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8

高暻兌 著 『ベトナム戦争と韓国 そして 1968』(人文書院 2021) 波多野 淑子

《新著紹介》
高暻兌 著、平井一臣・姜信一・木村貴・山田良介 訳
『ベトナム戦争と韓国 そして 1968』(人文書院 2021)
波多野 淑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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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저소개》 타카하타 兌 저, 히라이 일신·강신이치·키무라 타카·야마다 요스케 번역 
“베트남 전쟁과 한국 그리고 1968”
(인문서원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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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에 미군이 북베트남을 폭격한 이래, 베트남 전쟁(북 베트남·남 베트남 해방 민족 전선 VS 남베트남·미국)이 격화하고 있었다. 이 해의 연하장을 저는 일본 열도와 베트남의 지도를 겹쳐서 디자인했다. 북베트남을 폭격하는 미군의 비행기는 당시 아직 미군의 지배하에 있던 오키나와의 가데나 기지에서 발진했기 때문에 일본도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월, 미국의 원자력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사세보항에 입항. 학생과 시민단체가 대규모 입항 저지 시위를 벌였다. 사세보가 북폭의 기지가 되는 것에 대한 반대와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현의 땅에 원자력선이 들어가는 것에 항의하는 반핵운동이었다. 

그런데 1월 23일, 미국의 정보수집선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엔터프라이즈호는 급거사세보항을 떠나 일본해로 향했다. 실은 이 2일 전인 21일에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꾀한 북한 병사 31명이 서울에 침입해 청와대에 다가갔다(총격전 끝에 미수). 이 두 사건은 북한에 의한 북베트남 옹호·미국군 견제의 목적이었다고 생각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북한 공격을 요청했다. 일촉 즉발! 혹시 베트남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베트남에서는 1월 30일 테토(구정)을 기하여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통칭 베트콘)의 대규모 기습 공격이 전개되어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도 일시 점거되었다. 미군은 드디어 이를 격퇴했지만, 미국 본국에서는 단번에 왕전 기분이 퍼져, 젊은이의 징병 기피나 반전 운동 나아가서는 흑인 공민권 운동과도 연동해 큰 부끄러움이 되었다. 5월에는 프랑스에서도 학생들의 반전운동이 일어났다. 6월, 후쿠오카시의 규슈대학 의학부 구내에 미군의 정찰기가 추락했다. 10월 21일, 국제 반전의 날. 전공투 운동이 높아지는 가운데 베트남 전쟁 반대 학생들 4,600명, 그 외 군중 2만명의 시위가 신주쿠역 주변에서 경관대와 충돌. 소란죄로 734명 체포. 한편, 쓰루미 토스케・오다 미츠 등을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에 평화를! 반전 운동은 베트남 전쟁의 기지가 된 오키나와의 조국 복귀 운동과도 연동하고 있었다. 오키나와에서는 11월 행정주석 선거에서 즉각 복귀를 주창하는 야라 아사모가 당선했다. 산리츠카에서는 나리타 공항 건설에 따른 농지 인수 반대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우로가 치마마타쿄 온천에서 일본인의 민족차별을 날카롭게 찌른 것도 올해 2월이었다. 이들이 연결되어 뜨거운 열기가 일본 열도를 감싸고 있었다. 

한국은 1964년 베트남에 의료반을 파견한 후 65년부터 본격적인 전투부대를 파견했다. 8년 5개월간의 파병수의 누계는 325,517명으로 전사자 약 5,000명, 부상자 약 8,000명을 냈다. 그 밖에 고엽제 후유증자가 2만명이나 있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의뢰보다 먼저 한국 측에서 신청한 것이었다. (아메리카 측에서도 병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한국의 파병을 환영했다.) 한국 측의 목적은 '베트남 특수'와 '파병의 보상'으로서의 경제 원조에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인 병사의 몸과 생명을 대가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다. 

