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2

‘나는 제사가 싫다’ 작가 李河泉 2000

‘나는 제사가 싫다’ 작가 李河泉  (김정근 부인)

<나는 제사가 싫다>로 가부장제에 도전한 작가 이하천(李河泉)씨
(2000.3) 

글·이혜련 기자 동아일보


“조상은 자신에게 경배하지 않는다고 자손에게 벌을 내리는 깡패가 아니다.”
“그런 말 하면 칼 맞는다.”

작가 이하천씨(51)가 <나는 제사가 싫다>를 내고 나서 한 50대 여성에게서 들은 말이다. 그는 이 땅의 가부장제가 조상을 핑계삼아 여성을 얼마나 심리적으로 억압해왔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말한다.

“조상이 깡패입니까? 자신을 섬기고 경배하지 않으면 자손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협박하는 게 조상의 모습입니까? 이젠 조상의 개념을 다르게 설정해야 합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인정스럽고 품위있고 자존심 있는 존재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잘 섬기면 복 받고 그렇지 않으면 벌 받는다는 식으로 조상의 개념을 축소시킨 것은 가부장제가 특권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유아독존적 발상이에요. 그리고 뿌리는 남자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여자에게도 엄연한 뿌리가 있어요.”

그의 말은 격렬하다. 하지만 정곡을 찌른다. 그는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산맥과 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땅의 여성들이 죄의식과 모멸감에 시달리는 것은 가부장제가 만든 거짓언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내 성질이 나빠서’ ‘내가 능력이 없어서’ ‘내 욕구가 너무 커서’ 빚어낸 불협화음이라고 여겼다.

“말은 똑바로 해야죠. 이 세상은 며느리도 자식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두 아이를 둔 여성이 있는데, 남편이 간암으로 죽어 남편이 남긴 퇴직금과 약간의 보험금으로 살아야 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시어머니가 전화를 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걱정을 하기는커녕 ‘너 혼자 다 차지하고 사니까 좋지. 죽은 내 아들만 불쌍하게 되었다’며 악다구니를 쓰더라는 겁니다. 그 시어머니는 먹고 살기 힘든 상황도 아니었고, 다른 자식들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시어머니의 모습이 이 땅의 시어머니들이 보일 수 있는 마지막 모습일 겁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 시어머니들은 아직도 며느리도 자식이란 말을 낯뜨겁게 하고 있어요.”

그는 낳지도 기르지도 않고 한 번도 정성을 쏟은 적이 없는 시부모가 어떻게 부모냐고 묻는다. 자기 아들과 이혼이라도 하면 남이 되는 사이인 며느리에게 자기가 부모라고 우기면서 희생을 강요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 묻는다.
그의 시어머니는 며느리인 그 앞에서 자주 울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체구의 반밖에 안되는 시어머니를 작고 가련하고 순박한 시골 노인네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울음이 며느리의 영혼을 움켜쥐려는 ‘음모’라는 걸 결혼한 지 20년이 지나고야 알았다고 한다.

그는 1970년 만 스물한 살에 결혼했다. 당시 그에겐 시집 간다는 의식이 없었다. 그저 사랑하는 남자와 같이 산다는 것밖에 몰랐다. 남편은 3개월 만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그는 2년 뒤 남편을 따라갔다.
시어머니는 공항에서 그에게 “니는 좋겠다. 내 아들 따라 미국에 가니 니는 좋겠다” 하며 엉엉 울었다. 시집에서는 유학비용을 한푼도 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린아이처럼 우는 시어머니에게 왠지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이 들었다. 미국에서 5년, 캐나다에서 10년간 사는 동안에도 시어머니는 전화만 하면 “니그들 부모 모시기 싫어서 갔제? 니는 좋겠다. 외국에 가서 사니” 하며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시부모로부터 라면 한봉지 받은 게 없습니다. 그렇다고 고생한다는 위로의 말을 들은 적도 없어요. 오히려 돈을 보내라는 압력을 받았고, 시집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뼈아픈 한숨소리를 들었죠. 그러나 그땐 그게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 몰랐어요. 천근만근 짓누르는 죄의식에 시달릴 뿐이었습니다. 시부모라는 막강한 권력 앞에서 그저 내가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시달렸어요. 아니, 왜 어른이 어린 며느리 앞에서 웁니까? 울고 싶으면 자기 부모에게 가서 울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것은 동정심을 유발해서 며느리를 자신의 뜻대로 따르게 하려는 계획된 행동이었어요.”

