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3
한국 기독교사 톺아보기 - [격문] 진짜 못참겠다!! 결점투성이 한국 기독교회에 드리는 한국기독교사 톺아보기 팀의...
한국 기독교사 톺아보기 - [격문] 진짜 못참겠다!! 결점투성이 한국 기독교회에 드리는 한국기독교사 톺아보기 팀의...
한국 기독교사 톺아보기
4 December at 00:48 ·
[격문] 진짜 못참겠다!!
결점투성이 한국 기독교회에 드리는 한국기독교사 톺아보기 팀의 공개서신
제목에는 기독교회의 결점이라 하였으나 대부분은 기독교인의 결점이라 함이 적당할 듯하다. 앞선 글에서 말하였거니와 내가 결점을 말하려는 것은 비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고하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보더라도 오늘날 한국에는 너무 토론이 없다. 이것이 좋지 않다. 자꾸 토론하는 중에 만사가 다 진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기독교회의 결점을 말하는 것이 또한 무익한 일은 아닐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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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회는 계급적이라는 것이다. 계급 사상은 동양 그 중에도 한국에서 어쩔 도리 없을 정도로 깊은 근거를 가진 것이다. ‘관민’ 이라든가 ‘장유’라든가 부부, 부자, 형제, 이웃을 막론하고 심지어 친구간에도 둘 이상이 모이면 반드시 계급이 생겨나서 자유평등한 모임은 보기 어렵다. 평등주의인 기독교도 이 사상을 밀어내지 못하는 듯하여,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는 이전 사색반상과 같은 계급이 엄연하게 되어 뿌리뽑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목사나 장로와 보통교인과의 관계는 마치 관민, 장유, 사제의 관계와 같은 것이 되어 목사와 장로는 언제나 보통교인의 위에 서려고 하고 보통교인들도 목사나 장로의 관여와 간섭을 받으려고 한다. 교회 내에서야 목사는 장로는 지도하는 자, 보통교인은 지도받는 자라 하는 것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다만 교회문을 나서면 모두 평등한 친우이고 형제이어야 할 것이 아닌가. 관리도 관청에 앉아서 집무를 볼 때나 인민을 다스리는 자이지 관청문을 나서면 보통 인민과 평등한 국가의 신민일 것이 아닌가. 예로부터 전제사상이 남아 있어 갑이 어떠한 관계로 을의 위에 서게 되면 을의 다른 관계에까지도 자기가 위에 서려는 경향이 있다. 가령 선생은 교육은 관해서 제자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자이지 제자의 가정사나 생업, 혼인이나 사교와 같은 데 관여할 권리가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이 교회 내에서 종교적 가르침이나 의식을 행할 때에 목사나 장로는 교인을 지도하는 지위를 가지더라도 교회 밖에 있어서는 평등한 교인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서 목사 장로는 절대적으로 보통교인의 위에 서서 만사에 우월권을 가지려고 한다. 목사 장로는 양반이고 보통교인은 상놈이라 할 만하다. 어디서든지 윗자리를 점하고 무슨 일에든지 참견하는 자리에 서려고 한다.
목사 장로뿐 아니라 지방에 가면 하급 교역자까지도 보통교인보다 높은 자리에 처한 줄로 안다. 그래서 교역자 되는 것이 예전 관리되는 것 같은 명예와 권세라고 생각한다. 교역자를 선거할 때 혹은 얼굴을 보고 혹은 교인이 분포하는 지역의 균형을 보고 혹은 선거운동을 하는 등 추한 모습도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설립한 학교에서나 기타 교회 관련한 사회에서 교역자의 자녀는 유형 무형으로 다른 이보다 우월한 대우를 받는다. 마치 귀족과 서민의 구별 같다. 가장 웃기는 것은 교역자가 그 교회 내의 자기보다 학식이나 인격이나 사회적 지위가 우월한 사람에게조차 자기 아랫품에 두려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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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교회지상주의이다. 첫 번째 말한 것도 사실은 이 교회지상주의에서 나오는 병폐이다. 이것은 서양에서는 19세기 이전까지 있던 병폐였다. 여러 종교전쟁은 사실 국가와 사회가 이러한 교회지상주의의 폭력을 벗어나려 하던 투쟁이었다. 교회는 국가의 위에 서서 윤리 도덕은 물론이고 교육, 학술, 문학, 예술에까지 간섭하였다. 무엇이건 교회의 승인을 받지 못한 것은 모두 악이라 하였다. 교회는 제반 만사에 인류를 관장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자연과학과 국가주의의 발달에 따라 19세기 후반 이후로 종교는 정치, 경제, 과학, 문학 등과 마찬가지로 문명의 분과에 불과하다는 사상이 보급되었다. 즉, 인생이란 종교 하나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과학, 문학 등 여러 분과를 영위하면서 사는 것임을 자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이나 학술이나 기타 문명의 여러 분과는 교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고 교회도 전처럼 분에 넘치는 간섭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회는 바로 일세기 이전 교회지상주의를 따르고 있다. 이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한국에 다른 문명이 들어오기 전에 종교만 들어와서 종교의 신자는 종교의 신앙으로써 인생의 모든 것을 삼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에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아무리 덕행이 있는 자라도 죄인이고 악인이라 한다. 마치 유대인이 소위 ‘이방인’ 을 대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선교사들이 자기네들 조상인 청교도 시대, 즉 교회지상주의 시대의 기독교를 전파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리를 따르자면 기독교의 신앙이 아니면 덕행도 소용없고 학식도 소용없다 한다. 