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1

12 책에 빠져 죽지 않기 - 로쟈의 책읽기


책에 빠져 죽지 않기 - 로쟈의 책읽기 2012-2018
이현우 (지은이)교유서가2018-08-29


































전자책 미리 읽기 종이책으로 미리보기


종이책
25,000원 22,500원 (1,250원)
전자책정가
18,800원

판매가


Sales Point : 216

9.1100자평(5)리뷰(4)


종이책 페이지수 752쪽, 약 33.7만자, 약 10.1만 단어


책소개
연중무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본명보다는 인터넷 서평꾼 ‘로쟈’로 더 유명한 저자의 세번째 서평집이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새 책이 밀려들고 쓸려가는 현실에서, 책의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고 버티다가 끝끝내 자신만의 항로를 찾아낸 지난 6년간의 책과의 사투 기록이다. <책을 읽을 자유>(2000-2010),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2010-2012) 이후 2012년부터 2018년 상반기까지 6년간 쓴 칼럼을 선별하고 분야별로 정리하여 묶었다.

분야를 크게 인문, 역사, 정치, 사회, 문화, 과학의 7개로 나누고 각 분야에 어울리는 173개의 글을 담았다. 한 권의 책으로 본다면 방대하지만, 그렇다고 책의 두께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각각의 글은 한 권의 책을 주요 도서로 다루면서 관련 주제의 핵심만 간결하게 짚어나간다. 내용적으로 책과 저자, 책과 책, 책과 사회, 책과 나, 쓰기와 읽기 등으로 경계를 넘나들며, 글에 따라서는 이번에 책으로 묶으면서 별도로 생각거리나 읽을거리를 덧붙인 부분도 있다.


목차


책머리에

1부 책의 바다
1. 책은 여전히 우리의 미래다
독서의 가치 | ‘읽는 인간’과 ‘읽지 않는 인간’ | 너는 왜 공부 안 하고 책을 보니? | 다시 읽는다는 것에 대하여 |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 독서의 입문과 조건 | 책은 여전히 우리의 미래다 | 불량한 책이거나 불필요한 책이거나

2. 소중한 책 한 권만 있으면 된다
요나손이 그려낸 독서의 힘 | 공무원이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 | 마키아벨리에게 배우는 독서 | 소중한 책 한 권만 있으면 된다 | “무엇보다도, 종이를 존중하시오!” | 책을 움켜쥔다는 것의 의미 | 문명의 기록과 인간의 역사

3. 서평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내가 읽은 장르 문학 | 디지털시대의 서평쓰기 | 한 권의 책이 된 사람 | 독서일기를 가장한 곡진한 사부곡 | 서평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 책 이사를 하고서

2부 인문의 바다
1. 인생을 바꾸는 고전의 힘
인생을 바꾸는 고전의 힘 | “전쟁에서는 속임수도 꺼리지 않는다” | 삼국지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 노자의 『도덕경』과 독서의 반감기 | 『박물지』와 『산해경』 | 이중톈, 중국의 지혜를 말하다 | 사랑의 기술과 형제애 | 행복의 비결은 무엇인가 | 고전 작가로서의 하위징아

2.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
철학은 배워서 어디에 쓰나요? |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 | 철학의 기원과 소크라테스 | 플라톤이냐, 호메로스냐 |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 신들을 다시 만나는 방법 | 신들은 어떻게 죽었나

3. 인문학을 대하는 교양인의 자세
누구를 구할 것인가? | 지적 대화를 위한 교양인의 자세 | 속물 교양의 탄생과 교양의 의미 | 바우만의 일기가 가르쳐주는 것 | 바우만에게서 배우는 희망 | 아감벤과 비평의 자격조건 | 지금 시작하는 소프트인문학 | ‘읽히는’ 인문서의 비결과 한계 | 강신주 인문학의 거의 모든 것

3부 역사의 바다
1.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시대의 죽음
왕의 얼굴과 왕의 화가들 | 『정도전과 그의 시대』가 말해주는 것 | 문제적 인물 허균의 생각 | 성리학의 ‘대항 이데올로기’는 존재했나 | 조선의 근대와 공론장의 지각변동 | 동아시아 시각으로 본 소농사회의 유산 | 일본인이 바라본 조선인 강제징용

2. 자본론에 물든 세계사
글로벌 역사는 세계사와 어떻게 다른가 | 교환 양식으로 바라본 세계사 | 유럽이 중국을 앞설 수 있었던 이유 | 가라타니 고진의 생태론 | 세계박람회란 무엇인가 | 빅히스토리와 지구사의 도전 | 유발 하라리의 성찰과 우리의 선택

3. 알려지지 않은 역사
한 책 사냥꾼의 발견과 근대의 탄생 | 올리버 스톤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 | 유럽연합과 유럽의 미래 | 중동 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 북중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나 | 문화대혁명과 그 이후 |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4. 역사의 교훈과 진보의 의미
우리는 가장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 아프리카 원조의 진실 | 아우슈비츠에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잃어버린 20세기에 대한 성찰 | 역사의 교훈과 진보의 의미

