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①
북한은 왜? 2018-02-22 11 0
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한국에서는 광복을 ‘외세에 의해 어느 정도 주어졌다’고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토지몰수 등을 통해 친일청산을 철저하게 진행한 입장에서 북한은 일제의 패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1983년 북한에서 출간된 ‘현대조선역사’는 일제의 항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 앞에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일제의 ‘대본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이 개시된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 황급히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160쪽.)
즉, 북한 역사책은 민중들의 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났다고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역사서적들에 기초하여 그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목차]
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 현재 한국 역사책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 민족을 ‘조선’보다는 ‘한국’이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1897년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의 약칭으로 ‘한국’이라고 쓰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지역 명칭으로 불려졌고 민중들 역시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국민회’, ‘조선공산당’, ‘조선여성동우회’, ‘조선일보’ 등 조선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썼다. 대한제국이 왕조 교체 없이 1392년에 설립된 조선이라는 나라의 연장선에 불과했다는 점, 오늘날 순종 역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불려왔다는 점 등에 기초하여 이 연재글에서 당시 한반도 지역을 ‘조선’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의 ‘조선’이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1) 반일의병운동
일본이 조선침략을 시작했던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였다.
명치유신(메이지유신)으로 개화의 길에 들어선 일본에서는 서구 열강으로부터 ‘천황(天皇)의 국가’를 지키기 위해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조선이라는 땅덩어리를 차지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의 지원 하에 청나라, 러시아와 전쟁을 치렀다.
1895년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어 미국의 지원(가쓰라-태프트 조약) 하에 우리나라 땅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얻게 된다. (배타적 독점권 : 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는 독점권)
포츠머스 회담 2달 후인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1910년 한일합방조약으로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삼았다. (정식명칭은 한일협상조약. 일제의 강압에 의해 법적 형식이 결여된 채 불법적으로 맺어졌다. )
이로서 가혹한 일제 치하의 36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 민족은 일제가 조선에 대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시점부터 단 한시도 독립운동을 그치지 않았다.
양반관리들의 비리와 부패에 저항하여 시작된 1894년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혁명)도 일제에 맞서 싸운 반외세투쟁으로 확대되어 최후까지 일본군들과 맞서 싸웠다.

갑오농민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농민군은 곳곳에서 반일의병운동에 적극 떨쳐나섰다.
갑오농민전쟁 직후인 1895년 7월 유생 김원교가 이끄는 상원의병은 평안도 상원 읍내로 진격해 친일 관리들을 처단하고 황해감영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후 장수산에서 격문을 발표해 의병운동을 추동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이후 의병의 수가 급증해 총 1만 여 명에 달했던 제천의병(대장 유인석)은 1896년 2월 충주성을 함락시키고 일본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물리치기도 했다.
이승룡이 주도했던 양근의병은 이천의병 등과 합세하여 남한산성에 입성하고 관군과 대규모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국가기록원,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일의병운동은 더욱 양양되었다.
당시 민종식 대장이 이끈 홍주 병오의병, 신돌석의 을사의병, 최익현의 홍주의병 등은 일제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웠다.
1906년 5월 의병군 1,000여명이 일본군이 지키고 있는 홍주성을 점령하고 10여 일 동안 지켜내기도 했다.
일제는 토벌대를 배치해 1907년 8월부터 1911년 6월까지 무려 1만 7,000여명의 의병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1908년에만 7만 여 명의 의병들이 1천 500여 회에 달하는 전투를 벌여 일제가 조선을 점령하는 데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에 맞서 일제는 1910년부터 1,624개소에 달하는 경찰·헌병기관, 1만 7915명의 헌병, 경찰들을 배치해 조선을 ‘완전한 감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거대한 감옥’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일제가 축소해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910년 9월부터 1913년 8월까지 3년 동안 의병의 전투회수가 70여차에 달하기도 했다.
의병전투 외에 영등포피혁회사 파업 등 노동자투쟁, 강원도 춘천군 서하면 농민들의 면사무소 습격 등 농민투쟁, 청년학생들의 동맹휴학 등이 도처에서 발발했다.
이러한 민중들의 분노가 거족적인 반일항쟁으로 폭발된 것이 바로 3·1운동이었다.
2) 3·1운동의 성과와 한계
3·1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 전민족적 독립항쟁이었다.
조선총독부 공식기록에만도 총 집회인수가 106 여 만 명이라고 적혀있을 정도로 많은 수가 참가했다.
총 참가인원은 전체 조선 인구 1,678만 8천400명의 10% 정도로 추산된다. (3.1운동, 한국사콘텐츠)
전국적으로 총 232개 중 211개 부, 군, 섬에서 발생한 거족적인 봉기였고 우리 민족이 살아있다는 것을 세계적으로 시위했던 항쟁이었다.
3월 하순에서 4월 하순에 걸쳐 전국적으로 544회 봉기가 일어났고 4월 1일 하루 동안에만도 60회 이상 투쟁이 전개되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 특기할만한 항쟁으로 기록되어 남북 모두 3월 1일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
북한은 그 원인을 운동지도부의 나약성과 비폭력·무저항주의로 보고 있다.
당시 3.1운동 지도부는 비폭력·무저항주의에 입각한 평화적 시위와 열강에의 독립청원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윤상, “3.1운동의 배경과 독립선언”,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8쪽.)
이들은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면서 파리 강화회의가 개최되는 정세에 희망을 갖고 곽종석, 김창숙 계열은 파리 평화회의에 독립탄원서를 보낼 시도까지 했다.
민족대표들은 10여 년 전 총을 들고 일제와 맞서 싸웠던 의병들과 달리 외국청원에 희망을 품고 비폭력주의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노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리고 연행되었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6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인물과 사상사.)
보성법률상업학교 학생 강기덕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들이 태화관으로 들이닥쳐 민족대표들이 탑골공원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비난했지만 당대의 논객이었던 박희도는 “무저항 비폭력으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방침에 따라 불가피하게 불참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표들이 잡혀가자 3·1운동은 명확한 지도부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확산되었다.
