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3

조선그리스도교연맹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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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그리스도교연맹

최근 수정 시각: 2019-12-06 22:48:08


분류
개신교 관련 단체
북한의 인물
북한의 문화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본부 청사

조선그리스도교연맹
Korean Christian Federation


1. 개요2. 역사3. 현황4. 평양신학원5. 성서와 찬송가6. 관련인물7. 관련문서8.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북한의 개신교 단체로서, 북한의 유일한 합법적 개신교 단체이다. 교파를 초월한 초교파 개신교 단체임을 표방[1]하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북한의 개신교인 전체를 포괄하고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단체이다. 약칭은 조그련이며 현 중앙위원장은 강명철 목사이다. 강명철 목사는 강량욱 목사의 손자이자 강영섭 목사의 아들이며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양신학원에서 수학했다.

북한의 다른 사회단체가 다 그렇듯이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역시 정부의 지시 하에 있는 관변(官邊) 단체다. 현(現)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장 강명철 목사는 한 인터뷰에서 지하교회를 폄하하고 그 존재를 부인하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2. 역사[편집]

조선기독교도연맹 총회장 김익두 목사

조선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장 강량욱 목사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1946년 11월 28일 조선기독교도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해방 직후 이북의 반공주의 성향 개신교 목회자들이 결성한 이북5도연합노회에 대항하여 친정부 성향 개신교 목회자들은 당시 이북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묵인과 지원을 받으면서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창립했다. 창립 총회에서는 일제시대 많은 부흥과 은사를 행한 명망있는 개신교 인사 김익두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중앙위원장에는 김일성의 외종조부이자 학창시절 스승인 강량욱 목사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총회장을 맡을 만큼 연맹에 협조적이었던 김익두 목사는 인천상륙작전38선을 넘어 북진하던 국군과 UN군을 지지한 죄로 총살됐고 이후 유일한 연맹의 지도자가 된 강량욱 목사는 83년 사망할때까지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중앙위원장을 지냈다.

강량욱 목사를 포함한 창립 주도자들은 연맹 창립 전부터 이북 정부에서 실시한 토지개혁에 찬성하는 등 적극적인 친정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토지개혁 이후에도 (기존 이북5도연합노회에서 주일 성수를 명분으로 반대한) 북조선인민위원회 선거에 적극 참여할 것을 주장하는 등 일관된 친정부 행보를 보였다. 연맹 창립 이후에는 이북 개신교계의 주도권을 놓고 이북5도연합노회와 적극적으로 경쟁했다. 이북 정부는 이렇게 자신들을 지지하는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북5도연합노회를 탄압했다. 결국 이북5도연합노회는 한국전쟁 무렵에는 주요 인사가 체포되거나 월남하는 등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은 한국전쟁 때에도 이북 정부에 적극 협조하여 북한군의 서울 점령 기념예배를 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특히 1950년 8월 5일에는 조선기독교도연맹 주관 하에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전쟁승리를 위한 기독교인 궐기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조선기독교도연맹 및 연맹 주도 세력은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강량욱 목사는 연맹 창립 이전인 1945년 11월에 조선민주당의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 2월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서기장이 되었다. 연맹의 다른 맹원들도 조선민주당 당원으로 입당·활동했으며 지방 인민위원회 공직에 피선(被選)되었다. 조만식이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연금된 후로는 최용건을 지지하는 당원들과 조선기독교도연맹 소속 개신교인들이 조선민주당을 주도했다. 이들이 주도하게 된 조선민주당은 조선노동당 등 정당들과 사회단체들이 가입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가입해 1948년 초대 최고인민회의 및 지방인민회의 선거에 공동으로 후보를 공천했다. 연맹 중앙위원장 강량욱 목사 자신도 조선민주당 소속으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피선됐고 이후에도 계속 대의원에 피선됐다. 강량욱 목사는 대의원만 맡은 것이 아니라 외교부문에서도 활동했고 정부에도 입각하여 1972년 부주석이 되었다. 1958년 11월에 조선민주당을 탈당한 최용건을 대신해 조선민주당 중앙위원장에 선출됐고 1981년 1월에는 조선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 조선민주당의 제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장으로 다시 선출됐다.

