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6

Yuik Kim - 박권일의 조한혜정 실명 비판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반박글....

(21) Yuik Kim - 박권일의 조한혜정 실명 비판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반박글....









Yuik Kim
6 March at 14:11 ·



박권일의 조한혜정 실명 비판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반박글. 강정석씨는 하자센터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는 '가난한' 지식인이다. 박권일의 비판은 다른 건 모르겠는데, 존재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서, 많이 아쉽다. 조한은 부르조아가 맞고, 나르시스트가 맞다. 그런데, 그 자체가 문제가 되면, 대화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조한의 빈곤층에 대한 성찰부족은 그 문제 해결을 위한 전제가 되는 기본소득 주장과 함께 보고 비판해야지 않나 싶다. 그리고 인류학자의 기본소득 주장은 단순히 시혜적 복지나 자본가가 염려하는 소비시장 위축을 방지하기위한 경제 논리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강제로 생산수단을 노동자에게 돌려 줄 방법이 없으니, 시민의 성원권, 배당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농업 사회에선 농민에게 '경자유전'원칙에 따라 땅을 주면되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니까. 그리고, 조한은 이런 식의 과도한 확대 해석이 염려됐기 때문인지, 그 시끄러웠던 조국사태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발언을 한 적이 없다. 그냥 조한이나 조국이나 소속된 경제적 계급이 같다고 해서, 이렇게 퉁쳐서 비판해버리면, 그냥 계급투쟁과 혁명하자는 얘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Kang Jung Seok
6 March at 03:43



이 글이야말로 '나르시시즘'적이 아닌가? 조한의 칼럼을 실명비판하며 이상한 논리로 조국까지 확대되고, 빈약한 설명으로 '진보의 위선'과 '나르시시즘'으로 귀결된다.

그냥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런 식의 논리 앞에선 우리는 아무런 말,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난 이렇게 묻고 싶다. 나르시시즘 없는 정치적 행동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즉 "자기 진실성의 추구" 없이 오히려 "용의주도한 계급전략"은 불가능한 것 아닌가? 그리고 "'정의로운 능력자'가 되려는 자기애적 열망'은 과연 나쁜 것인가? 만약 '자기애적 열망'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욕망을 가질 수 있을까? '정의로운 능력자'가 없다면 "용의주도한 계급전략"은 어떻게 수립되고 실천될 수 있는가? 박권일은 혹시 '개인'과 '욕망'이라는 범주 자체를 지워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박권일은 개념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기 진실성의 시대'와 나르시시즘을 그대로 이어붙이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1960년대 서구사회가 개인의 정체성을 통해 '정상성'을 인정받으려는 싸움을 벌였다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 아닌가? 오히려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이어져고 있는 싸움, 즉 '비정상성' 또는 '정상성의 불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정상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해체하는 싸움들이 더 가열차게 벌어진 것은 아닌가?

난 이 칼럼보다 조한의 칼럼이 훨씬 더 실천적이고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조한은 최소한 재난학교를 만들자는 '제안'이라도 했지, 박권일은 "혼수상태의 사랑과 어찌 이별할 것인가"라는 신세한탄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 달'과 '서울'이라는 문구 하나에 사로잡혀 맥락을 삭제해버리는 비판의 방식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난 박권일의 칼럼이 '징후적'이라고 생각한다. 맥락을 삭제해버리고, 문구 하나의 '불편함'을 과대포장한 뒤 나르시시즘과 착한 건물주 지원의 비판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비약. 맥락을 상실하고 파편화된 지식들이 난삽하게 배치되는 글의 전형 아닌가. 그래서 난 이러한 칼럼 자체가 지식인이 자신의 비판적 관점을 '사랑'하기 위한 비판, 즉 '나르시시즘적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박권일 ㅣ 사회비평가 최근 가장 놀라웠던 글은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의 칼럼 ‘푹 쉰 후 슬슬 재난학교를 만들자’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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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혼수상태의 사랑
박권일 ㅣ 사회비평가 최근 가장 놀라웠던 글은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의 칼럼 ‘푹 쉰 후 슬슬 재난학교를 만들자’였다. ...박권일 ㅣ 사회비평가 최근 가장 놀라웠던 글은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의 칼럼 ‘푹 쉰 후 슬슬 재난학교를 만들자’였다. ...





15강길모, 권혁란 and 1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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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박권일 글 보고 어이가 없었어요. ;; 저는 활동가로써 조한의 글을 보며, 재난 상황에서 좀 해맑으신 거 아닌가 걱정되는 마음이 좀 있었고. 학교를 통한 사회 운동에 다소의 피로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한의 경우 성공한 운동의 이력이 있으며, 재난 학교란 제안 제 피로감과 별개로 역시 재난 이후 상황에 대한 나쁘지 않은 방향 중 하나라 생각했어요. 고치신 글은 훨씬 좋더군요. 조한이 제주도에서 어떤 생활을 하셨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서울을 이야기한 것도. 제가 박원순 시장에 대해 실망과 피로감을 느낀 것과 별개로, 서울시가 거버넌스를 제일 열심히 하고 있고. 마을과 사회적경제 인프라도 강한 게 맞기 때문에. 서울에 제안 하는 게, 서울 중심주의와 연결 되는 것도 말이 안되요. 하자센터는 서울에서 시작했만, 성공 모델을 만든 후 대안학교연대 활동을 적극 주도하면서 지역 구석구석에 모델을 전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가 실명 비판한 조한혜정이 어떤 컨텍스트에서 서울중심주의와 나르시즘으로 귀결되는지 알 수가 없어요. 반대로 박권일의 나르시즘이란 관점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는 것 같구요.