4부 정치의 바다
1. 무엇을 위한 정치인가
아테네 민주주의는 무엇을 추구했나 | 사회주의라는 또하나의 약속 | 공포정치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 정치적 진보주의와 지능의 역설 | 도둑정치와 어떻게 단절할 것인가 | 역사를 바꾼 선택의 순간

2. 법의 패러다임
미국 헌법의 탄생과 대한민국 헌법 | 통치 패러다임으로서의 예외 상태 | 비즈니스 우파가 승리하는 이유 |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 | 국민 통합은 어떻게 가능한가

3. 돈 없으면 죽는 나라는 필요 없어
부자를 위한 정책과 중산층의 파괴 | 돈 없으면 죽는 나라는 필요 없어 | 열심히 일해도 지킬 수 없는 삶 | 우리의 침묵을 깨우는 각성제 | 신빈곤층과 위기국가 | 복지국가를 위해 필요한 고민 |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 | 시장사회와 인체 쇼핑 | 기업에 포위된 아이들 | 선택의 독재와 진정한 선택

4. 무엇이 경제를 움직이는가
“우리는 모두 부채 인간이다” | 가난과 빚에 쪼들리는 8억 명의 인도인 | 왜 검은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 플루토크라트와 그 나머지 | 장하준과 사마천에게서 배우는 경제학

5부 사회의 바다
1. 더불어 살아가기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 사회적 비만과 비만의 사회학 | 쓰레기의 재구성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 사람 더하기 사람! 협동조합 |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맞서는 국가와 개인의 연대 | 새로운 사랑, 새로운 관계에 대한 욕망

2. 차이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
결혼의 역사와 아내의 역사 | 무성애를 말하다 |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 버지니아 울프 이야기 |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 | 서양 정치사상의 남성중심적 편견 | 차이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 | 『한국의 여기자』와 『편의점 사회학』 | 휴머니즘과 동물들의 침묵

3. 나쁜 사회가 만든 시대 문제
시대를 앞서 결행한 독자적인 삶 |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 | 아파트 게임과 한국 중산층 흥망사 | 잉여 세대의 문제는 시대의 문제다 | 나쁜 사회가 만든 청춘의 절망 | 청춘을 향한 도올의 부르짖음 | 군사독재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 ‘민주화운동의 대부’가 걸어온 길 | 죽을 각오란 무엇인가

4. 실패할 권리와 갱생할 권리
프레이리가 말하는 문해교육 | 아이들은 실패할 권리가 있다 | ‘대안입시’란 무엇인가 | 대학의 역사와 대학의 미래 | 왜 대학에 가는가 | 침묵의 공장과 인문학 갱생의 길 | 최후의 교수들과 인문학의 미래

6부 문화의 바다
1. 휴식이 필요한 이유
우리에게 휴식이 필요한 이유 | 고독의 미덕과 힘 | 여행을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 모든 책은 여행서다

2. 일상을 예술화하다
애정을 담은 음식 이야기 | 클래식이 흐르는 책 |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 | 우리가 몰랐던 우리 문화 | 사진이라는 털이 말해주는 것 | 중년의 의미, 중년의 발견 | 중년 이후의 삶

3. 에덴은 어디에 있는가
에덴은 어디에 있는가 | 당신들의 기독교에 대한 인문적 성찰 |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과 생각 | 유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새로 읽는 논어, 다시 만나는 공자 | 일본의 군국주의와 선불교

7부 과학의 바다
1. 감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불안과 환상 사이 | 감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 사람은 왜 거짓말을 할까 | 프로이트의 원인론 vs 아들러의 목적론 | 인간은 왜 무의식적 낙관주의자일까 | 착각의 과학과 착각의 심리학

2. 생각하는 잡식동물의 진화
대멸종이 말해주는 것 | “인간은 불로 요리하는 동물이다” | 생각하는 잡식동물의 진화 | 우리 안의 영장류 본성 | 농업문명의 불편한 진실 | 과학 글쓰기의 계관시인 | 사회생물학에 대한 오해와 이해 | 종교와 과학, 동행인가 전쟁인가

3. 디지털시대와 가장 멍청한 세대
지식의 공유와 공유 지식 | 디지털시대와 가장 멍청한 세대 | 빅데이터 인문학과 데이터토피아 | 멋진 디지털 신세계 | 인간이 원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 포스트휴먼과 포스트휴머니즘 | 디지털 치매와 디지털 다이어트 |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 미래를 보는 과거와 현재의 눈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네가 무얼 먹는지 알려주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는 말이 있다.




