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1

아주 사적인 독서 - 욕망에 솔직해지는 고전읽기 이현우


아주 사적인 독서 - 욕망에 솔직해지는 고전읽기
이현우 (지은이)웅진지식하우스2013-04-22





























Sales Point : 91

9.0100자평(46)리뷰(27)


종이책 페이지수 256쪽

책소개
고전의 놀라운 힘은 읽고 또 다시 읽어도 언제나 우리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특히 고전은 내 마음의 가장 이기적인 곳, 그렇기에 가장 억눌러두는 곳을 자극하는 질문을 담고 있다. <마담 보바리>는 지금 내 욕망이 정말 내 것인지를 묻고,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육체가 정신보다 더 중요하지 않냐고 물으며, <돈키호테>는 멀쩡한 정신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을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고전을 철저히 나의 관심과 열망을 위해, 나만의 방식으로 읽어내야만 한다. 바로 '사적인 독서'가 필요하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로 우리 시대의 '서재지기' 역할을 하고 있는 이현우가 6년 넘게 진행해 온 비공개 독서 수업에서 골라낸 일곱 편의 고전으로 '사적인 독서'의 시범을 보인다. 상투적이지만 너무도 강렬하고, 뻔뻔하지만 진정성이 넘치는 고전을 통해 억눌려있던 삶의 감각을 깨우는 개인 교습이 시작된다.


목차


내 욕망은 정말로 내 것인가 - 《마담 보바리》를 읽어버렸다는 것에 대하여
책 읽는 ‘보통’ 여자의 등장 / 권태는 프랑스의 특산물 / 책에서 읽은 대로 사랑하다 / 몽상가의 파멸과 속물들의 승리 / 욕망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용서받지 못할 죄란 무엇인가 - 《주홍 글자》 법과 정의를 되묻다
우아한 죄수의 도전장 / 자신의 죄를 이기지 못하는 두 남자 / 더없는 보물, 살아 있는 주홍 글자 / A의 세 가지 의미 / 마음의 감옥에 갇힌다는 것 / 누구나 자기만의 주홍 글자가 있다

정신보다 육체가 더 중요하다 - 《채털리 부인의 연인》 온전한 자신의 발견
진짜 불구란 무엇인가 / 내 딸은 반처녀로 살 수 없다 / 스스로 절정에 이르는 한 여자의 자서전 / 하나의 몸을 본 바로 그 순간 / 당신의 그 근사한 엉덩이를 위해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 《햄릿》의 긴 망설임은 어디에서 오는가
햄릿은 왜 이렇게 긴가? / 복수의 열쇠는 어머니 / 정체성을 둘러싼 분투 / 새롭고 또 새로운 햄릿의 얼굴

멀쩡한 정신만으로 살 수 있을까 - 《돈키호테》 그 숭고한 광기에 대하여
돌아버린 독서광의 모험이 시작되다 / 이 정도는 되어야 기사 노릇 / 환멸의 시대를 건너가는 이야기 / 정말 미친 것일까, 미친 척하는 걸까 / 현실과 이상, 그 지긋지긋한 낙차 / 광기가 삶의 허공을 메울 때

사람은 무한한 꿈을 가져야만 하는가 - 《파우스트》의 구원을 삐딱하게 바라보다
무한한 욕망의 발명 / 파우스트는 신과 악마의 노리개인가 / 사랑은 젊음의 약발 / 지배자의 욕망, 파멸을 부르다 / 노력과 방황은 늘 무죄인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석상 손님》 매력적인 난봉꾼 돈 후안의 작별
금지하는 석상과 자유로운 시인 / 발꿈치만 봐도 사랑에 빠지는 불같은 상상력 / 언젠가 늙겠지만, 아직 멀었어! / 어른아이에게 작별을 고하다


