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1

08 김애영 남북교류에 있어서의 종교의 역할과 전망 -기독교를 중심으로-



615유럽공동위 / 615europe.de

남북교류에 있어서의 종교의 역할과 전망 -기독교를 중심으로-
2008년 05월 17일

김애영 (한신대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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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는 말



이 논문은 남북교류의 그 어느 분야보다 더 길고 복잡한 종교분야를 다룬다. 특히 북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시기에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당시의 북쪽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비타협적 태도로 초래된 종교박해와 6.25전쟁 혹은 한국전쟁 동안에 벌어진 비극적 경험들로 인하여, 대다수의 종교들, 특히 기독교는 북을 버리고 남을 선택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오랫동안 자본주의에 세계에 안주하여 왔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세계를 대표하는 미국과 복음을 거의 동일시하는데서 오는 친미 반공 세력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 기독교는 통일논의가 오랫동안 남쪽에서 금기시되거나 당국의 독점물로 여겨지던 상황에서 분단을 뛰어넘어 북과의 대화의 장을 열어젖힘으로써 오늘의 전면적 남북교류와 협력의 시대를 마련하는데 있어서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 물론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들과 사회주의 국가인 북과의 적대적 관계가 해소되기 시작하여 남과 북, 북과 남의 종교교류가 가능하게 된 것은 미ㆍ소 양대 진영으로 분단된 세계적 냉전체제의 해소가 크게 작용하였다. 1972년 닉슨 미 대통령의 중국과의 수교로 시작된 세계적 데땅뜨의 흐름에 부응하여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되었고, 동구권의 변화라는 신 데당뜨의 흐름에 부응하여 1991년에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마침내 2000년에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을 공표하기 이르렀으니, 이를 단순히 세계구도에 종속된 사건으로만 간주할 수 없는 바, 온 겨레의 통일염원이 응집된 결과이리라. 이 글은 이러한 맥락에서 분단장벽을 허물고 남북교류, 협력, 화해에 이르기까지 온 힘을 다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종교분야의 측면을 조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지향해야 할 남북교류의 내용과 전망에 대한 모색을 다루려고 한다. 시간과 지면상의 한계로 인하여 남북교류에 관여한 모든 종교들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지 못하지만, 대체로 분단을 깨뜨리고 통일을 이루고자 염원했던 선구적 해외동포 기독자들의 노력이 통일의 길을 열어젖혔듯이, 불교나 가톨릭과 같은 다른 종교들도 대체로 해외에서 북과의 접촉을 통해 남북교류 혹은 통일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 파문에서부터 대화에로 1)

이 논문은 한신대학교 학술원이 남북교류와 학문이라는 대주제로 2005년 11월 24일 한신대 60주년기념관에서 개최한 제4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이다. 2007년 6월14일-17일 평양에서 개최된 6.15공동선언 발표7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필자가 앞으로 획기적으로 전개될 남북교류화해 물결에 있어서 우리 여신협 회원들의 보다 적극적인 교류화해 활동을 기대하며 이 글을 여성신학지에 소개한다. 2007년 8.15 남북공동행사는 부산에서 개최하기로 남북 합의하였다.



1) 대결과 파문의 양상



일제 식민 지배를 극복하기 위한 노선과 항일투쟁방식을 놓고 벌어진 바, 국내외에서의 좌우대결은, 좌우연합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미ㆍ소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냉전대결시대의 세계분단 구도와 연동ㆍ강화되어 8.15 광복을 맞이하자마자 민족분단으로 이어졌다. 분단된 남과 북, 북과 남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체제경쟁의 최전선과 쇼 윈도우로 내몰리면서 극심한 상호비방과 대결을 오랫동안 벌여왔다.

남의 대표적인 한국교회사가들 중의 한사람인 민경배 교수는 그의 대표저작 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기독교회사』에서 8.15 광복직후의 상황을 다루는 부분에서, 그는 당시의 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언급보다는 북의 사회주의국가 건설 초기부터 공산당에 의해 교회가 어떠한 수난과 박해를 당하게 되었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반면에 그는 남쪽에서의 교회 재건시기에 미군의 진주로 남쪽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고 서술함으로써 극단적인 냉전적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6.25전쟁 혹은 한국전쟁 당시에 북측에 의한 남쪽 교회의 파손, 손실, 비극, 배덕의 적색 전직 목사나 교인의 행패 등등을 언급하는데서 잘 드러나 있다. 2) 대체로 남측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민경배 교수의 저러한 견해들과 거의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김흥수와 류대영의 『북한 종교의 새로운 이해』는 이에 대하여 남측에서 나온 북측관련 역사서는 거의 예외 없이 북 정권에 의한 박해를 강조하는데, 이는 특히 기독교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3)

8.15 해방부터 6.25 전쟁시기에 이르는 북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시기에 북의 사회주의 혁명 지도자들은 다른 어떤 비사회주의 세력보다 견제세력이었던 천도교와 개신교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러나 종교인들 특히 개신교인들과 사회주의자들 간의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들 중의 하나가 종교단체와 종교인들의 부르주아적 성격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북 사회주의 정권과 종교인들과의 충돌에 있어서 토지개혁으로 인해 천도교를 제외한 종교단체의 경제적 기반의 붕괴가 그 원인이었는데, 토지개혁에 의한 피해를 입은 것은 교회나 사찰이 아닌 땅을 가진 교인들이었다. 개신교와 달리 빈농 등 농민층을 기반으로 하였던 천도교는 토지개혁 등의 반제반봉건 조치들을 거치면서 교세가 오히려 크게 향상되었으며, 사회주의화에 정면으로 맞선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은 토지개혁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4)




1) 프랑스 공산당 이론가였던 로저 가로디(Roger Garaudy)는 1950년대에 크리스천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과의 대화를 제창하였고 이를 그의 유명한 책,『파문에서부터 대화에로』(From Anathema to Dialogue)를 출판하였다. Roger Garaudy, De l'anathema au diálogue (Paris: Plon,1955), trans., Luke O'Neil, From Anathema to Dialogue (New York: Herder & Herder, 1966). 이 항목에서의 나의 제목은 로저 가로디의 저 책 제목에서 따왔다.



2)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개정판;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452-464.

3)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정태혁(불교), 민경배(기독교), 최석우(가톨릭), 표영삼(천도교)김양선(기독교)의 문서들이 제시 되었다. 김흥수ㆍ류대영, 『북한 종교의 새로운 이해』(서울: 다신글방, 2002), 38.

4) 김흥수ㆍ류대영, Ibid., 56-76.; 북에서는 1946년 3월 5일 ‘토지개혁령’이 공포되어 ‘몰수




1989년 한국 가톨릭이 제44차 성체세계대회의 행사로 개최한 심포지움에서 조광 교수는 해방 공간에 처한 (가톨릭)교회의 자세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에 의하면, 러시아 혁명 이래로 교회는 본격적으로 반공주의의 입장을 천명해 왔는데, 비오 11세, 12세등 역대 교황들의 칙서를 통해 강조되고 있었고, 세계 도처에서 교회가 공산주의 탄압을 받던 과정에서 반공의 정당성이 검증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된 일제의 방공정책(倣共政策)과 해방직후의 소련군과 종교에 대한 공산주의의 태도로 인하여 갖게 된 공산주의에 대한 교회의 적대적 태도를 언급한다. 그에 의하면, 1945년 8월15일 서울에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소문을 듣고 당시 가톨릭 서울 교구 당국이 소련군을 환영하기로 결정하고 기다리다 돌아왔다는 것이다. 소련군이 점령한 북의 교회는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점령군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제약을 받았으나, 미군이 점령한 남측은 일정한 보호 하에서 친미 반공 노선을 걷게 되는 과정을 통해 교회는 미ㆍ소의 세계전략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결여 혹은 상실했다고 진단한다. 5) 조광 교수는 분단체제 성립에 끼친 남측 교회의 영향력을 언급하면서 당시 교회가 추구했던 정치적 방향을 1) 반소ㆍ친미의 방향, 2) UN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지지, 3)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지지, 4) 반공 정신 무장의 강화로 요약하고 있다. 6)

여기서 우리는 앞으로 논의하게 될 남북 종교교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북측 상대방인 조선기독교도련맹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식민지배가 끝나자 해방공간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북의 가장 막강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기독교 지도자들은 9월부터 사회주의 기류에 반발하면서 11월에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여한 ‘조선 민주당’을 결성하였다. 공산 정권 수립에 반발하고 있던 장로교의 ‘이북5도 연합노회’가 주축이 되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실시하는 선거일이 일요일로 정해지자 이들은 성수주일 준수를 내세워 북측 당국에 5개항의 결의문을 전달하며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은 강량욱 목사였는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인 김일성에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여 김 위원장이 이들 주도자들에 대한 설득을 시도했으나 이들의 선거 반대 움직임을 되돌릴 수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측 당국은 친정부적 교회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선거 직후 1946년 11월에 ‘북조선기독교도련맹’을 결성하게 되었는데, 이는 오늘의 ‘조선기독교도련맹’의 전신이다. 7) 북 사회주의 국가 건설 과정에서 북 정권과 가톨




된 토지는 모두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자, 국가 반역자, 지주, 사원, 교회 그 밖의 종교단체의 소유지를 포함하여 100만 325 헥타르가 몰수되어, 땅 없는 농민에게 분배되었다. 하야시 다께히꼬, 『남ㆍ북한 현대사』(서울: 삼민사, 1989), 38.

