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7

20세기 초 일본인들의 이주, 식민도시 대전의 탄생과 성장 | Redian



20세기 초 일본인들의 이주, 식민도시 대전의 탄생과 성장 | Redian



20세기 초 일본인들의 이주,
식민도시 대전의 탄생과 성장
두 개의 식민권력, '조선총독부'와 '재조일본인사회'
By 고윤수/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2019년 02월 01일 10:38 오전


* 앞 회의 글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근대에 접어든 인천, ‘오물이 넘치는’ 도시?

“가장 급한 일은 다음의 두 가지다. 하나는 부산에서 한성을 거쳐 의주까지 철도를 부설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평양 이북 의주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지점에 방인(邦人)을 이식하는 일이다.”

일본 조슈 군벌의 총수이자 청일전쟁 당시 조선주둔 1사령관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1894년 입안한 대조선정책이다. ‘철도 부설’과 ‘자국민의 이주’, 일본의 이 간명한 한반도 식민정책이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된 도시가 바로 ‘대전(大田)’이다. 대전의 역사 자체가 철도와 일본인의 이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대전 최초의 시지(市誌)지라 할 수 있는 『대전발전지(大田發展誌)』(1917)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에 의해 기록되었다. 대전실업협회의 서기장이었던 저자 다나카 레이스이(田中麗水)는 다음과 같이 대전도시사의 첫 페이지를 썼다. “대전은 삭막한 한촌(寒村)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로(日露)전쟁 당시 경부선 철도가 놓일 즈음 내지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메이지 37년(1904) 당시 대전에 거주했던 내지인의 수는 180여명이었다.” 저자는 뒤에서 이들의 수가 정확히 188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철도 노동자들이거나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1918년에 신축된 대전역사

일찍이 일본이 한반도의 경부선 철도를 구상했을 때, 충청지역에서는 대전이 아니라 ‘공주’ 혹은 ‘청주’에 역을 둘 계획이었다. 당시 대전은 지명조차 희미했던,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던 곳이었으므로 여객이든 물류든 ‘수요’라는 게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공주와 청주는 오랜 역사도시로 인구는 물론, 역을 놓고 운영할 만한 기초적인 인프라가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빨랐던 러일전쟁의 개전으로 일본은 속성으로 공사를 진행해야 했고, 그 때문에 복잡한 토지수용 절차는 물론 주민들의 저항도 없었던 한적한 대전을 선택했다. 그리고 1905년 1월,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 대전에는 도시의 새로운 발전 가능성에 착목한 일본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88명이었던 일본인의 수는 1905년 609명으로 뛰었고, 조선총독부가 들어선 1910년엔 2,479명으로 늘어났다. 5~6년 사이 1,000%가 넘는 경이적인 상승이었다. 일본인 수의 증가와 함께 각종 지역 커뮤니티들도 만들어져, 재대전 일본인들의 대표기구라 할 수 있는 ‘대전거류민회’가 1905년 11월 일본 영사관의 승인을 받아 정식 출범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그들은 자신들의 거류지를 6개의 구로 나누고 구장(區長)을 선출, 본격적인 ‘자치’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충청도 지역의 수위도시는 단연 ‘공주’였다. 공주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대전보다 훨씬 이른 시기인 1895년이었지만, ‘공주일본인회’가 조직된 것은 대전보다 늦은 1906년 4월이었다. 이처럼 불과 1년 만에 자신들의 대표기구를 조직할 만큼 대전 일본인사회의 결속은 빠르고 역동적이었다.

1907년엔 이들 대전거류민회를 중심으로 신사(神社)가 대전역 뒤편, 지금의 소제동(蘇堤洞)에 세워졌다. 부산이나 인천 등 개항장의 전관거류지(치외법권지역)에 신사가 있었던 것은 이상할 게 없었지만 당시만 해도 법적으로는 엄연히 ‘외국’이었던 한국에, 그것도 내륙의 한 중심에 신사가 세워진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1907년 대전신사의 건립은 당시 대전 일본인사회의 위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내부적으론 그들의 결속을 한층 가속화시켰을 것이다. 일본이 건설한 다수의 식민도시들을 연구한 하시야 히로시(僑谷弘)의 지적처럼 신사는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주민 집단의 통합과 안정을 심리적으로 지원하는데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실제 그들은 자신들만의 도시를 건설했다. 1914년 지방제도 개편과 함께 일본은 대전의 일본인들이 처음 정착했던 대전역 주변을 ‘대전면(大田面)’으로 설정하고, 과거 회덕군과 공주목, 진잠현의 일부를 떼 내어 ‘대전군(大田郡)’을 신설했다. 당시 대전면의 인구는 일본인이 3,435명, 한국인이 1,556명으로 일본인이 두 배가 훨씬 넘었다. 이 기이한 현상은 대전면역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1926년까지 계속됐다.

