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2

[제4차 학술회의] 『독립정신』에 나타난 이승만의 독립노선 > 관련논문/출판물 |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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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학술회의] 『독립정신』에 나타난 이승만의 독립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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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정신』에 나타난 이승만의 독립노선

김효선 (한국논단)


Ⅰ. 머리말

이승만의 대표적인 옥중저서인『독립정신』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집필 동기, 집필 당시의 시대적 상황, 집필 목적을 설명하고 이 책에서 이승만이 강조한 ‘독립’이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독립정신』은 이승만이 한성감옥서에 수감된 지 5년 1개월이 조금 지난 1904년 2월 19일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4개월여 만인 1904년 6월 29일 탈고했다. 이승만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대한제국의 미래가 불투명함을 인식하고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독립정신』을 집필한 것이다.


『독립정신』은 총 51장과 전체 내용의 핵심을 요약, 정리한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독립주의의 긴요한 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승만은『독립정신』머리말에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세상 형편이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울분이 치솟아 몇 권의 책을 번역하며 잊으려 하기도 했으나 어느 것도 발간되지 못하여 울적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또한 몇 년 동안 논설을 써서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으나 그것도 사정이 생겨 중단하고 있던 중 때마침 러일전쟁이 벌어지고 있어 남아로서 세상에 나서 유익한 일을 할 만한 경륜은 없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분노가 치밀어 눈물을 금치 못하여…내용이 부족한 점도 있고 일관성도 적지만 내용의 핵심은 ‘독립’이란 두 글자이다.


Ⅱ. 러일전쟁 발발 배경


청나라 말기인 1900년 산동성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反그리스도교 폭동으로 촉발된 북청사변은 연합국이 의화단을 격파하고, 연합국과 청나라 간에 신축조약(辛丑條約, 북경의정서)을 체결함으로써 끝났다. 이 조약의 주요내용은 청나라는 연합국에 배상금을 지불하고, 천진지역은 청나라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삼아 각국이 공동관리하며, 만주지방을 중립지역으로 삼고 군사 활동을 금지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각국 군대는 천진으로 물러갔으나 러시아 군대는 조약을 지키지 않고 사실상 만주 전체를 점령하였다. 러시아는 이에 머물지 않고 남하정책을 통해 오히려 조선의 서북지방을 침범하여 자신들의 세력 하에 두고자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침략행위에 자유로운 무역과 선교를 원칙으로 삼았던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각국이 분노했으나 일본의 우려와 분노가 가장 컸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만주지방을 획득했으나 러시아의 개입으로 돌려주었던 일본으로서는 만주지역이 러시아의 수중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이 러시아의 통제 하에 들어가 만주와 접경한 조선과 청나라가 위태롭게 되면 일본에도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1895년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조선 내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은 쇠락(衰落)하고, 친러파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에서의 영향력 회복을 노린 일본은 1896년 5월 14일과 같은 해 6월 9일,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정부 대신(大臣)의 임명과 해임에 관여하며, 조선의 영토 내에 그들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재정문제에 개입하는 등 조선의 자주독립을 침해하는 내용의 두 건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러한 내용의 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에서는 친러파와 친일파라는 두 갈래의 대립되는 세력이 등장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친러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동양에서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달가워하지 않던 영·미와 만주지방과 조선에서 영향력 회복을 꾀하던 일본의 끊임없는 외교적 노력으로 일본에 유리한 세계 여론이 형성되었고, 마침내 영국과 일본은 1902년 1월 30일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1903년 6월 23일 일본 어전회의에서는 대한제국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고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지배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을 결정하고 러시아에 다음과 같은 협상안을 제시했다.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독립과 영토를 존중할 것, 대한제국과 청나라에 각국이 가진 통상, 공업, 기타 이익 균등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할 것과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우선권 인정 등이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양국의 협상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해를 넘겼다.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로 협상에 진전이 없자 1904년 2월 4일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협상은 완전히 결렬되었고, 2월 8일 일본의 선발대가 인천에 상륙하였으며, 10일 양국은 각각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다.


