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예와 병사 만들기
안연선 (지은이)삼인2003-08-08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
기본정보
337쪽143*221mm438gISBN : 9788987519913
책소개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는 우리 식민지 역사에서 동원 체제에 희생된 소수자, 특히 위안부와 군인의 삶을 심층 인터뷰와 조사를 통해 복원하고 있는 책이다. 지은이는 십여 년 동안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만난 옛 위안부 13명, 옛 일본 군인 17명과 직접 만나 나눈 이야기, 옛 위안부 38명에 대한 기존의 구술자료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기존의 연구들과는 달리, 위안부뿐만 아니라 일본 군인들의 목소리를 함께 담아내어 위안부 문제를 가해자/피해자, 남성/여성, 식민주의자/피식민주의자 등의 다각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면접 조사를 통해 좀 더 폭넓고 새로운 시선으로 연구의 지평을 넓혀놓았다는 평을 받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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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을 펴내며
1. 위안부 문제 알기 - 옛 위안부와 옛 일본 군인들을 만나다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뒤안길|위안소 만들기|침묵|
이야기 듣기
2. 위안부 문제의 역사 기술
민족주의의 시각|'객관주의적' 역사학의 시각|여성주의
의 시각|나의 질문은 무엇인가?
3. '위안부'들의 한 맺힌 이야기들
모집되어 실려가다-위안부의 모집과 운송|가족 배경|
성의 '입문'|일상 생활|몸으로서의 여성|위안부와
군인과의 관계|겨룸과 저항|전쟁은 끝났지만
4. 일본 군인들의 이야기
그것은 연예 관계였다|군인들은 왜 위안소에 갔을까|
군대 내 규율과 통제|폭력|합리화|시각의 차이가
나는 이유가 뭘까
5. 병사 만들기
군사주의적 남성성의 특징|'진짜 사나이'를 만들어라!-
군사주의적 남성성 형성을 위한 실천|전쟁에의 기여
6. '창녀' 만들기 - 노예화되고 성적화된 여성성
강요된 여성 주체의 자리매김|조선과 일본에 이미 확립되
어 있던 여성성|'재사회화'-'전통적인' 여성성의 사용과
변형|정체성 재구성의 효과
7. 천황의 신하 만들기 - 민족 정체성
'조선인됨'과 '일본인됨'-일본 군인과 한국 위안부의 민족
정체성의 특징|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실천 관행|정치
적 수단으로서의 정체성 개편
8. 끝나지 않은 이야기 끝맺기
순응하기 - 내면화된 여성성|저항의 몸짓|전쟁은 끝
났지만- 전후 정체성의 재구성 과정|침묵을 깨기-위안
부 운동
주석
조제별 참고 문헌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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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안연선 (지은이)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숭실대에서 화학을 공부하다가 1984년 이화여대 여성학에 입문했다. 졸업 후 창원대, 이화여대, 동국대 등에서 여성학을 강의했다. 그 외에 한국성폭력상담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성폭력 피해자를 상담했으며, 1992년 한국정신대연구회에 참여했다. 1994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Warwick) 대학에서 여성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에 일본 도쿄대 일본 사학과에서 Visiting Scholar로 있었으며, 독일 라이프찌히(Leipzig) 대학 일본학과에서 위안부 문제와 난징 학살 등을 통해 나타나는 전쟁 또는 식민주의와 성폭력에 대한 강의를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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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반일과 동아시아>,<성노예와 병사 만들기> … 총 2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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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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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대중적으로 읽히기를 바라며...
