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3

이광수 그의 자서전 3 3] 교원생활


3] 교원생활

나는 이러한 중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고향 K라는 학교의 교사로 연빙 되어서 조선으로 돌아왔다. 중학교만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 온 것은 늙은 조부 때문이란 것도 한 이유가 되지마는, 그 밖에도 또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당시 기개 있다고 자처하는 청년들은 이때가 안한 하게 공부하고 앉았을 때가 아니라, 고국에 돌아 가서 민중 을 각성 시켜아 할 때라는 비분 강개한 생각을 가졌었다.

그 해가 바호 합방이 되던 경술년이었다면 상상될 것이 아 니냐. 또 한 가지 동경서 고등 학교에 들어 가기를 그만 두 고 돌아 온이유는, 공부는 더 해서 무엇 하느냐, 나는 벌써 최고 지식에 달한 것이 아니냐, 나는 벌써 인생관과 우주관 을 완전히 가진 것이 아니냐, 하는 건방진 생각이었다. 마치 산전 수전 다 겪어서 인생을 다 알고 난 사람과 같은 초연 한 듯, 인생에 피곤한 듯한 그러한 태도를 나는 가지고 있 었다. 그래서 인제는 내가 무엇을 배울 때가 아니요, 남을 가르칠 때라고 자임 하였다. 이러한 건방진 생각을 품고 열 아홉 살 먹은 나는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내가 고향에 돌아 온 때에는 조선서는 인심이 물끓듯 하였 다. 이등 공작 암살 사건, 해아 평화 회의 사건, 양위 사건, 군대 해산 사건 등등. 그리고 민간에는 학교들을 세우고, 연 설들을 하고, 대 운동회을 하고, 비밀 결사들이 생기고 그러 나 나는 여기서 그러한 자세한 이야기를 아니하는 것이 좋 을 것이다.

나는 서울을 들러서 며칠을 머물려서 지사들이 법석하는 구경도 하고, 또 어떤 대신에게서 원으로 가라는 권도 받아 보고, 그리고는 그때에 개통된 지 얼마 안된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갔다.

정거장에는 수백명 학생과 직원이 이 젊은 새 교사를 맞느 라고 나와서 정렬하고 있었다. 이 학교는 중등 학교와 초등 학교를 합한 학교로서 상급생 중에는 내게 아버지 뻘이나 되는 나이를 먹은 사람까지 있었고, 중등과의 거의 반수 이 상이 나보다 나이 많은 이들이었다.

이러한 학생들이 십리나 되는 정거장까지 나와서 맞는 것 을 나는 별로 고맙게도, 더구나 미안하게도 생각지 아니하 고 도리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였다. 한술 더 떠서 〈나 같은 장한 사람이 너희들의 선생으로 오는구나.〉하는 생각 까지 있었다. 나는의기 양양하게 탈모 경례하는 학생들의 행렬 앞으로 군대를 검렬하는 장관의 태도로 걸어 지나가서 백발이 성성한 N이라는 교주와 초면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는 N으 소개로 늙은, 젊은 여러 선생과 인사를 하고 학생 행렬의 선두의 서서 학교로 들어 갔다. 학교에서는 소를 잡 고 여러 가지 음식을 여투고 이 애숭이 선생의 환영회를 성 대하게 열었다. 인제 겨우 중학교를 졸업한 열 아홉 살 된 아이인 나를 N교주 이하로 대소 직원들이 끔찍이 대접을 하 였다. 다만 학교 경비가 곤란해서 월급이 없는 것만은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서도 별로 감 사한 생각을 가질 줄을 몰랐다. 나 같은 큰 인물이 시골 학 교에 온 것이 이 학교와 및 N교주 이하 모든 직원들에게 큰 영광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내가 이학교 취임한 지 며칠이 못하여 내 늙은 조부는 병 이 위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남 보고 늙은 조부를 봉 양하러 왔노라고 하면서 중병 든 조부의 곁에 있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나는 조부의 병을 핑계로 학교를 쉬이고는 이 리저리로 술을 먹고 돌아 다녔다. 어렸을 적 친구들이 모두 벌써 술군들이 되어서 오래간만에 만나 친구라고간 데마다 술을 사 주었다.

