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7

‘그림자 통치’와 기득권 카르텔 - 에큐메니안

‘그림자 통치’와 기득권 카르텔 - 에큐메니안
‘그림자 통치’와 기득권 카르텔민중신학자의 눈으로 세상 읽기 (35)강원돈(길마루글방지기/민중신학과 사회윤리) | 승인 2021.12.13 16:10댓글0icon트위터icon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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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부처 관계자들은 단순한 공무원이 아니라 기득권 카르텔이다. ⓒJoe Gough / NBC News
다시 고개를 쳐드는 파시즘

파시즘이 다시 한국 사회를 어두운 그늘로 덮어가고 있다. ‘다시’라는 말을 쓴 것은 파시즘이 한국 사회를 휩쓴 적이 이미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파시즘은 멀리 식민지 파시즘 체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제국의 체제와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엄중한 사상 통제, 식민지 주민의 공민권 제한, 광범위한 수탈과 착취에 바탕을 둔 식민지 자본주의 경제, 전쟁 총동원 체제 등이 식민지 파시즘의 주된 징표들이었다. 가까이는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국가권력을 찬탈한 뒤에 가난을 타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위로부터 경제개발을 주도하던 시기에 파시즘 체제가 강력하게 구축되었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고, 관치금융체제를 구축하고, 경제적 자원을 수출산업과 수출 대기업에 집중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을 압살하고, 시민의 기본권과 참여권을 억압하는 일이 파시즘 체제의 문법이었다.

한국 사회에 파시즘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은 사회에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한 바로 그러한 일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신자유주의 체제는 사회적 양극화를 날로 악화시키고, 민주주의의 기반을 침식하고, 마침내 파시즘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깃든 파시즘은 식민지 파쇼체제나 군사적 파쇼체제와는 다른 외양과 형식을 갖는다. 불공정을 공정이라 하고, 몰상식을 상식으로 둔갑시켜 대중의 판단력을 혼돈으로 끌고 들어가는 파시즘 특유의 선전과 선동은 어디 다른 데로 간 것이 아니지만, 식민지 파쇼체제와 군사적 파쇼체제에서 ‘날 것’의 폭력을 앞세웠던 전형적인 폭압 정치는 금융기술, 법률 공학, 관료지배, 언론조작 등을 통해 극우 기득권 세력의 권력과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통치 전략으로 대체된다. 그러한 통치 전략이 연성 파시즘의 특징이다. 선출 권력이 연성 파시즘의 사령부가 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연성 파시즘은 금융, 재벌, 법률, 행정, 언론 등 여러 분야의 선출되지 않은 전문적 엘리트가 선출 권력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권력과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사회와 국가를 지배하는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러한 엘리트 지배를 가리켜 ‘그림자 통치’라는 용어를 쓸 것이다.(1)

신자유주의 체제가 파시즘의 온상이 되는 사례는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다. 신자유주의의 요새인 미국에서는 트럼프주의(Trumpism)가 맹위를 떨쳤다. 트럼프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희생자들로 꼽히는 구(舊) 산업 지역의 백인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을 선동하여 백인우월주의와 보호무역주의 구호로 묶어 세우고 극우 기독교 세력을 동맹군으로 삼고서 극우 선동 정치를 벌였다. 2020년 11월 미연방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가 패배한 이후에도 트럼프주의는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폴란드, 헝가리, 브라질 등지에서는 극우 반동 정권이 들어섰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최대 수익자들이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 구사하는 파시스트 지배가 어처구니없게도 그 체제의 최대 희생자들인 노동자들, 청년들, 노인들, 실업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그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연성 파시즘의 정치경제학적 배경: 금융화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공고화

