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0

19 제2의 고향요? 25년간 가슴에 붙인 하청 차별···나는 거제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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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고향요? 25년간 가슴에 붙인 하청 차별···나는 거제가 싫다! [커버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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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2019.03.09 오전 6:01



경남 거제에서 24년간 선박 용접을 해온 김수용씨가 동료들이 퇴근하는 대우조선해양 서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청업체 소속인 그의 작업복 가슴께에는 소속부서가 아닌 ‘○○산업’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다. 거제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거제의 해안선은 유난히 구불구불하다. 24년 전, 만 34세의 김수용씨(58·사진)는 이 해안선을 달리는 버스를 타고 거제의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옆자리에 앉은 아내는 세 살배기 딸을 안고 있었다. 차창 밖의 바다 물결만큼이나 불안감이 일렁였다.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

김씨는 원래 김해 사람이다. 고교 졸업 후 군대를 다녀와 이 지역의 신발 제조업체에 취업했다. 그때만 해도 고향에서 늙어갈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1990년 예기치 않게 해고를 당했다. 1987년 6월항쟁 직후 노동조합을 만드는 운동에 참여한 것이 문제가 됐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그의 곁에, 회사에서 만난 아내가 있어 줬다. 1992년 결혼을 했고 이듬해 딸이 태어났다. 생계는 막노동을 하며 감당했다. 소송을 통해 법원에서 ‘부당해고’임을 인정받았지만 업체는 폐업해버렸다. 모기업으로부터 밀린 임금과 퇴직금을 어렵사리 받아냈다. 그러고 나니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어 있었다. 가장으로서 새 출발을 해야 했다. 지인들은 그가 김해는 물론이고 울산 업체들 사이에서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귀띔해주었다.

그 무렵 경남권 지역신문의 한 구인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거제 조선소 용접공 모집. 월급 150만원 보너스 500%.’ 안 그래도 조선업이 활황이라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들은 터였다. 거제에 가기로 마음먹고 1년간 용접을 배웠다.

김씨가 거제에 온 1990년대는 한국의 조선업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던 시기였다.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한국의 빅3 조선사들이 1960년대부터 30년간 선박수주 세계 1위를 지켜온 일본과 각축전을 펼쳤다. 1993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오른 한국의 선박수주 실적은 전년도의 4배가 넘는 951만9000t(수주금액 73억달러·186척). 이후 한국은 일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2000년에 이를 즈음엔 일본을 완전히 따돌리게 된다.

빅3 조선사 가운데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이 거제에 자리하고 있다. 험하고 고되지만 돈을 벌고자 하는 기술자들이 저마다 다른 사연을 안고 거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김씨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60~1970년대에 11만명선이던 거제도 인구는 2000년대 중반에는 20만명, 2015년엔 27만명까지 불어났다. 거제의 임금노동자 가운데 84%는 조선업 계열에서 일한다(2015년, 국토연구원). 거제는 그야말로 조선업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다. 거제 사람들의 삶에는 한국 조선업의 부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실 김씨가 거제에 온 1995년 당시에는 조선소 하청업체 취업은 어렵지 않았다. 그가 노심초사했던 것은 혹시나 이곳에서도 블랙리스트를 공유하고 있을까봐서였다. 온 가족이 거제에 와서 지원서를 낸 며칠 뒤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아내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대우조선해양 하청 용접공의 24년 여정이 시작됐다.

‘○○산업 김수용’…가슴에 붙인 하청 차별, 그게 거제입니다




■ 생사의 기로

조선소 일은 고단했다. 용접 과정에서 피어오르는 중금속 연기를 ‘흄(fume)’이라고 한다. 아무리 용접마스크를 써도 흄을 흡입할 수밖에 없다. 처음엔 매캐한 쇳가루 먼지 때문에 코끝이 찡해지고 어질어질 했다. 용접 불똥(슬러그)이 눈에 들어가 병원에서 빼 낸 것도 여러 번이었다. 용접공들은 불꽃 때문에 소가죽으로 된 작업복을 입는데, “여름엔 완전히 초주검이 된다”고 했다. 태양에 달궈진 철강판 앞에서 용접을 하다 보면 땀이 비 오듯 줄줄 흘렀다. 용접 이후의 ‘용접물’ 온도는 2000~3000도에 이른다. 온종일 쪼그려 앉아 일하는 탓에 무릎연골이 파열되는 등의 근골격계 질환도 흔하게 앓는다.