책속에서



P. 8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각자가 자기 안의 햄릿과 돈키호테와 파우스트와 돈 후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배합비율까지도 예민하게 의식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주인공들이 바로 근대인의 전형적 초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그렇다면 이 작품들은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고뇌와 욕망과 광기와 탄식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것이 고전이 갖는 현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접기
P. 41 사실 샤를르가 특별히 악인은 아니지만, 이 사람의 특징은 야망이 없다는 겁니다. 뭐 특별히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취미도 없어서 밖에 나가지도 않고, 집안일도 곧잘 도와줍니다. 요즘 같으면 무난한 신랑감이라고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엠마가 보기엔 너무나 몰취미하고 심심합니다. 이걸 결혼한 다음에야 알게 된 거죠. 접기
P. 102 여자는 청어 타입이 있고 송어 타입이 있는데, 내 딸은 송어 타입이라는 겁니다. 비쩍 마르고 성에 대해서 별로 관심 없는 청어 같은 여자라면 남편이 불구든 아니든 상관없겠지만, 얘는 팔팔한 송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거죠. 로렌스가 모든 여성의 해방을 외친 것은 아니고, ‘송어’의 해방을 주장한 거라고 봐야한달까요. 코니 아버지는 더 적극적으로 충고를 해요. “애인 하나 두는 게 어떻겠니, 코니야? 세상의 여러 재미도 좀 맛보도록 하려무나!” 접기
P. 153 아버지를 기억한다면 복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들의 의무죠. “당신을 기억해달라고? 그러지. 불쌍한 유령이여.” 그다음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공책을 꺼내서 적어요. 말이 안되는 거죠. “아, 그랬군요, 아버지! 제가 복수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게 정상이죠. 기억하기 위해서 공책에다 적는다니요. ‘아버지가 복수하라고 했음. 몇 월 며칠.’ 그건 기억이면서 동시에 배반입니다. 자크 데리다 같은 철학자는 이것이 글쓰기가 갖는 고유한 역할이라고 이 대목을 주목하기도 합니다. 접기
P. 190 일단 두란다르테와 벨레르마의 숭고한 사랑 이야기에 대한 존중감이 있어요. 돈키호테는 그걸 재현하고 싶어합니다. 자기 시대의 두란다르테가 되고 싶어해요. 둘시네아는 벨레르마고요. 그런데 정작 이뤄지는 건 이런 식의 금전적 거래뿐입니다. 마이클 샌델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하는 이야기지만, 돈이라는 것은 가치를 변질시킵니다. 모든 것은 돈으로 환산하면 그렇게 됩니다. 가령 대학 기부금 입학을 허용하면 돈이 대학 입학이라는 것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되죠. 돈이라는 것이 중립적으로, 가치의 형태만 바꿔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치 자체를 하락시켜요. 심장을 주는 것과 돈을 주는 것은 의미가 상당히 다릅니다. ---

저자 및 역자소개
이현우 (지은이)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로쟈’라는 필명을 가지고 매일 새롭게 출간되는 책들을 소개하는 서평가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다. 대학 안팎에서 러시아문학과 세계문학, 한국문학, 인문학을 강의하며 여러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 『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책에 빠져 죽지 않기』 『아주 사적인 독서』 『로쟈의 인문학 서재』 『... 더보기


최근작 :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책에 빠져 죽지 않기> … 총 5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우리 시대의 ‘서재지기’, 로쟈 이현우의 첫 번째 강의록

지금도 읽히는 힘을 품은 고전들은 언제나 우리를 자극한다. 삶에서 무언가 막혔거나 빠져나가버렸다고 느껴질 때, 예전에 대충 읽었거나 잊고 있었던 그 책들을 다시 읽게 되곤 한다. 아마 이 시대가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한 시대를 풍미한 ‘스캔들’이었던 고전을 통해 일탈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스캔들을 추구하는 발칙한 감성의 지지를 받아낸 끝에 그 문제작들은 지금 위대한 고전이 되었을 것이다. 막상 그 문제작들을 지금 읽어보면 내용은 진부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진부함 속에는 가장 상투적이면서도 강렬한 인생의 질문들이 들어있다. 삶을 살수록 그 감정과 질문들을 삶 속에 재배치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고전은 새로운 매력을 보여준다.
책 내용은 늘 같을지 몰라도 읽는 나는 매번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로 우리 시대의 ‘서재지기’ 역할을 하고 있는 로쟈 이현우가 그렇게 ‘달라지는 나’를 위한 책 읽기를 선보인다. 새로운 어조와 문제의식을 담고 제안하는 이 ‘다시 읽기’는 책 읽기를 단순히 교양을 쌓기 위한 작업이 아닌, 내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특별한 체험으로 바꾸어놓는다. 인생의 문제와 질문들을 추려보고, 고전 속 그들과 나의 공통 경험 속에서 해답을 찾아내는 것이다.
“보바리, 채털리, 햄릿, 돈키호테의 열망과 방황은 모두 나의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리고 나는 그 감정과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었던가? 그리고 이제는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한 시대를 풍미한 감수성 속으로 일탈하여, 공감하고 고민하다보면, 결국 내 삶이 던지는 질문 앞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럴 때 고전은 비로소 굳어있던 마음을 뜨거워지게 하고 풀리지 않던 삶의 문제에 해결의 실마리를 준다. 이것이 이 책이 제안하는 ‘사적인 독서’다.

‘욕망’의 문제를 담은 고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독서는 이제 치워라

‘아주 사적인 독서’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독서를 가리킨다. 즉 나의 관심과 열망, 성찰을 위한 독서를 말한다. 책 읽기의 중요성은 늘 강조되지만, 아직까지 우리가 당면한 책 읽기는 ‘공적인’ 성향이 강하다. 즉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회사에서 추천하는 책이라서, 요즘 뜨는 명사가 언급했기 때문에,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에 읽는다. 읽었다는 티를 내야만 하는 상황에서 남의 눈을 의식한 독서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독서로부터 진정으로 의미있는 무언가를 건져내려면 ‘사적인’ 독서를 추구해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자기만의 방식, 자기 색깔로 책 읽는 방법을 배워야만 독서의 진정한 효용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효용은 결국 자신이 당면한 인생의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돌아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사적인 독서는 고전을 그저 이야기책이 아닌 현실적인 문제에 대응하는 매뉴얼로 읽을 수 있도록 한다.
‘가장 공적인 책’이랄 수도 있는 고전들은 사실 지극히 사적인 책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고전 속 인물들은 저열하든 고결하든 자기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추구하기 때문이다.《주홍 글자》나《채털리 부인의 연인》같은 책들은 출간될 당시에는 커다란 스캔들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 책이 고전으로 남은 것은 독자가 그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방황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에 대한 성찰도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전이 되는 힘은 작품성이나 선정성도 아닌 어느 시대건 내 삶에 달라붙는 질문과 감성들이다. 이 책은 현대인의 피부에 현실적으로 달라붙는 일곱 가지 질문에 걸맞은 책들을 골라냈다.
사적인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기 위해, 저자는 ‘시범 조교’로서 고전을 읽어가는 자기만의 눈을 자유롭게 드러낸다. 이런 방식의 책 읽기는 저자가 6년 넘게 진행해 온 독서 수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책사랑’이라는 고전 애독자들의 자발적인 독서 모임에서 강의한 내용이다. 6년 전 그가 한 단체에서 진행하던 강의가 폐강될 때, 그 수강생들이 따로 모여 ‘책사랑’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매주 강의해줄 것을 의뢰했다. 말하자면 ‘정말로 사적인 독서’ 수업이 시작된 셈이다. 그 후로 6년 동안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이 ‘사적인 독서’는 이어져왔고 책으로도 나왔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접기