내가 씨름해야 하는 현실은 책의 바다이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다. 적당히 헤엄치다가 빠져나오면 되지만 때로는 예기치 않은 현실에 대한 대응 방책이다. 이른바 ‘책의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책이다.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을 다 읽을 수 있는 시간과 능력이 있다면 서평은 필요하지 않다. 내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읽으면 되니까.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서평은 그 대책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결코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입막음 같은 것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_「책머리에」에서 접기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 우리 각자는 독서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하면서 비로소 독서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이 늘어남과 함께 정신이 성장하고 사고가 깊어지며 세계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 그것이 독서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와 ‘나의 세계’를 새롭게 변형하고 갱신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읽는 것이 나’라는 말은 그런 의미의 무게를 지닌다. _「독서의 가치」에서 접기
무거운 책들과 함께하는 삶은 향기로운 삶이라기보다는 단내나는 삶이다. 그런데도 나는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믿는다. 그 말에 인생을 걸었으니 도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정신과 일상의 감각을 보존하고 환기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매체로 책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한다. “이 많은 책을 다 읽으셨어요?”라는 질문을 이사할 때마다 받으면서도 “다 읽을 수는 없지요”라고 멋쩍게 답하면서 여전히 책 속에 파묻혀 지내는 이유다. _「책 이사를 하고서」에서 접기
우리의 마음은 소시지 기계와 같아서 외부세계로부터 원료가 공급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다. 우리가 열정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은 무궁무진하다. 다른 조건이 비슷하다면 어느 것 하나에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세상에 잘 적응할 수 있고 흥미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거기서 더 바란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이상한 행성과 이 행성이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인류사의 원대한 조망 속에서 살아간다면 개인적으로 어떤 운명을 산다고 해도 강한 행복감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러셀의 행복론이다. _「행복의 비결은 무엇인가」에서 접기
플라톤에게 신은 아무런 흠결도 없으며 모든 좋은 것의 원인으로서 선을 본성으로 한다. 반면에 호메로 스의 신들은 절대자도, 초월자도 아니고 각자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세상사에 개입한다. 이렇듯 전혀 다른 관념을 플라톤과 호메로스가 대표할 때 저자의 결론은 무엇인가. 그는 기독교로 전승된 플라톤주 의에 맞서 호메로스의 정신을 회복하자고 제안한다. ‘호메로스의 아이’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철학자들, ‘자유로운 정신들’은 ‘늙은 신이 죽었다’는 소식에 새로운 아침놀이 비치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다.” _「플라톤이냐, 호메로스냐」에서 접기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현우 (지은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림 신청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로쟈’라는 필명을 가지고 매일 새롭게 출간되는 책들을 소개하는 서평가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다. 대학 안팎에서 러시아문학과 세계문학, 한국문학, 인문학을 강의하며 여러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 『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책에 빠져 죽지 않기』 『아주 사적인 독서』 『로쟈의 인문학 서재』 『... 더보기


최근작 :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책에 빠져 죽지 않기> … 총 5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책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 벌이는 생존 투쟁!

“책읽기가 계속되는 한,
책의 바다에서 벌이는 고투에서 살아남는 한,
나는 계속 읽고 쓸 것이다.”


책의 바다에 빠진 위험한 18년차 독서가
이 책은 연중무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본명보다는 인터넷 서평꾼 ‘로쟈’로 더 유명한 저자의 세번째 서평집이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새 책이 밀려들고 쓸려가는 현실에서, 책의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고 버티다가 끝끝내 자신만의 항로를 찾아낸 지난 6년간의 책과의 사투 기록이다. 『책을 읽을 자유』(2000-2010),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2010-2012) 이후 2012년부터 2018년 상반기까지 6년간 쓴 칼럼을 선별하고 분야별로 정리하여 묶었다.

책읽기의 충실한 안내서이자 책의 궁전
책의 위기를 논하는 시대에, 저자는 어쩌면 책의 바다를 지키며 항구로 안내하는 등대지기이자, 책의 궁전을 지키는 경비병은 아닐까. 읽고 싶고, 읽어야 할 책들은 많지만 정작 시간에 쫓기고 읽을 책을 잘 고르지 못하는 우리 현실에서, 저자는 책을 제대로 고르고 책읽기의 즐거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2000년 이후 18년간 서평가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해온 저자는 ‘필독할 책을 서로가 걸러주고, 동시에 한동안 읽지 못할 책에 대해서는 핵심이라도 챙겨놓는 것이 서평’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이번에 펴낸 책에서도 저자의 서평가로서의 역량이 잘 드러난다. 글자를 읽을 줄 아는 문해력과 책을 읽고 이해하는 독서력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독서 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넘쳐나는 정보의 시대에 오히려 따분함을 예찬하거나, 기계문명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원하는 세상을 고민해야 한다는 등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 책은 책읽기에 대한 흥미롭고 충실한 안내서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한 권의 교양서로도 부족함이 없다.

나는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믿는다
이 책은 분야를 크게 인문, 역사, 정치, 사회, 문화, 과학의 7개로 나누고 각 분야에 어울리는 173개의 글을 담았다. 한 권의 책으로 본다면 방대하지만, 그렇다고 책의 두께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각각의 글은 한 권의 책을 주요 도서로 다루면서 관련 주제의 핵심만 간결하게 짚어나간다. 내용적으로 책과 저자, 책과 책, 책과 사회, 책과 나, 쓰기와 읽기 등으로 경계를 넘나들며, 글에 따라서는 이번에 책으로 묶으면서 별도로 생각거리나 읽을거리를 덧붙인 부분도 있다.




