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2

12 ]“낙성대경제연구소는 뉴라이트가 아니다” - 주간경향



[표지이야기]“낙성대경제연구소는 뉴라이트가 아니다” - 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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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2 (수)


2012.07.10ㅣ주간경향 983호
[표지이야기]“낙성대경제연구소는 뉴라이트가 아니다”
정용인 주간경향 기자 inqbus@kyunghyang.com




“안병직 교수나 이영훈 교수가 바깥에는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 뉴라이트의 이론적 근거를 뒷받침해온 사람이 김낙년 교수다. 연구를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을 꼼꼼히 뒷받침해온 사람이니까.”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으로 학계에 널리 알려진 한 교수의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대담집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나 이영훈 교수의 <대한민국 이야기> 등을 보면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의 연구 성과가 자주 인용된다. 그가 소장을 맡고 있는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식민지근대화론’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있다.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의 이름을 언론지상에서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지난 2008년 이른바 ‘뉴라이트 교과서’ 논란을 일으킨 대안교과서 집필진에는 낙성대경제연구소 회원이 여럿 참여했다. 김낙년 교수는 대안교과서를 만든 ‘교과서포럼’의 심포지엄에 발제자로 참여했지만 역시 집필자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난 4월과 5월, 김 교수의 연구가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국세청 자료를 이용해 1970년대부터 2010년까지 한국 상위계층의 소득을 추정한 연구다. 특히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부의 쏠림현상’이 급격해졌다는 것을 구체적 데이터로 밝혀낸 김 교수의 연구는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영훈 교수는 중앙일보의 관련 보도에서 “(김 교수의 연구는) 한국의 소득불균형을 다른 OECD 국가와 비교하게 할 수 있게 했다”고 평가했다. 한겨레·프레시안 등 진보매체들도 이를 보도했다. 한겨레는 “상위 1% ‘슈퍼부자’ 전체 소득의 11,5% 차지”라는 제목으로 김 교수의 연구 성과를 소개했다. 이 신문의 낙성대경제연구소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우리나라 경제사 연구를 목적으로 1987년 설립돼 조선시대 후기부터 최근의 고도성장까지 우리나라 경제제도의 변화에 따른 사회의 변화를 다양한 통계로 설명하는 실증적 연구를 벌여 왔다.” ‘뉴라이트’ 식민지근대화론의 학문적 기지(基地) 정도로 취급되던 이전과는 자못 상반된 것이다.

그렇다면 ‘뉴라이트’가 변신을 한 것일까. 사상운동으로서의 ‘뉴라이트’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역사와 성장을 긍정하는 관점으로 인식됐다. 그런데 ‘소득불평등 심화’에 대한 지적은 비판과 분배 문제로 관심사가 선회한 것처럼 보인다. 6월 28일, 동국대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김 교수는 “어디까지나 실증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의 장기 통계를 추론한 것이며, 정치적 입장의 뉴라이트와 학문 연구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를 의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과거 일제시대의 ‘성장’ 문제를 다루다 보니까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자료를 수집해 왔다. 지난 2006년도에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이게 일본 동경대 출판부에서 일어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번역은 히토츠바시대학 연구소에서 했다. 그 이유가 일본의 장기 통계를 히토츠바시에서 했기 때문이다. 메이지시대부터 쭉 해온 것인데, 그게 나오면서 국제적으로 일본 연구 붐이 불었다. 그 연구소 사람들이 일본을 연구하면서 한국 것도 같이 했다. 한국의 GDP를 추계한 것인데, 그게 국제적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우리 책이 나오자마자 번역해서 자기들이 쓰던 것을 우리 것으로 대체했다. 수입대체를 한 셈이다. 사실 2010년까지 100년간의 통계를 갖고 있는 나라가 몇 안 된다. 이런 통계가 정비되면 일본학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학 연구 붐이 불지 않을까.”

기존 계급계층 연구자들은 왜 이 연구를 하지 않았을까.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나만 하더라도 6개월이 꼬박 걸렸다. 소득세와 같은 세법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국세청 자료만이 아니라 한국은행이 내는 국민계정도 같이 합쳐서 보정해 추계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실증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김 교수나 낙성대연구소의 일제시대 연구에 대해서 그 실증에서 틀렸다는 지적이 여전히 나온다.
“국사학계와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않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겠다고 책도 내고 심포지엄도 했는데, 나는 실증적 근거를 갖고 논문으로 비판해오면 언제든지 대응하는 사람이다.”

뉴라이트의 중심 인물인 안병직 교수나 이영훈 교수는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소상히 밝힌 바 있다. 김 교수는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금의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나.
“KDI 연구원으로 있다가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돈이 없어 장학금을 대줄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게 동경대 국비유학이었다. 경제사를 했던 서울대 대학원을 다니지 않았지만 그 그룹과는 개인적인 관계를 계속 갖고 있다. 일본 유학을 갈 때 일본 경제사를 공부하려고 했는데, 실제 가서보니 테마가 너무 세분되어 있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한동안 일본 경제사를 공부하다가 조선을 보니, 조선에 대한 연구가 너무 비어 있었다. 일본 경제사에 대한 백그라운드를 갖고 조선, 식민지시대를 연구하게 되었다.”

