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6

1702 5.18, 유월 항쟁, 촛불 정국 지킨 장태원 선생


장태원 선생 “나중에는 주리원 거기가 꽉 차버렸어”
기획/특집 / 이채훈 / 2017-01-25



장태원 선생. 그는 누구보다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열심히 했다. 장 선생은 지금도 언양에 산다. ⓒ박주석 기자


“야권 배제 안 된다고 보고 포용해”



“그럼 무슨 어디 대학 그렇게 되잖아. 그건 좀 그렇더라고.”



장태원 선생의 첫인상은 페이스북 상의 ‘대학과 학번을 밝히지 않습니다’를 현실에서 실천하고 계시는 소탈 그 자체였다. 몸과 마음에서 세월을 거스르는 젊음이 느껴졌다. 과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한 한 재야운동가가 박근혜 정권 이후 코드인사로 찍혀 물러났을 때를 언급하면서는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절차적 민주화를 쟁취한 유월 항쟁을 이야기하는 뜻 깊은 자리에 블랙리스트 언급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씁쓸했다. 그는 87년 6월 전후 울산의 민주화운동 공간을 회고할 수 있는 산 증인이다. 최근 들어 울산 촛불에도 빠짐없이 참석한 그에게 87년 항쟁과 지금의 촛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항쟁을 움직인 건 청년들이었지"


이종호 편집국장(이하 ‘이’)=울사협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장태원 선생(이하 ‘장’)=울사협이 만들어지는 건 울산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소규모 조직들이 학생이면 학생, 노동이면 노동 이렇게 개별적으로 존재했는데 그때 목사, 신부님들 하고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울사협) 아래 뭉치기 시작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봉사하는 식으로 참여, 결합했지. 나는 울사협 부설 노동문제상담소의 소장이었고 노옥희 선생은 와이엠씨에이 교사선언으로 학교에서 해직돼 상담소 간사를 맡았지. 노옥희 선생은 그전부터 교사 운동하다가 그 사건에 연루돼 해직됐고 실제로 상담소도 그가 주도적으로 하게 됐지.



나도 활동이야 했지만 젊은 사람들이 굉장히 열심히 했어. 기억에 그땐 홍보하는 방법이 유인물 만들어 뿌리는 거 밖에 없었거든. 밤새도록 만들어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그땐 그거 뿌리다 잡히면 그냥 달려가는 거니까. 몇 사람 있어. 저녁에 딱 모여가지고, 외곽으로는 목사님이나 우리들이 하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건 청년들이 핵심적으로 참여했었지.



이=처음에는 가톨릭농민회를 하셨잖아요?



장=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계속 언양 살아. 농민회 활동하던 사람인데. 어느 날 누가 언양에 찾아와. 울산에 지역 활동을 좀 하고 그래야 하는데 인적자원이 너무 부족하대서 결합하게 됐지. 울산 오기 전에는 부산 사회선교실천협의회 멤버였어. 언양에 있으면서 부산하고 연결이 된 거야. 활동은 회의나 참석하는 정도였는데 그 다음부터는 울산으로 참석하게 됐지.



이=유월 항쟁 당시 울산의 시위는 어땠나요?



장=박종철 군 숨진 사건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하기로 약속이 잡혀있었는데 울산에서는 어떻게 할 거냐 미리 깔아놓고서 선두 지휘부를 어떻게 구성할 건지 논의했지. 옛 주리원백화점 골목길 안에서 핵심멤버 손덕만 신부, 이완재 목사, 김진석 사관, 전재혁 신부하고 나하고 몇 사람이 현수막에 앞에 서니까 딱 맞더라고. 그 정도 멤버였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구체적으로 얼마나 모일지 짐작할 수 없었는데 골목에서 나와 주리원 앞에 서기 시작하니까 한두 사람씩 붙어. 주리원 지나서부터는 100미터 좀 안되게 상당히 모여들기 시작하더라고. 나중에는 거기가 완전히 꽉 차 버렸어. 최루탄 날리고 그랬지.



그게 3월이야. 3월 1일이었는데 전국 시위가 조직된 데 맞춰 울산도 하게 됐지. 주로 논의하던 장소는 울산성당. 사람들이 모이기 가장 용이했고. 손 신부님이 아주 꼿꼿하게 그걸 했지. 그땐 교구장도 좋게 안 봤고 특히 기관들 동원해서 전화하고 별 희한한 욕도 듣고 그랬는데 굴하지 않고 챙겨주셨어.


이=울사협은 어디에서 출범했나요?


