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08

알라딘: [전자책] 그늘에 대하여

알라딘: [전자책] 그늘에 대하여
[eBook] 그늘에 대하여 - 다니자키 준이치로 산문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은이),고운기 (옮긴이)눌와2019-05-30 

종이책 페이지수 : 215쪽

책소개

일본의 대문호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대표 산문을 선별해 엮은 책이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는 '그늘에 대하여'를 비롯하여, 일본 전통문화와 근대문학에 대한 성찰과 남녀관계에 대한 철학을 담은 '연애와 색정', 화장실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문학작품의 효시격인 '뒷간', 이 밖에 '게으름은 말한다', '손님을 싫어함', '여행' 등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화들을 예리한 관찰력으로 묘사한 6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수록된 산문들이 씌어진 시기는 주로 1930년대. 일본에 서구의 문물을 도입되면서 근대의 변화가 이루어지던 때로, 한지를 바른 장지문에 유리창이 끼워지고 전통 의상에서 양복으로 갈아입었으며, 서양식 건물이 속속 들어서던 시대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글 전반에 걸쳐, 당시 일본의 풍토와 문화를 외면한 채물밀 듯이 들어오는 서구의 외래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결과를 이중생활이라 칭하며 신랄하게 꾸짖는다.

공사할 때의 발생하는 문제들, 교토나 나라의 사원들의 변화, 전등이 가져다주는 득과 실, 종이의 효용성, 일본의 건축과 다다미방, 어둠 속에 있는 황금박과 금빛이 발하는 아름다움, 노 무대의 어두움과 옛 여인의 생활상 그리고 그늘(음예)의 세계 등 일본을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알기 쉽게 서술하는 동시에, 변화의 과정에서 전통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표제작 '그늘에 대하여'는 1996년 <음예공간 예찬>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작품집에 실려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다. 사물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견해 속에 작가 자신의 미학을 감성과 이론과 행동으로 관철시킨 작품으로 미국과 영국, 일본의 대학에서 건축과 관련한 텍스트로 즐겨 읽힌다.
목차
그늘에 대하여
게으름을 말한다
연애와 색정
손님을 싫어함
여행
뒷간

옮긴이의 글

책속에서
유리를 제조하는 기술은 일찍부터 동양에 알려져 있으면서도, 그것이 서양처럼 발달하지 못한 채, 끝내 도자기 쪽이 진보한 것은 우리의 국민성과 상당히 관계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들이 한결같이 빛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옅게 선명한 것보다도, 가라앉아 그늘진 것을 더 좋아한다. 그것은 천연의 돌이든 인공의 도구이든, 반드시 세월의 손때를 연상시키는 듯한 흐릿함을 띤 빛인 것이다.

중국에 '쇼우쪄'라는 말이 있고, 일본에 '나레'라는 말이 있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에 사람이 손을 대어서, 한군데를 반들반들하게 만지는 사이에, 자연적으로 기름이 스며들게 되는 광택을 이르는 것으로, 바꿔 말하면 손때임에 틀림없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풍류는 추운 것'인 동시에 '때 묻은 것'이라는 경구도 성립한다.

어쨌든 우리들이 좋아하는 '아치(雅致)'라는 것 속에는 어느 정도 불결한 동시에 비위생적인 분자가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서양인은 때를 송두리째 벗겨내 없애려고 하는 데 반해, 동양인은 그것을 소중히 보존하여 그대로 미화한다고, 억지스러운 말이 되겠지만, 숙명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때나 그을음이나 비바람의 더러움이 붙어 있는 것, 내지는 그것을 생각나게 하는 색조나 광택을 사랑하고, 그런 건물이나 가구 가운데 살자면 기묘하게 마음이 풀리고 신경이 편안해진다.

