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7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김철수 지음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김철수 지음, 상생출판 : 네이버 블로그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김철수 지음, 상생출판 지난 11월, 보천교에 대한 학술회의가 국회의사당에서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산실 -보천교의 재발견"이란 주제로 진행된 이 날의 학술대회는 일제시대, 당시 민중들의 마음에 '독립'에 대한 확신과 후천이란 새 세상으로 가는 세계변화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보천교의 역사와 뿌리,다양한 활동 그리고 증산도로 이어지는 동학의 맥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요, 굉장히 많은 분들께서 참석하셔서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답니다. 이 날 학술회의를 참석으로 '보천교'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입니다.

책표지 뒷면엔 이런 글이 적혀있습니다. 개벽사상으로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 했던 보천교는 제국주의 일본의 집요한 탄압을 받았다. 식민지 상황에서 민족혼을 품은 보천교는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었다. 보천교는 교주 차경석이 타계한 1936년을 기점으로, 거의 해체 상태에 이르렀고, 종국에는 그 찬란한 역사의 흔적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보천교를 제대로 조명하기 위하여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잘못된 시각을 벗어나야 한다. 이 책의 논지를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흔적조차 사라진 보천교에 대해 새롭게 조명하는 일.


이 책의 저자는 현재 중원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이자 대학원 글로벌문화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인 김철수 박사입니다. 종교사회학을 전공, 한국과 일본의 종교문화 비교연구와 근현대 한국 종교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김철수 교수가 그동안 발표했던 보천교에 관한 글들을 묶어 한 권으로 만든 것인데요,

첫번째 글에서는 일제시대 종교정책과 보천교에 대해, 두번째 글에서는 보천교와 민족 독립운동을, 세번째 글에서는 식민권력의 형성과 보천교, 마지막 글에서는 일본신사로 나타나는 일제 식민권력의 종교정책을 살펴봅니다. 일제강점기, 한국 민족종교의 의미 아래 사진은 책 앞쪽에 있는 일제시대 전국지도입니다. 이 지도는 1935년 조선총독부가 출판한 <조선의 유사종교>란 책에 들어 있는데요, 빨간 점은 천도교, 검은 점은 보천교입니다. 지도의 이름은 "천도·보천 양교분포연혁도"입니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조선민중들에게 민족종교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김철수 교수의 일본에서의 연구를 지원해 준 노무라 히로시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19세기 말, 서세동점의 광품에 직면한 이후 정신적 가치를 우선한 동양문명은 서양문명에 대항해 일종의 문화적 자긍과 정신적 자부의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메카니즘이 붕괴된 혼란한 시대상황에서, 동양의 문화적 자긍과 정신적 자부의 원천은 공감해요 '종교'로 응축되었고,
 따라서 '종교'는 동시대의 사회혼란과 문명의 폐단을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한국에서는 동학과 증산사상이 그러했다." 이에 더해 김철수 교수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러한 식민지 시대에 종교란 뭐였을까?"라구요...... 역사와 문화가 다른 민족을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모순투성이 현실에서, 서구열강같은 뒷 배경도 없이 식민권력에 대항하는 민족혼을 품은 민족종교... 또한 동시에 그런 식민지 상황에서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종교들은 무슨 이유였을까... 민족종교의 뿌리, 동학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은 공감해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직원으로,
 1919년부터 1941년까지 일제강점기 한국의 민속과 관련된 많은 조사를 한 일본의 민속학자입니다. 한국의 민간신앙, 사상의 성격, 한국의 귀신, 조선의 풍수, 조선의 무속, 점복과 예언, 조선의 유사종교, 부락제(部落祭), 기우, 안택, 조선의 향토 오락등 다양한 민속을 연구하고 책으로 출판했는데요, 이 연구의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천도교를 비롯한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벌어진 걸 보고 일제가 한국인의 정신세계와 신앙을 이해해 식민정책에 반영하고 활용하기 위한 것. 그 무라야마 지쥰은
자신의 책 <조선의 유사종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사종교는 최제우의 동학에서 시작된다." "유사종교가 항상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동인(動因)을 제공하므로, 총독부는 끊임없이 그 동태를 감시하고 조사해야 한다." "중요한 종교유사단체는 천도교, 시천교 및 보천교다." 일제시대 민족종교 연구의 현재와 이 책이 주목한 기록 김철수 교수는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에 대한 연구는 항일운동 방면에서 천도교, 대종교,태을교 순으로 많다고 했는데요, 태을교는 선도교, 훔치교로도 불린 보천교입니다. 보천교에 대한 연구인식은 1925년 보천교 간부들이 일본에서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면담하고 '시국대동단'이란 단체를 만들어 친일활동을 했다는 점으로 