이렇게 술을 먹고 돌아 다니다가 하루 저녁은 문득 앓는 조부가 마음에 켕겼다. 나는 친구가 붙드는 것도 뿌리치고 밤길을 육십리나 걸어서 조부가 앓고 누운 곳으로 달려 왔 다. 닭이 울었다. 대문 밖에 나섰던 내 당숙모가,

『너 인제 오느냐. 큰아버님이 돌아 가셨다. 너를 기다리다 못해서 아버님이 눈을 감기셨고나. 석아, 하고 두 번아니 부 르시고 운명을 하셨어.

하였다.

나는 방으로 뛰어 들어 갔다. 조부는 자는 듯이 반듯이 누 워 있었다. 그 곁에는 종조부가 혼자 앉아 있었다. 난봉난 당숙들은 어디 가고 없는 모양이요, 그의 운명을 본 이는 오직 그 아우와 질부 두 사람뿐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승중상으로 거상을 입을 것이언마는 쓸데 없는 허레 라고 주장하여 거상을 아니 입었다. 무론 영연도 설하지 아 니하고 조객이 와도 곡도 아니하였다. 내 아내가 삿갓 가마 를 타고 머리를 풀고 와서 우는 것을 듣기 싫다고, 다시는 곡성을 내지 말라 하고, 머리푼 것도 보기싫다고 소리를 컸 다. 다들 내말대로 순종하였다.

벌써 시집 간 애정이 누이가 온 것도 울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것으로 구습을 혁파하는 것이라고 자처하였 고, 나만한 큰 사람은 이렇게 새 법을 내는 것이 옳다고 자 신하였다. 일가와 어른들은 내가 하는 해괴한 행동에 눈살 들을 찌푸리고는 다 달아나 버렸다. 욕이 내 귀에도 들어 왔다. 그러나 나는 잘하는 체하고 뻗대었다. 개혁가요 선구 자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나는 해가 갈수록 늙은 조부에게 대하여 죄송한 마 음이 깊었다. 나는 동경서 돌아 온 뒤에만이라도 왜 곁에 뫼서서 시탕을 못했던고, 운명하는 마지막 밤만이라도 그 곁에 못 뫼셨던고 하는 한이 가슴에 맺혔다.

나는 조부의 앞에 엎드려,

『다시는 조부님 곁을 안 떠나겠습니다.

하고 우는 꿈을 사십이 넘은 오늘까지 꾸는 때가 많다. 아 마 이 한은 내 일생을 두고 가실 날이 없을 것이다. 지금 이글을 쓸 때에도 나는 몸에 소름이 끼침을 깨닫는다.

K학교 교사로 온 뒤에 조부상, 기타로 야 일 개월이나 학 교를 쉬이고 밤낮 술만 먹고 돌아 다녔다. 나중에 들었거니 와, 교주 N노인은 나를 초빙한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고 한 다.

『저것이 원 선생 노릇을 할 수 있나?

이렇게 걱정하였다고 한다.

N노인은 나를 자리를, 잡게 하기 위하여 집 하나를 사고 살림을 차리게 하였다. 집이라야 방두 간, 부엌 한 간뿐이 요, 대문도 없고 헛간뿐인, 북향 외따른 오막살이다. 산을 남쪽으로 등지고 있어서 하루종일 가야 볕 한번 안 들고, 그리고 대낮에도 방안은 골방같이 음침하였다. 이 집은 애 조부모가 돌아 가던 집만도 못한 집이었다. 나는 그 집이 무론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아버지 적만도 못하다는 비애 까지 느꼈다. 나 같은 휼륭한 선생을 데려다가 이 모양으로 대우하는가 하고 나는 N교주에게 대하여 불쾌하였다. 이러 한 집에서 마음에 안드는 아내와 단둘이서 살라는 것은 큰 모욕이요, 큰 형벌인 것같이 생각혔다. 더구나 나를 아는 사 람들이,

『남궁 석이는 서울을 갑네, 동경을 갑네 하기에 무엇 큰 사람이나 되는 줄 알았더니 인제 저 꼴이야?