미군에 의한 「성미 학살」(죽은 자 504명)이 유명하지만, 한국군도 여러 곳에서 「양민 학살」을 행한 것이 밝혀진 것은, 1999년, 주간지 「한겨레 21」의 도구 히데히메(구수정) 「아아, 진심의 한국군」 「베트남의 분혼을 기억하라」 「우리의 치부에 빛을」라는 일련의 기사에 의해서였다. 그녀는 베트남의 한국군 주둔지 곳곳에 주민들이 지은 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 조사한 것이었다. 한국 내 반향은 크고 많은 모금이 전해지는 반면 고엽제 후유증 전우회의 2,000명이 명예를 더럽혀졌다고 화내며 한겨레 신문사를 습격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중부의 폰니 마을과 폰냑 마을을 일군의 한국군 병사가 통과하고 있었을 때, 뒤쪽에서 총성이 일어났다. 당시 베트남에는 움직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발포할 수 있는 「발포 자유 구역」과 「발포 제한 구역」이 있었지만, 옆에 있는 이 두 마을은 「발포 제한 구역」으로, 무암하게 발포 해서는 안 됐다. 한국군 병사가 지나간 뒤 총소리를 듣고 망원경으로 보고 있던 남베트남 군병사가 달려가자 마을 곳곳에서 할아버지에서 젖먹이까지 쓰러졌다. 무고한 시신과 부상자들. (죽은 사람 74명). 나중에 온 미군 병사들과 손으로 나눠 부상자를 병원에 보내 미군 병사가 사진을 찍었다. 

이 책의 저자 고경태는 같은 '한겨레 21'의 기자로 이 마을을 2000년부터 10회 방문했다. 누가 한 일은 먼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었습니다. 죽은 자와 부상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나 연령, 가족관계를 조사하고, 사진으로 확인하고, 각각이 어떤 인생을 보내고, 어디서 어떻게 피해를 당했는지를 본서에서 극명하게 재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성을 듣고 뭉치에 숨어 있던 곳을 끌어당겨 총격당하고 있었다. 또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뒤 어떻게 살아왔는지, ​​죽은 자를 떠올리는 제사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등도 보고 듣고 있다. 이 문서의 대부분은 누가 재구성 한 다큐멘터리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현장에 있던 한국군의 사관이나 병사들에게 인터뷰해, 당시의 상황을 찾아내려고 했다. 어떤 것은 솔직하게 말하고, 어떤 것은 흐리게 한다. 누군가가 발사를 명령하고 누군가가 그것을 따랐다. 어쨌든 진상은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 고가 생각되는 것은 1948년 제주 4·3이며 1980년 광주, 혹은 일본군의 난징 학살이다. 아, 사람은 왜 어떤 상황에서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는가! 마을의 한국병...모두 고향에서는 좋은 아버지, 아들, 형, 동생이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아도 매우 보통의 청년이었을지도 모른다. 군대(혹은 경찰)이라는 조직, 또 전장이라고 하는 장소가 본인을 하고 잔학 행위에 달릴 수 있는 장소, 혹은 토양이 되는 것이 아닌가? 폰니 마을과 폰냐트 마을의 가주말 나무 아래에 위령비가 있다. 죽은 74명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새겨져 “남조선의 군인에게 학살당했다”고 쓰여 있다. 이 비의 비용은 한국의 시민단체 ‘나와우리(나와 우리 나와 우리)’가 모금활동으로 모아 건설작업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한편, 같은 학살로 135명이 희생된 하미마을에서는 "...(한국의) 청룡부대 병사가 미친 듯이 와서 사람들을 학살했다....여기는 피에 물들어 모래와 뼈가 섞여 집은 불에 타고 불에 구워진 시체가 얽히고, 불타는 시체를 개미가 걸려 피의 냄새가 가득했다. 건설비를 낸 청룡부대의 전 병사들은 그 잔학행위의 리얼한 묘사를 견디지 ​​못하고 비문 수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한국정부와의 사이에서 “과거에는 뚜껑을 하고 미래지향으로”라는 노선을 취하는 베트남 정부는 요구를 받아 비문을 수정하려고 했지만, 사건의 생존자 3명이 열심히 듣지 않고 , 수정할 정도라면 정말 뚜껑을 하면 비문 전체를 커버로 덮었다고 한다. 

여기서 사과와 보상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가로서의 사과, 민간 시민들의 사죄, 어느 쪽이 피해자의 마음을 따르는 것일까? 루터 킹의 암살, 69년의 호치민의 죽음 등을 언급하고, 1968년을 '세계적인 항쟁의 해'라고 부르며, 그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빙산의 하나로 한 38도선의 험한 철덩어리(시인 김수연) 아래에 있었다고 말했다. 많은 것을 시사하는 책이다. 

