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8

[북한은 왜?] 북한에서 친일파는 어떻게 청산되었을까? (1-4)


[북한은 왜?] 북한에서 친일파는 어떻게 청산되었을까? ④

2018-02-01 11 0

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왜?] WHY..전체 읽기




북한은 왜?




북한은 왜?

[북한은 왜?-친일청산③]북으로 간 강동원의 외증조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2018-01-27 10 0

[북한은 왜?] 북한에서 친일파는 어떻게 청산되었을까? ②

2018-01-20 10 0



북한은 왜?

[북한은 왜?] 북한에서 친일파는 어떻게 청산되었을까? ①

2018-01-16 12 0

[북한은 왜?] WHY..전체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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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은 왜?] 북한에서 친일파는 어떻게 청산되었을까? ①
북한은 왜? 2018-01-16 12 0


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왜?] WHY? 북한! 시작합니다.



“천왕폐화께 한가지 바치옵는
정성이련만 총을 잡는 어깨는
보람이 차는 것을.”

– 주요한(마쓰무라 고이치),
<불놀이> 등의 작품으로 교과서에 기재된 시인.
훗날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역임. (이성광, “민중의 역사1”, 기획출판 한,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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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우리 민족의 염원은 친일 청산이었다.

친일 청산은 단순히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를 심판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 조선사회에 만연했던 일제 잔재 전반을 청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친일 청산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북한에서 친일파를 숙청했다는 것 정도는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구체적인 시행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북한에서 친일청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친일파 청산 과정과 사회문화적 일제 잔재 청산 두 부분으로 확인해보도록 하자.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친일 경찰 노덕술.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친일파 경찰에서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냈다. 출처 :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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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북한에서 친일파는 어떻게 청산되었을까?

1. 해방, 그리고.

2.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출범

3. 중앙기구 차원에서 진행된 친일청산

  1) 재판소 사법절차에 따른 처벌

  2) 정치적, 경제적 조치
    ① 토지개혁 
    ② 친일재산의 국유화와 노동자 자주관리 
    ③ 선거권과 피선거권 박탈 
    ④ 그 외

4.친일파규정

  1)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2) 정준택, 이활, 그리고 이광수

5.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6. 일제유산 청산

7. 북한 친일청산의 특징

   1) 천편일률적이지 않았던 친일파 청산

   2) 친일파 청산만큼 중요하게 바라봤던 일제유산 척결운동

   3) 대중이 주인되었던 일제 잔재 청산

8. 친일청산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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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방, 그리고.

해방이 되자, 민족을 팔아먹으면서 자기 잇속을 차린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는 대중들의 요구는 뜨거웠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독립운동가들. 출처 :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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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정대로 농민조직이 완료된 시점에서 면민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그토록 순박하고 말이 없던 농민들이 대회가 열리자 연단에 나와 지주들과 친일 앞잡이들의 친일행각을 낱낱이 폭로하는 게 아닌가. 자연히 기세 좋게 설치던 지주와 일제 앞잡이들이 낯을 못 들게 되었다. 이어서 선거로 풍산면의 일꾼을 뽑자는 안이 통과되었다. 곧이어 선거가 진행되었는데 우리 면의 나이 많고 양심적인 인사가 지주와 친일 앞잡이들을 물리치고 면 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 풍산에서의 해방 모습 (이인모 기록, ‘전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 수기’, (주)월간 말, 72~73쪽)

1945년 8월 16일부터 25일까지 10일간 살해된 일본인 내지 친일파가 21명, 부상을 당한 자는 67명, 구타폭행을 당한 자가 118명에 달했을 정도였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198쪽)

이들은 총 206여명으로 당시 조선 전체의 일본인, 친일파 수에 비하면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과 10일 만에 200여명이 신체적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일제 치하 36년간 쌓였던 우리 민족의 분노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반증하는 통계치였다.

직접적인 신체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주로 경찰관(54.4%, 112명), 면사무소 직원 (33.5%, 69명)이었다.

대중들은 주로 자신의 삶에 직접적 악영향을 미쳤던 악질 일본인, 친일파부터 청산하고자 했던 것이다.

대중의 분노를 감지한 조선인 경찰관들 중 80%는 8월 15일부터 미군진주일인 9월 8일 사이에 일을 멈추거나 쫓겨나거나 도망쳤다.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15쪽)


2.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출범

해방 직후 우리나라 곳곳에는 자치기구인 건국준비위원회(훗날 인민위원회)가 출범했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 따르면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적으로 145개 지부가 있었다.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13쪽)

일본경찰권력이 급속도로 무너졌기 때문에 인민위원회는 자체 치안대를 꾸려 각 지역마다 치안을 담당하도록 했다.

38선 이남의 경우 미군정의 진주 이후 인민위원회가 1945년~1946년 사이 모두 해체되었다.