1995년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에 들어간 김씨는 꼼꼼한 일처리 덕에 금세 실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용접공으로서는 최고시급인 3800원을 받았다. 법정 최저시급이 1170원일 때였다. 묵묵한 성격의 그는 자신의 용접기술을 얘기할 때만큼은 “A급 기량”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조선소에서 일한 지 4년가량 흐른 후에는 선박건조의 ‘정점’인 탑재 파트에서 용접을 했다. 선박건조는 강재(철강판)를 절단해 수백 개의 작은 블록(소조립)을 만든 후 이것들을 큰 블록(중조립)으로 조립하고 또다시 대형 블록(대조립)으로 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거의 다 조립된 초대형 블록들을 골리앗 크레인으로 도크에 옮기면 선박의 윤곽이 드러난다. 이 과정이 ‘탑재’다.

도크에 놓인 선박의 높이는 대략 50~60m. 아파트 20층 수준이다. 바닥을 내려다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그는 이곳에서 폭 70㎝의 임시발판·통로(족장)에 서서 용접을 한다. 안전벨트를 맬 때도 있지만 작업을 위해선 풀어야만 할 때도 있다. 때로는 임시통로의 나사가 풀려 있기도 한다. “매년 추락사 소식은 예사지예.”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추락사고가 일어난 장소는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써 눈길을 피한다고 했다. 거제의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은 각각 2011년과 지난해 노동계로부터 ‘최악의 살인기업’으로 선정됐다. 산재사망자는 거의 하청노동자였다.

■ “거제 전체가 중산층이었지만…”

김씨가 분투하는 동안 살림은 안정을 찾았다. 거제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1997년 둘째인 아들이 태어났다. 처음엔 구인광고에서 본 액수만큼 벌지는 못했지만 단칸방에서 20평대, 30평대 아파트로 차차 옮겨갈 수 있었다. 그의 아들, 딸이 학창시절을 보낸 2000년대에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부근은 신도시처럼 꾸며졌다. 번듯한 레스토랑들이 생겨났다. 외국인 엔지니어들을 위한 레지던스들이 들어섰다. 수도권, 부산에서나 보던 브랜드 아파트들도 건설됐다. 2010년대 초반까지 거제는 “섬 전체가 중산층이었던 시절”이었다. 연말이 되면 대우조선해양 조선소가 있는 ‘옥포’와 삼성중공업 조선소가 있는 ‘고현’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고 한다.

“근데 그거는 직영(정규직 생산직 노동자)들 얘기지요. 저는 중산층에 못 끼었어요. 이번에 연말정산 해보니, 지난해에 3600만원 벌었더라고예. 직영들 팡팡 쓰고 다닐 적에 우리는 그래 못 쓰니까 늘 아끼고 아끼고…. 결국 아파트 대출도 다 갚지도 못했지예.”

양승훈 경남대 교수가 쓴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는 서울·엘리트 중심의 사고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노동자 중산층’ 공간으로서 거제가 묘사돼 있다. 예를 들어 작업복은 그들 지위의 상징이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술집, 결혼식, 상갓집, 소개팅 자리에도 작업복을 입고 나갔다. 2010년 초반의 조선업 활황기까지 생산직 정규직 평균 연소득은 7000만원이었고 반장급이 되면 연 1억원에 이르는 임금을 누렸다. ‘직영’ 노동자의 아내들은 문화센터 등에서 네트워크를 쌓으며 지역 내 투자정보와 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의 사내정보를 모았다. 직영 노동자의 자녀가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할 경우 아버지가 오피스텔을 마련해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정규직 중심으로 형성된 ‘중공업 정상가족’ 신화는 하청노동자 가족을 하위주체로 만들면서 이룩됐다. 쉽게 말해 소득격차를 만들고, 하청노동자들과 그 가족을 은연중에 배제하고 발언권을 박탈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거대 조선사들은 조선업 활황기에 부족한 인력을 주로 하청업체 직원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1995년 9대 조선사의 하청 직원 규모는 직영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러나 2000년엔 하청 직원이 직영보다 1.4배가량 많아진다. 이어 2014년 즈음엔 직영 대 하청 직원의 비율이 1 대 3.5가 된다(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2015년).