86년 귀국 후 시집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 갔을 때 그는 시집식구들이 어둡고 불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걸 보고 의아했다. 캐나다에 살면서 밝고 구김살없는 표정에 익숙해 있던 그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나중엔 그게 다 쇼라는 걸 알고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어요. 다들 먹고 살 만한데도 일부러 금방이라도 굶어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이젠 맏며느리인 네가 이 집안의 짐을 다 떠맡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는 제 옷을 벗어서 거는 것까지 가정부가 따라다니며 해주었을 정도로 곱게만 자랐다. 결혼한 후에도 친정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냈기 때문에 시집에 갈 때도 가정부가 아기를 업고 가서 부엌에 들어가고 그는 우아하게 앉아 있다가 오곤 했다. 그래서 그땐 가부장제라는 구조를 볼 수 없었고, 자신과 시집 식구들과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귀국한 후 그는 시집에 가면 부엌으로 직행해야 했다. 남자들은 방안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음식을 해다 바쳐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는 엄청난 굴욕감과 견딜 수 없는 낭패감을 느꼈고, 이런 틀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심했다.

“남자들은 처가에 갔을 때 부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깍듯이 손님 대접을 받는데 왜 여자는 그런 대접을 못 받는 거죠? 나를 더 분노하게 한 것은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는 그 인습이었어요.”
외국에서 고생하면서도 그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자존심이 있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교포사회의 문제를 많이 보았지만 그는 그들이 하층 출신이라서 그럴 것이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귀국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텔레비전만 틀면 시위, 분신자살, 성폭행, 부정부패, 사기 이런 단어들이 매일 튀어나왔다. 그는 자신의 자부심이 박살나는 것을 느꼈다. 추하다고 여겼던 교포사회 문제점들의 뿌리가 바로 조국에 있었다. 그가 무엇보다 분노한 것은 정치가, 관료, 대학교수, 작가 등 사회적 권력을 가진 자들의 행태였다. 그들은 사회적 책무를 망각한 채 제 식구들끼리 잘 먹고 잘 살고 제 조상 제사나 지내고 산소나 가꾸고 있었다.
자신을 짓누르던 알 수 없는 죄책감, ‘결혼한 여자는 무조건 시집 식구들을 받들어야 한다’는 인식, 한국인들의 이중적인 사고, 거기다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지도층의 행태… 귀국 후 그는 엄청난 혼란과 고통을 겪었다.

“나는 작가입니다. 작가는 공적인 에너지를 가져야 하고, 그래야 하는 사회적 책무가 있습니다. 또 작가는 정서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한국인의 심리 속으로 깊이 잠수해 들어갔죠. 그런 과정에서 부딪친 것은 먹고 살 만한데 왜 그렇게도 내면의 상처가 많은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추적해 들어가보니 마지막으로 건져올려진 게 바로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틀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부장제의 핵심이 바로 제사와 호주제도입니다

그는 제사를 거부한다. 그러나 제사 자체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남성중심적 제사형태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거부한다. 현재의 제사는 여성의 뿌리를 자르는 틀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선택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선택할 권리를 빼앗깁니다. 단지 선고를 받죠. ‘너는 시집식구에게 잘해야 한다’ ‘시집풍습을 따라야 한다’ ‘시집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 그런 강제된 틀은 여성의 주체성을 빼앗아갑니다.”

어느날 그가 시집에 가니 시어머니가 “제사 지내는 게 너무 힘들다”면서 울었다. 그의 시집은 거의 매달 제사가 있는 집안이었다. 그가 “힘든데 왜 합니까? 힘들면 안하면 되지. 그렇게 힘들면 저 주세요” 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울음을 그치고 반색을 하며 “정말 니가 가져갈래?” 했다. 그가 제사를 지내기로 하고 명절때가 되었다. 그는 시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제사는 우리가 잘 지내줄 테니 각자 집에서 묵념하라고 하세요. 이 교통전쟁에 뭐 때문에 사람들을 부릅니까?” 했다. 파격적인 며느리의 행동에 시집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그는 끝까지 버텼다.
“조상을 잘 모셔야 복을 받는다고요? 나는 그런 복은 거부합니다. 복은 자신이 정당하게 노력해서 만드는 것이지, 나하고 내 자식 잘 되게 해달라고 죽은 조상에게 엎드려 비는 그런 천박한 개념이 아닙니다.”