장=그때가 86년일 거야. 교회에서 출범을 했는데 대현교회였을 거야. 대현동. 사진이 있더라고. 사무실은 신정동에 있다가 처음에는 시청 가까운 이면도로에서 나중에는 신정시장 근처에 있다가 그 다음에 성남동에서 가장 오래 있었어. 그땐 울산민주시민회였어.


민족학교 수배 때 ‘황당’...여전한 농촌사랑

이=울산의 유월 항쟁은 다른 지역과 어떤 점이 달랐습니까?

장=그때 기억으로는 국민운동본부를 만들면서 전체적으로 전국본부를 만들면서 당시의 야당을 포함시키자는 방침이었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야당을 수용을 못하더라고. 야당도 기성정치인이고 해서 배타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울산에서는 야당 사람도 같이 해야 한다, 현 시기에서는 그렇게 같이 노력하는 게 맞다, 그래서 심완구 씨가 국회의원도 아니고 야당 한다고 돈도 없고 그런 상황이었는데 같이 했어. 대번에 같이 하고 성남동 아스팔트 위에서 최루탄 가스도 마시고 그랬지.

차라리 배제하는 것보다는 그게 좀 낫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 보니까 전국단위 중에 국민운동 본부가 면, 리 단위까지 조직된 데가 있었어. 대단했었지. 안성이나 적극적으로 활동한 데는 그랬었지. 그때 전국조직부장이 나랑 잘 아는 사인데 경남 함안 사는 이병철 씨가 조직부장하면서 당시 와이에스 밑에 있던 최형우 씨를 데리고 다니면서 지방 조직을 해나갔어. 그걸 잘했는데 마무리를 못한 거지.

이=왜 그랬을까요?


장=자기들끼리 적당히 타협한 거지. 개헌 과정에서 대통령 직선제 겨우 그거 하나 한 거 같아. 나중에 이야길 들어보니까 협상을 와이에스 쪽 두 사람, 디제이 쪽 두 사람, 노태우 쪽 두 사람이서 했으니 국민운동을 한 성과물을 거기다가 다 줘 버린 거야. 그러니 자기들끼리 적당히 해가지고 대통령 직선제 하나 한 거지.


“난 그거 단일화될 줄 알았어.”


그러고 나는 항쟁 지도하고서 7월 말에 잡혀갔어.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남목고개 넘고 할 때가 8월인데 나는 그전에 노옥희 씨랑 먼저 잡혀 갔어. 나중에 그 그룹들이 들어오더라고. 남부경찰서 대용감방에 있다가 그해 연말에 나왔어. 울산경찰서가 지금 페다고지 맞은편에 있었는데 거기서 조사 받고 이쪽으로 넘어왔지. 있다가 나오니까 디제이하고 이 와이에스하고 단일화를 못한 거야. 못해가지고 결국은 노태우한테 준거지. 난 그거 단일화될 줄 알았어. 단일화를 시키려고 하는 서울 친구들과 교감이 있어서 가끔 소식을 들으면 되지 않겠냐 했는데 막바지에 원칙적으로 단일화해야 한다고 해놓고 나중에 가니까 안 되는? 거야.



이=87년 대선 당시 울산 민심은 어디로 기울었나요?



장=와이에스 디제이 갈렸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소위 ‘꿘’에서는 와이에스보다는 디제이가 더 비판적 지지가 많았고 그래갖고선 87년 지나고 하면서 그 민주시민회, 울산민족학교를 88년부터 했지. 그때 박종희라고 지금 청주에 있는 종희가 그때 조직하고 왔다갔다 만들고 고생 많이 했지.



이=민족학교는 구성이 어떻게 되나요?

장=교장은 나고,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따따부따 연재하는 이재권이 뭐 강의를 좀 했던가. 그리고 김창현 씨도 민족학교 때문에 국가보안법으로다 엮였거든. 민족학교 2기까지 하고서 도망 다니는 시점이었는데 법적으로 두 가지를 걸대. 하나는 사립학교법상 학교라는 명칭을 써서 안 되고 또 하나는 강의 내용 중에 국보법 위반 사항이 있다고 하더라고. 중공업 노동자 중에 열심히 해서 반장도 하던 이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놈이 프락치였어. 인물도 좋았는데 하여간 그가 처음부터 그런 거 같진 않던데 동창회한다고 어울리고 그랬는데. 아, 그리고 중공업에서 골리앗 크레인 투쟁이 일어나고 그 연루자 중에 80퍼센트 이상이 민족학교 출신이야. 추산해보니 그 정도 된대. 거의 모든 활동가들이었지.

