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8

10 [조갑제의 심층취재] 黃長燁 선생과 함께한 13년간의 행복



[조갑제의 심층취재] 黃長燁 선생과 함께한 13년간의 행복, 그리고 마지막 對話 : 월간조선

11 2010 MAGAZINE
조갑제의 심층취재
黃長燁 선생과 함께한 13년간의 행복, 그리고 마지막 對話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 필자는 “동지적·형제적 관계로서 함께 일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죽을 것을 다짐한다”는 문장을 담은
誓約文 초안 봉투를 건넸다. 봉투를 받은 黃 선생의 “곧 만납시다”라는 말이 이승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 黃長燁의 탈출은 ‘주체사상의 탈출’이었다. 국가이념이 빠져버린 컬트세습왕조는 무지막지한
계엄통치(先軍정치)에 의존하기 시작, 뜯어먹고 사는 마적단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지난 6월 서울 강남 한 사무실에서 전 북한노동당 비서 황장엽(黃長燁) 선생의 <논리학>(이신철 박사와 共著. 시대정신)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필자는 사회를 보았다. 황 선생은 1997년에 한국에 온 이후 2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이 과정은 그가 독창적인 ‘인간 중심 철학’을 완성해 간 과정이었다.




출판기념회 시작 전에 사무실에서 만난 황 선생은 예의 단아(端雅)한 모습이었다. 그는 내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천안함 폭침(爆沈) 사건이 나고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는 것을 보고 ‘이번엔 김정일이 오산(誤算)을 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가 오판(誤判)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민들 사이에서 전쟁 공포증이 이렇게 강한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정부의 한 요인(要人)이 나를 찾아와 이야기하던 끝에 이렇게 말합디다.




‘북한을 너무 몰아붙이면 코너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 듯이 공격하지 않을까요?’




하도 기가 막혀 내가 ‘누가 고양이고, 누가 쥐인가?’라고 물었어요. 우리가 휴전선에서 대북(對北)방송을 하겠다고 하면 저들은 ‘우리도 대남(對南)방송 하겠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 확성기를 향하여 총을 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누가 고양이고 누가 쥐입니까?”




그는 출판기념회 답사(答辭)를 통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다”고 걱정했다. 여진족 30만명이 거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을 정복, 청(淸)을 세운 사실을 소개하면서 “천안함 폭침이 북한소행이 아니라는 사람이 스무 명이라도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20~30%가 믿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나라입니까? 이게 무슨 민주국가입니까?”라고 절규했다.




그는 “한국이 미국을 떠나서 과연 버틸 수 있습니까? 아무리 거리에 자동차가 우글우글해도 사상전(思想戰)에서 지면 모든 게 끝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뒤돌아보면, 유언(遺言) 같은 발언이었다.







“세 사람부터 뭉칩시다”




 지난 8월 황 선생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일요일 서울 강남 사무실을 찾았다. 경호 경찰관이 안내해 들어갔다.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첫마디가 충격적이었다.




“우리 세 사람이 이제부터는 목숨을 걸고 싸웁시다.”




그가 말한 세 사람은 자신과 김동길(金東吉) 선생, 그리고 필자였다. 황 선생은 절박한 말투였다. 북한정세가 급변하고 있는데 남한에선 이러고 있으니 답답하다면서 “먼저 우리 세 사람이 형제적·동지적·전사적(戰士的) 관계로 뭉치자”는 것이었다. 뭉쳐서 무얼 하자는 것보다는 뭉치고 보자는 생각이 앞서 있었다.




이날 황 선생은 이례적으로 점심식사를 불고기로 했다. 하루 한 끼밖에 먹지 않는 분인데 필자를 위하여 시간을 많이 냈다. 그가 공개된 식당에 갈 때는 경호팀이 동행하므로 번잡해진다. 식사를 하면서 황 선생은 김일성에 대하여 인간적 장점과 함께 치명적 평가를 내렸다.




“김일성은 속물(俗物)이었습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은 악당이었지만 한구석엔 영웅적 풍모가 있었어요. 가족을 편애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은 김정일(金正日)에게 권력을 넘기더니 나중엔 아들 눈치를 보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어느 자리에서 김일성이 위민(爲民)해야 한다고 연설을 하는데 이를 듣고 있던 김정일이 저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황 선생, 위민이 다 뭡니까? 인민에겐 무섭게 대해야 돼요.’”