|“불야성? 직영들 얘기지예”

위험 도맡고 ‘세빠지게’ 일해도

정규직 작업복이 ‘중산층 지위’

|“욕이 절로…억울하지예”

부실 감춘 잔치에 싸늘한 여론

하청 동료들이 먼저 스러졌다

|“뒤도 안 보고 떠날기라예”

숙련공 내모는 현실에 뭔 미래

현대중공업·산은 약속 못 믿어

그는 직영들과 달리 자신은 “작업복을 입고 다니는 것도 싫다”고 했다. 작업복 왼편에는 ‘명찰’이 붙어있는데 직영의 경우 ‘탑재1부 ○○○’이라고 쓰여 있지만 하청노동자는 ‘□□산업 김수용’이라고 쓰여 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이들의 작업복 가슴께를 쳐다보게 됐고 남들에게서도 그런 시선을 느꼈다. 현장에선 어렵고 위험한 일이 주로 하청업체 노동자에게 몰렸으며, 임단협(임금 및 단체협약 협상)에서 하청노동자의 목소리는 낄 틈이 없었다. ‘(하청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한다’는 문구가 협상 결과의 전부였다.

김씨가 아무리 일한들 외벌이로는 두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었다. 그의 아내는 2000년부터 학습지 회사의 사무보조를 했다. 주로 ‘직영 중산층’ 가족이 고객이었다. 회원이 많을 때는 1000여명에 달했다.

김씨에겐 딸과 관련해 입 밖으로 꺼내기 머쓱한 기억이 있다. 딸은 중학교에 진학하자마자 학급에서 2등을 했다. 자랑스러우면서도 은근히 걱정됐다. 학원을 보내거나 과외를 시킬 여력이 되지 않았다. 당시 이런 취지의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네가 계속 잘한다면 지원해 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힘들다. 그러니 네 길은 스스로 뚫는다는 각오로 해라.’ “그 말이 부담이 됐는지 성적이 계속 떨어지는 기라예. 지금 와서 생각하니 미안하지예.”


원본보기경남 거제에 있는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의 전경. 8일 산업은행은 대우조선해양 매각을 확정했다(왼쪽 사진). 지난 5일 새벽 경남 거제시 옥포동의 한 인력사무소 앞을 서성이는 노동자들. 7명의 남성이 오전 6시부터 한 시간여 동안 대기했지만 단 한 사람만 철거업체로 일하러 갈 수 있었다. 15년간 설비·인테리어 일용직으로 일해온 한 남성은 “지난 세 달 간 딱 하루 일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상훈 선임기자

■ 스스로 생을 마감한 동료들

2015년 즈음부터 한국의 대형조선사들에 큰 위기가 닥쳤다. 일단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선박 수주량이 급감했다. 중소조선사들은 이때부터 휘청거렸고 도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등의 빅3는 이 상황을 ‘해양플랜트’(해안의 암반에서 석유를 뽑아내는 시설)로 헤쳐 나가려 했다. 이들은 해양플랜트 몸체(헐·hull)를 건조하는 일감을 저가로 따냈다. 2010년대 초반까지도 빅3의 ‘잔치’가 계속된 이유다.

