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9

외면당한 얼굴들을 기록하며 카메라는 울었다 : 인권·복지 : 사회 : 뉴스 : 한겨레



외면당한 얼굴들을 기록하며 카메라는 울었다 : 인권·복지 : 사회 : 뉴스 : 한겨레




외면당한 얼굴들을 기록하며 카메라는 울었다

등록 :2018-09-01 11:02수정 :2018-09-01 11:03

[토요판] ‘잊힌 이름’ 재한일본인 처
③ 곁을 지켜준 한국인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종욱씨가 찍어준 사진에 재한일본인 처 요네모토 도키에(1919~2014·왼쪽)가 글을 남겼다. 가운데는 야기 치요. 오른쪽은 쿠도 치요. 김종욱 제공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아요.”



일본 할머니들을 찍는 일이 그는 좋았다. 셔터 누르는 손가락도 필름값 걱정을 잊었다. 검버섯과 주름이 선명하게 드러난 얼굴들을 앨범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사진 뒷면에는 할머니들의 인적 사항과 증언 내용을 메모했다. “다시 하라면 못할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해온 그는 한국에서 ‘재한일본인 처’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기록한 사람이 됐다.



수차례 거절당한 전시



다큐멘터리 작가 김종욱(59)이 할머니들의 삶과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아온 지 14년이 됐다. 2004년 그가 경북 경주의 ‘나자레원’으로 할머니들을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사회복지시설 나자레원은 몸이 불편한 재한일본인 처들이 이 땅에서 머무는 마지막 안식처 역할을 해왔다. 법인 인가를 받은 1973년부터 나자레원은 재한일본인 처 147명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재판을 통해 한국 호적을 정리하고 일본 국적을 되살리는 과정을 일일이 거쳤다.



김종욱이 나자레원에서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평균 나이는 이미 70대 후반이었다. 당시 24명이던 할머니들이 14년 동안 차례로 영면에 들었다. 지난 4월 나자레원 봄나들이 행사에서 그가 안부를 물은 재한일본인 처는 5명뿐이었다.



김종욱은 오랫동안 ‘어떤 기억’을 붙들고 살았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경북 의성에서는 ‘밤사이 사람이 기찻길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곤 했다. 그때마다 동네 사람들은 ‘일본 여자’라고 수군댔다. 김종욱은 ‘왜 일본 여자들이 한국에 와서 비극적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자랐다. 훗날 나자레원이 있는 경주에 살면서 어릴 때 접한 ‘의문의 죽음들’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고향의 ‘일본 여자’와 나자레원의 할머니들은 사는 동네는 달라도 같은 처지의 시간을 견뎌왔다.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하기 시작한 2000년 이후 그의 마음에는 재한일본인 처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은 열망이 강하게 자리잡았다.



나자레원은 외부 사람의 출입에 엄격했다. 설립(1973년) 이후 35년 동안 할머니들과 동고동락해온 송미호(68) 원장은 나자레원의 이야기가 필요 이상으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재한일본인 처에 대한 언론 보도가 나갈 때마다 송 원장은 “한국 복지시설이 왜 일본인들까지 챙기냐”는 항의 전화에 시달렸다. 김종욱은 몇년간 수소문 끝에 나자레원에서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이를 알게 됐고 그를 따라 나자레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할머니들의 영정을 찍기 시작한 뒤부터 김종욱은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그들의 삶과 눈물을 마주할 수 있게 됐다. 송 원장도 “할머니들이 김종욱씨 사진을 좋아하니까 막을 이유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사진들을 세상에 선보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본과 한국에서 수차례 전시회 거절 통보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더 치열해져야 함을 느꼈다. “내가 죽어도 기록은 남는다”고 생각한 그는 하던 작업을 보류하고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근대기 조선이주 일본인 여성의 삶에 대한 연구: 경주 나자레원 할머니를 중심으로(2014)’라는 논문으로 작업 10년 만에 학위를 받았다. 한국과 일본 모두로부터 외면받던 재한일본인 처들의 삶을 사진으로 건져내고 그들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게 되기까지 녹록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의 작업 뒤에는 언제나 ‘김상진’이란 이름이 있었다.