하고 나를 멸시하는 것이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와 한 고향 사람으로서 나와 같이 동경 가 있던 사람이 이웃골 원을 해가지고 와서 거드럭거리는 M이라는 사람과 대조하는 데서 더욱 심각하였다.

〈나는 내부 대신이 원으로 가라는 것을 마다고 박차고 온 사람이야.〉 하고 속으로는 뽐내어 보지마는, 그 속을 세상이 알아 주 지를 아니하였다. 실상 나는 군수가 되라는 것을 욕으로 알 고 퍽 웃고 말았건마는, 그래도 교육 사업을 하는 것이 가 장 높은 지위라는 자신이 서지를 못한 것이다. 게다가 내 아버지 나이나 되는 학생들이 힐끗힐끗 의문의 눈으로 나를 감시하고 비평하는 양이 못 견디게 불쾌하여서 나는 날을 세우노라고 늙은 학생을 불러서 세워 놓고 딱딱거려도 보았 으나 도무지 어울리지를 아니하였다.

나는 여전히 술을 먹었다. 학교 시간만 끝나면 술친구를 찾아 다녔다. N교주 이하 직원들과도 아무쪼록 아니대하려 고 하였다. 밤새도록 술을 먹다가 술냄새를 피우면서 교실 에 들어 갔다. 준비도 없는 중학교 졸업생이, 놀라지 말지어 다. 물리 화학은 물론 이어니와 천문학, 심리학, 이러한 일 생에 들어 보지도 못한 과정을 가르치니 기막힐 것 아닌가.

그때 K학교에는 천문학, 심리학 외에 헌버, 국제법, 형법,같 은 과정까지도 있었다. 중등학교 인지 전문 학교인지 모르 는 그러한 학과들이었다.

나는 내가 공부하던 중학교를 표준으로 K학교의 학과 배정 이 옳지 못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어린 주정뱅이 교사의 말이 설 리가 없었다. 나중에 들은즉 여름 방학만 되면 나 를 내어 보내기로 내정했더라고 한다.

사월, 오월은 이 모양으로 취하여 보내다가 나는 마음을 돌려 잡을 수가 있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신 것 이었다.

나는 술을 뚝 끊고 아침에서 해질 때까지 학교에만 있었 다. 나는 내일 가르칠 교재를 내 힘껏 준비하고 또 직원과 학생과도 사귀었다. 나는 야구와 정구와 축구를 사다가 학 생들에게 가르치고, 또 손수 비를 들고 학교 구내의 청결을 하여서 학생들의 모범이 되려고 하였다. 그리고 어학 교재 를 모아서 등사파네 박아서 교과서를 삼았다. 나는 N학교에 서 공부하던 깨끗하던 시대의 나를 회복할 수가 있었다. 나 는 조국에 대한 의무를 굳세게 인식하였다. 나는 이 학생들 을 가르치기에 전 생명을 다 바치리라고 혼자 맹약하였다.

이렇게 고쳐진 내 생활은 한 달이 못하여 N교주와 기타 직 원, 학생들의 인식한바 되어서 나에게 대한 신임과 존경은 날로 더하였다. 나는 학교를 내 집으로 알고 학생들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로(자녀라는 생각은 나이 관계로 나지 아니 하였다) 깊이깊이 정을 들이게 되었다.

여름 방학이 지나고 가을 학기가 되어서는 N교주와 K이라 는 교무 주임격인 늙은 선생이 학칙 변경을 내게 일임하도 록 나는 신임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나는 N교주와 고향인 Y라는 동네의 동회의에 회장이 되고 남녀 야학교의 교장이 되어 집도 Y동네로 옮겼 다. 나는 가장 생활로도 동네의 모범이 되리라 하고 닭을 치고, 방이며 부엌이며 마당을 아침마다 손수 깨끗이 치이 고 새벽 일찍 일어나 동네 길을 쓸고, 학교에 건너 와 학교 의 청결을 몸소 하였다. 특별히 부엌과 뒷간의 청결을 위하 여서 동회에서 많이 권면하였고, 또 이불과 베개를 깨끗이 할 것을 장려하였다. 동회를 세우기는 N노인이어니와, 이러 한 여러 가지 실행에는 내 힘도 없지 아니하였다.