이 두 가지 원인이 합쳐져 한국 기독교인 대다수가 교회지상주의라는 완고한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교회지상주의는 몇 가지 나쁜 결과를 초래하였다. 첫째는 교회와 세속의 구별이 심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교인 아닌 자를 보기를 자기네들과는 완전히 종류가 다른 인간으로 여긴다. 교인 아닌 자는 다 악인이요 신용없는 이방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교인 아닌 자와 혼인도 금하고 교우관계까지 꺼린다. 이렇게 교인과 비교인을 소위 양과 염소처럼 확연히 구별한다. 다른 모든 좋은 점을 다 구비하였더라도 기독교 신앙이 없으면 그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
교회지상주의의 나쁜 결과 둘째는 학문을 천시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학문을 천시한다 하니 모순된 듯하나 이른바 진실한 기독교인은 학식을 “세상지식”이라 하여 극히 천대하며 또 “세상지식은 믿음을 박약하게 한다”하여 학문을 도리어 악마의 유혹처럼 원수처럼 여긴다. 전문(대학과정) 이상의 학문을 배우려 한다든지 외국에 유학하려 하는 자는 이미 지옥문에 발을 넣은 듯이 생각한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 암만 공부하면 무슨 소용이니? ” 하는 것이 진실한 교인이 자기 자녀에게 주는 교훈이고 교회가 설립한 학교에서도 현대 교육의 중심과정인 자연과학이나 지리 역사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지금 한국인은 학문 구하기를 갈급한 자가 물을 찾듯이 하여야 할 터인데 말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목사 장로 같은 교역자들이 “세상지식”에 반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겠다. 첫째는 자기네가 문명이라든지 과학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기 때문에 소위 “세상지식”에 관해서 이해와 동정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세상지식”을 많이 배운 자는 자기네 소위 “하나님 지식”에 순종치 아니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조금 “세상지식”을 가진 청년이 사실상 얼치기 개화가 되어 신앙이 박약해지고 어른을 경멸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든 간에 지식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멸망의 근본이므로,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교회지상주의 세 번째 폐해는 종교적인 것 이외의 일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금 기독교인들은 마치 옛날 사농공상 중 농공상을 천하게 여기는 것처럼 종교적인 것 이외의 사업을 천하게 여긴다. “하나님 일”과 “세상 일”의 구별이 있을 까닭이 없다. 인류에게 복과 이익을 주는 일은 다 “하나님의 일”일 것이다. 목사 전도사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하나님의 일”을 각자 나누어 하는 것이니 목사 전도사도 실제 “하나님의 일”의 일부를 분담하는 것이고 상공업자, 학자, 기술자가 모두 일부를 맡아 하는 것이다. 나는 결코 일요일에 회당에 가서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다른 육일 동안 인류의 복리를 위하여 하는 사업이 모두가 하나님께 섬김을 바치는 것이다. 차라리 육일간 열심히 일하고 일요일에는 쉰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농공상업 어느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겠는가.
교회지상주의의 네 번째 나쁜 결과는 종교적 의무 이외의 모든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매일 성경을 외우고 찬송 기도를 하고 주일에 회당에 가며 목사의 지도를 순종하면 인생의 의무를 다하는 줄 안다.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다른 의무를 가볍게 여긴다. (소위) 진실한 교인은 비신자인 부모와 어른을 가볍게 여기고 비신자인 친척 친구를 이방인으로 여기고 국가 사회에 대한 의무를 “세상일”이라 하여 극히 가볍게 여긴다. 그러나 이 모든 의무를 제외한 자를 국가와 사회에 유익한 일원이라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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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나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결점으로 계급적인 것과 교회지상주의를 들었다. 세 번째 결점은 교역자의 무식함이다. 목사 전도사 장로 같은 교역자는 최저 계급의 민중과 접하는 동시에 최고 계급의 민중과도 접할 뿐더러 종교적 의미에서 지도하는 자이다. 그리 하려면 상당한 학식이 있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신구약 성경만 두세 번 맹독하고 백 장 정도 되는 설교학이나 배워서는 부족할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기독교 성경의 대표적인 여러 종류의 신학을 열람하고, 예로부터의 저명한 철학설이며 종교문학을 열람하고, 그 중에서도 현대의 철학의 대강과 과학의 정신을 이해하여서 현대 문명의 정신과 현대 사조의 본류와 현대 문명과 종교 간의 관계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심리, 윤리, 수사학 지식이 필요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정도 해야 전도도 하고 지도도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교역자는 어떠한가?