내가 느낀 점을 잘 파헤쳐 줄 뿐 아니라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도록 잘 이끌어주는 책. 채털리 부인의 연인과 석상손님은 안 읽었는데, 샀다.
꼬마요정 2019-12-03 공감 (10) 댓글 (0)
Thanks to
공감





고전의 깊이와 삶의 통찰이라는 인문학적 소양이 넘치는 책읽기를 보여주고 있는 책. [텍스트로 읽는 고전]이라는 제목을 붙여 시리즈로 나왔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淸隱청은 2013-10-03 공감 (6) 댓글 (0)
Thanks to
공감





쉽고 재미있게 풀어준 문학의 심연
꿈대로 2013-05-23 공감 (2) 댓글 (0)
Thanks to
공감





고전을 세세하게 파해친 책, 꼼꼼한 설명 덕분에, 강의한 내용을 옮긴 덕분에 어렵기만 한 고전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었다.
별빛향기 2014-02-10 공감 (2) 댓글 (0)
Thanks to
공감





고전으로 시작하는 인문학의 시작
재는재로 2013-02-22 공감 (1) 댓글 (0)
Thanks to
공감


더보기




마이리뷰

구매자 (14)
전체 (27)

리뷰쓰기

공감순





아사독을 읽어야 하는 이유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보자.
있는 집답게 우리 집 서재에는 세계문학전집이 풀 세트로 꽂혀 있었다.

하지만 그 비싼 책들은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채 방치되다 결국 버려지는 운명을 맞았다.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읽으라고 사준 건데 우리가 책읽기에 뜻이 없었으니, 그리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내가 읽은 부분은 <여자의 일생> 일부분,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일부분, 그리고 <데카메론>이 고작이었다.

여기에 변명을 해보자면 당시 책은 위에서 아래로 읽어야 했고,

글자도 작아 어린애가 읽기엔 여러 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내가 책을 손에 들기만 하면 야단을 치면서 빼앗아 버렸고,

책을 사놓고 못읽게 한 아버님의 이 알 수 없는 철학은 나로 하여금 이십여년간 책을 멀리하게 만들었고,

책의 바다에 빠져든 서른살 이후에도 고전을 읽지 않았다는 열등감에 시달려야 된 한 가지 이유였다.



로쟈님은 고전을 ‘너무도 유명하지만 아무도 안읽은 책’으로 정의한다.

실제로 주변 사람들이 죄다 고전을 안읽었다면 내 열등감이 많이 상쇄될 수 있었겠지만,

나랑 매주 테니스를 치는 친구는 고전을 죄다 읽었다면서 말을 할 때마다 나한테 “그건 니가 전쟁과 평화를 안읽어서 그래” 같은 식이어서

열등감은 줄어들기는커녕 증폭됐다.

게다가 나와 결혼한 아내도 고전에 해박해서 나한테 이런 식으로 아쉬움을 말한다.

“여보가 고전을 읽었다면 정서적으로 훨씬 도움이 됐을 텐데”

내가 뒤늦게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을 읽기 시작한 건 다 그들의 자극 덕분이다.

하지만 읽어야 할 책들을 읽지 않은 폐해 중 하나가 이해력이 떨어진다는 것,

그 고전들을 읽고 난 뒤 남는 건 그저 “숙제 하나를 해치웠다”는 것뿐,

그 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주 사적인 독서> (이하 아사독)는 로쟈님이 고전 7권을 가지고 일반 독자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은 고전을 읽어야 하는 동기부여를 해준다는 거다.

로쟈님에 따르면 고전은 시대를 뛰어넘어 독자들에게 계속 읽히는 책,

즉 고전은 시대를 망라한 인간정신의 총아 정도로 표현해도 될 수 있을 테니,

고전의 위대성과 더불어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으로 충분할 것 같다.