하지만 돌파구로 여겨졌던 해양플랜트로 빅3 조선사는 몇 년 후 거액의 손실을 입게 된다. 해양플랜트의 핵심기술인 설계와 엔지니어링은 외국 업체가 맡았고 수주액의 절반가량을 가져갔다. 경험부족에 따른 제작 차질로 납품이 늦어져 발주사에 돈을 물어줘야 했다. 게다가 대금 대부분은 발주사에 인도하면서 받기 때문에 납품 지연에 따른 손실이 불어났다.

상황이 이쯤 되자 장부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부실이 드러났다. 대우조선해양은 2013년부터 2년간 해마다 4000억원대의 영업이익을 냈다고 공시했지만 이 기간 동안 2조원대 손실을 본 사실을 숨겼다가 뒤늦게 재무제표를 수정했다. 2014년 말 453%였던 부채 비율이 2015년 말 7308%가 됐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대우조선해양은 산업은행의 자회사가 됐는데, ‘주인 없는’ 이 조선사에서 단물을 빨아간 인사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가깝던 정치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국정원 출신 인사들이 달리 하는 일도 없이 ‘고문’이란 직함을 달고 억대의 연봉을 챙겨갔다.

“욕이 절로 나왔죠. 조선소 일이 정말 힘들거든요. 쎄가 빠지게 잔업, 특근해서라도 받는 임금이 연 4000만원 될까 말까인데. 그런 뉴스 나왔을 때 현장은 미치지요.”

2016년 대우조선해양에 공적자금 투입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나오자 여론은 싸늘했다. 포털사이트엔 ‘국민 세금으로 살려줄 필요 없다, 망해야 정신 차린다’ 식의 댓글이 이어졌다. 대중의 손가락질에 대해 그는 “억울하지예, 억울하지예…”라고 반복했다. 그는 구조조정이 단행될 당시 가장 먼저 스러져야 했던 업체(하청업체) 동료들에 대해 얘기했다.

“바다에 빠져 죽은 동생도 있고, 하청업체 폐업 후에 원청 찾아가 퇴직금 받게 해달라고 하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도크장 옆 블록에서 목을 맨 사람도 있고. 이혼한 사람도 많고….”

김씨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구조조정이 진행된 2015년부터 3년간 거제에선 1만명이 넘는 인구가 빠져나갔다. 그가 아는 사람만 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금도 거제의 실업률은 7.1%(지난해 하반기 기준)로 전국 최고를 기록 중이다.

한국 조선사들은 지난해 중국에 빼앗겼던 조선수주 1위 자리를 7년 만에 다시 탈환했다. 중국이 저가로 만든 선박에서 허술한 용접 등의 문제가 나왔고 발주사들은 중국 조선소를 믿지 못했다. LNG선은 물론이고 그나마 만들기 쉽다는 원유운반선조차 한국으로 다시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수주 소식을 들어도 감흥이 없다. “임금 도둑질 당하는 판에, 보람을 못 느끼는데 뭐가 기쁘겠습니까.” 그나마 일자리를 유지해 온 하청업체 노동자들에게 업체들은 기존의 보너스를 일부 깎은 후 나머지를 시급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받는 시급이 24년차인 김씨의 경우 최저시급(8350원)보다 1600원 정도 높은 수준이다.

■ “‘제2의 고향’이라 말하기 싫다”

‘A급’ 용접공으로 20년 넘게 배를 만들어 온 김씨가 보기에 한국 조선업의 강점은 ‘숙련공’에게 있다. 흔히 한국의 제조업을 두고 ‘기술로는 일본에 밀리고, 가격으로는 중국에 밀린다’고 하지만 김씨는 “조선업 기술력은 일본에 전혀 안 밀린다”고 했다.

2013년 6월 인도양을 항해 중이던 배의 선체 가운데가 두 동강이 나,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다. 2008년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에서 만든 8110TEU급(길이 6.1m의 컨테이너를 8110개 실을 수 있다는 뜻) 선박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꼼꼼하거든예. 우리가 만든 배는 튼튼하게, 파손 안 되고 오대양 육대주를 잘 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뿌듯하지예.” 김씨는 중국이 따라올 수 없는 부분도 한국 사람들의 꼼꼼한 기술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청노동자들이 아무리 기량이 있어도 제대로 대우를 해주지 않으니까, 현장에선 30대도 찾아보기 힘들어요. ‘기량자’를 키우지 못하는데 무슨 미래가 있어예.”