이=수배는 89년에 되셨어요?

장=그렇지. 풀린 게 90년인가 91년인가. 언양은 1년 정도 떠나있었지. 몇 달 지나면서 보니까 그건 내가 울산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었던 거야. 잡으려고 하면 잡을 수 있는데 내가 울산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팔다리를 묶어놓으려 그랬더라고. 울산 양산 이쪽으로만 출입을 막고 부산만 오가도 괜찮게 해놨더라. 아 지독해.



끝까지 그걸 안하고 내가 수배 조금 하고서 경찰에 가서 간단하게 조사 받고 끝냈는데도 지명수배를 안 푼 거야. 93년 ‘우리농촌살리기운동’ 할 때 멤버들 데리고 일본을 가려고 서울에서 여권을 신청하는데 울산 검찰에 다녀오셔야 된다고 하더라고. 지명수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절차상 문제가 있나보다 하고 내려갔는데 현장에서 체포를 하는 거야. 하하하.



박주석 기자=황당하네요.



이=아, 황당하더라고. 마침 와이에스 때여서 대통령이 되면서 뭘 좀 해본다고 어떤 걸 꾸몄냐면 저거 민주평통이 원래 완전 꼴통보수로 만들어져 있는데 청와대 인사나 밖에 민주화운동한 사람들로 변화를 시키자. 그게 각 지역에 있는 핵심이 50명인데 그 운영위원을 30명 정도만 장악을 하자. 그래가지고 서울에서 신부도 들어가고 개신교에서 다섯 명 천주교 다섯 명 시민사회 몇 명 이렇게 30명을 맞춰서 상임의원을 만들어서 운영위원으로 돼야 하니까 그 정도면 급이 군 대표 정도? 서울에서 그거 내가 해야 된다고 해서 이쪽에는 당신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하러 갔지.



결국 검찰에서 그걸 내민 거지. 민주평통 상임위원인데, 그래서 검찰이 구속을 못 시키는 거야. 현행범이 아니니까 말이지. 그런데 검찰에서 하는 말이 신병은 인수해가야 합니다. 당신이 나가면 나중에 필요할 때 누가 데려올지를 세워놓으라고 하더라고. 윤인섭 변호사한테 전화해가지고 나 신병 좀 인수해가라. 그렇게 해가지고 나왔지. 그때는 송철호 변호사가 내 변론을 했으니까 윤변이 울산에 온지는 아주 얼마 안됐을 거야.






그는 누구보다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열심히 했다. 대담 중에도 농업개방 반대를 외치며 칸쿤에서 숨진 이경해 열사를 추억하며 국내에서도 그 전에 우루과이라운드에 맞서 농촌살리기운동에 앞장선 몇몇 동료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하신 건 언제죠?



장=우루과이라운드 할 즈음 내가 전국 가톨릭농민회 회장이었는데 그 당시에 천주교 쪽에다가 내가 저걸 한 거야. 천주교가 조직적으로 되든 안 되든 뭘 좀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 농민들이 점점 더 힘들어져가고 그러는데 손 놓고 볼 수만은 없다. 그게 받아들여져서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를 만들게 돼. 그해 연말에 농민회장 임기가 끝나고 집에 있을 땐데 그 농촌운동 실무를 책임질 사람이 있어야 된다 해서 내가 서울에 올라오는 게 제일 낫겠다는 거야. 그래서 올라가서 교구마다 본부를 만들고 교육하고 햇수로 4년 하고 내려왔지.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는 가톨릭이 주도적으로 하고 아닌 사람들도 다 포용하고. 문호는 개방돼 있고. 우리가 물적 인적 토대가 조직돼 있으니까 그걸 활용한 거고.



이=울산 오시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장=요샛말로 농촌진흥청을 농촌교도소라고 했어. 교도하는 데라고 농촌진흥청. 요즘 말로는 농업지도소라고도 안하고 농업기술센터. 나는 진흥청, 농업기술센터에서 일했어. 아마 그게 독일 아덴하워재단이라고 거기서 지원을 받았을텐데 소위 농촌지역사회개발요원이라고 있는데 지역공동체를 만들고 지역사회를 민주적으로 하고 생산력도 높이고 하는 그 새마을운동, 뭐 비슷한. 관제라기보다는 한 사람이 상주하면서 멀티로 농사지도도 하고 문맹퇴치도 하고 때로는 위생 보건까지. 외부에서 사람 지원받아서 그런 것도 하고 그런 거를 한 몇 년 안성에서 했어.