내가 몸소 행하는 정성은 동호의 인정하고 신임하는 바가 되어서 회원들은 기쁘게 내 충고를 들었다.

얼마 지난 뒤에는 나는 회원들의 만장 일치의 결의로 청결 검사원이 되어서 토요일마다 집집으로 순회하면서 방과 부 엌과 뒷간과 금침까지도 모두 검사하는 권한을 받았다. 부 뚜막은 일주일에 한번씩 새로

「흙질」을 하여아 하고, 뜰에는 황토를 깔아야 하고, 이불 과 욧잇과 베개잇에는 때가 묻으면 안되고, 또 가마솥과 기 명은 어른어른하게 닦이지 아니하면 아니 되고, 담이나 영 이나 바자나 다 가축하게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이것이 더럽습니다.

한다든가.

『여기를 좀 고치시지요.

하면 부인네들은 다 기쁘게 내 말을 들었다.

나는 이 밖에 회원 전체를 통하여 남자는 매일 짚세기 한 켤레, 여자는 끼니때마다 매식구에 쌀 한 숟가락씩을 모아 서 한 달에 한번 동회 모이는 날에 바치되, 저마다 제 구좌 로 하여 저금해 두었다가 그 돈이 백원이 차거든 찾아 갈 수 있고, 그동안에는 저리로 대부하는 제도를 세웠다. 이 제 도에 대하여서는 처음에는 이론도 있었으나 결국 그대로 시 행하여 불과 반 년에 오백여 원 자금이 모였다.

동네 전체가 예수교인인 것과 또 이 동회로 하여 Y동네는 이웃 다른 동네와는 딴판인 동네가 되었다.

술과 노름이 없는 것은 물론이어니와, 어느 동네에서나 흔 히 보는 이웃끼리의 싸움도 없었고, 집들, 옷들도 다 깨끗하 게 되어서 헌병들이 청결 검사도 아니 들어 오게 되었다. Y 동네에는 실로 경찰이 올핑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듬해 봄까지에는 학교도 면목이 일신하고 동회도 자리가 잡히고 모든 것이 재미 붙을이만한 때에 큰 사건이 일어났 다.

내가 K학교에 온 해 팔월 이십 구일에 합방이 되었다. 나 는 K역에 붙은 두 나라 황제 폐하의 합병 조서를 읽었다.

그날은 하레 혜성이 지나간다는 이 지방에는 무척 해무가 자욱하게 낀 날이었다. 이 합병이라는 큰 사실이 내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학교와 동회에 전생 명을 바치려던 것도 이 영향이 한 원인이 되었을는지도 모 른다.

그런데 합병한 이듬해에 N교주가 신민회 사건으로 경무 총 감부로 붙들려 가서 K학교는 주인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

K학교는 기본금이 없고 N교주가 돌아 다니면서 동냥하다시 피 하여 유지해 오던 터이다. N교주를 잃어 버린 K학교는 가장을 잃은 가족과 같았다.

신민회라는 것은 합병 전부터 있던 비밀 결사다. T라는 이 의 계획으로 된 단체로서 동지를 규합하여 교육과 산업을 일으키고 신민다운 힘을 기르기를 목적으로 하였던 단체다.

N교주는 이 신민회의 일방 두령이었다.

N교주가 잡히자 K학교의 직원은 다 연루자로 잡혀 갈 것 을 예기하였다. 실상 헌병이 매일 학교에 왔고, 어떤 때에는 밤에도 달려드는 일이 있었다. 모든 우편물은 다 헌병의 손 으로 검열을 받았고, 동회의 문서까지도다 몰수를 당하고, 또 당분간 집회 금지를 당하였다.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S 라는 학교에서는 직원, 생도 삼십여 명이 검거 되어서 학교 는 휴교할 수 밖에 없이 되고 오늘은 어디서 누가 잡혔다 하는 소문이 아니 들리는 날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칠백여 명이 붙들렸으니.