-- 본문 22~23쪽, '그늘에 관하여' 중에서  접기
종이라는 물건은 중국인이 발명했다고 들었는데, 서양 종이를 대하면 단순한 실용품이라는 것 이외에 아무런 느낌도 일어나지 않지만, 당지나 일본지의 결을 보면 거기서 일종의 따스함을 느끼고 마음이 안정된다. 같은 흰 종이라도 서양 종이의 흰색과 봉서지나 백당지의 흰색은 다르다.
서양 종이의 겉은 광선을 되튕기는 듯한 맛이 나는데, 봉서지나 당지의 겉은 포근한 첫눈의 표면처럼, 몽실몽실하게 광선을 안으로 빨아들인다. 그리고 손에 와 닿는 감촉이 보들보들하고 접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뭇잎을 만지고 있는 것과 같이 차분하고 촉촉하다. -20쪽  접기 - panda78
중국인은 또한 옥이라는 돌을 사랑하는데, 저 묘하게 살짝 흐린 느낌이 드는, 몇 백 년의 오래된 공기가 하나로 뭉친 듯한, 속까지 거슴츠레하게 둔탁한 빛을 머금은 돌의 딱딱함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우리 동양인만이 아닐까. 루비나 에메랄드와 같은 색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금강석과 같은 광채가 있는 것도 아닌 저런 돌의 어디에 애착을 보이는 것인지, 우리들도 잘 알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그 흐린 표면을 보면 중국의 돌다운 느낌이 들고, 오랜 과거를 가진 중국 문명의 앙금이 저 두툼한 어떤 흐릿함 속에 퇴적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중국인이 저러한 색채나 물질을 선호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고 하는 것만은 끄덕여진다.