간만에 읽는 로쟈선생의 서평집. 지난 몇 년간 참으로 많은 책을 읽고 쓴 것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느낌이다. 테마별로 어느 정도 분류는 했는데 논픽션이 많은 것이 이번의 특이한 점이다. 언제나 읽고 싶은 책은 산더미처럼 늘어난다. 죽을때까지 달려도 끝을 볼 수 없는 무한우주..
transient-guest 2018-10-18 공감 (15) 댓글 (0)
Thanks to
공감





서평집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 책은 꽤 읽는 재미가 있다. 책의 종류가 다양하고 글도 잘 읽힌다. 문학 부분이 더 많았다면 좋았을 테지만, 순전히 취향의 문제이다.
포해니 2018-10-16 공감 (1) 댓글 (0)
Thanks to
공감





좋은 서평집. 읽고싶은 책이 많아졌습니다
성주영 2020-03-19 공감 (0) 댓글 (0)


쓰기가 당신을 만들고 지켜줄 겁니다


고생대 데본기에 다양한 생선들이 어슬렁어슬렁 육상으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그와 유사한 양태로 2015년 초의 서울에서는 그저 읽는 syo가 읽고 끄적거리는 syo로 진화의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중이었다. 그해 이전의 syo는 서평 같은 게 왜 있는지, 서평과 독후감의 차이는 무엇인지, 뭐 이런 기초적인 것들을 1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 마리 무지몽매한 척추동물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무덤이 있으면 반드시 핑계가 있는 법. 핑계 1. 아니, 지금 지구에 책이 몇 권이나 있는 줄 알아? 그리고 걔네가 앞으로도 태어나길 그만 둘 것 같아? 책 읽은 책 읽을 시간 있으면 책 읽어. 핑계 2. 네가 읽은 책은 네가 읽은 책이고 내가 읽은 책은 내가 읽은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읽은 셰익스피어와 네가 읽은 셰익스피어는, 내가 읽은 셰익스피어와 내가 읽은 도스토예프스키만큼 다르지. 핑계 3. 너는 내가 네 반찬 다 씹어서 밥상 위에 뱉어놓으면 소화 잘 되겠다고 신나서 주워 먹겠다?



아 세상 깝깝한 2015년의 syo여. 나 이놈, 내 죄를 내가 알렷다......



그렇게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라는 명제가 진리가 되는데 아낌없이 몸 바치던 syo에게 계몽의 빛, 진화의 구름판이 되어준 이가 있었으니, 이 책은 바로 그가 2018년에 쓴 책이다.







2




또 다른 책이 있었으니 그 이야기부터 하자면,




그 책의 표지는 차갑고 자비 따윈 모를 것 같은, 어쩐지 구치소 쇠창살을 떠올리게 하는 색깔이었다. 이걸로 사람 한번 툭 치면 그 구치소 쇠창살 안에서 내다보는 바깥 풍경이 어떤지 뼈저리게 알게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두껍고 무거운 책이었다. 제목을 비롯하여 표지에 인쇄된 글귀들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 책으로 무고한 시민의 둔부를 가격, 현장에서 적발되어 구치소에 갇혀 살던 한 남자가, 임종 전날 바스러져가는 멘탈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손톱으로 시멘트벽을 긁어 남긴 유서 스타일’로 디자인되어있었다. 그 모든 시각적 정황증거와 전혀 합이 맞지 않는,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역설적인 제목이 syo로 하여금 그 책을 펼칠 수밖에 없게 하였으니, 그 책의 제목은 『책을 읽을 자유』였다.



당시 벌써 나온 지 5년이 다 된 책이었지만 그런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감옥 같이 생긴 자유의 책을 통해 syo가 깨달은 것은, 서평이 되었건 독후감이 되었건, 책 읽은 글은 버젓한 하나의 장르라는 사실이었다. 인터넷 공간을 방황하다 가끔씩 마주친 서평이나 독후감으로부터 늘 실망만을 얻어왔다는 불행한 우연 때문에, 내가 이 어엿한 아이들을 근거 없이 괄시했구나. 문제는 질이구나. 그리고 양이구나. 우와, 이 양 좀 보소.



이런 사연이 있었으므로, ‘로쟈’라는 인물의 자취를 좇던 syo가 알라딘에 유입된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와서 보니, 이 인물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 존재하는 모든 책의 3/4 쯤을 읽고, 그 반절에 길고 짧은 코멘트를 다는 그야말로 탈 갤럭시 급 독서가였다. 이 책 재밌겠다 싶어 검색하면 ‘로쟈’의 코멘트가 있다. 저 책 재미없겠다 싶어 검색하면 거기도 있다. 도대체 어느 구석으로 드리블을 해야 저 거대한 관음보살의 물샐 틈 없는 손바닥 바깥으로 도망칠 수 있을까 잠깐 고민하다 관뒀다. 뭐하러 그래. 그럴 바엔 그냥 친구 추가나 하자. 딸깍.