황 선생은 김일성에 대한 인간적 감정과 역사적 평가를 명확히 구분했다. 2001년 책(<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에서 그는 이렇게 비판했다.




<그는 자기 아들의 권력 앞에 아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마지막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정권을 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김정일과 함께 수치스러운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의 한 생(生)의 전반부까지도 다 망쳐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함께 싸우고 함께 죽는다”









지난 9월 중순 추석을 앞두고 보수인사들이 마련한 점심식사 자리에 참석한 황장엽씨가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 다음 주 김동길 선생을 만나 황 선생의 뜻을 전했다. 즉석에서 “좋다”고 했다. 열흘 뒤 김 선생 댁에서 세 사람이 모였다. 황 선생은 “맹세문을 만들자”고 했다. 문장은 필자가 준비하기로 했다. 며칠 뒤 황 선생이 전화를 걸어 왔다.




‘맹세문에 형제적, 동지적, 전사적 관계로 뭉친다’는 말을 꼭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전사적’이란 말이 좀 과격한 것 같아 참고하겠다고만 이야기했다. 지난 9월 초 김동길 선생 댁에서 우리 세 사람이 만났을 때 필자가 내놓은 초안(草案)은 이러했다.




<서약(誓約): 한반도의 수구반동(守舊反動) 세력을 제거하고 자유통일을 이룩하여 일류(一流)국가를 건설함으로써 모든 국민들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 이 시대의 역사적 사명이다. 우리 세 사람은 진실-정의(正義)-자유의 원칙에 입각하여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동지적·형제적 관계로서 함께 일하고 함께 싸울 것을 다짐한다.>




황 선생은 이렇게 고치자고 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죽을 것을 다짐한다.” 그 순간 필자는 ‘함께 죽는다’는 맹세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란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이 그 대목을 강조하니 그 방향으로 고쳐 오겠다고 했다.




지난 10월 2일 김동길 교수 82회 생신 축하 모임이 있었다. 집 앞에 천막을 쳐 놓고 냉면, 빈대떡을 내놓았다. 황장엽 선생도 참석했다. 필자는 “동지적·형제적 관계로서 함께 일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죽을 것을 다짐한다”는 문장을 담은 서약문 초안 봉투를 건넸다. 봉투를 받은 황 선생의 “곧 만납시다”라는 말이 이승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황 선생의 생전(生前) 마지막 공식 논평은 자유북한방송을 통한 것이었다.




<죽은 민족반역자들에게는 후손까지 내력을 캐는 사람들이 어째서 산 반역자를 못 본 척하는가? 지금 그는 도적(盜賊)의 지위를 3대째 물려주기 위하여 철부지에게 대장 감투를 씌워 놓고 만세를 부르라고 인민을 우롱, 민족을 망신시키고 있지 않은가.>




황장엽 선생은 지난 9월 9일 북한군 출신으로 조직된 북한인민해방전선 창립대회에 보낸 친필 당부의 글에서 “나는 늙고 무능한 생명이지만 동지들을 위하여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글에서 그의 세습 비판은 언제나 그렇듯이 쉽고도 핵심적이었다.




<김정일은 기아와 빈궁에 신음하는 북한인민들을 혹사하여 온 나라 방방곡곡에 자기 별장과 사냥터, 놀이터를 만드는 데서 세계기록을 창조하였으며 단 하루도 인민들과 함께 땀 흘리며 노동한 날도 없고 단 하루도 군대에 나가 병사들과 생활을 같이 한 일도 없으면서 위대한 장군이요,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요, 하며 자기를 신격화(神格化)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민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독재행위의 극치입니다. 김정일은 자기 자식들을 인민의 자녀들과 함께 국내 학교에서 공부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두 외국의 호화별장에서 귀족생활을 시켰으며 이제 후계자로 정해 놓고는 ‘위대한 대장님’이라 부르라고 우리 군인들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북조선 인민들과 인민군 군인들에 대한 이러한 오만무례한 특권(特權)행세는 봉건시대의 왕(王)도 한 적이 없습니다.>







“남북한 대립은 자본주의와 봉건주의의 대립”









<월간조선> 1999년 4월호 별책부록 <황장엽비밀파일>.