이 글을 쓰는 데 이토 마사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기억의 비교연구』(교토대학 동남아시아연구 48권 3호)도 참조했다. (2021년 12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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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年は激動の年だった。1965 年に米軍が北ベトナムを爆撃して以来、ベトナム戦争(北ベトナム・南ベトナム解放民族戦線 VS 南ベトナム・アメリカ)が激化していた。この年の年賀状をわたしは日本列島とベトナムの地図を重ね合わせてデザインした。北ベトナムを爆撃する米軍の飛行機は、当時まだ米軍の支配下にあった沖縄の嘉手納基地から発進していたため、日本も無関係ではなかったからだ。
1 月、アメリカの原子力空母エンタープライズ号が佐世保港に入港。学生や市民団体が大規模な入港阻止のデモを行った。佐世保が北爆の基地になることへの反対と原爆が投下された長崎県の地に原子力船が入ることに抗議する反核運動だった。ところが 1 月 23 日、アメリカの情報収集船プエブロ号が北朝鮮に拿捕される事件が起こり、エンタープライズ号は急遽佐世保港を離れて日本海に向かった。実はこの 2 日前の 21 日には、韓国の朴正煕大統領暗殺を企てた北朝鮮の兵士 31 人がソウルに侵入し青瓦台に迫った(銃撃戦の末、未遂)。これら二つの事件は北朝鮮による北ベトナム擁護・アメリカ軍牽制の狙いだったと思われる。
朴正煕大統領はアメリカに北朝鮮攻撃を要請した。一触即発!もしかすると、ベトナムだけでなく、朝鮮半島でもまた戦争が起こるかも知れなかった。
ベトナムでは 1 月 30 日、テト(旧正月)を期して北ベトナム軍と南ベトナム解放民族戦線(通称ベトコン)の大規模な奇襲攻撃が展開され、サイゴンのアメリカ大使館も一時占拠された。米軍はようやくこれを撃退したものの、アメリカ本国では一気に厭戦気分が広がり、若者の徴兵忌避や反戦運動さらには黒人公民権運動とも連動して大きなうねりとなった。5月にはフランスでも学生たちの反戦運動が起こった。6 月、福岡市の九州大学医学部構内に米軍の偵察機が墜落した。
10 月 21 日、国際反戦デー。全共闘運動が高まる中、ベトナム戦争反対の学生ら 4,600 人、その他群衆 2 万人のデモが新宿駅周辺で警官隊と衝突。騒乱罪で 734 人逮捕。一方、鶴見俊輔・小田実らを中心とする「ベトナムに平和を!市民連合」(略称べ平連)は、反戦デモを行うとともに、米兵に脱走を呼びかける活動をおこなっていた。
反戦運動は、ベトナム戦争の基地になった沖縄の祖国復帰運動とも連動していた。沖縄では 11 月の行政主席選挙で即時復帰を唱える屋良朝苗が当選した。三里塚では成田空港建設に伴う農地買収反対闘争がくり広げられていた。金嬉老が寸又峡温泉で、日本人の民族差別を鋭く突いたのもこの年 2 月のことだった。
これらが結びついて熱い熱気が日本列島を包んでいた。
韓国は、1964 年にベトナムに医療班を派遣したのち、65 年から本格的な戦闘部隊を派遣した。8 年 5 か月間の派兵数の累計は 325,517 人で、戦死者約 5,000 人、負傷者約 8,000 人を出した。ほかに枯葉剤後遺症者が 2 万人もいる。
韓国のベトナム派兵はアメリカの依頼より先に、韓国側から申し入れたものだった。(アメリカ側でも兵力不足を補うために、韓国の派兵を歓迎した。)韓国側の目的は「ベトナム特需」と「派兵の見返り」としての経済援助にあった。朴正煕大統領は韓国人兵士の体と命を代償にして、「漢江の奇跡」と呼ばれる経済成長を成し遂げたのだ。
米軍による「ソンミ虐殺」(死者 504 人)が有名だが、韓国軍も数か所で「良民虐殺」をおこなったことが明らかにされたのは、1999 年、週刊誌『ハンギョレ 21』の具秀姃(ク・スジョン)「ああ、震撼の韓国軍」「ベトナムの冤魂を記憶せよ」「われわれの恥部に光を」という一連の記事によってであった。彼女はベトナムの韓国軍駐屯地のあちこちに住民たちが建てた碑があることに気づいて、調べたのだった。韓国内の反響は大きく、多くの募金が寄せられる一方、枯葉剤後遺症戦友会の 2,000 人が名誉を汚されたと怒ってハンギョレ新聞社を襲撃する事件も起こった。