신자유주의 체제는 연성 파시즘의 배경이고, 그 바탕이다. 이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한 권의 책을 써도 부족하겠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 측면을 개괄적으로 서술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이해관계들을 조정하면서 국민적 이익을 최대화하는 전통적인 국가의 기능을 무력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이해관계를 최대화하기 위해 국가기구를 도구화한다. 그러한 국가의 퇴각과 재구성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금융화였다. 미국에서 금융화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한 뒤에 1970년대 중반부터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영국을 위시하여 유럽 여러 나라가 그 뒤를 따랐다.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등지에서는 IMF, 세계은행, 미연방 재무부가 주도하여 금융화 전략을 집대성한 「워싱턴 컨센서스」에 따라 금융화가 강제되었고, 우리나라는 1997년 IMF의 금융신탁을 받으며 금융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갔다.

금융화는 국가의 엄격한 관리 아래 놓여 있었던 금융자본이 국가의 통제를 무력화하는 과정이고, 금융자본의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실을 사회화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이다.(2) 금융자본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교조화하고, 재정 건전성의 교리로 정부의 손을 묶었다. 신용화폐 제도의 운영과 감독은 전적으로 금융자본가들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정부는 예산 제약에 묶여 긴축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정부는 사회적 통합과 복지 증진을 소홀히 하고, 교육, 의료, 주택보급 등을 위한 지출을 줄임으로써 결국 가계부채를 천문학적으로 증가시켰다.(3)

금융화는 금융자본의 생산자본에 대한 지배와 수탈을 공고히 하고 자본의 노동 수탈을 극단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금융자본의 수탈 아래 놓인 큰 생산자본은 작은 생산자본을 수탈했다. 이 무미건조한 문장의 의미를 생생하게 파악하려면, 재벌을 구성하는 대기업들이 소유지분에 따른 배당을 어느 정도 규모로 털어내는지, 그러한 대기업들이 하청 기업들에 돌아갈 몫을 얼마큼 가혹하게 수탈하는지를 들여다보면 된다.

금융자본의 지배와 압력 아래서 자본은 노동시장을 분할하고, 노동 수탈을 강화한다. 재벌 계열사들과 공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특권화되고, 그곳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과 똑같은 직무를 수행하더라도 임금 차별을 당하고, 고용 불안정에 시달린다. 큰 생산자본의 수탈 아래 놓이는 작은 생산자본의 사업장들에서 노동 임금, 노동조건, 고용 형태 등은 노동법과 근로기준법의 보호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특수고용노동자들과 플랫폼 노동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노동시장 분단은 노동자들의 연대와 단결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을 형성하고, 자본의 노동 포섭에 맞설 수 있는 노동자들의 권력 형성을 근본적으로 제약한다. 노동자들은 그들을 수탈하는 신자유주의 체제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다.

연성 파시즘의 문화적 배경: ‘공정’과 ‘능력주의’의 신화, 그리고 안티-페미니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연성 파시즘은 승자독식의 세계관을 사람들의 몸에 새기는 사회화 과정을 통해 강고한 헤게모니를 구축한다. 승자독식의 세계관은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을 경쟁에 몰아넣고, 시험기계로 단련시키고, 패자를 승자의 울타리 바깥으로 내쫓고 낙인을 찍는 일을 당연시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적 사회화 과정은 자녀를 승자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정의 총동원 체제를 통해서, 「오징어 게임」이 극적으로 보여주는 승자독식 게임과 엔터테인먼트를 통해서, ‘자기착취’로 치닫는 업적경쟁을 통해서 빈틈없이 이루어진다. 시험을 통해 능력을 평가하고, 그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소득을 결정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관념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 것은 신자유주의적 사회화 과정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인천공항공사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반대한 것을 보면, 신자유주의적 사회화가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내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약과이다. 평범한 노동자의 임금과 그것의 수백 배에 달하는 경영자의 보수가 능력에 따른 격차라고 주장하는 ‘능력주의’가 ‘공정’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면, 한 사람의 능력이 역사적으로 축적되고 사회적으로 조직되는 지식과 기술의 인프라를 매개로 해서 발휘된다는 사회학적 사실은 부정된다. 능력주의가 공정의 잣대가 되는 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의 카르텔은 능력 없는 ‘개와 돼지’의 집단으로부터 분리되어 그들만의 ‘성채’를 구축한다. 금융, 재벌, 법률, 행정, 언론 등의 분야에서 ‘능력’ 있는 엘리트로 구성되는 기득권 카르텔은 능력주의에 포획된 사람들이 넘볼 수 없는 굳건한 성채이고, 그것이 연성 파시즘의 보루이다.