시위는 주로 학생들이 주도하여 독립선언서를 읽고 시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부르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민족대표의 입장에 영향을 받은 각지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국제적 여론에 호소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 국내에서 비폭력운동을 크게 전개해야 한다고 바라봤다.
태극기를 든 민중들은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제대로 된 저항을 못한 채 쓰러졌고 수만명이 연행되면서 항쟁역량이 온전히 보전되기 힘들었다.
일부는 파출소에 진입하거나 돌을 던지며 일본 경찰들의 총칼에 맞서 저항했지만 결국 2-3달만에 7,509 명이 사망하고 4만 7천여 명이나 구속되었다. (조선총독부 공식 발표)
수원 제암리에서는 3.1만세시위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가 시위 지도부를 죽이고 잔혹한 학살을 감행하기도 했다.

제암리 학살 현장.
결국 3.1운동역량이 급격히 소진되면서 운동은 독립할 때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3·1운동 이후 절망에 빠진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은 우리 현실에 맞는 독립노선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계속)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②
북한은 왜? 2018-02-27 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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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한국에서는 광복을 ‘외세에 의해 어느 정도 주어졌다’고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토지몰수 등을 통해 친일청산을 철저하게 진행한 입장에서 북한은 일제의 패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1983년 북한에서 출간된 ‘현대조선역사’는 일제의 항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 앞에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일제의 ‘대본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이 개시된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 황급히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160쪽.)
즉, 북한 역사책은 민중들의 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났다고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역사서적들에 기초하여 그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목차]
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 현재 한국 역사책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 민족을 ‘조선’보다는 ‘한국’이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1897년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의 약칭으로 ‘한국’이라고 쓰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지역 명칭으로 불려졌고 민중들 역시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국민회’, ‘조선공산당’, ‘조선여성동우회’, ‘조선일보’ 등 조선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썼다. 대한제국이 왕조 교체 없이 1392년에 설립된 조선이라는 나라의 연장선에 불과했다는 점, 오늘날 순종 역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불려왔다는 점 등에 기초하여 이 연재글에서 당시 한반도 지역을 ‘조선’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의 ‘조선’이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계속)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1운동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자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서서히 일제에 협력해나갔다.
이광수, 최남선 등 문학가들은 과감하게 친일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들이 일제와 협력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패배주의와 무력감 때문이었다.
강대한 일제에 맞서서 싸우기에는 우리 민족의 의식과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내선일체가 되어’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일까.
일본은 우리 민족에게 일본어, 일본이름, 일본식 문화를 강요하고 조선역사 대신 천황 중심의 일본역사를 가르쳤다.
나이어린 조선 소녀들을 위안부로 동원하고 구속된 독립운동가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까지 저지르는 만행을 벌였다.
일본은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있었지만 사실 우리 민족을 ‘일본의 2등 국민’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3.1운동, 일제와의 투쟁에서 무력감을 느낀 일부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내선일체’ 주장에 동조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다수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엔 독립에 대한 염원과 그 의지가 남아있었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만도 수만이 참가하는 노동자, 농민, 학생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면서 우리 민족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1929년 원산총파업은 3개월이나 원산 노동자 전체가 파업에 참가해 세계적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1) 독립운동노선
당시 독립운동은 외세에 의존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노선(이승만 등), 실력을 양성해서 독립을 이뤄내자는 노선(안창호 등), 일제 치하에서도 민족자치가 가능하다는 노선(이광수 등), 노동자, 농민의 과격한 계급투쟁을 앞세우는 노선(박헌영, 김찬 등), 암살, 파괴 등의 테러를 통한 독립노선(김구, 김원봉 등)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반면 1920년대 중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타도제국주의동맹(약칭 ㅌ.ㄷ, 훗날 반제청년동맹으로 발전),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성원 등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항일무장투쟁세력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의 기치 아래 전체 조선인들을 떨쳐나서야 조국광복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훗날 북한 정부의 지도부로 성장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외세의존, 실력양성, 민족자치 노선들이 민족의 힘을 믿지 못하고 일제에 대한 환상에 빠져 만들어진 이론들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이 이론들이 민중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독립을 이뤄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독립운동가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조짐을 보이자 ‘일본의 조선 병합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발생한 문제가 아니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인들의 요구를 들어줄 가능성은 없다’라며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사례 등을 꼽았다. (이윤상, “3.1운동의 배경과 독립선언”,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1쪽.)
그들은 일제 및 열강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오직 우리 민족의 힘으로 독립을 이뤄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제시한 노선이 바로 무장에 기반한 전민항쟁노선이었다.
2) 전민항쟁노선
전민항쟁노선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의 기치 아래 전체 우리민족을 단결시키고 발동하여 항쟁을 벌여나가자는 노선이었다.
즉, 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에 반대하는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고 하나의 독립운동조직에 묶어서 즉각적이며 조직적인 전국 반일항전을 전개하여 조국광복을 실현하자는 노선이었다.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항일무장투쟁세력은 일제의 가혹한 압박에 신음하는 전체 조선인들의 힘을 길러 무장으로 일제를 몰아내는 것밖에 독립의 길은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만주지역에서 상비적인 혁명무력을 키워내고 반일투쟁에 이해관계를 가진 모든 애국역량을 총발동하여 국내에서 거족적인 항쟁을 이뤄나가야 한다고 바라봤다.
그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의병들의 활동, 청산리·봉오동전투에서 보여줬던 우리 민족의 투지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3) 역사 속 전민항쟁 경험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항일무장투쟁계열이 이런 노선을 제기한 이유는 우선 과거 항쟁들의 경험이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 3·1운동은 전국적으로 폭발된 전민항쟁의 형태를 띠었고 실제 일제의 통치방식을 바꿀 정도로 위력적인 투쟁이었다.