위안부 리포트 책을 보다가 이 책을 참고도서로 한 것을 보았다. 올해 초 읽었던 책인데, 찾아 보니 리뷰가 전혀 올라와 있지 않아 기억을 더듬어 써 본다.(생각만큼 잘 안 난다는 게 문제지만...;;;) 당시 이 주제에 대한 관련 책들을 고르다가 게 중 좀 더 근래에 나온 책으로 골라본 게 이 책이다. 제목이 자극적이긴 했는데, 다뤄진 내용을 살펴보면 이 정도 제목은 '자극' 축에도 끼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저자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또 민족사적 관점 살펴보는 등 다양한 각도를 유지하며 책을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만나본 수많은 일본 병사들-'위안부'를 경험해 본 그들과의 인터뷰가 꽤 인상적이었는데, 게 중에는 '참회'라기 보다 '안타까웠다....' 정도의 반응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일부 사람들은 '당연한 권리'였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해서 분노를 일게 만들었다. 저자도 인터뷰 하는 도중에 숨을 고르느라 애먹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현장에서 그런 목소리를 들었으면 정말 주먹부터 올라가지 않았을까 싶다.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 문제로 국내외가 시끄러운데, 부친이 그 신사에 모셔져 있는 어느 딸의 유골 회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버지는 원해서 나간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끌려간 것이다!라고 해도, 일본 측에서는 그는 명예롭게 죽은 것이다! 영광으로 알라!라는 식으로 대응을 하니, 사회운동을 하고 있던 그 따님도 울컥한 나머지 목소리가 커졌다. 먼저 화낸 사람이 진다고...;;;; 그 심각함과 억울함과 비참함을 알지 못하는 저들은 왜 그리 감정적이냐며 비아냥 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ㅡ.ㅡ;;;;
아무튼! 이 책의 저자는 그래도 꽤 차분하게 내용을 진행시켜 나가는데, 당시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의 흑백 사진 한장이 나를 사로잡았다. 익숙한 사진이었다. 교과서에 이 내용이 실리게 되면 항상 오른쪽에 벽에 기대어 있는 임신한 여성이 나오는 사진이 실리곤 했는데, 그 책이 여기에 실려 있었던 것. 저자가 책을 쓸 당시만 해도 그분은 살아계셨는데 지금은 어쩐지 모르겠다. 관련 자료를 찾아서 확인해 보아야 할 듯.
익명의 사람이 아닌, 우리와 같은 공간에 그 처절함을 그대로 안고 계신 분이 여전히 한맺힌 가슴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참 먹먹했다. 덮어두고팠던, 동시에 고발하고팠던 그들의 기억, 상흔... 전체 희생자의 일부에 해당하겠지만(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거나 다른 곳에서 살아남았거나, 아니면 침묵을 지키기도 했을 것이다. 91년 첫 증언 이전에 이미 돌아가신 분도 상당수일 테고....) 큰 결심으로 진실을 밝히고자 한 이분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책 속에선 '남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책의 제목에서도 나오다시피, '진짜' 남자로 만들어주는 통과의례인 것처럼 남성들의 등을 떠밀어 '위안부'에게로 보낸 사실도 여럿 발견된다. 이런 악습은 오늘까지 남아서 많은 남자들이 군대에 가서 총각 딱지를 떼어온다고 한다. 그걸 진정한 남자다움으로 생각하는 왜곡된 의식구조에 한숨부터 나온다. 그 뿌리가 어디서부터일까를 생각하면 더 기막히다. 뭐, 이것 뿐이던가. 기합 문화 등도 마찬가지..(ㅡㅡ;;;)
표지만 보면 몹시 심각한 느낌이 드는데, 책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물론 내용은 절대로 심각하다!) 보다 대중적인 책이 되어야 마땅한데 많이 소외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좀 더 우리 사회의 중심 이슈가 되고 활발한 반응과 참여를 촉구할 수 있기를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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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26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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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예와 병사 만들기 / 안연선
"일본군의 위신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군 당국은 1938년 두 가지 지시를 내렸다. 첫째, 위안부의 모집은 군당국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어야 하고 모집 담당자는 군에서 신중하게 선정해야 한다. 둘째, 위안부 모집 과정은 조선에서와 같이 관련 지역 경찰과 긴밀히 협력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군 교통 수단이나 군 숙소 등을 제공해서 군이 모집해 온 소녀들을 호송했다는 증언이 많이 있었다. 이들 여성들은 종군 간호부처럼 일본군 조직 내에서 공식성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수송시에도 군수품 수송을 위한 장소, 즉 기차의 맨끝 연결 차량이나 배의 밑바닥에 실려갔다. 위안부 모집자들을 태평양 섬 지역으로 운송하는 동안 "배 안에서 사용 중지"라는 경고문이 선내에 붙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들 모집자들을 각 부대로 할당할 때는 '군수 물자 배급'이라는 명목에 위안부들의 이름을 적었다고 한다."(86)