김상진(1923~2017)은 김종욱의 아버지다. 김상진은 15살 되던 해에 일본 나가사키현의 다카시마 탄광으로 징용되었다. 그의 형이 결혼을 앞두고 강제징용 대상이 되자 형의 이름으로 자신이 일본행을 택했다.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한국인들은 말을 안 듣거나 작업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했다. 김상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탄광 현장의 일본 감독관들은 한국 사람들을 시켜 한국인들을 고문했다. 그 탓에 광복 뒤 귀국선에서는 그동안 고문을 한 한국 사람들과 고문당한 한국 사람들이 뒤엉켜 몸싸움을 벌였다. 김상진은 배움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의 눈에 일본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받은 반면 한국인들은 자기 이름 석 자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라나는 한국의 아이들에게 자신이 직접 경험한 아픈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겠다고 김상진은 생각했다.



귀국한 그는 탑리(현 경북 의성군 금성면)에서 안동까지 오가며 늦은 공부를 시작했다. 탄광에서 전기고문으로 피부조직이 타버린 탓에 다리에서 진물이 올라왔다. 약이 귀하던 시절이라 한센병 연고를 구해 발랐다. 안동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된 김상진은 학생들과 아들 김종욱에게 “일본 제국주의가 얼마나 영악한 방식으로 한국인들을 지배했는지 알아야 광복 뒤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종욱은 나자레원에서 만난 재한일본인 처들의 이야기에서 아버지를 보았다. 전쟁이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뒤틀어버렸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재한일본인 처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종욱씨가 경북 경주시 나자레원(재한일본인 처들을 돕는 사회복지시설)에서 찍은 요네모토 도키에(왼쪽)와 이노우에 아야코. 김종욱 제공



도키에의 휴대전화 ‘단축번호 8번’



요네모토 도키에(1919~2014)는 나자레원에서 그의 작업을 가장 잘 이해해준 일본인 처였다. 도키에의 한국 이름은 박수미였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한국에서는 세무공무원으로 일했다. 광복 직후 조선에 있던 일본인 남성은 조선인 아내, 자식들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지만, 조선인 남편을 둔 일본인 아내는 가족과 함께 돌아갈 수 없었다. 조선인과 결혼한 일본 여성들은 남편의 호적에서 자유로워져야 귀국이 가능했으나 그때도 자식을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나 하나 희생하면 한국에 있는 딸이 애미 애비 없는 자식은 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으로 도키에는 귀국을 포기했다. ‘전쟁 가해국민’이라는 마음의 짐을 지고 평생 대구적십자사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슬하에는 딸이 다섯 있었는데, 넷은 입양한 한국 고아였다.



도키에는 김종욱을 위해 카메라를 낯설어하는 할머니들을 설득해주었다. 일본에서 ‘재한일본인 처’를 소재로 한 소설 <잊힌 일본 할머니들>(가미사카 후유코)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본 학생들이 나자레원을 찾아오기도 했다. 도키에는 학생들의 손을 붙잡고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곤 했다. 김종욱의 작업을 향한 도키에의 믿음과 지지에는 그런 그의 뜻이 담겨 있었다. 도키에의 휴대전화 단축번호 8번은 “김 선생”이었다.



“할머니 잠시 카메라 끌게요. 실컷 욕하고 우세요.”



카메라 앞에 선 재한일본인 처들은 과거를 회상하다 눈물을 펑펑 쏟곤 했다. 그럴 때마다 김종욱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들의 울음 곁을 지켰다. 일본인 처들이 속마음을 내비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나라에서 외롭게 살면서 그들은 타인에게 폐를 끼치거나 실수를 해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져왔다.



“김 선생, 이제 나를 그만 보면 안 되겠나.”