일본의 대 러시아 선전포고문에서도 밝혔듯이 이 전쟁의 명분은 대한제국의 주권과 영토보전이었으니 이승만을 비롯한 당시의 개화파 지식인들이 러일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悲憤慷慨)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대한제국의 주권과 영토의 보존이 전적으로 러일전쟁의 결과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러일전쟁은 마땅히 조선이 치러야할 전쟁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일본의 승전이 확실시 되면서 대한제국의 조정에서 친러파는 사라지고 친일세력이 득세했다.


이에 앞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급박하게 감돌자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곧바로 서울로 들어와 대한제국에 대일(對日) 협력을 강요, 협박하여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전제로 한 조약을 체결했다.


이승만은 일본이 전쟁을 하여 우리나라를 지탱해 주기에 이르렀음을 통탄하며, 지금은 일본이 우리의 독립을 존중하고 영토를 보장한다고 하나 그것은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호의가 아니라 실제로는 세계 각국의 여론을 의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이 우리의 영토, 주권, 황실을 보전한다 하며 우리의 국정을 돕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의 독립에 적지 않은 침해가 되는 것이다. 이 조약 하나만 가지고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겉으로는 대한제국을 위한다고 생색을 내면서 속으로는 우리나라의 모든 권리를 장악했다. 이 얼마나 일본의 놀라운 계책인가. 이 조약으로 인하여 일본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칠 것인지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은 이러한 불평등 조약으로 말미암아 창자 대한제국의 주권과 영토가 일본에 의해 유린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독립정신』을 집필하며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국 동포들에게 호소하여 모든 동포들이 힘을 합하여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있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권리를 보전하여 영원무궁하게 만들고자 함이다. …어리석은 아내와 아이들이라도 그들의 마음속에 독립이라는 정신만 깊이 박혀 있다면, 2천만 동포가 다 죽어 없어지고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어 대한 독립을 지키겠다는 정신만 살아있다면, 독립이라는 말이 없어진들 무엇이 걱정이며 세계 만국이 능멸하기로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러므로 인민들의 정신 속에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황급히 쓰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은 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분할 점령당한 폴란드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폴란드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활동한 예를 들며, ‘그들의 마음속에 폴란드에 대한 애국심이 없어지지 않고 독립을 회복하고자 하니 폴란드는 결코 없어진 나라로 볼 수 없다. 그들은 반드시 다시 일어나 영원한 독립국가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즉 장차 우리나라가 독립을 잃게 될지라도 인민들의 마음속에 독립을 지키겠다는 정신만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독립을 회복할 수 있으므로, 백성들에게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한번 주권을 잃어버리면 다시 회복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므로 모두가 내 나라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 나서야 하며, 그것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 독립을 위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고 함으로써 모든 인민이 애국심을 가지고 대한의 독립 보전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Ⅲ. 청년 이승만의 정치 개혁운동과 한성감옥에서의 개혁운동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 손으로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아버지 이경선,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 6대 독자로 태어났다.