N교주는 학교 직원을 한 사람도 불지 아니하였다. N교 주는 학교의 전도를 미리 생각하고 학교 직원에게는 신민회 에 관한 말은 일제 아니할 만한 지혜도 가진이였다.

이 사건은 여러 가지 파란을 지난 뒤에 제일심에 일백 오 인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본심에서 구십 구인은 무죄가 되고, N교주를 포함한 여섯 사람만이 징역을 지게되었다.

학교는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우리는 밥 한 그릇 된장 한 그릇으로 버티어 가면서 N교주가 돌아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동안에도 학교 일과 동회 일로 불매증이 생기도록 과로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렇지마는 나는 불평도 아니하였 다.

그러나 나는 이 학교를 떠나지 아니하면 아니 된 일이 생 겼다. 그것은 내가 여름 방학 동안 어느 먼 지방에 강습회 강사로 초빙되어 가 있는 동안에 내게서 배운 몇 사람이 나 를 틀스토이주의를 학생간에 선전하는 이단자라고 해서 교 회와 학부형 방면에 나를 배척하는 운동을 일으킨 것이었 다.

나를 배척한 이 두 장본인은 K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신학 교에 다니는, 장차 목사가 되려는 사람들이었다. 그 들은 거 룩한 교회와 교회 학교 안에 나와 같은 부정한 인물을 둘 수 없다고 주장하여서 내게 시기에 가까운 일종 불쾌한 감정을 품고 있던 모양이었다.

첫째는 그중 나이가 어린 내가 교무 주임의 지위에 있는 것 이 불쾌하고, 둘째로는 내가 학생들간에 사랑을 받는 것이 불쾌한 것이었다. 또 나 자신도 자기의 열정과 철없음으로 써 나이로는 내 선배인 동료들에게 잘못한 일도 많을 것이 다.

나는 K학교가 교회의 관리로 넘어간 것을 말하기를 잊어 버렸다. 교회의 관리에 들어 갔기 때문에 교장은 미국 선교 사 R목사였다. 나를 배척하는 두 사람 CS는 필시 이 R목 사에게 나를 먹었을 것이요, K장로가 본래 사람이 음흉 하니까 이 두사람과 공모하였을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개학 때가 되어 내가 학교에서 나가게 된다는 말이 돌아 가매, 학생들과 학부형의 일부분과, 또 나를 지지하는 교원 들이 들고 일어나서 나를 옹호하기로 하는 모양이었다. 그 래서 내 교수 시간도 여전히 맡기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 년 간 ㅡ 열 아홉 살부터 스물 세 살까지의 인 생의 꽃을 이 학교를 위하여 시들려 버린 내게 대하여 이러 한 갚음이 오는 것을 볼 때에 세상 풍파를 모르는 나는 고 만 낙심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가정의 불만과 몸이 약해짐과 또 새로운 야심에 대한 동경으로 마음이 편안치 못하던 나는 이 사건으로 해서 K를 떠날 마음이 굳게 들게 되었다. 나는 K학교도 있을 곳이 아니요. 내 가정도 몸 붙 일 곳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방랑의 길을 떠나리라는 로만틱 한 생각을 품게 된 것이었다.

나는 사 년 간 영양 부족과 과로와 심려로 무척 몸이 약하 게 되었다. 내가 후년에 중병으로 오래 신고한 원인이 여기 서 시작된 것이었다. 월급이란 거의 한푼도 받아 보지 못하 고, 나무와 양식과 무 배추같은 반찬 거리를 얻어 먹을 뿐 이었다. 의복도 말이 아니었다. 혹 지나가는 손님이 두루마 기 한 감, 모자 한 개를 선물하는 것을 받아 서 썼다. 양말 은 구멍이 뚫어지고 미투리는 창이 났다. 그리고는 학교 시 간만은 한 주일에 서른 네 시간, 그리고 야학 있고, 동회 있 고, 또 교회에서 때때로 설교까지 하였다. 게다가 가정 관 계, 기타로 내 마음에는 번뇌가 늘 있었다. 잡아 가둔 내 청 춘, 내려 누른 청춘은 가끔 반란을 일으켰다. 나는 때때로 누구도 아닌 사람을 그리워하는 생각도 났다. 이것 저것이 합해서 나는 밤에 잠 안드는 병이 생기고 몸은 마르고 기침 까지도 났다. 의원들은 몸이 약해졌으니, 쉬이고 복약하라고 권하였으나 나는 쉬일 새도 없고 복약할 돈도 없었다. 여름 방학까지도 나는 하기 강습 교사로 다녔다. 나는 강습회 다 녀 오던길에 차중에서 졸도한 일도 있었다. 나는 이렇게 피 곤한 생활을 하다가 피가 말라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르친 사람들과 내 동료들에게 배척을 받음을 볼 때에는 나는 환멸의 비애를 느끼지 아니 할 수 없었다.