5) 제44차 세계성체대회 기념심포지움에서 발표된 글, 조광, “분단의 역사와 한국교회,” 세계평화와 한반도 평화문화분과위원회편,『세계평화와 한반도평화』(서울:일신기획,1990),106-109.; 1931년 교황 비오11세의 교시는 사회주의의 유물론적 무신론을 견제하려 했으나, 교황은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승인하였고, 온건한 사회주의의 방향을 가리켰다고 한다. 그러나 1948년 비오 12세는 공산주의를 정죄했고,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상호접근을 저지했다. 그러나 1974년에 발표된 요한 23세의 Pacem in terris (땅 위에서의 평화)라는 유명한 교서는 기독교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상호접근을 위한 계기를 열어놓았다. 박순경,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이론과 현실,” 박순경, 『하나님 나라와 민족의 미래』(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1984), 483 참조.

6) 조광, Ibid., 109-110.

7) 김흥수,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결성 과정과 활동,” 강위조ㆍ홍근수 엮음, 『민족 통일의




릭과의 갈등에 있어서 대표적인 사례가 1947년 5월 함흥 ‘덕원 수도원 몰수사건’이 있다. 이 사건 역시 인민위원회 선거를 반대하는 삐라를 저 수도원 인쇄소에서 제작하였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당시 북의 가톨릭은 개신교와 달리 끝까지 친공적 조직을 만들지 않았으나 강량욱 목사가 평양교구장 홍 주교에게 북조선기독교도련맹 가입을 거듭 요청하자 이를 거절하였고 평양교구 신자들에게 련맹 가입을 금지시켜 버렸다.8)

강정구 교수에 의하면, 통속적으로 우리는 북측이 종교일반에 대한 탄압을 했기 때문에 많은 종교인들이 월남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종교 일반을 단순히 기독교와 동일시하는 중대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해방 당시 북한지역 종교 신자들에 관한 한 추계에 의하면, 개신교 약 2.2%, 가톨릭 약 0.6%를 차지하였다. 강 교수는 종교인 가운데 종교적 이유로 월남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개신교 및 가톨릭에 국한되고 당시 북한 지역 종교인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천도교나 불교는 극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북에서 해방공간중 이들 종교 일반에 대한 탄압은 거의 전무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에서의 친미적 성향, 장로들의 지주적 계급위치, 미국선교사의 영향 등으로 인한 반민족 또는 비민주적 사상과 행위, 사대주의, 종교단체의 소유재산에 대한 재분배정책에 대한 반기, 일제치하의 친일행위나 반민중성 등으로 인해 탄압받을 수 없었던 집단이나 개인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추정하면서 강 교수는 이를 종교탄압이라기 보다는 특정 종교의 특성으로 인한 탄압으로 간주한다. 즉 외형적으로는 종교인에 대한 탄압으로 나타났지만 실제로는 종교 일반에 대한 탄압이 아닌 반혁명적, 반민족행위에 대한 탄압으로서, 이는 북의 내적 논리에 따른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9) 북의 구헌법 제54조에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 로 규정되어 있으나, 반면에 1992년 4월 신헌법 제68조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를 해치는 데 이용할 수 없다” 라는 사실을 들어 강 교수는 북이 해방공간이나 한국전쟁시의 기독교도들에 의한 반민족적ㆍ반민중적 행위의 재발에 대한 경계를 여전히 늦추지 않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10)






비전: 통일의 선구자 선우학원 박사 팔순 기념문집』(서울: 푸른기획, 1997), 314-319.; 특히 해외에서 개최된 통일의 논의들에 자비를 들여 참가하고 그때마다 발표된 자료들을 출판하는 일에 헌신한 도서출판 형상사 대표 김석주 사장은, 현재 미국에서 교회사 분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는데, 그가 편집한 작은 책자,『북한교회의 목사들은 무엇을 어떻게 설교할까?』(서울: 형상사, 1990)에 “북한교회 공식방문기”와 “남북한교회 공식상봉기”에 대해 약술한 (7-26) 김석주, “교회도 하나 나라도 하나,” 16-19를 보라. 오늘에 이르면 ‘조선기독교도련맹’은 그 명칭을 ‘조선그리스도교련맹’으로 사용하고 있다.

8) 김흥수ㆍ류대영, Op.cit., 81.

9) 강정구, “해방후 월남인의 월남동기와 계급성에 관한 연구,” 강정구,『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서울: 역사비평사, 1996), 284.; 연규홍 교수는 1978년 미국 정부가 공개한 6.25 전쟁 당시의 북한군 노획문서에 나타난 바, 1946년과 47년 반동으로 지목된 두 기독교인들의 재판기록의 분석을 통해, 북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시기에 일어나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원인이 단순히 종교에 대한 공산주의의 박해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사회경제적 물적 토대와 계급성으로 인한 충돌이었음을 논증하였다. 연규홍, “해방 후 북한 사회 건설과 교회 박해: 1945-1948,” 『신학사상』제114호(2001.가을): 233-251.

10) 강정구, Ibid., 284-285.






분열된 남북 각각의 정부가 탄생된 1948년은 미ㆍ소 냉전이 더욱 격화된 해였으니, 우리의 민족분단은 격화된 동서 냉전의 부산물이다. 이러한 국제적인 냉전시대의 최전선이 남과 북 사이에 형성되어 우리 민족사이의 상호불신과 적대감이 고조되어 급기야 6.25 혹은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3년 1개월에 걸친 이 전쟁은 핵무기를 제외한 모든 중화기, 근대 병기가 투입되어 새로 개발된 무기의 실험을 위한 물량(物糧) 전쟁의 성격을 지녔다.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인들은 소련과 중국이 세계 정복의 교의를 지니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를 입수했다고 생각했다면, 또한 이때부터 공산주의 세력에게는 미 제국주의야말로 불구대천의 적으로 각인되었다.11) 한국전쟁의 발발과 경험은 남측 교회로 하여금 반공의 정당성을 극도로 강화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교회는 한국전쟁을 ‘반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전쟁’ ‘무신론 폭군에 대한 신앙자유 수호의 십자군전쟁’으로 규정했다.12) 1953년에 김인서 목사가 “평양에는 언제 들어갑니까?”라는 글에서 “...북진할 기회는 왔다”라고 주장한 것이나, 1953년 6월 개최된 바 서울 기독교인들의 북진통일기원대회는 그 시기의 남한 통일정책이라 할 수 있는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13)



2) 변화의 조짐들



항일민족운동에 대한 관심과, 1944년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난 경험, 좌익 민족 운동가들의 무신론의 문제를 안고 기독교 신학에 몰두하였던 박순경 교수는 이미 1943년 경 부터 기독교와 공산주의 문제를 자신의 과제로 지니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박 교수는 신학수련, 학문연구와 교수직 수행으로 인해 오랫동안 보류해두었던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문제를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자 이를 자신의 주요 신학적 과제로 삼고 통일신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 오고 있다.14) 박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서구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비판, 양자의 상호 접근의 시도를 다루고, 한국 기독교와 공산주의 관계를 논한다. 당시 박 교수는 사용할 만한 자료들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북 정권에 의한 종교박해를 강조하는 자료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박 교수는 북의 종교비판이 마르크스에 의거한 것이었으나, 1960년대 주체사상의 등장과 더불어 종교에 대한 북의 입장이 변화하고 있다는 단서를 포착하고 있었다. 이는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대결을 넘어서서 상호 접근해야 한다는 박 교수 자신의 신념에 의거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라고 여겨진다.15)

1960년대에 출판된 『김일성선집』(총6권)과 『김일성저작선집』(1-4권)을 정독한 사와 마사히코(澤正彦) 목사에 의하면 김일성 주석은 마르크스나 레닌과는 달리 종교나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판은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16) 사와 목사는 『김일성선집』만을 놓고 본






11)하야시 다께히꼬, Op.cit., 65-67.