그는 제사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동학에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사람 중심의 제사의식을 발견했다. 남편과 함께 들꽃을 꺾어 청수와 촛불을 함께 놓고 상을 차렸다. 그런데 언어가 없었다. 종교적인 언어를 싫어하는 이들 부부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헤르만 헤세의 책에서 몇구절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제사를 지냈다.
제사의 새로운 양식을 실험하고 만족했지만 그는 지금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다. 이 사회의 가부장제 뿌리가 너무 깊기 때문이고, 수많은 사회 문제에는 눈감고 자기 가족만 잘 살게 해달라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대신 그는 사람들이 기르다 버린 고양이 20 여 마리에게 하루에 두 번 먹이를 주며 돌보는 것으로 제사개념과 종교개념을 대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동물에게는 잘 하면서 왜 시부모에게는 그렇게 못하느냐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동물을 돌보는 것은 선택이지만 시부모는 그에게 선택의 자유를 아예 주지 않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제적인 틀이 인간적인 면마저 왜곡시킨다고 말한다.

“한 번은 시집에 가보니 시어머니가 몹시 쇠약해져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시집 식구들이 모여서 정말 한줌도 안되는 아픈 사람을 두고 서로 안 모셔가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참담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형식만을 위해 살도록 짓눌림을 당한 결과 인간적인 면마저 파괴되어버린 사람들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제가 모셔가겠다고 했더니 다들 놀란 눈치예요. 자신들 마음대로 되지 않던 큰며느리가 그렇게 나오는 게 뜻밖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는 시어머니를 모셔와 정성을 다해 간호했다. 시어머니는 며칠 지나지 않아 기운을 차렸다. 그때부터 그는 시어머니와 매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이런 가족의 틀은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 서로 영혼을 갉아먹을 뿐이라고.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살아본 결과 어떤 생각이 드느냐고 물었다. 나중에 시어머니는 완전히 건강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가며 “요번에 내가 여기를 못 와보고 죽었다면 너를 잘 모르고 한스럽게 죽었을 것이다. 우리가 너를 오해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 시어머니가 만나는 사람마다 ‘내 며느리’ ‘내 며느리’ 하며 며느리 칭찬을 하고 다니는 걸 보며 또다시 참담함을 느꼈다.

“내가 시어머니를 간호한 것은 며느리이기 때문도 아니고, 그 분이 시어머니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저 한없이 약자 입장에 선 한 인간을 위해 한 행동이었을 뿐, 의무도 형식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며느리와 시집 관계에서는 모든 것이 의무와 형식의 틀에 맞춰져 왜곡되니 기가 막히죠.”
결혼한 여자는 자동적으로 시아버지나 남편의 호적에 올라간다. 호주제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시집 호적에 올라 있지 않다. 시집 호적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버렸다.

“시집 식구들이 기세등등하게 난리를 치는 이유를 따져보니 한마디로 그들이 잘났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 근거가 호주제였어요. 귀국한 후에 등본을 처음 보았는데, 시아버지가 호주로 되어 있는 거예요. 아, 이러니까 저들이 잘났다고 나를 찍어누를 수 있는 거구나
싶더라구요. 최후의 선택으로 서양을 등에 업을 수밖에 없었어요. 국적회복과정에서 국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는데, 망설이다가 캐나다 국적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집 호적에서 내 이름을 파내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더라구요. 모든 여자들이 나처럼 할 순 없을 테고, 호주제가 빨리 폐지되어야 합니다.”

그는 가부장제가 이 땅에 약자를 짓밟더라도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강자의 논리, 무엇이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무엇이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를 따지는 이익의 잣대 그리고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이중성을 심어주었다고 비판한다.
“강자의 논리에는 윤리성도 예의도 없습니다. 얼마나 예의가 없으면 남의 귀한 자식인 며느리를 자기들의 호적에 데리고 와서 자신들에 게 잘하라고 강요하고 잘못하면 벌떼처럼 달려든단 말입니까? 또 딸보다는 아들이 이익이 되기 때문에 딸을 차별하고, 작은아들보다는 큰아들이 이익이 되기 때문에 큰아들을 편애합니다. 가정에서부터 이렇게 공평성이 깨졌는데 사회가 어찌 공평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 사람들은 두 가지 얼굴과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자들을 보면 시집에 갈 때 차림새와 말과 표정이 친정에 갈 때와 완전히 다릅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에서는 정의를 부르짖다가도 집에 오면 군림하는 권력자로 돌변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적인 권력을 잡으면 다 도둑놈이 됩니다. 정치인만 썩었다고 욕할 게 아녜요. 가정에서부터 기본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사회가 이 모양인 것 입니다.”
그는 자신을 극렬 페미니스트로 보는 일부의 시선을 거부한다. 그는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한다. 페미니즘뿐 아니라 어떤 주의에도 자신을 가두는 것을 원치 않는다. 판단의 기준은 인간이고,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문제가 여성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이고, 우리 영혼의 문제입니다. 이 땅의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를 포함한 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자신의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지 모르고 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내가 나선 겁니다.”