거기에 <햄릿>의 주인공이 우유부단한 이유, 내가 일부분만 읽은 <채털레부인의 연인>이 내가 아는 그런 책이 아니라는 것 등등을 아주 친절하게 말해주는데,

진즉 아사독을 읽었다면 좀 더 일찍 고전의 세계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사독은 1) 나처럼 고전을 건너뛴 청소년기를 보낸 것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는 분,

2) 학교숙제 때문에 억지로 고전을 읽어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분,

3) 좋은 책이 없어서 안읽는다고 핑계대면서 책을 멀리하는 분,

4) 책을 많이 읽은 이성친구 때문에 속성으로 지식을 습득해야 할 분 등이 읽으면 좋을 것이다.

강의한 걸 글로 풀어낸 거라 술술 읽힌다는 점도 아사독의 매력이며,

이 책의 저자와 한 공간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가슴벅찬 일인지도 깨달을 수 있으니,

망설이지 말고 구매하시라. 뒷일은 내가 책임진다.
- 접기
마태우스 2013-02-25 공감(24) 댓글(17)
Thanks to
공감




이토록 이로운 독서라니!




서평가 로쟈님의 명성을 익히 아는 관계로 이분의 책을 고른다는 건 심호흡이 필요했다. 여러 책 중에서 그나마 이 책을 골랐던 것은 제목이 주는 평이함의 평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점이 적중했다. 필요 이상으로 겁을 냈다는 듯이 아주 쉽게, 편안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이 책은 로쟈님이 강연을 했던 내용들을 입말로 옮긴 것이다. 마치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을 읽을 때처럼 내가 현장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책 읽어주는 교수님, 아니 책을 풀어주는 서평가라니, 참으로 근사하다.




작품은 크게 두줄기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문학 속의 여자, 또 하나는 문학 속의 남자다. 여자 편이든 남자 편이든 내키는 쪽으로 먼저 읽어도 무방하지만, 섞지는 않고 읽기를 저자가 권했다. 읽어 보니 까닭을 알겠다. 흐름! 이어지는 그 흐름을 타보니 더더더 책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드는 게 아닌가!




'마담 보바리'는 내가 읽어보지 못한 소설인데, 이렇게 간접적으로 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계층 의식이 흥미로웠다. 아주 표나게 잘살지도 못하고, 아주 드러나게 못살지도 않았던 중산층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무료함으로 스스로를 갉아먹는 계기를 만들고 있었다. 작품 속 주인공 엠마가 꼭 그랬다.


삶이 권태에 빠지는 이유는 시골에 살아서만은 아니고, 무능한 남편 때문만도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 탓도 있습니다. 권태는 중산층 부르주아의 정서입니다. 그보다 상류층이거나 빈곤층이라면 권태롭지 않아요. 빈곤층은 먹고살기 바쁘니까 권태로울 여유가 없고, 상류층은 정치 활동이나 사교 활동이 많아서 일상생활을 관조해볼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중간층이 문제입니다. 중산층은 대개 먹고살 만은 하지만 아주 풍족하지만은 않은 상인 집단입니다. 권태라는 건 이렇듯 특정한 사회적·시대적 조건 아래 발생한 것입니다. -25쪽



출산은 엠마에게도 현실에 만족하면서 주저앉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입니다. 육아를 하며 아이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다른 일은 잊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엠마는 아이를 직접 보지 않고 유모에게 맡기는 바람에, 주저앉을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놓칩니다. 하층민은 직접 아이를 돌보지만, 중산층 이상은 보통 유모가 대신 돌보죠. 어머니는 아이를 가끔 보러 갈 뿐이에요. 육아도 하지 않고, 노동도 하지 않으니 남은 시간은 권태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이 변변찮다면 더더욱 그렇게 됩니다. -27쪽


내가 어릴 때 읽었던 책은 '주홍글씨'라고 제목이 적혀 있었는데 이 책에서 소개한 제목은 '주홍글자'이다. 그때는 제목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 의문을 갖지 않았는데, '주홍글자'라고 다시 각인하고 읽게 되니 원문의 느낌은 주홍글자가 맞다고 동의하게 되었다. 이런 수정과 교정도 반갑다. 내가 한 사색은 아니지만, 어쩐지 나도 좀 더 고민해 본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영화로 보았다. 이 책에서도 잠시 언급한 영화였는데 당시 관람하면서 나쁘지 않았지만 크게 좋지도 않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내가 원작을 읽고서 보았더라면 느낌이 좀 달랐을 것이다. 지금 이 책에서 소개한 짧은 분량으로도 영화가 더 좋았다고 기억이 조정되는 것을 보니 말이다.





톨스토이 작품에서는 ‘적게 먹고, 가급적이면 육식을 자제해야 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어요. 채식주의를 주장한다기보다 육식에 반대하는 것인데, 이유는 육식을 통해서 많은 열량을 얻으면 에너지가 남아도니까 욕정을 품게 되고,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절식을 해야 하고, 그래도 에너지가 남으면 노동으로 소진해야 합니다. 톨스토이에게 도덕적 삶이란 그런 구체적인 삶입니다. 로렌스는 도덕에 대한 관점이 조금 다릅니다. 건강한 욕정을 억압하는 게 오히려 부도덕하다고 생각해요. 자연적인 본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건강이라고 봅니다. 로렌스가 쓴 편지를 보면 톨스토이를 꽤나 탐독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렌스는 《안나 카레니나》같은 작품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두 작가가 모두 성을 중요한 문학적 화두로 다루지만 결론은 서로 다릅니다. -97쪽