세살이 되던 해에 서울로 이사하여 네 살이 되던 해부터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서 수학했으며, 10세부터 19세가 될 때까지는 사간원 대사간직을 지낸 양녕대군 봉사손인 이근수의 도동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이승만은 19세가 되던 1894년에 터진 청일전쟁과 전쟁의 와중에 시작된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신긍우의 권유로 영어를 비롯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1985년 4월에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이승만이 성장하던 시기는 동북아시아의 기존 질서가 파괴되던 격동기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종주국이었던 청나라가 침몰했고,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던 조선왕조가 서구국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등 조선은 외국 문물의 유입에 따른 변화와 기존질서의 붕괴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격동기에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을 통해 새로운 혁명적 사상인 자유, 평등, 민권 등 근대적 정치이념과 미국식 민주주의 제도를 알게 된 것이었다. 이승만은 1912년에 쓴 글에서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배재학당에 가기로 하면서 가졌던 포부는 영어를, 단지 영어만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영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배웠는데, 그것은 정치 적 자유에 대한 사상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억압받고 있었는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기독교 국가 시민들은 그들의 통치자들의 억압으로부터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전 처음으로 들은 나의 가슴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지 상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너무나 혁명적인 것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같은 정치적 원칙을 따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896년 11월, 이승만은 서재필의 지도 아래 ‘협성회’라는 미국식 토론회를 조직한 창설멤버로서 토론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순수한 학생들의 모임으로 출발한 협성회의 토론장은 시급한 현안 문제를 다루는 등 점차 정치적 토론장으로 변모해 갔다. 이승만은 이 토론회를 통해 정치적 지식과 화술을 익히게 되었으며 또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승만은 1897년 6월 8일에 있었던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의 영어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은 하객들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이승만은 장안의 유망한 청년으로 떠올랐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1898년 양홍묵과 함께『협성회회보』를 창간하여 그 회보의 주필이 되어 논설을 쓰며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처럼 협성회에서의 활동은 이승만이 정치인과 언론인으로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여세를 몰아 1898년 4월 9일에는 유영석, 최정식 등과 함께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일간신문인『매일신문』을 창간하고, 같은 해 8월 10일 이종일과 함께『제국신문』을 창간하여 주필 및 논설자로 활약했다.


이승만은 언론인으로 맹활약하는 한편 서재필의 영향 하에 설립된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에 참여하여 정치개혁운동에도 선봉에 섰다. 특히 이승만은 1898년 3월부터 시작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3월 10일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租借)를 반대하기 위해 모인 제1차 만민공동회에서 이승만은 가장 인기 있는 웅변가로 인기를 모았으며, 총대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대중운동으로 말미암아 러시아 정부는 대한제국에서의 이권획득 책동 등의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이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관민이 협력하여 국권을 보호한 즉, 민의가 민주주의 원리를 밟아 국가의 중대한 정책을 변경시킨 민주주의의 첫 승리였다.


1898년 8월에 독립협회는 인민참정권운동에 박차를 가했고, 이승만 역시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독립협회는 개혁성향의 박정양·민영환 내각의 협조로 10월 29일에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고종으로부터 수구파 대신 퇴진 및 독립협회측이 제시한 ‘헌의6조’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에 놀란 수구파는 고종에게 독립협회가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고 익명으로 무고(無告)했다. 이 무고로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전격 체포·구금하고 독립협회를 해산했다. 이에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들과 민중을 규합하여 경무청과 평리원 앞에서 연일 철야농성을 벌이며 체포된 독립협회 간부 석방과 ‘헌의6조’ 실천을 요구했다. 결국 고종은 11월 10일 구속된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석방했고 ‘헌의6조’ 실천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더욱 과감한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제1차 중추원회의에서 최정덕과 함께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던 급진개혁가 박영효를 불러들여 기용하자고 동의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 일로 말미암아 고종의 노여움을 산 이승만은 관직을 빼앗기고 독립협회는 해체되었다.