광복 당시 한반도 전체 개신교인의 2/3는 이북에 있었고, 이북의 개신교는 한반도 전체의 개신교를 주도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한 교회파괴, 정부에 의한 교회폐쇄 등으로 이북에는 단 하나의 교회 건물도 남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신자들도 전란 와중에 죽거나 대거 월남하고 더러는 이북 정부에 의해 반정부 인사로 지목되어 처형당하는 등 크게 감소하였다. 이북에 살아남은 개신교인들도 당장 생존의 문제와 전란 직후 이북 정부와 주민의 극도로 악화된 반기독교 감정 때문에 공개적인 신앙활동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 더군다나 1958~1959년 정부와 조선노동당의 대대적인 반종교 선전으로 인해 북한 개신교인들의 입지는 더욱 위축됐다. 이로인해 친정부 성향인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공개적인 활동조차도 한국전쟁 이후 오랫동안 사라졌다.

한국전쟁 이후 교회 건물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서 이북의 개신교 신자들은 가정에서 예배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현재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중추를 이루는 가정예배처소의 시초가 되었다. 가정예배처소의 실제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전 조선노동당의 간부로서 한국에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전향한 신평길의 증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그는 북한 정부에서 1960년대 말 '풀어주는 사업'을 통해서 원래 개신교인이던 사람들이 자신들끼리 가정에서 모여 예배모임을 가지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용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김흥수 목원대학교 명예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이 시기[2] 가정예배처소를 운영한 사람들은 전쟁 전부터 북한 정부에 협조하거나 전쟁 중 북한 정부에 공을 세웠거나 조선노동당 간부와 혈연관계에 있는 개신교인이 적지 않았다. 북한 정부에 일찍이 협조하기 시작해서 전쟁 후 가정예배처소 예배를 허락받은 사람 중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여동생 안신호 권사도 있다고 한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공개적 활동은 1972년 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재개되었다. 당시 강량욱 목사가 방한하여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대외적으로는 남한에서 일어나는 여러 시국 사건들에 대해서 다른 종교단체들과 함께 성명을 발표했고, 세계교회협의회(WCC) 등 국제 기독교 단체와의 교류도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는 목회자 양성을 위하여 1950년 7월 폐교되었던 평양신학교를 계승하는 평양신학원을 1972년 9월 개원했다.

1980년대에 WCC 등 국제 기독교 단체를 통해서 남한과 해외 한인 기독교인과의 교류도 시작되었다. 이때 접촉의 목적은 종교적인 교류에 있다기보다는 통일운동의 확산에 목적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종교적인 면도 없지는 않았다. 이때 북한의 개신교인과 교류하고자 한 남한 개신교인들은 주로 KNCC를 주축으로 하는 진보적, 개혁적 개신교인들이었다. 남북한 개신교인의 공식적인 첫 접촉은 1986년 9월 2-5일까지 스위스 글리온에서 WCC 국제위원회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서 이루어졌다. 이 회의에서 조선기독교도연맹 고기준 목사와 NCCK 강문규 목사가 평화통일을 주제로 발제를 한 후 성만찬과 성경공부를 함께 진행했다. 같은 도시에서 1988년과 1990년 두 차례 더 회의가 개최되었다. 글리온에서 개최된 세 차례 남북개신교간 회의는 각각 '제1차 글리온 회의', '제2차 글리온 회의', '제3차 글리온 회의'라고 명명된다. 하지만 제3차 회의 이후 글리온 회의는 재개되지 못한다.


1988년 11월 24일 제2차 글리온 회의[3] 중 찍은 남북개신교 관계자들 모습. 사진 맨 하단 좌측에서 세 번째 인물이 당시 조그련 서기장 고기준 목사.

1980년대는 조선기독교도연맹이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외부에 공개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1980년대 초부터 고향을 찾으러 방북한 해외 한인 개신교인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가정예배처소를 공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당시 조선기독교도연맹이 공개한 가정예배처소 중에는 평양 뿐 아니라 평안남도, 황해북도, 강원도 지역의 가정예배처소들도 있었다. 1981년에는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이영빈 목사가 방북하여 강원도 원산가정예배처소 예배에 참석했으며, 1986년에는 미국장로교회(PCUSA) 총회장을 역임한 재미동포 이승만 목사가 방북해서 평양 경상골가정예배처소 예배에 참석했다. 이영빈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81년 방북 당시 방문한 원산가정예배처소 책임자가 훗날 봉수교회 담임목사가 된 리성봉 목사라고 한다.


