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7

190206 Park Yuha 김복동 할머니를 생각한다 1, 2, 3

Park Yuha
190206 
https://www.facebook.com/sejin.pak8/posts/10156917759997296
김복동 할머니를 생각한다 1
지난주에 김복동 할머니가 작고했을 때 굳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삼우제도 치러졌다니 뒤늦게나마 써 두기로 한다.
김복동 할머니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는 각 언론사가 보도한 바 있다. 그 자료를 제공한 건 아마도 정대협일 것이다. 
그런데 김할머니는 1997년에 정대협이 출판한 증언집 에 자신의 체험을 아주 구체적으로 남겨놓고 있다.
물론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건, 가난, 성병검사,폭행, 강간, 자살시도, 병원에서 일하면서 당했던 부상병들을 위한 채혈등, 다른 대부분 위안부 할머니들과 비슷한 고통과 고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한번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저 세상에서나마 편안하시길 빌고 싶다.
김복동 할머니는 정대협이 관리하는 거주지에 계신 두어분 중 한분이었다. 함께 한 세월도 긴 만큼, 정대협 에는 아주 특별한 분이었을 것이다. 다른 분들과 달리 4일장에 시민장 형식으로 화려한 영결식을 치른 심경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렇다면 더더욱 그 분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지만, 할머니들이 사망하면 지원단체나 관계된 학자들이 전하는 건, 한결같이 단순화된 생애와 일본에 대한 분노 뿐이다. 심지어 유지를 왜곡하는 경우도 봤다.
이번에는 어땠을까. 외국언론들까지 선입견과 상식으로만 기사를 내보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누군가는 써야 할 것 같아서 쓴다.
1.위안부가 되기까지
<정대협 설명>(페이스북)
1926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출생
1940년 만 14세에 일본군‘위안부’로 연행.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의 침략경로를 따라 끌려다니며 성노예가 됨.
<증언집>(다 인용 할 수 없어서 부분 인용한다. 맥락이 명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질문해 주시면 답변할 생각.)
“동네 구장과 반장이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을 입은 일본사람과 함께””한국말을 잘하는 일본사람”
“데이신타이(정신대)에 딸을 보내야 하니 내놓으세요”””아들이 없으니 딸이라도 나라를 위해 보내야”
“군복 만드는 공장”
“서류에 도장”(어머니가 못 찍겠다고 실랑이)
“일본사람이 버스에 태워 부산까지””일본에서 오래 살았다고 하는 조선 사람”이 “다른 처녀들을 끌고 온 듯.”
이 두사람이 인솔해서
“시모노세키에서 화물선””대만””광둥”으로 이동.
“우리를 인솔했던 일본 사람과 조선사람이 우리를 높은 사람에게로 데려갔다””높은사람에게 서류를 냈다””이들은 우리에게 높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그저 하이,하이(예,예)라고만 대답하라고 일렀다.”
<박유하해설>
— 어느집에 딸이 있는지를 잘 아는 동네 조선사람이 업자를 데리고 나타났고, 정신대에 보낸다는 명목으로 데려갔다.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는 것은 부모의 동의서일 가능성 높음.
그동안 지원단체들은(일부학자들도) 이런 정황을 전부 “연행”이라고 표현. 결국 영화 <귀향>의 이미지로 구체화하고 국민들에게 전파했다.
업자들이 데려온 여성들이 속임수에 의해 끌려 왔는지 여부를, 일본군은 체크했다. “높은 사람”에게 낸 “서류”란 계약서와 부모의 동의서등 당시 정부방침으로 요구된 서류들일 것이다. 그 정황에서 ‘그저 하이하이로 대답’하기를 종용받았다는 건, 데려간 소녀/처녀들이 일본어를 잘 모르는 것을 업자들이 이용했다는 얘기.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의 주인공은,군속대우를 받은 업자일 가능성이 있지만 당시엔 흔한 옷이었으니 보통 민간인일 수도 있다.