12) 조광, Op.cit., 111-112.

13) 김애영, “우상들의 동요와 민족통일,” 김애영,『한국 여성신학의 지평』(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4), 14.

14) 박순경, “이화여대 은퇴강연: 회고와 전망,” 박순경,『통일신학의 고통과 승리』(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2), 15-26.

15) 박순경,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이론과 현실,” 박순경, Op.cit., 457-497.; 이외에도 1986년에 발표한 박순경, “현대 신학과 한국 기독교 사상의 이데올로기 비판, ” 박순경,『통일신학의 여정』(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2), 203-240 를 참조하라.






다면 기독교 자체를 아편으로 비판한 곳은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17) 1988년에 출판된 『주체사상입문』에서 고림은 “민주, 통일운동에 일떠선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기초로 되는 현대신학을 단순히 민중의 아편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종교에 대한 낡은 고정관념에 포로된 사람들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올바른 평가에 기초해서 그들과의 연대활동을 강조했다.18) 이러한 언급들은 1960년대에 ‘김일성 주체사상’이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1960년대 후반부터는 종교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철학논쟁이 사라져 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올바로 이해된다.19) 그러나 반공주의적 시각을 가진 남쪽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자료들은 종교의 비과학성과 봉건적 성격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북의 문서자료들, 월남한 사람들에 의한 종교탄압에 대한 증언 자료들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저 문서자료들이란 김일성 어록이나 저작집에 포함된 종교 혹은 종교인에 대한 비판적 발언들, 1990년대 이전의『현대조선말사전』,『철학사전』등에 나온 종교에 관한 항목들,『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여야 하는가?』등의 반종교적 선전문서들이다.20)

1969년 괌 독트린을 시작으로 하여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의 축소를 천명한 닉슨 독트린은 1972년 미ㆍ중 수교를 통해 데탕트 시대를 개막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러한 세계의 새로운 물결이 하나의 자극이 되어 1972년 남북은 역사적인 7ㆍ4 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21) 홍동근 목사에 의하면, 북과 해외통일대화라는 모험은 “통일의 신령을 받은 몇 사람 기독자들의 믿음에서 시작”되었다.22) 그 선구자들 중의 한 사람인 이영빈 목사에 의하면, 1969년 말 자신이 독일 뮌헨대학 교목으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 제3세계에서 온 학생들로부터 북의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데에서 북의 새로운 측면을 알게 되었다는 개인적 경험을 말하고 있으며, 1972년 11월 8일 동서독간의 ‘기본조약’ 체결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이 당시 동포 기독자들과 소수의 목사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이들은 1977년 유럽, 미주 그리고 캐나다에 거주하는 동포 기독자들과 신학자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고, 1978년 ‘해외 그리스도인 유지 일동’ 29명의 이름으로 “조선인민공화국에 계시는 기독자 여러분” 앞으로 편지를 보내기에 이르렀다.23)




16) 사와 마사히코,『남북한기독교사론』김숙자ㆍ강문규 역 (서울: 민중사, 1997), 184.; 김흥수ㆍ류대영, Op.cit.,, 39참조.

17) 선우학원ㆍ홍동근『주체사상과 기독교』(n.p.:북미주체사상연구회,1990), 220.

18) 홍동근,『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북과 해외동포ㆍ기독자간의 통일대화 10년의 회고』(서울: 형상사, 1994), 81-82.

19)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적대관계와 대립은 공산주의가 태동했던 19세기 유럽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20세기 들어서서 러시아 볼쉐비키 혁명과 공산화과정에서 격화되었고, 2차세계대전 이후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정점으로 한 동구권, 중국등의 사회주의 국가건설이 이루어지고 소련에서의 악화된 기독교와 공산주의 관계가 그 원인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종교에 대해 얼마만큼 적대적이며 본질적으로 반종교적인가 하는 것은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20) 종교에 대한 북의 입장이 주체사상의 등장이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를 위해서 김흥수ㆍ류대영,『북한 종교의 새로운 이해』, 37-38, 108-114 참조하라.

21) 우리의 통일에 있어서 역사적 이정표로 여겨지는 7ㆍ4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에 대하여, 김애영, Op.cit., 21-22를 보라.

22) 홍동근, Op.cit., 26.

23) 이영빈ㆍ김순환,『경계선』(서울: 신앙과 지성사, 2005), 253-264.; 이영빈 목사와 그의 부인 김순환선생은 수많은 경계를 넘나들은 자신들의 삶의 역정을 표현하기 위해 경계를 넘






재미 정치학자 김종익 교수는 영어로 저술된 것 중에서 해리슨 솔즈베리(Harrison Salisbury)의 『북경을 넘어』라는 책을 북 방문에 대한 가장 균형 잡힌 책으로 간주한다. H. 솔즈베리는 1972년 비 공산권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한국전쟁이후 방북한 인물인데, 그 책의 마지막에 당시 김 주석과의 만남에서 김 주석이 미국과의 소규모 교류를 시작할 시기가 왔다는 것을 토로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또한 1980년 7월 방북하여 김 주석과 만난 미국의 솔라즈 의원도 김 주석이 미국과의 문화, 학자 및 기타 교류를 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24)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해외 동포 기독교인들과 학자들에 의한 통일에의 선구적 행동들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은 1970년대 초 세계적 냉전의 해빙기를 맞아 김 주석이 표명한 서방과의 교류의지가 작용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한종교의 새로운 이해』의 필자들에 의하면, 1970년대 들어서서 북은 서구 자본주의 세계와의 교류를 강화하려했는데, 이때 국제적 기독교 단체들이 이러한 교류에 있어서 매우 좋은 수단임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고 기술하고 있다. 때마침 북에 고향을 둔 해외 한국인들 가운데 통일운동에 헌신하는 인사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25)

조선기독교도련맹,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에 더하여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가 1972년에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1972년 조선기독교도련맹 안에 평양 신학교를 다시 개원하여 목회자 양성을 시작하였고, 1970년대 후반부터 조기련은 교세파악에 나선 것 같으며, 1985년 WCC 대표단이 방북했을 때 1만명의 개신교 신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26)

1960년대에 남측 기독교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남측 교회의 흐름은 여전히 강력한 반공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1970년대에 약간의 변화를 보이지만 애매모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3) 분단을 뛰어넘어 대화와 교류에로 나아가기



홍동근 목사가 정리한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북과 해외동포ㆍ기독자간의 통일대화 10년의 회고』에 의하면, 1975년 선우학원 박사와 그의 부인이 그 어느 누구보다 앞서서 ‘분단의 장벽을 뚫고 북의 조국을 방문’하였다.27) 이를 시작으로 하여 북부 조국을 찾는 해외 동포, 특히 기독교인들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28) 이미 언급했듯이 1978년 ‘해외 그리스도인 유지 일동’의 이름으로 “조선인민공화국에 계시는 기독자 여러분” 앞으로 편지를 보내어 1981년 6월 첫 번째 평양방문을 통해 독일의 이화선 목사, 이영빈 목사와 그의 아내 김순환 선생이 통일대화를 가졌다. 이렇게 통일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북과 해외동포 사이의 대화는 1981년 11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북과 해외동포ㆍ기독자간의 대화”라는 명칭 하에서 처음으로 개최되기 시작하여, 핀란드 헬싱키, 평양, 중국 베이징, 오스트리아 비엔나




나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Grenzgänger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나 국내 출판과정에서 책 제목이 『경계선』으로 잘못 인쇄된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24) 김종익, “긴 여행: ‘금기의 땅’을 가다,” 양성철ㆍ박한식 편저,『북한기행: 재미한국인학자 9인이 본 80년대 북한』(서울: 도서출판 한울, 1986), 20-21.