비록 당장의 독립을 이뤄내지 못했지만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났던 6.10만세운동 역시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6.10만세운동. 흰 옷을 입고 순종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죽자 전국적으로 망곡, 봉도, 철시, 동맹휴학 등이 거세게 일어났다. (망곡 : 먼 곳에서 임금이나 어버이의 상사를 당했을 때에, 곡을 할 장소에 몸소 가지 못하고 그쪽을 향하여 슬피 욺. 봉도 : 임금이 거둥할 때 수레를 편안히 모시라고 별감이 소리를 지르면서 경계하던 일. 철시 : 국상이 났거나 대신이 죽었을 때 저자의 문을 닫고 쉬던 일.)
이리, 김천, 청주, 강릉, 강경, 광주 등 주요 읍내가 전부 철시를 하고 전국적으로 봉도식이 진행되었으며, 언론에 보도된 것만 토대해도 김제 금구보통학교, 홍성보통학교, 여산보통학교, 원주보통학교 등 수십 개의 학교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진행되었다. (장석흥, “6.10만세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38~263쪽.)
그리고 1926년 6월 10일 서울에서 학생들 중심으로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등의 구호로 시위가 벌어졌으며 시위는 인천, 고창 등지로 확대되었다.
당시 조선공산당, 천도교, 임시상해부 등은 6.10만세운동을 전국에 확대하여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210여명의 학생들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1,000여 명을 사전 검거하면서 시위는 확산되지 못했다.
비록 6.10만세운동이 지도부의 사전 체포로 큰 항쟁으로 되지 못했지만, 우리 민족이 사상의 차이를 넘어 단합이 가능하다는 것, 전국적 항쟁이 가능하다는 것, 우리민족의 반일 의지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동맹휴학 투쟁으로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1920~1925년(6년) 총 234회, 1926~1928년(3년) 총 210회의 동맹휴학이 발생하는 등 반일학생운동의 기세가 높아지던 시점에 일어난 항쟁이었다.
1929년 11월부터 1930년 4월까지 6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194개교에서 6만 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 동맹휴학 등에 참가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조선 청년학생들의 반일의식과 단결력이 대단히 높아 항쟁의 기운이 전체 민족으로 확산만 되면 전민항쟁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믿은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전민항쟁이 항일무장세력과 결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대중투쟁만으로는 해방을 이뤄낼 수 없다는 교훈이 바로 3·1운동, 6.10만세시위 등에 있다는 것이었다.
총칼로 무장한 일제가 조선을 가혹하게 옥죄고 있는 상황에서 비폭력·평화운동은 역량의 손실만 가져올 뿐이었다.
그들은 1900년대 의병운동처럼 만주지역에서 성장한 항일군대가 국내에서 직접 전투를 벌여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무장력이 전민항쟁과 결합하여 단숨에 한반도 땅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군대가 서서히 한반도 땅을 점령하면서 해방을 이루는 형태는 조선땅, 일본본토에서 일본군의 증강을 불러올 위험이 컸다.
따라서 전국 독립운동조직에 묶인 조선인들이 각자 자기 지역에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동시에 이루어내는 형태로 추진되어야 했다.
이렇게 항일군대과 전체 조선인들의 신뢰와 연대 속에서 해방을 이루자고 했던 것이 바로 전민항쟁 노선이었다.
실제 항일군대와 민중이 결합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운 경험은 우리 민족이 많이 거주하는 동만주 지역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의병운동과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로 대표되는 독립군의 활동으로 우리나라 북부국경지대, 동만주지역에는 역사적으로 반일의식이 높은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1930년대 초 동만주에는 일본의 통치나 만주국(일본이 세운 괴뢰정부)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유격구(일종의 해방구)가 꾸려지기 시작했다.
유격구에서는 토지개혁, 8시간 노동제, 남녀평등,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을 실현하는 인민혁명정부가 건설되었다.

소왕청 유격근거지 기념비. 인민혁명정부가 꾸려졌다고 쓰여져 있다. ⓒ이창기
아이들은 아동단, 여성들은 반일부녀회, 농민들은 농민협회 등의 대중단체에 묶여 반일의식을 높여 나갔다.
인민혁명정부를 중심으로 결합된 주민들은 자체의 힘과 의지로 일본군과 위만군(만주국의 군대)로부터 유격구를 수 년 동안 지켜냈다.
유격구를 지켜낼 수 있었던 힘은 유격구가 꾸린 군대에서도 나왔다.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군대를 유격구의 군대라 하여 유격대라 불렀다.
유격대는 일본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여 총 등의 무기와 식량, 의복 등을 얻었다.
이에 일제는 유격구의 확대에 위기감을 느끼고 1932년 겨울부터 많은 병력을 규합해 해방구에 대한 지속적인 토벌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해방구를 지켜낸 경험들은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들이었던 것이다.
1933년 봄 일제는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의 주재지인 소왕청에 수천여명의 전투병력을 투입하여 대규모 공세를 전개했다.
유격대는 주민들과 함께 1933년 3월 30일 하루 종일 치열한 격전을 치른 끝에 3백여명의 적군을 살상하고 보총·권총 259정과 박격포 4문 등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종석, “북한 지도층과 1930·40년대 초반 동북인민혁명군의 항일무장투쟁”.)
그러나 그해 가을 일제는 또다시 보병, 포병, 항공대의 협동 하에 대병력을 밀어붙였다.
비행기까지 동원한 최신무기로 초토화전술을 써가며 왕청, 연길, 화룡, 훈춘현에 각각 수천 명의 병력으로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150쪽.)
당시 소왕청은 120여명에 달하는 2개 중대 유격대 역량만 있었다고 한다. (당시 소대규모는 20여명, 중대규모는 60여명, 대대규모는 120여명, 연대규모는 360여명로 추정된다.)
백여명의 사람들이 총을 들고 수천명의 적들과 싸운다는 것은 사실상 무모한 행동이었다.
이 때 소왕청 방어를 위해 나섰던 이들은 유격구 주민들이었다.
