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08

“남은 생도 ‘조선인 전범’ 문제 기록하고 기억할 겁니다” : 일본 : 국제 : 뉴스 : 한겨레

“남은 생도 ‘조선인 전범’ 문제 기록하고 기억할 겁니다” : 일본 : 국제 : 뉴스 : 한겨레


“남은 생도 ‘조선인 전범’ 문제 기록하고 기억할 겁니다”

등록 :2022-06-08
김소연 기자 사진
김소연 기자

인터뷰‘후광학술상’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신을 기리는 제15회 ‘후광학술상’ 수상자로 결정된 우쓰미 아이코(81)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도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저는 스스로 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런 상을 받게 되니, 기쁘기도 하면서 당황스럽습니다. 일본의 전후 보상운동에 나선 많은 일본 시민들을 위한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신을 기리는 제15회 ‘후광학술상’ 수상자로 결정된 우쓰미 아이코(81)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는 5일 도쿄에서 <한겨레>와 만나 활짝 웃으며 수상 소감을 밝혔다. 후광학술상 선정위는 8일 “우쓰미 선생이 지금까지 30여권의 저서를 집필하며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침략적 성격을 규명하고, 전후 처리의 이중성을 폭로하는데 기여했으며, 일본 정부의 사죄·보상과 평화운동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고 시상 이유를 밝혔다.

우쓰미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인 비시(BC)급 전범 문제의 권위자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1945년 8월 이후 ‘전쟁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한일 앙쪽 모두에서 외면 받아온 이들의 삶을 집요하게 추적해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동남아시아 연구자인 남편 무라이 요시노리(1943~2013)와 함께 방문한 인도네시아에서 1975년 조선인 야나가와 시치세이(양칠성)를 처음 발굴하면서 우쓰미 교수와 비시급 전범 문제의 인연이 시작됐다. 우쓰미 교수는 이후 양칠성의 사연을 처음 소개한 <적도하 조선인 반란>(1980)에 이어, <조선인 BC급 전범의 기록>(1982), <김은 왜 재판을 받았는가>(2008) 등 다수의 저작을 집필했다.

우쓰미 교수의 활동이 한-일 두 나라 시민사회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비시급 전범에 대한 학술 연구에 그치지 않고 이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해 오랫동안 투쟁해 왔기 때문이다. 우쓰미 교수는 “연구와 운동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며 “나는 방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싸우려면 자료를 읽어 근거를 찾아야 했고, 그렇게 역사의 진실에 다가서다 보면 더 열심히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 보여준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우쓰미 교수는 양칠성과의 첫 만남을 운명이라 표현했다. “어찌 보면 운명일 수 있겠네요. 자이니치(재일동포) 문제에 관심이 많아 한국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여러 사정상 포기했어요. 장학금을 받은 남편과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유학을 하게 됐죠.” 그 와중에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영웅 중 조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북 완주군 삼례 출신인 양칠성이 왜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싸우다 네덜란드군에 잡혀 총살(1948년 8월) 당해야 했을까?

그의 인생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것은 조선인 비시급 전범들의 슬픈 사연이었다. 일본은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동남아에 침공했다. 그 과정에서 무려 30만명에 이르는 연합군 포로를 떠안게 된다.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조선에서 3000여명의 포로 감시원을 모집했다. 타이·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에 배치된 포로 감시원들은 열악한 시설에 수용된 연합군 포로들과 크고 작은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포로 학대 혐의 등으로 사형 당한 이 14명을 포함해 12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렇게 통상의 전쟁범죄(B급 전범)와 인도에 반한 죄(C급 전범) 저지른 이들을 전쟁을 일으킨 평화에 반한 범죄(A급 전범)를 저지른 이들과 구별하기 위해 비시급 전범이라 부른다.



왼쪽은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이 된 조선인 군무원 양칠성씨. 1949년 8월10일 네덜란드군 손에 총살당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가운데는 1975년 11월17일 서부 자바의 가룻 독립영웅묘지에 이장되고 있는 양칠성씨와 일본인 2명의 유골함. 오른쪽은 히라하라 모리쓰네라는 일본명을 지닌 조선인 전범 사형수. 어깨 쪽에 ‘조문상’이라는 본명이 영문으로 표기돼 있다. 역사비평사 제공조선인 비시급 전범 문제를 다루면서 우쓰미 교수는 이들이 어쨌든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라는 쉽지 않은 문제와 직면해야 했다. “저는 이들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핵심은 왜 전쟁 책임을 그들이 떠맡게 됐는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쓰미 교수는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복잡한 문제의 책임을 조선인들에게 전가했다고 본다. 나아가 일본은 1952년 4월 이들의 일본 국적을 최종적으로 박탈해 옛 일본군과 군무원에게 지급된 연금인 ‘은급’ 등의 지급 대상에서 제외했다. 일본의 명령에 따라 전쟁의 일선에서 갖은 고생을 한 뒤 전범으로 낙인 찍힌 이들을 내팽개친 것이다. 우쓰미 교수는 “일본이 자신들을 대신해 조선인들을 전범자로 만들어 놓고, 전쟁이 끝난 뒤엔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버렸다”고 강조했다.

우쓰미 교수는 일본 시민단체인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에서도 활동하며 한국의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로 확정된 배상금의 ‘현금화’ 문제는 현재 한·일 관계의 핵심 현안으로 떠올라 있다. 우쓰미 교수는 한국 피해자들과 일본 기업 간의 화해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전범기업인 니시마쓰 건설의 화해(2009년 10월) 사례 등이 있잖아요. 중국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보상을 하고 후세 교육을 위해 위령비도 세웠죠. 선례가 있는 만큼, 한·일 사이에도 이런 방식이 필요하다고 봐요.” 우쓰미 교수는 “전후 보상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는 것은 한국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차원에서 “지금 논의되는 ‘대위변제’(한국 정부가 피해자에게 대신 배상을 해 주고 구상권을 가지는 것)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우쓰미 교수는 앞으로 “조선인 전범들의 증언·경력·재판기록을 한명씩 정리”할 계획이다. 도쿄 ‘스가모 감옥’에 구금돼 있던 조선인 비시급 전범들이 ‘동진회’를 만들고, 이후 일본 정부를 상대를 싸우는 과정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도 목표다. 결국 그가 강조한 것은 ‘기억과 기록’이었다. “조선인 비시급 전범 등 일본 근현대사엔 복잡한 문제가 많아요.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기 위해선 기억을 기록으로 검증하고, 기록을 기억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해요.” 80대 원로 연구자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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