안병직 교수는 일본에 가서 입장이 바뀌었는데.
“나라고 달랐겠는가. 학생운동을 하면서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같은 책을 봤다. 베트남 혁명이나 중국을 볼 때 스스로 검열하는 눈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 가보니 그런 것이 없었다. 정보가 그대로 전해졌다. 유학 가서 몇 년 동안 논문 쓰는 것보다 그 ‘충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생각하면서 헤맸다. 정리한 것이 이것이다. 우리들끼리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시각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진보에 대한 비판으로 들린다.
“엄밀히 말해 시대착오적이다. 기존에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현상을 이해하려는 것인데, 그 틀이 과연 검증이 되어서 얼마나 설명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답해야 한다. 얼마나 가치를 믿느냐는 식으로 이야기가 되면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무엇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역설적으로 일제의 유산인 과잉민족주의다. 이런 시각이 팽배해 있으니까 현실이나 역사를 왜곡해서 보는 것이다. 민족주의의 속성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남의 탓으로 돌리는 식이니, 내적으로 성찰할 기회가 없는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서도, 결국 일제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식의 정치적 딱지를 붙인다. 일제시대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1960년대 이후의 한국의 고도성장기를 설명하려면 일제시대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영어권 연구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회피할 것이 아니라 직시하자는 것이다. 나만큼 일본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은 없다. 그런데 비판이 너무 저차원적이다. 어린아이들이 좋은 편 나쁜 편 갈라 싸우는 것처럼 역사인식을 그렇게 몰아가려고 한다.”

그 구도가 박정희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박정희 시대에 정책금융을 어떻게 운영했느냐를 보면 상당히 실적 위주로 운영했다. 시장논리로 보면 비효율적이고 잘못되었을 수 있는데, 박정희의 정책을 보면 위험할 수 있지만 효율적으로 분배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금융부문의 기형화로 이어져 외환위기를 불러 왔다. 강점과 동시에 초래한 비용을 동시에 보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한국 경제의 고성장에서 박정희의 리더십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 와서는 은행이 자율화되고 민영화된 상태에서 같은 정책을 편다면 잘못될 가능성이 높다. 박정희의 방식이 전시(戰時) 때 자금 통제방식과 비슷한데, 그게 또 일제 때의 경험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말씀하신 내용은 조갑제 기자의 박정희 인식이나 우파의 인식과 거의 유사하다.
“사람들이 낙성대경제연구소를 뉴라이트라는 딱지를 붙여서 이야기하는데, 낙성대는 기본적으로 연구단체다. 멤버가 정치적 입장을 가질 수는 있지만 낙성대연구소의 이름으로 정치활동을 한 적은 없다. 나도 개인적으로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지만 연구소 소장으로서의 입장과는 다르다. 과거의 잣대로 보면 나를 우익보수 혹은 보수꼴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어디에 매인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안 교수 등의 활동과는 별도로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던 ‘뉴라이트’가 있었고, 처음 뉴라이트가 나왔을 때에 비해 요즘은 활동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안 교수가 이사장을 맡은 시대정신의 경우 지향은 분명히 있다. ‘뉴’자를 붙이더라도 보수 쪽인데, 결국은 보수철학이다. 단지 워낙 보수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독재 부패세력과 뒤얽혀 있었기 때문에 ‘뉴라이트’라고 하면 뭔가 새로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몰린 것이다. 안 교수 등의 생각은 보수의 가치를 다시 보자는 것이다. 보수라는 사람들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면 그건 개인의 문제다. 나는 이름을 정하는 것도 일정한 정치행위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논란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치발전이나 사회발전을 위해서는 그런 식으로 딱지를 붙여 치우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거 도요타재단이 낙성대연구소 프로젝트를 지원한 걸 두고 계속 말이 나온다.

“도요타재단 지원을 받은 연구나 연구자는 여럿이다. 연구 결과에 영향을 준 경우는 없다. 낙성대경제연구소의 반대 입장에 선 사람도 지원을 받았다. 학술진흥재단 지원의 경우 300만원까지 개인 활동비로 쓸 수 있는데, 낙성대연구소는 그 돈까지 연구비로 내서 사용했다. 운영비는 연구재단에 프로젝트를 내서 꾸려간다. 독지가들이 낸 돈으로 집세 등을 내고 있는데, 그분들이 지원한 내역은 다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다.”

<글·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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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_id=201207031802091&fbclid=IwAR3BzLJO0foSOiIHYSAEknPqFbOqDHsVpejx7V50SrAE2codCDLuxfkNKXM#csidx1afc5904275da529406400b7022db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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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뉴라이트는 어떻게 사용됐나
한윤형의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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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에 나는 <뉴라이트 사용후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일제 식민지 시기와 대한민국 건국을 바라보는 역사전쟁의 차원은 곧잘 현존하는 정치세력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와 대한민국의 향후 과제는 무엇인지를 묻는 정치논쟁의 차원으로 번져가곤 한다. 그래서 나는 역사논쟁이면서 정치논쟁인 ‘뉴라이트 논쟁’을 그들이 공격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주장과 함께 공정하게 다루면서, 탈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뉴라이트 사관의 주장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없을지 모색해보려 했다.