38선 이북에 설치된 인민위원회는 그 존재가 계속 이어졌다. (지금 이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다.)

38선 이북 인민위원회들은 일본인 재산 접수, 노동관계, 소비문제, 소작료문제 뿐 아니라 친일파 청산 사업을 담당했다.

강원도 고성에서 민족반역자 11명이 ‘군중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강원도 양양에서도 3명이 인민재판에서 교화형을 선고받았다. (군중재판 : 지역 인민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죄를 평가하고 심판하는 것. 교화형 : 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 일반적으로 교도소가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위해 만들어진 시설인 반면 교화소는 교육과 노동을 통한 단련이 주된 목표로 된다.)

이러한 재판은 각 지방 인민위원회 자체가 세운 법과 제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3. 중앙기구 차원으로 진행된 친일청산

38선 이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에 의해 자체적으로 진행된 친일파 청산은 1946년을 맞아 차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1946년 2월, 38선 이북에 각 지역 인민위원회들의 중앙기구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한 것이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처 : 인터넷.

1) 재판소 사법절차에 따른 처벌

임시중앙정부가 꾸려지면서 국가차원으로 친일파청산을 담당할 검찰소, 재판소 등 사법기구의 조직이 건설되었다.

구속->입소->기소->재판->형 집행 등 사법절차가 친일파들에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199쪽)

통계에 의하면, 1947년과 1948년에 279명과 182명이 각각 ‘일본인과의 적극적인 협조행위’로 적발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한국역사연구회, ‘친일파 처리, 그 배제와 수용의 매커니즘’, http://bit.ly/2F17LyH).

2) 정치적, 경제적 조치

친일 청산 사업은 단순히 친일파들을 법적으로 조사하고 처벌하는 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친일파들이 일제에 협력하여 수십년간 누린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박탈하는 것도 함께 진행되어야 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중앙정부)가 제시한 11개항의 정책 가운데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항이 ‘친일파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에 대한 박탈’과 관련된 사항이였다.

① 친일분자 및 반민주적 반동분자 숙청
② 일본침략자 및 친일적 반동분자와 조선인대지주의 산림과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 반분소작제를 철폐, 농민에게 무상으로 토지 분여
③ 생산기업소를 인민생활필수품에 소요되는 기업소로 전환
④ 철도, 수운, 통신, 운수 등 회복
⑤ 금융기관 체계 정리
⑥ 중소기업의 개량과 발전
⑦ 노동운동의 적극 방조
⑧ 인민교육제도의 민주주의적 개혁
⑨ 민주주의적 인민 교양
⑩ 식량문제 대책 수립
⑪ 모스크바 결정의 진의의 정확한 해석


친일청산 문제가 정책의 가장 앞에 배치되어 있었던 만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친일청산에 가장 많은 역량을 쏟았다.

김일성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은 공산당이 주도하기보다는 대중이 주체가 되어 친일파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189쪽)

따라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모든 절차에서 대중이 주인으로 설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하여 진행된 친일청산은 크게 3가지로 이루어졌다. (김성보, “북한의 역사1”, 역사비평사, 98~100쪽)

2-1) 토지개혁

첫 번째로 진행한 것은 바로 토지개혁이었다.


북한의 토지개혁 구호. 토지는 농민의 것이라고 쓰여져 있다. 출처 : 인터넷.

토지개혁 전 38선 이북지역은 순소작농이 50%, 자작 겸 소작농 30%를 차지할 정도로 농민 대부분은 소작의 굴레에 얽매여 있었다.

1946년 3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을 발표하였다.

법령은 토지를 이용하는 권리는 기본적으로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 있다는 것(경자유전,耕者有田)을 선포한 것이었다. (경자유전 : 대한민국 헌법 제121조에도 있다. 밭 가는 사람이 밭을 가진다는 뜻.)

그리고 토지의 몰수 방법과 분배의 원칙도 규정했다.


– 일제가 소유했던 토지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소유지 및 5정보(1만5천평) 이상을 가진 지주의 토지, 계속 소작을 주고 있던 모든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한다.

– 몰수한 토지는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어 그들의 소유로 한다.

– 농가의 가족인원, 일할 수 있는 사람수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여 분여된다.

– 토지의 매매, 저당, 일체 소작제도를 금지한다.

– 몰수한 산림, 관개시설, 과수원 및 농민들이 경작하기 힘든 일부 토지를 국유화한다.


토지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선택한 방법은 각 지역마다 토지개혁을 담당할 기구를 수립하여 대중의 힘으로 이뤄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 소작농, 고농(농업노동자)들로 1만 1,500여개의 농촌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농촌위원회는 단 26일 만에 북한 전역에서 대지주, 친일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분배하게 된다.

대다수 농민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활동으로 세계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토지개혁이 이루어진 것이다.