독립협회가 해체된 후에도 더욱 대담한 행동에 나선 이승만은 고종 양위(讓位)사건에 연루되어 1899년 1월 9일 체포·수감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감방 동료 최정식의 탈옥 제의를 받아들여 1899년 1월 30일 탈옥을 결행했으나 실패하고 재수감되었다. 당시의 심경을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7개월 동안 나는 10킬로그램 정도 무게의 나무로 만든 형틀 칼을 목에 걸고 있었고, 두 발은 족쇄에 묶이고 양손에는 수갑을 찬 상태로 앉아 있어야 했다. 다른 죄수들은 여러 차례 몰래 들여온 아침 신문에서 내가 밤사이에 처형되었고 내 부친이 내 시신을 찾아가 묻기 위해 감옥소로 왔다는 기사를 눈물로 읽어주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나무칼을 풀었을 때 그들은 살인자를 데려가고 나를 다시 묶어두 었다. “내가 다음 차례일거야”라고 내 자신에게 말했고 내가 빨리 죽어 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고 바랬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 처한 이승만은 성경에서 위안을 찾았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뿐만 아니라 이상재, 이원긍, 유성준, 김정식, 홍재기, 이승린 등 사대부에게 전도하여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들의 개종은 기독교전파는 물론 기독교를 통해 백성들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기독교입국론을 뒷받침하는 등 사회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승만은 옥중학교와 옥중 도서관을 개설하여 수감자들을 교육시키는 한편 각종 서적 번역과 영한사전 편찬 작업, 저서 집필, 논설 기고 등 왕성한 활동을 했다. 제국신문에 기고한 논설을 통하여 망국(亡國)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한편 조정관리들의 무능과 부패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고종과 조정관리들은 여전히 ‘독립’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고, 개혁의 필요성도 깨닫지 못했다. 당시 고종이나 조정 관리들의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맥켄지는 이용익과의 대화 내용을 그의 저서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리는 그의 사랑방 마루에 앉아서 시국을 토론했다. 나는 한국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개혁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그는 미국과 유럽 나라들이 독립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반론했다. ‘아니 그것을 모르시오? 힘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조약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모르시오? 당신이 그 조약들을 지키도록 하려면 그만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 아니겠소? 당신의 나라는 개혁을 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오.’라고 나는 역설했지만 그는 ‘다른 나라들이 무엇을 하던 상관이 없소. 우리는 우리가 중립한다는 것을 선명(宣明)했고 우리의 중립을 존중하라고 당부했소.’라고 고집했다. ‘미국은 약속했소. 무슨 일이 있던지 미국은 우리의 우방으로 남을 것이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입장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사흘 후에 러시아 군함들, 바리아그와 카리옛츠는 제물포 앞 바다에 침몰해버렸고…일 본군인들이 조선황제의 궁궐을 점령했다. 그리고 일본공사 하야시는 황제에게 수리해 야 할 조항들을 제시했다. 명목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한국은 독립을 상실해 버렸다.


이 시기 이승만의 급진적 개혁성향은 점차 온건해져 점진주의 노선을 택했다. 급진 개혁사건에 연루되어 수감 중이던 이승만은 헌법을 채택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지만 우리나라 수준을 고려할 때 결코 쉽게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했다. 백성들이 낡은 습관에 억눌려 있으므로 먼저 백성들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교화되어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게 되어야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신학문을 배우는 것이며, 신학문을 통해서 자유에 대한 권리와 한계를 알고 지킴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률을 알고 또 그 법률을 잘 지켜야 자신의 권리 행사를 방해받지 않을 것이며, 이 원리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나라에게도 적용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곧 나라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 시기 또 하나의 변화는 조선왕조의 전제군주제도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하려 했던 집념이 자유, 평등,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에 바탕을 둔 모범적인 기독교 국가인 미국을 근대 국민국가의 모본(模本)으로 삼아 미국의 공화제를 채택한 신대한 공화국 건설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Ⅳ. 『독립정신』내용 분석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립정신은 51장과 후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부터 10장 까지는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분석과 비판, 독립을 위한 백성의 역할의 중요성을 들며 백성의 각성과 개혁의 필요성 등에 대해 언급했다.


1장에 들어가면서 이승만은 ‘삼천리강산 우리 대한은 삼천만 백성을 싣고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 위에 표류하고 있는 배와 같다.’고 비유하고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공과 선객들이 협력하여 위기에 처한 배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장부터는 우리가 얼마나 위태한 상황에 처했는지, 왜 그러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데 대해 각자가 얼마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부터라도 모두가 자기 과오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개의치 말고 각자가 먼저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를 주문했다. 만일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책망을 받는 것이 마땅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피해 역시 우리 모두에게 미치게 된다고 했다.


