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5

[나의 좌파 탈출기] '거짓분노-北인권 외면' 좌파 미망 벗어난 행복[현수환]



<나의 좌파 탈출기> 

<나의 좌파 탈출기>
 '거짓분노-北인권 외면' 좌파 미망 벗어난 행복[현수환]

2018. 8. 25.
좌파 탈출기①大賞
 
편집국
 
 

사람들에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환상' 심어주는 좌파 사상의 어두운 매력
인권과 민주주의 위하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던 좌파들 북한인권에는 오히려 침묵
다시 정규재·김정호·이영훈 등 우파 지성인 책 보니 좌파는 가짜 선동-날조된 엉터리였다
좌파에서 빠져나온 지금...조금 힘들지 몰라도 매일매일이 즐겁다  
펜앤드마이크(PenN)는 오늘부터
'나의 좌파 탈출기' 공모전에 응모한 작품들을 홈페이지에 순차적으로 연재합니다.


지난 6일 열린 PenN 주최 제2회 청춘콘서트에서는 
57편의 응모작 중 예비심사를 통과한 작품들을 대상으로 현장투표를 실시해
대상(大賞)부터 장려상까지의 당선작이 선정됐습니다.
 
대상은 대학생인 현수환 씨(23)가 받았고
최우수상에는 전명수 씨(27·대학생),
우수상에는 남택동 씨(40·개인사업),
장려상에는
김시민 씨(27·대학생), 이병세 씨(29·개인사업), 배재희 씨(39·교사)가
각각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첫번째로 대상 수상자인 현수환 씨의 '좌파 탈출기'를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대상 수상자, 현수환 씨.
.
10대의 내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바로 ‘좌파에 찌든 삶’ 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좌파였다.
그것도 그냥 일반적인 좌파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책을 옆에 끼고,
<공산당 선언>을 입에 읊고 다녔던 ‘극좌’.
공부 대신 나는 내 10대 시절을 거의 과거 운동권과 비슷한 지하써클 모임만을 쫓아다니며 지냈다.
그때의 내게 자본주의와 대한민국은 만악(萬惡)의 근원이었다.
바로 내가 참석했던 그 모임의 선배들이,
그리고 전교조 교사들이 내게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이 미국에 빌붙어 세운 정당성 없는 국가라고.
자본주의는 1%가 나머지 99%를 착취해먹는 악질적인 체제라고.
그래서 나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이 체제를 뒤집어 엎고
사회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이해해서 좌파 사상을 추종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마르크스의 이름을 소리높여 외쳤던 내 주변 친구들 중 정작 마르크스를 읽어본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사상을 정확히 이해조차 못한 우리들이,
도대체 왜 그의 사상을 그토록 열렬히 추종했던 것일까?
 
정답은 ‘그것이 멋있으니까’ 다.
일반 사람들도 종종 그렇지만, 아직 철이 덜든 10대, 20대들에게는 무언가 기존의 것들을
삐딱하게 보고 그것을 부정해야만 멋있다는 왜곡된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가 좋은 체제라고?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라고?
설령 그것이 올바르다 할지라도 그런 말을 하는 건 ‘별로 멋있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특히 그때는 한창 주변에 멋지게 보이고 싶은 나이가 아닌가.
따라서 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은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마치 자신이 깨어있는 척,
멋진 척, 정의로운 척을 하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떠들어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자본주의는 1%만을 위한 체제야...”
“북한이나 한국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니까?”
물론 여기에 대해 ‘왜?’ 라며 구체적인 이유를 물으면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지만 말이다.
 
또 하나 좌파 사상의 커다란 매력은 사람들에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환상’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공부도 못하고, 제대로 하는 건 아무것도 없이
부모님에게 의존해 사는 일반 청년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럴 때 “내가 열심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무엇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됬구나!
열심히 노력해서 여기에서 벗어나야지!” 라고 다짐하는 인간은 정말 거의 없다.
 
그것은 나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직면하고 인정해야만 가능한 다짐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남탓과 세상탓에 빠져 현실을 부정하며 살아간다.
하기야 자기가 못난 인간이고, 앞으로 더 고통스럽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달가워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을 시인하는 것은 정말이지 극도의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다.
(본인이 겪어봤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안다.)
이럴 때 좌파들은 달콤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니가 이렇게 된 것은 너때문이 아니라, 부자들, 기득권들, 금수저들 때문이라고.
분노하라고.
대한민국은 원래부터 썩은 나라라고.
 
이러한 주장들이 무서운 것은 단지 그것들이 거짓이라는 데에 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그것들이 청춘으로 하여금 노력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어짜피 서울대는 금수저만 가는 곳이고,
대학입시제도는 썩었으며,
나는 흙수저로 태어나 공부를 못한다는 사실을 같이 다니는 좌파들에게 주입받자
내 마음 속에 남아있던 최소한의 공부 의지마저도 사라져버렸다.
 