"위안부들은 가난에 시달리는 경제적 약자일 뿐만 아니라, 외부모 가족(특히 '편모 가정') 출신이나 고아와 같은 당시 사회적인 배경에서 약자들인 경우가 많았다." "옛 위안부들의 가족 배경에서 발견한 또 하나 눈여겨볼 사실은 장녀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맏딸로서 가족 부양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위안부 모집 대상의 또 다른 그룹은 기생 학교의 소녀들이었다." "위안부들 중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모집 대상자가 된 경우도 있었다. 정서운·윤순만 할머니처럼 당시 조선 독립 운동과 연루되어 있던 가족의 딸들 역시 위안부로 차출된 경우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위안부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그룹을 주요 대상으로 모집하였는데, 그 이유는 모집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사회적인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는 위안부 문제에 사회적 계급이라는 변수가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준다."(87-9)
"위안부들을 통제하기 위해 서로 분열시켜 통제한다는 분리 지배의 원리가 사용되었다. 배족간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위안부들도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위안소에 있었던 기한에 따라 계급이 매겨지기도 했고, 상급자 위안부는 하급자를 처벌할 수도 있었다." "위안부들 사이의 위계 구조를 형성하는 기반이 된 것은 그들이 '상대하는' 군인들의 계급이었다. 군인들 사이의 위계 구조는 위안부들 사이에서도 재생산되었다. 각 위안부가 '받는' 군인이나 장교의 계급에 따른 특권과 위계 구조가 바로 이들의 지위를 결정했다. 군 위계 구조 내 고위직 장교를 '상대한다'는 사실은 이들의 일상 생활에 차이를 가져왔다. 위계 질서 구조에서 위안부가 지니는 위치에 따라 그들이 하루에 몇 명을 받아야 하는가가 결정되었다. 주로 장교들을 '상대하는' 일본 위안부들은 다른 위안부들처럼 많은 군인들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차별은 이들 여성들을 서로 분열시키는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96-7)
"위안부들이 더 이상 군인을 '상대할' 수 없을 때는 사용 가치가 없는 것이므로, 그야말로 사용후 버려지는 소모품과 같은 존재였다. 예를 들어 병이 심해지거나 몸이 너무 약해서 더 이상 성행위를 할 수 없게 되면, 위안부로서의 사용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들의 몸은 성행위를 위해서만 유용했을 뿐, 그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성병이나 다른 질병에 걸리지 않은 상대적으로 건강한 위안부만이 그 '유용성'을 인정받았다." "위안부들에게는 성노예에서부터 심지어 전쟁 말기에는 군사적인 업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일이 부과되었다. 예를 들면 군부대 병영의 청소, 군복 세탁, 창 찌르기 등의 군사 훈련, 탄약 상자와 폭탄 나르기, 부상병 간호, 전투에 나가거나 돌아오는 군인들의 환송과 환영, 춤과 노래로 군인들에게 오락 제공, 재사용을 위해 사용한 콘돔 세척하기, 부상병을 위한 헌혈, 심지어는 스파이 활동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했다."(103-4)
"위안부들은 매일매일 계속되는 장기적인 성폭행에 대처해 나갈 생존 전략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위안소 체제는 위안부들의 저항을 약화시켰지만, 그러함에도 몇몇 위안부들은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방식으로 저항했다. 저항의 방식은 다양했다. 위안소 탈출을 시도하기, 군인 요구에 저항하기, 되받아치거나 싸우기, 군인 살해, 자살 시도, 실성함(미침), 힘든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술이나 마약 복용하기, 장교와의 친근감을 형성하기 등 여러 가지 생존 전략과 저항의 방식이 존재했다. 그 가운데 가장 대담한 저항 방식 가운데 하나는 바로 위안소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안부들은 늘 감시당하고 있었으므로 탈출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위안소를 벗어나기 어려웠던 또 다른 이유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던 대부분의 위안소들이 최전방 근처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위안부들이 위안소를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바깥은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111-2)