토지개혁 결과 38선 이북지역의 총 100만 325정보(약 30억평, 9921㎢)의 토지가 몰수되었고 경작하기 힘든 땅을 제외한 98만 1,390정보의 토지가 72만 4,522호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되었다. (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200쪽.)

땅을 빼앗기게 된 대지주 및 친일지주들은 토지개혁을 방해하기 위해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농촌위원회를 파괴하고자 했다.

심지어 38선 이남과 연계하여 테러활동이 준비되기도 했다. (김성보, “북한의 역사1”, 역사비평사, 98~100쪽)

그럼에도 토지개혁은 수천년간 간직해온 농민들의 세기적 숙망을 실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세를 막을 순 없었다.

토지개혁 이후 농민 100%가 모두 자작농이 되었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포함한 4만여명의 지주는 몰락했다.

이로서 친일파 지주들의 주된 경제적 기반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 계속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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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2018-01-20 10 0


– 계속-

2-2) 친일재산의 국유화와 노동자 자주관리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진행한 두 번째 친일청산은 중요산업의 국유화 및 노동자 자주관리화였다. (노동자자주관리제(Workers’ self-management)란 사기업체의 기초적 의사 결정에 노동자가 직접 참여하는 것. 생산수단은 사회화-노동자 공동체나 전체 사회에 의해 소유된다. 노동자자주관리제에 대한 최초의 생각은 오웬, 푸리에 등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현재 스페인 몬드라곤, 이태리 북부지역의 노동자협동조합의 번영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8월 10일 ‘산업, 교통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법령’을 발표한다. (출처 : NK조선, 법령)


산업, 교통운수, 체신(우편), 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법령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민을 노예화하며 대륙의 다른 나라 령토(영토)를 강점하고 그 나라 인민을 노예화하기 위한 군사적 기지와 경제적 토대를 닦을 목적으로 조선을 강점하고 36년 동안 식민지통치를 실시하였다.

일본강점자들은 조선에서 식민지통치를 시작한 첫날부터 조선의 경제를 자기의 제국주의적 리해(이해)관계에 예속시켰고 조선인민의 고혈로 많은 기업소, 발전소, 철도 등을 건설하였다.

조선이 일제식민지통치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조선인민에게 민주주의적 자유를 보장하고 조선인민의 공·사유재산을 보호하며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빨리 부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조성되였다.

조선인민을 착취하고 조선의 자원을 일본으로 빼앗아갈 목적으로 일제가 조선에 건설한 모든 기업소, 광산, 발전소, 철도 등은 반드시 조선인민의 소유로 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나라의 발전과 조선인민의 생활향상에 리용(이용)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산업, 교통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법령을 발포한다.

일본국가와 일본 법인 및 사인의 소유 또는 조선인민족반역자의 소유로 되여 있는 모든 기업소, 광산, 발전소, 철도운수, 체신, 은행, 상업 및 문화기관 등을 모두 무상으로 몰수하여 이를 조선인민의 소유로 즉 국유화한다.

본 법령은 발포한 날부터 효력을 가진다.

1946년 8월 10일


법령에 따라 일본국가, 일본 자본가들, 친일파의 소유로 된 모든 기업, 광산, 발전소, 철도운수, 우체국, 은행, 상업 및 문화기관 등을 무상으로 몰수하였다.

그 수는 38선 이북 지역 산업의 90%에 달하는 1,034개에 달했다.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97쪽.)


김일성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이 중요산업 국유화를 발표하던 모습. 출처 : 인터넷.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당국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국유화는 토지개혁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단한 문제였다.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129쪽.)

그럼에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중요산업 국유화도 ‘철저한 무상몰수의 원칙’ 하에 노동자 스스로가 주인이 되도록 하였다.

각 기업별로 노동자들이 조직한 공장위원회가 직접 몰수투쟁을 진행했으며 파괴된 공장, 기업들을 복구하여 생산을 정상화하기 위한 사업도 동시에 했다.


공장의 주인으로 나선 노동자들. 노동자 자주관리화가 이루어졌다. 출처 : 인터넷.

여기에서 거둔 성과가 중요산업국유화법령로 공고화되었고 이로서 일본자본, 친일파의 자본 청산은 완전히 이루어졌다.

중요산업국유화에 이어 1946년 11월에는 ‘북조선 산업 및 상업발전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각 도 인민위원회는 친일파의 부동산(건물, 토지) 뿐 아니라 동산(움직일 수 있는 재산)까지도 몰수했다.(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200쪽.)

그러나 친일파가 아닌 자본가들의 소유는 법적으로 보호해주었다.

‘개인 소유권을 보호하며 산업 및 상업 활동에 있어서의 개인의 창발성을 발휘하기 위한 대책에 관한 결정서'(1946.11)가 채택되면서 민족 반역자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 중소 상공업자들은 존속할 수 있었다. (김성보, “북한의 역사1”, 역사비평사, 2011년, 92쪽.)