박권일의 글은 그냥 몇 가지 개념과 인물과 사회 이슈를 성의 없이 엮어. 그저 냉소와 짜증을 분출 한 것에 불과하다고 봐요. 이것 역시 엘리트 특유의 오만과 혐오 정서라 볼 수 있는데. 좀 어이 없는 헤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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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rong Lee 조한의 최근, 그리고 오랜 활동 이력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쉽게 비판할 수 있겠단 생각은 드네요. 조한샘이 이곳저곳에서 많이 비판 받지만 조한만큼 공동체에 발 딛고 꾸준히 활동해온 지식인도 정말 드문데요. 물론 저 저 비판도 일리있지만, 일단 그게 왜 '나르시시트적'인지 좀 이해가 안가고, 둘째, 박권일 씨는 저 글 자체가 나르시스트적의 궁극이란 걸 본인은 모를까? 그게 저 글을 읽는 저에겐 가장 크게 다가온 생각이었답니다. 저 글 자체가 끝으로 갈수록 무지 나르시스트적인 남성 인텔리게챠 글로 향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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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경 그런가요? 그렇다고 이또한 내용없고 들을가치없는 글? 이 되나요? 말하기 방식.태도의 문제인가요? 이렇게 몰아부칠 글인가 싶네요. 재난 상황에서 항상 가장 낮은 이들의 피해를 투과하고 하는 말들에 더 예민했음 좋겠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어느 정도 수준이 가난 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박권일님이든 위 본문글을 쓴 분이든 빚도 없고 안정된 일정 임금이 보장되고 거처가 안정적이면 그 조건들의 부재에서 오는 불안은 불안감이 아닌 생존과 직결되는 현실이라서요. 경제활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고 아파도 쉴 수 없는 이들이 있으니까요.그룹에게 수당으로 지급이 되고 있지만 가난을 증명하는 그리고 실제 필요한 시기.상황은 생존과 관련된 실질적 구제는 구멍이 숭숭 뚫려 버린 사회적 안전망. 공공의료.교육.주거가 더 우선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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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ik Kim 
동의합니다. 강정석님은 지식순환 협동조합에서 임금노동자로 일하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활동가로 분류될 수 있겠죠. 박권일님은 제가 개인적으로 몰라서... 유명 필자이시니, 강연과 고료로 생활하시는 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제 페친중엔 유명한 분이든, 아니든, 그런 독립연구자들이나, 필자, 활동가들이 많습니다. 다들 코로나로 수입 끉어져서, 통장 잔고 걱정하시더군요. 물론 인적 자본, 지적 자본 등을 꽤 가진 분들이니, 정말 아비투스도 없는 저임금 노…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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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인적 자본, 지적 자본 등을 꽤 가진 분들이니, 정말 아비투스도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과 똑같은 처지라고 얘기한다면 그것도 위선이겠죠. 각설하고, 제 커멘트도 그렇고, 여기에 박권일님의 글에 반박하는 분들은, 박권일 님의 글이 들을 가치가 없다고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박권일님의 비판 전제들이 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게 안타깝다는 것이죠. 누군가에게 저 정도로 심하게 딱지를 붙여서 '계급의 적'으로 규정한 후에 어떻게 대화가 가능할까요 ? 그리고 박권일님의 글은 여러 지식인들, 이론을 거명하고 있는데 (솔직히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을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는 저는 다 모르는 이름이고 이론입니다). 노동자와 저소득층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지간히 공부한 분들이 아니면 독해가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면 조한의 글은 어렵게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하시겠죠. 여기 반박글 단 분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내용입니다. 정부의 코로나 경제 대책에 불만이 있으면, 그건 정부의 경제 정책 담당자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지, 여기서 조한의 재난학교 제안 글에 대해서 그렇게 비아냥 거리는 게 타당하냐는 거죠. 단지 조한이 그들과 같은 경제적 계급에 위치한다는 이유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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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경 Yuik Kim 그 이유만으로 반박한다고 느껴지지 않았어요.계급 단지 그 이유도 아니라고 생각하구요. 나와 처지가 다른 이들. 쉴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상황인식 없이 여유롭게 쉬자 그리고 이후 대책.대안
이후엔 뭘 하자 할 여력이 없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그건 여유로운 이들의 대안.제안. 그 대안과 제안은 당장에 숨이 끊어질 이들은 없는 듯 보임이죠. 그 제안.대안의 전제조건 일단 쉬자에 관한 이야기 였다고 봅니다. 선 위치와 자리와 형편의 다름에 대한 돌아보기가 더 더 예민하길 바래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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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 Re 기본 소득제도를 해내도록 노력해야죠. 쉽지 않겠지만 그 방향으로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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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혼수상태의 사랑