"전후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위안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수치와 비난과 오명뿐이었다. 자신과 가족과 한국 사회는 이들을 '더럽혀진 몸'으로 여겼다.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더 이상 '정상적인' 다른 여자들과 같을 수 없음에 대한 쓰라린 심정을 토로했다. 위안부들이 자신의 과거를 주위에 밝히자 가족과 친척들은 심지어 이를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이러한 가족들의 반응은 이들을 다시 가족 밖으로 내몰았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사회 운동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들어, 옛 위안부들이 자신의 과거를 신고하거나 공개적으로 밝히고자 할 때, 이들은 또다시 가족과 마찰을 빚었다. 이제는 위안부 자신만이 아니라 그녀의 가족 모두가 '더럽혀진 몸'에 대한 수치와 맞부딪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옛 위안부들에게는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것을 운동단체나 정부에 신고차는 것 자체가 '가족의 수치'를 사방에 알리는 것으로 해석되었다."(119-20)
"옛 일본 군인들 가운데는 위안부와 나눈 연애 관계 때문에 전쟁터에서 상실된 자아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인 작가 니시노 루미코가 만난 한 군인은 위안부와의 만남이 "진정한 인간적 만남"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는 위안부와 군인의 경험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는 것 중에 하나이다. 위안부들의 구술과는 많이 다른데, 옛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 여성들이 자신들의 동반자였고, 연인이었고,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옛 일본군인들은 그들이 그리던 어머니, 아내, 연인상을 투영시킨 이상적인 여성상의 대용품으로 이들 위안부들을 대상화했던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인간적인 연애 관계에 대한 감정이 위안부를 경멸하는 감정과 함께 공존했다는 것이다. 옛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들은 성적 쾌락을 얻기 위한 대상이라든가, '더러운 여자'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131-2)
"위안부뿐만 아니라, 일본 군인도 엄격한 규제와 통제를 받았다. 그들은 일본제국 군대의 군인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증명해야 했다." "일반병들은 고참들의 가혹한 대우와 혹독한 군사 훈련을 견뎌야 했다. 특히 막 입대해 들어온 신참들은 '지옥 훈련'이라는 것을 거쳐야 했다. 이때 신참들은 매일 맞았다. 군복에 조금이라도 흙이 묻었다거나, 군화가 제대로 광이 나지 않는다거나, 대답이나 태도가 고참의 맘에 들지 않을 때는 신참들은 고참들에게 가차없이 구타를 당했다. 그러나 군인들을 통제된 군생활과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길들이기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했다. 혹독한 군생활을 보상하기 위한 일종의 위로·오락으로서(그러니까 당근으로서) 제공된 것은 바로 '성'이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처벌과 보상 체계가 공존했던 것이다. 옛 일본군 장교 요시오카 다다오 역시 일본 군당국이 군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위안부 제도에 의존했음을 시인했다."(142-3)
"옛 위안부와 전쟁 포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옷을 갈기갈기 찢고 발가벗기기, 채찍질하기, 가슴 도려내기, 담배불로 지지기, 자궁에 총을 겨누어 발사하기, 복부 가르기 같은 상상하기도 힘든 행위들을 일본 군인들이 했음이 보고된 바 있다." "폭력은 마치 화폐처럼 군인들이 위안부들한테 원하는 '서비스'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폭력은 위안부들뿐만 아니라 부하 군인들, 그리고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널리 사용되었다. '불굴의 전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전투를 위한 사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군대 내 폭력은 국가 권력에 의해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도화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인들은 일상에서 계속되는 구타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갔다. 말하자면 위안부를 구타하는 것을 포함해 군대 내에서 구타는 하루 일과 가운데 하나로 일상화되었고, 가차없이 냉혹해져 갔다."(148-9)
# 위안소 설치를 합리화하는 주장들
1. 위안소 제도는 기존의 매춘 제도와 다를 바 없다.
2. 전시戰時라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3. 남성은 통제할 수 없는 생물학적 성욕이 있다.
4. 주둔/작전 지역의 여성들에 대한 강간을 방지한다.
5. 주둔 지역의 치안 유지에 이바지하여 반일감정을 억제한다.
6. 위안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군당국이 개입했다.