25) 김흥수ㆍ류대영, Op.cit.,125.

26) 김흥수ㆍ류대영, Ibid.,123-129.

27) 홍동근,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28.

28) 이를 위하여, 양은식 편저,『분단을 뛰어넘어: 북한방문기』(np.: 고려연구소, 1984); 홍동근, 『북한방문기: 미완의 귀향일기』(np.: 통일신학연구소, 1988)를 보라.




를 거쳐, 199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제10회 통일대회에 이르기 까지 이어졌다.29) 김일성 주석의 부친인 김형직 선생의 후배요, 북의 부주석에 이른 강량욱 목사의 친구이며, 숭실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고, 당시 조국통일촉진회의 회장이며 미국한인교회연합회의 고문인 김성락 목사는 선우학원박사의 권유로 1981년 8월에 처음 북을 방문하였고, 그 다음 해 10월 북을 방문하여 대한성서공회가 발행한 성경 200권과 로스앤젤리스에서 편찬한 찬송가 100권을 조선기독교도련맹에 전달하였다.30)

여기서 우리는 남측 인사, 특히 기독교계 인사들이 분단의 장벽을 뛰어 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가에 관한 한 사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홍동근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 군사독재에 항거했던 김재준 목사는 1975년 일본의 잡지 『세계』에 기고한 “한국교회는 왜 투쟁하는가?” 라는 글의 결론에서, 북의 주체적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와 남에서의 민주적 사회주의 사회건설에의 결단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말했다고 한다. 김재준 목사는 1979년 선우학원 박사와 함께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하고 통일을 위한 대화를 위해 제네바에 있는 북조선대사관에서 북의 고위지도자와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김재준 목사는 여기서 멈추었는데, 북의 조국을 방문하거나 북과 해외동포기독자들과의 통일대화를 여는 역사적 사건으로 더 나아지 못하였으니, 홍동근 목사는 이를 '슬픈 좌절'이라고 표현했다.31) 1970년대 세계적인 해빙무드에 편승해서 시작된 남북의 접촉과 대화가 오늘의 대규모적 남북교류로 가시화 되기 까지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김재준 목사의 북행길을 주선한 선우학원박사를 비롯한 해외동포 통일운동가들과 김재준 목사와의 연계가 끊어진 것은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에 항거하여 국외로 나간 김재준 목사의 귀국과 국내활동에 큰 제약이 될 것을 염려한 김 목사의 친지들의 강력한 만류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김재준 목사의 북행길을 좌절시킨 사람들이 비교적 진보적 기독교인들에 속하였지만, 그들 역시 분단의 장벽을 일찌감치 뛰어넘어 오늘의 남북교류의 길을 여는데 있어서 선구자적 업적을 쌓은 해외동포 통일운동가들과 학자들을 친북세력으로 낙인찍고 적대시했던 동포사회의 냉전 이데올




29) 이를 위하여, 이영빈ㆍ김순환,『경계선』, 264 이하, 홍동근,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26을 보라. 홍동근 목사는 이들이 북에 편지를 보낸 것을 1979년 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 일을 주도한 이영빈ㆍ김순환 부부는 저 책에서 197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30) 홍동근,『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28, 116.; 김흥수ㆍ류대영, Op.cit., 158.; 김석주, “교회도 하나 나라도 하나,”『북한교회의 목사들은 무엇을 어떻게 설교할까?』, 9 참조.; 류성민 교수는 1970년대 말까지 남측에서 연구된 북측 종교연구가 매우 적었으나 1980년대 들어서서 증가되기 시작한 두 가지 요인들을 언급한다. 첫 번째 요인이란, 1970년대 초반까지 ‘반종교정책’을 시행해온 북측이 1980년대 들어서서 종교단체들의 급격한 활동의 증가라는 북의 종교정책의 변화이다. 두 번째 요인이란, 남측의 대북정책의 변화로서, 7.4 공동성명이후 중단되었던 남북교류가 1980년 남북총리회담 추진, 적십자회담의 재개, 남북체육회담, 남북 국회회담 등으로 이어진 남북접촉이 남북 이산가족의 고향방문과 예술 공연단 상호방문의 성사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남측 정책의 변화라기보다는 남북 쌍방의 정책변화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또한 류 교수는 이런 연장선상에서 1981년 김성락 목사의 방북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는데, 이런 해석은 통일을 위해 애쓴 선구적 해외 기독자들의 노고를 남측 정부의 대북정책에 종속시키는 결과로 귀결되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북한 연구학회가 엮고, 도서출판 한울이 1999년에 펴낸 『분단 반세기 북한 연구사』에 실린 류성민의 글 “제 9장 북한종교 연구,” 429-430 참조.

31) 홍동근, Ibid., 27-28.




로기적 사고에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살벌한 박 정권 시절보다 훨씬 완화되었다 해도 노태우 정권시절 국가보안법이란 실정법을 어기고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는 분단을 뛰어넘어 김일성 주석과 포옹을 하고 통일논의를 결행함으로써 문 목사는 국제적인 탈냉전 시대에 여전히 냉전적 반북ㆍ반공 이데올로기에 젖어있던 우리 사회, 특히 기독교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고, 오늘의 통일 대장정을 열어젖힌 주요 인물들 중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32)

1970년대 말까지 남측 기독교는 통일문제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어떤 태도 표명이나 논의를 않고 있었다. 세계분단ㆍ민족분단 체제를 빌미로 삼은 역대 정권들에 의한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중단 없는 통일 열망을 이어온 혁신계 인사들과 학생들의 통일운동에 빚지지 않은 남측의 통일운동은 생각할 수 없다. 특히 광주항쟁에서 폭발한 민중저항을 진압하고 집권한 전두환 군사정권하에서 전개된 1980년대의 사회변혁운동, 학생 운동권의 통일운동은 기독교로 하여금 더 이상 통일논의를 미룰 수 없게 만들었다. 1981년 6월 서울에서 모인 한독교회협의회를 계기로 세계교회협의회(이하 WCC) 국제문제위원회가 1984년 일본 도잔소 모임이라는 형식을 빌려 이 모임에 초청된 북의 조선기독교도련맹과 남측 기독교인들이 만나게 되었다. 남측은 이 모임을 한국교회의 통일문제 논의의 공식적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김형태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관심하는 해외 교회들의 움직임에, 미ㆍ중공 관계 개선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 자유국에 거주하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중국방문과 북한 방문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KNCC) 인사들이 주목했다” 는 것이며, “북한이 이 기회를 최대로 이용하고 있는데...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이 현상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연구하고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1981년부터 1983년 까지 북이 이른바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간의 대화”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 “이 모임이 북한의 공산당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면서 “이와 같이 해외교포들의 산발적인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보다 적극적인 능동적 태도로” 대처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33)

비교적 진보적으로 간주된 남측 주도적 교계인사들은 저 북과 해외동포들 사이의 비엔나에서부터 프랑크푸르트까지의 대화를 친북모임으로 간주하면서도 통일의 주도권을 놓칠 수 없다는 일종의 경쟁심을 발동하여 WCC를 비롯한 서구 국제적 기독교 단체들을 활용하면서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하였다. 1984년 도잔소 회의 이후 WCC 직원의 북측 방문, 미국 NCC의 남북 동시 방문, 스위스 글리온에서의 남북 기독교 대표의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졌었며, 일본,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의 교회들에 의한 남북 동시방문 이어졌다. KNCC는 1981년 KNCC 산하의 통일문제 연구원 운영위원회의 조직, 1985년 이래로 수차례에 걸쳐 진행된 협의회를 통하여 1988년 KNCC 제37차 총회에서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 선언” (2.29 선언)의 채택을 통해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포괄적 입장을 표명하였으며, 1988년 세계기독교 한반도 평화를 위한 여성협의회를 개최하였고, 1988년의 KNCC






32)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ㆍ민주화운동청년연합 편,『나는 왜 평양에 갔나: 문익환 목사 공판 기록』(서울: 나눔기획, 1989); 문익환,『걸어서라도 갈테야』(서울: 실천문학사, 1990); 문익환『문익환 목사 북한방문기』(서울: 삼민사, 1990); 문익환, “가슴으로 만난 평양,” 한승원선생 화갑기념문집간행위원회 편,『분단시대의 피고인들』(서울: 범우사,1994), 573-609.; 박순경, “문익환 목사의 평양행의 의의,” 박순경,『통일신학의 여정』, 189-194를 보라.