1997년 2월, 필자가 황장엽 선생의 탈출 소식을 들은 것은 미국 하버드 대학 니만 펠로 과정(중견기자 연수 프로그램)에 있을 때였다. 필자는 그의 탈출에 놀라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당시 <월간조선>(月刊朝鮮) 김용삼(金容三) 기자(전 월간조선 편집장)는 황씨와 연결되었던 한 민간인(작고)을 통하여 탈출준비 과정을 사전에 지켜보고 있었다. 탈출이 성공하면 기사를 쓰기로 하였다. 김 기자는 황 선생이 베이징(北京)의 한국대사관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탈출경위를 보도하였다. 한국 언론사에 남을 특종이었다. 황장엽 선생은 탈출을 결심한 뒤 평양에서 쓴 글들을 민간인을 통하여 내보냈다. 김 기자는 이 글들을 <조선일보>에 소개했다.




필자는 노트북에서 뽑아 낸 황장엽 선생의 글을 가슴에 품고 얼어붙은 하버드 대학 캠퍼스와 해빙(解氷)된 찰스 강가를 해가 질 때까지 돌아다녔다.




“남북 간의 대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아니고 자본주의와 봉건주의의 대립이다”라는 첫 문장에 흥분을 가누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가 많은 고급정보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필자는, 첫 문장에 담긴 진실이야말로 그가 가져온 최대의 특종이 아닐까 생각한다.




북한정권에 정통성이 있다고 믿고 있던 소위 진보세력의 이론적 지주(支柱)인 황씨가 “북한은 자본주의보다도 역사발전 단계가 낮은 봉건주의”라고 자백했다. 필자는, “이로써 친북(親北)세력은 퇴보(退步)가 되고 자본주의-자유민주 세력이 자동적으로 진보가 된다. 수구, 반동이란 말도 이제는 그들의 몫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봉건왕조에 다름 아닌 전제(專制)체제에 충성하는 것이 수구이고 역사발전을 거부하는 것이 반동인 것이다”라고 조선일보에 썼다.




1997년 4월호 <월간조선>의 부록은 <황장엽 비밀파일>이었다. 그가 외교문제로 한국에 오지 못하고 베이징에 머물고 있을 때인데, 탈출 전 평양에서 써 보낸 글들을 모아 낸 책이었다. 보스턴에서 하와이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단숨에 다 읽었다. 한 지식인이 목숨을 걸고 써 보낸 글이라 감동이 더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었다.







‘강요와 폭력으로는 친딸의 사랑도 얻을 수 없다’




그는 공산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본 하이에크나 조지 오웰 같은 이들처럼 나치즘과 공산주의를 똑같은 전체주의로 보고 있었다. ‘독일식 전체주의는 민족주의를 이념으로 하였다면 소련식 전체주의는 계급주의를 이념으로 하고 있을 뿐 전체주의임에는 차이가 없다. 전체주의가 민주주의에 의하여 패망하였다는 것은 그것이 민주주의보다 낡은 사상이라는 것, 즉 봉건사상과 통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시즘의 교조성(敎條性)이 자체 수정의 길을 봉쇄한 것이 공산주의 멸망의 원인이었다. 황 선생은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자본주의를 수정한 케인스주의를 배척하지 않았으나 사회주의 나라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순결성을 고수한다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적(敵)으로 간주하고 배척하였다’는 것이다.




황장엽 선생은 사회를 분석하는 학문으로선 마르크스주의를 높게 평가한다. 문제는 마르크스주의 안에 무오류성(無誤謬性)에 대한 확신과 계급적 증오심이 함께 들어 있다는 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은 ‘무식한 사람이 유식한 사람을 지도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지도할 수 있는 사상과 문화가 없으니 관료주의와 폭력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강요와 폭력으로는 친딸의 사랑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그해(1997년) 여름 조선일보를 방문한 황장엽-김덕홍(金德弘)씨와 만났을 때는 구면(舊面)인 듯했고, 동지적 교감(交感)을 느꼈다. 이때 찍힌 황 선생의 사진을 보면 가족과 친지(親知)들을 희생시킨 사람답지 않게 편안하고 맑은 모습이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그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었고, 그 또한 김정일 정권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많은 사람은 ‘황장엽 리스트’의 공개를 기대하였다. 황 선생은 그런 관심을 지엽말단적인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보다는 김정일 정권의 본질과 북한정권의 전략을 알리고 이 집단을 전쟁하지 않고 붕괴시키는 대응책을 설파하는 일에 주력했다.