그때는 소위 사람들 모으고 모아서 마오쩌둥 옷 같은 재건복 있잖아? 그걸 어떻게 예전에 처음 만들었냐고 하면 양복을 뜯어가지고 양복기지를 뒤집어. 그땐 기지도 귀하고 재건복을 맞추려고 하면 비싸고 하니까 자기가 입던 옷을 해체해서 뒤집으면 새것 같아. 천이 밖에는 낡지만 안에는 안 그렇잖아. 그러고 댕기고. 나는 뭐 양복도 뒤집어서 그러진 않았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다니더라고. 그러면 그 옷 한 벌 주고 자전차 하나 주고 그게 굉장한 특별대우였지. 그 지역의 몇 개 리, 일 년이면 일 년, 이년이면 이년 활동도 하고 평가도 하고. 공무원이었지. 농촌지도를 하는 공무원. 그거 하다가 군대 갔어.


평범한 공무원이었던 그의 삶을 바꿔놓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음 호에 계속된다.


<특별취재팀>
총괄, 대담=이종호 국장
사진=박주석 객원기자
기록=김규란 기자
정리=이채훈 기자


5.18, 유월 항쟁, 촛불 정국 지킨 장태원 선생
5.18, 유월 항쟁, 촛불 정국 지킨 장태원 선생기획/특집
특별취재팀 / 2017-02-08 13:06:46



의도치 않았지만, 한국 현대사의 격동에 장태원 선생이 있었다. ⓒ박주석 객원기자


“사람 사는 세상” 큰절하던 무위당 선생 기억

촛불 염원 현실화 위해 구체화 지혜 발휘해야




<지난 호에 이어>


“다들 한 데서 촛불 들고 있는데 나만 방안에 있음 되겠어?”


5.18, 유월 항쟁, 그리고 최근의 촛불 정국까지. 장태원 선생은 늘 현대사 격동의 현장 한복판에 있었다. 그는 이러한 삶의 움직임이 의도하거나 무언가 바라고 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재차 강조했다. 시국의 변화 속에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는 삶, 그래서 부끄럽지 않다고 자부하는 장 선생의 현대사 속 회고와 삶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본다.


이종호 편집국장(이하 ‘이’)=가톨릭농민회 회장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장태원 선생(이하 ‘장’)=서울 가기 전에 했으니까 그게 93년인가 90년 92년 임기가 2년. 그러고 나서 와이에스 정권 들어서고 나서 그러고 서울 올라가서 평통 상임의원도 하고. 평통은 할 게 없어. 일 년에 회의 두 차례 하는 거뿐인데 직만 가지고 있는 거지. 처음에는 운영위원까지 만들어서 평통 내부를 변화시키려고 했는데 나중에 다 밀려나서 상임위원까지만 만들고 운영위원은 못 만들더라고. 그래서 임명만 돼서 우리가 생각한 건 생각도 못해보고.?


이=그럼 96년에 다시 울산 내려오셨겠네요?


장=아니, 울산에 있으면서 서울 왔다 갔다 한 거지. 집은 울산에 있고 서울엔 방 한 칸 얻어놨지. 93년에 갔다 96년에 왔지.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장은 신부가 하고 나는 사무국장으로 실무총책임을 맡았지. 그 이후에는 각 연합 연대단체 지역 활동하고 울산 경실련을 공동대표 하고 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하고 환경운동연합 만들고 쭉 그랬지.


그는 과거 경기도 안성에서 농촌지도자로 일했다. 그런 그가 울산으로 오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그 이면에는 아픈 개인사가 있었다.


이=울산에는 어떻게 오게 되셨어요?


장=그때(안성에 있을 당시, 5.16 군사정변 직후)만 해도 박통이 중농정책도 아주 잠깐이지만 하려고 했고 잘했어. 혁명군이니까 그랬을 수밖에 없는데 군대 가서 3년 있다 나오니까 완전 개판이 됐더라고 사회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소위 ‘와이롱’(뇌물?) 있잖아. 내가 복직하는데 자리를 안 만들어 준거야. 난 여기 있다가 갔잖아. 그럼 돌아오면 당연히 복직시켜줘야 하는데. 물론 지역사회개발요원이니까 처음에 일자리는 없어도 어디다 만들어주든지, 근데 차일피일 끄니까, 일 년 이상 넘어가니까... 나중에 보니까 복직하는 데 돈을 줘야 하는 거야. 이야. 그래서 욕 좀 해주고 떠났지 뭐.