톨스토이와 로렌스를 비교한 이 부분이 좋았다. 육식으로 인한 에너지의 과잉이 욕망을 더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에 어쩐지 동의하게 된다. 현대인의 식생활은 지나치게 육식으로 변해버렸다. 학교 급식의 경우 일주일에 4-5회는 고기가 나온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그나마 2주에 한번 나오던 생선도 거의 안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채소 위주의 식단은 나부터도 오늘 찬이 좀 부실하네~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축적된 과잉 에너지를 어찌 풀꼬! 폭력적 성향의 게임을 선호하는 것도 어쩌면 육식과 좀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로렌스의 입장 또한 지지하게 된다. 예전엔 야동의 야자도 못 꺼냈던 것 같은데, 요새는 오히려 그쪽에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건강한 것이라는 공감이 조성되어 있지 않던가. 성자스러운 톨스토이에게 경배를 바치지만, 세속에 가까운 로렌스 쪽이 더 흥미롭다고 여기는 건, 역시 육식 탓이야...;;;;;

남자 쪽 이야기로 건너가 보자. '햄릿'의 긴 망설임에 대해서 얘기할 때 푸훗! 웃고 말았다. 아, 이 진지한 글에 이런 유머라니!!!

《햄릿》은 행수로 따지면 약 4000행 정도 되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런 평도 가능했을 겁니다. 존 판던의 인용입니다.

마음이 어지러운 젊은이에 관한 멋진 희곡이다. 그런데 이 젊은이의 지독한 우유부단함 때문에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할 연극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나 4시간을 넘겨버렸다. 거의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수준이었다. 연극이 절반 정도 지났을 때 나는 이렇게 소리칠 뻔했다. 빨리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인다! -138쪽

아하하핫,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런 반응이 나올까!

'돈키호테'에 붙은 소제목이 무척 마음에 든다. '그 숭고한 광기에 대하여'라니! 광기와 숭고함이 동격이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쉽게 수긍하기 어렵지만 상대가 돈키호테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는 흔히 ‘곱게 미치라’고 충고하지만 돈키호테는 ‘숭고하게 미친’ 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돈키호테의 모험담을 마주하게 되면 광기 없는 삶이란 무난한 공허에 불과한 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일상의 안락에 파묻혀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문득 ‘불쌍한 몰골’로 비칠 때 우리는 다시금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풍차를 향해 돌진해가는 이 방랑기사의 피가 우리에게도 흐르고 있다면요. -193쪽

지나치게 안온하지 못한 일상 덕분에 늘 평온한 일상을 꿈꾸며 사는 나이지만, 그럼에도 돈키호테의 숭고한 광기를 선망하기도 한다. 다들 그런 이중적인 마음을 갖고 살지 싶다.




'파우스트' 편을 읽다가는 무척 우울해지고 말았다. 이 대목 때문이다.





파우스트의 비극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게 된다는 건데, 사실 요즘은 비극의 내용이 달라졌다고도 합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내 영혼을 사줄 악마가 없다는 거라나요.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고 하잖습니까. 단, 계약 조건이 좀 특이하죠. 일도 해주고, 영혼도 파는 거니까요. -209쪽


영혼을 사줄 악마가 없다는 것이 현대인의 비극이라니,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는가. 이 문장 안에 서러운 '을'들의 모습이 보여서 울적했다. '흑집사'의 세바스찬 같은 악마는 역시 상상의 세계에서만 등장해야 하는가 보다.




등장하는 작품들 중에서 유일하게 처음 들은 게 '석상 손님'이었다. 푸슈킨의 작품인데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대구'를 이용해서 풀어낸 문학적 감각에 감탄했다.





헤어지면서 돈 구안은 돈나 안나에게 키스를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돈나 안나가 키스를 해주며 “자, 여기 이렇게”라고 말하는데, 러시아어로 키스는 남성명사라서 원문에서는 “여기 키스가 있어요”란 문장이 “여기 그가 있어요”로 표현됩니다(영어로 옮기면 “Here he is"입니다). 교묘한 이 중의적 의미 역시 푸슈킨의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가 옵니다. 기사단장의 석상이죠.

251

돈 구안이 손을 내밀며 “자, 여기……”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돈나 안나의 “자, 여기 이렇게”와 대구를 이룹니다. 러시아어로 손은 여성명사라서 “여기 손이 있네”라는 돈 구안의 말은 “여기 그녀가 있네”라고 표현됩니다(영어로는 “Here she is"입니다). 여기서도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죠. 결국 돈 구안은 돈나 안나를 남겨두고 죽음을 맞습니다. -250쪽


나의 독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독서이건만, 그 바람에 나의 책 읽기가 더불어 즐거워지고 깊어지게 되었다. 얼마나 고맙고도 이로운 사적인 독서인가. 원래도 호의적인 인문학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인문학의 효용과 가치에 대해서 더 찬사를 보내고 싶어졌다. 즐거운 독서였다.
- 접기
마노아 2013-09-09 공감(20) 댓글(14)
Thanks to
공감




아주 사적인 리뷰




로쟈의 <책을 읽을 자유>를 읽고 내친 김에 <아주 사적인 독서>를 읽었다.