3




그해 여름, syo와 syo의 친구 三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로쟈님의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우리 두 백수는 교통비 말고는 지불여력이 없었으므로 강의료가 없는 강의 밖에는 선택지가 마땅치 않았다. 노원구에서 19세기 러시아 문학 강의를 들었고, 남산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 강의를 들었다. 노원구 강의는 평일 오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시간에 참석한 젊은이는 우리 말고는 없었으므로, 맨 앞줄에 앉은 우리는 첫날부터 다른 분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등가죽이 뜨뜻했다. 짧은 자기소개의 시간이 있었는데, 三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三입니다. 혜화동에 살구요, 저는 옆에 이 친구를 따라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수 짝짝. syo의 차례였다. “안녕하세요, 제가 바로 옆에 이 친구 syo입니다. 저도 혜화 살구요, 저는 앞에 저 분 따라 왔습니다.” syo의 손끝이 강단 책상에 앉아 있는 로쟈님을 향했다. “저는 저 분 선생님 따라다닙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짝짝짝짝짜자자자짝짝. 웃음 하하하호호하하호호. 三아, 보았니, 이 해일 같은 박수와 웃음의 앙상블을?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



1시간 강의가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 강의실 뒤쪽에 비치된 녹차 티백을 가지러 나왔는데 50대쯤 되어 보이는 참가자 한 분이 syo를 보고 웃으며 물으신다. “선생님 매니저세요?” “네?” “아니, 선생님 따라 다닌다길래, 호호호.” syo가 웃으며 대답한다. “아, 아닙니다. 전 그냥, 사생팬인걸요.” 대답하고 아차 했다. 사생팬까지는 아닌데. 정정할까? 넌지시 그분의 표정을 살피고 syo는 안심하며 돌아섰다. 아무래도 사생팬이 뭔지 모르시는 눈치였으므로. 자리에 앉았는데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사생팬이 뭔지 아는 나이대의 사람이, 평일 이 시간에 구립도서관 강의실에 앉아 푸쉬킨, 고골, 레르몬토프 중에 누가 형인지 생각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 전복적인 자기소개에도 로쟈님은 옅은 미소만 보일 뿐 미동조차 않으셨다. 며칠 뒤 그해 노벨상을 발표하는 날, 남산에서 강의 초입에 로쟈님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수상을 은근히 바라시는 투의 말씀을 하셨다. 네이버에 ‘노벨문학상’을 입력하고 5초 단위로 새로고침을 하고 있던 syo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 우크라이나 작가가 수상을 한 것 같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을 때도, “그렇습니까? 우크라이나 태생이지만, 벨라루스 작가입니다.” 하시며 안경을 살짝 올리셨을 뿐, 안경 너머로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아주 잠깐 찾아들었을 뿐, 이내 더 이상의 언급 없이 다시 강의 주제로 돌아가셨다.










4




간결함, 정확함, 세세함. 개인적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의를 수십 번 들은 것도 아니지만, syo가 눈으로 보고 느낀 로쟈님의 이미지는 그의 책에서, 특히 서평을 모은 책에서 읽고 느낀 것과 아찔할 정도로 비슷했다. 글과 말이 서로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그리고 흔치 않다. 그놈들은 하루아침에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성질 순한 아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취향을 자극하지 않는 음식은 폭발적으로 팔려나가지 않는다. 누군가 눈물 나게 매운 치킨을 먹을 때, 다른 곳의 누군가는 단짠단짠이 절묘한 치킨을 먹고 있다. 치킨의 알파요 오메가는 후라이드임을 설파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가장 맛있는 음식은 뭐냐고 물어보면, 시간을 많이 줄 테니 오래오래 생각해보라고 하면, 그들은 무취향한 음식들을 떠올릴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걸 고르진 않더라도, 돈을 주고 사 먹을 수 없기에 팔지도 팔리지도 않는 어떤 기본적인 요리들을 생각해 볼 것이다.



물론 세상에서 제일 잘 팔리는 서평을 쓰는 로쟈님에게 딱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하여튼 그런 이유만으로, 양념 팍팍 친 맵고 짜고 달고 때로는 쓴 문장을 사랑하는 syo가 삼삼하고 때론 심심하기까지 한 그의 글을 좋아하는 것일까?




역설적일 수 있지만 좋은 서평은 서평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서평을 쓰는 일 자체에 대해 과도하게 흥분할 필요가 없으며 너무 많은 기대를 갖는 것도 조지 않다. 멋진 문장보다는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이 바람직하며 화려한 수사에 대한 고민도 자제하는 것이 좋다. 예술적인 글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읽을 만한 책을 감별하고 권장하는 일이 서평의 주된 역할이라면 그것은 한두 사람의 몫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자라면 모두의 일이고 모두가 나서서 자기 몫을 거들어야 하는 일이다. 서평은 자발적인 품앗이에 가깝다. (94)



그의 글이 지닌 품성이 어디서 발원하는지 명확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 편의 글을 읽을 때는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어떤 강인한 마음 같은 것이, 책 전체를 이어 읽으면 느껴진다. 더 화려하고 멋스럽게 쓸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도록 자신을 붙잡는 마음. 더 세고 따가운 분노의 표현을 휘두를 수 있음에도 춤추는 손을 꼭 붙잡고 가라앉히는 힘. 있는 대로 수사를 갖다 붙이고, 10만큼 건드리면 12만큼 분노하는 syo는 하려해도 도저히 되지가 않는 절제와 자제......



그리고 그런 굳센 지지점을 건설해 두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자기 안에 세운 기준으로부터 뻗어 나온다는 점이 찬탄을 던져 넣을 바른 자리이다. 좋은 글의 기준이 내 안에 있다는 것, 타인의 평가나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글을 쌓아올린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쓰듯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 내가 쓰는 글이 자꾸 내가 되는 것.