울산에 오게 된 거는 그건 참 기구한 거지. 얼른 다른 데 저거 할 데도 없고 마침 우리 부친 친구가 회사의 전무를 하는 사람인데 한국양회, 시멘트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다가 전봇대 만들고 빔 만들어서 육교를 만들어놓고 하는 기술을 일본에서 배워 와서 하는 회사 전무인데 거의 사장이야. 그 사람이 자기 도와달라고 해서 거기에 좀 있었지. 결국에는 시게 다쳤어. 현장에 가가지고 옛날에 서울 한강다리 들어가기 전에 입체교차로가 있었는데 다리 밑으로 지나가는, 지금은 다 뜯어냈지만 그거 공사하는 현장에 갔다가, 서울시 공사니까 시에 공사기사하고 나는 회사사람하고 그거 하다가, 그때는 크레인이나 이런 장비가 없어. 미군부대에서 나온 고물 가지고 그물을 걷어가지고 무거운 걸 들다가 확 무너졌는데 나는 거의 어깨랑 닿다시피 서 있었는데 기사는 완전 작살나고 나는 요 정도? 그래서 병원 생활 한 1년 쯤 하고 살아났지.




그래서 언양 온 거는 도자기 만들러 왔어. 부산에 한 번 왔는데 일본 친구들이 우리나라 도자기를 좋아하잖아. 이걸 막 가져가더라고. 해운대에 골동품상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집에를 놀러 가니까 백자 같은 거를 내가 볼 때는 굉장히 좋은 건데 거기다가 엉터리로다가 페인트를 칠해가지고. 공항에 가면 지금은 모르겠지만 문화재 감정 밀반출 감식하는 조가 있는데 페인트로 해놓으면 그냥 통과하는 거야. 그래서 미리 주고 통과시키고 그러는 거야. 문화재감정원에 있는 놈이 돈 받고 다 통과시켜주고 그랬더라고 알고 보니. 그럼 저놈들의 요구를 만들어서 충당시켜주면 되겠다, 그때 마침 도자기 만들 줄 아는 사람도 있었고. 언양에 와 가지고 항아리 만드는 공장에 그걸 반쯤 빌려서 만들고 굽고 그랬지. 71년에 언양 왔어. 잘하다가 74년에 문세광 사건이 일어나니까 일본 관광객들 다 끊어지고 일본에서 돈을 들고 한국으로 못 오게 했어. 제도가. 그래도 유지하다가 구체적으로 내가 소위 운동판에 뛰어들면서 도자기는 못했지.


70년대 중반부터 가톨릭농민회하고, 최영준 씨가 나보다 1년 더 빨라. 최영준 씨는 동생이 와이엠시에이의 농촌부 간사를 했거든. 최석진이. 언양성당에 뭐 촌사람이 하나 와가지고 선전을 해야 한다고, 농민회에 가입도 시키고. 한번 교육을 하자, 농민들 강당에 모아놓고 본부에서 교육부장이 와 가지고 교육을 했지. 내가 교육을 들으러 대전에 갔어. 분회장 교육인 3박 4일 동안. 대전에서 집중교육하고 전달교육도 하고 활동을 깊이 관여하게 됐지. 내가 농사를 짓는 사람도 아니고 어중간한 거야. 그래도 당시 농업분야는 내가 아는 분야고 점점 더 황폐해지고 하니까 자꾸만 빠지게 되더라고. 그렇게 살다보니까 이렇게 됐어.


취재팀은 장태원 선생에게서 현재는 잘 알려지지 않은 12.12사태 전후 울산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오히려 뜻밖의 증언을 듣게 된다.


이=1970년대 말 80년대 초반의 울산은?


장=그때는 내가 잘 모르고. 부산 쪽에는 개별적으로 했고 서울 조금 다니고. 74년에 명동성당에 삼일기도회가 있었는데 우리 성당에 신부가 민주화운동에 관심이 있어서 언양성당의 신부가 나하고 의기투합해서 서울에 같이 갔어. 몇 번을 왔다 갔다 하고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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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원 선생. ⓒ박주석 객원기자