33) 김형태,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교회의 역할,” 『기독교사상』, 1985년 6월호, 31-32; 김애영, “민족통일과 기독교”, 김애영,『한국 여성신학의 지평』,43-44.




2.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1995년 희년 선포와 평화통일희년 운동을 전개하였다.34) KNCC 주도의 통일운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남측 기독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 우익 기독교 세력들은, KNCC에 소속된 교단일지라도 특히 본래의 희년사상이 지닌 사회 변혁적 급진성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평화통일희년 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35) 그러나 보수 기독교 세력들은 사회주의권 붕괴에 편승하여 소위 ‘북한 선교’ 를 목표로 하는 바 조선 그리스도교련맹과의 접촉‧교류를 경쟁적으로 시도하는 모순된 양태를 보이고 있다.

나는 이미 1988년에 발표한 “우상들의 동요와 민족통일”이라는 논문에서, 남측 기독교의 견고한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우상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당시 남측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통일운동의 봇물에 의해 그 우상이 어떻게 흔들리게 되었는가를 다루었다.36) 홍근수 목사는 1988년 2월 29일에 발표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기독교회 선언’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 주목하고 있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주’(골1:20)이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인간구원과 해방을 위한 선교사역이 우리와 이념과 체제가 다른 사회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는다. 다른 사회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신앙고백의 형태와 교회의 모습이 비록 우리와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는...(중략)...세계 에큐메니컬 공동체는 최근 몇 년간, 놀랍게도 우리와 떨어져 있던 북한 사회내의 신앙의 형제 자매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소식을 알려 옴으로써...” 홍근수 목사는 저 NCC 선




34) 이를 위하여, 형상사 편집부, 『교회도 하나 나라도 하나』(서울: 형상사, 1989).; 한국기독교협의회 통일위원회편,『남북교회의 만남과 평화통일신학: 기독교 통일운동자료 및 평화통일 신학논문 모음집』(서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90).;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가 펴낸 자료집, 『세계기독교 한반도평화를 위한 여성협의회 보고서』를 참조하라.; 연규홍, “한국교회의 민족통일 운동과 평화문제: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의 선언(1988)을 중심으로,” 한신신학연구소, 『신학연구』41집 (2000):425-443; 김애영,『한국 여성신학의 지평』 특히 “제1부 통일희년운동과 여성신학” 부분을 보라.; 1988년 7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주체사상과 조국통일에 관한 북과 해외동포학자사이의 대화” 라는 명칭으로 개최된 모임에서 북측의 기조보고를 맡은 안병수 박사는 남의 기독자들이 한국교회협의회(KNCC), 한국여신학자협의회 등의 이름으로 통일대화를 위한 남북기독자들의 대화를 요구하고 나선 것을 환영하였다. 홍동근,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66-69. (안병수 선생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으로 오늘날 남과 북 혹은 북과 남에서 6.15 공동선언기념 혹은 8.15 광복기념 통일대회가 개최될 때 북측 민간대표단 단장을 맡고 있는 안경호 선생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북측 인사이다.); 1980년 4월 창립한 한국여신학자협의회(여신협)의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박순경 교수는 취임사에서 “한국교회와 사회의 민주화, 남녀평등, 민족통일”이라는 한국여성신학의 과제와 원칙을 제시하였고, 지금까지 여신협이 이 원칙과 과제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은 박순경 교수의 공헌이라 생각된다. 여신협은 연례행사로 개최한 1993년까지 의 여성신학 정립협의회중에서 여러 차례 통일문제에 집중하였다. 그 노력의 결과물, 한국여신학자협의회,『한국여성신학과 민족통일: 제 4, 5, 6차 여성신학정립협의회 보고서』(서울: 한국여신학자협의회, 1989)를 보라. 여신협은 또한 1992년에 『희년ㆍ통일과 여성신학』을 출판하였으며, 지금까지 일관되게 통일문제를 여성신학의 주요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35) 통일희년 운동의 의의와 전개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에 대하여, 김애영, “한국 여성신학과 민족통일,” 김애영,『한국여성신학의 지평』, 290-301을 보라.

36) 김애영, “우상들의 동요와 민족통일,” 김애영, Ibid.,, 11-41.




언에 대하여 평하기를, 오랜 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있던 한국교회를 놀라 깨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며, 이런 선언이 NCC라는 제도권 교회 연합체에 의해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변화를 말해준다는 것이다.37) 홍 목사의 글에는 또한 남측 가톨릭 교회의 한 저자의 글이 인용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인도 세속인도, 경건한 사람도 무신론자도, 자유민주주의자도 김일성주의자도 다 포함하여 모든 믿는 사람을 자유로이 해방하는 하나님의 능력일 것이다. 정말 그 복음은 남북한의 체제이념의 차이와 대립을 넘어서 양쪽으로부터 믿는 사람들을 부르는 하나님의 계시의 전능력일 것이다.” 38)

이제 우리의 시야를 북으로 돌려보자면, 이미 앞에서 제시했듯이, 1970년대 후반부터 조기련은 개신교 교세파악에 나선 것 같으며, 1985년 WCC 대표단이 방북했을 때 1만명의 개신교 신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가톨릭교인의 존재는 1980년 독일의 작가 루이제 린저가 방북했을 때 처음 확인되었고, 1985년 대표단이 방북했을 때 800명의 신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또한 1987년 미국 NCC 방북보고서를 통하여 북의 불교교세가 처음 알려졌는데, 조선불교도련맹 관계자가 불교도를 약 1만명으로 밝혔으며, 천도교의 현황도 저 방북보고서를 통해 알려졌다.39) 1988년 평양에 봉수교회가 건립되었고, 1988년 6월에 개신교조직인 조선기독교도련맹과는 별도의 조직으로서 조선천주교인협회가 발족하여 10월에 평양 장충성당에서 교황청 특사자격으로 파견된 남측의 장익, 정희철 신부가 정식으로 첫 미사를 올렸다. 또한 조선불교도련맹은 1988년부터 석가탄일을 비롯한 불교절기를 매해 공개적으로 기념하기 시작하였다.40) 김일성 종합대학에서는 개교 때부터 역사학부에서 불교, 천도교, 회교 등을 교육해 왔는데, 1988년 김일성 종합대학에 종교학과를 신설하여 1989년부터 기독교 강좌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는데, 미국 장로교 소속의 홍동근 목사가 선교사 자격으로 북에 파송되어 교수들을 상대로 기독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1990년 1월부터 평양신학원에서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41) 1988년에 일어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김흥수ㆍ류대영은 1988년을 북의 종교에 있어서 하나의 분기점으로 간주한다.42)

1992년 3월말부터 4월 초에 미국의 보수적 빌리 그래함 목사가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방문하고,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김일성주석과 회견하였다. 그는 1994년 7월 김 주석이 서거하였을 때 조문을 위해 유엔주재 북한 대표부를 방문하여 애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그의 아들 넬슨 그래함 목사도 1993, 95, 96년 북을 방문하였다.43)

이러한 흐름에 대하여 북의 강성산 총리의 사위였으나 남으로 망명한 강명도, 그리고 조선로동당국제담당 비서였으나 남쪽으로 망명한 황장엽은 북이 종교의 자유를 선전하기 위해 가짜 교회, 급조한 교인들이라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44) 이들의 증언이 아니라 해도 북의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들이 단지 북 체제의 하수인이요 선전물, 따라서 가짜교회, 가짜교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당시 남측 기독교인들을 사로잡고 있었고 현재에도 그런 의구심이 남




37) 홍근수,“기독교와 주체사상 간의 대화,”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ㆍ서울남노회 편, 『기독교에서 본 주체사상: 대화의 모색을 위하여』(서울: 민중사, 1993), 27-28.

38) 양한모,『교회와 공산주의』(n.p.: 가톨릭출판사, 1987), 154. 홍근수, Ibid., 35에서 인용.

39) 김흥수ㆍ류대영, Op.cit., 133-141.

40) 1992년 11월 만경대 구역에 칠골교회가 건립되었다. Ibid., 158-161.