황 선생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정보는 1980년대의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공동정권’이었고 후반기엔 ‘김정일-김일성 공동정권’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황 선생은 김일성이 나중에는 아들에게 아부하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였음을 증언, 충격을 주었다. 그때까지 한국과 미국의 정보기관은 김일성이 죽었으므로 김정일 정권은 지지기반이 약하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1994년 북핵(北核)해결을 위해 제네바합의를 맺을 때 한미(韓美) 간엔 북한은 어차피 금명간 무너질 터이니 양보하더라도 좋다는 판단이 있었다. 황 선생은 또 북한 노동당 자료를 인용, 1995년의 아사자(餓死者) 수가 50만명이었다고 폭로했다.







송두율 잡은 황장엽 증언









황장엽씨의 증언은 송두율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에도 황장엽 선생의 처지가 곧바로 어렵게 된 것은 아니다. 임동원(林東源)씨가 국정원장이 되기까지, 그리고 김대중-김정일 평양회담이 있기까지는 비교적 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필자는 1998년 7월에 <월간조선> 편집장으로 복귀, 8월호를 만들었는데, “송두율(宋斗律)은 ‘김철수’란 가명을 가진 정치국 후보위원이다”는 황 선생의 증언이 나갔다. 이동욱(李東昱) 기자가 입수한 <북한의 진실과 허위>란 책이 특종의 산실(産室)이었다. 황 선생이 써서 안기부 내부자료로 돌린 자료였다.




송씨는 이 기사가 나간 직후 황씨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한편, <한겨레신문>은 “송두율씨는 김철수와는 무관하다.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의 내사 결과 김철수라는 가명(假名)을 쓰는 북한공작원은 조선노동당 구라파위원회 위원장 김성수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요지의 보도를 했다. 국정원(당시 원장 李鍾贊)은 1999년 2월 23일 서울지방법원에 사실조회 문서를 제출했다.




이 문서에서 국정원은 “송두율이 김철수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북한노동당의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함”이라고 주장했다.




2000년 11월 3일 국회 정보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김은성(金銀星) 국정원 2차장은 “송두율이 북한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임이 분명하다”고 거듭 확인하면서 “김철수란 이름은 김일성(金日成) 장례위원 명단에도 올랐었다”고 말했다.




2003년 가을 노무현(盧武鉉) 정부 시절 송두율은 해외 민주인사로 대우받으면서 입국(入國)하였으나 국정원의 용감한 수사진에 걸려들었다. 수사팀은 방대한 자료를 들이대 송두율로부터 “나는 북한노동당에 가입하였다”는 자백을 받아내 구속 기소했다. 그는 유죄(有罪)판결을 받았으나 출국(出國)했다.







지옥을 본 사람들끼리 만나다









1999년 2월 <월간조선> 주선으로 최은희(맨 왼쪽)·신상옥(왼쪽에서 두번째)씨와 만난 황장엽씨. 맨 오른쪽은 필자.


1999년 2월 말 필자는 국정원에 요청하여 신상옥·최은희(申相玉·崔銀姬)-황장엽 대담을 성사시킨 적이 있었다. 강남의 한 안가(安家)에서 이뤄진 네 시간에 걸친 대담은 흥미진진했다. 두 사람은 김정일에게 납치당하여 가서 독재자의 내면(內面)을 들여다본 사람이었다. 기자는 신상옥씨처럼 김정일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남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1989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필자가 변태적인 파티를 통해 본 김정일 집단의 본질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간단하게 답했다.




“그자들은 마적단입니다.”




이날 황 선생은 신 감독의 관찰에 동의하면서 이렇게 부연 설명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지배자와 부하 관계입니다. 술자리에선 오직 김정일 한 사람에게만 동지라고 그러지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동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오진우 같은 사람에게도 김용순 같은 젊은 사람이 ‘오진우야’ 그래도 괜찮아요. 술자리에서 오직 예의를 지켜야 할 대상은 김정일뿐입니다. 자기들끼리 싸우고 그래요. 그들의 의리는 도둑집단에 대한 의리일 뿐이지 원칙에 기초한 의리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무너지기 시작하면 한꺼번에 무너집니다. 아무런 사상적 바탕이 없기 때문입니다.”




황 선생은 김정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김정일은 남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즐기기보다는 남이 자신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일종의 가학적(加虐的)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정일이는 경제력으로는 안되니 끝까지 무력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남한 경제력이 미국보다 앞섰다고 해도 발바닥으로 봅니다.”