4장에서는 백성이 우리는 할 수 없다는 마음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나서 최선을 다한다면 반드시 문명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즉 백성의 변화를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다.


5장부터 10장까지는 문명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백성이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설명했다. 지금까지 오랜 압제와 고루한 풍습이 백성들의 사기를 꺾어놓아 경쟁심은 사라지고 독립하려는 의지도 없으므로 하루속히 마음속에 독립정신을 굳게 하며, 외국과의 통상은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므로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여 교류하고 개화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8장에서는 독립국과 중립국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는 당시 일부 조정관리들이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을 만들자는 생각을 가졌던 것에서 기인(起因)하는 것 같다. 우리가 자주독립할 의지와 힘이 있다면 세계 각국과 자유롭게 경쟁하여 보다 문명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 나라의 위태함을 염려한다면 중립국을 만들 것이 아니라 죽을 각오로 독립의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라와 백성이 개화되어야 하며, 자주독립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므로 백성들이 하루속히 교육을 받아 자주독립의 권리를 지키자고 역설했다.


11장부터 21장까지는 국민 계몽을 위한 글이다. 특이한 것은 민주주의의 장점을 설명하며 미국독립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부터 이승만은 종래의 입헌군주제보다 미국식 공화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22장부터 25장까지는 백성의 의무와 자유권리의 한계에 대해 설명했다. 이승만은 천부인권(天賦人權)에 대해 논했는데 이는 기독교와 프랑스혁명사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권리의 존재는 신학문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므로 백성들이 먼저 신학문을 배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했다. 그러나 백성이 자유권만 알고 그 한계를 모른다면 그 권리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유에 따른 책임과 한계를 분명히 했다.


26장부터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이승만이 직접 보고 듣거나 경험한 내용을 중심으로 논했다. 조선의 국내 상황과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한 청·일·러의 각축, 청일전쟁이 조선에 미친 영향과 러일전쟁이 조선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분석해 놓았다. 특히 이 부분은 18세기 중엽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내부에서 발생한 사건, 조선과 주변국과의 관계 및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술했기 때문에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 또한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러일전쟁이 발발할 무렵만 해도 일본에 상당히 호의적이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개화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과 일본 간에 강압적인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이승만은 조약(條約)의 전문(全文) 6조를 그의 책에 인용하고, 이 조약이 대한의 독립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즉 대한제국이 일본의 영향을 얼마쯤 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 원인은 과거에 우리가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지금도 책임지고 나라를 이끌어나갈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또한 현재의 상황으로는 자주권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10~20년 전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보장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그 해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우리가 능력 있는 지도자들을 육성하고 세계여론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바뀔 때까지 한일조약에서 합의한 대로 시행하면서, 점차 그 조약에 의해 영향 받는 범위가 줄어들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정부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무엇을 할 것이냐에 달렸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별로 다루지 않고, 백성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에 초점을 맞추었다. 즉 독립의 기초를 세우는 책임은 우리 백성들에게 있고, 이 기초를 세우려면 일본인들의 굴레를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초반부터 전쟁의 양상이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며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 되자 일본정부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일례로 1904년 3월 초, 양국 황실 간의 친선을 도모한다며 특명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친선도모는 위장에 불과했고 주된 목적은 대한제국의 국정에 간섭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한에서 일본의 권익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이승만은 50장과 51장에서 일본정부의 의도가 대한제국에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대한 조정의 무능과 분노를 다음과 같이 토로(吐露)했다.


슬프다! 대한동포들은 장차 어디로 가려는가.…이것은 우리나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제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논의조차 할 수 없다. 나라의 권리와 이익을 누구에게 팔아먹으려는지 또는 이미 팔아 넘겼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 가운데 오히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관한 문제를 자기 나라 정부에 이것저것 요청하며 시행해달라고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우리나라에 백성이 있다 하리오.