연성 파시즘은 한정된 사회적 재화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투쟁을 격화시키고, 사람들 사이의 반목을 극적으로 확대한다. 안정되고 소득이 높은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은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급기야 젠더 갈등과 세대 갈등을 악화시킨다. 그러한 분열과 갈등 가운데서 가장 딱한 것은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남성들의 사회적 기회를 줄인다고 단정한 남자들 사이에서 거의 일베 수준의 안티-페미니즘 구호가 터져 나오고, 거기 대응해서 메갈리아 수준의 남성 혐오주의 구호가 확산하는 현상이다. 젊은이들이 여성과 남성 진영으로 갈리지 않고 서로 힘을 합쳐서 그들에게서 사회적 재화의 배분에 참여할 기회를 체계적으로 빼앗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분쇄하려고 나서도 모자랄 판인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극단화하는 전략으로 사람들이 서로 결집할 기회를 체계적으로 분쇄하고, ‘공정’과 ‘능력주의’를 신조화하는 멘탈리티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 넣어 사회적 격차와 불평등에 순응하도록 훈육한다. 그러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사회정치와 문화를 배경으로 해서 연성 파시즘이 번창한다. 만일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사회적 재화의 분배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는 패자들의 불만과 공격성이 점점 더 커지고, 사회적 참여와 통합의 기회를 확대할 능력이 없는 정부와 집권당에 대한 저항이 점점 더 드세진다면, 연성 파시스트 세력은 선출 권력을 중심으로 폭압적 성격을 더 강화하는 길을 찾을 수도 있다.

이병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에서 나타난 연성 파시즘의 형태

우리 사회에서 연성 파시즘은 선출 권력 아래서 체계적으로 구축되기도 했고, 선출 권력을 무력화하는 ‘그림자 통치’의 형태로 관철되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은 선출 권력이 연성 파시즘의 교두보가 된 생생한 예이다. 이명박 정권은 방송통신위원회를 장악한 뒤에 언론 권력이 신자유주의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고 극우세력의 세계관을 전파할 수 있는 역량을 한껏 키워주었다. ‘비지니스-프렌들리’ 정권을 자처한 이명박 정권의 가장 큰 목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해서 기업사회의 모델을 한국 사회와 정치의 모든 영역에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토지 개발과 국토 개발 등을 통해 개발이익을 독점하는 특권 카르텔을 공고화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검찰 권력의 정치화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이명박 정권 시기의 한 특징이다.

박근혜 정권은 보수 언론의 엄호를 받으며 검찰 권력을 움켜쥐고, ‘사법 농단’을 서슴지 않는 방식으로 사법부와 헌법재판소를 장악하고, 정권의 세계관에 따라 군부독재와 위로부터의 산업화를 미화하는 방식으로 역사 교육을 디자인하고,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정당을 해산하는 등 전형적인 파시즘 통치의 사령부 역할을 했다. 박근혜를 중심으로 한 파벌 투쟁이 극단에 이를 정도로 집권당의 퇴행이 극심해지고, 금융-재벌-관료-군부-언론-검찰 등으로 구성된 기득권 카르텔의 이익균형이 한계에 봉착하자 박근혜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국정농단’ 혐의로 탄핵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박근혜가 탄핵을 당해 물러났지만, 기득권 카르텔이 해체되지는 않았다. 기득권 카르텔은 노골적인 파시즘 통치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림자 통치’ 전략을 구사했다.