김일성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은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중요산업의 국유화는 자주독립국가건설의 기초 라는 연설을 진행했다. 출처 : 인터넷.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이 두 조치로 친일자본가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38선 이북 지역에 있던 친일파들의 경제적 기반을 모두 청산시킨 셈이다.

일반적으로 산업사회에서 기득권 세력에 대한 경제적 청산은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낮추는데 가장 위력적 방법이 된다.

36년간 일제에 빌붙어 배를 불려온 친일세력들은 38선 이북지역에서 일반 농민, 노동자들과 완전히 똑같은 경제적 수준을 갖게 되었다.

2-3) 선거권과 피선거권 박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중앙정부)가 행한 마지막 조치는 바로 1946년 말, 1947년 초에 걸쳐 각급 지방인민위원회(도, 시, 군, 면, 리) 선거에서 이루어졌다. (1946년 11월 3일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 1947년 2월 24~25일 리(동) 인민위원회 선거, 1947년 3월 5일 면 인민위원회 선거가 각각 진행되었다.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124쪽.)

38선 이북 주민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산물인 선거를 시행하게 된다.

보통, 직접, 비밀로 진행된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중앙정부)는 ‘북조선 군, 시 및 도 인민위원회 선거에 관한 규정’을 발표하게 된다.

선거에 대한 규정 제1장 제1조는 친일파들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제한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친일파의 선거참여 권리가 제한된 이유는 친일파의 정치세력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친일파 청산사업에 위기를 느낀 친일자본가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재산을 이용하여 돈으로 표를 매수하는 작업을 진행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38선 이남 미군정청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장악하기 위해 친일파들의 출마를 부추기고 선거비를 지원해줄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이유들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친일파들의 피선거권(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권리)를 막았다.

그리고 친일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친일파들의 선거권(선거할 수 있는 권리)도 제한했다.

이렇게 하여 전체 유권자 4,516,120명 중 친일파 575명은 1946~1947년 선거에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선거권이 박탈당한 친일파들은 북한 정계에 진출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친일파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후보에게 투표할 수 없었다.

일제시기 정치적 영향력이 높았던 친일파들은 북한 정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대신 평범한 민중들이 농민 36.4%, 노동자 14.5%, 사무원 30.6% 비율로 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투표율 99.68%, 국방성 중앙문서보관소 문서군 172, 목록 614631 문서철 20, 31쪽. 전현수, ‘1946년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 “사학연구 제115호”, 2014년 9월, 199쪽.)

2-4) 그 외

그밖에 사회적으로 친일파들에게 주어진 제약 중에는 사법기구로의 진출 금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201쪽.)

1946년 3월 6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법국 재판소·검찰소의 구성과 직무에 관한 기본원칙’이 발표되었고 이 원칙에 따라 친일파는 재판소·검찰소·교화소와 그 외 사법기관의 직원에 발탁될 수 없게 되었다. (제8조)

이 조항은 일제시기 판사나 검사의 직위에 복무한 자들이 사법국과 도 사법부 과장 이상의 직위 또는 판사에 발탁될 수 없다는 추가규정을 통해 한층 구체화된다.

이러한 조치는 일제시기 독립운동가들을 심판했던 수많은 판사, 검사들을 심판하기 위한 이유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참심원(형사사건에 참여하는 시민법관), 변호사가 될 자격 역시 가질 수 없었다.

이 역시 친일파들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법을 활용하거나 법을 이용하는 모든 행위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친일청산을 위해 진행한 조치들을 모두 받아들인 친일파들은 38선 이북 지역에서 살 수 있었다.

그 수는 1946~1947년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선거권·피선거권을 박탈당했던 575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조치에 반발한 친일파들은 모두 38선 이남으로 내려왔다.

미군정이 구성한 남조선의 임시기구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구성원들 가운데 38 이북 지역으로부터 도피성 월남을 감행한 이들은 총 36명으로 총입법의원 90명의 40%에 이르렀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197쪽.)

제주 4.3항쟁에서 제주도민들을 학살해 악명 높았던 서북청년단도 북한의 토지개혁, 재산몰수 등의 조치에 불만을 품고 월남한 이북 각 도별 청년단체가 설립한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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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친일청산③]북으로 간 강동원의 외증조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북한은 왜? 2018-01-27 1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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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친일파 규정

그렇다면 친일청산 과정에서 친일파 규정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친일청산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어떤 사람을 친일파로 규정할 것인가’를 정하는 문제였다.