그리고는 나라의 운명이 위태한 상태에서 취해야 할 지침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지금 우리에게 급하고, 급하고, 또 급한 일은 다른 무엇이 아니고 알려고 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라 형편에 행운이 오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낙심하지도 말며, 정부가 어찌 되든지 상관하지도 말고, 또한 갑자기 정부에 반대하려 하지 말고, 각자가 나라의 주권을 보호할만한 사람이 되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라의 형편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전파하여 하루속히 전국 모든 백성들에게 다 알게 해야 할 것이다.


목숨을 바칠 각오로 대한제국의 자유와 독립을 나 혼자라도 지키며, 우리 2천만 동포 중 1천 9백9십9만9천9백9십 명이 모두 머리를 숙이거나 모두 살해된 후에라도 나 한 사람이라도 태극기를 받들어 머리를 높이 들고 앞으로 전진 하며, 한 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을 각자 마음속에 맹세하고 다시 맹세하고 천만번 맹세합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는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독립주의의 긴요한 조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승만은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 도입부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히 알아야 할 내용들을 기록했으므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이를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6대 강령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문물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다섯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 연결되는 주제로 당시 조선사회의 폐쇄성을 지적하며, 세계에 대해 개방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방하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교류를 통한 통상(通商)은 서로에게 이익이 되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근본이라고 했다. 그러나 소극적인 교류가 아닌, 이익 발생을 위해서는 상권 확보가 시급하므로 우리도 외국으로 나가 국제사회의 상업의 실상을 관찰하는 등의 적극적인 교류를 추진해야하며, 수출입의 주도권을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하여 수입과 수출의 균형을 맞춰야만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국제통상원리 내지는 경제원리를 설파하며 무역입국을 부강(富强)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사회계급이 깊게 뿌리박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새로운 문물의 도입이 개개인의 발전으로 연결되어 외국인들과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도 외국의 정치, 종교, 풍속 등을 알아야 하므로 외국 유학 등을 통해 신학문을 연마하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야한다는 주문이기도 하다.


이승만은 대한제국이 주변국에 의해 자주권을 침해받게 된 원인을 자주적인 외교를 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진단하고 셋째 강령에서 외교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청나라에 의존적이던 대한제국은 청나라의 쇠퇴에 당황하고 일본이나 러시아에 의존하여 주권을 지키려는 정책을 펼쳤다. 이승만은 강대국 사이에서 약한 나라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외교가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했고, 이승만의 이러한 주장이 옳았음은 1948년 건국 후 국정(國政)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이승만은 외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원칙과 법을 기준으로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고 했다. 국제법의 테두리 내에서 당당하고 평등하게 교류하는 자주외교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과 같은 그룹에 속해야 하며, 진실함을 외교의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그동안 우리의 신뢰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반드시 법에 의해 심판을 받도록 해야한다고 했다. 즉 신의성실과 법치주의를 성공하는 외교의 자세로 제시했다.


넷째에서는 법치주의와 인도주의를 강조했다. 외국인에게 치외법권을 허용함은 우리의 주권이 침해되는 것이므로 하루속히 법치를 세워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는 근본이라고 했다. 그러나 법치만을 내세우면 인심이 각박해 진다며, 진정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인도적 사업을 할 것을 주문했다.


또한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의 중요성을 논하며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우리나라 사람이나 물건이라도 외국인들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하며 국기(國旗)를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국기란 그 나라의 국민과 영토를 상징하므로 국기를 사랑하는 것은 곧 국가를 사랑하는 것이며, 국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국기로 대표되는 자기 나라의 백성과 영토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참된 충성을 한다고 봤다.