그는 자신에게 반박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으니 완벽한 논리를 갖고 오라고 말한다. 당당한 체구와 화려한 화장은 그를 정말로 ‘전사’처럼 보이게 한다

그는 화장을 좋아한다. 화려한 색을 좋아한다. 일상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나 환상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 화려한 색감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화장에 대해 말이 많다. 그는 그 사실이 재미있다고 말한다. 그가 귀국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금은방에 들른 적이 있었다. 볼일이 다 끝나갈 때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주인남자가 손을 잡을 듯이 다가와서 은밀하게 속삭였다.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지요?” 그를 술집 여자로 본 것이었다. 그는 하하 웃으며 빠져나왔다.
또 한 번은 어느 신문사 문화부 기자들과 밤을 새우며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때 밖에서 바람이 세게 불어 창문이 음산하게 흔들렸다.
그러자 그 중 한사람이 그를 보며 “혹시 무언가 힘을 쓴 게 아니냐”고 농담을 했다. 그 사람은 그를 마녀로 본 것이다. 그는 그때도 깔깔 웃었다. 또 어느 철학자는 그만 보면 남성들의 자존심이 상한다고 했다. 그는 또 다시 하하 웃었다. 그 남자에겐 그가 가진 여성관, 즉 얌전함과 곱상함을 벗어버린, 그래서 쉽게 점령할 수 없을 것 같은 당당한 모습과 언어가 재수없게 느껴진 것이었다.
당당하고 거침없는 태도와 언어 때문에 그는 간혹 혼자 사는 여자이거나 이혼한 여자가 틀림없다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를 만나러 가면서도 남편 김정근 부산대 교수가 더 궁금했다. 단적으로 한국남자 가운데 시부모가 어떻게 부모냐고 말하는 아내를 이해할 수 있는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하천씨와 김정근 교수 부부는 부산 해운대에서도 차로 40분쯤 걸리는 시골마을에 살고 있다. 귀국한 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는 이하천씨는 90년 이 산골로 이사한 후 겨우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5년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오직 글만 썼다. 그때 쓴 장편소설이 93년에 나온 <조용히 쓸어라 대지는 깊이 잠들지 않는다>와 97년에 나온 <불타는 대지>다.
시골에서 그는 동물을 기르고 농사일을 하며 영혼의 힘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집 앞 텃밭에 25그루의 배나무와 각종 채소를 가꾸는 그는 가끔 도시에 나갔다가 마음이 시끄러워지면 집에 돌아와 파릇이 돋은 새싹을 보거나 잡초를 뽑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 시끄러웠던 마음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조용히 가라앉는 걸 느낀다.

직접 지은 그의 집은 독특하다. 한 울타리 안에 세 채의 건물이 있는데, 안채는 이하천씨의 공간, 바깥채는 남편 김교수의 공간 그리고 또 하나는 아들이 오거나 손님이 오면 머무는 곳이다. 남편과 아내가 각기 다른 채에 거주하는 이유는 라이프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하천씨는 글을 쓸 때 음악을 틀어놓아야 하는데 김교수는 조용해야 한다. 또 이하천씨는 새벽 2시나 돼야 잠자리에 드는데, 김교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그래서 서로 방해받지 않고 일을 하기 위해 따로 지내는 게 편하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원래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내가 책을 냈고, 아내의 일이니까 혼자 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하천씨에 대해 “아마 저 여자는 혼자 사는 여자일 거야” “이혼한 여자일 거야”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기꺼이 인터뷰와 사진촬영에 응해주었다.

김교수는 말씨나 태도가 조용하고 부드러워 점잖은 선비 같은 인상이다. 김교수에게 가부장제에 정면도전하는 아내 때문에 주변에서 어려움을 겪진 않느냐고 묻자 그는 “심리적인 불편함은 있죠. 그러나 그건 참으면 되는 겁니다. 내가 이하천을 도와준 거라면 그게 유일한 일이죠” 한다.