5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읽기를 위해 쓰는 것은 배우고 싶지 않다. 나는 삶을 직조하는 쓰기가 부럽다.



읽기와 쓰기는 상호보완적인 동시에 독립적인 역할을 가진다. 읽기로 삶의 내용을 기르고 쓰기로 삶의 형태를 세워 올리는 것이 독서의 양 날개라면, 이 책을 비롯한 이현우의 모든 책이 그 날개를 펼쳐 흔드는 법을 보여준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 이 책 속의 수백 권 다른 책들이 다 낡아져 시간의 저쪽으로 치워지는 날이 와도, 이 책은 서가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 접기
syo 2018-08-31 공감(53) 댓글(12)
Thanks to
공감




이게 투플러스 책이다




내가 청년이던 시절, 쇠고기는 그냥 쇠고기였다.
모든 쇠고기는 ‘소’라는 이유만으로 찬양받았고,
한번 소를 먹고 나면 적어도 보름 동안은 자랑을 하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쇠고기에도 급이 생겼다.
투플러스와 2등급은 같은 쇠고기긴 하지만 다른 취급을 받았다.
2등급 소를 먹고 자랑을 하다간 본전도 못찾았는데,
심지어 2등급 소가 돼지고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기도 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고기를 못먹던 시절엔 고기 자체가 권력이었지만,
고기가 흔해지니 고기가 갖는 힘이 줄어들고,
고기 중에서 최상급의 고기만이 대접받게 된 것이다.




책이 귀하던 시절, 그러니까 사람들이 책값 때문에 책을 못읽던 그때,
책을 쓴 사람은 ‘저자’라는 이유만으로 칭송받았다.
A: 제가 저서가 하나 있는데요. <마태우스>라고...
B: 정말입니까? 그렇게 훌륭한 분인 줄 몰랐는데, 오늘 밥값 제가 내겠습니다.
하지만 책이 흔해진 지금은 저자라고 다 대접받는 건 아니다.
A: 제가 저서가 하나 있는데요. <마태우스>라고...
B: 흥, 그걸 저서라 우기다니. 제 조카가 써도 그것보단 잘쓰겠네요.




그렇다면 어떤 게 투플러스 책일까?
읽는 내내 가슴이 벅차고,
읽고 난 뒤 최소한 보름 동안은 뿌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으며,
누군가 만나서 얘기할 때면 “너 읽었어?”라고 뻐기고픈 책이라면
투플러스 등급을 매겨도 괜찮으리라.
최근 읽은 책 중엔 로쟈님이 쓴 <책에 빠져 죽지 않기>가 바로 그런 책이다.
서평집이 흔한 시대에 나온 또 하나의 서평집이긴 해도,
로쟈님이 쓰는 서평은 그 차원이 다르다.
좋은 쇠고기가 사람의 입을 황홀하게 만들 뿐 아니라
우리 몸에도 도움이 되는 것처럼,
로쟈님의 책은 읽는 재미와 더불어 독자에게 큰 도움을 준다.
특히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기술해 놓은 앞부분은
요즘 독서에 관한 강의로 먹고 사는 내가 새겨들을 점이 많았다.
책을 읽는 이유에 관한 책들을 일일이 다 읽을 수 없는 터에
그 책들의 정수를 요약해서 저자 자신의 의견과 접목시켜 주는 이 책은
누군가가 투플러스 등심을 알맞게 구워서 내 입에 넣어주는 것과 같다.
맛있는 고기를 먹고 나면 “이 집 또 와야지”라는 생각을 하듯,
로쟈님이 서평에서 괜찮다 싶은 책들은 적어 뒀다가 다음에 읽게 된다.
내가 갔던 식당을 다른 이가 가면 반가운 것처럼,
내가 읽은 책을 가지고 로쟈님이 서평을 썼다면 그저 반갑다.





문화, 페미니즘, 철학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로쟈님의 방대한 독서가 부럽지만,
어차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서평이라도 읽고 대리만족을 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다.
딱 하나 마음에 안드는 것은 책의 제목이다.
차라리 <책에 빠져 죽기>라고 했다면 좀 더 멋있었을 텐데.
- 접기
마태우스 2018-09-16 공감(30) 댓글(14)
Thanks to
공감




안 읽는 것인가? 못 읽는 것인가?




로쟈 이현우는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평가다. ‘쓰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국문학자 조동일이라면, ‘읽고 쓰다’라는 동사의 주어는 마땅히 이현우라고 봐야 한다. 최소한 지금은 그렇다. ‘읽을 만한’ 책을 보는 눈을 가지고, 한 주의 도서 트렌드를 따라가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종이신문을 구독해야 한다고 믿는다. 책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으로도 가능하긴하다. 이 작업은 일일이 검색을 하고 클릭을 해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하지만 종이 신문의 서평 코너는 한 주간의 독서 트렌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종이신문이 내키지 않고 인터넷이 편하다면 마땅히 로쟈의 블로그가 그 대안이 되겠다. 로쟈의 블로그(http://blog.aladin.co.kr/mramor)야말로 종이신문의 서평 코너에 대적할 만한 인터넷의 보물창고다. 적어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렇다. 굳이 글 내용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가 이 거대한 책의 바다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읽고 쓰다’는 주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꾸준함과 방대함으로 모자라 글의 유려함이 더해진 그의 블로그는 세상의 모든 책을 포획하려는 거대한 저인망 거물이고 로쟈는 저인망 어선의 선장이자 노꾼이다.