날마다 생기는 감정은 오직 분노일 뿐이었다.
부모님에 대한 분노.
금수저에 대한 분노.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
대한민국에 대한 분노.
날마다 ‘나는 왜 이따위 나라에서, 이렇게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만이 머리를 채웠고,
그럴수록 성적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성적이 떨어지자 나는 나의 훼손된 자존심과 자의식을 또다시 좌파 사상으로 채워넣기 시작했다.
‘내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다. 너희들과 다르게 나는 깨어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도 안되는 주문을 스스로에게 외우면서 말이다.
솔직히 말해 이때 제대로 공부를 했던 날들보다도 ‘노동자 청소년단’ 같은 알수 없는 모임을
따라가 시위에 참가했던 날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조언을 해주는 친구나 어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를 따로 불러 정신좀 차리라며 따끔하게 조언해줬던 선생님도 있었고, 내가 계속 사회에 대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늘어놓자 정규재 선생님의 강의나 우파 관련 책들을 추천해주며 미몽에서
깨어나라고 말해줬던 친구도 있었다.
(10대 나이에 그정도 수준에 이르다니! 나는 아직도 그 친구가 너무 고맙다)
그러나 자의식 과잉의 10대에게 이런 이야기들은 그저 소귀에 경읽기였다.
오히려 내 반발심만 더 크게 만들었을 뿐이다.
여느 좌파들이 팩트에 기반한 비판을 받으면 그러하듯,
나는 저런 말들은 사회에 순응한, 세뇌된 자들의 헛소리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좌파 사상에서 완전히 탈피할 수 있었던 것은 하위권 대학에 합격한 다음이었다.
수능을 보고 성적표를 받았던 날,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놀랍게도 성적표에는 3등급을 넘어선 성적을 하나도 확인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공부를 중상위권은 유지했던 나였는데
고작 이정도 성적이라니. 나는 정신이 멍멍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세상탓, 남탓, 부모탓 그 어떤것도 할 수가 없었다.
20년치의 공부를 한눈에 보여주는, 수능이라는 성적표가 내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순수한 너의 실력이고, 네가 노력하지 않은 데 대한 정직한 대가라고.
이 등급을 거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이다.
나는 성적표를 받은 자리에서 쭈그려앉아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나는 밑바닥 끝으로의 추락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제대로 직시하게 되었다.
세상에 분노하기 이전에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고,
이것을 바꾸어나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답은 간단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재수하는 것.
그리고 집에 충분한 돈이 없으므로 스스로의 생활비는 스스로 버는 것.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생각보다 대한민국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국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힘든 과정이긴 했지만 노력하자 성적은 지속적으로 올랐고, 알바도 꾸준히 하자
(다양한 알바를 해봤지만, 많은 청년들이 불편하는 것처럼 그렇게 힘든 것은 거의 없었다.)
돈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재수를 거쳐 최하위권 대학에서 그럭저럭 수도권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는
성적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던 우파 사상을 접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자 내가 그동안 세상을 바라봤던 관점에도 의문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생 시절 쳐다보지도 않았던 정규재 주필님의 강의와 김정호, 이영훈 등
우파 교수님들의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전에 없던 충격을 받았다.
놀랍게도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모두 가짜 선동에 날조된 엉터리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헬조선’ 이나 불평등한 국가가 아니었다.
또한 자본주의는 내 생각만큼 불의한 체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합리적이고 공정한 체제였다.
인류 최악의 학살과 재앙은 오히려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뛰어난 공헌 위에, 수많은 미군과 국군이 피로써
지켜내며 건국된 소중한 자유 민주주의의 국가였다.
사실 나는 무언가에 분노해야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 너무나 행복하고 또한 감사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여기에는 그 어떤 의문도 표시할 수가 없었다.
좌파들과 다르게 우파분들은 감정을 자극하는 것 대신, 명확한 자료와 객관적인 통계를 가지고
논리로써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번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사람들이 다시 좌파로 돌아서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그순간, 그야말로 내 지난 20년 세월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까운 학창시절을 낭비했던 것인가.
내가 그때 품었던 분노와 증오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시간을 되돌릴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늦지 않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런 분들을 접하게 된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내가 최종적으로 좌파들과 손을 끊고 우파로 완전히 돌아서게 된 것은
바로 ‘북한 인권’ 문제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접하고 이것에 관해 좌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이전에, 나는 그래도 좌파들이
따뜻한 감성을 지니고 진정으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이 말도 안되는 선동에 휘둘리는 것은 그저 머리가 조금 나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생각은 북한 인권문제를 접하며 완전히 무너졌다.
더러운 악인일수록 겉으로는 도덕을 내세우는 경향이 강하듯, 실상 그들만큼 인권과 민주주의를
앞세워 반(反) 인권, 반(反) 민주주의를 자행하고 있었던 이들도 없었던 것이다.
 