사실은 천주교 쪽도 있고 농민회도 있고 재야운동권하고는 75년 그때서부터 하고 그랬지. 80년에 내가 한국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 회장을 했었고 연합회 회장을 하면 전국 상임위원이 되잖아. 1980년 광주 5.18 나고 19일에 광주에 갔었어. 모임이 있어서. 5.18 때문에 간 건 아니고 모임 때문에 광주 북동성당에 갔는데, 거기 모였는데 19일에도 헬리콥터가 계속 뜨고 시내에서는 연기가 나고 슬슬 금남로 쪽으로 가보자고 해서 갔는데, 광주 가톨릭센터로 가자고 해서 갔는데 못 가게 하더라고. 근데 그게 참 빨라. 그러고 있는데 회의도 대충하고 이제 헤어질 단계가 되니까 그 5.18날 이뤄졌던 상황에 대해 유인물이 나왔어. 유인물이 나오고 동아일보인가 호외가 있더라고. 동아일보지 아마. 호외를 요만하게 있었는데 그게 우리한테 전달이 돼가지고 우린 그걸 들고서 전국으로다가 퍼뜨린 거야. 그 뒤에는 계속 김현장이가 광주에서 유인물을 하나 만들면 대전까지 와서 대전농민회본부에서 제대로 대량으로 만들고 해서 전국으로 배포하고 그랬던 적이 있지.


이=지학순 주교, 장일순 선생님은 원주 가서 보셨어요?


장=나는 79년 농민회 가입하고서 얼마 안돼서 원주 가서 뵀지. 장일순 선생님과의 기억은 크게 없어. 그 양반은 내가 느끼기에 아주 대단한 양반이라고 생각하는 정도. 그 대단하다는 게 무슨 파워풀하고 그런 게 아니라 이 생각하는 마인드가 좀 다르시더라고. 원주에 가면 그 김지하, 지하는 그때도 술 먹고 그러니까 지하는 그 전서부터 면이 좀 있고 그러니까 모임에 가면 지하는 와서 술 먹고 장 선생님은 와서 간단히 한 말씀하시고 술도 먹고 아주 농담도 잘하시고. 그 양반에 대해서는 감명 받은 게 한살림 초기에 86년인가 저기 원주에서 전국 한살림 일꾼들 연수회가 있어서 갔는데 강원도 청소년 수련원 치악산에 있는 큰 강당에서 먹고 자고 하는데 끝나는 날 마치고 뭐 밖에 나와서 술도 한잔 먹고 마무리하고 춤도 추고 남자들끼리 호쾌하게 잘 어우러져가지고 그랬는데. 그때 그 어른이 문을 열고 딱 들어오더니 거기다 대고 큰 절을 하시는 거야.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 이렇게 돼야 한다고. 격의 없이 어우러지는 당신은 이런 세상을 원하셨던 거지. 그때 같이 오셨던 연세 많은 분이 기세춘 선생이던가. 그 양반도 같이 밥 먹고 그랬지.


# 촛불, 새로운 세계, 남다른 감회


장 선생은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울산 촛불 집회에 신병 치료를 위한 일정을 빼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유월 항쟁 이후 최대 항쟁을 보며 87년과 2016~현재까지 두 번 모두 동참한 입장에서 그 감회가 남다를 법하다.


이=지난 촛불 집회 때도 말씀하셨지만 이번 촛불 항쟁을 보며 느끼신 바는 무엇인가요?


장=87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촛불을 한다든지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변화의 열망을 표현하잖아. 그런데 마무리를 못해 그래서 나는 처음에 촛불을 들고 두 번째 가서 그렇게 말했거든. 근데 지금은 내가 서울을 가서는 이렇게 저렇게 말할 처지는 못 되고. 처음 촛불을 들 때부터 마무리할 준비를 해야 한다. 말하자면 소위 촛불 드는 사람들이 이게 나라냐? 이러면 그럼 네가 원하는 나라는 뭔데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야. 그럼 이런 이야기를 해가면서 촛불이 타오르면 거기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내고 그걸 구체적으로다가 구슬을 꿰는 것은 정치를 이리 끌어내야 하는 거야.


나는 이게 아주 쉽게 될 줄 알았거든. 근데 그걸 안하더라고. 촛불 처음에 될 지 안 될지 정치하는 놈들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다가 촛불이 확 커지니까 여기저기서 전부 광화문으로 오잖아. 그때 꽉 붙들어 앉혀야 하는 거야. 너 촛불이 원하는 게 뭔데, 각 정당 대표들 대선 후보들이 모여서 구체적으로다가 어떻게 실현할 건데, 만들어내라. 마주 보고서 요구하는 거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거 하고 정치를 변혁하는 거하고 거기서 합의를 해서 양측이 도장을 꽉 찍어야 하는 거야. 촛불을 아무리 들더라도 쿠데타 아닌 이상 여기서 법 하나 못 고치잖아. 그건 결국 국회의원들이 해야 되거든. 보기 싫어도 거기서 해야 하는 건데 인간적으로 보기 싫고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거기서 이뤄져야 하는데 그러면 촛불이 훨씬 지혜로워져야 하는 거야. 이걸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해야 되고 말이지.