내가 만일 세례를 받았더면 배척 문제가 아니 일어 났을는 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교인 된 지 칠팔년이 되도록 세례 를 못 받았다. 그것은 세례 문답에 번번이 낙제가 되기 때 문이었다. 아마 K장로가 나를 세례 목 받게 하기 위하여 목 사에게 미리 약속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길래 평소에는 먼 교회에 있어서 이따금 순회로 오는 R목사가 내게 문답을 할 때에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신 것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죽으사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난 것을 믿으시 오?

하는 것과,

『구약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인 줄을 믿으시오?

하는 것과,

『이후에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죽은 자들이 모두 무덤 에서 일어나서 심판을 받을 것을 믿으시오?

하는 세 가지를 꼭 물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것을 아 니 묻기도 한다는데 내게는 꼭 물었다. 여기 대해서는 내가,

『네 믿소.

하고 대답하지 아니할 줄을 R목사는 미리부터 아는 모양이 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믿기에 믿는다고 대답하겠지마는, 나는 그것을 못 믿으니까 믿는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 래서 번번이 나는 세례 문답에 낙제를 한 것이었다. 나보다 나중 교인이 된 사람들이 다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네 장로 가 되네 하건마는 오직 나만은 만년 학습 교인으로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안 일이지마는 내가 W라는 고을에 하기 강 습 강사로 가 있는 동안에 CS 두 사람은 벌써 R목사에게 말해서 나를 학습 교인의 적에서까지 제적해 버렸다고 한 다.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R목사는 K교회를 관리하는 목사인 동시에 K학교의 교장이었다. 무론 한 학기에 한번도 다녀 갈까말까하는 목사요 교장이었다. 이리하여 우선 나를 교회 에서 제명을 시켜 놓고 학교에서 몰아 내자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분연히 K학교를 떠나기로 결심을 하였다.

개학이 된 지 한 달이나 지나도록 나는 학교 사무를 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오늘 내일 하면서도 차마 학교를 떠나지 못하였다. 그것은 학교와 학생들에게 정이 든 까닭 이었다. 실상 나는 사랑 없는 가정생활을 하여 가는 사랑의 주림을 학생들에게 대한 사랑으로 채웠다. 인제는 K학교에 온 지가 사 년이나 되니, 학생은 전부 내 손에 길려 난 아 들까지는 안되더라도 동생들과 같았다, 밤낮 그들과 함께 어울려서 나는 내게 있는 정을 모두 학생들에게 쏟아 주었 다. 나는 하루도 그들을 대하지 아니하고는 살 수 없도록 그들이 그리웠다. 그들 중에 앓는 이가 있으면 나는 내 건 강이 허하는 한에서 지서으로 그들을 간호하였다. 어떤 때 엔 장질부사로 고통하는 학생을 꼭 켜안고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그들은 내 애인이었다. 그들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나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리는 것 같아서 천지가 텅 비인 듯 하였다.

나는 학교에는 아무말도 아니하고 슬그머니 일어설 작정이 었다. 가지 말라고 붙들기나 또는 송별회를 하거나 이런 것 이 다 내 마음에 귀찮았다. 나는 병이라는 핑계로 학교를 쉬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떠나더라도 눈에 아니 뛸 것이었 다.

문제는 아내뿐이었다. 어린것을 하나 낳다가 돌도 못되어 서 죽고 가족이라고는 단 두 식구뿐이었다.