반디의 <고발>, 비탈리 만스키 감독의 <태양 아래>. 북한에 살고 있는 실제 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북한인권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이 소설과 영화는, 인간이라면 정말이지 분노할 수밖에 없는
김씨왕조의 잔혹한 인권유린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별 사소한 문제에 인권과 민주주의의 침해라며 거품을 물던 좌파 동기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심지어 북한을 옹호하며 이러한 작품들이 보수세력들이 날조한 것 같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거칠게 반박하며 따지고들자 그들은 한국의 군사정권이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도 크게
다를 바 없다며, 정말 중요한 것은 통일이고 평화라고 나에게 강조했다.
 
나는 너무나 황당했다.
한국의 인권 현실이 아무리 열악하다 한들 그것을 어떻게 북한에 비할 수 있으며, 나아가
북한 인권없는 통일 논의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인가.
아아, 나는 그 순간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들에게 인권과 민주주의는 실상 우리 정부를 비난하고 자신들의 왜곡된 신념을 지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10대 시절의 철없는 분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진정한 ‘분노’를 그들에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좌파 사상을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웠다.
 
좌파에서 빠져나온 지금은 어떻냐고?
비록 완벽한 상위권 대학에 다니지 못하고, 엄청나게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너무나 행복하다.
10대 시절의 어리석은 분노에서 빠져나와 생산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고,
내가 태어난 이 세상이 얼마나 행복한 세상인지 알게 되었으며,
자유 민주주의적 질서를 지켜나가고 발전시킨 분들에게 감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우파로 전향하면서 ‘내가 노력하면 변할 수 있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조금 힘들지 몰라도 나는 그래서 매일매일이 즐겁다.
 
현수환(23·대학생/대상 수상자) hard-boiled@naver.com


승인 2018.07.09 16:00
 
 
 
<각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전교조(全國敎職員勞動組合) 세력에 세뇌洗腦 당했습니다
우리의 불찰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나라의 다음 세대들을
의로움으로 구하고 사랑으로 끌어안읍시다
자유와 민주를 지향하며 우익右翼으로 동행同行 합시다

===
<나의 좌파 탈출기>광우병 선동에 속던 나, 색안경 벗었다[전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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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호
2018. 8. 2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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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탈출기②최우수상
 
 


고향인 전라도 특성상 좌파 이념이 자연스럽게 유입 …투철한 좌파의 전사로 양육
좌파였을 때 세상 바라보는 눈, 항상 증오·분노로 가득
…세상 바로 볼수 없어
우파로 돌아선 뒤 주변의 차가운 시선에 고독감과 소외감 느끼기도
색안경을 쓰지 않고 공부하면 할수록 우파사상이 진리에 가까움을 느낀다
 


최우수상 수상자 전명수 씨.
안녕하세요 전라북도 전주에 사는 20대 청년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조금 유별나게 역사, 사회, 정치적 거대담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국사과목만은 항상 만점을 맞았고 뉴스, 신문은 매일 꼬박꼬박 보며 저의 생각을 정리하고
가치관을 정립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라도 특성상 좌파 이념이 자연스럽게 유입되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사회(지역) 분위기는 물론 학교에서 조차 우파는 기득권, 요즘말로 적폐세력이라 가르치며
논술 공부한다는 미명 하에 좌파언론의 사설만을 제시하고
근현대사 시간에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도 서슴없이 틀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투철한 좌파의 전사로 양육되었고 2006년 지방선거에 좌파의 참패와
17대 대선 당시 정동영 후보의 패배로 인해 우파에 대한 분노가 싹트고 있었습니다.
 
때는 2008년 광우병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학교는 광우병 찌라시가 돌아다녔고 저 역시 우파가 틀렸다는 것이 입증된 것 마냥 희열감에
촛불시위에 나가 '이명박 아웃'을 외치고 다녔습니다.
주변사람들에게도 광우병 사태에 대해 선동을 하고 다녔고 동생에게 “이명박이 광우병 걸린 소를 수입해서 우리 다 죽이려 한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때 동생은 저에게 “형. 정신 차리고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봐 이명박이 사이코패스야?
전 국민을 광우병으로 죽이게?
형은 그냥 이명박이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했고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진실을 쫓아왔던게 아니었습니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나의 가치관, 이데올로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상대의 단점을 파헤치기 위해
공부 해왔고 행동했으며 이를 통해 나는 정의롭다 진실을 추구한다고 위안을 삼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제 동생은 정치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항상 비판적 사고를 할 줄 알며 상식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성향인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내가 생각해 왔던 진리, 정의가 틀릴 수도 있음을 깨닫고
모든 면을 새롭게 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가치관을 정당화 하는 수단의 공부가 아닌 진실추구를 위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모든 것을 부정해야 했기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초기에는 외교, 안보는 우파-민생은 좌파라는 저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있을 무렵
사회적으로 무상급식 논쟁이 떠오르고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과 싸울 때의 일입니다.
 