1968 年 2 月 12 日、ベトナム中部のフォンニ村とフォンニャット村を一群の韓国軍兵士が通過していたとき、後ろの方で銃声が起こった。当時、ベトナムには動くものなら何でも発砲してよい「発砲自由区域」と「発砲制限区域」があったが、隣りあっているこの二つの村は「発砲制限区域」で、無暗に発砲してはならなかった。韓国軍兵士が通り過ぎた後、銃声を聞いて望遠鏡で見ていた南ベトナム軍兵士が駆け付けると、村のあちこちでおじいさんから乳飲み子までが倒れていた。むごたらしい遺体と負傷者たち。(死者 74 人)。あとから来た米軍兵士たちと手分けして負傷者を病院に送り、米軍兵士が写真を撮った。
本書の著者高暻兌(コ・ギョンテ)は、同じ『ハンギョレ 21』の記者で、この村を 2000年から 10 回訪れた。かれがしたことはまず村人の話を聞くことだった。死者と負傷者ひとりひとりの名前や年齢、家族関係を調べ、写真で確認し、それぞれがどんな人生を送って来て、どこでどのように被害に遭ったかを本書で克明に再現した。ほとんどの人が銃声を聞いて壕に隠れていたところを引きずり出されて銃撃されていた。また生き残った人たちがその後どう生きて来たか、死者を弔う祭祀はどのようになされているかなども、見聞きしている。
本書の大部分はかれが再構成したドキュメンタリーである。他方では、その現場にいた韓国軍の士官や兵士たちにインタヴューして、当時の状況を探ろうとした。あるものは率直に語り、あるものははぐらかす。誰かが発砲を命じ、誰かがそれに従った。いずれにせよ、真相は明らかではない。ここで高が想起するのは、1948 年の済州 4・3 であり 1980 年の光州、あるいは日本軍の南京虐殺である。ああ、人はなぜ、どういう状況で残酷に人を殺すのか!
南京の日本兵、済州島の西北青年団や警察官、光州の韓国軍兵士、ベトナムのソンミ村の米兵、フォンニ村とフォンニャット村の韓国兵...いずれも故郷ではよき父、息子、兄、弟であったかも知れず、そうでなくともごく普通の青年だったかも知れない。軍隊(あるいは警察)という組織、また戦場という場が本人をして残虐行為に走らせる場、あるいは土壌となるのではないか?と問いかけているように思える。
フォンニ村とフォンニャット村のガジュマルの木の下に慰霊碑がある。亡くなった 74 名の名前と生年月日が刻まれ、「南朝鮮の軍人に虐殺された」と書かれている。この碑の費用は韓国の市民団体「ナワウリ(나와 우리 わたしとわたしたち)」が募金活動で集め、建設作業にも参加したという。一方、同じような虐殺で 135 名が犠牲になったハミ村では、「...(韓国の)青龍部隊の兵士が狂ったようにやって来て人々を虐殺した。...ここは血に染まり、砂と骨が入り交じり、家は焼かれ、火に焼かれた死体がからみあい、焼けた死体をアリがかじり、血の匂いが満ち満ちていた。...」という碑文に対して、建設費を出した青龍部隊の元兵士たちは、その残虐行為のリアルな描写に耐えられず、碑文の修正を求めたという。韓国政府との間で「過去にはフタをして未来志向で」という路線を取るベトナム政府は要求を受け入れて碑文を修正しようと図ったが、事件の生存者 3 名が頑として聞き入れず、修正するぐらいならほんとにフタをすると、碑文全体をカバーで覆ったという。ここでは謝罪と償いはどうあるべきかという問題が提起されている。国家としての謝罪、民間の市民たちの謝罪、どちらが被害者の心に沿うものなのだろう
か?
高は、日本のべ平連の活動、67 年のチェ・ゲバラの死、68 年のマーティン・ルーサー・キングの暗殺、69 年のホー・チミンの死などにも言及し、1968 年を「世界的な抗争の年」と呼び、そのとき韓国は「世界で一番高い氷山のひとつである 38 度線の険しい鉄の塊」(詩人キム・スヨン)の下にあったと述べている。多くのことを示唆する書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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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文を書くにあたって、伊藤正子『韓国軍のベトナム派兵をめぐる記憶の比較研究』(京都大学東南アジア研究 48 巻 3 号)も参照した。
(2021 年 12 月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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