"(가혹한 폭력과 더불어) 남성성을 부추기기 위한 또 다른 실천 가운데 하나는 여러 명이 함께 위안소에 가서 성관계를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마치 하나의 '의식'(ritual)과 같다. 이때는 대개 장교나 고참이 부하들을 이끌고 갔다. 옛 위안부 하군자 할머니는 군가를 부르며 그녀의 방 안으로 행진해 들어오는 군인들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성행위는 그룹의 구성원 모두가 참여해야만 하는 하나의 통과 의례와도 같다." "군인들이 성적인 필요를 느끼는지, 또는 상대 여성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와는 상관없이 위안부와 성관계를 하는 것은 이들 군인들에게 주어진 권리였을 뿐 아니라 성을 통해 남성성을 증명해야 하는 하나의 과제였다. 성행위를 통해서 남성다운 행동의 기준에 들었음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러므로 성은 군대 내에서 일상 생활을 통해 남성성을 강화시키고 재확인하기 위한 주요 실천 관행 가운데 하나였다."(176-7)
"한마디로 말해 위안부 제도는 남성적 정체성(용맹스럽고 공격적이고 성적화된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재확립할 수 있는 환경을 군인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일본 군대의 위계 구조에서 일반 사병이나 갓 입대한 신병들이 가장 낮은 층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군대 내 위계 구조, 특히 체벌의 위계 구조에서 위안부들은 일반 사병들보다 더 낮은, 유일한 '부하'들이었다. 군인으로서의 남성적인 지배와 군사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구성된 '위안'을 위한 공간에 위안부들이 제공되었던 것이다. 전쟁터에서 남성은 전투를 위한 하나의 군수품이나 '총알받이'로 전락했다. 그러나 위안소에서는 위안부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통해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들의 주체성을 재확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통해서 남성적인 주체성을 회복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행위는 남성성의 정수로 여겨진다."(185-6)
"조선의 여성성 모델은 일본 천황의 군대를 '위안'하기 위한 성적인 대상('창녀')으로 규정되는 반면, 모범적인 일본 여성의 역할은 재생산자로서 미래 천황의 군인을 생산하기 위한 모성으로 규정되었다." "조선 여성과 일본 여성 사이의 이분화된 이미지, 즉 성적인 도구와 '국가의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는 가부장적 국가 권력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인 분류는 서로에 상반되어 개념화되기 때문에, 위안부들을 '더러운 창녀'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일본의 후방에 있는 일본 여성들에게 '정숙한' 부인·어머니·딸의 자리를 비축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분화는 이들 둘 사이의 민족적인 위계 질서의 골을 깊게 하는 데 한몫 했다. 조선과 일본에 걸쳐 통용되었던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에 기반한 이러한 위계 질서는, 전쟁을 통한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에서 식민주의 지배를 당연시하기 위한 또 다른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211-2)
# 여성의 몸에 대한 이미지가 '조국(homeland)'으로 상징화
"여성의 몸을 민족의 고결함으로 상징하는 담론은 여성에게는 위험한 것이다. 사실 상당수의 위안부들이 전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또한 귀향을 한 경우도 자신들이 위안부였음을 공개하지 않았다. 또다시 수치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며, 그들이 속한 공동체, 즉 '민족의 명예'를 훼손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한국도 일본도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여성성에 대한 한국 민족주의와 유교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이의 실천은 이러한 집단적인 '기억상실증'을 초래했다. '정숙한' 여성의 성과 '정조'는 민족의 순수성과 연관지어 개념화되므로 위안부들의 침묵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대부분의 위안부들에게 부과된 수치감들은 이들을 침묵하게 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위안부 문제를 부인해 온 일본의 이해 관계에 공모해 온 셈이다."(223-4)
"위안부들에게 강요된 '난잡함' 또는 '더러운' 여성 정체성은 군인들 내에 여성을 혐오하도록 하는 남성 정체성을 강화시켰고, 순종적인 여성성은 우월한 남성성을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위안부들을 노예화된 위치에 놓음으로써 일본 군인의 '주인됨'이 형성되고 강화되었다. 즉 조선인 위안부들의 몸은 일본 군인의 민족적 우월성과 남성성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위안부들의 '오염된' 여성성은 군인들의 남성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위안부 제도를 통해 구성된 여성성에는 모순이 드러난다. 노예화되고 성애화된 위안부의 여성성과의 관계에서 군인들의 남성성은 강화되는 한편, '더러운' 위안부의 몸과 접촉함으로써 군인들 자신도 '오염되고', 성병에 걸려 남성성이 훼손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는 위안부를 '필요악'의 위치에 자리매김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225-6)
"일본 군인의 민족 정체성은 '광적인' 애국주의, 천황에 대한 충성, 외국인 혐오주의, 집단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들의 민족 정체성은 또한 성별화되어 있었다. 특히 천황제는 일본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의 정체성은 천황제와 민족주의의 결합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대부분의 조선인 위안부들의 민족 정체성은 반식민주의적이었으나 일본 남성들의 민족 정체성은 식민주의적이었다." "일본에 의한 조선인의 민족 정체성 형성은 일본인의 우월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한국 위안부를 '미문명화되고' 성애화되고 '음란하고'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하는 것은, 반대로 일본 군인의 문명화되고 우월하고 애국적이고 남성적인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가부장적인 민족주의와 '광적'인 애국주의는 조선인 위안부의 멸시와 고통에 의해 마련된 토양 위에서 번성했다."(2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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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9-07-15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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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예와 병사만들기
좋은 연구는 시간이 지나도 읽을 수 있고, 읽어야 한다. 이 책은 2003년에 처음 나왔다. 2008년에 개정판이 나왔는데, 나는 2003년판을 읽지 못해서 2008년판이 얼만큼 많이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 한국사회가 일본군'위안부'와 관련해 얼마나 공부를 안하는지 알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 책에서 이미 다 언급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에 관련된 담론과 연구사 비판점 등등을 일본군'위안부'가 이슈화 될 때마다 반복해 왔다는 것이다.