“협력행위에 가담한 자들을 어느 선까지 친일파로 규정해야 할까?”라는 이 쉽지 않은 질문은 해방 직후 심각한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토지개혁, 산업국유화가 진행될 때까지도 명확하게 마련된 규정이 마련되지 못하다보니 지역인민위원회에서 자체적인 판단에 의해 친일파를 규정하기도 했고 대중들의 판단에 의해 재판과 처벌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그러다 1946년 3월 7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을 제정하였다. (류석춘, 김광동, “북한 친일청산론의 허구와 진실”, 격월간 시대정신, 2013년 봄호, 부록1)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1. 일제의 침략당시 조선민족을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팔아먹은 매국노와 그 관계자
2. 귀족칭호를 받은 자, 중추원 부의장 고문 및 참의, 일본 국회 귀족원과 중의원의 의원
3. 악질고관(조선총독부 국장 및 사무관, 도지사, 도사무관, 도참여관)
4. 일제경찰 및 헌병 고급관리(경찰경시, 헌병 하사관급 이상) 사상범 담임판사와 검사
5. 고등경찰 중 악질분자(인민의 원한의 대상이 된 자)
6. 고등경찰의 밀정책임자와 밀정
7. 해내외 민족운동자와 혁명투사들을 학살 또는 박해한 자와 방조한 자
8. 도회의원 및 친일단체 파쇼단체(일진회, 일심회, 녹기연맹, 대의당, 방공단체 등) 간부와 악질분자.
9. 군수산업의 책임경영자 및 군수품조달 책임자로 악질분자.
10. 일제의 행정, 사법, 경찰기관과 관계를 가지고 만행을 감행하여 인민들의 원한의 대상으로 된 민간악질분자
11. 일제의 행정, 사법, 경찰의 관공리로서 인민들의 원한의 대상이 된 악질분자
12. 황국신민화운동을 전개하여 지원병, 학도병, 징용을 실시하는데서 이론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의식적으로 행동한 악질분자
13. 8.15 해방 후 민주주의적 단체를 파괴하며 또는 그 지도자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였거나 테러단을 조직하고 그것을 직접 지도한 자와 그와 같은 단체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 혹은 테러행위를 직접 감행한 자
14. 8.15 해방 후 민족반역자들이 조직한 반동단체에 의식적으로 가담한 자
15. 8.15 해방 후 민족통일전선을 방해하는 반동단체의 밀정 혹은 선전원으로서 의식적으로 밀정행위를 감행한자와 사실을 왜곡하여 허위선전을 한 자.

부칙: 이상의 조항에 대당한 자로서 현재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자와 건국사업을 적극 협력하는 자에 한하여서는 그 죄상을 감면할 수도 있다.

1946년 3월 7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이 법령은 친일파의 범위를 규정하고 토지개혁, 중요산업국유화 등의 친일청산사업을 추진할 때 적용되었다.

그리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말~1947년 봄 진행된 인민위원회 선거 당시 선거권을 제한시킬 친일파를 다음 6가지로 규정했다.([면·군·시·도 인민위원회에 대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제2차 확대의원회의 결정서] [북한관계사료집 5], 국사편찬위원회, 1987, 25~27쪽.)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의, 고문 전부
도회의원, 부회의원 조선인 전부
조선총독부 및 도의 책임자로 근무한 조선인 전부
경찰, 검사국, 판결소의 책임자로 근무한 조선인 전부
자발적 의사로서 일본을 방조할 목적으로 일본 주권에 군수품 생산, 기타의 경제 자원을 제공한 자
친일단체의 지도자로서 열성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방조 활동한 자. (다음의 규정들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생계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 행적이 없으면 제외하되 권력과 부 명예를 좇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했던 점에서 상당히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친일파 개념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서 칭송받고 있는 고려대학교 설립자 김성수, 이화여대 초대총장 김활란 등의 경우 5번, 6번에 해당하여 친일파로 규정된다.)


이 규정에 제시된 친일파는 앞서 3월에 발표된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의 친일파들 중에서도 ‘죄질이 나쁜 것’으로 분류된 사람들이었다.


1946년 11월 3일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 모습. 출처 : 인터넷.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친일파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오를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관직에 있었던 자들을 명확히 친일파로 규정했다.

그리고 직위의 고하를 떠나 관직의 성격과 개인의 행적 역시 친일파 판별의 기준으로 되었다.

특히 항일운동가들의 연행, 고문, 형 집행 등을 담당했던 고등경찰 종사자들은 모조리 친일파로 규정되었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195쪽.)


물론 예외사항은 있었다.

친일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죄를 깊이 반성하고 해방 후 ‘조선민족을 위하여 살겠다는 결심’을 하면 건국사업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는 해방직후부터 꾸준히 제기돼온 각계의 제안을 수용한 것으로 일종의 ‘포용정신’을 발휘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1946년 1월 31일에 열린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북조선연맹 결성대회 자료에는 “인민정권수립”에 협력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이들에게까지 일제시기의 관리였다는 점을 문제삼아 “민족반역자로 규정해 배척하는 태도를 경계하자”는 대목이 나온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196쪽.)