5월 17일 북한 인권운동을 하다 중국에 구금된 김영환씨의 어머니 조성자씨와 김성환 외교부 장관이 면담을 하고 있다. 현재 뉴라이트는 북한 인권운동 외에는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 김문석 기자
출간 과정에서도 그 이후에도 이 책의 의도는 조명받지도 이해받지도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뉴라이트’를 그저 ‘이명박 정부를 돕는 나쁜 놈들’ 정도로 이해했고 그들이 그 이상 뭘 하는지는 잘 몰랐다. 역사논쟁에 대해서도 그들이 일본 기업의 돈을 받아 연구를 하는 친일파들인지라 독립투사를 테러리스트라 칭하고, 김구 선생을 매도하고, 일제 식민통치와 이승만을 찬양한다는 식의 이해가 있을 뿐이었다. 이들이 던지는 논쟁을 극복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더구나 책 출간 후 뉴라이트 세력은 사람들의 그 단순한 어림짐작에 제대로 반박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책이 나온 직후 진중권이 중앙대 교수에서 해임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진중권은 중앙대 고별 강연에서 “저들(뉴라이트와 극우세력을 지칭)은 비판을 받으면 반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한 사람의 물적 조건을 끊어내려고 공격한다”고 고발했다. 그 후에도 진중권은 한예종 시절 프로젝트 참여와 강의료에 대한 문제제기를 당해 법정을 드나들어야 했다.

정권비판 인사 몰아내는 이익단체로
맥락을 따져보면 이 사건은 2008년 촛불시위의 충격 이후 중도실용을 자처하던 이명박 정부가 벌였던 ‘좌파 색출’ 작업의 일환이다. 이 시기 ‘PD수첩’은 고발당했고, 시민단체는 사찰당했으며, 이 사실을 고발한 박원순은 곧바로 국가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뉴라이트 진영은 이즈음 진중권과 같은 ‘좌파’ 교수들을 축출하고 거기에 자신의 명함을 들이밀기를 희망하며 줄선 이들을 위한 이익단체로 전락한다.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가 생각한 ‘보수 이념의 선명성 강화’는 보수의 철학과 이념을 재정립하고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에 비판적인 이들을 ‘좌파’로 몰아 그들을 쫓아내고 그 위에 자신의 밥숟가락을 얹는 것이었던 것이다.

보수정권이 들어선 초기에 안병직이 다시 ‘사상투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피가 끓어 오른다”고 말했을 때 기대했던 것이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뉴라이트 담론을 이끄는 안병직과 이영훈 등은 과거 종속이론을 신봉했던 좌파였고, 개발도상국은 경제성장을 할 수 없다는 그들의 이론이 한국과 대만 등의 경제성장에 의해 박살나자 자본주의의 힘을 강조하는 우파로 돌아섰다. 그들은 아마 한국의 우익들이 이념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개탄하며 뉴라이트 운동이 그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다고 믿었을 게다. 박정희 숭배자가 이승만을 비판하고, 시장경제를 찬양하는 이가 박정희를 비판하는 ‘분열적인’(그들의 생각에는) 상황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성공을 잘 설명해낼 수 있는 우익의 통합적인 정체성이 필요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들의 그러한 의도를 해체한 것이 이명박 정부의 탄생이 아니었던가 한다. 뉴라이트는 과거 <딴지일보>가 정리했던 바, 한국의 기득권 세력의 특성인 “콩사탕 좋아, 기득권 싫어”를 벗어나려 했지만, 정권을 다시 찾은 순간 뉴라이트에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한국의 우익은 다시 이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 후기>따라서 한국의 우익들에게 이데올로그는 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비정규직’이 되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은 한국 정치사의 ‘변절’에 대한 어떤 구조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우익은 담론의 재생산을 못하고 좌익은 일자리를 못 주는 사회에서, 오늘의 진보담론에 맞서 싸우는 것은 왕년의 진보투사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수준 높은 학자였던 안병직과 이영훈에겐 민망한 일이지만, 그런 그들의 전략을 답습하여 ‘잘 나가는’ 이가 변희재 아닌가.