주민들이 아동단, 부녀회, 농민협회 등에 소속되어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아이들은 돌과 통나무를 굴려 적들을 살상하고 기마대와 군용트럭에 타격을 입혔다.

소왕청 전투를 벌였던 뽀쪽산. 여기서 아이들이 돌을 굴려서 일본 토벌대의 공격을 막아냈다고 한다. ⓒ이창기
여성들과 아이들은 밤에 일본 토벌대 숙영지에 들어가 꽹과리나 북을 쳐 일본군들이 밤에 잠을 못 자게 했다.
당조직과 혁명정부의 두리에 뭉친 군민들은 근거지방어전에 한결같이 떨쳐나섰다. 후방을 지켜선 여성들은 불비 속을 헤치면서 물과 밥을 유격대에 날라갔고 의복도 빨아 주었으며 아동단원들은 근거지를 지켜선 유격대원들에게 항일가요를 불러 그들의 투지를 고무하여 주었다. 인민들로 조직된 반일자위대는 유격대를 도와 후방을 지켜선 한편 적극적으로 출격하였다. 이리하여 1933년 춘기대토벌과 1933년 동기대토벌에서 각각 400여 명, 1,000여명의 살상자를 낸 일제는 부득이 물러가고 말았다. 반일자위대는 근거지방어전에서 무비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백년사화” 제2집, 료녕인민출판사, 1982. 300쪽. /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151쪽에서 재인용.)
이렇게 전체 주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 전투를 벌였다.
당시 주민들의 힘으로 사흘간에 400여명의 토벌대를 소멸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일제토벌대가 녹아난 소왕청골 뾰족산” )
유격대는 일제의 초토화 작전을 물리치기 위해 일본군의 병영을 몰래 지나 적의 배후를 쳤다.
배후공격에 당황한 일본 토벌대는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주민들과 독립군대가 합세하여 일제의 침략을 몰아낸 소왕청 전투를 통해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봤다.
항일의식이 높은 주민들과 무장한 군대가 있다면 전민항쟁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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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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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③
북한은 왜? 2018-03-02 9 0
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한국에서는 광복을 ‘외세에 의해 어느 정도 주어졌다’고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토지몰수 등을 통해 친일청산을 철저하게 진행한 입장에서 북한은 일제의 패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1983년 북한에서 출간된 ‘현대조선역사’는 일제의 항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 앞에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일제의 ‘대본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이 개시된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 황급히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160쪽.)
즉, 북한 역사책은 민중들의 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났다고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역사서적들에 기초하여 그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목차]
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 현재 한국 역사책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 민족을 ‘조선’보다는 ‘한국’이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1897년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의 약칭으로 ‘한국’이라고 쓰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지역 명칭으로 불려졌고 민중들 역시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국민회’, ‘조선공산당’, ‘조선여성동우회’, ‘조선일보’ 등 조선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썼다. 대한제국이 왕조 교체 없이 1392년에 설립된 조선이라는 나라의 연장선에 불과했다는 점, 오늘날 순종 역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불려왔다는 점 등에 기초하여 이 연재글에서 당시 한반도 지역을 ‘조선’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의 ‘조선’이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계속)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항일유격대
그렇다면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본격적으로 전민항쟁을 준비했던 과정은 어떠했을까?
“20세기 우리역사”,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 등 현재까지 한국에서 발간된 역사책들에 토대하여 그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전민항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상비무력 즉, 군대부터 꾸려야 했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1931년 12월 연길현 명월구 (현 명월진, 明月镇)에서 조선독립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군대를 꾸릴 것을 결정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94쪽.)
회의에서는 원산총파업, 광주학생운동 등 반일투쟁이 세차게 일어나고 있는 정세에 맞춰 만주지역에서는 유격군(독립군) 및 유격구(해방구)를 꾸리기로 결정했다.
1932년~1933년 당시에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만주국을 세우면서 만주지역의 통치권력이 일종의 공백기를 겪던 시기였다.
1931년 10월 중국공산당도 ‘만주 병사공작에 관한 지시’를 내려 만주지역 반일대중을 중심으로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할 것을 지시한 바 있었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136~146쪽.)
따라서 만주지역 조선인들은 중국인들과 함께 연합하여 유격구와 유격대를 꾸렸다.
1932년 4월 안도현에서 김일성 대장(훗날의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는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었다. (이정식, 스칼라피노, “한국공산주의운동사 Ⅰ”, 돌베개, 1986, 278쪽.)

안도현에서 반일인민유격대가 꾸려졌다는 기념비. ⓒ이창기
북한에서는 이 날을 건군절로 기념해왔다. (올해 북한은 건군절을 조선인민군 창건일인 2월 8일로 변경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는 자체로 칼, 창, 곤봉, 고춧가루폭탄, 화약 등을 제조했고 이것을 이용하여 일제의 현대적인 무기들을 빼앗아 스스로를 무장했다.
안도에서 인민유격대가 창건된 후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 각 현에서 현 단위의 항일유격대가 꾸려졌다.
이 지역들은 대부분 조선 북부 국경과 인접한 동만주지대였다.
1933년 말 동만주 지역 항일유격대의 민족별 구성은 조선인 565명, 중국인 16명으로 총 600명 규모를 유지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정식, 스칼라피노, “한국공산주의운동사 Ⅰ”, 돌베개, 1986, 226쪽.)
유격대는 중국공산당과 협력 하에 동만주지역 조선인들이 많이 살던 왕우구·소왕청·석인구·대황구·연통라자 등을 유격구로 형성했다.

처창즈의 항일유격근거지 기념비 ⓒ이창기
유격구는 급격히 확대되어 1933년 말 13개의 고정된 해방구로 발전했으며, 총 3만 여 명의 인구를 포용할 만큼 크게 성장·발전했다고 한다.