대중단체 회의에서 그러한 입장들이 등장했을 정도로 “친일파는 무조건 숙청하자”는 논리가 대중들에게 설득력이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선거권·피선거권 제한 역시 친일파로 판정된 장본인에게만 철저히 적용되었다.

친일청산이 친일행적을 가진 사람의 가족들에게까지 절대 확대적용하지 않은 것이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201쪽.)


이러한 흐름은 38선 이북 지역의 친일파 개념 정립작업이 나름의 합리성을 띄고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2) 정준택, 이활, 그리고 이광수

일제 시기 일본에 협력했던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의 죄를 반성하면 반민족 행위자로 간주되지 않고 새 국가 건설을 위한 인재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일제 시기 기술전문직에 종사했지만 38선 이북지역에서 청산당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로 정준택, 이활이 있다.

정준택은 일제강점기 당시 화학공장 과학자로 1943년 4월부터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해방후 정준택은 자신의 죄를 반성하면서 과학기술로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북조선 행정10국 산업국장을 맡아 38선 이북지역 공업 발전에 기여했다.

내각부수상까지 역임했던 정준택은 건국사업에 끼친 노력이 인정받아 사망 후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김일성 주석과 정준택 내각부수상의 모습. 출처 : 월간 조국.

이활 역시 일본 해군에서 비행사로 근무했던 인물이었다.

해방 후 이활은 건국사업, 특히 건군사업에 적극 기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조선인민군 비행사단 부사단장으로 북한 공군창설에 크게 이바지했다.


사진 중간에 김일성 주석. 앞줄 왼쪽에 비행사 이활. 출처 : 인터넷.

또한 연예인 강동원의 외증조부로 알려진 이종만의 경우 비록 일제에 협력한 자본가였지만 해방 후 ‘독립신보’를 간행하고 남북통일협상을 적극 지지한 점, 북한의 광업부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여러 지역을 탐사하여 자원개발에 기여한 점 등을 인정받아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가 되었다.

이렇게 38선 이북지역에서 전문기술자들을 적극 발탁한 이유는 ‘친일파들에 대한 분노해소와 처벌’보다는 ‘새 조국 건설’에 더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죄를 저지른 인물이여도 지금 이 순간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가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기준으로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북한이 현재 친일문학가 이광수를 바라보는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말년에 이광수가 친일 과오를 뉘우쳤으며 한국전쟁 후 월북을 선택했다고 한다.

북한으로 가던 중 폭격으로 사망한 이광수를 북한은 초기 독립운동가 및 문학가로서 민족근대문학에 기여했다는 점, 과오를 반성한 점 등을 인정해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에 안장했다.

5.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38선 이북지역의 친일 청산을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프랑스에서의 나치협력자 청산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프랑스는 법이 정비되기도 전에 이미 약식으로 8천여명이 처형되고 여성 나치부역자 2만여명의 삭발식이 진행될 정도로 나치부역 청산이 빠르고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법이 정비된 이후에는 프랑스 인구 116명 중 1명꼴로 부역자 혐의를 받았으며 12만여명이 재판을 받고 약 6천 700여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정계, 경제계, 문학계 등 각종 분야에서 대대적인 청산이 이루어져 4만명에 달하는 공무원, 직원, 행정직원들이 직업활동을 제한받고 금지당했다고 한다.

북한 역시 1945년말까지 일제 보안대에서 보안원 3,600명이 친일 경력 등 각종 이유로 면직되었는데, 이 수는 전체 보안원의 41.5%에 해당하기도 했다.

프랑스와 유사하게 직업파면, 재판, 재산몰수, 선거권 제한 등을 중심으로 친일청산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처벌을 받아야 할 친일파 상당수가 남하하면서 프랑스처럼 대규모 사형판결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주 북한 소련 민정국이 작성한 통계에 따르면, 1946년부터 1948년 8월까지 북한에서 남한으로 건너간 사람 수는 84,369명(1946년 – 44,175명, 1947년 – 30,471명, 1948년 – 8개월 9,723명)으로 집계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친일파들로 추산되고 있다.

– 계속-




4]
[북한은 왜?] 북한에서 친일파는 어떻게 청산되었을까? ④
북한은 왜? 2018-02-01 11 0

-계속-



6. 일제유산 청산

“우리들은 함흥에 도착하기 바로 전, 도민들을 위하여 신문을 발행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인쇄소에는 조선 문자의 활자가 없었다. 일본인들이 이미 10년 전에 그것을 없애버렸다. 학교에서 조선어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조선말로 된 책이 없고 조선인 교사도 부족하다. 전부가 침략당하고 온갖 것이 일본화한 것이다. 책방은 일본인 덕망가의 생활을 취재한 교훈소설로 홍수가 났다. 조선의 유명한 옛 문인들의 저서를 찾아내려 별 애를 다 썼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202쪽.)