진짜, 박**가 이 책 한번만 읽었어도 <**의 위안부> 같은 연구사도 뭣도 없는 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이미 연구된 것을 가지고 소모적인 논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장과 3장의 내용은 그 시기의 연구를 통해 정말로 많은 것들을 제안하는 소중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후속 연구자들이 그 연구들을 발전 시켜서 연구 성과를 내야할 것이다.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관련 논문에서 일본 군인의 증언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 여성학 전공자들이 미국유학을 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고, 일본어 자료와 일본어 인터뷰를 통한 연구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솔직히 2장과 3장의 내용을 더욱 발전시켰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잠깐 했으나 한국의 연구 상황을 봤을 때 4장의 일본군인들의 이야기도 너무 소중한 것이었다.
이 책을 내가 왜 지금 읽었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책날개에 저자의 소개를 보면 너무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관점과 생각지도 못했던 타자들을 만나가며 연구한 분임을 알 수 있다. 언젠가 꼭 만나보고 싶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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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되는게없다 2020-03-23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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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예와 병사 만들기> 안연선
‘종군 위안부’라 부르지말라
‘종군 위안부.’ 이 말에 담긴 위선과 거짓과 추악한 자기기만을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자발적으로 군대를 따라가 성적 서비스를 제공했던 여성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니, 이 말이 덮어버린 ‘역사의 진실’을 알게 된 사람들로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군 위안부라는 말은 좀더 정확한 용어, ‘일본군 성노예’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 여자정신대란 이름으로 징용을 당하거나 좋은 곳에 취직시켜준다는 말로 속이거나 그냥 백주 대로에서 납치해 간 것부터가 이들이 자발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들이 ‘위안소’에서 당했던 “강제규율, 강금상태, 자유박탈 등을 고려할 때 성노예라는 용어보다 더 적당한 용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이 ‘위안부’의 존재마저 극구 부정하다가, 1992년 아시아 태평양 전쟁기에 일본군 당국이 ‘위안소 제도’에 직접 관여했다는 문서가 발견되자 마지못해 그 존재를 시인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1992년 1월 이후 10년이 넘도록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옛 ‘위안부’ 생존자들이 항의 집회를 열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공식 사죄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한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적극적 노력을 게을리했다. 더 알 수 없는 것은 위안부 존재 자체가 한국 땅에서조차 반세기 가까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90년 초 민간운동단체들이 이 문제를 처음 세상에 알리고, 고 김순덕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이 나오고 나서야 한국인들은 일제의 만행 가운데 하나로 ‘위안부’ 항목을 추가했다. 그 긴 세월 동안 ‘위안부’ 생존자들은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잃어버린 존재였다. 무엇이 이들을 ‘침묵’ 속에 밀어넣었을까
△ ‘일본군 위안부’였던 강덕경 할머니가 그린 <빼앗긴 순정>. 일본군대는 ‘위안부’여성들을 성적으로 짓밟아 성노예화함으로써 그들의 정체성과 조선 민족을 유린하고 그를 통해 남성적 우월성과 일본인의 우월성을 확인했다. 아래는 ‘일본군 위안소’ 여성들의 모습.