수정 같은 것도, 요즈음은 칠레에서 많이 수입되는데, 우리의 수정과 견주면, 칠레산은 너무 깨끗하고 지나치게 투명하다. 옛날부터 있는 고슈수정은, 투명하면서도 전체가 희미하게 흐릿하여서 좀더 무게가 나가는 느낌이 들고, 풀 들인 수정이라고 하여, 속에 불투명한 고형물이 한데 섞인 것을 오히려 우리는 좋아하는 것이다. 유리조차도 중국인의 손으로 만든 건륭유리라는 것은 유리라기보다는 옥이나 마노에 가깝지 않았을까. 유리를 제조하는 기술은 일찍부터 동양에 알려져 있었으면서도, 그것이 서양처럼 발달하지 못한 채, 끝내 도자기 쪽이 진보한 것은 우리의 국민성과 상당히 관계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들이 한결같이 빛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옅게 선명한 것보다도, 가라앉아 그늘진 것을 더 좋아한다. 그것은 천연의 돌이든 인공의 도구이든, 반드시 세월의 손때를 연상시키는 듯한 흐릿함을 띤 빛인 것이다. -21 - 22쪽  접기 - panda78
화려한 마키에 따위를 그려 넣고 번쩍번쩍 빛나는 왁스를 바른 작은 상자나 책상이나 선반을 보면, 너무 현란하여 차분하지 않고 속악하게조차 생각되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 그런 도구들을 둘러싼 공백을 새까만 어둠으로 빈틈없이 칠하고, 태양이나 전등의 광선 대신에 등불 하나나 촛불로 밝게 해 주면, 문득 그 현란하던 것이 바닥 깊숙이 가라앉아, 차분하게 무게 나가는 물건이 될 것이다.
옛날의 공예가가 그릇에 칠을 바르고, 마키에를 그릴 때는, 반드시 그런 어두운 방을 염두에 두고, 빛이 적은 속에서의 효과를 겨냥했음에 틀림없고, 금색을 호화롭게 사용한 것도, 그것이 어둠에 떠오르는 상태나, 등불을 반사하는 정도를 고려한 것이라 여겨진다. 결국 금 마키에는 밝은 곳에서 한번에 퍼뜩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곳에서 여러 부분이 그때그때 조금씩 드러내는 것을 보도록 만들어진 것이어서, 호화 현란한 모양의 대부분을 어둠에 숨겨 버리는 것이, 말로 할 수 없는 여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저 반짝반짝 빛나는 표면의 광채도, 어두운 곳에 놓고 보면 그것이 등불 끝의 어른거림을 비추고, 조용한 방에도 때때로 바람이 찾아온다고 알려 주어, 어느덧 사람을 명상에 빠지게 한다.
만약 저 음울한 방 안에 칠기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촛불이나 등불이 자아내는 괴이한 빛의 꿈의 세계가, 그 등불의 펄럭임이 때리고 있는 밤의 맥박이 얼마나 매력을 감쇄당할 것인가. 정말 그것은 다다미 위로 몇 줄기의 작은 시내가 흐르고, 연못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하나의 등불 그림자를 여기저기에 비춰서, 가늘게 희미하게 가물가물 전하면서, 밤 그 자체에 마키에를 한 듯한 비단을 짜낸다. -26 - 27쪽  접기 - panda78
일본 요리는 먹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경우, 보는 것 이상으로 명상하는 것이라 말하련다. 그리고 그것은 어둠에 깜박이는 촛불과 칠기가 합주하는 무언의 음악인 것이다. 일찍이 소세키 선생은 [풀베개]에서 양갱의 빛을 찬미한 적이 있는데, 말하자면 양갱의 빛깔 역시 명상적이 아닐까. 옥처럼 반투명의 흐린 표면이 속까지 햇빛을 빨아들여서 꿈꾸듯 발그스레함을 머금고 있는 느낌, 그 색조의 깊음, 복잡함은 서양의 과자에서 절대로 볼 수 없다. 크림 따위는 그것에 비하면 천박하고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양갱의 색조도 그것을 칠기 과자그릇에 담아서, 표면의 색을 겨우 알아볼 어둠에 잠기게 하면 한층 더 명상적이 된다. 사람은 그 차갑고 미끄러운 것을 입속에 머금을 때, 마치 방 안의 암흑이 하나의 달콤한 덩어리가 되어 혀끝에서 녹는 것을 느끼고, 사실은 그다지 맛있지 않은 양갱이라도, 맛에 색다른 깊이가 덧보태어지는 듯이 생각한다. -28 쪽  접기 - panda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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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다니자키 준이치로 (谷崎潤一郞)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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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도쿄 니혼바시에서 태어났다. 제일 고등학교를 거쳐 도쿄 제국 대학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퇴학당했다. 1910년 『신사조(新思潮)』를 재창간하여 「문신」, 「기린」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고, 소설가 나가이 가후로부터 격찬을 받으며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1915년 열 살 어린 이시카와 치요코와 결혼했는데, 시인인 친구 사토 하루오가 그의 부인과 사랑에 빠지자 아내를 양도하겠다는 합의문을 써 『아사히신문』에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문화 예술 운동에도 관심을 가진 그는 시나리오를 써 영화화하고 희곡 『오쿠니와 고헤이』를 발표한 뒤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924년 『치인의 사랑』을 신문에 연재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검열로 중단되었다.
1942년 그는 세 번째 부인이자 그가 희구하던 여성인 마쓰코와 그 자매들을 모델로 『세설』을 쓰기 시작했다. 간사이 문화에 대한 애정이 짙게 배어 있는 『세설』은 몰락한 오사카 상류 계츨의 네 자매 이야기, 특히 셋째인 유키코의 혼담을 중심으로 당시의 풍속을 잔잔하게 전하는 풍속 소설이다. 1943년 『중앙공론』 신년호와 4월호에 게재되었고 7월호에도 실릴 예정이었으나 <시국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표가 금지되어 전후에야 비로소 작품 전체가 발표되었다. 훗날 마이니치 출판문화상과 아사히 문화상을 받았다. 1948년에는 제8회 문화 훈장을 받았고 1941년 일본 예술원 회원, 1964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문학예술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에 뽑혔다. 1958년 펄 벅에 의해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된 이래 매년 후보에 올랐으며 1965년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 밖의 대표작으로는 『치인의 사랑』, 『만』, 『킨쇼』, 『열쇠』, 『장님 이야기』, 『미친 노인의 일기』 등이 있고,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를 현대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접기
최근작 : <치인의 사랑>,<간단한 죽음>,<[큰글씨책] 일본 명단편선 8> … 총 204종 (모두보기)
고운기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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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 흔히 “주먹 자랑하지 마라”고 하는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주먹과는 거리가 멉니다. 한양대학교 국문학과와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한국 고전 문학을 공부했고, 일본 게이오대학교 방문 연구원과 메이지대학교 객원 교수로 있으면서 한일 고대 문학을 비교, 연구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스토리텔링 삼국유사(1~5권)》 들을 냈습니다.
1983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그 뒤로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나는 이 거... 더보기
최근작 :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삼국유사의 재구성>,<일연과 13세기, 나는 이렇게 본다> … 총 8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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즁이치로를 더 알고 싶어서 일게 된 책입니다. 만족스럽습니다.  구매
윤재홍 2014-04-1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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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기를 권함.  구매
moon 2012-03-07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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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람들에게는 고전문학인지라 일본작가들은 여기저기서 이책을 인용을 많이한다. 그러나 고전에 대한 그리움과 그들만의 존경심 외에는 그닥 볼만한 것과 배울만한 것은 없다. 오히려 볼것없고 배울만한 것이 없음에도 그들만의 존경심으로 높이 띄워올린 작품에 대한 한 사례라고 할수 있겠다.  구매
홈런왕 2017-07-02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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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한 고전.  구매
봄고양이 2014-04-1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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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예를 인지하고 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늘에 빠져 계속 되뇌이고 있다.  구매
jay 2017-11-20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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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Praise of Shadows 새창으로 보기
영어번역본을 읽었는데 현대화되며 사라져 가는 일본의 옛 정취를 작가가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내용의 책.읽어 볼 만 함. 소설만큼 재밌진 않아도 20세기 초 일본 분위기를 짐작해 볼 순 있음.
심술 2006-02-26 공감(8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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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꼬리를 흔드는 법 새창으로 보기
만일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1968년까지 살아 있었다면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제치고  노벨상을 받았을 거라는데, 그 정도의 작가였단 말인가?