41) Ibid., 177.

42) Ibid., 161.

43) Ibid., 295-296.; 빌리 그래함 목사의 방북을 주선한 홍동근 목사의 노력을 위해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115를 보라.

44) 김흥수ㆍ류대영, Ibid., 162-164.




측 기독교인들에게 아직도 해소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교회도 자신이 참된 교회냐 라는 질문에서부터 결코 자유하지 못하다는 20세기의 탁월한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을 경청하면서, 북의 종교, 특히 교회가 진짜 참된 종교, 혹은 교회냐를 묻기 이전에 우리의 교회와 종교가 참된 교회, 참된 종교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우려야 할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주체사상의 등장과 1970년대의 세계질서에 있어서의 해빙기 혹은 데땅뜨와 연동된 남북의 변화의 조짐들을 논하였다. 이제 1980년대 후반기에 뚜렷해진 변화, 마치 봇물 터지듯 행해진 남과 북, 북과 남의 대화와 교류의 시대가 펼쳐지게 된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앞에서 언급한 남북의 종교와 종교교류의 양상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1972년 H. 솔즈베리와의 만남에서, 그리고 1980년 미국의 솔라즈 의원과의 만남에서 이미 김일성 주석은 미국과의 교류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을 나는 앞에서 이미 제시했다. 그런데 재미 정치학자 김종익은 1981년 당시 북을 방문할 당시의 북을 “주체사상과 김일성숭배의 철저한 자기폐쇄적 국가” 라고 평하면서, 이러한 행태에 극적인 전환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는 1983년 10월 9일 버마 랭군에서의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던 북의 폭탄테러 사건이 북의 이미지를 악화시켰고, 이를 만회하려는 의도에서 북은 주체사상의 유연성을 나타내면서 이에 따른 변화들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1984년 1월에 북은 북한, 미국, 남한이 참가하는 3자회담을 제의했으나, 남한과 미국은 이를 거절했고, 북은 다시 1984년 LA 올림픽에 남북한 단일팀 출전을 제안하여 판문점에서의 회담이 열렸으나 동구권의 LA 올림픽 불참선언으로 회담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남북 관계에 획기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1984년 남쪽이 큰 수해를 입게 되자 1984년 9월 8일 북측 적십자가 남측 적십자를 통해 남북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무상물자제공을 제의하여 10월 4일하게 남측 수재민들에게 전달한 사건이라고 한다. 이런 극적 사건에 이어 남북경제회담, 남북적십자 본 회담, 남북 국회회담, 남북체육회담 등 다각적인 남북교류가 이루어졌고, 1985년 9월에 분단 40 년 만에 이산가족 상봉이 평양과 서울을 상호 방문을 통해 성사되었고, 동시에 양측 예술 공연단이 각각 서울과 평양에서 공연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45)

남북관계에 있어서 획기적 변화를 가져오게 된 계기에 대한 김종익 교수의 서술은 실추된 이미지를 만회하기 위한 북의 정략적 차원으로만 접근하고 있다. 북진통일만을 내세운 이승만 정권이 4월 혁명에 의해 무너지고 남측에서도 통일논의가 진전될 무렵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이래로 남측은 1988년 6.10 항쟁 때 까지 통일논의가 금기시될 정도로 긴 동면기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북측은 1960년 8.15 경축사에서 김일성 수상이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연방제’를 제안하고, 1980년대 까지 줄곧 공세적 통일정책을 펼쳐왔다는 사실이다. 이즈음 동구권의 몰락을 불러온 소위 신 데땅뜨의 물결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해도, 1984년 이래의 획기적 남북 관계에 있어서 나타난 변화의 바람은 통일논의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북의 일관된 방침과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남쪽은 당시의 신 데땅뜨의 영향이 한반도에 미치는 가운데 6공의 노태우 정권은 1988년 7. 7 특별선언을 통해 과거와는 다른 전향적 대북정책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신 데땅뜨의 영향이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동서의 갈등과 대결 혹은 동서 냉전은 폴란드에서 시작해서 루마니아에 와서 일단락 된 동 유럽 국가들의 탈사회주의 도미노 현상(1989),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1990), 구 소련의 해체 (1991년 말) 이후로 말해지는 1989년의 대격변을




45) 김종익, “긴 여행: ‘금기의 땅’을 가다,” 양성철ㆍ박한식 편저, Op.cit., 17-18.




전후해서 벌어진 세계상황의 변화를 의미한다. 김흥수와 류대영에 의하면, 남북 종교접촉과 교류의 문이 개방된 것은 노태우 정권의 7. 7선언을 통해 남북간 교류협력을 추진할 것을 밝힌 이후부터 라고 말한다. 7. 7 선언은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종교인, 문화예술인, 체육인, 학자 및 학생 등 남북동포간의 상호 교류를 적극 추진하며 해외동포들이 자유롭게 남북을 왕래하도록 문호개방 할 것을 선언하였고, 또한 이때 남쪽 및 해외동포 종교인들에게 방문을 허용해 주었다는 것이다.46) 그러나 노태우 정권의 7. 7 선언에 관한 김흥수와 류대영의 서술은 저 노태우의 7. 7 선언이 공표될 수밖에 없었던 바, 당시 남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통일운동의 견인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박순경 교수는 1991년 7월 재일대한기독교회가 주최한 “제2회 조국과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도쿄회의”에서 행한 “기독교와 민족통일의 전망”이라는 주제 강연과 남쪽 당국에 의해 불법화되었던 1990년 8월 15일 남ㆍ북ㆍ해외 범민족대회와 그 상설기구로서의 남ㆍ북ㆍ해외 범민족연합(범민련) 준비위에의 참가문제로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이때의 상황을 언급하는 글에서 박 교수는 당시에 일어난 통일열기를 말해주고 있다. 즉, 남한의 올림픽 단독 주최에 자극받은 서울대 총학생회가 1988년 봄에 남북청년학생공동체육대회와 국토 순례대행진을 제안하였고, 1988년 5월 서울대생 조성만이 양심수 석방과 남북 올림픽 공동주최를 외치며 할복 투신자살하였고, 학생들이 1988년 6월 10일 남북 학생회담 추진을 위해 판문점 행을 감행하다 정부에 의해 저지당하는 등 통일열기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었다. 그러자 노태우 대통령은 7. 7 특별선언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남측 재야 통일운동권이 주도한 남ㆍ북ㆍ해외동포의 범민족대회를 위한 논의를 1988년에 시작하여 1989년 8.15 범민족대회를 위한 남북 실무자 회의를 위한 판문점 행을 감행하다 정부에 의해 저지당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47)




46) 김흥수ㆍ류대영, Op.cit., 303.; 미국과 서독에 거주하던 목사, 학자,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1986년 미국 LA에서 통일신학동지회가 창립되었다. 남측에서도 목회자들과 신학자들로 구성된 통일신학동지회를 1989년 2월 창립하게 된다. 해외의 남측의 통일신학동지회는 1988년 12월 수원 크리스챤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의 신학 정립을 위한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 때 친북인사로 분류되어 오랫동안 남측방문이 금지되었던 이영빈ㆍ김순환 선생 부부와 홍동근 목사가 노태우 7. 7 선언이 천명한 방문 허용의 일환으로 참가하였다. 이때의 학술회의를 위하여, 통일신학동지회 엮음,『통일과 민족교회의 신학』(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0)을 보라.; 1988년 수원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린 저 학술회의에서 “주체사상과 기독교의 대화”가 제의되었는데, 1990년 헬싱키에서 “남과 북과 해외기독자간의 통일대화”를 가질 것을 해외통일신학동지회가 제안하였다. 1990년 헬싱키에서 북과 해외는 모였으나, 남측의 통일신학동지회 인사들은 남측 정부의 저지로 참가하지 못하여, 헬싱키 대회는 “주체사상과 기독교, 조국통일에 관한 북과 해외동포학자ㆍ기독교인 대화”로 열리게 되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고 한다.(홍동근,『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79-96.) 이러한 사실은 바로 7. 7선언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47) 박순경,『통일신학의 고통과 승리』(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2), 60-62.; 문익환 목사 역시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이 발표된 전후의 상황을 진술하고 있다. 문 목사는 세계청년학생 축전을 위한 예비회담을 차단하고 범민족대회 결성을 위한 준비회담을 저지한 노태우 정권이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방북을 허용한 사실에서 7. 7선언의 허구성과 노정권의 참된 의도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났고, 이로 인하여 더 이상 통일문제를 정부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북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진술을 하고 있다.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ㆍ민주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계기로 민주화가 진전되고, 1988년 6.10 남북학생회담 및 남북 공동올림픽쟁취투쟁, 그리고 외적으로는 동구권과 냉전체제의 붕괴등과 맞물리면서, 1980년대 후반기는 남측의 상대적 역량이 상승하여 노태우 정권의 7. 7선언과 김영삼 정권의 암묵적인 대흡수통일정책등이 등장하였다. 동시에 민민진영의 통일운동과 전대협이나 한총련으로 결성된 대학생들의 선도적 통일운동이 남측의 통일정국을 이끌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91년 10월 남북 고위급 회담은 1972년 7. 4 공동선언에 이어 협의 작성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 평양에서 남측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측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분단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6.15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에서 남측의 남북연합방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수용함으로써 통일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동시에 이산가족 상호방문과 민족경제의 추진을 합의함으로써 오늘의 남북교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48)