저는 저소득층으로 무상급식을 받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전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못했고 무상급식은 복지를 확대해 복지 사각지대를 챙기는 모습이 아니라 중산층, 상류층이 저소득층에게 가는 복지에 자기들도 한발 들여놓겠다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민주당은 무상급식이 좋다고 선전하며 투표 독려 운동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는데 항상 투표참여, 선거연령 하향을 주장하는 민주당이 자기들 불리할 때는 투표 거부 운동을 하는 모습에 신물이 나고 민생 또한 우파가 잘하며 좌파들은 이용할 뿐이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저는 완전히 좌파에서 탈출하여 우파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진실이 무엇인지 무엇이 맞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좌파는 위선적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으로 ‘인간 개개인은 신 앞에 선 단독자’로써 개인주의와
자기책임, 자유주의 사상을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한없이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인간의 힘(생각)으로는 절대 이상향을 만들 수 없고 인간이 임의(의도)적으로 세팅하고 계산(계획)한 이상향은 위험할 수 있음을 현재 포스트모더니즘, pc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진리를 사수하는 모습에 우파와 기독교적 가치관은 닮은 점이 많음을 알았고 공부를 할수록 저의 원래 내면 깊은 가치관은 우파에 적합 했구나를 느낍니다.
 
하지만 우파로 전향한 현실은 냉혹하고 고독했습니다.
예전에는 주변사람들과 정치, 사회적 이슈를 이야기하면서 서로 단합하고 하나가 됨을 느꼈지만
이젠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서로 단절되고 멀어져만 갔습니다.
전라도에서 그것도 청년이 우파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자체로 저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고
제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해도 조금이라도 수가 틀어지면 들으려 하지를 않아
조금씩 정치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러 사례가 있지만 최근에 문재인의 거짓평화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 하면서 “북핵이 폐기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핵, 북한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이 김정은과 악수하고 평양냉면 먹으면 평화가 오는 거야?”라고 했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전 국민이 평화를 염원하고 바라는 상황에서 찬물을 끼 얹으려는 이유가 뭐야?

보수정권은 못한 일을 문재인 대통령은 해냈으니까?
너 소시오패스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소시오패스가 무슨 말인지는 모릅니다.
소시오패스를 반사회적 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사회성이 결여됬다는 말인 것 같은데 좌파들은 공감능력만 있지 이성과 논리는 없고
전부 저런 식으로 생각하고 개인이 부재 하는가보다 라고 웃으며 넘겼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생각을 변화시킬까를 고민하던 중 저는
조금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가게 되었고 나이가 많아 걱정을 하였지만 나잇값 때문이라도
나름 성실히 군생활을 하였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후임들에겐 그냥 선임이 아닌 나이도 많고 의지할만한 선임으로 간부들에겐 성실하고
믿을만한 분대장으로 인지(?)되었고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귀 기울이고 행동의 변화도 보였습니다.
저는 군종병으로 교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다른 때(이전) 보다 그리고 다른 중대에 비해 교회로 많이 전도되고 후임들이 잘 따랐습니다.
군대에서 여러 가지 많은 것을 배웠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변하면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 주는구나 나를 좀 더 발전시키고 성실히 살아야겠다를 느꼈습니다.
 
저는 전역 후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기에 우선 사회에서 평가하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헬스도 하면서
나름 몸과 마음 정신을 가꾸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제 자신에게 자신감이 생기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정치적 이야기를 할 때 마음속을 후벼 파는 듯한 공격적인 말을 주로 했지만 이젠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서 어느 정도 인정도 해주고 반박을 하니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도 보이고
그냥 평범한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그 사이에 좌파의 잘못된 점을 삽입시키면서 이야기하니
거부반응도 없는 것 같습니다.
몇 명은 우파적 마인드로 변화시키는데 성공도 했습니다.
 
제가 좌파였을 때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항상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서 세상을 바로 볼 수 없었고
또한 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항상 바깥에 탓을 돌리며 발전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좌파에서 탈출하여 우파가 된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고 나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시키니 내 삶이 바뀌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책임의식이 생기고 나 자신에게도 자부심, 자신감이 생기며
좌파였을 때는 나의 사상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공부해 왔지만
색안경을 쓰지 않고 공부하면 할수록 우파사상이 진리에 가까움을 느낍니다.
 
아직 좌파에서 탈출하지 못한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좌파의 사고방식만이 진리라 생각해왔고 우파는 무조건 악으로 여겨왔기에 변화하는데
힘이 들것입니다.
요즘같이 좌파 광풍시대에 주류에 편승함에서 오는 평온함을 벗어나기 싫을 수도 있겠네요.
내 현실이 못마땅하다면 나 자신을 변화시켜 보세요.
사회탓 남탓만 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세상과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처음에 시작 할 때는 좌파가 무조건 맞고 우파는 틀리다는 생각을 버리고 왜 우파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에서 고민해보면 우파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할 것이고
어디를 지지하건 적어도 무조건적 맹목적인 지지는 하지 않을테니
그 이후에 좌파, 우파를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전명수(27·대학생/최우수상 수상자) veritas9271@naver.com