원제는 ‘음예예찬’인데 옮긴이는 한국인들의 무지를 걱정하셔 ‘그늘에 대하여’로 옮기셨다. ‘교토 문학’이라 불리는 장르가 있을까마는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다분히 ‘교토적’이다. 고풍스럽고도 고즈넉한 풍미를 띤다고 해야 할까. 번역 역시 그런 맛을 잘 살린 듯싶다. 그것이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어둠을 다루는 일본 소설가들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예찬>을 가이드로 삼는 걸까. 최근에 읽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형태뿐인 사랑>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이 작품을 언급했다.

 

‘음예’란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현(玄)’, 한글로는 ‘가물거리는 것’에 가까운 것일까.

 

준이치로가 보기에 어둠은 무서운 정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반면 온화함을 느끼게도 해준다. ‘반짝반짝 광택이 나는 것’이 서양의 미라면 반면 동양의 미는 ‘그을음이나 비바람의 더러움이 붙어 있는 것’을 중시한다.

 

영화판에서 번쩍번쩍 하는 미술을 하기는 쉽다. 그냥 돈 주고 사서 갖다 놓기만 하면 된다. 반면 사물에 세월을 담으려면 많은 시간과 아티스트의 내공이 쌓여야만 가능하다. 서양에서도 어둠을 온화함과 연결시키기도 할까? 한마디로 ‘간지’는 그저 돈 주고 살 수 없다. 카라바조 회화속의 어둠에도 여러 어둠이 있다고는 하지만 온화함의 정서가 느껴지지는 않는 듯싶다. 음예란 일종의 ‘양갱의 빛깔 같은 것’?

 

“소세키 선생은 <풀베개>에서 양갱의 빛을 찬미한 적이 있는데, 말하자면 양갱의 빛깔 역시 명상적이 아닐까. 옥처럼 반투명의 흐린 표면이 속까지 햇빛을 빨아들여서 꿈꾸듯 발그스레함을 머금고 있는 느낌, 그 색조의 깊음, 복잡함은 서양의 과자에서 절대로 볼 수 없다. 크림 따위는 그것에 비하면 천박하고 단순한 것이다. p29”

 

(피츠제럴드 흉내를 내기위해 크림색을 남발하는 하루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읽다니!

여기서 퀴즈. 그렇다면 하루키는 어두운 색은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

 

정답 : 초콜릿 무스.