여성학자 안연선(40)씨가 쓴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는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마저 은폐와 기피의 대상이 돼 왔던 ‘위안부 문제’를 생존자들의 생생한 인터뷰에 근거해 새롭게 재조명한 연구서다. ‘위안부’ 피해자를 돕는 활동에서 시작해 10년 넘게 이 문제를 연구해온 지은이는 한국인 피해 여성들뿐만 아니라 가해 남성들, 그러니까 옛 일본군 출신 생존자들까지 인터뷰해 ‘위안부 제도’를 실존적 차원에서 정치적·이념적 차원까지 다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위안부’ 여성들의 피맺힌 절규는 일본군 생존자들의 거만한 정당화와 맞부딪치고, 그 상반된 증언은 제3의 시각에서 재해석된다.
특히, 이 책은 기존의 민족주의적 시각과 여성주의적 시각을 모두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지은이는 한국의 민족주의적 시각이 ‘위안부 문제’를 인권의 문제 이전에 민족 말살의 문제로 접근하고 해석해왔다고 말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 여성의 정조를 짓밟았음’을 비난하는 민족주의적 레토릭에는 가부장적인 순결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으며, 여성의 몸을 민족의 소유로 본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성(젠더) 중심의 여성주의적 시각은 여성문제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이 시각에서 바라보면 위안소 제도는 국가가 식민지를 대상으로 저지른 범죄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여성에 대한 범죄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관점은 “성폭력과 식민지 권력 사이의 관계를 간과함으로써 위안부 제도가 특별한 식민주의 정책의 일환이라는 점을 보지 못한다.”
지은이는 그가 ‘여성주의 운동 지향의 관점’이라고 부르는 시각을 통해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식민주의 지배’를 함께 분석함으로써, 일본의 제국주의적 시각의 반인권성을 비판함과 동시에 한국의 민족주의적 시각의 반여성성을 극복한다.
지은이의 관점에 따르면, 일본군대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설치됐던 ‘위안소’는 단순히 성욕을 해소하는 공간을 넘어 식민주의·가부장주의 이데올로기가 실천되고 형성되는 마당 노릇을 했다. 지은이는 일본 군대의 특성을 이루는 ‘군인정신’이 ‘남성성’과 ‘여성성’의 극단적 양분으로 나타났다고 강조한다. 공격성과 파괴성을 증폭시키기 위해 고안된 남성성의 강조는 ‘진짜 사나이’가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전장의 병사들에게 심어주었고, 그것을 입증하는 방편으로 ‘위안부’들에 대한 폭력적인 성착취가 일반화됐다. 동시에, 일본군대는 희생·복종·규율이라는 ‘여성화’ 또한 극단적 형태로 실현시켰다. 엄격한 규율의 위계질서 밑바닥에서 희생과 복종에 짓눌리는 병사들은 ‘위안소’ 여성들을 억눌린 남성성의 배출구로 삼았다. 성행위는 수시로 폭력과 학대를 동반했다.
위안소는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실행하는 장이기도 했다. 조선인 ‘위안부’들을 강간하고 폭행함으로써, 그들의 ‘순결’과 ‘정조’를 짓밟음으로써, 그리하여 조선 여성들의 ‘정체성’을 붕괴시킴으로써 일본 군인들은 조선 민족을 유린하는 우월한 일본 민족의 구성원, 천황의 군인으로 스스로를 만들어냈다. “지속적인 성폭행은 한 여성의 존엄성과 개인이 자아정체성을 파괴하고 그가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데 있었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이런 학대에 반항·탈출·실성·자살의 형태로 항거하기도 했지만, 대다수가 18살 미만이었던 어린 소녀들에게 죽음의 위협 속에 가해지는 성폭력은 저항의 의지마저 꺾어버렸다. 더구나, 이들은 ‘정조’라는 유교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몸이 더럽혀졌다는 생각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를 조국에 돌아오지도 못하는 ‘국적없는 부랑아’로 만들었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자신이 겪었던 끔찍한 경험을 철저히 감추어야 했다. 그들을 보듬어야 할 한국 또한 이들을 ‘민족의 수치’라고 생각해 오랫동안 방치했다. 지은이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운동이 일제의 만행을 단죄하는 운동을 넘어 반여성적 관념을 깨뜨리는 여성의 주체화를 향한 운동이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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