그는 청년 시절의 바람대로 거제에 뿌리를 내렸고 두 아이를 착실하게 키웠다. 하지만 그는 거제에 대해 “‘제2의 고향’ 같은 말은 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관 속에 들어갈 때까지도, 아마 나는 거제가 싫었다고 할 끼라예. 차별하는, 불평등의 도시. 그게 거젭니더.”

거제 사람들은 대우조선해양의 매각 소식에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거리 곳곳에 ‘거제지역 몰락한다 매각 중단하라’ 등의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김씨도 매각반대 집회에 열심히 나갔다. 하지만 8일 결국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우조선 인수가 확정됐다. 현대중공업과 산업은행은 ‘고용안정·협력업체 유지’를 약속했지만 김씨는 잠시뿐일 거라 생각한다.

“조선업은 짧은 호황 다음에 긴 불황이 오는데 그때 가만히 있겠습니꺼. 당연히 구조조정할 거고 하청들부터 또 어디론가 사라지겠지예.”

김씨는 현재 대우조선해양이 내다보이는 옥포 해안가에 살고 있다. 원래 펜션 관리를 위해 지어진 주택에 전세로 살게 됐다. 대출을 다 갚지 못한 아파트를 처분하고, 이곳에서 정년까지 남은 시간을 보내려 한다. 그는 대우조선해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품질은 어째어째 자존심 때문에 이끌어왔지만, 저 회사에 절대 마음은 주지 않았어예. 줄 수가 없지예.” 그는 은퇴 뒤 노후엔 아내의 고향인 밀양에서 살겠다고 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며 거제에 왔던 청년. 24년이 흘러 장년이 된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거제를 떠나버릴 생각이다.

◆호황기 태어나 불황기 사회 첫발…자녀들도 ‘남거나, 떠나거나’


원본보기거제여상 재학생들의 댄스스포츠 대회 도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땐뽀걸즈>의 주인공 중 박지현씨(왼쪽)와 김현빈씨가 지난 4일 거제시 고현동의 한 골목에서 마주 보고 서 있다. 이곳은 거제의 번화가지만 한산했다. 거제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너네 아빠 직영이야?”

어릴 적 친구들의 단골 질문

“직영 아니야? 그럼 못 살아?”

|온 가족이 조선소 근무

박씨 태어나기 전엔 어머니도

삼성중공업 하청업체서 근무

지금은 외삼촌 두 명과 언니

그리고 박씨도 하청 노동자

|토박이 청춘들의 미래

“번화가 무색, 사람이 없어요”

거제도를 떠나겠다는 박씨

“경기가 살아나야 할 텐데…”

고향서 자영업 꿈꾸는 김씨

“선생님이 볼 때는 대상감은 아니고 입상만 해도 잘하는 거야. 다른 애들이 얼마나 잘하는 줄 아나 요즘은 실력이….” “와~ 선생님, 제가 다리 하나씩 뽀사버릴게요.”

거제여상 2학년생들의 댄스스포츠 대회 도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땐뽀걸즈>(2017)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선생님이 혹시나 학생들이 상처받을까봐 다독이자 아이들은 발랄하게 응수했다.

조선업의 도시 거제에서 거제여상을 졸업하면 주로 ‘조선소 사무보조’ 일을 하게 된다. 이들의 미래도 거의 그렇게 결정되어 있었다. 부모님 세대와 다른 게 있다면 취업한다 해도 ‘구조조정 1순위’라는 점이다.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면봉을 그을려 속눈썹을 올리고, 담요를 곱게 포개 엎드려 잤다. ‘이제 담배 그만 피우고 싶다’고 하거나, ‘숙취 때문에 힘들다’는 아이들을 땐뽀반(‘땐’스 스‘뽀’츠반) 이규호 선생님은 있는 그대로 보듬는다.