뉴라이트는 우익을 견인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컷 이용만 당했고, 이제는 실체도 사라져버린 셈이 되었다. ‘뉴라이트’란 말이 개혁시민들이 조소하던 바로 그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 것이다. 2009년 겨울호 뉴라이트 계열 매체 <시대정신>에 이사 홍진표는 <뉴라이트의 추락과 재생>이란 글을 싣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뉴라이트 단체들은 내분까지 겹쳐 바닥 없이 추락해갔고, 2011년 3월엔 조선일보 주용중 정치부 정당팀장이 <추락한 뉴라이트의 대안은 뭔가>라고 묻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그들의 활동 중 ‘밥숟가락 디밀기’ 이외의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 전향한 주체사상파들의 북한 인권활동 정도였을 텐데, 이 역시 ‘통합진보당발’ 종북주의 논쟁과 임수경 막말 파문이 아니었다면 언론의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우파의 밥그릇’과 ‘좌파의 환상’
나는 이명박 정부 이후 전개된 뉴라이트 운동의 근황이 한국의 ‘좌파’와 ‘우파’, 그리고 ‘진보’와 ‘보수’의 수준을 드러냈다고 본다. 우리는 별 수 없이 한국 사회의 이념지형을 위해 저런 말을 쓰게 되는데, 그러면서 그들이 모종의 세계관을 공유한 이념집단일 거라는 착시현상에 빠진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우파’의 ‘밥그릇’과 ‘좌파’의 ‘환상’이 싸우는 것이지, 이념이나 정책의 대립은 아니다. 문화평론가 이택광이 경향신문 칼럼(6월 29일자 30면)에서 시사했듯이, 이념이 아닌 한국 우파들의 정신세계를 이념논쟁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북한의 도발과 종북주의 논쟁이라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북한 체제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한국의 우파는 이념과 정책 없이 지금 보여주는 이 정도의 행동만으로 어느 정도 자신들의 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에 대항해야 하는 진보진영의 전략이 중요해진다. 우리는 한국의 우파가 이념과 무관한 기득권 집단이기 때문에 그들의 탐욕을 공박하는 ‘민중주의적 환상’만으로 상대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그런 전략은 권력을 비판할 때엔 유효해도 권력을 잡았을 때엔 문제가 드러난다는 것이 증명된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의 10년 세월이라 볼 수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다시 진보는 보수의 탐욕과 무능을 비판만 해도 되는 ‘상대적으로 편한’ 상황에 빠져 들었고, 이를 새로운 매체에 접목시켜 가장 화려하게 부활시킨 것이 ‘나꼼수’일 테지만, 그들에게서 ‘보수’의 딱지를 떼내기 위해서라도 진보진영의 자기 혁신은 중요하다. ‘뉴라이트의 몰락’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동전의 양면에 있는 사건이 개혁시민 일각에서 신자유주의 반대와 외국인 노동자 반대를 같은 범주로 놓는 것임을 직시해야 할 때다.

한윤형의<미디어스 기자>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207031802061&code=115#csidx742719e8fe46083a4bcb6ee3ba6a444




[표지이야기]뉴라이트는 왜 8년 만에 몰락하게 됐나
백철 주간경향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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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일 정형근 뉴라이트전국연합 의장(67)은 한나라당 의원 시절인 2008년 1월 유동천 제일저축은행장(72)으로부터 돈이 든 쇼핑백을 받았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검찰이 돈다발을 들고 나오는 정 의장의 모습이 찍힌 CCTV를 제시한 이후다. 6월 21일에는 뉴라이트 단체 대표인 김범수씨(47)가 미소금융 자금을 빼돌렸다는 이유로 법원으로부터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뉴라이트 진영에서는 아무런 입장 발표가 없다. ‘뉴라이트’를 내세웠던 보수단체의 대부분이 뉴라이트 진영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주간경향>은 2004년께부터 7~8년간 이어온 뉴라이트 운동의 흥망성쇠와 그들의 현재를 살펴봤다.




2008년 11월 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뉴라이트전국연합 3주년 기념식에서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 오세훈 전 서울시장,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 김진홍 전 뉴라이트전국연합 의장, 김덕룡 대통령 국민통합특보(왼쪽부터)가 건배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04년 4월 17대 총선,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탄핵 역풍’에 힘입어 민주당계 정당으로서는 40여년 만에 과반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총선 직후 헌법재판소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주도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기각시켰다. 행정부와 입법부 권력을 넘기고 국민들로부터 외면받은 보수세력의 위기의식은 높아져갔다.

‘뉴라이트’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띄웠던 동아일보의 ‘뉴라이트 기획시리즈’에서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52)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등장에 대해 ‘이러다가 보수는 집권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위기의식이 뉴라이트 등장의 이유”라고 분석했다.

뉴라이트 떠오르다
뉴라이트의 위기의식은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로 나타났다. ‘올드 라이트’로 분류되는(스스로는 ‘애국우파세력’, ‘정통보수세력’ 등으로 지칭) 신혜식 독립신문 대표(44)는 “뉴라이트 운동의 중심은 이명박 정권 만들기였다”며 “정통보수세력도 정권교체에 있어서는 뉴라이트와 뜻을 같이 했지만 정통보수세력은 새로운 정권에서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뜻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말했다.

2005년 뉴라이트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의 창립을 주도한 김진홍 목사(71)는 이명박 대통령과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김 목사와 뉴라이트전국연합은 2007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와의 당내 경선, 이회창 무소속 후보의 출마 국면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당선 직후인 2007년 12월 22일 뉴라이트전국연합 송년회에 참석해 지지자들에게 감사 의사를 표한 뒤 “5년 전이나 5년 후나 똑같은 모습으로 여러분에게 다가가겠다”고 약속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전국연합의 많은 인사들은 한나라당과 정부를 통해 정치권에 진입했다. 김성회 뉴라이트경기안보연합 상임대표(56)와 장제원 뉴라이트부산연합 공동대표(46)는 18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상임대표를 지낸 제성호 중앙대 법대 교수(54), 시민과함께하는변호사들 공동대표를 지낸 이석연 변호사(58), 박영모 전국연합 조직국장, 한오섭 전국연합 기획실장은 각각 인권대사, 법제처장,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실 행정관, 청와대 언론1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이 됐다.