문재인 정권에서 나타나는 연성 파시즘의 형태: ‘그림자 통치’

혹자는 문재인 정권이 노무현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문빠’ 혹은 ‘대깨문’의 감정에 기대어 ‘연성 파시즘’을 획책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그것은 문재인 정권에서 나타나는 연성 파시즘의 본질과 현상형태를 잘못 짚은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연성 파시즘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선출 권력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관철되고 있는 기득권 카르텔의 ‘그림자 통치’를 들여다보고,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하여야 한다.

‘국정농단’에 항의하는 촛불집회는 박근혜의 대통령직 파면을 추동했고,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을 선출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촛불집회의 성과는 거기까지였다. 문재인 정권은 ‘촛불혁명’을 운위하고 ‘촛불혁명 정부’를 자처했지만, 촛불혁명 같은 것은 없었다. 정치 엘리트와 민중을 갈라놓은 1987년 헌정체제가 변경된 것도 아니고, 적폐로 지목된 기득권 카르텔이 해체되거나 분쇄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좌절과 공화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정치 기반의 침식으로 나타났다.

문재인 정권은 ‘노동자 존중’과 ‘소득주도성장’ 같은 듣기 좋은 정책 구호를 내걸었지만, 금융화 조건 아래서 구축된 신자유주의 체제를 제어하기 위해 신용과 재정의 민주적 통제, 노동시장 개혁, 노사협상 제도 개혁, 소득분배 개혁, 기업지배구조 개혁 등에 관한 실효적인 정책들을 제시할 수 없었고, 그 정책들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권력을 제도적으로 강화하는 데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집권당이 의회에서 소수파에 머물러서 민주주의의 실질적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판단한 국민은 2020년 4월 총선에서 집권당의 입법 권력을 대폭 강화했지만, 그 이후에도 문재인 정권은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회피했다. 2020년 11월에 이루어진 ‘전태일 3법,’ ‘기업개혁 3법’ 개정은 문재인 정권이 노동자를 존중하는 정권이 아니고, 경제 민주화를 추진하는 정권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문재인 정권은 사회적 격차와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했고, 코비드-19 상황에서 벼랑으로 몰린 소상공인과 서민의 삶을 지탱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재정 건전성을 방패로 내세운 관료체제의 저항을 분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출 권력이 선출되지 않는 관료들의 권력을 제어하지 못하자, 기획재정부, 산업자원부, 국토교통부 등을 매개로 한 금융-관료-재벌 카르텔이 더 강고해졌다.

문재인 정권은 공화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정치의 기반을 다지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이 침식당하도록 방치했다. 오래전부터 시민사회가 강력하게 요구해 왔던 언론개혁을 포기했고, 검찰개혁도 결국은 포기했다. 독일 같은 나라가 가짜 뉴스를 퍼뜨린 언론사에 6백만 유로의 벌금을 물리는 법제를 마련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도, 문재인 정권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가짜 뉴스를 통해 극우 정치 선동을 일삼는 언론을 방치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한 몸에 통합하고 있는 데다가 기소편의주의로 무장한 검찰의 무소불위 권력을 제어하려면,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 기소법정주의 등 근본적인 제도 개혁으로 나아가면 되었지만, 그것조차 외면했다. 조국, 정경심, 윤미향 등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언론과 검찰이 힘을 합쳐서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철저하게 유린하는 일조차 방치되고, 검찰 조직을 사유화하고 검찰권을 남용하였다고 해서 징계를 받은 자가 수구 언론의 압도적인 지원을 받으며 대통령 후보로 활동하고 있는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문재인 정권이 무능하다고 질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질타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물론 문재인 정권이 대통령 권력과 압도적인 의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공화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정치의 기반을 강화하지 못한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재인 정권이 신자유주의 체제에 포섭된 상태에서 벗어날 역량이 없었기에 나타난 치명적인 결과라고 말해야 정당한 평가일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지배 블록을 형성하고 있는 금융, 재벌, 법률, 관료, 언론 분야의 엘리트들이 ‘그림자 통치’를 관철하면서 선출 권력을 무력화하는 것을 억제할 역량이 없었다. 바로 그렇기에 문재인 정권은 연성 파시즘의 사령부가 아니라, 연성 파시즘의 방관자였다고 지칭하는 것이 바른 판단일 것이다.