이들의 부모님은 조선소에서 구조조정되거나, 침체된 거제를 떠나 가족과 떨어져 돈을 벌고, 혹은 자녀 앞에 잘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 ‘땐뽀’는 이들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탈출구였다.

이제 고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 ‘땐뽀’ 친구들은 지금도 한달에 한 두번씩은 꼭 만난다. 그럴 때면 입을 모아 “한번만 더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한다고 한다. 지난 연말에는 KBS 드라마로도 방영됐던 <땐뽀걸즈>의 주인공 박지현씨(20)와 김현빈씨(20)를 지난달 28일과 이달 4일 만났다.

■ ‘조선소 가족’의 딸


원본보기거제여상 2학년생들의 댄스스포츠 대회 도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땐뽀걸즈>(2017년)의 장면들. 거제에서 나고 자란 박지현씨와 김현빈씨가 출연했다. 이제 사회인이 된 땐뽀반(‘땐’스 스‘뽀’츠반) 친구들은 요즘도 자주 만나, “딱 한번만 더 무대에 서고 싶다”는 얘기를 나눈다고 한다. KT&G상상마당 제공

“너네 아빠 직영이야?”

박지현씨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친구들로부터 들었던 질문이다. 그는 “‘정~말’ 많이 들었어요”라고 강조했다. 아이들의 질문은 대개 이렇게 이어진다고 한다. “너네 아빠 직영 아니야? 그럼 너네 집 못 사는 거야?”

‘쿨’한 성격의 박씨는 당시 삼성중공업 조선소에 다니는 아버지에게 ‘팩트체크’부터 했다. “아빠 직영이야?” “아냐. 협력업체(하청업체)야.” “그게 뭐야?” “삼성(중공업) 직원은 아닌데 그냥 일하는 거야”. 실망스럽지 않았다. 그는 친구처럼 다정한 아버지가 좋았다.

박씨는 어린 시절 삼성중공업 조선소와 가까운 거제중앙로 인근에서 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부근에서 이사를 자주했다. 처음에는 단칸방에 살다가 방이 두개인 곳에서 사는 식이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그래도 꽤 번듯한 아파트에 입주했다. 한창 유행하던 대기업 브랜드와 유사한 이름을 가진 새 아파트다. 그가 고교를 졸업해 취업한 지금까지도 부모님은 아파트 대출 빚을 갚아가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삼성중공업 하청업체의 경리로 일하다가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스무 살에 첫 딸을 낳은 후엔 시내의 작은 병원에서 일하며 맞벌이를 했다. 그의 큰 외삼촌, 작은 외삼촌 모두 삼성중공업 조선소의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어머니와 그의 오빠, 남동생은 모두 ‘가조도’에서 거제도로 왔다.

아버지 역시 ‘이주민’이다. 경남 산청 사람으로 오랫동안 조선소에서 배의 선체를 만드는 일을 했다. 다만 수년 전에 조선소 일을 그만뒀다. 아버지는 퇴직금으로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큰 화물차를 샀다. 조선소를 벗어났지만 거제에서의 화물업은 조선업 경기와 맞물려 있었다. 거제에서 서울, 부산 등지로 화물을 운반하는 일은 있어도, 거꾸로 거제로 싣고 오는 화물이 없을 때가 많다. 아버지는 거제로의 화물운송 요청이 있을 때까지 부산 등의 외지에 화물차를 대 놓고 며칠이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어중간하게 공부할 거라면, 그냥 거제여상을 가서 조선소 사무보조를 해라.” 거제의 많은 여성 청소년들이 듣는 말이다. 박씨의 부모가 상상할 수 있는 딸의 안정적 미래 역시 ‘조선소’에 있었다. 그의 어머니도, 언니도, 거제여상을 나와 삼성중공업 하청업체의 경리로 일했다.

