝내 살아남았던 생존자 소녀들이 이젠 90살을 훌쩍 넘긴 할머니가 됐다.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는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 조사와 연구를 통해 역사적 진실 규명 작업을 해온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사회학) 연구팀이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생애구술사로 재구성한 기록이다. 우선 두 권이 나온 이 책에는 피해 여성 16명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 전황이나 귀환 상황을 입증하는 공문서와 이미지 자료들을 나란히 실어 증언이 사실임을 뒷받침했다.

2017년 7월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1944년 9월에 중국 윈난성 쑹샨에서 촬영된 ‘위안부’들에 관한 영상을 최초로 발견해 공개했다. 이는 조선인 ‘위안부’가 피사체로 잡힌 최초의 영상이었다. 푸른역사 제공.

<한겨레>는 지난 27일 오후 서울대 인권센터에서 연구팀 지도교수인 정진성 서울대 교수(사회학)와 연구작업을 주도해온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박정애 동국대 연구교수(한국사) 등 3명을 만났다. 오는 8월 정년 퇴임을 앞둔 정 교수는 20년 넘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를 천착해온 개척자다. “연구 초기만 해도 다수의 피해 할머니들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털어놓으면 진실에 가까울 것이란 공감대가 있었어요. 그런데 2010년 즈음부터 일본에서 자꾸 ‘(한국쪽 주장이) 거짓말이다, 역사왜곡이다’ 이렇게 나오니까, 증거 자료들이 절실해졌지요. 전쟁사, 여성사를 연구해온 사회학자들과 근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이 판타스틱한 연구팀을 이뤘죠. (발굴한 미국 자료들은) 정말 모래밭에서 건져올린 겁니다.”

왼쪽은 1944년 9월 연합군이 중국 쑹샨 위안소에서 살아남은 ‘위안부‘들을 찍은 사진. 맨 오른쪽 박영심씨는 만삭의 상태에서 다른 4명의 여성과 함께 탈출했으며 태아는 사산했다. 오른쪽은 1944년 9월 연합군이 중국 쑹샨 위안소에서 살아남은 ‘위안부‘들을 찍은 사진의 뒷면에 쓰인 캡션(사진 설명). 4명의 일본 여성(촬영자는 이들을 일본인으로 생각했다)이 마을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중국 8군에게 붙잡혔다고 쓰여 있다. 사진 푸른역사 제공. (※사진은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연구팀이 2015년 하반기부터 3년 반에 걸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소장된 태평양 전쟁 관련 자료들을 뒤져가며 어렵게 발굴한 문서와 사진·영상 자료들은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의 결정적 증거가 됐다. 이번 사례집에서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문헌 증거이기도 하다. 1991년 고 김학순씨가 국내 최초로 ‘위안부’ 피해를 증언한 이래 지난 26년간 수집된 구술 증언들에 근거 자료를 접목한 첫 사례집으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

기존의 증언집이 피해상황 설명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이 책은 피해 여성들의 어린 시절 생활부터 끌려갈 당시 상황, 악몽이 끝난 뒤에도 연합군의 포로 신분으로 심문 받고 감금된 사정, 멀기만 했던 귀환 여정과 그 뒤 생활까지를 ‘나’라는 1인칭 화자가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중국 각지와 내몽골, 멀리는 버마,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와 중부 태평양 섬까지 끌려갔던 피해 여성의 이동 및 귀환 경로를 지도로 표시했다. 책은 또 피해 여성들을 ‘○○○ 할머니’가 아닌 이름(본인이 원할 경우 가명)으로 표기해, 세월이 흐른 뒤의 특정 시점이 아니라 한 여성(인간)이 겪은 시대상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도록 서술됐다.