이승만은 특히 외국 국적을 갖지 말 것을 강조했다. 어려운 가운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올바른 정치로 백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자유롭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 일신의 편안함만 쫓아 사는 것은 당당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은 외채(外債)를 빌리지 말라는 내용이다. 당시 고종의 무분별한 황실재정운용으로 말미암아 정부재정이 잠식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1904년부터 일본은 재정적자를 이유로 군사비 삭감을 요구하는 등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사실상 대한제국정부를 장악하고는 필요하지도 않은 차관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대일 외채는 급격히 증가하여 재정운용에 큰 부담이 되었다. 결국 1907년 일제의 내정간섭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에 의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승만은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에 돈을 빌려주고 그것을 빙자하여 내정간섭을 하게 되므로 그것이 바로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리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정부에서 필요한 재정은 비싼 이자를 주더라도 국채를 발행하여 백성들로부터 돈을 빌리면 국가의 부(富)가 외국으로 나가지도 않고 주권을 침해받을 위험도 없다며, 백성들도 정부의 재정이 빈약한 것을 염려하고 바로잡는 노력을 하여 외채를 쓰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주장이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으로 표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섯째는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은 의무에는 사적인 의무와 공적인 의무가 있으나 그 무엇보다 공적인 의무가 앞선다며, 공적인 이익에 해가 된다면 도덕적 의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즉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가장 큰 도덕적 의무이며, 도덕적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는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자연히 같은 이상을 추구하는 도덕적 기준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며,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여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며 두 가지를 설명했다. 하나는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독립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길 것과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승만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 사상은 권리의식에 바탕을 둔 자주·독립일 것이다.


즉 자립하는 마음이 없으면 남에게 의지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자유를 속박 당하게 되므로 쇠잔하여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국가 구성원인 백성이 쇠잔하여진다는 것은 결국 국가 소멸로 귀결되므로, 개개인이 자립정신을 가지고 사회에 기여하며 나라를 위한 책임감으로 나라의 독립을 보호하는 무거운 짐을 나누어진다면 국가는 잃었던 백성을 다시 찾은 것이 되고,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스스로가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되는 것이므로 이를 매우 중요한 변화라고 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권리 또한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편적 윤리 원칙으로 볼 때 그것이 공평하다는 이승만의 주장은 천부인권으로 이는 특히 지배층에 대한 주문이라 할 수 있다.


개화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었을 때 폐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행해 내려온 것을 생각하면 윗사람들이 어느 정도 손해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며, 오늘날 그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것을 피할 도리도 없다. 설령 윗사람들이 이로 인해 손해를 입는다하더라도 내 나라 어리석은 백성들을 압제한 결과로 우리가 외국인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 몇 배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책 말미(末尾)에서 “나는 가지와 잎만 다룬 것이고, 문제의 근본을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종교로 모든 일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이승만은 기독교를 통해서 변화되는 것만이 우리나라가 영국이나 미국처럼 동등한 문명국의 수준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Ⅴ. 결론


이렇게 옥중에서 어렵게 쓰여진『독립정신』은 국내에서 발간되지 못하고 박용만에 의해 미국으로 반출되어 1910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출판되었다. 이때 『독립정신』의 내용을 미국인들에게 홍보할 목적으로 배포한 문양목 명의로 된 서평에서 이승만은 『독립정신』의 저술 목적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이 서평에 대해 유영익 교수는 “이 서평은『독립정신』의 핵심적 주장을 요령있게 설명하면서 동시에 옥중 이승만의 정치사상을 집약한 글이라고 여겨진다.”고 했다.


…이 책의 주요 목적은 동포들에게 서양세계에서 강하게 발달한 민족주의의 원칙을 가르치고 그들의 마음속에 미국 독립전쟁을 특징이었던 유(類)의 독립정신을 촉발시키는 것이었다. 저자는 절대주의는 [자기]민족의 독립에 치명적인 해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는 당시 [조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유의 폭군적인 탄압은 자연히 민란(民亂)을 초래하며 이러한 민란은 급기야 외세의 개입을 자초하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민족의 멸망을 예방하기 위해 낡아빠진 절대군주제 대신 인민들에게 일정한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는 입헌주의정부를 도입할 필요성을 간파하였다.