“계급주의는 지도자 이기주의로 전락”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미련을 가진 지식인들을 탁상공론자라고 했다.




“처음엔 공산주의 사상이 인도주의였습니다. 마르크스가 나오면서 무자비한 계급투쟁은 필연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서만 공산주의 사회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북한에선 수령(首領)이 당(黨)을, 당이 노동자 계급을, 노동자가 인민을 대표한다고 해 버렸습니다. 레닌까지만 해도 수령론을 부정하였지만, 제 생각으론 마르크스주의를 집행하려면 스탈린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자꾸 탁상공론하는 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는 괜찮은데 레닌과 스탈린이 변질시켰다고 그러는데, 계급투쟁론을 가지고 독재를 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황 선생은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였으나 김정일에게 이용된 과정도 설명했다.




“계급주의는 계급 이기주의로, 그것은 지도자 이기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다시 개인숭배와 개인독재로 집약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순간 나는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고 인본(人本)주의자로 전환하였습니다. 김정일은 나의 인간중심 철학을 가져가서 주체사상에 갖다 붙였습니다. 주체사상의 앞은 인간중심 철학이고, 중간은 스탈린주의와 계급투쟁론, 나중은 수령절대주의로 되어 있습니다. 북한주민들에겐 수령절대주의를 알리고,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 가선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주의의 진수(眞髓)이다’라고 설명하고, ‘제3의 길’을 주장하는 지식인들에겐 ‘인간중심의 철학이다’고 사기를 쳤습니다.”




그는 “김정일이가 변하기를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벼락 맞아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라면서 “북한정권은 개인숭배를 깨면 무너집니다. 소련도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면서 깨지기 시작합니다. 사회주의는 사상으로 시작하여 사상으로 망하는 체제입니다”라고 했다. 헤어질 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정말 통일에 도움이 되도록 써 주십시오. 나는 북에선 계속 거짓말을 하다가 여기 와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과장하거나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너무 사소한 문제보다는 통일에 이익이 되게 써 주십시오. 뭐든지 지나치면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죠.”







林東源의 국정원에 도전하다









2003년 미국을 방문한 황장엽씨는 디펜스포럼 초청 행사에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는 것’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회담 이후 황장엽-김덕홍씨의 활동이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6월에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써 탈북자 동지회 소식지인 〈민족통일〉에 발표했다. 국정원의 반대로 필자를 밝히지 못하고 편집부 이름으로 실었다.




탈북자들 속에서도 급변하는 정세 때문에 통일문제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지 못하여 혼선이 빚어졌다. 두 사람은 그해 10월에 다시 11개 질문에 답하는 식으로 논문을 썼다. 두 사람은 국정원과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탈북자 동지회 대내(對內) 교양자료’의 형식으로 250부를 출판했다. 이 글의 요지가 일본 신문에 보도됐다.




황장엽-김덕홍씨에 따르면 국정원 측은 11월 16일 두 사람을 불러 놓고 ‘이 글이 현 정부의 대북(對北)정책을 강도 높이 비판하였다고 하면서 우리를 호되게 비판하였으며 우리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조치를 더욱 강화할 데 대한 방침을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제한조치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1.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을 만나서는 안 된다.

2. 외부강연에 출연할 수 없다.

3. 책을 출판할 수 없다.

4. 탈북자동지회 소식지 〈민족통일〉을 내보내서는 안 된다.

5. 민간차원의 대북 민주화사업에도 참가하여서는 안 된다.




이 조치와 관련, 두 사람은 국정원 임동원 원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우리에게서 민간 차원의 대북사업에 참가하는 자유마저 제한하는 것은 우리 생명의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11월 16일 발표한 제한조치를 취소하지 않으면 우리가 스스로 행동방향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요지였다.







“자기가 벗은 외투를 북한이 벗은 외투로 착각”




두 사람은 그 직후 외부에 배포한 성명서에서 <언론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의 생명이다. 우리는 제기된 문제와 관련하여 언론기관들과의 상봉을 종전과 같이 사절하지 않고 진지하게 응할 것이다>고 선언했다. 국정원에 정면 도전한 것이다. 황장엽 선생의 대(對)좌파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황 선생의 유일한 무기는 말과 글인데, 그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 생명을 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무렵 황장엽 선생을 대리하여 <월간조선> 편집장이던 필자와 연락을 취한 이는 김덕홍씨였다. 그는 문제가 된 논문을 필자에게 건네, 2000년 12월호에 싣게 했다. 33페이지에 달하는 긴 기사였다. 표지 제목은 ‘황장엽이 피를 토하듯이 쓴 최근 남북관계 비판문’이었다. 황 선생은 이 글에서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인정한다는 김정일의 발언은 속임수”라고,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비판했다. “수령 독재체제가 변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북 경제지원을 하는 것은 집안에서 호랑이를 키우는 자살행위”라면서 “자기가 벗은 외투를 북한이 벗은 외투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비웃기도 했다.