지금 유권자들은 매우 어려운 선택 앞에 서 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실시한 다양한 여론조사에서 정권 교체 여론은 55% 가까이 되어 정권 재창출 여론보다 거의 20% 가까이 높다. 정권 교체 여론이 높은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다. 기회의 평등, 절차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내세운 문재인 정권이 신자유주의 체제 앞에서 보인 무능력에 대한 비난,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정권 실세들에 대한 집요한 도덕주의적 비난과 공격 등이 정권 교체 여론을 강화하는 데 주효한 것 같다. 일자리, 소득, 복지 등 사회적 재화의 분배에 대한 불만, 사회적 격차와 불평등 심화에 대한 분노, 특히 부동산 가격 폭등과 자산 격차에 대한 절망과 분노 등이 정권 심판론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정권 교체를 부르짖는 야당의 대통령 후보는 최저임금제 폐지, 주 120시간 근무, 산업재해에 대한 경영진 책임 소추의 폐지, 기업 규제의 대폭적인 철폐, 경영 전권의 보장 등을 약속하면서 신자유주의 체제보다도 더 못한 야수적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나섰다.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로드맵을 흐트러뜨리고, 원자력 발전을 탈탄소 경제의 핵심으로 삼겠다고 외친다. 대통령 후보를 둘러싼 정치세력은 극우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능력주의를 공정의 잣대로 내세우고, 안티-페미니즘을 공공연하게 선전한다. 차기 정권을 연성 파시즘의 사령부로 삼겠다는 태세가 이보다 더 분명할 수는 없다.

사회적 양극화, 불평등, 자산 격차 등에 분노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집권한 선출 권력이 연성 파시즘의 사령부가 되게 하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되면, 공화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정치는 더욱더 후퇴하고, 금융, 재벌, 관료, 언론, 검찰 등으로 구성된 기득권 카르텔의 성채는 난공불락이 될 것이다. 폴란드, 헝가리, 브라질 등지에서 극우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에 나타난 일련의 정치적 퇴행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금융화에 맞서서 금융과 재정의 민주화를 이루고, 자본의 노동 포섭을 해체하고, 사회적 통합, 복지의 증진, 생태계 보전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득권 카르텔의 연성 파시즘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적인 시민들과 사회세력들이 힘을 합쳐서 이루어야 할 역사적 과제이다. 2022년 3월 9일의 대통령 선거가 우리의 정치사에서 중요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미주
(미주 1) ‘그림자 통치’는 필자의 용어이다. ‘그림자 통치’에 가까운 개념으로는 미국 정치학자들이 고안한 ‘deep state’가 있다. ‘Deep state’ 개념에 대한 학술적인 논의로는 Mike Lofgren, The Deep State: The Fall of the Constitution and the Rise of a Shadow Government (New York: Viking, 2016)를 참고하기 바란다. 필자는 음모론에서 프리메이슨, 빌더버그 회의 등을 지칭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는 ‘그림자 정부’ 개념에 대해서는 비판적 거리를 취한다.
(미주 2)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라는 금융화의 모순적 측면은 2008년 전세계를 뒤흔든 금융위기의 발발과 수습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미주 3) 국제금융협회(IIF)의 「세계 부채(Global Debt)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2분기의 우리나라 가계부채 비율은 GDP의 104.2%에 달한다. 이것은 OECD 국가들에서 최고 수준이다.
강원돈(길마루글방지기/민중신학과 사회윤리)  kwdth5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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