2008년 재건축 전의 봉수교회

2008년 재건축 전의 봉수교회 내부 모습

2014년 재건축 전의 칠골교회

1988년과 1989년에는 당시 사회주의권의 해빙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평양에 두 곳의 개신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바로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다. 봉수교회는 1988년 10월 완공되어 예배를 드렸으며, 칠골교회는 1989년 완공되어 예배를 드렸다. 특히 칠골교회는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이 다니던 하리교회를 재건한 것이다. 봉수교회는 2008년 재건축되었고 칠골교회는 1992년과 2014년 두 번 재건축되었다.


왼쪽부터 강영섭 목사, 권호경 총무, 김일성, 박경서 국장, 고기준 목사

1992년에 KNCC 권호경 총무와 WCC 박경서 아시아국장이 방북하여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인사들과 김일성을 만났다.

1999년에 이름을 조선기독교도연맹에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으로 개칭했다.

연맹 중앙위원장 직은 오랫동안 중앙위원장이었던 강량욱 목사가 83년 소천한 뒤 3년 동안 공석이었다가 조선사회민주당 간부이자 조선적십자위원회 간부였던 김성률 목사가 86년 9월부터 89년 2월까지 맡았다. 89년 김성률 목사가 퇴임[4]한 뒤로는 강량욱 목사의 아들인 강영섭 목사가 2012년 역시 소천 할 때까지 위원장을 맡았다. 2013년부터 강영섭 전 위원장의 아들이자 평양직할시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을 역임한 강명철 목사가 위원장을 지내고 있다.


3. 현황[편집]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현재 북한에는 1만 5000명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1만 5000명의 신자가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봉수교회

칠골교회

가정예배처소 예배 모습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현재 북한에는 2곳의 교회와 500여 곳의 가정예배처소가 있다. 2곳의 교회를 제외하면 500여 곳의 가정예배처소가 있다는 연맹의 공식 발표는 구체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신평길의 증언과 여러 외부인사들의 방북 증언을 종합해보면 가정예배처소 존재 자체는 사실인 듯 하다. 지금까지 외부인에게 공개된 가정예배처소 중에는 평양 지역의 가정예배처소 뿐만 아니라 평안남도, 강원도, 황해북도 지역에 있는 가정예배처소도 있었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지역조직은 직할시·도그리스도교연맹과 그에 소속된 가정예배처소로 이루어져 있다. 가정예배처소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핵심이자 말단조직을 이룬다. 평양직할시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광역행정구역에는 지역그리스도교연맹이 조직되어 있다. 그러나 자강도, 양강도, 나선특급시에는 지역그리스도교연맹이 조직되어 있지 않다. 현 강명철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장은 피선되기 전 평양직할시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최고의결기구는 총회다. 총회는 4년에 한 번씩 개최된다. 직할시·도그리스도교연맹도 총회를 개최한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1946년 11월 28일 창립일을 기념하여 매년 11월 28일에 기념식을 가진다.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전후 북한 최악의 시기 동안에도 창립일 기념식을 지내지 않은 해가 없었다.

봉수교회, 칠골교회에서는 예배가 끝나면 신자들이 바로 돌아가지만, 가정예배처소에서는 예배가 끝나도 신자들이 바로 돌아가지 않고 식사와 친교 시간을 갖는다.

평양직할시 낙랑구역 충성동 가정예배처소의 예배모습. 2011년 방북한 재미동포가 촬영한 영상이라고 한다.

손효순 담임목사 시절 봉수교회 주일예배 영상. 손효순 목사는 2013년 소천.

2013년 7월 칠골교회 재건축 현장을 촬영한 영상. 영상에 나오는 북측 안내인은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소속 백봉일 목사.
4. 평양신학원[편집]

평양신학원 전경

평양신학원 강의실

평양신학원은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소속 신학교이다. 북한 개신교 유일의 성직자양성기관이다. 1950년 7월 폐교된 조선기독교도연맹 소속 평양신학교를 계승하여 1972년 9월에 개원했다. 평양신학원은 북한 당국의 허락 하에 1971년 5월 조선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회 회의의 결정에 의하여 개원할 수 있었다. 이후 1999년까지 운영되다가 2000년까지 1년여 동안 운영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부터 다시 운영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평양신학원 위치는 처음에 조선사회민주당 당사에 있었고 다음에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본부 청사 3층에 있었다가 2003년에 한국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지원을 받아 건축한 건물로 입주했다.