MB정부에서 이념논쟁 주도
뉴라이트 그룹에서 ‘역사 바로세우기’(식민지 근대화론, 이승만·박정희 긍정적 재평가)와 ‘북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뉴라이트재단(현 시대정신) 출신 인사들도 제도권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론작업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76)는 2007년 9월부터 1년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있으면서 중도실용주의, 선진화, 비핵개방3000 등 정부·여당 주요 정책의 골자를 마련했다.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49), 조전혁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 대표(52), 박영아 자유주의교육연합 정책위원장(52) 3인은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18대 국회에 입성했다.

안병직, 신지호, 김영환, 최홍재 등 ‘전향 우파’들은 건국절,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북한 인권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뉴라이트 계열의 주장은 이명박 정부 내내 이념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계간 <시대정신>의 편집위원인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61) 등이 줄기차게 주장한 ‘1948년 건국설’은 현실화될 뻔했다. 2008년 7월 한나라당은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가 야당의 반발로 2개월 만에 철회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주요 주제는 북한 인권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인권상’은 2009년부터 3년 연속 북한 인권단체에 돌아갔다. 2011년에는 아예 뉴라이트재단 이사를 지낸 홍진표 시대정신 편집인(49)이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이 됐다.

뉴라이트 학자들이 주축이 된 교과서포럼과 교과서포럼 회원들이 주도한 현대사학회는 일부 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좌편향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2008년 식민지 근대화론, 이승만·박정희 긍정적 재평가론이 담긴 <대안교과서>를 펴낸 데 이어, 2011년에는 <대안교과서>의 내용을 토대로 교육과학기술부에 ‘역사교육과정 수정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당시 현대사학회는 ‘객관적 사실’이라는 이유로 ‘강제병합 이후 일제에 의한 근대제도의 이식과 우리 민족의 수용’을 역사교육과정에 명기하자고 주장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현대사학회의 17개 요구안 중 10가지를 수용했다.

올드라이트 비판한 뉴라이트
그렇다면 대체 뉴라이트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뉴라이트전국연합, 뉴라이트재단(시대정신), 한반도선진화재단 출신 인사들이 뉴라이트로 분류된다. 뉴라이트 단체 출신이 아니어도 북한 인권운동, 이승만·박정희 재평가, 국가 정체성 등을 강조하는 세력을 포괄적으로 뉴라이트로 묶기도 한다.

‘올드 라이트’ 측에서는 자신들을 뉴라이트로 묶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서정갑 국민행동본부장(72)은 “뉴라이트와 정통보수세력의 차이를 잘못 알고 아직도 ‘뉴라이트 서정갑’이라고 여기저기서 많이 부르더라”고 말했다. 서 본부장은 “우리는 뉴라이트 쪽하고 역사도 다르고, 김진홍 목사를 비롯한 뉴라이트 주도 인사들은 원래 보수 쪽에서 기피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좌파정권(참여정부를 지칭하는 표현) 종식을 위해 뉴라이트와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계간 시대정신 편집위원인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51)는 “뉴라이트라는 표현은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동아일보 정치부장이던 2004년에 작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아일보의 뉴라이트 기획이 ‘뉴라이트’라는 말의 시초라는 뜻이다.

동아일보 뉴라이트 기획은 2004년 11월 8일자로 첫 기사가 나간 이후 이듬해 2월 23일까지 4부작 25회에 걸쳐 연재됐다. 여기서 동아일보는 뉴라이트를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집단”, “합리적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범보수·중도그룹”으로 규정했다. 동아일보의 뉴라이트 기획이 한창이던 2004년 11월에는 신지호 전 새누리당 의원이 주도한 자유주의연대가 창립했다. 이듬해 11월에는 뉴라이트전국연합, 2006년 4월에는 뉴라이트재단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

‘신(新)우파’라는 의미를 가진 뉴라이트는 ‘구(舊)우파’(올드 라이트)를 비판하며 나타났다. 신지호 전 의원은 자유주의연대를 창립하면서 “수구좌파와 수구우파가 주도하는 정치는 종말을 고해야 한다”, “기존 우파는 과거회귀적인 데 비해 우리는 미래지향적이다”라며 기존 보수세력과 선을 그었다.

뉴라이트가 ‘과거회귀적 우파’라고 보았던 세력은 이회창 총재 등 2004년 총선 이전 한나라당을 주도했던 세력과 뉴라이트 등장 이전의 보수시민단체의 핵심 인사들(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서정갑 국민행동본부장, 신혜식 독립신문 대표 등)이다. 2007년 대선에서 뉴라이트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지원한 것과 달리, 몇몇 ‘올드라이트’는 이회창 무소속 후보를 지원했다.