이렇게 끊임없이 토요일마다 할 필요가 없는 거야. 점점 피로해지고 숫자가 줄고 그렇게 될 거란 말이지. 그 다음에 저렇게 되면 끝까지 남는 사람은, 사람이 제일 힘든 건, 사람을 제일 소모시키는 건 사람을 미워하는 거야. 누구를 미워하게 되면 제일 먼저 상하는 게 저야. 이게 인간이 생태적으로 그래. 그러니까 기분 나쁘고 부부싸움 하면 스트레스 받는 게 그 거야. 상대에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욕하고 하긴 했는데 지가 먼저 스트레스 받는 거거든. 예를 들어 그렇게 만들어놓고 합의를 해놓으면, 제일 좋은 거는 시간 스케줄까지 합의해놓고 국회에서 어떻게 법 개정한다 하고, 헌법 안고치고 개정할 수 있는 건 어떻게 한다, 그런데 새누리당에서 반대한다, 그러면 촛불 드는 거야. 새누리당 아무개랑 반대한다, 그걸 촛불한테 보고하는 거야. 그럼 촛불 드는 거야. 그러니까 사안을 놓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두 달째 박근혜만 퇴진? 흠, 촛불의 지도부가 그런 걸 해야 하는데 지금은 늦었어.?


이미 새누리당 친구들은 오라고 해도 안 와. 처음에는 땅겨 올라왔다고. 지금은 문재인 밖에는 없어. 문재인은 촛불 하고 뭐 같이한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때는 뭐 저거 하고. 결국은 문재인 대통령 된다고 해서 할 문제 전혀 아니잖아. 이재명 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 전혀 아니잖아. 구체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키워드를 꿰어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법을 고치고 헌법 고치고 선거법 고치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하고 해내야 하는데 이게 수차 갈수록 사람은 줄고 점점 증오심만 쌓이게 된다고. 끌고 나가는 사람들이 말이지. 나는 그게 제일 나쁜 상황이라고 봐. 아까 같이 그렇게 한다면 날씨도 춥고 이렇게 요구해서 이렇게 한다고 했으니까 지켜보자, 언제까지 한다고 했으니 잘 하나 보자, 그게 시시각각으로 보도될 거 아냐. 이거 제대로 안 한다. 들자. 언제쯤 들자. 그러면 들고 한단 말이야. 다음에 지켜보자. 능동적으로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마지막으로 87년 유월 항쟁의 개인적 의미를 말씀해주신다면?


장=유월 항쟁도 그렇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그렇고 내가 내 인생에서 보면 잘했으면 진흥청에서 공무원 열심히 해서 그러면 정치 운이 좋으면 진흥청장, 운이 나쁘면 진흥청장은 임명하다시피 하니까 코드가 딱 맞아야 하고 운이 나쁘면 국장해서 정년퇴임했을 텐데. 그것보다는 훨씬 낫다. 지금 삶이. 그래도 참 다행인 게 내가 이렇게 살자 저렇게 살자 계획하고 산 게 아닌데 어쩔 수 없이 간 거야. 촛불만 하더라도 지난주에는 내가 치과 수술해야 돼가지고 지난주에만 빠지고 처음서부터 끝까지 계속 갔는데 지금 여기 안 가면 어떡해. 이거 갈 때 가야 되는 거야. 끝까지 간 거지. 농민운동 시민운동하고 하는 게 내가 계획해서 뭐 사회를 바꾸자고 해서 가고 이거보다는 사회상황이 사람을 그렇게 이끌더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불편하더라고. 다른 사람들은 촛불 들고 있는데 내가 뜨뜻한 안방에 있으면 불편하지. 그럼 촛불 드는 거지. 그거랑 똑같은 거야. 그렇게 해서 살아왔는데, 잘 살았어. 잘 살았더라고. 하하하. 잘 살았더라고.


<특별취재팀>
총괄, 대담=이종호 편집국장
사진=박주석 객원기자
기록=김규란 기자
정리=이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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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촌로 - 어느 촌로의 노자 읽기
장태원 (지은이)다른경제협동조합2018-11-28





기본정보

336쪽
220*150mm
638g
ISBN : 979118968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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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는 오랫동안 농민운동, 환경운동, 시민운동에 몸담았던 바 있다. 저자는 인생 후반부에 노장을 깊이 있게 읽게 되었고, 이를 주변 사람과 함께 공부모임을 만들어서 같이 연구했다. 총 81장으로 되어있는 책에서 각 장의 구성 방식은 동일한데, 먼저 노자 원문을 소개한 다음 이 원문에 훈독을 달아서 읽기 좋게 했으며, 이어서 원문의 중요 한문을 설명한다.