그 두 권은 같은 날 주문한 책으로, 내 나름 로쟈 컬렉션이다.(민망하지만)



우선 <책을 읽을 자유>를 읽을 때 속도가 더디었던 반면 이 책은 수월한 편이다.

둘은 내용이나 분량 자체도 다르지만 책장을 넘길 때 종이 두께도 다르다.

먼저 읽었던 책은 종이가 얇아서 두 장씩 넘어가곤 했는데 이 책은 종이가 두껍다.

별로 안 읽었는데 상당히 읽은 것 같은 두께감 때문에 뿌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것까지 신경 쓰는 줄 알면 출판사 직원들이 더 섬세해지려나.



일곱 편의 고전 문학작품을 저자가 어떻게 읽었는지 보여주는 게 책의 주내용이다.

원래는 강의한 내용인데 그것을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처음 제목을 보고서 '그럼 공적인 독서는 뭐지? 공적으로 기여하는 독서인가?' 생각했다.

나처럼 제목에 의문을 가지는 독자가 많았을까.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적인'이란 말이 여러 가지 뜻을 가질 수 있지만 여기서는 '남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독서'라는 의미로 쓰고자 합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교양으로서의 독서는 '읽은 척 매뉴얼'을 참고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아주 사적인 독서'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독서를 가리킵니다. 나의 관심과 열망, 그리고 성찰을 위한 독서입니다."(6쪽)

마치 공적인 독서와 사적인 독서가 흑과 백처럼 확연히 다른 듯이 말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개념 설정을 그렇게 했다는 뜻이다.

내 생각에 독서는 남에게 뽐내기 위한 독서와 자신을 성찰하기 위한 독서 그 중간 어디쯤이 아닐까 싶다. 대화를 나누고(논의의 토대) 소통하기 위해 읽기도 하지만 읽으면서 나를 돌아보기도 하니까. 그 둘이 분명하게 나뉘는 것 같지는 않다.



책에서 다루는 작품은 <마담 보바리>, <주홍 글자>, <채털리 부인의 연인>, <햄릿>, <돈키호테>, <파우스트>, <석상 손님> 7편이다.

너무나도 많이 들어 봐서(<석상 손님>은 빼고) 마치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다.(저자는 '너무도 유명하지만 아무도 안 읽는 책'이란 표현을 쓴다.)

나도 한 두 권은 확실히 읽었는데 나머지는 긴가민가하다. 어린이 시절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중요하지도 않은데 왠지 세어보게 된다는…)



이런 종류의 책이 가진 장점 중의 하나는 읽은 책도 다시 보게 해준다는 것이다.

내 경우엔 <마담 보바리>와 <주홍 글자>, <햄릿>이 그랬다.(확실히 읽은 책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아니, 엠마가 저런 짓을 한 걸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거였어?!'

'헐, 저런 게 있었나?'

속으로 이 비슷한 말을 주절거리며 읽게 된다. 결국 내가 읽은 책이 진짜 저 책이 맞는지 의심할 지경에 이르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만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난 그저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바쁜 유형이다.

드라마를 보며 등장인물의 대사나 행동, 사건에 일일이 흥분하고, 마치 자기 일인 듯이 온갖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도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드라마를 잘 안 본다.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이유도 읽고 나면 '기가 빨리는' 느낌이 들어서다. 좋게 말하면 몰입도가 뛰어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빠져들어서 현실과 이야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거다.

그런데 성찰이라니?! 내가 문학작품을 읽고 과연 성찰할 수 있을까?! 내가 '아주 사적인 독서'를 할 수 있을까?!! 로쟈사마처럼 저런 해석을 할 수 있을까?!!! 흥미진진하다.



로쟈가 펼쳐 보이는 고전 작품의 세계에 빠져 있다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난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물론 저자의 훌륭한 해석과 빼어난 글솜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왠지 나도 이제 고전 작품을 로쟈처럼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로쟈사마에게도 몰입하다니, 난 진짜 몰입능력이 좋은 것 같다)

그러한 흥분을 가라앉히기 싫어서(열정은 좋으니까) 책을 다시 훑어 보는데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이 나온다.



"(…) 저는 고전을 최대한 우리 가까이에 갖다놓고 싶었습니다. (…) 작품이 갖는 보편성을 발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발견은 자기 발견의 구문으로 이루어집니다. '나는 햄릿이다', '나는 돈키호테다', '나는 보바리다'라는 식입니다.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각자가 자기 안의 햄릿과 돈키호테와 파우스트와 돈 후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자칫 진부해보일지도 모르는 주인공들의 물음에 나의 물음이 포개질 때, 고전 독서는 시간이 남아돌 때나 가능한 독서가 아니라 필수적인 독서로서 의의를 갖게 될 것입니다."(7~8쪽)



난 저 부분을 읽고 소름이 돋았다.(처음 읽을 땐 왜 몰랐을까?) 난 이미 저자가 말하는 독자의 범주에 속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햄릿이다', '나는 돈키호테다', '나는 보바리다' ……

날카롭게 분석하고 정확하게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읽을 때 난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주인공(또는 꽂히는 인물)인데.