해방 후 38선 이북지역에 주둔한 어느 소련군 병사의 수기다.

36년간의 일제 유산이 뿌리깊었던 당시 조선사회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방 후 모든 일제 유산을 바로 청산할 수 없었다.

법적인 측면에서도 새로운 법률이 대중의 의사를 모아 정립되기 전까지 일제 강점기 법률을 상당기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법국은 1946년 11월 건국산업과 민족정서, 각종 조례에 상반되지 않는 법령에 대해 새 법령이 발표되기 전에 일제시기의 것을 유지하겠다는 포고를 내리기도 했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203쪽.)

그러나 일상생활에서의 일제 유산 청산 운동은 대중이 주인되어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자료들에는 그러한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인이 쓴 한 수기에 따르면 일본인 피난민들은 해방 직후 조선인 가옥의 문패가 모두 한글로 바뀐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식 옷인 몸빼를 입거나 일본군인 전투모를 착용한 사람들은 거리에서 봉변을 당하거나 핀잔을 받았다고 한다.


일제시대 몸빼입은 모습. 북한에는 ‘몸빼 문화’가 청산되었다.

일본식 어법과 용어사용도 자제되었다.

한 여성의 자서전에는 1945년 9월 초 해방 후 감격적인 첫 개교식을 맞은 평양 서문고녀에서 교사들이 바로 조선어로 수업을 해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평양방송국의 일본어방송도 1945년 8월 27일부터 바로 중단되었고 8월 29일 관서인민신문으로 개명된 평양매일신보도 한글로 발간했다.

일제 시기 배포되어 학교도서실이나 공공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었던 일문서적은 완전히 폐기처분되었다고 한다.

1949년 1월 14일 내각 서적출판지도국은 ‘일본서적 및 출판물 단속에 관한 규정’을 발표하여 사전류를 제외한 모든 일문 서적 및 출판물의 판매를 금지했다.

이렇게 물질·문화적 잔재들이 서서히 일소해간 것이다.

사실 이것보다 더 중대한 과제는 바로 일제 시기 개인이 체득한 생활습성과 의식관념을 어떻게 청산할 지에 대한 문제였다.

예를 들어 일제로부터 배운 뇌물상납, 횡령 등 습관들의 경우 대표적으로 청산되어야 할 관습이었다.

이런 관습이 해방 후까지 이어지는 것은 건국사업에 대단히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청산되어야 했다.

이렇게 38선 이북 지역에서는 일제 문화, 관습 등을 척결하기 위한 운동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7. 북한 친일청산의 특징 (이 부분은 김재웅씨의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논문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였음.)

1) 천편일률적이지 않았던 친일파 청산

북한은 프랑스와 같이 친일 경력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재판에 넘긴다거나 처벌을 한다는 식으로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았다.

불과 4여년동안 독일의 통치를 받아야 했던 프랑스는 부역자 16만명이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았고 약 25%는 불명예 조치 및 공민권 박탈을, 나머지 24%는 유무기 징역 및 금고형, 7천여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36년간이나 식민통치를 겪은 조선이 부역자를 철저하게 숙청하게 될 경우 조선 전역에 피바람이 몰아칠 가능성이 컸다.

이는 새 조국 건설에 막대한 지장을 줄 수도 있었다.

따라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일제 시기 당시 각종 일제에 협력한 인물이여도 자기 반성을 하면 건국사업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했고 훗날 건국공적을 인정해주었다.

불가피하게 생계를 위해 일제에 복무했던 지식인 계층에 대해 특히 관대했다.

새조국 건설에 전문인재들이 절박했던 북조선중앙임시인민위원회는 어느 정도 부역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건국사업에 적극 나서겠다는 다짐을 하면 용서하고 전문 역할을 주었다.

심지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일제가 남겨놓은 방대한 공업 시설을 운영하기 위해 일본인 기술자들까지 포용하기도 했다.

“인민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본래 기술적 사명을 온전히 하기 위해 민주주의 조선의 기초를 만드는 공업화 사업에 적극 참가 협력”하겠다는 선언을 밝힌 ‘북조선 공업기술총연맹 일본인부’는 38선 이북 지역에서 당당히 신분증명서를 받고 북한 경제건설에 이바지했다.

그 수는 868명(가족 2,095명, 1946년 11월 당시)으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이들을 위해 각지에 일본인 인민학교를 세웠고 최고급 수준의 월급, 생필품, 주택을 제공해주기까지 했다.

북한이 친일청산에 초점을 맞춘 것은 구조적인 문제였다.

외세에 자발적으로 부역한 그 누구도 다시는 민족을 착취해 자신의 잇속을 챙기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친일파의 토지 등 재산을 몰수하고 건국 직후의 선거에서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박탈한 조치가 바로 그것이었다.