“나까지 그래야 돼? 나는 절대 조선소 안 갈 거야.” 박씨는 제과·제빵 기술을 배우고 싶어 관련 학과가 있는 특성화고등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단칼에 자르듯” 반대했다. 그렇게 거제여상에 진학해 컴퓨터와 회계를 배웠다. 조선소 사무보조 역할을 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었다. 박씨는 현재 거제 조선소의 한 업체에서 사무보조를 하고 있다. 물론 가족과 외삼촌들처럼 ‘직영’이 아니다. 결국 어머니, 언니, 나아가 아버지, 외삼촌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됐다.

■ 아름다웠던 고향

박지현씨가 삼성중공업 조선소가 가까운 거제시청 부근에 살았다면 친구 김현빈씨는 대우조선해양 조선소와 비교적 가까운 지세포리에서 나고 자랐다. 비교하자면 박씨는 주로 도시를 배경으로 자랐고, 김씨는 거제의 자연 속에서 자란 편이다. 김씨는 자신이 어릴 적 살던 고향을 “어딜 가나 논과 밭, 바다가 따라다녔던 곳”이라고 소개했다. 어린 시절엔 아침 6시쯤 동네 아저씨들이 조선소로 출근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안전화 소리가 진짜 크거든요. 터덕터덕, 터덕터덕…. 안 깰 수가 없어요.”

김씨는 할머니와 살았다. 아버지는 조선소에서 일했지만 집에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김씨가 갓난아이일 때 이혼했다. 아버지가 생활비는 부쳐줬지만 늘 빠듯했다. 초등학교 때는 할머니를 졸라 햄버거를 처음 먹어봤다. ‘불고기버거’를 사달라고 했는데 할머니가 잘못 알아듣고 ‘데리버거’를 사왔다.

어릴 적 김씨는 동네 뒷산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음 좀 예쁘네” 할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름다웠다. 친구들과는 해안가 모래사장에서 시간을 보냈고, 할머니와 싸운 다음에는 마을 산기슭에 올라가 홀로 씩씩대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대문이 잠겨있어 동네를 돌아다니며 할머니를 찾기도 했다. 이웃들은 할머니가 어디 계신지 알려줬다. 동네 사람들이 서로를 챙겨주던 시절이었다.

그의 추억이 담긴 공간은 지금 모두 사라졌다. 모래사장은 한 리조트에서 사들여 산책로로 포장해 버렸다. 뒷산은 사라지고 아파트 단지가 지어졌다. 아파트 공사 당시 흙무더기가 김씨 집으로 밀려들어와 난처했던 적도 있다. 해안가는 관광지가 되어 옛모습을 잃었다. 그와 친한 언니는 해안가에 위치한 ‘거제씨월드’에서 안내업무를 보고 있다. 돌고래 쇼를 하는 곳이다.

그는 일찌감치 ‘어른’이 됐다. 중학생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에 보탰다. 고교시절에도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 뛰었다. 고된 일을 마치고 오면 술이 절로 들어갔다. 다음날 학교에 지각하거나 결석하는 일이 잦았다. ‘출결 불량’임에도 김씨는 컴퓨터·회계에 관한 여러 자격증을 땄고 성적도 좋았다. 친구 박지현씨는 “현빈이가 마음먹고 공부하면 깜짝 놀랄 만큼 잘하는데, 공기업 같은 곳에 못 들어가서 아쉽다”고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땐뽀걸즈>에서는 김씨가 아르바이트 때문에 공연 연습에 자주 빠져, ‘땐뽀반’ 친구들이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김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친구들의 얘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형편상 돈을 벌어야 한다느니 하는 구구절절한 사정을 늘어놓지 않았다. 사실 이날은 현빈씨의 생일이었다. 알고 보니 친구들이 마련한 ‘서프라이즈’ 이벤트였다. 친구들이 들고 온 케이크를 보고 현빈씨는 그제서야 눈물을 흘렸다. “현빈이는 늘 ‘괜찮다’ 하면서 쎈 척해요. 많이 보듬어줘야 해요.” 친구 박씨의 말이다.