===
<나의좌파탈출기>삼성전자 친구 보며 노무현·문재인 버렸다

2018. 8. 25. 10:57
[남택동] …좌파탈출기③우수상
 
"대학 자퇴…과외교사로 오랜시간 활동 '일반적 삶'에서 스스로 멀어졌다"
"불안·패배감 우울의 절정에서 삼성전자 다니는 고교동창 치열한 삶보며 반성했다"
"이론-논리-통계로 설득되는 사람은 이미 좌파 아니다…그래도 우리는 답을 찾을 것"  

우수상 수상자 남택동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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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79년에 경기도 성남에서 태어나 27년간을 살다가 지금은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습니다.
98년도에 아주대에 입학했어요. '
대리 출석'이 만연했고, 매일 갖은 핑계의 술판만이 기억납니다.
공강 시간에 도서관 가다가 만난 선배에게 '요새 1학년은 왜이리 공부를 열심히 하냐'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씁쓸했던 기억이 나네요.
대학교에서 처음 치른 '공학 수학'시험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옆에 앉은 내가 느낄 정도로 주위 사람들은 컨닝을 했지만 언젠가 술자리를 같이 했었던
조교 형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최근에는 논문표절 문제가 이슈인데, 컨닝 같은 것은 누구나 하는 일상의 일이라 괜찮았던 것일까요.
 2차례 학사 경고와 씁쓸한 기억만 남아있는 대학생활은 대우가 망한 것을 핑계 삼아 끝냈습니다.
 
IMF 시기여서 그런지 제 친구들은 유독 군대를 빨리 갔습니다.
대학에 대한 미련도 없었던 저는 순차적으로 군대를 가는 친구들의 술 상대를 수년간 했습니다.
한 놈 들어가고 그 다음 놈 들어가고, 또 다른 놈 들어가면, 한 놈 휴가 나오고.
그렇게 2년 정도 술을 마시니 간에 탈이 나서 정작 저는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를 했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곳은 건강보험공단의 지역 지사였습니다 .
20명 남짓의 직원들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때 건강보험공단에는 노조가 있었습니다.
공기업에 노조가 있다는 것도 의아했지만, 지역 노조, 직장 노조 2개의 조직이 다르다는 것이
더 놀라웠습니다.
각각의 노조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매일 각각의 ‘노조 회의실’에서 낮잠도 자고, 차도 마시고,
회의도 했었는데 6시에 칼퇴근 하던 것이 가장 충격이었습니다.
11월부터인가는 동절기 적용으로 5시 퇴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때의 경험 때문에 저에게 있어 노조와 공기업은 방만, 나태의 이미지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즈음 치뤄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을 뽑았습니다.
뚜렷한 정치관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공약을 본 것도 아닙니다.
당시에 인터넷 커뮤니티 여론이나 친구들 여론에 휩쓸려 그냥 뽑았습니다.
큰 고민은 없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술자리에서 오히려 자랑스럽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공익근무를 마치고, 뚜렷한 목표 없이 수학 과외를 통해 돈을 벌고 살면서 2004년 말부터
2010년 7월까지 인터넷과 게임에 빠졌습니다.
하루 2~3시간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히키코모리', '방구석 폐인'으로 지냈습니다.
수많은 밤을 원색적인 욕설이 오가는 '키보드 배틀'로 보내고, 각종 커뮤니티를 돌아 다니면서
수많은 분쟁과 사건 사고를 봤습니다.
그 당시의 경험들로 소위 '박제' 당할 위험도 있고, 인터넷에 쓴 글로 인해 현실에서 사건 사고가
일어날 위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2006년 이후 불특정 다수가 보는 사이트에 글을 쓰지 않고,
쇼핑몰 이외에는 가급적 회원가입도 안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경험들로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일이나 사람을 대할 때 편견 없이 대하는 편입니다.
이러한 깨달음들과는 별개로 현실 속의 저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패배감에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불안, 패배감 등으로 우울함이 절정이었던 2010년 7월 어느 금요일 고교동창 A와 술을 마셨습니다.
삼성전자에 다니던 A는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친화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A가 결혼 전 성남에 살 때에도, 결혼 후 수원에 살면서 성남 본가에 올 때에도 한달에 한 두 번은
밤 10시, 11시에 저의 집 앞에서 만나 술을 마셨습니다.
그날도 그렇게 술을 먹다가 A는 와이프가 처갓집에 갔다며 수원 자기집에 가서 한잔 더 하자 하길래
따라가서 새벽3시까지 먹다가 잠이 들었죠.
 
그런데 새벽 5시 A의 전화 알람이 시끄러워서 잠에서 깼습니다.
알람을 끄고 다시 자다가 10시쯤 일어나 아침을 먹으면서 A에게 '꼭두새벽에 알람을 왜 맞춰?'라고
구박하듯이 물어봤어요.
 