그가 쓴 세 번째 서평집 <책에 빠져 죽지 않기>는 우리 서평계에서 독특한 영토를 점유하는데 아마추어와 프로 서평 가의 경계가 그것이다. 이 책에서 이현우가 말했듯이 비평은 책을 읽은 사람을 위한 것이고, 서평은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을 위한다. <책에 빠져 죽지 않기>에서 이현우가 담은 글은 서평이라고 불리지만 보통 사람이 쓴 서평과 비교하면 확연히 ‘고급스러운’ 글이고 전문가가 쓴 비평과 비교하자면 ‘그들만의 암호’가 난무하지 않는 ‘보통사람의 언어’가 사용되었다. 어려운 글이 아니면서도 독서와 책에 대한 신선한 시각과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책이다.

독서가에게 ‘책에 대한 책’이란 그저 다른 사람의 ‘느낌’과 ‘감상’을 공유하고, 읽을 만한 책을 소개해주는 책이기 쉽다. 말하자면 정보를 얻기 위함이지 인문학책에 버금가는 담론을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책에 빠져 죽지 않기>는 이런 내 생각이 적확히 달랐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다음 구절이 그랬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 수는 세계 최저 수준인 데 반해 독서 인구나 평균 독서량은 현저히 적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문해력이 곧 독서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독서력은 문해력만 있다고 해서 저절로 얻게 되는 능력이 아니다. 문해력만으로는 책을 수월하게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문해력에서 독서력만으로는 책을 수월하게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해력에서 독서력으로 건너뛰기 위해서는 그 보폭을 가능하게 할 만한 독서량이 요구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책을 ‘안’ 읽는 것이 아니라 ‘못’ 읽는 것이다. 실제로는 독서력이 부족해서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인데도 충분히 읽을 수 있지만 단지 안 읽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 17쪽

단지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지 않을 뿐이라고 자위하는 사람에게는 당혹감을 주고, 책을 읽기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동기 부여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내 경우를 봐도 이현우의 생각이 일리가 있다. 야구광인 내가 일본의 야구 명작 만화 ‘터치’나 ‘H2’를 전집으로 사서 읽으려고 ‘노력’을 해도 도무지 읽히지 않았던 경험이 생생하다. 수십 년 동안 만화를 읽지 않은 나는 만화를 읽을 능력이 상실된 것이 아니냐는 고민을 했었다.






내가 다시 만화를 읽으려면 일정 수준의 워밍업과 훈련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현우가 독서력을 갖추려면 150권의 독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독서교육이나 정책은 우리 국민은 시간과 의욕이 없어서 책을 읽지 않을 뿐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진행된다. 이현우의 통찰이 일부라도 사실이라면 독서교육의 방향에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를 더해야 한다. 즉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좀 더 많은 책을 읽게 할 것인지 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줄까를 고민해야 한다.

이현우가 말했듯이 서평집은 드라마만큼 극적이지도, 연애소설처럼 달콤하지도 않다. ‘서평계의 계관시인’의 최신 저작쯤은 읽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마치 문화유산답사를 좋아하는 독자가 유홍준의 신간을 일상처럼 주문하고 읽는 것처럼 말이다. <책에 빠져 죽지 않기>에는 생각지 않았던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아프리카에 대한 원조가 오히려 아프리카 사람들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거나 구석기 시대와 비교해서 오히려 신석기 시대가 되면서 인류의 평균 수명이 줄어들었다거나. 어떤 책을 읽고 쓴 서평인지는 앞으로 <책에 빠져 죽지 않기>를 읽을 독자의 권리로 남겨준다. 로쟈 이현우가 많은 독자에게 책을 읽을 자유를 선물한 것처럼.
- 접기
박균호 2018-09-05 공감(27) 댓글(8)
Thanks to
공감




책에 빠져 죽지 않기




4일 동안 약 173 권의 책을 읽었다. 아니 약 173 권의 책에 대해 쓴 서평을 읽었다.




혹시 알라딘 명예의 전당에 오른 알라딘 서재인 '료자의 저공비행'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서재의 주인이 바로 이현우 님이다. 내가 읽은 <책에 빠져 죽지 않기> 저자이다. 료자가 무슨 뜻인지 항상 궁금했는데, <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의 애칭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저자에게 직접 팩트 체크를 한 것은 아니다.




<책에 빠져 죽지 않기>는 저자가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을 모은 책이다. 정확하게 센 것은 모르겠지만, 약 173 권의 서평이 담겨 있다. 저자는 비평은 어떤 책을 이미 읽은 독자를 상대하지만, 서평은 아직 읽지 않은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고 알려준다. 내가 읽은 책을 보았을 때는 반가움을 느꼈고, 읽지 않은 책을 보았을 때는 보관함에 넣었다. 물론, 관심 있는 주제를 다룬 책 위주로 선택을 했다.

