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8

불교언론-⑧ 춘원 이광수의 『원효대사』 - 법보신문

불교언론-⑧ 춘원 이광수의 『원효대사』 - 법보신문


⑧ 춘원 이광수의 『원효대사』
 윤창화 승인 2004.08.10
민족 사상가로 거듭나

춘원의 ‘불교사랑’ 듬뿍


‘자루 빠진 도끼’를 찾아 서라벌 거리를 방황하는 원효, 그가 비로소 파계승이라는 낙인을 벗어버리고 천 수백 년 만에 탁월한 민족적 사상가로 존숭되기 시작한 것은 춘원 이광수(1892-?)의 소설 『원효대사』에 의해서이다.

단편 소설 『꿈』과 함께 춘원의 『원효대사』는 불교적 소재를 문학(소설) 속에 끌어들인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제에 협력한 변절자라는 시대적 시련과 정신적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에 나온 작품이다.


원효는 불도 수행자로서 생명처럼 지켜야할 계율을 망각한 채 스스로 이성을 찾아 거리를 방황한다. 요석공주는 원효가 부르는 ‘자루 빠진 도끼’라는 사랑 노래에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한다. 천우신조라고나 할까. 두 사람은 드디어 요석궁에서 3일간의 세속적인 사랑을 나눈다. 아/ 정(情). 쾌락은 번민을 동반한다고 했던가? 원효는 인간적 사랑과 불교(타)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그는 끝내 종교자의 길을 택함으로써 요석공주와의 사랑 역시 남녀간의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설총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얻어 민족의 정신사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강한 애국심의 산물이며,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성스러운 사랑이야기로 승화시키면서 장편소설 『원효대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사진설명>1948년 판 『원효대사』.


춘원은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원효를 그림(묘사)으로 불교에 있어서는 한 중생(원효)이 불도를 받아서 대승보살행으로 들어가는 경로를 보이는 동시에 신라 사람을 보이고 동시에 우리 민족의 근본정신과 그들의 생활 이상과 태도를 보이려 하였다.(... ...) 내 눈에 어렴풋이 띈 우리 민족의 모습을 아니 그려보고서는 못 배기도록 그리웠기 때문이다.”(서문)

요석공주와 정을 나눈 원효, 거렁뱅이 차림으로 화엄의 무애가를 부르며 거리를 방랑하는 파계승이었지만 춘원의 눈에 비친 원효는 당 유학을 거부한 민족의 심벌이자 동시에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다. 춘원은 소설 『원효대사』를 통하여 원효와 신라, 그리고 자신의 민족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작자는 원효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욕설, 그리고 그의(원효) 중생구제와 숭고한 민족사랑 등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통하여 작자 자신의 삶과 정신을 투영하고자 했다.

어느 평론가는 “제대로 읽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천박한 통속 취미와 작위적인 포오즈에 함몰해 있다.”는 혹평을 했지만, 대부분의 옛 소설들이 그러하듯 춘원의 『원효대사』 역시 다분히 설화적으로써 지금의 소설적 시각으로는 읽기 거북한 곳이 없지 않다. 물론 소설의 특성상 역사적 사실여부에 대해서도 꼭 신빙할만한 것은 못 되지만, 그러나 이 작품 속에는 원효의 생애, 사상, 전기(傳記) 자료, 민중에 대한 연민과 교화활동 등이 잘 반영되고 있다. 특히 원효의 인간적 사랑과 방황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사랑으로서 한 고승의 다양한 삶-불교적 소재-를 소설화했다는 측면에서 문학적 가치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 속에 나타난 춘원의 해박한 불교지식과 경구(經句)의 현실적 해석, 신라의 옛 문화를 그려보고자 했던 일단의 노력 등도 독자들에게는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춘원의 불교사랑은 『무정』, 『사랑』 등 그의 소설 곳곳에 나타난다. 아주 옛적 필자는 춘원이 쓴 ‘육바라밀’이라는 짧은 시가를 읽은 적이 있었다. 숭고와 천박이 공존하는 사랑, 그 속에다가 저토록 아름다운 우리 말로 육바라밀을 해석하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춘원의 만년은 쓸쓸했다. 해방이 되었지만 그의 발목엔 친일자라는 무거운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사촌형인 운허스님의 도움으로 광능내 봉선사에 기거하면서 광동학교에서 잠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남는 시간엔 공허한 숲 속을 하염없이 걷곤 했는데 그 때 그가 걸었던 산책길을 ‘춘원의 산책로’라고 하여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6, 25때 납북되었으나 김일성 찬양운동에 동조하지 않는 바람에 강제 노역장으로 끌려가 험한 일을 하다가 죽었다. 춘원은 가고 그의 문학만 남았다.

이 책은 그의 나이 51세 때에 쓴 작품으로 1942년 3월 1일부터 226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그 후 해방된 지 3년만인 1948년 7월 생활사(生活社)에서 상 하 두 권으로 정식으로 출판되었다. 46판 반양장 세로조판.


윤창화(민족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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