이 무렵 황장엽 선생은 서울 송파구에 사무실을 갖고 있었다. 필자는 늘 감시 겸 경호상태에 있는 그를 만나러 갈 때 김덕홍씨와 먼저 약속을 했다. 아침 일찍 사무실에 가면 김씨가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황 선생 방으로 미리 안내해 준다. 그 뒤 황 선생이 들어오면 국정원 직원의 간섭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햇볕정책 전성기에 황 선생은 고립되고 포위된 상태였다. 국정원이 그를 보호하면서 그를 감시하고, 그의 생계를 보장해 주었다. 그 국정원과 그 뒤에 있는 김대중 정권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그는 담담했다. 비굴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사소한 것으로 다투려 하지 않았다. 이념으로 무장된 사람은 역경(逆境)에 처했을 때도 자존심과 인간적 권위를 지킨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고고(孤高)한 선비의 모습이었다. 그에 대한 호칭은 ‘선생’이 가장 자연스러웠다. 그가 필자를 동지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이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김대중 정권을 상대로 한 언론투쟁을 이어 갔고 <월간조선>은 황 선생의 발언을 세상으로 연결해 준 한 창구(窓口)였다.







황장엽의 넥타이









황장엽씨의 책을 일본에서 펴낸 하기와라 료.


이 무렵의 황 선생을 의미 있게 접촉했던 이는 그의 저서를 일본어판으로 번역한 하기와라 료(萩原遼) 씨였다.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赤旗) 평양 특파원으로 일한 적이 있고 <북조선에서 사라진 친구와 나의 이야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소녀 김현희(金賢姬)가 북한에서 남북조절위원회 회담 때 꽃다발을 들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공개하여 북한정권의 조작 주장을 뒤집은 사람으로 유명했다.




하기와라 씨는 2001년 4월에 일본에서 출판될 <황장엽 회고록- 김정일에의 선전포고> 문고판의 개정판 후기(後記)를 미리 나에게 보내 왔는데 자신이 받은 황 선생의 사신(私信) 내용을 소개한 이런 대목이 있었다.




<몇 번이나 접촉하는 가운데 황장엽 선생은 나에게 “공개는 안 했으면 합니다. 귀하의 연구를 위해서 드립니다”라고 말하면서 A4 용지 2, 3매의 문서를 주는 것이었다. 황 선생이 워드 프로세서로 쓴 한글 문서였다.




거기엔 한국의 상황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자신의 주장에 신중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은 점들이 기록되어 있었고, 자살하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는 사실도 적혀 있었다. 나를 신뢰하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서를 주었지만, 그리고 공표하지 않는다고 약속도 했지만, 지금 나는 그 약속을 깨고 있다. 배신했다는 질책을 각오하고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선(死線)을 넘어서 민족을 구하려고 모든 것을 버리고 남쪽으로 온 황장엽 선생에 대한 김대중 정권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 대한 나의 분노 때문이다.




황 선생은 항상 똑같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것은 부인이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이로써 황 선생 가슴 깊은 곳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생애의 반려(伴侶)인 부인과 세 딸, 아들 경모(敬模)씨,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손자, 그리고 황 선생을 존경하는 많은 제자와 부하들. 이들을 모두 강제수용소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건너온 남한이 그에게 이런 가혹한 박대를 하다니! 나는 할 말이 없다. 너무나 가슴 아프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결코 계속되어선 안 된다. 황 선생, 아무리 실망, 낙담이 되시더라도 고난 속의 2000만 북한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아, 싸워 이겨 주실 것을 마음으로부터 기원합니다.>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


1999년 6월 3일 하기와라 씨는 서울시내 안가에서 황씨와 만나 새 책의 출판 관계를 논의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계약서를 쓰려고 하는데 별실(別室)의 문이 열리더니 국정원 직원이 나와 “선생님, 그러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황씨가 “왜?”라고 하자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상부의 허가가 있어야 합니다.”