뉴라이트 내에서도 시민단체 성격인 전국연합과, 학자·전문가 그룹 성격이 강한 시대정신 그룹·한반도선진화재단 측의 입장은 다르다. 핵심적인 차이는 뉴라이트의 정치참여 부분이다. 2008년 말 한반도선진화재단 정책위원을 지낸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작고)는 보수단체 토론회에서 “뉴라이트는 죽었다. 제3의 길로 부르기에는 콘텐츠가 취약했다”고 말했다. 이후 김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가장 규모가 큰 행동주의 분파가 정치에 참여하면서 사상·정책운동의 여지를 축소시켰다”며 전국연합 측을 비판했다.

뉴라이트 내부의 차이, 외부와의 차이



지난해 12월 20일, 장제원 전 새누리당 의원이 국회 정론관에서 총선 불출마 기자회견을 가진 후 눈물을 흘리며 퇴장하고 있다. 장 전 의원을 비롯한 뉴라이트 출신 새누리당 의원들은 대부분 19대 총선에서 공천탈락하거나 낙선했다. | 박민규 기자비슷한 시기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도 “특정 이해집단과 밀착하면 시민운동으로서의 객관성을 상실한다. 나도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을 했지만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전국연합 측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선택했으면 신뢰하고 기다리자. 그가 능력에 맞게 일할 수 있도록 화끈하게 밀어줘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한편, 전국연합과 시대정신 그룹 모두 ‘올드 라이트’의 “정통보수 이념 주창”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2009년 9월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대표 김창남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교수(58)는 뉴데일리 기고글을 통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보수 우파의 소모적 이념논쟁도 자제할 필요가 있다. 이 대통령이 표방한 중도실용주의가 헌법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일부 우파인사들이 정체성 운운하며 거부감을 내비치는 것도 한 번쯤 재고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시대정신 그룹은 ‘올드 라이트’의 극우적인 색채를 경계했다. 대표적인 것이 안병직-조갑제 논쟁이다. 안병직 이사장이 2010년 8월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한국의 보수주의는 반공주의를 앞세우는 게 문제다. 종북주의를 제외한 모든 사상을 다 포용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자,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는 “한국의 국가이념은 반공자유민주주의다”라고 반박한 것이다. 이에 안 이사장은 다시 “이승만·박정희 두 시기의 반공주의와 권위주의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성장하는 데 필수불가결했지만, 다른 편에서 보면 자유민주주의가 반공주의와 권위주의에 의해 심각히 제한받았다”고 답했다.

하지만 뉴라이트 출범 후 8년이 지난 지금 뉴라이트를 ‘중도보수세력’으로 보는 시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동아일보는 뉴라이트 기획기사에서 “본보는 논의 끝에 (뉴라이트에 대해) 신보수주의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며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핵심 그룹인 ‘네오콘’을 연상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라고 이유를 밝혔지만, 뉴라이트가 미국의 네오콘, 일본의 신우파와 비슷하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았다.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정상호 박사는 <한국정치학회보> 2008년 가을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뉴라이트가 미국 네오콘의 후속편이라고 지적했다. 정 박사의 논문에 따르면, 뉴라이트와 네오콘은 지식인과 기독교가 주도한 신보수주의 운동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둘 다 감세, 규제완화, 작은 정부 등 신자유주의 경제노선을 강조하고 있다. 정 박사는 “뉴라이트의 네오콘 따라잡기는 한국 정치의 미국화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참여정부 시절 경제침체와 양극화가 가속된 것은 일본에서 신우파가 등장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뉴라이트 운동이 한창이던 2006년, 일본의 반전운동가이자 작가인 오다 마코토(작고)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신우파가 1990년대 경제침체 이후 등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중산층이 붕괴하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혹해진 일본의 경제현실이 신우파의 토대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몰락한 뉴라이트
뉴라이트는 몰락했다. 국회에 진출했던 뉴라이트 인사들은 19대 총선에서 대부분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지 못했다. 18대 총선에서 김근태 전 의원을 누르고 파란을 일으킨 신지호 전 의원, ‘반(反)전교조 투사’ 조전혁 전 의원도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영조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는 서울 강남을에 공천을 받았으나 역사관 문제로 중도탈락했다. 한반도선진화재단 출신인 나성린 의원(부산 진구갑)이 뉴라이트로서는 유일하게 19대 국회에서 살아남았다.

그 외에도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64)이 창당한 국민생각의 총선 실패, 이석연 전 법제처장의 서울시장 출마 좌절 등도 뉴라이트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들이다. 6월 16일에는 정형근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67)이 17대 의원 시절 유동천 제일저축은행장으로부터 수천만원이 든 쇼핑백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다.

뉴라이트 관련 인사들은 하나같이 “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김성회 전 의원은 “나는 안보연합에서 활동했을 뿐이고 전국연합하고는 별로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잘 모른다”고 말했다. 시대정신 그룹인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도 “지금 우리는 뉴라이트라는 이름을 쓰지 않을 뿐더러 이명박 정부 이후 뉴라이트 운동이라는 게 없어지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17만명의 회원을 가진 뉴라이트전국연합은 한때 보수 시민운동의 중심이었지만 현재는 실질적 활동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립자 김진홍 목사는 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직함을 옮겼다. 최인식 시민단체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사실상 뉴라이트 조직은 없는 거나 다름 없다. 현재 정형근씨가 전국연합 의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분이 운동가도 아니고 별 관심이 없다”며 “김진홍 대표도 여러 대표 중 한 명일 뿐 특별히 더 대표성이 있는 분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신혜식 독립신문 대표는 뉴라이트의 지나친 정치화가 몰락을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뉴라이트는 과거 보수세력의 권위주의적 모습을 개혁하겠다고 했지만 그들이야말로 이명박 정권과 유착하면서 ‘올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소통을 강조하던 뉴라이트전국연합 출신 청와대 시민사회비서실 행정관도 있었지만, 정통보수세력과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보수는 보수일 뿐인데 거기에 ‘뉴’라는 표현을 붙이면 선명성을 떨어뜨릴 뿐이다.”