유격구에서 유명했던 어린
항일투사 김금녀(금순)의
모습. ⓒ이창기
유격구에서는 인민혁명정부가 주민들을 대중단체로 묶고 끊임없이 반일교양사업을 진행했고 유격대의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유격구는 해방된 사회의 원형을 실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독립투쟁에 대한 확신을 주는 역할을 했다.
참고) 인민혁명정부 정강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134쪽.)
Ⅰ. 인민혁명정부 통제구역 내에 있는 모든 노동자, 농민, 유격데병사·지휘관 및 학생, 상인 기타의 반일, 반만, 반제 대중 및 그들의 가족을 남녀, 종족, 종교·신앙의 차별 없이 모두 평등하게 혁명정부의 공민으로서 평등권을 가지며 16세 이상은 모두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다. 단 매국적 민족반역자, 일본제국주의 및 괴뢰만주국의 앞잡이, 반혁명분자에게는 선거권·피선거권이 없고 정치적 자유도 없다.
Ⅰ. 일본 및 모든 제국주의와 매국노의 은행, 철도, 광산, 기업소, 토지 및 기타의 재산을 몰수하여 반일군비로 충당하며 일부분은 빈곤한 인민에게 분배한다.
Ⅰ. 일본에 반대하는 모든 피압박민족과 공동전선을 결성한다.
Ⅰ. 인민의 무장으로 반만항일을 행한다.
Ⅰ. 가렴잡세를 폐지하고 통일누진세제를 실시한다.
Ⅰ.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독서 및 스트라이크(파업)의 자유를 보장한다.
Ⅰ.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를 실시하고 실업자 및 이재민을 구제한다.
Ⅰ. 소작농민에게 2·8 소작제를 실시한다. (20% 지주, 80% 농민)
Ⅰ.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확립한다.
또한 유격대 인원이 보충되고 군사훈련, 학습, 휴식 등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줌으로써 반일인민유격대가 급격히 성장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인민혁명정부가 꾸려진 유격근거지임을 표시한 기념비 ⓒ이창기
2)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
1934년 3월 각 지방의 유격대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결성했다. (장세윤,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41~145쪽. 한국 역사학계에서 낸 이 책에 따르면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에 대해 1930년대 전반기 일부 중국인들 사이에서 확인된다고 한다.)
한국 학계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만주지역에 살던 우리 민족이 대거 참여해 성립한 부대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독립사단)이라고 보고 있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136~146쪽.)
동북인민혁명군은 중국공산당이 1933년 “1월서한”을 채택하면서 동만주·남만주·북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유격대들을 개편한 연합군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2~3개의 독립연대로 편성된 수개의 독립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일인민유격대가 최초로 세워진 지 2여 년 만에 일종의 정규 군대 정형을 갖추게 된 것이다.
장세윤의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가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민혁명군 규모가 3천명이었다고 한다.
3개 소대가 1개 중대로, 3개 중대가 1개 대대로, 3개 대대가 1대 연대로 편성되었고 중대마다 정치지도원, 대대, 연대에는 정치위원이 있었고 사단 및 군에는 정치부가 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이후 여러 전적을 쌓았는데 1934년 6월 만주지역 중국인부대인 구국군과 함께 연대하여 라자구 시내를 해방시키기도 했다.
또한 1934년 9월 탄광노동자들의 집결지인 연길현 노항구로의 진공작전으로 도시를 일시에 해방시키는 전적을 쌓기도 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34년 10월~1935년 초까지 북만주로의 원정을 진행한 후 1935년 요영구회의에서 유격구를 해산하고 더 넓은 지대로 진출하여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벌일 것을 결정한다.
이후 조선인민혁명군은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새롭게 건설하고 국경지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937년 6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 갑산군 보천보를 공격하여 국내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136~146쪽.)

보천보전투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한편 1936년 2월 중국공산당이 “동북항일연군 군대 편제를 통일할 것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면서 동북지역 무장조직들이 통합되어 동북항일연군 제1군부터 제11군으로 편성되었다.
동북항일연군 주요간부 저우바오중(주보중)이 쓴 “저우바오중문선”(1987, 51쪽)에 따르면 “항일연군 제2군은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고 되어 있다. (장세윤,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41~145쪽. “재만한인들이 대거 참여해 성립된 이 부대를 중국인들도 경우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고 적혀 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훗날 동북항일연군 제1군과 제2군을 합쳐 편성된 제1로군(양징우 총사령)에 배치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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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④
북한은 왜? 2018-03-06 8 0
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한국에서는 광복을 ‘외세에 의해 어느 정도 주어졌다’고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토지몰수 등을 통해 친일청산을 철저하게 진행한 입장에서 북한은 일제의 패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1983년 북한에서 출간된 ‘현대조선역사’는 일제의 항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 앞에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일제의 ‘대본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이 개시된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 황급히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160쪽.)
즉, 북한 역사책은 민중들의 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났다고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역사서적들에 기초하여 그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목차]
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 현재 한국 역사책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 민족을 ‘조선’보다는 ‘한국’이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1897년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의 약칭으로 ‘한국’이라고 쓰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지역 명칭으로 불려졌고 민중들 역시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국민회’, ‘조선공산당’, ‘조선여성동우회’, ‘조선일보’ 등 조선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썼다. 대한제국이 왕조 교체 없이 1392년에 설립된 조선이라는 나라의 연장선에 불과했다는 점, 오늘날 순종 역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불려왔다는 점 등에 기초하여 이 연재글에서 당시 한반도 지역을 ‘조선’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의 ‘조선’이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계속)
3. 전민항쟁 준비단계
3) 조국광복회
“저우바오중문선”에 따르면 “(조선인민혁명군은)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의 민족혁명군중활동의 기초상에서 창건되고 발전장성되었다. 기타 각군의 지도간부와 전사들 중에는 상당히 많은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의 성원이 들어있었다. 항일유격전쟁 중에서 중조인민은 공동의 사업을 위하여 붉은 피를 같이 흘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장세윤,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44쪽.)