■ 호황기에 태어났지만…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의 영업이익, 수주실적 따위의 숫자는 잘 모르지만 거제에서 줄곧 자라온 두 사람은 불황을 온몸으로 느낀다. 박씨는 1년 전에 건강보험공단에서 인턴으로 일한 적이 있다. 이곳에서 거제의 경기침체를 다른 각도에서 확인하는 경험을 했다.

그가 맡은 업무는 ‘건강보험료 자동이체 권유’와 ‘체납액 징수’ 안내. 조선소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업체 폐업 등으로 일자리를 잃으면 직장가입자가 아니라 ‘지역가입자’가 된다. 지역가입자는 스스로 건강보험료를 납부해야 하는데, 실직한 마당에 건보료 납부까지 챙길 여유가 없는 이들이 많았다.

“건강보험공단입니다. 퇴직 후에 지역가입자가 되셨는데요, 자동이체하시면 어떠세요. 그리고 지역가입자가 되신 후 건강보험료 체납액이 있는데…” 여기까지 말해도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징수업무만 오래 했다는 베테랑 직원들조차도 진땀을 빼며 전화를 했다.

박씨는 침체의 늪에 빠져 있는 거제를 떠나고 싶다고 했다. “고현이 서울로 치면 홍대 같은 곳인데 보셨다시피 다니는 사람이 없어요.” 그는 거제 경기가 완전히 가라앉았다는 것을 “거리를 돌아다니기만 해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불황 때문에 사람들의 신경이 매우 곤두서 있다. 그의 월급은 올해 최저시급이 높아지면서 약 10만원 올라 165만원이 됐다. 사람들은 수군댔다. “회사가 안 좋은데 여사원 월급을 왜 올려주노.” 박씨의 친구도 거제의 한 조선소 경리로 취직했다가 ‘사정이 안 좋으니 나올 필요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원본보기거제여상 2학년생들의 댄스스포츠 대회 도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땐뽀걸즈>(2017년)의 장면들. 거제에서 나고 자란 박지현씨와 김현빈씨가 출연했다. 이제 사회인이 된 땐뽀반(‘땐’스 스‘뽀’츠반) 친구들은 요즘도 자주 만나, “딱 한번만 더 무대에 서고 싶다”는 얘기를 나눈다고 한다. KT&G상상마당 제공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던 박씨는 지금은 “20학번이나 21학번을 꿈꾸고 있다”고 했다. 다행히 여상에서 배운 회계업무가 적성에 맞았다. 거제를 떠나 부산에 있는 대학에 가서 경제학이나 회계학 등을 전공할 생각이다. 대학에 간다면 고교시절을 빛나게 해 준 ‘땐뽀’ 관련 동아리에도 들어가고 싶다.

김현빈씨는 박씨와 달리 아직은 거제를 떠날 생각이 없다. 고교시절 성적이 좋았음에도 “사무직에는 잘 안 맞는 성격”이라면서 돈을 모아 자영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다만 이곳의 경기가 언제 살아날지가 문제다. 중학교 시절부터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다른 주민들보다 경기 변화를 빨리 눈치채는 편이다. 김씨는 지금은 ‘땐뽀반’ 이규호 선생님 가족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이 업계에 대해 마스터할 때까지 열심히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매일 오후 2시부터 자정까지 일하는 그는, 직장과의 거리 때문에 떨어져 사는 할머니에게 꼬박꼬박 용돈도 부친다.

두 사람은 고교시절 때처럼 곧잘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불황기의 거제에서 사회인으로 첫발을 디딘 그들의 삶은 녹록지만은 않다.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을 뿐이다. 박지현씨는 아버지가 “이제 쉰살이야”라며 우울해할 때면 이렇게 말해 준다고 한다. “괜찮아, 염색하면 티 안 나.” 이들은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는 감각이 있었다.

“거제요? 저한테는 가족이죠.” 김현빈씨의 말이다. 늘 잘됐으면 하고 ‘응원’하고 싶은 공간. 학교가 아닌 거제에서의 ‘땐뽀걸즈’ 성장기는 어쩌면 지금부터 진짜 시작이다.

거제 |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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