 

아, 오글거려. 잠시 자판에서 두 손 띄고 있었다는)

 

후대의 일본 작가들이 <음예예찬>에서 배우고자 한 어둠은 아마도 ‘눈에 보이는 어둠’이 아니었을까

 

“그런 어둠 가운데 특히 실내의 ‘눈에 보이는 어둠’은, 무엇인가 아물아물 아지랑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환상을 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집 밖의 어둠보다 더한 맛이 있다. 도깨비나 요괴가 날뛰는 것은 아마도 이런 어둠이겠지만, 그 안에 깊을 장막을 드리우고, 병풍이나 맹장지를 몇 겹이나 에워싸고 살고 있는 여자라는 것도 역시 그 도깨비의 무리가 아니었을까. 어둠은 그 여자들을 열 겹 열두 겹으로 둘러싸고, 옷깃이나 소맷부리나 옷단의 맞춤선이 다다르는 곳의 빈틈을 메우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거꾸로 그녀들의 몸에서, 그 이를 색칠한 입속이나 검은 머리끝에서, 땅거미가 뱉는 거미줄처럼 어둠이 내뱉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p57

 

이 책에는 ‘음예예찬’외에도 다섯 편의 준이치로의 산문이 실려 있는데, <손님을 싫어함>이란 글에서 예상외로 포복절도하고 말았다. 과학자 데라다 도라히코는 고양이에게 꼬리가 왜 있는지 모르겠고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어서 인간에게 꼬리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반면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자신에게도 고양이 꼬리같은 ‘편리한 물건’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꼬리가 편리하다고?? 주인이 부르면 잠든 것처럼 보이는 고양이는 꼬리 끝만 살랑 흔든다. 한 번 더 부르면 또 살랑 흔든다. 그러나, 집요하게 계속 부르면 더 이상 흔들지 않는다.

 

“.....꼬리를 가지고 하는 대답의 방법으로는 일종의 미묘한 표현이 깃들어 있어서, 소리를 내는 것은 귀찮지만 묵묵히 있는 것도 너무 무정하므로, 슬쩍 이런 방법으로 인사해 두자는 듯한, 그리고 또 불러주는 것은 고맙지만 실은 자기는 자고 있으므로 참아 주지 않으시려오, 하는 듯한, 뺀들거리는 듯하나 붙임성 있는 복잡한 기분을 그 간단한 동작으로 매우 교묘하게 나타내는 것인데....”

 

그렇다면 준이치로는 언제 꼬리를 흔들고 싶은 것일까. 예를 들어 펜을 쥐고 창작이나 사색을 하려하는데 돌연 와이프가 들어와 자질구레한 하소연을 할 때. 이럴 때 꼬리 두 세 번 흔들어 주고 계속 글을 쓰고 싶다고.  



공감 백만배. 울 와이프가 "책 좀 그만 읽고 좀 자라 자.  "

이럴 때 꼬리한 번 살랑 흔들어주고 계속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혹은 이런 경우. 그런 사람들 꼭 있다. 분명 얘기 한 말 인데 또 다시 반복하는 사람. 그럴 때마다 참 난감하다.

 

“저기 지난번에 한 말인데, 그만 하면 안 될까? 재미도 없고 지루하거든”

 

이럴 순 없지 않은가. 아, 이럴 때 꼬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꼬리 끝만 두세 번 살랑살랑 흔들어주고 싶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원치 않은 손님을 상대해야 할 경우에 ‘상상의 꼬리’를 흔들기도 한단다.

 

“그래서 ”예“라거나 ”음“이라거나 말하는 대신에, 상상의 꼬리를 흔들어 그것만으로 넘어가 버리는 적도 있다. 고양이 꼬리와 달리 상상의 꼬리는 상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유감이지만, 그래도 내 마음에서는 그것을 흔드는 것이 흔들지 않는 것과 얼마만큼 다르다. 상대방으로서는 알지 못해도, 나로서는 이것을 흔듦으로써 응답만은 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p147

 

아, 상대방이 알지도 못하는데 상상의 꼬리를 천만번 흔들면 뭐할 것인가?

나는 그저 호감 가는 이성을 만났을 때 상상의 꼬리를 천만번 흔들어줘야지.