1945년 4월 미군이 영문으로 작성한 중국 쿤밍 전쟁포로 보고서에는 다수의 조선인 남성 이름과 함께 박영심이라는 이름도 나온다. 연구팀은 이 이름의 주인공이 앞서 1944년 9월 중국 쑹샨의 일본군이 전멸한 뒤 중국군이 발견한 4명의 조선인 위안부 중 임신해 배가 부른 여성과 동일인임을 밝혀냈다. 방대한 문서 자료와 사진 촬영 정보를 일일이 대조해보는 힘든 작업의 성과였다.

1944년 8월14일, 버마 북부 지역 미치나의 서쪽 비해장에 설치된 임시 수용소에서 미군들이 조선인 ‘위안부’ 20명을 앉혀놓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른쪽은 1944년 8월 버마(미얀마) 북부 미치나에서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인 ‘위안부’ 여성들이 일제에 끌려가 이동한 경로. 푸른역사 제공. (※사진은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나는 1921년 12월15일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태어났다. (…) 집이 가난하여 학교도 가지 못하고 (…) 식모로 일했다. 1938년 3월경 나는 일제의 ‘처녀 공출’에 걸려들었다. 검은 제복에 긴 칼을 찬 일본 순사놈이 나와 친구를 강제로 평양까지 압송했다. (…) 처음 끌려간 곳은 중국 남경(난징), (…) 일본군 병영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안소가 있었다. (…) 20명의 조선인 여성들이 있었으며 (…) 일본군은 하루에 30명 정도 왔다. 저항하면 끌려 나가 매를 맞고 (…) 하루하루가 인간의 생활이 아니었다.” 박영심씨는 해방 뒤 분단된 한반도의 북쪽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2006년 타계했다.

왼쪽은 1946년 1월 미국 해군이 중서 태평양 축 제도(Chuck Islands)의 두블론섬을 일본군에게서 빼앗은 뒤 1월17일에 작성한 민간인 귀환선 호위함 이키노호의 승선자 현황. 368명 중 한국인이 249명으로 가장 많다. 미군 전투일지에 따르면 당시 이 섬에선 모두 1만4298명이 귀환했는데 한국인은 3483명이었다. 오른쪽은 1946년 1월 미국 해군이 중서 태평양 축 제도(Chuck Islands)의 두블론섬을 일본군에게서 빼앗은 뒤 1월17일에 작성한 민간인 귀환선 호위함 이키노호의 승선자 명부 중 조선인 여성 명부. 푸른역사 제공. (※사진은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노수복씨는 “1921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 14살 때 신랑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한센병 환자였다. (…) 혹독한 시집살이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어린 마음에 눈물짓기 수천 번, 1년 만에 보따리를 챙겨 한밤중에 친정으로 왔으나 문 앞에서 쫓겨났다.” 두 번째 남편과 살던 1942년 가을 “우물가 빨래터에서 물을 길으려는데 갑자기 일본군 순사 서너명이 나타나 (…) 날 붙잡아 끌었다. 잡혀가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으나, (…) 40여일 항해 끝에” 싱가포르 위안소로 끌려갔다. “어떤 날은 하루 60여명의 병사들을 맞기도 했는데, 이런 날은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산송장이나 다름 없었다.(…) 1945년 초 전세가 불리해지자 (…) 일본군이 태국의 동굴에서 여자들을 몰살했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사례집에 실린 이들의 사연을 보면 이보다 더한 인간성 말살이 있을까 싶다. 박정애 교수는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과정 자체가 인간이 낼 수 있는 용기의 최대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피해 할머니들의 삶을 당신들의 목소리로 재구성하는 과정이 결국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며 “이번 사례집에 ‘전승자’로서의 의미도 부여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흔히 위안부들은 연합군의 승전과 함께 해방되고 구출됐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았다. 또다시 연합군의 포로가 되고 평군 1년5개월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고국에 돌아온 시점도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초였다. 모두가 귀환한 것도 아니다. 강성현 교수는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군에 조직적으로 끌려갔다가 어느 순간에 버려졌고, 고국에 돌아와서도 사회에서 철저히 버려졌다”며 “이 분들이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계급적 억압, 한일관계에서 비롯한 억압을 개인적으로 뚫고 나와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듣기 시작했을 때, 공감과 시너지가 생기고 할머니들이 당당한 주체로 우리 앞에 서게 됐다”고 말했다.