1909년 대전에서 출생한 일본 오우미상인(近江商人)의 후예, 쓰지 만타로(辻萬太郞)는 대전에서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종전(終戰) 전의 한 시기를 제외하곤, 일찍이 나는 이 도시에 대립하는 두 민족이 살고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게 우리들이 실질적으로 식민 통치자들 쪽에 있었고, 그들이 통치를 받는 쪽에 있었다는 사실에 눈을 감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예 생각을 못했던 것인지, 이 도시의 특이한 분위기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인지, 지금에 와 생각해 보게 된다.”



사진 : 대전 후지산, 지금의 보문산에서 바라본 대전 전경. 위가 개발된 시가지고, 아래가 미개척지로 남겨진 대전천 서편이다.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이다.’라는 의식은 지명에도 반영되었다. 대표적으로 현재 대전 도심의 랜드마크인 보문산을 그들은 ‘후지산(富士山)’이라고 불렀다. 일본의 후지산과 모양이 비슷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실제 그래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어떤 욕망이 투사된 결과일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대전을 ‘작은 에도(小の江戸)’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아마도 대전면을 관통하는 대전천을 보며 교토 시내를 흐르는 카모강(加茂川)을 떠올렸던 것 같다. 이같은 그들의 자신감은 1932년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을 통해 정점에 이르렀다. 당시 충남도청의 이청식을 보며 『대전발전지』의 저자 다나카 레이스는 감격에 겨워 다음과 같은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조선에서 일본인들만이 모여살고 처음으로 지명이 생겨 일본사람들만으로 건설한 도시는 유일하게 대전뿐이다. 건설을 시작한 지 겨우 30년, 오늘처럼 대전이 발전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참으로 ‘신흥대전’이라고 할만하다.” (〈부산일보〉 1932.10.22.)



사진 설명 : 1920년대 중반의 대전시가. 대전역과 대전천 사이에 좁고 긴 시가지를 형성했다. 현재 대전역 앞 대전중앙시장 자리에 ‘기후정(岐阜町)’과 ‘마쯔시마정(松島町)’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기후와 마쯔시마 출신의 일본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동향끼리 마을을 이루고 살만큼, 대전의 일본인들의 수는 그 어느 지역보다 많고 밀집도도 높았다.

대전의 재조일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강한 자부심은 단순한 정신승리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것의 근본적인 이유는 지역개발의 동력이 조선총독부라는 식민국가가 아닌, 자신들 즉 지역의 재조일본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이라는 식민지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충분한 재정을 투입하지 못했다. 1930년대 후반 전시동원체제기의 긴축재정은 논외로 하더라도, 1910년대조차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었고, 총독부 또한 세입의 많은 부분을 철도나 토지조사사업 등 소위 수탈을 위한 식민지의 초기 세팅비용에 투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덧붙여 일찍부터 일본 군부는 조선을 보호국이 아닌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비용 문제’였다. 그래서 줄곧 군부의 핵심들이 총독으로 부임했던 조선은 총독부 스스로 재정지출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의 지역단위 개발사업들은 많은 부분, 민간 즉 재조일본인들의 자본과 조직에 기대어 혹은 총독부의 권력을 끌어들인 그들의 주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잘 알려져 있듯 1910년 한국에 총독부 체제가 출범하면서, 일본의 식민엘리트 관료들은 재조일본인들의 자치조직을 강제적으로 해체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이유로 인해 재조일본인사회의 외형적인 변화는 불가피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사회적 역량은 결코 축소되지 않았다. 다른 많은 식민도시들의 개별 연구들이 모아져야겠지만, 적어도 대전의 경우 거류민회의 해체는 재조일본인사회에 실질적인 타격을 주지 않았다. 재조일본인사회의 핵심 엘리트들은 학교조합을 통해 재집결하였으며, ‘공공회(公共會)’라는 새로운 법인을 만들어 과거 거류민단이 수행했던 소방과 위생, 특히 토목 등의 공공사업들을 자체적으로 추진해갔다.

초기 대전이 도시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호남선철도유치운동’(1908~1910), ‘일본군연대유치운동(1911~1915)’, ‘대전중학설치청원’(1916), ‘대전-금산간 도로개수사업’(1916) 등 모든 굵직한 지역의 현안사업들에는 재조일본인사회가 개입돼 있었거나, 그들의 주도로 촉발되었다. 철도 외에는 별로 가진 게 없었던 대전의 재조일본인들은 계속해서 외부의 자원들을 끌어오는 방식으로 도시를 성장시켜갔고, 그 막후에는 지역 토건세력들의 힘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황무지에 가까웠던 곳에 개척된 도시였던 탓에 토건세력들이 성장하기 좋은 환경이었고, 그들을 계속 끌어안고 발전해온 대전은 늘 새로운 토건사업들을 필요했다.