22년전 증언집은, 제목과 소제목에서 소녀가 “전전”했다고 표현한다. 당시의 채록자들은 그렇게 이해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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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2640601909300040&set=a.296221900404731&type=3&theater
김복동 할머니를 생각한다 2
정대협의 발표자료엔 위안소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따라서 여기선 증언집만 사용한다.
2.위안소생활
<증언집>
“우리를 데려간 일본남자와 조선인남자가 사복을 입고 문 앞에서 우리를 감시했다.”
“관리인은 우리를 부산에서부터 인솔했던 한국인이었다. 그는 일본 군복을 입고 계급장은 달지 않고 있었다.”
“관리인은 전쟁이 끝나면 큰 돈을 주겠다고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저렇게 큰 집을 살 만큼의 돈을 주겠다고 바깥의 큰 건물을 가리켰다.”
“한국에서부터 같이 간 일본사람과 조선 사람이 계속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싱가포르에서 몇달 있다가 수마트라로,인도네시아로 말레이지아로 자바로 우리는 계속 이동했다.”
“나는 어느 곳에서건 특별히 정을 준 사람은 없었다. 얼굴이 익을 만 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했으니 정들 사이도 없었고, 나는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일본이 이겨야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일본이 승전하기를 빌기도 했다.”
“우리는 일본인 여자들과는 말도 하지 않고 우리끼리만 어울려 다녔다. “
“위안부 시절 내 이름은 가네무라 후유코라고 하기도 했고, 요시코라고도 했다. 모두 군인들이 지어줬다.”
“관리인은 처음부터 같이 다녔던 일본에서 자란 40대 한국인이었는데 우리는 이사람을 ‘니상(오빠)’이라고 불렀다. 이사람은 마음에 드는 위안부를 골라 데리고 자기도 했으며, 위안부들이 말을 안 들으면 막 때리고 욕도 했다. “
<박유하 해설>
여기서는 관리인들이(업자)”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보다 명확하게 표현된다. “군인이 나타나 끌고 갔다”는 증언을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일본인들도 있는데 , 대개는 이러한 경우일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업자는 ‘위안부’에게 지급해야 할 돈을 데려오면서 지불한 빚으로 충당시킨 경우가 많았다. 다만, 꼬박꼬박 대신 저금해 준 경우도 있었으니 이 부분은 일괄적으로 말하기 힘들다.
김할머니는 이 때 “이동”했다고 표현한다. 물론 이 때의 인솔자는 업자들이다. 군부의 요청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이동”은 경제논리로 이루어졌다.
“정을 준”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정을 주고 받는 정황이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할머니의 경우 15세에 갔으니 어렸기 때문일 수 있다. 일본군과의 관계는 나이와 일본어 능력이 크게 좌우한 듯 하다.
일본을 좋아해서든 아니든 “일본의 승전”을 빌었다는 것은 “일본”이 구조적으로 “적”의 관계가 아니었음을 말한다.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 역시(위계관계가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일본군 위안부”의 첫번째 대상은 일본인여성이었다.
조선인들과 잘 어울리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지만, 민족적차별은 똑같은 일에 동원된 여성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조선인을 포함한 업자들이 위안부와 ”자기도” 했다는 건, “업자”가 그저 일본군의 명령으로 관리했을 뿐이라는 일부학자들의 주장이, 상상이자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선 간단히 기술되고 있지만, 위안부들의 몸에 잔혹한 폭행을 가한 주체들은 압도적으로 업자였다. “성노예”들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군인들 또한 때로 폭행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규율로 금지되었고, 어길 경우 무겁지 않았어도 처벌받았다.
위안부들은, 군인들의 부당한 행위를 ‘헌병’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문옥주 할머니는 칼로 위협하는 군인과 싸우다가 상대를 죽였는데, 재판에서 무죄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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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2640367349323496
김복동할머니를 생각한다 3
3. 일본패전 이후
<정대협설명>
1945년, 싱가폴에서 일본군 제16사령부 소속 제10육군병원에서 간호사로 위장당하여 일본군인들 간호노동, 버려짐. 미군포로수용소에 수감. 