초판본 서평에 드러난 것과 같이 이승만의 정치사상의 근간은 민족·민주주의로, 개혁운동 초기에 집착했던 입헌군주제에서 자유·평등·민주주의·법치주의·인도주의를 기초로 한 모범적인 기독교 국가 건설로 바뀌었다. 그 결과 이승만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정치제도는 민주공화제라고 믿고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인 미국식 민주공화제를 선호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사상은『독립정신』전반(全般)에 걸쳐 천부인권론에 바탕을 둔 개인의 자유, 평등, 인권을 논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이승만은 9장에서 국제법은 하나님의 뜻과 인류 보편적 진리에 따라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들에게 똑같은 이익과 권리를 보장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즉 개화된 나라는 모든 백성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되고 모든 사람의 이익을 차별 없이 보호해 준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조(思潮)를 무시함으로써 발생할 국내적 혼란은 급기야 나라의 독립을 잃게 되는 즉, 자주권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라고 보았다. 즉, 자주와 독립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로 우리가 이러한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원인은 교육을 받지 못함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백성이 제대로 교육을 받고 자주의 중요성을 깨달으면 힘이 생겨 국가의 독립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승만은 개개인의 자주독립은 국가의 자주독립으로 이어진다고 본 것이다. 이승만의 이러한 생각들은 독립운동 활동기에 교육 및 종교사업과 외교를 중시하는 외교독립노선으로 표출되었다.


오영달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승만의 인권과 주권에 대한 사상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그는 백성의 자유와 권리를 천부적인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따라서 정부의 존재목적도 이러한 백성의 자유와 생명의 권리를 보다 잘 보호하기 위한 데서 찾았음을 볼 수 있는데…천부 인권사상은 이론적으로 주권재민사상으로 연결되었는데…그는 국권의 보존을 강조하였는데 이것도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단합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봄으로써 결국 인권사상에 그 논리적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흔히 사용하였던 독립권은 개인에게서는 천부인권으로 나타나고 국가에서는 국권으로 나타나며 나아가 대외적으로는 자주권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수준의 복합적 개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적 맥락에서 본 논문은 이승만의 사상적 기초를 자연권에 기초한 인권론 및 피치자 즉, 시민 중심의 주권론으로 특징지웠는데 이는 국내차원에서 국민에 속하는 본원적 주권과 국가 통치자들에게 속하는 파생적 주권의 이중주권론의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이러한 시각에서 국가통치자에 속하는 파생적 주권이 소멸하였을 때일지라도 아직 국민에게 속하는 본원적 주권은 남아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파생적 주권의 회복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승만은 청년기에 주창했던 개혁사상을 초지일관 유지한 보기드문 신념의 인물이기도 하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기독교적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문명부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청년기에 품은 원대한 포부는 30여년 이상 지속된 해외 망명생활 중에도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승만의 원대한 신대한 건설의 구상은 1948년 대통령 중심제의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탄생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이승만이 청년기 때부터 추구했던 자유·평등·민주주의·법치주의·인도주의 등의 정치적 이념들은 건국이상에 충실히 반영되었으며 그의 통치이념에도 반영되어 오늘날 대한민국 통치의 근간이 되고 있다.


이주영 전 건국대 명예교수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이 책은 ‘세계화’와 ‘선진화’가 외처지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를 위한 예언서, 또는 ‘문명개화’의 지침서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선구적인 업적이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정형은 20세기 초반과 크게 다르지 않다. 100여 년 전 한성감옥에서 20대의 청년 개혁운동가 이승만이 우국충정으로 절규한 이 책의 내용들은 오늘날의 급변하는 세계화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우리를 위한 지침서이자 뛰어난 생존전략서이다. 이 책에 녹아있는 이승만의 정치사상은 대한민국 건국이념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국가정체성이 파괴된 이념의 혼란시대에 대한민국 정체성 회복을 위한 이론서로, 선진일류 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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