2014년 가을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김종욱에게 도키에가 말했다. 도키에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음을 김종욱은 알아차렸다. 그날 김종욱은 50여년을 살아오는 동안 가장 서러운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울음 옆에서 김종욱도 같이 울었다. 병실 문을 여닫지도, 발걸음을 떼지도 못하고 창문 밖만 오랫동안 응시하다 돌아왔다.



일주일 뒤 그는 마지막으로 생전의 도키에를 찍었다. 그가 언제 어떻게 임종했는지는 나자레원에 묻지 않았다. 다만 숨을 거둘 때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남기를 바랐던 도키에의 마음을 기억했다. 도키에는 김종욱에게 가끔 말하곤 했다.



“우리 세대는 어쩔 수 없이 힘들게 살았지만 미래에는 전쟁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아야지요. 그래도 나 같은 할머니가 한국에서 열심히 살다가 갔다는 사실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14년간 재한일본인 처 기록해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종욱
어린 시절 스스로 목숨 끊는
일본 여자들에 대한 소문
그 기억이 마주한 여성들의 시간



그의 작업 도운 요네모토 도키에
가해국민으로 한국 고아 4명 입양
생전 그가 김종욱에게 남긴 말
“나 같은 할머니가 한국서 열심히
살다 갔다는 사실만 기억해줘요”



조선인 남편을 따라 바다를 건너 재한일본인 처라는 이름을 얻은 여성들. 조선 광복 뒤 일본으로 돌아가길 포기하고 한국과 일본 모두로부터 잊힌 채 살아온 그들. 광복 73돌이 되는 동안 한 명씩 세상을 떠나며 그들은 기억에서도 지워지고 있다.



재한일본인 처들의 모임인 ‘부용회’의 임원에 따르면, 현재 생존 회원은 서울에 2명과 부산·경남 지역 7명뿐이다. 논문 ‘재한일본인 처의 생활사’(1999년 김응렬)는 1983년 당시 전국의 회원을 1500여명으로 봤다. 일본 외무성 관료 모리타 요시오가 정리한 <전쟁 중 재일조선인의 인구 통계>(1968)는 1938~1942년 일본에서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 5242명 중 5천여명이 1946년 3월까지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왔다고 추산했다. 김종욱은 말했다.



“아버지는 제가 찍은 재한일본인 처들의 사진을 좋아하셨습니다. 아픔의 역사도 누군가는 기록해야 한다고요. 아버지뿐 아니라 그들도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의 피해자였습니다. 이제라도 그들을 알고,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쟁 피해국민으로만 머무르지 않는 과거청산의 한 방법이 아닐까요.”





재한일본인 처들의 삶을 기록해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종욱(오른쪽)씨와 아버지 김상진(1923~2017)씨. 강제징용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겪은 아버지는 광복 뒤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아픈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아들에게 당부했다. 김종욱 제공

“고생 많았어요, 우리”



“우연한 운명의 장난으로 이국 사람과 맺어져, 이 한국 땅에 뿌리를 내린 우리들/ 언어도 풍습도 습관도 문화도 다른 이국 하늘 아래서 지내며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겪은 고통과 슬픔// 기나긴 세월을 지내온 지금, 이마의 주름살도 그리고 얼굴 전체에 번져 있는 검버섯도/ 이들의 고통스럽고 슬펐던 인생 역정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이들의 젊었던 청춘 시절의 추억들을 나는 모릅니다/ 한국에 남은 일본인 부인으로 60년간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며 이국 하늘 아래서/ 고분고분 운명에 따라 살아왔다고 나는 믿습니다// 이들의 밝게 웃는 얼굴과 성격을 볼 때면 고생 많았어요 하면서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성상(星霜)은 계속되고 사람은 사라지고 언젠가는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모습, 남는 것은 사진뿐입니다.”(2007년 가을 요네모토 도키에가 김종욱의 사진에 남긴 글)



기획·글 팩트스토리 서지연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rights/860204.html#csidx34130525333e4049b92cb888c8e0da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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