“출판은 시민의 권리가 아닌가?”




“아직 결재를 받지 못했습니다.”




황씨는 몇 번 말다툼을 벌이더니 욕설에 가까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하기와라 씨는 “그렇게도 순한 황 선생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런 말까지 했을까”라고 적었다.




황장엽 선생의 무기는 말이었다. 그의 말은 이념과 진실에 근거하니 힘이 있었다. 그의 강연이나 대화 속에는 늘 인용할 말들이 있었다. 만날 때마다 배우는 느낌이었다. 2001년 9월, 그의 글을 <월간조선>에서 책으로 펴낼 때 나는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




이 책 표지엔 ‘김정일이 햇볕을 인질로 잡았다’란 부제(副題) 아래 황 선생의 글이 인용되어 있었다.




“김정일은 ‘동무들에게서 수령의 신임을 떼어 놓으면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대남공작원용 저격무기를 개발할 때 개 대신 정치범을 실험대상으로 삼도록 명령했다. 민족반역자 김정일을 통일의 파트너라고 치켜세우는 서울의 수많은 ‘천재’들로 인해 나는 요사이 머리가 아프다. 아마도 그들이 풍기는 젖비린내 때문인 것 같다.”




황 선생은 김정일이 고깃덩어리 이야기를 할 때 이렇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만일 우리가 고깃덩이라면 너 또한 권력을 떠나서는 인민의 심판을 받아 난자(亂刺)당해 마땅한 고깃덩이이다.”




황 선생은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라는 책 제목을 좋아하였다.







DJ를 ‘김정일과 깊이 결탁한 자’로 간주




그가 남한에서 가장 미워한 사람은 김대중이었다. 2001년 3월 29일에 써서 외부로 내보낸 글에서 그는 현직 대통령을 ‘김정일과 깊이 결탁한 자’라고 간주했다. 김대중 정권은 황 선생의 방미(訪美)를 막았다. 2001년 여름 황 선생은 자신을 비판한 이종석(전 통일부 장관)씨를 비판한 글을 돌린 적이 있다. 끝은 이러했다.




<나는 북한에 있을 때 세상에는 절대적인 천재가 한 사람밖에 없다는 주장을 반대해 보려고 헛되이 많은 애를 썼지만, 여기 남한에 와서는 천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들이 풍기는 냄새 때문이다. 아마도 젖비린내인 것 같다.>




이 무렵 한 미국 기자를 데리고 가서 황장엽 선생을 만나게 한 적이 있다. 미국 기자가 우문(愚問)을 던졌다.




―귀하는 김정일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는 독재자로서는 A학점이고, 정치인으로서는 F학점 이하요. 권력을 유지하는 기술은 뛰어나고, 국민들을 먹여살리는 데는 바보란 말이오.”




황장엽 선생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은 철학이었다. 여기서 즐거움을 느끼는 듯하였다. 지옥을 본 황장엽 선생은 인간에 대한 놀라운 낙관론자였다. 그는, 인간은 이 우주(宇宙)의 관리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 즉 ‘우주론적 인생관’을 믿었다.




황장엽 선생은 인간의 발전은 우주의 종말까지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50억년 뒤에 태양이 사라진다고 해도 인간은 또 다른 태양을 만들 수 있으며 우주의 운동공식까지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의 ‘인간중심 철학’은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무한한 낙관론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이 이 세계를 진정으로 민주화시키면 우주의 관리자, 즉 신(神)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다. 그가 말하는 민주화는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자유를 조화시킨 체제의 수립을 뜻했다.







스탈린에게 불려 가 시험을 친 김일성









2004년 11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북한 대학살전’ 순회전시회를 둘러보는 황장엽씨.


황장엽 선생은 저서와 강연을 통해 냉전에서 서방세계를 승리로 이끈 레이건 같은 반공지도자들을 높게 평가했다. 특히 헬싱키 선언이 인권존중의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소련을 붕괴시킨 단초였다고 했다. “독재국가가 인권문제를 접수하는 것은 스스로 독재를 죽이는 독약을 먹는 것이다”고 했다.




황 선생은 또 ‘평화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평화적 방법으로 적을 돕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조건에서 북한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은 다 평화적 방법이다’고 정의(定義)했다.




그는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을 통해 이승만(李承晩), 박정희(朴正熙)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비판자들을 경멸했다.