잠깐 장로교회 목사 양성의 상황을 보자. 보통학교 졸업 정도도 못되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에게 매년 세달씩 오년간, 즉 15개월 동안 신구약 성경을 한두 번 읽어내면 목사 자격을 얻어 강단에 서서 만인의 정신을 지도하는 목사가 된다. 그들이 무식할 것은 물론이다.
하기는 초창기 시대이므로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또 요즘 들어서 신학교 입학생 자격 정도도 높이고 학과에도 다소 개량한 점이 있다 한다. 아직 그 내용은 알 수 없고 성과에 대해 고찰할 시기도 아니거니와, 얼마간 진보야 있겠다. 그러나 기독교회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방침이 잘못되었다.
가령 신학교 입학지원자로 말하자면 노회(장로교의 예를 들고 있으므로) 검정위원의 검정에 합격해야 하고 합격하는 조건은 신앙이라 한다. 아무리 신학을 연구해서 교역자가 되려는 열망이 있는 자라도 이 검정에 합격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그런데 그 검정위원들은 대체로 사람의 성격과 재능을 판단할 능력이 없는 교육받지 못한 노인들이다. 게다가 신앙의 검정이라면 하느님8밖에야 누가 알 수 있는가. 그런데도 무엇을 표준으로 하는지 반수 이상은 불합격 처리된다. 합격하는 사람이 불합격한 사람보다 우수하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렇게 해서 다수의 종교적 천재의 앞길을 막는구나. 그저 만사 “예 예”하고 검정위원과 마찬가지로 미신적이고 마찬가지로 무식하고 마찬가지로 자각이 없는 자라야 가장 합격하기 쉬울 것이다.
신학교 입학뿐 아니라 기타 교회에서 사람을 쓰는 방법이 모두 이 모양이므로, 상당한 자각과 천재와 학식을 가진 인사는 좀처럼 교역자가 되지 못하고 선교사와 원로들에게 유유낙낙하게 납미헌첨하는 자라야 등용된다. 이것이 교역자가 무식한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기독교회 안에서 현재 대표적인 인물이 결코 기독교회 밖에서도 가장우수한 인물이 아니다. 우수한 인물은 도리어 불운한 경우에 처하여 아까운 천재를 썩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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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결점은 미신적이라는 것이다.
미국 사람이 선교하는 방법은 크게 나누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 나라나 그 밖의 문명국에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 남양군도, 중국, 한국 등 자기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민족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별에 따라 성경 해석과 의식(儀式)의 경중에 차별이 있다. 가령 문명 민족에게는 성경을 해석할 때 되도록 합리적 과학적으로 한다. 신학이 과학과 타협하는 것이 현대에 극히 현저한 사실이다.
처음에는 교회가 과학을 박멸하려 하다가 마침내 과학과 악수를 하게 된 것이다. 현대의 기독교회는 다윈의 진화론을 믿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믿는다. 창세기의 천지창조설을 문자대로 믿는 교인이 문명한 민족 중에 있을까? 교회 부설 학교에서도 자연과학과 현대문학 철학의 과정을 넣는 것을 보더라도 얼마나 현대 기독교회 신학이 과학과 타협하였는지 알 것이다. 문명 민족 중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는 이러하다.
그러나 문명이 없는 미개한 민족에게는 높고 심오한 이론을 가르쳐도 이해하지 못하니까 옛부터 내려오는 미신을 이용하여 천당지옥설과 사후부활, 기도만능설 같은 것으로 몽매한 민중을 죄악에서 구원하려 한다. 이것은 불교에서도 교육받지 못한 하급 우민을 위하여 취하였던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이해와 감상보다 미신하기를 권하고 맹목적으로 세례, 예배, 기도 같은 의식의 신비적 공덕에 의지하기를 권하는 것이다. 한국 각 교회에서 또는 각 교인의 가정에서, “병을 낫게 해줍소서”, “혈육이 없으니 아들을 점지하여 줍소서”, “천당에 올라가게 하여줍소서”하는 기도를 진정으로 올리고 진정으로 그 효력이 발생하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몽매한 민족은 하나님을 서낭신이나 대감신 같은 귀신의 대장으로 여기는 것이다. 기도만 올리면 풍랑에 파선도 아니하고 생존경쟁에 열패도 아니할 줄로 안다. 이것이 미개한 민족에게 전파하는 기독교이고, 한국의 기독교는 안타깝게 여기에 속한다.
