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9

재한일본인 처 모임 이끈 97세 구니다 할머니 "日食 섞인 설 차례상 벌써 66번째 차리죠"



재한일본인 처 모임 이끈 97세 구니다 할머니 "日食 섞인 설 차례상 벌써 66번째 차리죠"



재한일본인 처 모임 이끈 97세 구니다 할머니 "日食 섞인 설 차례상 벌써 66번째 차리죠"


입력 2011.01.30 12:09

김혜경 기자

"신정에는 찹쌀 떡을 넣은 오조니(お雑煮ㆍ일본식 떡국), 설에는 한국식 떡국을 맹근 지 60년이 넘었심미더."

한국에서 66년째 설을 맞는 구니다 후사코(國田房子ㆍ97) 할머니는 말투부터 영락없는 '부산 아지매'다. 해방 전후 한국인과 결혼해 국내에 머문 일본인 여성을 '재한 일본인 처'라 부르는데, 구니다 할머니는 그 중 연장자다. 따지고 보면 국제결혼 1세대인 셈이다.

설을 1주일 앞둔 지난달 26일, 부산 동래구 온천동 집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엿기름 대신 누룩으로 만든 일본식 식혜와 한국의 쌀강정을 차려 나온다. 할머니는 "설을 맞아 부산, 울산, 경주의 어렵게 사는 회원들에게 먹거리와 차례 경비를 갖다 주느라 하루가 짧다"고 했다.


그는 재한 일본인 처 모임인 부용회(芙蓉會) 창립을 이끌고, 40년 넘게 부용회 부산본부 회장을 맡아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일본인 여성들을 경제적, 정신적으로 지원해왔다. 기댈 데 없는 그들의 거처도 마련해줬다.




생활 속 아이디어가 사업이 되다





백수(白壽)를 앞두고 있지만 구니다 할머니는 활기가 넘쳤다.이번 설에 할머니 집은 4대에 걸친 40여명의 후손들로 북적댄다. 슬하에 3남4녀를 뒀는데, 황금연휴를 맞아 부산이나 일본에 사는 자식들이 모두 찾아온다는 것. 해마다 그랬듯 큰아들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할머니 집에서는 일본 음식을 차리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할머니는 "처음 시집왔을 땐 만들 줄 아는 한국 음식이 하나도 없어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며 "시어머니, 형님들이 그저 귀여워해준 기억이 난다"고 했다. "지금은 못하는 거 없지요. 올해도 된장, 고추장을 직접 담갔다 아입니까."(웃음)

하지만 당시 일본인 처들이 할머니처럼 사랑받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해방 뒤 20년은 특히 반일 감정이 심해서 일본인 처들의 시름이 깊었다"고 회상했다. 최근 많은 결혼이민 여성들이 겪는 아픔과 통하는 부분이다.

실제 한국인 남편을 따라온 일본인 처들은 본처 때문에 버림받거나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시댁과 자식에게 내쫓기는 일이 흔했다. 국내 경제 상황이 나빠 밥 굶는 것도 예사였다. 모국인 일본에서도 냉대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가해국의 피해자'라는 사실은 오래도록 잊혀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구니다 할머니는 "애 넷 낳을 때까지 친정에는 남편이 한국인이라는 걸 숨겼다"고 털어놨다.

일본 에히메(愛媛)현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당시 자신의 고향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헌칠한 외모의 남편 박기용씨를 만났다. 남편은 당시 중학교(현재의 고교)까지 다닌 엘리트 여성이었던 할머니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의 서툰 일본말을 북쪽지방 사투리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남편은 부산 대지주의 3남 중 막내였다. 할머니는 "영감이 한인, 일인 구분 없이 땅을 내주고 먹거리를 나눈 덕에 오히려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둘째 딸 박옥희(62)씨는 "늘 한복 차림이었던 엄마는 당신 입으로 일본인이라고 한 적이 없어 우리조차도 어머니가 재외동포인줄 알고 자랐다"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셋째 딸 명기(59)씨도 "고춧가루가 빠진 김치를 먹는 엄마를 보면 이상하다 여길까 봐 차마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 못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딸들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할머니가 역사의 경계인으로 산 지 60여 년, 남편과 사별한 지도 12년이 흘렀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 남편과 결혼한 연도도 정확하게 떠올리지 못한다. 다만 한식, 일식 반반씩 차려 소식을 한 덕에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여가 시간에는 "한국 사극과 일본 책을 즐긴다"고 했다.

할머니는 이제서야 "내 국적은 일본"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한국 국적을 지킨 애국자들처럼 내 피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간 할머니의 말 못할 외로움과 슬픔은 재한 일본인 처들을 돕는 양분이 됐다.

기억이 쇠해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땐 한참을 생각하거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지만 마지막 말만큼은 명쾌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을 착취한 일본인에 대해) 뭐 할라꼬 그렇게 무리했는가 싶어예. 나는 한국, 일본 한 가지로 불쌍한 사람들 줄 거 다 줬으니 후회 없시므니다. 낼 모레 죽는 사람이니까 모쪼록 다 건강한 게 내 소원이라예."

▦부용회(芙蓉會)는

1962년 결성된 재한 일본인 처들의 친목단체. 불교에서 극락을 상징하는 연꽃(부용)을 단체 이름으로 삼았다. 기록에 따르면 1983년에만 해도 회원이 1,500여명에 달했지만 현재는 100명이 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김혜경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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