대부분 부정적인 시각이라고 하는데요, 이 책에서는 일제식민권력의 기록에 나타난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차경석' 혹은 '보천교'와 관련해 식민권력이 생성한 자료를 주목합니다. 그게 전라북도가 1926년 편찬한 <보천교일반>과 1924년 <양촌 및 외인 사정 일람>같은 식민권력의 보고서와 공문서들입니다. 특히 <보천교일반>은 일제 식민권력이 보천교를 대상으로 비밀리에 조사보고한 자료인데요, 이를 보천교 탄압에 이용했습니다..

 일제 문서에 나타난 보천교와 차경석 전라북도에서 펴낸 <보천교일반>에선 보천교의 교주인 차경석(1880~1936)을 1917년 '갑종(甲種)요시찰인'에 편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시찰인(要視察人)은 조선총독부가 1925년 임시정부 요인들의 행적을 조사해 작성한 기밀서류에서 갑과 을로 나누어 표시하고 있는 데서 보이듯,

식민권력의 입장에서 위험도가 큰 인물에 대한 평가인데요, 보천교 교주인 차경석과 함께 당시 갑종 요시찰인으로 분류된 사람으론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이동녕,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이자 사학자인 문일평 등이 있습니다. 민족의식 말살을 위한 종교정책 1910년 8월29일 한국강점 후 일제는 3인이상 옥외집회 금지, 전국 사회,정치단체 해산, <을지문덕>, <초등대한역사> 등 45권을 발매금지, 한국인이 저술한 각 학교용 교과서 몰수, 학교교과서를 조사해 식민통치에 방해되는 문구나, 학생들에게 구국사상을 고취시킬 수 있는 창가 등을 삭제합니다. 

이런 가운데, 종교는 일제 식민권력의 중요한 억압과 통제 기제였는데요, 1910년 강점 직후 일제는 불교와 유교를 통제하기 위해 <사찰령>,<경학원 규정>을 공포하고, 천주교 등 기독교 통제를 위해 <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합니다. 또한 총독부령으로 <포교규칙>을 공포해 '공인종교'와 '유사종교'를 나눠 민족종교의 통제와 억압수단으로 활용합니다.

조선내의 비밀결사, 민족종교 1921년 일제의 여러 보고서 작성자들은 "조선 내의 비밀결사란 바로 종교유사단체를 일컫는다"고 하며, 비밀결사를 소유한 종교유사단체들 중 하나로 보천교를 지적합니다. 무라야마 지쥰은 당시 민족종교 105개 교단 중, 민중을 선도하는 적극적 정치활동을 하는 교단이 53개, 관의 시설에 반대하는 등 소극적 정치방해를 한 교단이 52개라고 정리하고 있는데요, 민족종교 교단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보천교일반>에 적힌 차경석에 대한 기록 책 65쪽에 적힌 <보천교일반>의 내용을 그대로 적어봅니다.

41 "교주 차경석은 일명 윤홍이라 칭하고, 1880년 6월1일 전라북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차치구는 동학당의 간부이기 때문에 1894년 경석 15세 당시 흥덕군수 부하에게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경석은 1890년 1월부터 1901년 2월까지 정읍군 입암면 안경현이란 자 밑에서 한적(漢籍)을 배우고, 1904년부터 1908년 3월까지 일진회 평의원이었으며, 1907년 6월16일 김제군 수류면 원평이 주막에서 우연히 강증산과 만난 이후, 그 문하에 들어가 훔치교에 귀의하여 오로지 교리의 연구에 몰두하여 마침내 기유년 1909년 음력 1월 3일 교통언례식을 하여 교도를 전수받기에 이르렀다." 차경석은 강증산의 사후(1909), 1911년 창립된 고판례(1880~1935)의 ' 선도교(仙道敎, 일명 태을교)에서 활동하면서 1914년경부터 실권을 장악하고 독자의 세력을 형성하는데요, (79p) 차경석과 태을교는 교단 형성과정에서부터 조선의 국권회복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차례 수난을 당합니다.