A는 '평소에 출근 준비 하던 시간이야. 쏘리'라며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거짓말처럼 패배감, 우울함은 사라지고
'이 친구처럼 열심히 부지런히 사는 사람은 대기업 다니면서 잘 살 수 있구나'
'나는 열심히 살아 보지도 않고 패배감에 젖었구나, 나도 다시 열심히 살아보자'라는 생각이 들며
A가 참 자랑스럽고 고마웠습니다.
 
그 길로 바로 취업 준비를 해서 2010년 9월 중소이불회사에 생산관리직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처음엔 생산관리였지만 1년차부터 영업관리 업무, 총무 업무 일부까지 맡으면서, 1년 반 후
주임을 거쳐 대리로 승진했습니다.
회사 생활은 한국통신에서 인터넷 설치 업무, 두산주류에서 전수조사 알바 관리 등을 짧게 나마
해봤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을 줄 알았는데 아주 큰 오산이었습니다.
입사하고 일을 하면서 겪었던 몇가지가 저를 정말 힘들게 했습니다.
 
첫번째는 관리자부터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전부 오너를 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남의 돈 먹는게 쉬운 일이 아니다’란 마인드가 있었기 때문인지 또는 오랜 과외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일자리를 주고 월급도 주는 사람을 욕하는 것이 선뜻 이해가 안됐습니다.
 
일을 해나가면서 이유를 알게 됐는데, 오너는 약간 조급할 뿐 상당히 합리적 사람이었고
욕을 먹을 정도의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중간 관리자들은 업무 조율이나 명확한 지시는 하지 않고 말단 직원처럼 수동적으로
일하려 들고, 말단 직원들도 자기일 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하고 업무에 변화를 주면 적응을 못하는
 (당시의 제 생각에는 일부러 안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자기들 일이 힘드니 저보고 노조를 만들어 오너와 관리자에게 대항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많이 힘들어서 그러는가 보다'라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그냥 웃으며 넘겼지만, 나중에는 저를
총알받이로 세우고 뒤에 숨으려는 무책임한 태도에 질려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세번째는 부도덕한 행태입니다.
생산관리를 할 때 재고가 맞지 않아 수차례 창고 정리도 하고 전산 작업도 하며 고생했는데,
동료 몇몇의 집들이를 갔을 때 포장도 뜯지 않은 우리 제품이 장롱 뿐 아니라 한쪽 구석에
쌓여있는 것을 보고 재고가 맞지 않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수동적이고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행태들을 보며 '가난한 자는 선, 부자는 악'이라는
생각도 버리게 되었고, 이런 환경에 적응해가는 제 모습이 싫어서 2013년 초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2012 대선에서는 문재인을 뽑았습니다.
제가 보던 인터넷 여론과 회사사람들은 물론 제 친구들까지 모두 그랬으니까요.
지금 다시 생각하면 제 스스로도 웃긴 것이 그 회사 사람들의 모습이 싫어서 회사를 그만 뒀는데
투표는 아무 생각없이 그들처럼 뽑았네요.
 
회사를 그만두고 주식 전업 투자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지인의 권유로 주식 투자를 할거면 다양한 정보가 필요할 테니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일할 수 있는 보험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기왕 시작한 거 제대로 해보자!'라는 마음 반, 대학을 못 마친 자격지심 반으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명함 열심히 돌리고 다니기 시작한 2013년 말쯤 고등학교 친구 B에게
일간베스트와 정규재tv를 한번 보라는 소개를 받았습니다.
개업 약사인 B는 깐깐한 꼰대 스타일이라 쉽게 친해지기는 힘들지만 뭔가를 파면 전문가 수준으로
깊히 있게 파서 신뢰할 수 있는 친구입니다.
B에 대한 신뢰감과 편견 없이 새로운 것을 대할 수 있다는 제 나름의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일간베스트는 너무 거부감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을 만나려면 온갖 것들을 견딜 수 있어야 된다는 마인드로,
'그저 공부다'라는 마인드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모독, 비하, 욕설의 대상(이 부분은 대상이 박정희, 이명박, 박근혜에서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상만 바뀌었을 뿐 10년전부터 다른 사이트에서 충분히 많이 봤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런 것들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을 제쳐놓고 보기 시작하니 역사관, 경제관, 세계관 등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제가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한 검증을 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정규재 tv의 다양한 영상들과 tv토론들을 챙겨보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공부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저는 대학시절 경험한 편법과 꼼수가 만연한 사회가 아닌
개개인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공정한 법치국가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공익 시절 경험한 방만한 공기업, 나태한 노조들에 의해 몰락한 세계 여러 사례들을 통해
자유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작은 정부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사회생활을 통해 우리사회 전반에 걸친 정치적 올바름,
언더 도그마 등의 군중심리에 함몰된 무책임,
무정견의 집단주의가 아닌 독립적인 주체로서 개인주의, 자유주의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친구 A, B 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과 저의 가족이 있는
우리나라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혼자서 빠져나가면 그냥 도망 아닌가?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치지는 말자!'라는 개똥 철학이 문득 떠올랐고
이때부터 저의 본격적인 좌파탈출기를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 의욕과는 다르게 초반부터 벽에 부딪쳤습니다.
공부한 이론, 논리, 통계 등으로 얘기를 나누고, 제 사고방식으로 대화를 하다 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너 일베충이지?'였습니다.
 