문제는 내가 작품 속 인물과 완전 합체(?)되던가 아니면 아예 따로 놀던가 하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 내 문제를 바라보지 못한달까.

포인트는 '자칫 진부해보일지도 모르는 주인공들의 물음에 나의 물음이 포개지'도록 하는 것에 있다. 아, 소중한 깨달음.

이야기, 해석, 정보 게다가 깨달음까지 빼곡하게 담긴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읽지 않은 책도 읽고 싶어졌고, 이미 읽었던 책들도 다시 보고 싶어졌다.

앞으로 문학작품을 읽을 때 책에 나온 저자의 가르침(?)이 도움될 것 같다.
- 접기
cobomi 2015-05-12 공감(20) 댓글(2)



고전의 깊숙한 밭고랑으로부터 싹트는 삶이라는 씨앗.

욕망, 우리의 일상에서는 터부시 되는 말이지만, 우리의 총체적인 삶에서는 너무도 친숙한 말이다. 수많은 문학작품과 인문서들의 주요 타깃이 되는 ‘욕망’이 이번에는 인터넷 서평가로 유명하신 로쟈님의 주 타깃이 되었다. 이 책 《아주 사적인 독서》의 부제는 ‘욕망에 솔직해지는 고전읽기’ 이다. 욕망의 사전적 의미는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 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욕망하는 근본적인 이유, 그것은 인간이 결핍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고 둘을 가지면 셋을, 셋 다음엔 넷...그러나, 중요한 것은 숫자가 무한대인 것처럼, 또는 우주가 무한대인 것처럼 다다를 수 없는 것이 욕망의 끝이다.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채우거나 탐하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능이다. 진실은 무한대의 우주에 우리가 다다를 수 없듯이 욕망이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이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이다. 애초에 인간은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그야말로 욕망의 최고봉이자, 세기의 스캔들로 잘 알려진 《마담 보바리》,《주홍 글자》,《채털리 부인의 연인》, 《햄릿》,《파우스트》,《석상손님》, 이렇게 7편의 고전이 실려있다. 이 고전들의 공통 텍스트는 욕망으로 이 고전들을 통해 우리들의 억눌려 있던 감각들에 심폐소생술을 하여 삶의 감각을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심리학 용어 ‘보바리즘’을 낳을 정도로 마담 보바리처럼 현재에도 꾸준히 제기되는 문제작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오래 전 읽었을 때 그저 보바리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구분 못하는'자신은 다르다고 스스로 믿는 능력'-이 병리학적 양상이라 생각해왔던 것에 머물러 있었는데 나아가 저자는 ‘사회가 굴러가는 어떤 법칙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 작품의 의의는 이들의 욕망이 가지고 있던 ‘보바리즘’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려 하는 ’ 리얼리즘의 문학으로서의 가치이다. ‘욕망’이라는 텍스트에 ‘삶’이라는 현실을 대차대조 하고 있는 저자의 고전읽기를 통해 고전이 주는 의미를 새롭게 재생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가 솔솔하였다. 엠마가 소설이 주었던 환상의 세계를 현실에서 끊임없이 욕망하였지만,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는 길은 욕망이 가지고 있던 허구성과 모방성을 마주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주홍글자》에서도 마찬가지다. 주홍글자가 가진 ‘간통녀’라는 각인의 글자이지만 간통의 A가 ‘Angel'로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역시도 욕망이라는 텍스트에 담겨져 있는 우리 세계의 진실이 숨겨져 있는 장치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성애소설로 잘 알려져 있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도 기존에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남녀간의 성적 욕망의 관계가 합일을 이룰 때 -정신과 육체가 일치되어야 하는 관계-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의 예찬이 담겨져 있는 고전이다. 여기서 궁극의 욕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단연, 파우스트이다. 마담 보바리는 환상과 현실 사이의 욕망을, 주홍글자는 사회 규범에 길들여진 욕망의 그림을, 채털리 부인에서는 남녀간의 성적 욕망이라 한다면, 파우스트는 , 괴테 일생을 이 책 한권에 담으려 했던 것처럼 다양한 욕망들이 대거 등장하여 욕망의 끝을 폭로하고 있다. 그것은 욕망이라는 전차에 올라타는 순간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 삶의 본질이란 것을 깨우쳐주려 함이다.



위에 실려 있는 일곱 편의 고전을 다 읽고 나서 떠오른 것은 연암집을 읽고 나서 쓴 홍길주님의 글이었다. 글은 변함이 없지만, 내 모습이 늙고 변하여 가듯이 글도 얼굴을 따라 변한다는 말씀처럼 고전은 항상 변함이 없지만, 그 고전을 읽는 '나'는 항상 변하고 있었다. 고전과 삶을 대차대조하여 가듯 읽을때마다 고전에서 얻는 지혜 또한 변해갈 것이다. 아주 사적인 독서, 그것은 누구의 독서도 아닌 고전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매력이다. 저자 이현우님을 통해 고전 깊숙한 밭고랑으로부터 싹트는 삶의 씨앗을 하나 얻게 되었다. 그 씨앗을 가슴에 품고 아주 사적인, 나만의 독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소망해본다. 우리는 숙명처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났으며 '나'라는 역에서 '타인'이라는 전차를 갈아탄 후,'함께' 하는 역에 지나쳐야만 비로소 삶의 본 모습에 다다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역을 지날 때마다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것은 고전이라는 조타수임을 확인하는 시간들이었다.