보천교로 밝혀지고 있는 항일운동 1. 1918년10월 제주 법정사 항일무장봉기 (일명 '제주도사건') 최초의 종교계 항일무장봉기로 알려진 제주도사건은 <양촌 및 외인사정일람>에 차경석이 제주도 법정사에 교도 약 30명을 모아놓고 도내 거주 일본인관리를 죽이고, 일본 상인을 쫓아내야 한다는 설교 후에 발생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간은 불교계의 항일봉기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보천교의 활동이었습니다. 2. 1919년3·1운동 3·1운동은 천도교측의 주도로 기독교, 불교계가 참여해 민족대표에 천도교 15인, 기독교 15인(후에 1인 추가), 불교 2인이 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에 대해 김철수 교수는 91p에서 태을교와 천도교가 혼재되어 인식되었음을 지적합니다. " 1919년 3·1운동 이후 "소요사건 입감자의 종교별"이란 자료(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1978)를 보면 민족종교로 거론될 수 있는 천도교, 시천교, 대종교 등이 들어 있는데,

조선군참모부에서 작성한 보고서 (鮮內民心 일반의 취향에 대하여)를 보면, "천도교도에 귀의하게 되면 장래 조선독립에 즈음하여 물질적 이득을 얻는다고 칭하며 입교하는 자"등이 있음을 보고했는데, 이는 태을교와 천도교가 혼재되어 인식되었음을 추정 가능케 한다." 당시 이런 인식의 혼재는 차경석이 비밀리에 교세를 확장해 나가던 때로, 아직 교의 이름을 공개하기 전이기 때문인데요, 여러 정황으로 차경석과 그 교의 존재를 파악한 일제는 회유를 통해 교단공개를 유도합니다. 그래서 1922년에야 '보천교'란 이름으로 (처음 정식 등록한 교 이름은 '보화교(普化敎)')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보천교의 교세

 미키 하루오란 사람은 보천교가 교단을 공개한 후 보천교의 교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 다수는 '조선독립' 및 '보천교를 믿지 않으면 조선민족이 아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보천교를 믿었다는 방증인데요,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미국보고서에서는 600만, 지난 11월 보천교 학술대회에 참석한 보천교신앙을 하시는 분은 700만이라고 하셨답니다. 또한 미키 하루오의 말을 보면, 일제의 한국강점이 시작된 1910년부터 우리나라가 독립을 할 거란 걸 당시 사람들이 믿었다는 걸 알 수 있는데요, 제주도 사건에 적혀 있는 차경석의 말을 보면, 보천교가 조선독립에 대한 이런 신념을 전파해 갔다는 걸 알 수 있답니다.