조국광복회는 전민항쟁을 위해 꾸려진 독립운동조직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36년 2월 27일 남호두에서 열린 군정간부회의에서 조국광복회 건설을 결정했다.
조선인민혁명군과의 긴밀한 연계 하에 일제에 드러나지 않게 비공개독립운동조직을 꾸리기로 한 것이다.
조국광복회에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을 기본으로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민족주의자, 애국적인 종교인, 양심적인 민족자본가 등도 포괄하기로 했다.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했던 조선인민혁명군이 종교인, 자본가들까지 독립운동의 동력으로 삼은 것은 상당히 혁신적인 입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36년 5월 5일 조국광복회의 창립선언과 10대강령이 발표되었고 기관지 명칭은 ‘3·1월간’으로 확정되었다.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준 3·1운동을 계승하겠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조국광복회는
㉠우리민족을 총동원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독립적인 인민정부를 수립할 것,
㉡중국 땅에 사는 우리민족의 진정한 자치를 실현할 것,
㉢조선독립을 위해 싸울 수 있는 혁명군대를 조직할 것,
㉣일본과 매국적 친일분자의 모든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와 빈곤한 인민을 구제할 것,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전취하고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양반, 상민 기타 불평등을 배제하고 남녀, 민족, 종교 등 차별없는 인륜적 평등을 실현하고 여자의 인격을 존중할 것,
㉦의무무상교육을 실시할 것,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재해보험법을 실시할 것,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대해 선의와 중립을 표시하는 국가·민족과 친선을 유지할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10대 강령을 발표했다.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220~221쪽.)
조국광복회는 장백지구(백두산지구)를 중심으로 서서히 확대되어갔다.
조국광복회가 결성된 지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장백현의 조직은 현위원회, 그 산하에 상강구, 하강구의 각 구위원회 및 각 방면의 구회, 지회, 분회, 반 등의 정연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자료에 근거하면 조국광복회 장백현 위원회는 구회 3, 지회 11, 분조 41, 반 10개를 포괄하고 있었으며 지방대중단체인 농민협회, 반일부녀회, 반일청년회 등과 긴밀한 연대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309쪽.)
조국광복회와 관련해 가장 유명한 사건은 혜산사건이다.
혜산사건은 일제가 1937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조국광복회 회원 총 739명, 그 중 188명을 기소한 사건이었다.

1937년 10월 혜산 사건 1차 검거 당시 체포된 박달(앞줄 포승줄에 묶이고 수갑찬 사람.)
한국 역사학계는 혜산사건을 일제 강점기 항일조직사건 중 국내외조직이 대규모로 연결된 특별한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혜산사건”)
일제가 1937년 11월 중순까지 조선 내에서 체포한 인원이 162명에 달했을 정도로 조국광복회 국내조직들은 결성 1년 반 만에 국내에 상당한 규모로 확대되어 있었다.

혜산사건 수사에 대한 공로로 함경남도 경찰부의 최령(崔鈴 = 崔燕), 시원감일(市原感一), 금야좌차랑(今野佐次郞) 3인이 경찰공로기장(警察功勞記章)을 수여받고, 급천정인(及川正人), 촌전금오(村田金吾) 등 2인이 감장(感狀)을 수여받은 것이 1940년 2월 11일자 매일신보에 보도.
조선 양강도 중부지역 갑산군에 있었던 조국광복회 갑산공작위원회는 조직의 은폐와 확대를 위해 ‘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여 확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314쪽.)
국내에서는 반일회, 반일소년회, 반일부녀회 등 다양한 명칭을 띠고 조직이 확대되어 평양, 서울, 부산까지 각계각층이 묶여 있었다.
4)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이 1939년 9월 1일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이미 수년간 중국대륙 침략전쟁에서 침체에 빠져 있었다.
일제는 만주지역에서 10년 가까이 존속하고 있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대륙으로의 군수물자 보급의 장애물로 여겼다.
따라서 1939년 가을부터 조선인민혁명군 토벌작전에 일본정규군을 포함한 20만 대군을 동원해 초토화 작전을 벌이게 된다.
일본군의 탄압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은 오히려 일제가 패배하고 조국광복이 머지 않았음을 예견했다고 한다.
일본이 중국대륙을 침략하면서 최정예부대의 절반을 잃어버린 상황, 중국 대륙 전역에서 전쟁을 수행하다보니 군수물자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 점 등을 근거로 중국에서의 일제의 패망을 예상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로 침략의 예봉을 돌린 일본이 아시아 전체의 저항에 직면하고 소련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일본의 패망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국내에서도 여운형 선생의 건국동맹이 1944년 발족해 이미 건국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을 미루어볼 때 독립운동가, 일부 지식인들은 어느 정도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40년 8월 조선인민혁명군은 최후대결전과 전민항쟁을 준비하자는 측면에서 소부대활동으로 행동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이후 그들은 역량 보존을 위해 대규모 전투를 피하고 조국광복회 확대를 위한 소부대활동을 진행했다.
소부대들은 적정 정찰 등 최후대결전 예비활동을 진행했으며 철도, 간선도로 등 일제 수송로를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136~146쪽.)
국내에서도 전민항쟁을 준비하는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이재화의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에 따르면 1942년 당시 국내에 총 183개의 정치단체들이 조직되어 있을 정도로 반일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28쪽.)
평양에는 무장항쟁을 목표로 하는 260여명 규모의 조국해방단이 꾸려졌다.
경상북도에서는 청장년 27명이 ‘결심대’를 꾸려 죽창, 낫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산중에 은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34쪽.)
1943년 상반기에는 총 30만명의 강제징용자 중에 11만명이 강제노동을 그만두고 탈주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고등의사월보, 1944년 51호, 67쪽. 300,654명 중 109,185명이 탈주해 총 36%에 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리산, 덕유산, 백운산 할 것 없이 깊은 산중에는 가는 곳마다 학병과 징용을 피해 입산해 있는 청년들이 널려 있었고 이들 중에는 무장유격대오를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할 준비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34쪽.)