특히. 저에게 삶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열심히 살아갈 동기를 준 친구 A가 소위 '강남좌파'가 되어
원색적인 비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십 몇 년 만에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 아프네요.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견문도 얕았고, 토론 스킬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더욱 필사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해외 여행,
국내 여행도 많이 했습니다.
 
토론 스킬도 부족해서 정규재 선생님이나 여러 우파 논객 분들의 영상도 보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쉽지는 않았어요.
대부분 술자리에서 술안주 삼아서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니
명확하게 설명하기도 힘들고 쓸데없는 감정 싸움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그냥 식사 자리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초기부터 계속 나온
"너 일베충이지? 니가 일베충이라 그래"라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적어도 제 경우엔 이론, 논리, 통계 등으로 설득되는 사람이면 이미 좌파가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전 요새 이론, 논리, 통계는 알아서 찾아보라고 하고 될 수 있으면
가볍게 웃을 수 있는 농담이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화두를 던지려고 노력합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에겐 어벤저스3 번역 논란을 예로 들어
"'이미 끝난 게임'이 아니라 '계획의 마지막 단계'인데 번역 한 줄로 영화의 색깔이 완전히 바꼈잖아.
니가 아는 현재 대한 민국 상황은 좋은데 왜 나는 안좋다고 생각할까?" 
게임을 좋아하는 친구에겐 스타크래프트2를 예로 들어 "신경삭이 오염 되어 있네!
jtbc라는 신경삭을 짤라야 돼!" 이런 식으로 언론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에겐 "필리핀 마닐라 갔더니 5성 호텔을 기관총 들고 지키고 있고,
50미터 정도 나오니까 헐벗은 어린애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구걸하고 있더라.
예전에는 우리나라보다 잘살았다는데 마음이 안 좋더라."
이런 식으로 역사관,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있습니다.
 
비교적 상대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진행하니 듣는 상대도 상대적으로 예전보단
 편하게 듣는 느낌입니다.
2016년 말부터 이어진 일련의 사태들과 이미 수 년 전부터 경고 하셨던 대기업의 엑소더스,
GM사태 등등을 보며 잊고 있었던 좌절감, 알 수 없는 패배감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도
'내가 그릇된 가치관, 생각을 가진 것을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많은 위안을 얻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그냥 도망이 아닌, 싸울 힘을 비축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베트남 진출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철이 없고, 공부해야 할 것도 많은데, 낯선 땅에서 새로운 시도까지 하려니 정답도 없고,
참 많이 두렵습니다.
그래도 영화 인터스텔라 대사처럼 "우리는 답을 찾겠죠. 늘 그랬듯이"
 
20년전 대학 입학 논술 이후에 장문의 글을 써본 것은 처음이라 너무 어색하고 어렵네요.
저에게 지식과 용기를 나눠 주신 정규재tv에 큰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열심히 써봤습니다.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남택동 씨(40·개인사업/우수상 수상자) want2happ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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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좌파 탈출기>찌라시로 만든 '국정농단'…좌익독재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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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호
2018. 8. 2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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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좌파탈출기④장려상
 
 

"우파 찾기 힘든 대학 캠퍼스…나 역시 좌파로 살았다"
"운동권 선배들의 가짜 정의감에 매료…편향된 세계관 형성"
지방출신, 자취로 스스로 책임지는 삶 배우며 우파 가치관 관심
2016년 국정농단 촛불시위 나가는 친구들 수준보고 확실히 전향
"다수라는 파도에 맞설 용기…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 확인"  

장려상 수상자 김시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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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졸업을 앞두고 있는 20대 대학생 남성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대학생이 우파인 경우는 찾기 힘듭니다.
대학에서는 워낙 좌편향적 풍토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교수들도 친구들도 모두 좌파입니다.
물론 저도 남들과 뇌 구조가 특별히 다르지 않은 평범한 대학생이라 영락없이 좌파로 청춘을
보낼 뻔했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우파로 돌아서게 되었는지에 대해 자기 분석한 이야기를 공유하려고 합니다.
 
저의 20대 초반은 대학에서의 좌파 이념에 대한 흠모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저희 대학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의 인문학 강좌들이 필수 교양 과목이었고,
교수들도 대부분 좌익적 성향을 띠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저는 좌익적 가치에 매료될 수 밖에 없었죠.
 
저는 교과 과정을 넘어 맑시즘, 페미니즘 등을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반기업적, 반기독교적,
PC적 정서를 체득했고, 좌파 이념의 충실한 졸병 말로 거듭났습니다.
생산활동도 제대로 해보지 않았지만 노동자에 행해지는 자본권력의 갑질이 무엇인지 아는 것만
같았고, 연애도 결혼도 해보지 않았지만 남성 젠더권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고통을
공감한다는 듯한 오만한 착각에 빠져 살았습니다.
 