1990년 평양신학원 강의실 모습. 사진 맨 좌측 인물은 당시 조그련 서기장 고기준 목사.

평양신학원은 1972년 9월 개원 당시 학제로 3학년 6학기제를 채택했다가 2000년 9월부터는 5학년 10학기제를 채택했다. 개원 당시 초대 원장은 강량욱 목사였으며 교수로는 고학진, 김득룡, 임현달, 이영태 목사 등이 있었다. 현재는 강명철 목사가 원장이며 교수로는 오경우, 정경숙 목사 등이 있다. 신학교재의 경우 처음에는 한국전쟁 전에 출판된 신학도서를 사용하다가 지금은 한국 및 해외에서 지원받은 신학도서와 북한 목사들이 쓴 신학도서를 사용한다. 특히 한국 공동번역성서를 북한 문화어에 맞춰 교정[5]한 이영태 목사는 《조선교회사》, 《세계교회사》, 《조직신학》, 《조선기독교도연맹 약사》 등 여러 신학 서적도 저술했다. 평양신학원은 개원 당시부터 지금까지 매해 신입생을 뽑지 않고 한 기수가 졸업하면 다음 기수를 뽑는 방식으로 신학생 선발을 하고 있다. 재학생 숫자는 1기수부터 현재 재학중인 13기수까지 9~12명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입학은 입학을 희망하는 교인이 소속된 교회, 가정예배처소의 추천을 받고 직할시·도그리스도교연맹의 허락을 받아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입학자격은 고등중학교[6] 졸업 이상의 학력을 요구하지만 재학생 거의 대부분은 대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갖고 있다. 또한 재학생 거의 대부분은 중·장년 연령대의 사람들이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며 평양신학원도 여성 입학을 허용한다. 신학생 중에 여성도 있다.

평양신학원에서는 구약성서, 신약성서, 조직신학, 실천신학, 조선교회사, 세계교회사, 찬송가학 등의 과목을 가르친다. 종교 이외의 인문학·사회학 과목들도 개설하여 가르치는데 평양신학원 교수들이 아닌 북한 내의 다른 대학교 교수들을 초빙하여 가르치게 한다.

1990년부터 2001년 소천 할 때까지 재미동포 홍동근 목사[7]가 북한을 매년 방문하여 평양신학원과 김일성대학 종교학과에서 성서강해, 조직신학, 기독교개론 등 개신교 관련 강의를 했다. 홍동근 목사는 2001년 11월 11일에 강의를 위한 북한 방문 중 지병인 고혈압으로 소천하여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는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측에서는 목사들이 정기적으로 방북하여 계절학기 강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독교대한감리회의 평양신학원 운영 지원은 이명박 정부 집권 기간에 중단되었다. 현재에는 오직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자체 능력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평양신학원 시설로는 교무실, 교수실, 강의실, 휴게실, 교육관, 도서관 등이 있다. 강의실 정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걸려 있으며 옆면에는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성구가 쓰여진 액자가 걸려있다. 평양신학원 교육관은 봉수교회 재건축 당시 봉수교회 임시예배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봉수교회 성가대 연습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평양신학원 도서관은 수천 권의 도서가 비치되어 있으며 이중에는 한국과 해외 기독교계에서 지원한 도서도 있다. 향린교회 전 담임목사 홍근수 목사의 형 재미교포 홍동근 목사 역시 자신의 시무하던 선한사마리아인교회를 통해서 수백 권의 도서를 기증했으며, 홍동근 목사 사후에 평양신학원 측에서는 그가 기증한 도서로 도서관 한 구석에 '홍동근 목사 기념서가'를 조성했다. 한국과 해외에서 기증한 신학도서 외에도 북한 목사들이 쓴 신학도서 역시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

5. 성서와 찬송가[편집]