우리가 현실에서 외면하고 있는 정말 많은 문제가 있다.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디까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이 많은 문제(불평등, 차별, 자연 파괴, 교육, 복지, 정치, 시민, 개혁 등)을 각 개인이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책을 읽는다고 달라질까? 책을 읽는 내내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서평의 부상은 비평의 쇠퇴의 이면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독자라 하더라도 해마다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의 수가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의 독서 현실이다. 점점 많은 책에 대해 우리는 '읽지 않은 독자'가 될 수밖에 없다. 책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지만 우리의 독서량은 산술급수적으로만 늘어날 뿐이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최대한 가려서 읽되,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가늠해두는 편이 최선일 것이다. 서평은 바로 그런 필요에 대응한다. (P.09)




나는 책 리뷰를 쓰면서 한 번도 비평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혹시 내가 쓴 것도 서평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있다. 내가 쓴 책 리뷰가 누군가에게 책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 서평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서평을 쓰는 목적을 저자는 자기만족이라고 하는데, 격하게 공감한다. 이제까지 255 편의 리뷰를 썼고, 이 달의 리뷰로 3번 정도 뽑혀서 적립금을 받았지만 모두 다시 책을 사는데 썼다. 앞으로 대중적으로 유명해질 리는 없고, 수익도 창출하기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난 책 리뷰를 쓴다. 왜 쓸까? 그냥 자기만족이다.




이 사회에서 자칭 전문가, 지식인 등이라고 떠들면서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배울 만큼 배우고, 책도 많이 읽었지만, 그들의 언행은 정의와 진실과 멀다. 검찰 개혁을 반대하는 검사, 이런 검사에게 기사 받아서 팩트 체크 하나도 안 하고, 거짓 기사를 쓰는 언론인, 자신의 정치적 입지만을 생각해서 정의와 진실을 외면하는 국회의원 등이 존재한다. 항상 왜 그럴까 고민했는데, 이에 대한 답을 플라톤이 제시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노예는 '주인에게 아첨하고 자비를 구하는 기술'을 터득하느라 영혼이 쪼그라든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성장할 수 없고, 고귀한 감정도 가질 수 없다. "그리하여 젋은 시절부터 노예가 된 이들은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으며, 쉽게 거짓말을 하고 모욕을 주고받는다. 결국 어린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고 전문가와 현자가 되었다고 믿는 그 순간, 건강한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 (P.122)




여기에서 '주인'은 누굴까?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모든 활동을 무익한 것으로 치부하는 '지배적 유용성'을 뜻한다고 한다. 자기의 기득권, 권력, 재산 등을 지키기 위해 정의와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결국 노예이다.




요즘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여행 관련 서적도 많고, 정보도 많다. 그런데, 꼭 여행을 가야만 좋을까?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공유하고자 한다.

이순신 장군님이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한 해미읍성을 방문한 적이 있다. 충청남도 서산에 위치한 읍내에 있는 성이다. 이곳에 가면, 평평하고 넓은 돌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조그만 개천이 하나 흐른다. 평범하게 보이는 이 돌이 바로 천주교도 처형장이었다. 약 1,800명의 천주교도가 이곳에서 참수를 당했다. 이곳을 일부러 찾아서 본 것은 미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을 읽었기 때문이다. 책을 안 읽었다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보고 난 느낌은? 글쎄,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방콕 여행자의 상징적 인물이 바로 철학자 칸트인데, 알다시피 그는 단 한 번도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난 적이 없지만, 각종 여행담의 열혈 독자였다. 그가 여행할 시간을 내지 못한 것은 역설적으로 더 많은 나라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P.584)




요즘 한기총 전광훈 씨의 행실에 대해 말이 많다.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이용해 먹는 파렴치한 행위라고 생각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개독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이게 과연 기독교의 정신인가? 하나님을 믿는 나 자신도 기독교에 대한 자괴감이 들 때 이 책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서평을 읽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표현하는 많은 말들이 있다. "청빈과 평화의 수도자이며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여 보호하신 분", "정의가 실편되지 않은 곳에서 인간이 얼마나 큰 고통에 빠질 수 있는지,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큰 위협에 처할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교황".





신학자 김근수는 <교황과 나>라는 책에서 프란시스코 교황을 읽는 세 가지 코드로 예수회와 성 프란치스코, 조국 아르헨티나의 현실 세 가지를 들면서 교황이 '온건 해방신학자'의 입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면서 교회개혁을 통해 사회개혁에까지 이르고자 하는 것이 교황의 지향점이라고 보는 것이다. 교황의 꿈은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교회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지 통렬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교황의 방한이 그런 반성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P.633)




너무 많은 책이 있어서 숨이 막힐 때, 대체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고민이 될 때, <책에 빠져 죽지 않기>를 한 번 읽어 보기를 바란다. 이미 읽었던 책에 대한 서평을 읽을 때는 미처 몰랐던 것을 다시 알게 될 수도 있고, 아직 안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을 읽을 때는 나의 독서 리스트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서평을 읽고, 골라 내어도 정말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다.




2019.10.5 Ex. Libris. HJK



- 접기
아타락시아 2019-10-05 공감(15) 댓글(0)
Thanks to
공감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