황 선생은 국제공산주의 역사에 대하여도 1급 정보를 가진 분이었다. 흐루시초프, 미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같은 인물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그는 3년 전 필자에게 이런 비사(示必史)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필자가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불러 직접 면접을 보고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선택했다는 주장이 러시아 측으로부터 제기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황 선생이 빙긋 웃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이가 저에게 그런 말을 합디다. 스탈린한테 두 사람이 불려 가 시험을 쳤다는 겁니다. 스탈린이 출제한 것을 가지고 두 사람이 각각 다른 방에 들어가 답안을 썼다고 해요. 여기서 김일성이 합격된 셈이지요.”




북한정권을 세울 때 스탈린은 김정일을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國號)와 헌법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희대의 독재자 앞에서 시험을 친 뒤 북한의 독재자로 결정된 김일성, 미(美) 군정과 대결하여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의 초석(礎石) 위에 세운 이승만, 그 차이가 오늘의 한국과 북한의 차이라고 황 선생은 확신했다.







‘이념의 칼’ 제공









황장엽씨가 지난 9월 중순 보수인사들이 마련한 점심식사 자리에서 대북풍선단장 이민복(오른쪽)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명박(李明博) 정부 출범 이후 황장엽 선생에 대한 정부의 대우는 많이 좋아졌다. ‘젖비린내 나는’ 햇볕론자들이 중앙무대에서 사라진 것도 그의 골치를 덜 썩인 듯하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노선을 들고 나오면서부터는 마음이 편하지 않아 보였다. 그는 “이념은 공동체의 이해(利害)관계에 대한 자각(自覺)”이라고 정의하면서, 이념과 사상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해 온 이였는데, 이 대통령은 “이념은 낡은 것, 이념의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해 버렸다.




특히 천안함 폭침과 정부의 대응, 지방선거에 나타난 걱정스러운 여론이 그의 울분을 더했다. 김정일의 중병(重病)과 그들의 잇단 헛발질로 우리가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기회는 왔는데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는 초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에 쫓기는 기분도 들었을 것이다.




황 선생은 말을 많이 하진 않지만 하는 말은 다 핵심이고 본질이었다. 늘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가까이 지내는 이들일수록 그가 87세의 노인이라는 생각을 잊곤 했다.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을 빼곤 건강한 편이었다.




황 선생이 별세한 날 평소 각별하게 지냈던 이회창(李會昌) 자유선진당 대표는 개인성명을 내고 그를 ‘분단(分斷)시대의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신념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기득권과 가족, 친지까지 희생시킨 ‘행동의 지성(知性)’이었다. 황 선생은 북한정권의 본질을 폭로하고, 그들의 급소(急所)를 알려주고, 때리는 전략(戰略)까지 제시했다. 김정일이 그토록 그를 죽이고 싶어했던 것은 자신의 약점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황 선생은 무엇보다도 종북(從北)세력을 우습게 만들 수 있는 ‘이념의 칼’, ‘언어의 칼’을 우리에게 쥐여준 분이다.




황장엽 선생의 북한탈출은 북한정권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의 탈출이었다. 미국의 건국이념을 만든 토머스 제퍼슨이 영국으로 탈출한 격이다. 황 선생의 탈출 이후 북한에서는 주체사상 교육을 축소하거나 사실상 중단했다고 한다. 주체사상의 전도사가 탈출했으니 자신들이 가르치는 주체는 가짜가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교회가 성경을 가르치지 않으면 언젠가는 해체된다.




김정일이 황장엽 선생 탈출 이후 선군(先軍)정치를 들고 나온 것은 주체사상이 빠진 곳을 보충하려는 발버둥이었다. 이 선군정치는 말뜻 자체로서도 영구적 계엄통치이고 폭압이다. 북한정권을 한 단계 더 벼랑으로 몰아붙인 것이 황장엽 선생이었다.




김정은 3대(代) 세습 시도는 북한정권이 조폭(組暴) 수준의 조직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북한은 내부적으론 반(反)봉건시장(市場) 혁명의 단계에 들어갔지만, 외부적으로는 마적단 진압 내지 조폭소탕 작전이 남아 있다. 황장엽 선생의 역사적 위상(位相)은 이 작전의 성패(成敗)에 따라 다시 매겨질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황 선생이 남기고 떠난 자리가 너무 크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선생의 명복(冥福)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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