(그 사람은 모르겠지만, 혹은 알아도 안 되지만) 상상의 꼬리를 흔드는 것과 흔들지 않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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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7-12-03 공감(35)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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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그늘 새창으로 보기 구매
 애인과 사귀기 전, 80일간 교토에 머물 때에 이 도시는 “그늘이 빛나고 빛은 그늘질 때가 많아요.”라고 전한 적이 있다. 그때는 아직 이 책을 읽기 전이었지만, 내용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던 까닭에 나름대로 의식하며 건넨 말이었고, 애인은 그 맥락을 잘 알고 있었다. 교토는 그늘이 그저 가라앉게 버려두지 않고, 빛이 아무렇게나 흩어지도록 들이붓지도 않아서 구석구석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도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꾸며야 사람과 거리가 지루하지 않을지 항상 깊이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오래되었다고 무작정 받들지 않고, 새로 나왔다고 그저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향토요리를 둘러보면, 현대에는 도시인보다 시골 사람의 미각이 훨씬 더 확실하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화려함이 있다. 그래서 노인들 중에는 점차 도시를 단념하고 시골로 은둔하는 사람이 있는데, 시골 거리도 은방울꽃 모양의 장식용 가로등 따위가 설치되어 해마다 교토처럼 되기 때문에,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늘에 대하여)-p.65

 

 그러다 보니 때로는 모두가 교토를 부족하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늘이니 마냥 어두워야 하고, 빛이라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무슨 큰 깨달음인양 가르치려 드는 사람은 의외로 많으니까. 심지어는 이 책의 저자인 저 다니자키 준이치로조차도 좋았던 과거에서 멀어지는 옛 수도를 사뭇 호들갑스레 걱정할 정도다. 물론 그가 「그늘에 대하여」를 쓴 1933년이라면 거리에 은방울꽃 모양의 가로등만 놓여도 밤의 어둠이 송두리째 사라진 듯 불안했겠지만, 역시 경박한 불평이라는 생각이 더 크다. 이미 40대 후반이었던 그는 캄캄한 어둠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허무는 조금의 빛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나는 우리가 이미 잃어 가고 있는 그늘의 세계를 오로지 문학의 영역에서라도 되불러 보고 싶다. 문학이라는 전당의 처마를 깊게 하고, 그 벽을 어둡게 하고, 지나치게 밝아 보이는 것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쓸데없는 실내장식을 떼 내고 싶다. 어느 집이나 모두 그런 것이 아닌, 집 한 채 정도만이라도 그런 집이 있었으면 좋을 것이다. 자, 어떤 상태가 되는지, 시험 삼아 전등을 꺼 보는 것이다.

_1933. 12 (그늘에 대하여)-p.67

 

 그는 이 글의 끝에서 자신은 그저 “문학의 영역에서라도” 인공적인(그리고 서구적인) 빛이 침입할 수 없는 세계를 다시 이루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범위를 좁히더라도 왜 굳이 문학만이 사회와 동떨어져서 음예(陰翳)가 아닌 암흑(暗黑)을 추구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집집마다 놓인 전등, 골목마다 선 가로등이 밤을 낮으로 바꾸지 못했다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데, 세계의 변화를 찬찬히 숙고하기보다 부르르 반발부터 한 탓에 마치 어둠이 아닌 그늘이 없어질 것처럼 역정을 낸 셈이다.



한 가지 일이 만 가지 일이다. (게으름을 말한다)-p.87

 

 게다가 사회의 전등과 격리된 문학이라고 해 보아야, 기껏 한다는 소리는 “방종하여 노골적인 것보다도, 내부로 억제된 애정을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아서, 때로 무의식적으로 말씨나 몸짓 끝에 드러나는 것이 한층 남자의 마음을 이끈다. 색기라는 것은 대개 그런 애정의 뉘앙스이다.”(「연애와 색정」, p.137)라는 수준의 구차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백번 양보해서 남성이 이런 색기에 끌릴는지는 몰라도, 어째서 여성이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듯 숨기지 못하며 표현해야‘만’ 하는 것일까. 다니자키는 물론 여기에 대해서 어떤 숙고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때 지난 망상을 언제까지고 중얼대기 위해서 어떤 빛도 들지 않는 골방, 혹은 문학이 필요하다고 자인한 셈인데, 이렇게 소수의, 고립된, 신념만 강한 문학이 얼마나 해로운지 충분히 확인한 현재로서는 역시 어둠에 빛을 들이대서 새로운 그늘을 만들어야 한다고 되새길 뿐이다.