이어서 원문의 ‘직역’을 배치하여 고전으로서의 노자 내용을 음미할 수 있도록 한다. 직역에 이어서 펼쳐지는 ‘해설’에는 노자 원문에 대한 맥락 설명이 있고, 이어서 이의 현대적 함의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가미된다. 해설을 읽는다는 것은 한편 동서양의 문리를 섭렵한 저자의 식견을 음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해설을 통하여 최진립 장군의 삶, 다산의 시 애절양, 칼 폴라니의 사상, 야운선사의 자경문, 무위당의 노자 언급을 인용한다. 그의 해설은 시공간을 종횡무진 폭넓게 뛰어넘으면서 전개되지만 결코 난삽하지 않다.


목차


내가 만나는 노자 010
노자 1장 024

노자 81장 324
장태원 선생님의 노자 연구를 응원합니다 / 이남곡 330



추천글

우졸당선생의 노자이야기는 쉽고 간결하다. 보편적 상식에 닿아있다. 도가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소용과 기쁨이 있을 것인가. 선생이 전하는 소식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통해 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듣는 이들을 뜬 구름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딛게 해준다. 그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고 노자이야기 한 편이 다시 보태어진 까닭일 터이다.
- 이병철 (시인, 생태귀농학교장)

오래전부터 노자를 읽어왔지만 제대로 마친 적은 없었습니다. 마침 페이스 북에서 이남곡선생께서 장태원선생님의 해설본을 매일 한 장씩 81장을 올려주셨습니다. 두 분의 해설은 게으른 제가 비로소 노자를 연이어 끝까지 읽어 마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사회적으로 퇴직 연령에 해당하는 때에 이런 가르침의 인연이 닿았다는 것이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거듭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두 분 선생님에게 감사드립니다.
- 김태원 (인문학도, 초보 귀농자)

보내준 원고를 읽는 것으로 공부를 함께 했다.
도덕경, 그 심오한 뜻을 내가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물처럼 하면 만사형통’이라고 하는 교훈을 곱씹고 곱씹었다. ‘논밭에 스며들면 곡식을 여물게 하고 산에 스며들면 숲을 푸르게 하고 사람 몸에 스며들면 생명을 빛나게 하는 물’ 생각할수록 놀랍다.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하다. 세상어디에 이보다 더한 불가사의가 또 있을까.
원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도 모르게 우리 삶도 서로를 빛나게 하는 물처럼 흘렀으면 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참 좋고 고맙다.
- 도법 (실상사 회주)




저자 및 역자소개
장태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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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촌로>


최근작 : <노자와 촌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의 저자는 오랫동안 농민운동, 환경운동, 시민운동에 몸담았던 바 있다. 저자는 인생 후반부에 노장을 깊이 있게 읽게 되었고, 이를 주변 사람과 함께 공부모임을 만들어서 같이 연구했다. 이번에 발간하는 『노자와 촌로』는 이러한 공부 과정에서 정리한 것을 엮은 것이다.
『노자와 촌로』의 구성은 간결하고 설명은 명쾌하다. 총 81장으로 되어있는 책에서 각 장의 구성 방식은 동일한데, 먼저 노자 원문을 소개한 다음 이 원문에 훈독을 달아서 읽기 좋게 했으며, 이어서 원문의 중요 한문을 설명한다. 이어서 원문의 ‘직역’을 배치하여 고전으로서의 노자 내용을 음미할 수 있도록 한다. 직역에 이어서 펼쳐지는 ‘해설’에는 노자 원문에 대한 맥락 설명이 있고, 이어서 이의 현대적 함의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가미된다.
이 책의 해설을 읽는다는 것은 한편 동서양의 문리를 섭렵한 저자의 식견을 음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해설을 통하여 최진립 장군의 삶, 다산의 시 애절양, 칼 폴라니의 사상, 야운선사의 자경문, 무위당의 노자 언급을 인용한다. 그의 해설은 시공간을 종횡무진 폭넓게 뛰어넘으면서 전개되지만 결코 난삽하지 않다. 이 책은 노자를 가장 간결하고 정리한 저술에 속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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