등록 :2020-03-05 18:26수정 :2020-03-06 02:08






박권일 ㅣ 사회비평가



최근 가장 놀라웠던 글은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의 칼럼 ‘푹 쉰 후 슬슬 재난학교를 만들자’였다. 그는 코로나19 사태로 “어수선한 석 달 정도는 푹 쉬자”고 한 뒤, 기본소득, 봉준호, 포스트휴먼 등을 현란하게 오가다가 “서울에 재난학교를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저 글이 경이로운 이유는 표층 수준에서 온갖 진보적 개념을 남발하며 사회적 연대를 말하지만 심층 수준에서는 정확히 그 반대를, 즉 각자도생을 가리킨다는 점에 있다. “어수선한 석 달 정도는 푹 쉬자”라는 말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대한민국에 석 달간 푹 쉬어도 지장 없는 이가 몇이나 될까? 누군가에게 푹 쉴 수 있는 석 달이 누군가에겐 벼랑 끝에 매달린 석 달이다. 쉬고 싶어도 못 쉬는 자영업자들, 코로나19로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애초 저 글의 독자로 상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재난학교를 슬슬” 만들어 서울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자는 말 역시 지독한 서울중심주의 또는 ‘변방’에 대한 무관심을 방증할 따름이다.

마디로 그것은 ‘우리, 먹고살 만한 사람들의 진보’다. 생각해보면 저런 사고방식은 만연해 있었다. ‘조국 전 장관 수호’를 위한 촛불 시위도 이를 염두에 두면 많은 부분 해명된다. 대리시험, 표창장 위조, 공직자 사모펀드 같은 불법적·비도덕적 행위가 이미 그들끼리의 일상이기에 용인해준 면도 있지만, 동시에 그런 ‘사생활’이 검찰개혁이나 수구 척결 같은 ‘진보적 과제’와 무관하다고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그런 행태를 “위선”이라 비난한다.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위선은 글자 그대로 선을 위장한다는 것이며 스스로 옳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과연 저들이 그런가? 되레 저들은 자신만이 ‘진짜 진보’라 확신하지 않을까. 조기숙 교수는 언젠가 “신좌파”를 자임한 바 있고 조국 전 장관은 심지어 “사회주의자”라 당당히 선언하지 않았던가. 앞의 칼럼은 소셜미디어 등에서 회자된 이후 인터넷판에서 수정되었는데, 평소 지론에 비춰보면 저 글이 아마 필자의 진심일 것이다.

따라서 문제를 참과 거짓 내지 진보와 보수 같은 개념으로 풀어낼 수 없다. 이것은 이념이라기보다 사랑, 정확히는 ‘나르시시즘’이기 때문이다.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 사랑에 빠진다. 나르시스는 그리스어 나르코시스(narcosis)에서 파생한 말로 감각 마비, 혼수상태를 뜻한다. 숲의 요정 에코가 나르시스의 목소리를 메아리로 만들어 그의 사랑을 얻으려 했지만, 지각이 마비된 나르시스는 자기 모습에 자폐적으로 몰두하며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찰스 테일러가 ‘자기 진실성의 시대’라 부르고 이졸데 카림이 ‘2세대 개인주의’라 명명한 사회적 경향은 모두 이러한 나르시시즘과 밀접히 관련된다. 1960년대 이후 서구사회에서는 다양한 개인들이 민족이나 계급 같은 집단적 범주가 아닌 개인의 정체성을 통해 정상성을 인정받으려는 싸움을 벌였고, 그것이 오늘날 정치적 주체의 보편 양식 중 하나가 됐다. ‘말이 통하는’ 상대들끼리 만나다 보니 결과적으로 중간계급의 정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자기 진실성의 추구는 용의주도한 계급전략이라기보다 ‘정의로운 능력자’가 되려는 자기애적 열망에 더 가깝다.

그래서 나르시시즘의 정치는 늘 동일성과 정상성을 향한 투쟁이 된다. 이 정치에는 논리적으로 ‘타자’가 존재할 수 없다. 타자가 미약하고 추레한 존재일 때, 나르시시스트들은 그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반면 타자가 강하고 세련된 존재일 때 그들은 이미 타자가 아니라 동일시의 대상이 된다.

나르시시즘으로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 감각 마비 때문에 나르시스가 자신을 타인으로 착각하듯, 나르시시즘 정치는 인터넷에 활발히 의견을 개진할 지식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주장을 ‘우리 시대 가장 절박한 요구’로 오인하게 만든다. 코로나19 경제 대책으로 나온 ‘착한 건물주’ 세금 감면 정책은 이런 나르시시즘 정치의 적나라한 사례다. 헬기로 돈을 뿌려서라도 빈곤 취약계층을 도와야 할 이 시기에 정부는 세금으로 건물주를 지원하고, 시민들은 잘한다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 혼수상태의 사랑과 어찌 이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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