 

나는 꽃구경을 좋아해서, 봄에는 뭐니 해도 화려하게 꽃이 한창인 경치를 보지 않으면 봄의 기분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는데, 이때도 역시 지금의 요령으로 간다. 빈틈없는 철도성에서는 매년 산들의 눈이 녹아서 스키를 탈 수 없게 된 때부터 서서히 꽃 선전을 시작해, 4월 중은 꽃구경 열차를 내보내는 것은 물론, 다음 일요일에는 어디가 볼 만한 곳인지, 어디가 곧 만개할 정도로 피었는지 일일이 게시를 해 주고 있으므로 조용한 꽃구경을 하고 싶은 사람은 그런 장소를 피해서 돌아가면 괜찮다. 어쨌든 꽃을 보는 사람으로서는 명소의 꽃에 한정하는 것은 아니어서, 보기 좋게 핀 오직 한 그루의 벚꽃이 있으면, 그 나무 그늘에 휘장을 펴고 찬합 도시락을 열면, 마음 어딘가가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p.170

 

 물론 이 책 속의 글에서 그가 무턱대고 암흑과 음예를 혼동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경험했던 그늘의 미묘함에 집착한 나머지, 더 이상의 빛을 완고하게 거부했을 뿐이다.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늘을 말할 때의 섬세하고 경묘한 표현은 그 그늘 혹은 문화의 미래를 염려할 때의 편협하며 장황한 훈계와 뗄 수 없는 관계처럼 보인다. 8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다니자키의 역할은 음예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뿐이었음이 꽤나 분명하지만 일본에 오래도록 드리웠던 전통의 그늘이 마치 사라질 듯 끊임없이 급변한 당시의 시점에서는 이 둘이 뗄 수 없는 인과로 오해되었을 법도 하다. 다니자키 같은 사람 덕에 여태껏 교토의 그늘이 옛 모습을 좀 더 지켜 냈다고 역성은 들 수도 있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들만 굳이 골라서 아쉬워하는 사람에게는 별반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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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18-10-10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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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새창으로 보기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 3학년 때였나? 전공 외 교양 수업으로 ‘일본근대문학’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그 수업 시간에 처음 그를 알게 되었다. 이 수업 시간에는 일본 문학사에서 아무래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들의 단편을 읽어보고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읽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은 ‘후미코의 발(富美子の足)’이었다. 그때 정말 이 단편을 읽고 나서의 충격이란!

제목을 보니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가? 어쩐지 여성의 발에 집착하는 중년 ‘오덕후’의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가? 만약 그런 상상을 했다면 제대로 집었다. 이 단편은 어린 첩의 발에  집착하는 노인의 이야기인데 여자의 몸에 대한 묘사하며 일종의 성도착이라고 할 수 있는 발 페티시즘에 걸린 노인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그려진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우스꽝스럽기도.

그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읽고 논하면서 나왔던 이야기들이란 ‘탐미주의’ ‘유미주의’ ‘악마주의’ 이런 단어들이었고,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실제로 ‘후미코의 발’ 외에 이런 성향의 작품들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일본에서는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지만 그보다 먼저 노벨문학상 후보에 심심찮게 오르락내리락했던 이가 바로 다니자키 준이치로다.

‘후미코의 발’에서 느낀 변태 이미지가 컸던지 그 뒤 오래도록 그의 작품은 선뜻 다시 읽어보게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날엔가 그의 작품을 읽기 시작해서는 나도 모르게 새 책이 번역되어 나오기를 바라고 있더라. 아무튼 이 책 <그늘에 대하여>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산문집이다. 예전에 <음예공간예찬>이라는 제목으로 한 번 출판되었던 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그늘’이라고 번역한 ‘음예’란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으로 우리말로는 선뜻 풀이하기 쉽지 않은 듯하다.