평생 가도 이야기 한번 하는 일 없는 두 내외였다. 그렇다 고 피차에 성낸 모양이나 미워하는 모양을 보이는 일도 없 었다. 남이 보기에는 의 좋은 부부일 것이다.

실상 아내는 착한 사람이었다. 내가 학교에 가서 열, 스무 날 묵고 안 돌아 오더라도 불평한 말 한 마디 하는 일 없었 다. 어린것이 앓는 동안 나는 돌아 보지도 아니 하였건마는, 거기 대해서도 입밖에 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어린것이 죽은 뒤에 나는 집에 돌아 오지 아니하였건마는 그는 아무 말 없이 혼자 있었다. 얼마나 슬프고 무서웠을까. 나는 실로 무정하고 죄 많은 사람이다. 나는 어린애가 돌이 가깝도록 한번 안아 준 일도 없었다. 그리고 어린애가 숨을 모으는 것을 보고도 나는 웃고 잡담하였다.

그것이 죽은 뒤에도 나는 눈물 한 방울 아니 흘렸다. 나는 일 년쯤 후에 죽은 어린애에게 대해서 무정하게 한 것을 퍽 이나 뉘위쳤다. 꿈이면 그 어린것이 두렁이를 입고 팔을 버 리고 내 앞에 서서 시무룩하고 있는 양이 보였다. 그는 그 짧은 일생 동안에 내가 무정하게 한 것을 원망하는 것이었 던가.

나는 그후에 새 아내에게 난 아들 하나를 끔찍이 사랑하다 가 잃어 버렸다. 그리고는 피눈물이 나도록 가슴이 아팠다.

만일 인연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면 그 어린애가 내게 대한 미진한 인연을 풀기 위하여, 또 나로 하여금 자식 죽은 슬 픔을 가르치기 위하여, 인정 없는 악한 버릇을 징계하기 위 하여 다녀 간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무정한 아비요, 남편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옳을 것이다. 또 벌도 실상 받았다. 앞에 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알 것이다.

나는 K학교를 떠나기 전날 아내를 불러 놓고 내 뜻을 말하 였다. 나는 이로부터 정처 없는 길을 떠나노라고. 다시 조선 에 돌아 올지도 모르거니와, 설사 살아서 돌아 온다 하더라 도 언제 돌아 올는지 모른다고. 그러니까 내가 가든지 마음 대로 하라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을 본시 내 약한 내가 얼 마나 오래 별러서 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고 이 말 끝에는 반드시 한바탕 비극이 날 것도 예상하였다.

그러나 의외였다. 아내는 지극히 냉정한 태도로,

『나도 당신 생각이 그러신 줄 알아요. 나는 친정에 가 있 지요. 어디를 가시든지 몸 성히 댕기시고 큰 이름 내시오.

하고 도리어 빙그레 웃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빈정대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이 사람이 누구를 빈정댈 사 람이 아닌 것을 믿는다. 그는 어디까지든지 순량한 사람이 었다. 그러한 미점을 잘 인식하면서도 그를 사랑하지 못하 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아마 나는 더 아름다운, 더 좋은 아 내를 바란 것일까. 내 변명이 아니라, 그저 싫었다. 나는 일 생에 다른 아내를 구하려는 생각조차도 그때에는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에게서 떠나서 혼자 됨으로써 만족할 것 같 았다. 이것이 그때의 내 진정이다.

나는 지금 와서는 이것을 인연이요 업보라고 믿는다. 그와 나와는 그만큼 밖에 부부 생활을 할 수 없는 인연이었던 것 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고 나는 내가 그와 이혼하여서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한 책임을 벗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 것은 지난 날의 인연이라고 하더라도 지 금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한 업의 보는 내가 장래에 꼭 받아 야 할 것이다. 혹시 안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결단코 받을 것임을 믿는다. 나는 그것을 벌써 받았거나 또 장차 받거나 할 것을 믿는다. 나는 우주의 인과의 이법을 믿기 때문에, 만일 인과의 이 법이 추호만큼이라도 부서지는 날 에는 우주가 부서질 것을 믿기 때문에, 나는 내가 이 업보 를 받더라도 우주가 부서지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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