일본 기독교를 한국 사람은 신앙이 약하고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방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기독교 또는 한국인의 신앙은 세계의 으뜸이라고 자긍한다. 그러나 일본 기독교는 우리 선생되는 미국 선교사 본국에 있는 기독교와 같은 기독교요, 우리 기독교는 아프리카와 중국에 있는 기독교인 것이다. 미국에서 처음 오는 선교사는 한국에 오래 있은 선교사의 지도를 받고서야 성경을 해석한다 하더라. 그 지도를 아니 들으면 축출을 당한다 하더라. 아무려나 얼른 보더라도 일본에 와 있는 서양 선교사와 한국에 와 있는 서양 선교사의 성경 해석 또는 성경과 의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나는 꼭 서양 선교사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저들의 눈에 아프리카의 토인과 같이 비친 것이 분할 뿐이다. 물론 선교사들의 방침은 현명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야 무식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겠다. 더구나 초기에 신도들은 무식한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무식한 계급이었으니까 그러한 방법을 취한 것이 매우 현명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보하였다. 얼마간 신문명의 세례를 받았다.
30년 전 우리와 오늘날의 우리는 문명정도나 이해력에 약간 차별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종교도 거기에 부응하여 진보하여야 할 것이다. 적어도 오늘날 약간 교육받은 계급은 현재의 기독교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실상 여러 청년들로부터 교회에 대한 불평을 듣는다. 그럴 때마다 노인들은 “네가 믿음이 없다”하고 책망한다. 어느 편이 옳을지는 시간이 증명할 것이다.
근래 교육받은 계급 인사와 청년학생들이 점점 다른 이의 교회로 가는 경향이 있음은 실로 그 징조가 아닐까? 재래 교회에 불만이 있어 이성의 만족을 얻으러 가는 경향이 아닐까? 그런데 한국의 교회는 여전히 “믿음이 약하다”는 책망을 가지고 그 파멸을 막을 수 있을까? 저번 백만명 전도 운동의 실패와 근래 점점 새 교인 증가율이 감소하는 것과 교육받은 계급이 다른 교회로 가버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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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회는 실로 대개혁의 기회를 만난 줄로 안다. 새로이 루터, 칼빈, 후스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30여년 명예로운 역사를 가진 한국 교회의 앞날은 비관밖에 없을 것으로 안다. 미신을 깨트리고 문명적 신교회로 개조해야 될 줄 안다.
이상에서 나는 현재 기독교회의 결점으로 계급적인 것, 교회지상주의, 교역자의 무식한 것, 그리고 미신적인 것, 사개조를 열거하였다. 다시 이를 통틀어 말하면 현재 한국교회는 전제적이고 계급적이다. 기독교의 근본 특징인 자유평등의 사상을 몰각하 였으며 종교 신앙을 인생의 전부로 여겨 신자 비신자 구별을 선인 악인 구별처럼 여긴다. 인생의 행복은 문명에서 오고 문명은 종교 이외에 정치, 법률, 실업, 과학, 철학, 문학, 예술 및 각종 기예로 성립된 것이므로 종교는 실로 이들 여러 분과 중의 하나에 불과한 줄 모르고 학술 기예를 경멸하고 여러 문명사업을 비신성시하여 문명 진보의 열망이 없으며 교역자가 문명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수 교인을 미신으로 이끌어 문명의 발전을 저해하며, 미신적 신앙을 고집하여 사회의 추세와 더불어 나아가지 못하므로 마침내 문명적 종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 하겠다.
교회 여러 노인은 논자를 책망하실 것을 안다. 그러나 책망하기 전에 한번 반성 하시기를 바란다. 내 주장의 올바름 여부는 내가 알 수 없으나 교회와 사회를 위하는 충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은 하나님 앞에서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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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글은 춘원 이광수가 1917년 11월 「청년」 지에 기고한 “금일 조선야소교회의 결점” 전문입니다.
* 여러분을 낚기 위하여 '조선'을 '한국'으로, '예수교'를 '기독교'로 수정하였습니다. 저희가 무슨 공개서신을 보내겠습니까. 각 교단의 총회장님, 감독회장님 이하 모든 목사님들 늘 사랑하고 존경합니... 충성충성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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