이재교 시대정신 대표(52)는 4·11 총선 이후 시대정신과 바른사회가 공동주최한 토론회에서 뉴라이트가 혁신보다 정권교체에 집중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뉴라이트 운동은 사그라지고 말았다. (뉴라이트는) 보수혁신운동으로 시작했으나 보수의 혁신보다 노무현 정권과 그 주변세력에 대한 비판에 중점을 두었고, 노무현 정권이 몰락하자 표적을 잃었다. 이후 이명박 정권의 인기 추락과 더불어 침체되면서 뉴라이트는 존재도 없이 사라졌고, 자유주의연대를 계승한 뉴라이트재단은 뉴라이트라는 명칭마저 포기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표는 보수혁신운동의 필요성을 다시 강조하면서 몇 가지 보수혁신 과제를 제시했다.


그는 기존의 보수세력을 “수구우파”로 부르며 새로운 보수혁신 과제로 ‘기득권 세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 ‘냉전적 보수와의 차별화’를 들었다. 적극적으로 재벌과 대기업의 반칙을 비판하고, 반공주의와 폭력시위로 물든 “60~70년대 냉전적 사고를 온전히 지키고 있는 수구세력”이 “보수를 참칭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정치지도자의 소통을 강조하며 “차기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가 기자들을 상대로 설득하거나 국민들과 조근조근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런 지도자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207031802201&code=115#csidx4cdc20c0dcea5ceb26000badd93554d








[표지이야기]뉴라이트 인사의 공적 지원금 횡령
정용인 주간경향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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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피고인 양○○을 징역 7년 및 벌금 2억5000만원에, 피고인 김범수를 징역 5년에 처한다. …
압수된 증 제1, 2호를 피고인 김범수로부터 각 몰수한다. 피고인 양○○으로부터 2억3036만500원을 추징한다.”
지난 5월 25일 서울중앙지방법원 23형사부 법정. 피고들에게 적용된 죄는 양씨에게는 뇌물, 김씨에게는 횡령, 사기, 업무상횡령, 뇌물공여,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등의 법 위반이 적용되었다.

얼핏 봐서는 통상적인 뇌물수수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막은 경악스러웠다. 지난 6월 하순, 언론들은 일제히 “‘미소금융’지원금 꿀꺽해 재테크까지… 뉴라이트 단체 대표 징역 5년”이라고 김범수씨 사건을 보도했다.

“사실 깜짝 놀랐다. 민생포럼은 뭐고, 사람사랑은 또 뭔지 헷갈리는 부분도 있고, 갑자기 일이 터지니까 나도 당황했었다. 저 분이 정말 그랬나 하고 믿기지도 않고….” 사회적 기업 대표를 맡고 있는 A씨의 말이다. A씨의 회사는 김씨 사무실에 입주해 있었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나왔을 때 A씨는 사무실에 있었다. A씨도, 김씨 회사 직원들도 다 황당해 했다.

A씨에게 김씨는 사무실을 빌려 쓸 수 있게 해준 사람이었고,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김씨 주변의 수상한 돈 흐름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해 11월부터 흘러나왔다. 사법당국도 김씨와 김씨 주변인물들을 내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꼬리가 잡혔다.




종로구 청진동에 자리잡은 미소금융중앙재단 사무실. | 정용인 기자
결과는 깜짝 놀랄 만했다. 미소금융중앙재단으로부터 사회적 기업에 대한 시설 및 운영자금 대출을 위한 지원금 명목으로 지급받은 돈은 민생포럼이 3년에 걸쳐 65억원, 사단법인 사람사랑이 10억원으로 모두 75억원이었다. 지원금은 사회적 기업에 지출돼야 하며 지원금액의 80%가 소진돼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공적 지원금 유흥비 등으로 날려
김씨가 횡령한 금액은 75억원 중 23억3167만여원. 6개 예비 사회적 기업들이 지원받은 것처럼 문서를 위조했다. 이 중 미소금융중앙재단 사업총괄부장을 맡고 있던 양씨에게 흘러들어간 돈은 2억1653만원이었다. 3억4084만원은 현금으로 인출해 생활비 등으로 사용했다. 2030만원은 부인에게 생활비 명목으로 지급했고, 지인들에게 총 3억3000만원을 빌려줬다. 지인들 중에는 민생포럼과 사람사랑의 임원들도 있었다. 공적으로 지출되어야 할 돈을 개인 돈처럼 펑펑 쓴 것이다.