2000년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5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면 적십자회담을 비롯한, 당국간의 셀 수 없는 회담들이 개최되고 있으며, 민간단체들이 주축이 된 남북공동행사들이 여러 가지 명목으로 연례행사로 치루고 있으며, 금강산과 개성 관광, 개성공단 조성 등 남북간의 교류가 활발하다. 따라서 남측 당국에 의하여 통일논의가 금기시 혹은 독점되었을 때, 분단을 뛰어넘어 오늘의 전면적인 남북 교류협력 시대를 열게 하는데 있어서 선구적 역할을 했던, 특히 해외에서 애쓴 인물들과 단체들은 그 소임을 다한 것




화운동청년연합 편,『나는 왜 평양에 갔나: 문익환 목사 공판 기록』43-46.;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도쿄회의”는 1971년 이래로 남측 한국기독자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하던 재일대한기독교회 인사들이 WCC를 통해 북측과 접촉을 시도하여 1989년 처음으로 북의 조선기독교도련맹을 방문하였고, 조선기독교도련맹과 남측 기독교관계자, 해외동포교회를 초대하여 1990년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도쿄회의”가 처음 개최된 이래로,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등지에서 개최되었다. 1990년 제1회 기독자 도쿄회의는 비록 일본에서 개최되었으나, WCC를 비롯한 국제기구가 아닌 처음으로 남북교회가 주최한 민족통일을 위한 회의였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제2회 회의를 준비하는 도중에 북과의 대화채널의 일원화를 둘러싼 KNCC측과의 마찰로 1993년 3회 때부터 KNCC는 도쿄회의의 불참가를 조직적으로 결의하자, 기독자 도쿄회의는 WCC와 KNCC와 관련없는 남측 보수교회들이 참가함으로써 이들이 조선기독교도련맹과 대화의 장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재일대한기독교회,『평화통일과 KCCJ: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도쿄회의 평가자료집』(도쿄: 재일대한기독교회 평화통일선교위원회, 2000), 124-125에 실린 편집후기, 김흥수ㆍ 류대영, Op.cit., 300-301 참조.; 이 회의를 위하여, 재일대한기독교회총회 남북선교연구위원회 편,『평화통일과 그리스도인의 역할: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교인 동경회의』(서울: 형상사, 1990), 같은 연구회 편,『평화통일과 한(조선)반도 선교: 제2, 3회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교인 도쿄회의』(서울: 형상사, 1994), 같은 연구회 편, 『평화통일과 민족의 대단결: 제4, 5회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교인 도쿄회의』(서울: 형상사,1998)를 보라.

48) 강정구,『민족의 생명권과 통일』(서울: 당대, 2002), 153-162.; 김애영, “남북 및 동서의 갈등현실과 화해의 신학: 오늘의 한반도 상황을 중심으로,” 김애영, 『여성신학의 주제탐구』, 318-349를 보라.




처럼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이제 남북 당국자들과 국내 단체들이 교류협력의 시대를 이끌고 있다. 비엔나에서부터 헬싱키에 이르기까지의 모임을 이끌면서 분단장벽을 돌파하는데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해외동포 통일운동 모임뿐만 아니라,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동경회의, 통일신학동지회, 북미주 기독자회* 등은 해외에서 남과 북의 모임을 매개했던 역할을 이제 남북간의 직접적인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운동의 선두자리를 국내통일운동 단체들에게 내주었다. 현재 남측에는 개신교, 가톨릭, 불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민족종교 7개종교단체로 구성된 종단,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민화협), 6.15남북공동선언실현과 한반도평화통일을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가 주축이 된 민간통일운동단체가 남북교류협력사업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 그 이외에도 각 종교단체들은 각자의 교류사업을 활발하게 벌여나가고 있다.



3. 종교의 영원한 화해의 역할과 전망



지금까지 나는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자마자 미ㆍ소 강대국에 의한 세계분단과 맞물려 남북으로 분단됨으로써 벌어진 바, 자본주의 세계에 안주한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가 어떤 상황에서 상호비방과 대결, 파문에서부터 벗어나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어떤 대화와 교류 과정을 거쳐 왔는가를 다루었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가장 큰 거부감과 적대감을 가져온 종교인도, 분단을 뛰어넘는 선구적 역할을 해온 종교인도 특히 개신교에 속한 인물들이며, 그 어느 종교보다 더 일찍부터 북의 종교 특히 개신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온 것도 개신교 측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가장 먼저 분단의 장벽을 뛰어넘어 통일의 물꼬를 튼 해외동포기독자들은 물론이지만, 1980년대 말 남측 인사로서 분단을 뛰어넘은 방북인사들이 기독교인들이었다. 당시 한국기독교장로회 문익환 목사는 1989년 3월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회 상임고문 자격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정경모 선생의 주선으로 북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청을 받고 유원호 선생과 함께 방북하여 김일성 주석과 역사적 회담을 하였다. 또한 가톨릭 신자인 대학생 임수경은, 전대협 대표자격으로 평양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방북하였으며, 당시의 남의 실정법을 어기고 방북한 가톨릭 신자인 임수경을 보호하고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게 하는 임무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으로부터 받은 문규현 신부가 임수경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의 방북사건은 당시 남쪽 사회에 큰 충격을 주면서 서서히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을 하나하나 깨트리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이외에도 농민출신으로 당시 여당 국회의원 신분으로 방북하여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던 서경원 의원의 방북사건이 일어났다. 홍근수 목사는 소위 이러한 방북인사들이 문익환 목사, 유인호 집사, 정경모 교인으로서 개신교인들이요, 임수경 대표와 서경원 의원 가톨릭 신자요 문규현 신부로서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고 말한다. 49) 이들은 분단을 깨뜨




* 북미주기독자회는 1967년 미국과 캐나다에 유학중이던 대학원생, 신학생, 교수와 목사들이 시작한 모임으로써, 북미주 에서의 회원 간의 친목, 이민정착기 교포사회에서의 기독자 및 교회의 역할, 남측 조국의 민주화 문제들에 관심을 기우려왔다. 이 회는 1987년 11월 뉴욕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를 위한 해외 동포회의’를 발기대회를 거쳐 1988년 미국 LA 대회에서 ‘분단시대와 이산가족’을 취급하면서 1989년부터 남과 북, 해외에 있는 기독자들을 초




리고 민족의 화해를 위한 기독교인, 종교인들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국민의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장직을 역임했고 햇볕정책의 전도사 역할과 6.15공동선언을 이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임동원 세종재단 이사장은 한 통일강좌에서 6.15 공동선언이후 남북관계가 얼마나 빠르고 크게 변하고 있는지 그리고 6.15 이후의 남북 교류와 협력은 수치로 계산할 수 없는 적대감 해소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교회장로로서 그는 통일의 과정이 그나마 진전된데 있어서 기독교 NGO 덕택이라는 사실과 화해, 협력, 북의 변화, 평화가 실현되는 땅으로 만들어야하는 기독교인들의 과제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러한 언급은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교회의 대대적인 나눔운동, 북의 식량 악화을 돕기 위한 교회의 지원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처럼 통일이 가시화되기 까지 분단이래로 지금까지 줄기차게 엄청난 고난과 희생을 무릅쓰고 벌여온 민민운동 진영의 통일운동이 6.15공동선언을 이끌어낸 남북의 화해와 교류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50)