1947년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지 8년 째 되던 22세에 귀향
<증언집>
“어느 날 갑자기 위안소의 일본 군인들이 오지 않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관리인인 한국 사람의 밥을 해 주면서 위안소에 그대로 있었다. 한 보름쯤 지난 어느 날, 일본 군인들이 빨간 십자가 그려져 있는 차를 타고 위안소에 와서 우리를 태우고 떠났다. 이때 그 한국인 관리인은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차에 타고 보니 차 안에도 없었다. 그 길로 어디론가 숨어버렸나 보다. 우리는 그때까지 해방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그놈을 죽여버렸을 것이다.”
“일본군인들이 우리를 데려간 곳은, 싱가포르에 있는 제10 육군병원이었다.””일본군인들은 우리에게 간호훈련을 시켰다.”
“하루는 누가 나를 찾는다고 해서 나가보니, 어떤 조선인 남자가 와서, 자기가 나의 형부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
“형부는 미군 수용소에 있는 중이었다. 여기 이러고 있지 말고 수용소로 가자고 했다.”
“형부가 병원에다가 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안 된다고 했다. 형부가 왔다갔다 교섭을 하더니, 병원에 있는 조선인 여자300명이 다같이 떠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람이 굉장히 높고 큰 미군트럭을 가지고 와서 여자들을 전부 태우고 미군 수용소로 왔다.”
(어머니와의 해후)”열다섯 살에 집을 떠났다가 스무살에 돌아왔으니,5년만인 것이다.”
“형부는 내가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을 아는 것 같았지만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후에 결혼을 하라 해서)”내가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을 말하니 어머니는 통곡을 하셨다.””부모 잘못 만나서 이 고생이라고 (결혼하라고)애원하셨다.”
<박유하해설>
전쟁이 끝나고 김할머니를 “버린”건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였다. 여기서의 “해방”은 명백히 ‘업자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위안부가 도망을 시도하다 구속당하는 대상은 군이 아니라 업자였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의 미움/분노의 대상이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인 이유이기도 하다.
김할머니가 “간호”를 하게 된 건 “위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헌혈을 당하기도 했지만, 어지럼증을 호소하면 군인이 “포도당”주사를 놔 주기도 했다고 김할머니는 말한다.
수용소에 가게 된건 일본군에게 버려져서가 아니라 형부가 데려갔기 때문이다. 처음엔 거부당했지만 결국 “조선인 여자 300명”은 모두 무사히 미군에게 갈 수 있었다. ‘버려지고 학살’당했다는 스토리는, 전쟁터 극한상황에서 어쩌다 일어날 수 있었던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그런데도 일각에선 ‘버려짐과 학살’이 전체양상인 것처럼 강조된다. 
또, 김할머니는 그저 “수용소”라고 말하고 있을 뿐, “포로수용소”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본인”으로 간주되어 “포로”가 된 경우도 있지만, 점령군으로서의 미국이 점령지 사람들을 그저 ‘관리’차원에서 ‘수용’한 곳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위안부’를 포함한 조선인들은, 때로 일본인들과 함께, 미국의 도움을 받아 귀국했고 김할머니 역시 그렇게 귀국했다.
위안소에 있었던 기간을 김할머니는 “5년만”이라거나 “내가 없는 6년동안”이라고 표현한다. “8년”이 아니라. 
김할머니의 “어머니의 통곡”은 “위안부”생활이 유발했지만, “부모 잘못 만나서 이 고생”이라는 회한에 ‘일본군의 강제연행’이라는 인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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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어떤 시기에 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건 맞다. 하지만, ‘누가’ ‘왜’ 끌어 갔는지, ‘누가’ 한 여성을 불행하게 만들었는지는 총체적으로 봐야 한다. 규탄대상이 단순화될수록, “김복동”이라는 여성은 ‘역사’에서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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