왼쪽은 1944년 9월15일 미군 사진병이 중국 윈난성 텅충 인근 포대진지로 보이는 곳에서 찍은 사진. 참호로 보이는 구덩이를 메운 여성들의 주검을 중국 군인들이 코를 막은 채 보고 있다. 오른쪽 사진의 뒷면에 “이들 대부분은 텅충에서 살해된 조선인 여성들”이라는 사진 설명이 달려 있다. 푸른역사 제공. (※사진은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박정애 교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중강연을 하면 중·고등학생들한테 ‘쉽게 읽을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며 “이번 사례집 발간을 계기로 시민들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올해 서울시의 지원으로 위안부 문제 전시 콘텐츠를 만들어, 내년 3.1운동 100년을 기념하는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자료집을 펴낸 정진성 서울대 교수(가운데)와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왼쪽), 박정애 동국대 연구교수가 27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 인권센터에서 자료집과 함께 펴낸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란 제목의 ‘위안부’ 피해 여성 구술생애사 사례집을 펼쳐보이며 이야기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내주 자료집 발간…귀중한 사료들 어떻게 찾았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술 사례집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와 별개로,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은 다음달 초에 그동안의 학술적 연구 성과를 <일본군 ‘위안부’ 관계 미국 자료>라는 제목의 학술자료집으로 집대성한 3권 한 세트를 내놓을 예정이다. 이미 인쇄가 끝난 1, 2권은 문서 영인본과 번역, 기록물에 대한 해제를 보탰고, 3권은 문서뿐 아니라 관련 사진과 영상 이미지 자료들을 일일이 대조해 합본했다.

연구팀의 미국 자료 발굴 조사 과정엔 강성현 교수의 역할이 컸다. “2007년부터 거의 매년 미국 메릴랜드주 컬리지파크에 있는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2관을 찾아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 관련 자료들을 조사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쟁 관련 문서들의 발굴과 감식에 대한 노하우들이 생겼죠. 위안부 관련 자료들도 크게 보면 전쟁 및 군대 관련 자료들인데, 여러 군데 흩어져 있는 것들을 조각조각 모았습니다.”

정진성 교수는 “미국으로 2~3주 일정의 자료 발굴을 가기 위해선 6개월 가량의 사전 준비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라서, 미리 소장기관의 자료 목록을 분석해 원하는 자료가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위치를 좁히는 사전 ‘타게팅 작업’이 필수라는 것. 그렇게 목록화해서 현지 조사를 가도 초기엔 허탕이기 일쑤였다고 한다.

자료 발굴 과정은 신체적으로도 위험한 고강도 노동이다. 약 70년 전에 생산된 문서들이다보니 보존약품 처리가 돼 있는데다, 디지털 검색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강성현 교수는 “문서들을 한시간만 만져도 (보존약품 탓에) 손이 붓는다. 또 깨알같은 영문들에서 관련 단어들을 찾다 보면 눈이 따갑고, 무심결에 눈을 비벼 탈이 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미국이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지만 굳이 이 문제에 주목할 이유가 없었고, 한미일 삼각동맹을 의식해 일부러 외면한 점도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최근 연구팀이 발굴한 ‘중국 윈난성 일본군 위안부 학살’ 영상을 최초로 공개한 이후 미국과 일본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미국쪽의 위안부 관련 자료 조사와 열람도 이전보다 어려워졌다고 한다.

정진성 교수는 “연구팀이 어렵게 수집한 자료들과 다른 학술기관 및 시민단체들에 흩어진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아카이빙 작업과 네트워킹, 컨트롤 타워 구실을 할 구심점이 시급하다”며, “이런 일은 민간이 할 수 없으므로 정부가 의지를 갖고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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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 (지은이),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 (기획)푸른역사201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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