캠퍼스 안에서만 생활했으니 제 편향된 세계관은 어떠한 도전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평등주의에 집착할 수록, 저 같이 충실한 좌익이 많을수록 세상이 정의로워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머리띠를 두르고 화염병을 던지고 각목을 휘두르다가 전경들에게 양팔이 묶여 연행당하는 와중에도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끌려가던 운동권 세대 선배들의 정의감(으로 포장된 이미지)을
간직하겠다는 허황된 의지를 품고 몇 년 간 대학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 무의식 한 구석에는 우파적 자아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영양분은 바로 자취 생활이었습니다.
 
저는 고향이 지방이기 때문에 대학 입학 때 상경해 지금까지도 혼자 살고 있습니다.
물론 부모님으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해서 완전한 독립이라고 하기엔 좀 민망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가족들과 물리적으로 단절되어 홀로 자취방에 남았을 때 느꼈던
그 고독감을 잊지 못합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생활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저는 낯선 서울 환경에 대비하기 위해 스스로를 무장해야 했습니다.
밥해 줄 사람이 없으니 요리법을 공부했고, 돌연 쓰러지면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꾸준히 운동을 했고,
달마다 관리비를 내야 하니 틈틈이 돈을 버는 방법도 익혔습니다.
가정이란 보호막 없이 살다보니 크고 작은 문제들이 어떠한 필터에도 걸리지 않고 곧장 저에게
부딪혀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해결해나가는 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에 대한 신뢰감을 탄탄히 길렀습니다.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해도 경쟁 과잉의 대학교육 시스템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취업 면접에서 떨어져도 나의 능력을 알아봐주지 못하는 면접관들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저는 인생에 대한 주인의식이 투철했고, 자기 안에서 해결책을 찾는 연습이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취 생활은 ‘내 인생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모토(물론 좌파였을 때는
저런 류의 문장을 떠올린 적이 없었습니다)를 온몸으로 체감시켜준 계기입니다.
훗날 제가 우파적 이념을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길러졌던 우파적 마인드가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좌파 탈출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16년 촛불 시위 열풍입니다.
국정 농단 사태로 나라가 한창 떠들썩할 때였습니다.
대한민국이 빠르게 좌경화되어가는 것에 하루하루 놀랐습니다.
대학 캠퍼스에서는 그 속도가 세 배쯤으로 느껴졌구요.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학교에서 나가던 중, 광화문 촛불 시위 참여 계획을 짜는
그들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저도 물론 그들이 시위에 간다면 같이 따라갈 의향이 있었습니다.
'보수 정권은 타도의 대상’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국정 농단에 대해서 토론을 하던 그들의 대화를 오랫동안 듣고 있자니,
아무도 제대로 알고 나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
저 사실관계도 검증 안 된 찌라시 뉴스들을 들먹이며 그들이 박근혜 정부에 분노해야 할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했죠.
 
친구 중 한 명이 저에게 넌 촛불 시위에 안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문득 생긴 궁금증을 풀어 반문했습니다.
우리가 시위에 나가는 목적이 올바른 사실관계에 의해 정당화되는지 생각부터 해봐야하는 건
아니냐고요.
그게 전제되지 않는다면 내 개인 시간을 써가면서까지 시위에 나갈 만한 정치적 절박함을
느낄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요.
 
제 대답을 듣던 친구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발전이 안 되는 거야'라고
한 마디 무심하게 뱉었고, 다른 친구들도 비웃듯이 그에 동의했습니다.
아무도 저에게 촛불 시위에 나가야하는 납득 가능한 설명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광화문으로 갔고, 저는 자취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는 광화문으로 향하던 친구들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좌파로 살던 저의 뇌구조를
처음으로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좌파적 세계관이 붕괴되며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저 어두운 광화문에서 벌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에 섞이고 싶어하는 저들이구나.
어둠을 몰아내고 정의를 쟁취해내는 비장한 전율을 느끼기 위해 몰려다니는 저 친구들이 곧 나구나
저들이 손에 쥘 촛불은 진실 없는 공허한 정의겠구나.
그런 정의감에 이끌려 행동하는 사람들, 지적 허장성세를 좋아하고 자기검열을 상실한 사람들,
분노를 위해 분노하는 사람들을 키워내는 게 좌익 세뇌 교육이구나라고요.
그 날 저는 '좌익 독재'가 무엇인지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저의 좌파 탈출은 좌파 친구가 무의식적으로 툭 던진 말을 트리거로, 여러 생각들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고흐름은 어쩌다 운 좋게 일어난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대학 입학 때부터 고독감을 삶의 일부로 안으며 살아왔고,
개인에게 닥친 문제들을 고독하게 해결해내면서 우파 친화적인 사고회로가 발달했던 탓입니다.
 
다수라는 파도에 떠밀려가지 않을 용기,
다수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용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저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 때 확인했던 것입니다.
 
김시민(27·대학생/장려상 수상자) syukran@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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