또한 기독교는 냉전시대이래로 오늘의 탈냉전시대에도 여전히 친미 반공의 주축을 이루면서 매우 공격적인 북한선교 정책을 수립해 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청 앞을 비롯한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양 손에 들고 ‘북 체제 붕괴와 김정일 타도’ 를 외치는 보수 반공 기독교인들의 집회들이 난무하고 있으며, “북핵 반대와 북한 인권을 위한 국민화합대회” 대회 등을 개최하며, 오늘의 남북화해를 저해하는데 있어서도 개신교인들이 앞장서고 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들은 냉전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against the stream) 분단을 뛰어넘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으며, 또한 탈냉전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친미ㆍ반공의 기수로서 안간힘을 쓰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이제 남북교류의 흐름을 되돌려 놓을 수 없다. 그러나 남북교류에 있어서 남북 당국간의 협력과 교류뿐만 아니라, 경제교류와 협력과 같은 실질적인 부문의 교류가 우선시되는 상황에서 종교교류와 협력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짐으로써 이제 종교의 소임을 다한 것으로 여길 수 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들은 남측의 막강한 물적 인적 자원을 앞세워 공세적인 선교의 차원에서 북의 종교를 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남의 종교들은 북의 종교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올바른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자치(self-governing), 자급(self-supporting), 자전(self-propagating)을 표방하는 중국교회의 삼자(三自)운동처럼 주체적인 종교로 북의 종교들이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길을 남의 종교들은 존중하고 도와야 할 것이다.51)

또한 북의 종교지도자들은 남측의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건립을 요청할 때마다 성전 건축보다 북의 련맹이나 교회가 하고자 하는 사회복지 혹은 봉사 활동에 대한 요청을 남측에 원하고 있다. 이제 남측의 교회를 비롯한 종교들 자체가 직접 북에서의 전투적 선교활동을 개




청하는 대화의 장을 열어왔다. 이를 위하여, 북미주 기독자회 1989-1992 연례대회 자료집, 『기독교와 주체사상: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 해외 기독교인과 주체사상가의 대화』(서울: 신앙과 지성사, 1993)를 참조하라.

49) 홍근수, Op.cit., 26.

50) 김애영, “통일된 민족공동체 건설과 그리스도교 여성의 책임,”『한국여성신학』제62호(2005년 가을): 28.

51) 북의 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은 중국의 삼자교회로부터 자문을 받았다고 한다. 김흥수ㆍ류대영, Op.cit.,128, 158.; 중국의 삼자교회운동을 위하여, 홍성현 편저,『중국교회의 전기와 새로운 중국의 신학』(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2)을 참조하라.




시할 날만을 고대하며 과당 경쟁적 북과의 접촉에 열을 올리기 보다는 우리의 간접지원에 의하여 북의 종교들이 사회사업을 전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남측 종교뿐만 아니라 많은 단체들과 개인들은, 우리의 지원이 과연 올바로 사용되고 있는가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을 돕는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김흥수와 류대영의 저서에 의하면, 북의 종교단체들은 남과 국제종교기구들의 인도적 지원의 덕택으로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여러 가지 사회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봉사 위주의 신앙 공동체 기능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의 이러한 활동을 세계개혁교회연맹은 ‘디아코니아적 선교 활동’이라고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52) 남측 종교단체들을 비롯한 우리의 인도적 대북지원들은 단순히 구제나 시혜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치열한 경쟁만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협력과 연대성을 자본주의 사회 한 복판에서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는,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여기는 기반에서 추구되어야 할 것이며, 그것이 바로 화해의 역할을 담당해야할 종교에게 주어진 일이라 생각된다.

대체로 남북간의 종교교류는 오랜 불신과 단절로 인하여 상호방문과 공동행사, 지원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더 나아가는 교류와 화해를 위한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각 종교들은 북의 주체사상과의 대화를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주체사상과의 대화를 친북적인 눈으로 바라보거나 혹은 이미 주체사상 자체가 북에서도 그 시효를 다한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북을 이해하는 하나의 주요한 앵글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독창적 사상의 하나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통일운동 단체들이, 특히 해외 기독자들이 분단을 뛰어넘어 북과의 교류와 화해를 위한 주요 방편으로써 주체사상과의 대화를 시도하였으며,53) 본격적인 남북 당국간, 민간교류가 본격화된 오늘에 이르러 주체사상과의 대화 보다는 실질적인 경제협력과 인도적 대북지원 사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제 우리는 주체사상이 지닌 규정력이 쇠퇴하였다고 해도 우리 민족 사상의 한 자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기독교와 주체사상과의 대화와 같은 형식으로 사상, 철학적 검토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베를린-브란덴부르크의 주교 알브레히트 쇤헤르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은 단순하게 상호공존만 할 것이 아니라 “창조적 긴장관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 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창조적 긴장관계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물론 기독교인들도 바로 잡아주고 자극




52) 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 Proceedings of the 23th General Council, (Bangalore, India, 2000), 98.; 김흥수ㆍ류대영, Op.cit., 307 참조.; 사회복지(Wohlfahrt)라는 개념이 1530년 경 종교개혁 과정 중에 나온 논문 가운데 등장한 것인데, 독일에서 1920년대 이래로 기독교 사회복지 실천의 활성화가 이루어졌으며, 19세기 중반이래로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발전되어 온 디아코니아학(Diakoniewissenschaft)과 오늘의 독일 사회복지 체계의 근간이 되었다. 이러한 디아코니아학을 독일에서 전공하고 돌아온 홍주민 박사의 활동이 남북 기독교의 사회실천에 있어서 기대된다.

53) 홍동근,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선우학원ㆍ홍동근『주체사상과 기독교』, 북미주 기독자회 1989-1992 연례대회 자료집, 『기독교와 주체사상: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 해외 기독교인과 주체사상가의 대화』,통일신학동지회 엮음,『통일과 민족교회의 신학』, 남측에서 시도된 것으로서,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ㆍ서울남노회 편, 『기독교에서 본 주체사상: 대화의 모색을 위하여』, 박순경, “주체사상에 대한 금기, 냉전 체제를 넘어서 통일된 민족사회 창출로 가는 길,” 박순경ㆍ박순경박사 팔순축하문집 간행위원회, 『과거를 되살려내는 사람들과 더불어』(서울: 사계절, 2003),364-381를 참조하라.




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54) 1990년 9월 대한성공회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마련한 신학강연회에서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파울스(C. Pauls) 교수는 “기독교와 사회주의, 과연 함께 갈수 있는가?” 라는 강연을 한바 있다. 그는 그 강연의 끝을, 남북한 통일에 있어서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결합하는 일이 한국인 전체로부터 나온다면 오늘날 전 세계의 사회주의와 기독교사상에 독특한 기여를 할 것이라는 말로 맺었다.55)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들은

이와 같은 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의 사회주의와의 결합을 통해 “세계의 자원을 세계 공동체에다 이양시킬 방법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할 길을 모색” 56)함으로써 오늘의 불의한 신자유주의 물결을 저지하여 전 세계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유럽에서의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상호접근을 참조하면서574), 기독교 (다른 종교 사상들과)와 주체사상의 상호 비판적 접근을 통하여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남북의 종합적 민족사상을 형성하는 일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다면 남북 종교교류의 내용과 전망이 보다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54) James Bentley, Between Marx and Christ : The Dialogue in German-SpeakingEurope1870-1970 (London: Verso, 1982), 14.

55) 1990년 9월26, 27일 양일간에 걸쳐 대한성공회 선교 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가 주최한 신학 강연회 “이념적 위기와 기독교의 선교”의 팜플렛 형식의 자료집, 3-10 참조.

56) Rosemary R. Ruether, New Women New Earth: Sexist Ideologies and Human Liberation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75), 31.

57) James Bentley의 저 책 이외에도, 숭실대학교 기독사회연구소가 1988년 주최한 평화통일 학술심포지움2 자료집, 『맑스주의와 기독교 사상: 바르트, 틸리히, 니버, 몰트만을 중심으로』,박순경,“하나님 나라, 사회역사 변혁의 동력,”『한국기독교신학논총』Vol. 41(2005):37-88f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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