2) 친일파 척결만큼 중요하게 바라봤던 일제유산 척결운동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친일파 청산만큼 물질적, 제도적, 문화적, 사상적 측면에서의 일제 유산 척결도 중요하게 바라봤다.

일제가 남긴 모든 유산과 세계관을 부정하는 기반에서 새 국가가 건설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식민통치 기간에 체득한 생활습성, 의식관념까지 모두 척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말보다 일본말을 더 많이 써야 했던 대중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문맹률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등 대중교육에 큰 힘을 쏟았다.

그러한 ‘정신영역에서의 투쟁’이야말로 북한이 추구한 일제유산 척결운동의 완결판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대중이 주인되었던 일제 잔재 청산

김일성 주석과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주도했던 공산주의자들은 공산당이 주도하는 친일청산은 오히려 대중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수십년간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던 세력의 입장에서는 친일파를 당장 심판하고 싶었겠지만, 전체 대중이 주인되어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고 봤다.

따라서 토지개혁을 비롯하여 많은 친일청산사업이 지방조직인 인민위원회, 농촌위원회, 노동자위원회 등에서 자체적으로 판단되고 집행되었다.

중요산업국유화도 마찬가지였는데, 다음은 『조선전사』(1981)의 한 기록이다.

“남신의주 동양상공회사에 예속되었던 300여명의 로동자들은 성토모임을 열고 이 공장의 경영주였던 리 아무개의 형제를 친일파, 예속자본가로 규정하는 리유서를 만들고 그 놈의 소유를 몰수하였다. 함경남도에서는 악독한 친일주구이며 예속자본가였던 방아무개란 놈을 청산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과학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그 놈의 재산을 철저히 몰수하였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전사 23 (현대편 민주건설사 1)”, 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185쪽. (류석춘, 김광동, “북한 친일청산론의 허구와 진실”, 격월간 시대정신, 2013년 봄호.에서 재인용) )

이와 같이 친일청산은 대중이 주인되어 스스로의 자치능력으로 진행한 과정이었다.

그렇다보니 1여년 안에 큰 소요 없이 일본인, 친일파들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청산을 이룰 수 있었다.

8. 친일청산의 결과

38선 이북 지역의 친일청산 결과는 훗날 독립운동가들이 북한 사회를 주도해나가는데 기여했다. 우선 북한 사회를 ‘영도’하는 조선노동당의 경우 그 출발부터 독립운동가들이 책임적 역할을 맡았다.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에 참여한 대표 801명 중 일제 시기 반일투쟁에 적극 참여했던 사람이 373명(46%)이었고 그 중 옥중 생활을 한 사람이 263명, 이들이 받은 총형량은 1,087년이었다.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114쪽.)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경우에도 위원장 김일성(조선인민혁명군 대장), 부위원장 김두봉(조선독립동맹 주석) 김책(동북항일연군 제3군 정치부 부주임), 보안국장 최용건(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제2령 정치참모), 사법국장 최용달(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에 참여), 선전부장 오기섭(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등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주도했다.

특히 군대와 보안국(경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그 책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만주지방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을 했던 인물들의 진출현황만 보더라도 다음과 같았다.

최용건 :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사령관(1946.8 당시)
김책 :평양학원 원장(1946.2)
강건 : 나남훈련소 제2소(제2사단) 소장(1946.11)
안길 :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참모장(1946.8)
김일 : 보안간부훈련대대부 문화부사령관(1946.8)
박성철 :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 군사부교장(1946.10)
오백룡 : 철도여단 부여단장(1946.10)
박영순 : 보안간부훈련대대부 통신부장(1946.8)
허봉학 : 보안국 강원도 보안부부장(1946.7)
김창봉, 전문섭, 전문욱, 안영, 박우섭 : 철도경비대 간부(1946)
이외 김광협, 최용진, 최광, 최현, 김경석, 석산, 오진우, 이영호, 유경수, 최춘국, 심태산, 전창철, 조정철, 이두찬, 서철, 손종준 등이 조선인민군 및 내무성 군관으로 활동. (이종석, “조선인민군 연구”, 역사비평사, 197쪽.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116쪽.에서 재인용)

이외 문학예술 분야에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작가, 예술인들이 주도했다.

1946년 10월 결성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반일문학예술운동을 벌렸던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출신들이 주도했다.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140쪽, 146쪽.)

‘고향’으로 유명한 소설가 이기영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을, 카프의 손꼽히는 이론가였던 안막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카프출신 한설야는 내각 교육문화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역임하며 북한 문학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었다.

카프 출신의 예술가들은 향후 북한사회에서 애국주의, 미래에 대한 낙관 등이 담은 문학작품들을 창조하고 민족적 형식을 담은 민속무용, 민요 등을 발전시켰다.

오늘날 북한 예술공연에 민족적 형식이 강하게 담겨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 공연 모습.

( [북한은 왜?] 북한에서 친일파는 어떻게 청산되었을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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