북한의 성서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는 오랫동안 성서가 인쇄, 발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가정예배처소 교인들은 한국전쟁 이전에 발행된 성서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서 1983년에 신약전서를, 1984년에는 구약전서를 발행했으며 1990년에는 신구약 합본 성경전서를 발행했다. 2010년에는 다시 성경전서를 발행했다. 찬송가는 1935년 일제시대에 발행된 신편찬송가를 바탕으로 1990년과 2010년에 발행했다. 이 성서와 찬송가는 봉수교회, 칠골교회 및 가정예배처소뿐만 아니라 북한 유일의 가톨릭 성당인 장충성당과 북한 유일의 정교회 성당인 정백사원에서도 쓰이고 있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당국의 공식 주장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발행된 성서의 부수는 35000부지만 정말로 그 정도로 발행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8]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당국에서 발행한 성서는 성서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1977년 발행된 한국의 공동번역성서를 북한 문화어에 맞춰 교정한 것이다. 다만 공동번역성서를 100% 그대로 따르지는 않고 일부 어휘는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성경의 어휘를 따르고 있다. 공동번역성서 평양교정본의 편집자는 평양신학원 교수였던 고(故) 이영태 목사이다. 그는 일제시대에 이눌서 선교사의 조수로 일했고 해방이후에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소속 평양신학원 교수로 일했다. 또한 평양신학원 교수로 일하는 동안에 《조선교회사》, 《세계교회사》, 《조직신학》, 《조선기독교도연맹 약사》 등 여러 신학 서적도 저술했다. 그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내에서 학문적으로 가장 뛰어난 목사였다고 한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서 발행한 성서 외에 일부 한국 선교단체들이 번역, 인쇄, 발행한 북한어 성경이 탈북자들을 통해 북한에 몰래 배포되고 있다. 한국 선교단체들 중에서는 따로 번역한 북한어 성경이 아니라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서 발행한 성경 본문을 그대로 베껴서 발행한 성경을 몰래 배포하는 단체도 있다.

6. 관련인물[편집]

강량욱
강영섭
강명철
김성률
김득룡
김운봉
이영태
고기준
고학진
임현달
리춘구
오경우
정경숙
백봉일
손효순
리성봉
리성숙
7. 관련문서[편집]

봉수교회
칠골교회

8. 참고문헌[편집]

《북한 기독교 100장면》, 이찬영, 한국기독교총연합회, 2000년

《북한종교의 새로운 이해》, 김흥수·류대영, 다산글방, 2002년

《북한의 종교문화》, 하종필, 선인, 2003년

《북녘의 교회를 가다》, 최재영, 동연, 2019년

〈북한의 종교정책과 장충성당의 건립〉, 남궁경,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01년

〈북한 종교인가족의 존재양식에 관한 고찰 : 기독교를 중심으로〉, 김병로, 통일연구원, 2011년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지하교인에 대한 고찰〉, 《신학과 선교》 45권, 조은식,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신학연구소, 2014년

〈남·북 성경비교 책으로 출간··· 통일후 ‘겨레성경’ 실현 가능하다〉, 《국민일보》 2007년 1월 13일호, 노희경, 2007년

〈북한 성경에는 ‘하나님’이 없다〉, 《국민일보》 2016년 10월 8일호, 윤중식, 2016년

〈1980년대 이후의 기독교〉, 《한반도 북부지역의 기독교사》 6강(2016년 10월 17일 강의), 갈릴리신학대학원, 김흥수, 2016년


[1] 단 몇몇 방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인사들이 자신들은 장로회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2]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3] 1988년 11월 23일~25일[4] 김성률 목사는 이 때 퇴임한 것이지 소천한 것이 아니다. 김성률 목사는 퇴임한 뒤 다시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직을 맡는 등 정치인 활동을 계속했다. 원래 그는 중앙위원장 직을 맡기 전부터 평양직할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직을 맡는 등 주로 정치인으로써 활동한 인물이다. 조선사회민주당 기관지 계간《조선사회민주당》 보도에 의하면 김성률 목사가 사망한 것은 2000년 12월쯤이다.[5]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공동번역성서를 문화어에 맞게 개정하여 출판했다.[6] 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학교다.[7] 향린교회 전(前) 담임목사 홍근수 목사의 형이다.[8] 성서의 발행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한성서공회 민영진 전(前) 총무가 83·84년에 각각 출판된 신약성서와 구약성서 실물을 확인한 적이 있고 1990·2010년 두 차례에 걸쳐 출판된 성경전서의 경우에는 다수 기독교 관련 방북자들이 실물을 확인한 바 있다. 대한성서공회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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