보천교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들 책은 일제가 보천교도에 대한 특별법을 만들어 탄압했음을 보여주는데요, 보천교란 이름외에도 훔치교, 태을교의 이름도 보입니다. 일제는 3·1운동 후 "보천교 간부와 재외 불령단과의 관계"를 가장 주목하는데요, 국내를 바탕으로 국권회복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문기사 제목을 보면 이런 점은 더 분명해집니다. '상해임정 보천교에 독립운동자금 모집하려 요원 파견(동아일보 1924.4.1)' 보천교는 1925년 시국대동단으로 친일활동을 해 비난을 받을 때도 '정의부' 등 많은 독립운동을 지원했는데요, 아래 사진은 그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런 활동들은 대부분 지금껏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국권회복운동을 지원하다가 일이 발각되면 보천교를 내세우지 말고  개인적으로 한다고 말하고,(한규숙) 11 1
 이 일은 절대 비밀로 하고, 만일 도중에 체포되더라도 보천교와의 관계는 말하지 않을 것이니(이춘배)란 신문조서에 적힌 내용처럼 철저히 '보천교'란 이름을 숨기고, 비밀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밝혀야 할 역사, 보천교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 때마다 밑줄을 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동안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란 놀라움과 새로움, 안타까움 때문이었는데요, 안타까움 중 하나는 보천교를 밝혀주는 기본 자료가 현재 대부분 일본에 있고, 일본어로 적혀 있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이를 알고, 마음 먹고 연구하지 않는 이상 하기 힘든 일이 보천교를 세상에 밝히는 일이었을 텐데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또 다른 안타까움의 하나는 보천교를 통해서 보듯, 얼마나 많은 진실이 일제에 의해 사라지고 왜곡되었을까란 점입니다. 그게 사람에 관한 일이든, 사건에 관한 일이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35년동안 있었던 수많은 일들에 대한 진실....... 보천교가 세상에 드러나듯, 당시 보천교를 신앙했던 모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사실들... 온전히 다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보천교 이외의 것들 -일제의 종교를 통한 식민정책과 단군에 대한 인식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정책의 핵심 - 종교와 교육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게,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전, 메이지유신 시대부터 일본내에서 종교정책으로 일본 국민들을 통제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종교들을 넘어서는 위치로 일본 신사를 끌어올리고, 모든 사람을 그 밑에 두어 '국가와 천황체제'를 강화했는데요, 이때 '유사종교'란 말을 이미 자국내에서 일본은 사용했다고 합니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지배정책의 중심을 자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종교와 교육으로 잡는데요, 그래서 3·1운동이 끝난 4개월 후 조선에 일제의 신사를 세우는 논의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1925년 , 남산의 조선신궁이 준공되고,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구상도 이때 이루어집니다. 조선의 국조, 단군에 대한 논의 재미있는 건, 조선신궁을 둘러싼 일제의 여러 신도가들과 정치인들의 논쟁인데요, 이런 논쟁의 바탕은 일제가 조선을 성공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황극화정책의 일환이지만, '단군'에 대한 당시 일제의 인정도 어느 정도는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일제는 조선신궁을 계획하고 지으면서 어느 신을 모실지 의논을 합니다. 오가 사와라 같은 신도가는 "조선의 시조인 단군을 봉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지쯔란 사람은
조선 2천만 민족의 조신을 제사하는 신사를 건립해야만 한다.', '한국 건국의 신을 무시함은 인륜의 상도를 무시하는 부도덕한 일이다."고까지 말하는데요, 영향력있는 이런 여러 사람들의 주장에 조선총독부는 금방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대신 조선총독부 주무과 지방과장이 총독에게 '단군 봉사에 대한 반대의견서'란 비밀문서를 제출하는데요, 반대의견의 여러 주장 중 하나에서 단군에 대해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제의 흔적이 드러납니다. 김철수 교수는 이 '역사적 사실'문제가 논쟁의 핵심으로 등장한 게 결국 일제가 한국인의 뿌리를 부정함으로써 동조동근사상을 주입을 통한 동화정책의 의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p236 이미 조선사편수회를 통한 <조선사>에 대한 구상이 끝난 단계....... 결국 조선신궁엔 삿뽀로신사, 대만신사 같은 다른 일제의 식민지 신사와 다르게 국혼신이 정확히 배사되지 않습니다. 대신 단군이란 인명을 적지 않고, 애매하게 '시조 및 건국유공자'를
나란히 국혼신이란 이름으로 배사하게 됩니다. 이렇듯 일제는 조선에 신사를 밀어넣고, 강제로 참배시키는 황민화 정책을 꾸준히 행하는데요, 당시 사람들은 이에 대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 해방된 8월15일과 16일, 신사의 대다수를 파괴했다고 합니다. 미군정도 일제의 신사가 식민지 침략의 주요 담당자라는 걸 알았는데요, 때문에 일제가 퇴각할 때 군인, 신관, 창기는 집단적으로 날을 정해 퇴각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몰랐던 것들을 이 책 덕분에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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