식민지시대 대전 재조일본인사회가 이룩한 가장 빛나는 성취는 아마도 1932년의 충남도청 이전일 것이다. 이 사건은 작게는 근대도시인 대전이 전통도시인 공주를 압도한 사건이었으며, 크게는 대전의 재조일본인들이 제국의 본토와 식민국가인 조선총독부, 모두를 아우른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나름 유명한 이 사건을 짧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920년대 이후 대전의 재조일본인사회가 조선총독부에 끈질긴 로비를 벌려 (중간에 무리한 로비로 현직이었던 야마나시 총독이 사임하는 독직사건에 연루되는 악재를 만나기도 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결국 총독부의 도청 이전 결정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본국의 중의원이 이를 뒤집는 상황이 연출되자, 다시 도쿄로 건너가 전방위적인 진정과 로비를 벌려 귀족원에서 다시 상황을 원점으로 돌리는 대역전의 드라마를 쓴 것이다.


1932년 10월 충남도청사 대전 이청식에 운집한 대전시민들(〈동아일보〉 1932.10.17.)

물론 이 사건 하나를 두고, 재조일본인사회가 일본 제국의회나 조선총독부를 압도할만한 힘을 갖고 있었다거나 그들과 대응한 지위에서 조선이라는 식민지를 지배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가 그렇지도 않았다. 조선총독부가 갖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규정력은 분명 경쟁자가 없는,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 단지 그것이 만능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조선총독부의 강한 힘, 이를테면 그들이 보여준 폭력성은 오히려 총독부 권력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또 다른 식민지였던 대만과의 비교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몇몇 경제사가들이 ‘식민국가로서의 조선총독부의 능력이 과대평가되어 온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는 지적은 깊이 생각해볼만 하다.

요컨대 1930년대 초 충남도청 이전을 둘러싸고 벌어진 상황들, 즉 조선총독부의 무능 혹은 한계가 노정되는 그 지점에서 재조일본인사회는 여지없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총독부보다 빠르게는 한 세대 먼저 조선에 정책해 자신들의 물적 토대를 구축해 놓았고, 그 위에 총독부의 정책과 일방적인 프로파간다에 포섭되지 않는 자신들만의 입장과 논리, 즉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앞서 소개한 대전의 재조일본인 쓰지 만타로는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가 『포플라와 바가지』라는 제목의 비망록을 남겼는데, 거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정책과 통치를 비판하는 내용들이 곳곳에 담겨있다.



사진 : 대전에서 태어난 재조일본인 쓰지 만타로와 그의 부인. 오우미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쓰지 킨노스케는 1904년 대전에 정착, ‘쓰지양조(釀造)공장’을 세우고 1920년 중반 기준 전국 생산량 6~7위 차지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이 기업의 2대사장에 취임하여 패전 전까지 대전에 살았다. 그의 부인 ‘우타’도 부산에서 태어난 일본인이었다. 쓰지 집안은 대전 보문산에 처음으로 조림사업을 시작했고, 위 사진은 보문산에 있었던 그의 별장에서 찍은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가리는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식민자(colonials)’들에 대한 흥미로운 정의를 내놓았다.

“모험가, 괴짜, 전도사, 탈영병, 장사꾼, 성자, 가끔 살인자, 멀리 떨어졌지만 가족에 얹혀사는 이주민, 탐험가, 귀족 아버지의 재산과 신분을 상속받지 못한 막내아들, 자연 곁에서 살고 싶어 하고 원시인의 자연스러운 고상함을 믿는 낭만주의자, 상속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가족이 대신 빚을 갚아 준 노름꾼, 정글에서 활동적으로 살면 치유될 것이라 간주된 젊은 알코올중독자, 영원히 새로운 술자리를 찾아 해매는 늙은 알콜중독자. ‘언제나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살고 싶어 하는’ 도피 애호가, 그리고 왜 어떻게 그곳에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아프리카로 왔고 그들은 이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은 진정으로 제국의 건설자가 아니면서도 제국을 건설했다.”

로맹가리의 말처럼 20세기 초 한반도의 재조일본인들 역시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무수히 다양한 인적 구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다면성은 식민지조선의 다면성과도 조응한다. 로맹가리의 마지막 진술처럼 그들은 진정한 제국의 건설자들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제국을 건설했다. 대전의 재조일본인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의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건.

[주요참고문헌]
田中麗水, 『(朝鮮)大田發展誌』, 1917
辻萬太郞, 『ぽぷらとぱかち』, 1978
고윤수, 「재조일본인 쓰지 긴노스케를 통해서 본 일제하 대전의 일본인사회와 식민도시 대전」, 『서강인문논총』51, 2018.



필자소개
고윤수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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