한편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소련 극동지방으로 이동해 1942년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 부대들과 함께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을 꾸리게 된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136~146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소련 적군 제88독립저격여단(88 Otdel’naya Strel’kovaya Brigada)”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사전에서는 “명칭은 88독립보병여단(88여단)으로 4개의 대대와 독립통신대대, 독립보병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제1대대는 항일연군 제1로군의 조선인 대원들을 기본으로 구성하였고, 대대장은 김일성이었으며, 안길이 정치담당 부대대장을 맡았다. 최용건은 여단의 부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소련으로 들어온 동북항일연군은 대략 590명 정도였고, 이들 중 최소 190여 명은 조선인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에 소속된 조선인민혁명군은 최후 전민항쟁을 앞두고 하바롭스크 근처 북야영에서 대규모 현대전의 수행에 필요한 낙하산훈련, 공병훈련, 무전훈련 등을 진행했다.
김참봉, 석산, 김병갑, 지병학, 오백룡, 백학림 등은 오케얀스카야 근처의 국영농장에서 소련군의 정찰부대 성원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김병균, “쉽게 보는 북한역사, 그리고 통일-항일무장투쟁사편”,해드림,2013, 266~274쪽.)
(계속)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⑤
북한은 왜? 2018-03-09 7 0
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한국에서는 광복을 ‘외세에 의해 어느 정도 주어졌다’고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토지몰수 등을 통해 친일청산을 철저하게 진행한 입장에서 북한은 일제의 패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1983년 북한에서 출간된 ‘현대조선역사’는 일제의 항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 앞에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일제의 ‘대본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이 개시된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 황급히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160쪽.)
즉, 북한 역사책은 민중들의 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났다고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역사서적들에 기초하여 그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목차]
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 현재 한국 역사책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 민족을 ‘조선’보다는 ‘한국’이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1897년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의 약칭으로 ‘한국’이라고 쓰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지역 명칭으로 불려졌고 민중들 역시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국민회’, ‘조선공산당’, ‘조선여성동우회’, ‘조선일보’ 등 조선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썼다. 대한제국이 왕조 교체 없이 1392년에 설립된 조선이라는 나라의 연장선에 불과했다는 점, 오늘날 순종 역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불려왔다는 점 등에 기초하여 이 연재글에서 당시 한반도 지역을 ‘조선’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의 ‘조선’이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계속)
4. 전민항쟁
※이 부분은 고태우, “북한사 다이제스트100”, 가람기획, 2015, 12쪽~15쪽. / 김병균, “쉽게 보는 북한역사, 그리고 통일-항일무장투쟁사편”, 해드림, 2013, 266~274쪽.의 상당 부분을 인용하였음.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1930년대 말까지 서부 유럽과 북부 유럽을 점령한 독일은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여 그해 10월 모스크바까지 진격하지만 바로 소련의 반격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독일과 동맹을 맺었던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1943년 7월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한 미·영연합군(허스키 작전)에 밀려 그해 9월 항복을 선언하였고, 결국 1945년 5월 소련이 베를린을 점령함에 따라 독일은 항복을 선언했다.
전쟁이 종말에 가까워짐에 따라 국제정세는 조선독립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중화민국 3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 대한 전략과 조선을 독립시킬 것을 합의한 카이로선언을 발표했다. (원문 :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이어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는 소련과 미국, 영국이 독일의 분할통치, 폴란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행사 인정, 소련의 극동에서의 이권 회복 등을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소련은 독일 항복 3개월 이내에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할 것을 약속한다.
국내에서는 전쟁이 종말에 가까워짐에 따라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고 있었다.
각지의 노동자, 농민, 학생, 청년들 속에서 징병과 징용을 거부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초보적인 무장항쟁을 전개하는 사태가 발생할 만큼 반일·반전의 각종 투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광주서중학교에서는 무등회가 결성되어 태평양 전쟁이 장기화되면 조선독립의 절호의 기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일제의 군사교육을 무력 항쟁의 수단으로 이용해 무장봉기를 기도했다.
또한 평양사단 학생의거 등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간 학생들 중 일부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1941년 소화 공과학원 학생들이 조직환 BKC단 등 학생층이 무장대를 조직해 무장항쟁을 기도하기도 했다.
전주사범학교의 우리회, 경복중학교의 흑백당 그룹 등은 임시정부 등 만주지역 운동세력과 합류하기 위해 만주로 탈출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김정인, 이준식, 이송순, “한국근대사②”, 푸른역사, 2016,327~328쪽.)
이 당시 조선 국내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연계를 가지려는 사건들은 일본 경찰 측에 확인된 것만 하더라도 1942년에서 1944년까지 무려 30여건을 상회하고 있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29쪽.)
이러한 상황에 대해 가장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미국이었다.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은 당시 사회주의가 확대되어 세계 곳곳에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대단히 우려하고 있었다.
얄타회담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45년 2월 한 미국 국무성 문서는 “명백한 위험사태는 조선공산군이 적절한 시기에 조선반도를 휩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태는 미국에 대해 치명적인 상황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55쪽.)
미국은 조선이 조선인민혁명군 및 동북항일연군의 주도 하에 전민항쟁의 형태로 해방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1943년 2월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성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중국의 주보중 군장과 김일성 주석이 가운데 앉아있다. 1930년대 조선과 중국의 항일유격대는 피를 나누며 함께 항일운동에 나섰다. ⓒ민족21 자료사진
한편 조선인민혁명군은 1945년 8월에 들어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진공작전계획” 실행을 위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이 계획은 1943년 9월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간부회의에서 결정된 것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을 함경북도, 함경남도, 평안북도, 평안남도의 4개 방면으로 나누어 진공하고 그 과정에서 징병, 징용을 피해 입산한 청년들을 합류시키며 국내의 노동자, 농민, 학생을 비롯한 전민항쟁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56쪽.)