‘그늘에 대하여’는 일본의 다다미 방이나 건축문화에 스며 있는 보일 듯 말 듯한 ‘그늘’ ‘그림자’ 이미지에 대한 예찬인데 딱히 ‘건축문화’하나로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 일본의 전통 연극, 교토나 나라의 사원들의 변화, 전등이 가져다주는 득과 실, 서양 종이와 동양 종이의 효용성 등 서구 문물과 대비되는 동양(일본)의 정서적인 ‘그늘’에 대한 찬미, 일본의 전통에 대한 찬미로 볼 수 있다.

‘그늘에 대하여’가 첫 장을 이루고 있으나 이 책에는 ‘게으름을 말한다’ ‘연애와 색정’ ‘손님을 싫어함’ ‘여행’ ‘뒷간’과 같은 수필이 담겨 있다. 가장 먼저 읽었던 것은 아무래도 ‘연애와 색정’- 이 수필을 읽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대한 변태 이미지가 더 굳어지는 것은 아닐까 심히 염려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생각보다는 싱거웠다. ‘색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부분이 있는데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대놓고 드러내기 보다는 감출수록 색기가 드러난다는 그런 주장이랄까.

‘손님을 싫어함’이라는 수필에서는 자기에게도 고양이 꼬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한다.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대화를 하는 중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 이야기를 듣다가 자기만의 생각으로 곧잘 빠졌다. 때문에 제 때 대꾸하지 못해 손님에게 불성실하게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고는 한다. 해서 자기에게 고양이처럼 꼬리가 있다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서 ‘내가 너 이야기를 듣고는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피식 웃음이 났다(나도 고양이 꼬리 좀 주슈~). 남들이 다 가는 명소와는 정반대의 여행지로 떠나고 그렇게 해서 발견한 자기만 아는 최고의 여행지를 수필에서조차 끝내 밝히지 않는 괴팍함을 드러내는 ‘여행’이라는 수필도 꽤 공감이 갔다.

다만 불편한 것은 아무래도 여성이나 여체에 대한 묘사 등이 권위주의적인 남자의 시선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어 씁쓸하기도 하고, ‘하이고~ 웃기고 있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서양에 비해 동양(즉 일본)의 우월함을 계속 강조하는 태도도 껄끄럽다. 같은 동양을 이야기할 때도 중국 등 다른 나라에 대한 비하는 물론 일본의 상대적 우월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 ‘어쭈, 자화자찬은 참…’하며 혀를 차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별것 아닌 소재 속에서 뛰어난 묘사와 관찰을 통해 그토록 세심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작가만의 꼴통 기질이랄까 괴팍함을 발견하는 부분도 꽤 재미있었다.



문득 ‘후미코의 발’도 읽고 싶어져서, 생각난 김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후미코의 발'을 다시 읽었다. '후미코의 발'은 고려원에서 나왔던 <일본대표단편선> 제1권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 돌아보니 이 일본대표단편선 시리즈에는 꽤 괜찮은 단편이 많이 실려있어서 뒤늦게 1권 외에 더 사두려고 찾아보니 아쉽게도 절판되었더라.


아무튼, '후미코의 발'은 예전에는 충격적(?)이었는데, 어제는 좀 많이 웃겼다. 키득키득. 특히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는 미친 듯이 웃었다.

발뒤꿈치의 곡선을 살며시, 그러나 머리 속이 타버릴 정도로 뚫어지게 탐닉했습니다. 밑에 어떤 뼈가 있으며, 거기에 어떤 식으로 살이 감싸고 있기에 저리도 부드럽고 원만하며 윤기 도는 뒤꿈치가 되었을까요? 후미코는 태어나서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이 뒤꿈치로 다다미와 이불 외에 그 어떤 딱딱한 것도 밟아 본 적이 없었겠지요? 저는 한 남자로 태어나 살기보다는, 이렇듯 아름다운 뒤꿈치가 되어 후미코의 발 뒤에 붙을 수 있다면 그쪽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미코의 발뒤꿈치에 밟히는 다다미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의 생명과 후미코의 발뒤꿈치 중 이 세상에서 어느쪽이 더 존귀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일언지하에 후자 쪽이 존귀하다고 대답할 겁니다. 후미코의 뒤꿈치를 위해서라면 저는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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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6-07-08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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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의 그것도 결국 사람을 도발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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