재판에서 김씨와 양씨는 2억1653만원을 차용금이라고 주장했다. 미소금융중앙재단의 한 간부는 “내 의견은 아니다”라고 전제하며 이들 측 주장을 들려줬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6촌인가 그렇다. 가까운 친척은 아니고 외가 쪽이라고 하는데, 친척이니까 서로의 속사정은 뻔히 알 것이라는 이야기다. 정말 뇌물을 받으려고 했다면 한꺼풀만 벗기면 다 드러나는 계좌로 주고받았겠느냐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항소도 준비한다고 하던데….”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이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된 것은 민생포럼이 복지사업자로 선정된 이후이며, 차용증도 작성하지 않은 채 무이자 무담보로 거액의 금전대차거래를 했다고 보기 어렵고, 돈을 빌려줄 당시에 김씨는 다른 경제적 수입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돈을 빌려줄 여유가 없었을 뿐 아니라, 양씨는 자신 명의의 적금, 골프장 회원권 등 자산을 갖고 있었으며, 치과의사인 부인이 부동산 및 금융재산 등 상당한 재력을 보유했다는 점 등을 들었다.

양씨와 김씨는 미소금융중앙재단 인근 종로구 청진동 소재 유흥주점에서 적게는 30만원, 많게는 288만원의 향응접대비를 썼다. 음주는 주중에, 골프 접대는 금요일과 주말에 주로 이뤄졌다. ‘범죄 일람표’에 따르면 양씨는 술자리에 항상 3~4명을 대동했다.

납득되지 않는 부분은 미소금융중앙재단의 다른 임원은 두 사람의 공모를 정말 몰랐느냐는 것이다. 양씨가 술자리에 데리고 간 사람들은 도대체 누굴까. 앞의 재단 간부는 “검찰도 조직적 수뢰를 의심해서 사람들을 여럿 소환했다. 추가적으로 구속된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재단 내부에는 같이 간 사람이 없다는 뜻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감독·관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정기 현장실사를 나간 재단의 직원이 통장 거래내역을 확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양씨는 “통장 거래내역을 확인한 결과 대출금이 수혜자에게 적정하게 대출되고 있었다”는 내부 보고서를 결제했다. 결국 양씨가 다 조작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앞의 재단 간부는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가 현장파악에 소홀했다는 지적은 맞다”고 말했다.

궁금한 것은 또 있다. 무려 23억원을 횡령하는 과정에서 김씨가 관여한 민생포럼과 사람사랑의 직원들은 어떻게 모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언에 따르면 김씨는 열쇠를 채운 금고를 두고 따로 관리했다. 다른 지원기관 관계자는 “김씨가 횡령한 돈과 관련해서는 김씨와 김씨 최측근 인사만 관리를 했기 때문에 일반 직원들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근무했던 직원으로부터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김씨 관여 단체 뉴라이트 “맞다”
김씨가 ‘뉴라이트’ 쪽 사람이라는 언론 보도에 대해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민생포럼과 함께 사업자로 선정되었던 민생경제정책연구소 전직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번인가 김씨를 만난 적이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의 전력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적어도 뉴라이트 쪽 사람은 아니다. 대선 때 박영준 전 차관 등이 만든 선진국민연대 쪽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진국민연대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인사에게 물어봤다. “김범수? 처음 듣는 이름이다. 우리와 같이 일한 적은 없다. 이번에 터진 횡령사건 이야기는 얼핏 들었는데, 워낙 선진국민연대를 팔아먹던 사람이 많았으니까.”

사실 ‘휴면계좌의 돈을 사회적 기업에 대출하자’는 아이디어의 애초 제안자는 뉴라이트 쪽이 아니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상임이사를 맡던 시절, 희망제작소에서 제안한 사업이다. 당시 희망제작소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의 말이다. “‘아, 그거 아이디어 좋네요’라는 반응이었습니다. 청와대에서 비서관도 와서 보고까지 했습니다. 그 자리에 김승유 행장(미소금융재단 이사장)도 있었고.”


뉴라이트 단체들이 들어오면서 사업 주체가 갑자기 바뀌었다. “이게 돈이 된다고 생각했겠죠. 자기들끼리 아귀다툼하다가 결국….”

뉴라이트가 관련 없다는 민생경제정책연구소 쪽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본지가 입수한 재단법인 사람사랑의 연혁 및 조직표를 보면 2010년 11월 11일 출범한 법인의 이사장은 박효종 서울대 교수가 맡은 것으로 되어 있다. 박 교수는 이른바 대안교과서를 만들어낸 교과서포럼의 공동대표다. 교과서포럼은 2005년 만들어진 ‘뉴라이트네트워크’ 참여단체다. 사회적 기업 지원단체의 한 인사는 말한다. “솔직히 분통터진다. 사회적 기업과 같은 분야는 이념을 떠난 분야다. 뉴라이트라는 사람들이 단체를 급조해서 치고 들어오는데, 결국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이 판을 말아먹고 안 좋은 이미지만 남긴 것 아니냐.” 김씨 사건은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속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5년 넘게 어렵게 쌓아온 사회적 기업 사업에 대한 신뢰에 심각한 피해를 끼쳤다는 사실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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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207031802271&code=115#csidxa784b56adcc88358b50063bdad51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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