남편보다 2년 늦게 캐나다에서 돌아온 이하천씨는 주위 사람들이 남편이 학문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가장 큰 방해 요소가 부모 형제, 고향, 동창이었다. 특히 시집에서는 그동안 못한 아들노릇을 하라는 듯이 난리였고, 워낙 모범생인 김교수는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고 있었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었던 이씨는 이 골짜기로 이사온 후 누구라도 허락없이 오지 못하게 했고, 전화도 대신 받아서 처리했다. 그런데 만약 남편이 그의 행동에 반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남편은 교수입니다. 교수는 공인이에요. 공인은 개인적 삶보다 사회를 위해 에너지를 쏟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 남편도 한국남자이기 때문에 몸속에 가부장제의 세균이 잠복해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남편은 천성적으로 인습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또 교육자적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른 것은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거죠.”

이하천씨에 의하면 김교수는 처음에 반쯤 저항했다. 그러다 30%, 20%, 10%로 점점 저항의 수위가 낮아지다 결국엔 “나는 누구 편도 아니다.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라고 선언했다.

김교수가 이 사회의 정서적 문제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아내의 격렬한 저항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여제자들에게 있었다. 학창시절엔 똑똑해서 큰 재목이 될 줄 알고 열심히 가르쳤던 여제자가 결혼만 하면 생명력이 쑥 빠져버리는 것을 몇차례 경험한 김교수는 이 사회가 변하지 않는 한 여자들이 사회적 에너지가 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만약 남편이 끝까지 저항했다면 ‘너 사기꾼이지?’ 하고 말했을 겁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진리를 이야기하면서 집에서 다르게 행동하고 말한다면 그게 사기꾼이 아니고 뭡니까? 나는 남편이 사기꾼이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고, 사기꾼과 한집에서 살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강경하게 나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자신의 에너지를 나에게 쏟으라는 게 아니잖아요. 사회에 환원하라는 것 입니다. 그러기 위해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한 것 아닙니까?”

김교수는 서울대 영문과 석사를 마치고 유학, 시카고대 도서관학과 석사, 컬럼비아대 도서관학과 박사를 하고 다시 정치학으로 석사를 하고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교육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하천씨는 다른 사람의 몇배가 되게 공부한 이유가 가족끼리 잘 먹고 잘 살자는 게 아니잖느냐고 말한다.

“남편만큼 지독할 정도로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한 번도 친구들과 어울려 밤에 술을 먹고 놀러 다니며 헛 소리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성실성에 헛점을 보였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하천씨가 김교수를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김교수는 이하천씨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영어교사로 6개월간 재직했었다. 그 때 이하천씨는 김교수의 무겁고 심각한 태도와 그가 쓰는 언어에 흠뻑 빠졌다. 2년 뒤 서울로 대학 진학한 이하천씨는 김교수에게 연락을 했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두사람이 결혼하겠다고 하자 딸을 부와 권력을 겸비한 집에 시집보내고 싶어했던 이하천씨의 부모는 거세게 반대했다. 어머니는 임신한 이하천씨를 산부인과로 끌고 가 강제로 낙태시키려고 했고, 아버지는 화가 나서 사흘간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빠는 김교수를 찾아 죽여버리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결국 결혼 허락을 받았지만 그는 그때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무시한 부모에게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게 만드는 심리적인 배경이 되었다.

그는 효도라는 개념을 거부한다. 부모는 낳아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는 한 생명체를 자기들 마음대로 낳았기 때문에 당연히 잘 키울 의무가 있다. 자기가 낳은 생명체를 책임지고 기르는 것은 당연한데 “내가 널 키웠으니 빚을 갚으라”라고 하는 것은 낯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하천씨 부부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외아들 철훈씨는 캐나다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아들이 결혼하더라도 아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어떤 강요도 할 생각이 없다.
“내가 아들과 그 가족들에게 좋은 인간이었고, 좋은 어머니였고, 좋은 시어머니였고, 좋은 할머니였다면 그들은 날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인간이 아니라 심리적인 짐만 잔뜩 건네준 조상이었다면 과감히 기억에서 지워버리라고 할 겁니다. 또 조상을 위해 에너지를 쏟지 말고 이 사회를 조금이라고 밝게 하는 데 에너지를 쏟으라고 말할 겁니다.”
그는 젊은이들이 하루빨리 효의 개념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효는 어른이 어른임을 포기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효도나 충성이나 무슨 무슨 주의가 아니라 진리, 창의, 사랑, 열정 같은 단어들입니다. 나는 이 단어 들이 빛을 발할 때까지 외칠 것입니다. 이 땅의 볼썽 사나운 가부장제 귀신들아, 이제 한국인을 그만 괴롭히고 썩 물러가라.”
===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