책을 펼쳐 그 사람의 글을 읽으니 곧 그의 글은 바로 지금의 나였다. 이튿날 또 거울을 꺼내 살펴보다 책을 펼쳐 그 글을 읽으니 그의 글은 곧 이튿날의 나였다. 이듬해 또 거울을 떠내 살펴보다 책을 펼쳐 그 글을 읽으니 그의 글은 곧 이듬해의 나였다. 내 얼굴은 늙어 가면서 더욱 변해 가고 변하면서 그 옛 모습을 잊어버렸지만, 그 글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읽을수록 더욱 색다르니 내 얼굴을 따라 닮았던 것이다.-홍길주 -[연암집을 읽고]


- 접기
淸隱청은 2013-09-27 공감(10) 댓글(0)



[아주 사적인 독서]

【 아주 사적인 독서 】 : 욕망에 솔직해지는 고전읽기

_이현우 저 | 웅진지식하우스

이 책의 부제는 ‘욕망에 솔직해지는 고전읽기’라고 되어있다. 일곱 편의 고전에 대한 강의를 묶었다. 책의 각 장은 저자의 두 시간짜리 분량의 강의를 풀어서 편집했다.

책에서 다루는 작품은 《햄릿》부터 《돈키호테》, 《파우스트》, 《석상손님》, 《마담 보바리》, 《주홍글자》, 《채털리 부인의 연인》등으로 이어진다. ‘욕망’이 키워드이다. 이는 다시 작품별로 여성적 욕망과 남성적 욕망으로 분류된다.
독서는 무엇인가? 저자는 ‘아주 사적인 독서’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독서를 의미한다고 한다. 독자의 관심과 열망, 그리고 성찰을 위한 독서이다. 그런 독서의 과정에서만이 고전과 나(독자) 사이의 사적이고 은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욕망과 별도로 《마담 보바리》에서 뽑은 또 하나의 키워드는 ‘권태’이다. 권태는 프랑스의 이미지와 오버랩 된다. 영국은 ‘우울’이다. 권태의 의미는 현대에 들어서 많이 달라지고 있지만, 중산층 부르주아의 정서로 바꿔 부를 수 있다. 빈곤층은 먹고살기 바쁘다보니 권태와 이웃할 시간이 별로 없다. 상류층은 그 나름대로 바쁘다. “권태라는 것은 특정한 사회적, 시대적 조건아래 발생한 것입니다.”

《주홍글자》에선 ‘누구나 자기만의 주홍글자가 있다’라는 대목에 시선이 머문다. “간통소설이되 간통이 드러나지 않는 소설, 《주홍글자》는 딤스데일 목사와 헤스터 프린의 두 갈래 길을 통해 죄와 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는 이야기입니다.” 작가 호손이 시대적 한계 안에서 진정한 죄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제기한 것만으로도 《주홍글자》는 고전의 반열에 들어선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파우스트는 신과 악마의 노리개인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계약이 이 소설의 핵심내용으로 인식되어있다. 실제로 연금술도 익힌 좀 이단적인 대학자 파우스트가 16세기에 존재했다고 한다. 에라스무스, 루터와 동시대인이다. 파우스트는 인식을 위해서 삶을 희생한다. 삶을 산 게 아니라, 삶을 투자해서 인식을 얻으려고 했지만, 남은 게 없다. 파우스트의 첫 대사이자 탄식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는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철저히 공부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가련한 바보, 전보다 더 똑똑해진 것이 하나도 없구나! 가슴이 타버릴 것만 같다.” 아무튼 파우스트는 이제까지 앎을 위해 욕망을 억제해왔지만 ‘인생의 황금나무’는 다 지나가버렸고, 허망함을 참지 못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악마와 계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석상 손님》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고전이다. 이 작품은 푸슈킨이 1830년에 쓴 네 편의 짧은 희곡 중 하나이다. 흔히 ‘작은 비극’ 혹은 ‘소 비극’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희곡의 주인공은 ‘돈 후안’이지만, ‘석상 손님’이라는 제목만 남았다. 이 작품의 주요 배역은 ‘석상 손님’인 셈이다. 로쟈 이현우는 이 희곡을 푸슈킨의 내적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푸슈킨이 결혼을 앞두고 쓴 여러 편의 작품 중 하나이다. “나이가 들면 젊음과 작별해야 하는 것처럼, 결혼을 앞둔 푸슈킨은 나름대로 선택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어른 아이를 넘어서 제대로 된 어른이 되기 위한 고민이 담겨있다.

이 책에 담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이미 이 책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을 읽은 독자들에겐, 다른 이(저자)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또 하나는, 아직 이 작품들을 만나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젠 좀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것이다. 가급적이면 소개되는 고전을 읽어본 다음에 이 책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저자의 시각이 독자의 생각에 스며들면, 작품들의 속맛을 제대로 못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접기
쎄인트saint 2018-03-21 공감(9) 댓글(0)
Thanks to
공감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