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8

신조 미치히코의 <조선왕공족>

손민석

12 hrs ·



오늘 신조 미치히코의 <조선왕공족>을 번역하고 있는 분으로부터 관련한 얘기를 들었는데 정말 재밌다. 우선 왕공족王公族이라는 표현 자체가 생소한데, 한일병합 이후에 이씨왕가를 천황가와 화족 사이에 위치시켜놓으면서 새롭게 규정한 것이라 한다.

일본이 이씨왕가를 상당히 파격적으로 대우했다는 점은 천황가의 방계와 이씨왕가를 혼인시킴으로써 사실상 이씨왕가가 천황가 계승권을 얻게 되었다는 데서 드러난다. 이는 다른 사회에서 기존의 왕가가 무너진 상황을 생각하면 굉장히 파격적인데, 대부분의 경우 침략해서 정복한 뒤에 이전의 왕조 구성원들은 대부분 멸족되거나 그 자손을 보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정복자 입장에서는 정복한 사회에서 저항의 구심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권력 정당성을 지닌 집단을 용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조선왕조의 이씨왕가는 천황가에, 비록 방계이지만 어찌됐든 포섭되며 일본 천황 계승자가 된다는 데서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를 받는다. 물론 그 대가로 정치적인 위상을 박탈하기 위해 조선이 아닌 일본으로 왕족들이 이동해야 하기는 하지만 어찌됐든 상당한 대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씨왕가의 지위는 한일병합 당시의 조약에서도 드러나게 되는데, 한일병합을 굴욕적이고 식민지화로 이해하는 일반의 이해와 달리 형식적으로는 일본국 천황은 한국 황제인 이씨왕가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아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식민지화도 아니고, 대한제국 왕실이 그 권한을 다시 회수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천황가로서도 이씨왕가를 왕공족이라는 새로운 규정까지 만들면서 극진하게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이씨왕실은 종묘악도 관리했으며, 제사 또한 종묘에서 다 지냈을 정도로 대우를 받았으며 정치적 권리야 당연하게도 봉쇄되었지만, 군대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이들이었다.

일본의 메이지 헌법은 1945년 패전 이전까지 두 번 개정되는데 그 한번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지만, 다른 하나는 순수하게 이씨왕가의 지위를 재정립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통기권을 회수할 수도 있는 이 이씨왕가를, 그리고 천황가의 방계와 혼인하여 물론 현실적으로는 천황가의 자식들이 많아 실현되기는 어렵겠지만 어찌됐든 왕위계승권까지 획득하게 된 이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지는 일본국의 천황가의 정통성과 정체성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일국의 헌법을 망국의 왕족 때문에 바꾼 것이다. 그정도로 이왕가를 중시했던 것인데, 일본제국이 이씨왕실을 냉대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동시에 이들의 지위를 살펴보면 당시 한반도를 단순히 식민지로만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다른 일본제국의 식민지와 비교해도 상당히 다른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존에 머릿속에서 머물던 의문의 조각들이 맞춰지는 기분이 든다. 일본제국이 지닌 복합성을 보다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현실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 앞서 말했듯이 을사조약에서부터 시작해서 한일병합에 이르기까지의 흐름 속에서 일본은 확실히 이씨왕실을 우대하고 있었으며, 한국을 식민지로 삼기보다는 이씨왕실로부터 주권과 통치권을 위임받아 대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씨왕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일본제국의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20년대부터 박영효를 비롯한, 소위 친일파라 불리는 집단이 자치운동을 굉장히 진지하게 주장하는데 그 자치운동의 구심점이 바로 이씨왕실이었다. 왜 자치론자들이 대부분 군주제 지지자였는지 이해가 다소 되지 않았었는데 이 지점에서 의문이 해소되었다. 임시적으로 통치권과 주권을 위임한 것이기 때문에 자치권을 인정하는 형태로 반환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일본제국의 와해는 순식간에 이뤄지기 때문에 바로 실현되기 어려웠지만, 이씨 왕공족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 자체로 제국 지배 질서를 위협하는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당히 흥미롭고 재밌는 지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씨왕실이 일본제국의 지배 속에서 점차로 푸대접을 받고 핍박을 받았다고 인식하지 않는가. 실제로 한국에서 나오는 여러 책들이나 연구들에서도 이 점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신조 미치히코에 따르면 이것은 핍박이나 어떤 푸대접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이씨왕실 자신의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조영준의 연구에서 보이듯이 조선왕조는 왕실재산과 국가의 공적 재정이 상당부분 분리가 되어 있지 않은 전근대 전제국가였는데, 그나마 분리되고 있던 것을 고종이 다시 통합해버리고 재정을 파탄시킨다. 고종은 어마어마한 사치를 했으며 근대화의 재원으로 쓰일 재정까지도 자신의 품위유지비에 사용해버린다. 이러한 이씨왕실의 행태는 병합 이후에도 바뀌지 않아서 일본 제국과 총독부가 상당한 보조를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향락과 왕실 자산 운용의 실패 등이 겹치면서 점차로 가난해지게 된다. 특히 1920년대 일본의 경제위기로 인해 이왕가에 대한 보조금이 삭감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되기 시작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이씨왕실의 자산을 일괄하여 매입해주는 식으로 계속해서 이씨왕실을 보조해주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산운용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던 이씨왕실은 점차로 가난해지게 된다. 이들에게 들어간 보조금은 한때 총독부 전체 예산의 10%에 달했을 정도라 하니 그 규모가 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천황가의 방계와 혼인하고 천황가의 일가로 편입되는 과정은 상당히 굴욕적이라면 굴욕적일 수 있는데, 그것은 이씨왕실이 어느정도 정치적인 위상을 가지려는 의지를 보였을 때에나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씨왕가는 자신의 정치적 위상이 박탈되는 대신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그다지 잃어버린 정치적 위상과 권리를 되찾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일본제국 내에서의 특권 계층으로서의 지위에 만족했으며, 상징적인 위치에 있는 것을 그리 꺼리지 않았다. 이런 이씨왕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는 전혀 없다고 생각된다.

왕공족으로서의 이씨왕실의 존재는 일본제국의 천황가와 얽힌 정통성 문제, 의회주의 입헌국가라는 정체성 등과 얽히면서 상당히 재밌게 볼 여지가 많은 것 같다. 황족도, 그렇다고 화족도 아닌 그 중간적 존재로서의 이씨왕실의 존재를 밝히는 것조차도 일본인의 손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다. 

참으로 서글프고 또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땅을 통치한 것도, 이땅에서 일어났던 그들의 통치에 대해 연구하는 것도 모두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는 게 나로서는 참으로 부끄럽고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연구자들은 어째서 이런 연구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참으로 서글프고 또 서글프다.

상황이 이런데도 고종의 장례를 재연하고, 고종의 길을 만들고 하는 식으로 고종과 대한제국, 그리고 이씨왕실에 대해 재평가하려는 흐름이 나타나는 걸 보면 뭐라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로 서글프고 화가 난다. 서둘러 신조 미치히코의 책 번역이 끝나기를 기원한다. 초고라도 빨리 읽게 열심히 번역하라고 쪼아야겠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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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Sungyup 다른 분이 셰어해 놓으셔서 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만, 사실관계에 관한 서술에 오류가 좀 많습니다(신죠오 미찌히코 씨의 저작에도 그렇게 서술되지는 않았습니다).
"천황가의 방계와 이씨왕가를 혼인시킴으로써 사실상 이씨왕가가 천황가 계승권을 얻게 되었다는 데서 드러난다."-> 왕공족은 황족이 아니기 때문에 황위 계승권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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