소련은 독일을 패망시킨 후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1945년 여름 원동소련군총사령부를 조직하고 3개의 큰 전선군을 배치했다.
제1원동전선군의 기본작전지역은 할빈 이남의 중국동북 일부 지역과 조선이었고 제2원동전선군의 작전지역은 하바로프스크 서쪽에 있는 동북지역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소속된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은 제1원동전선군에 배속되어 전민항쟁 전술을 기초로 하여 함께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2) 전민항쟁의 진행
소련의 일본 선전포고가 다가오고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면서 우리 민족의 저항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1944~1945년경에는 징용·징병의 기피형태로 전국 각지의 산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해방을 위한 준비를 모색하는 경우가 많았다.
징병·학병 기피자들과 산속에 은신해 있던 운동가, 징용을 기피한 농민들은 초보적 수준이지만 무장대를 꾸렸다.
‘평양학병사건’을 지도한 삼천당, 징용기피자가 중심이 된 경북의 결심대, 덕유산·지리산 등에서 항일유격대를 조직한 보광당, ‘부민관 폭파사건’으로 유명한 대한 애국청년당’ 등 많은 조직이 무장봉기를 직접 실천에 옮기려 했다.
당시 총독부 고위 관리는 “사실 나는 1944년 말경부터 위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은 언제 어느 때 어디서 폭동이 일어날지 몰랐습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정인, 이준식, 이송순, “한국근대사②”, 푸른역사, 2016, 329~332쪽.)
1945년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임금착취,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왔던 노동자들은 일제의 군수생산에 반대하여 적극 투쟁했다.
1945년 6월 서두수(두만강의 지류 중 하나)공사장에 끌려 온 인부들과 허천(함경남도 북동부에 위치한 군) 일대 노동조합들은 일제가 북선 개척의 미명 하에 벌려 놓은 수력전기공사장과 철도부설확장공사장에서 댐을 파괴하고 집단탈주투쟁을 감행했다.
이 투쟁은 일제의 전시전기생산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청진제강소를 중심으로 한 이 일대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를 들고 일제의 군수생산을 지연시키거나 공장 설비들을 파괴했다.
함흥비료공장, 흥남항부두, 원산조선소, 문평제련소, 천내리시멘트공장 노동자들도 일제의 태평양전쟁에 충당할 군수물자생산을 지연시키고 그 수송을 저지했으며 항구를 봉쇄하는 등 각종 대중투쟁으로 일제의 침략정책 수행에 막대한 타격을 주게 된다.
평양, 신의주, 남포, 서울, 부산, 목포 등 산업중심지의 중화학, 방직, 기계, 운수, 체신 등 업종별 노조산하단체들도 대중적인 반일반전투쟁으로 일제의 군수생산을 파탄시켰다.
도처에서 발생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일제의 군사전략물자생산에 실질적인 타격을 주었다.
흥남화학공장에서 다이너마이트 생산이 1942년 8,398톤(t)에서 1944년 5,767톤(t)으로 떨어지고 1945년에 들어와서는 그 양이 전해에 비해 절반으로 더 줄어들게 된다.
또한 문평제련소 구리생산도 1941년 1,302톤(t)에서 1943년 1,017톤(t)으로 떨어졌고 1945년에는 더욱 감소되었다.
일본 각지로 끌려간 강제징용노동자들 속에서도 저항이 확대되었다.
북해도 삿포로군사기지공사장에 강제로 끌려간 노동자들은 공사장에서 태업을 조직하고 도주자를 확대하여 공사기간을 연장시키기도 했다.

강제징용노동자들의 모습
농민들의 반일투쟁도 고조되었다.

농민들이 벌이는 투쟁을 소작쟁의라고 했다. 황구지리 소작쟁의 관련 기사. (1931년) 일제 강점기 당시 소작쟁의가 활발히 일어났다.
함경남도, 평안남북도, 강원도, 경기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은 일제의 농산물강제공출, 국방헌납금책동, 전시군사시설동원 등에 반대하여 격렬한 항의투쟁을 벌였다.
1945년 7월 황해남도 은율군 농민들은 일제의 공출에 반대하여 식량창고를 습격하기도 했다.
풍산, 북청, 흥원, 단천, 이원 등 비교적 농민조합이 강한 지역 농민들은 주변의 노동자들과 함께 일제의 농산물 약탈행위와 각종 부역에 반대하여 투쟁했다.
곡창지대로 알려진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 농민들은 공출미헌납을 반대하여 면사무소습격, 쌀창고 방화 등 투쟁을 진행했다.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과 그 주변 수백명의 농민들은 일제의 쌀 공출에 반대하여 면사무소를 포위하고 식량창고를 습격하기도 했다.
조직적으로 꾸려진 무장대의 활동도 활성화되었다.
1945년 6월부터 전국 도처에서는 일제의 통치기구들에 대한 정찰활동과 이를 파괴하는 전투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함경북도 선봉군 백학산의 무장대는 나진 제19사단 76연대가 주둔해있는 지역의 무력상태를 알아내고 일본군 병영과 그 일대 경찰서 등을 습격했다.
1945년 7월 백사봉에 활동거점을 둔 부거, 부령무장대는 ‘나진-선봉요새’에서 일제의 포진지에 불을 지르고 경찰관 주재소에 대한 습격을 진행했다고 한다.
청진 이북의 경흥 요새 구역에서도 무장한 조선인들이 일제 병영과 토장, 경차관 주재소를 습격했다.
1945년 8월 초 무산군 강선리 노동단은 진화, 용산, 풍산 경찰서 습격을 단행했다.
1945년 7월 양덕의 대봉무장대, 신양군의 반일행동대, 쌍룡광산의 노동자돌격대, 용암리의 용암무장대 등 항쟁무장조직들도 일제 주둔지, 경찰무력 배치상태를 알아내고 일제의 관동군 방면군을 태운 열차 전복, 일제 기관과 면사무소, 헌병대에 대한 기습을 단행했다.
260여명 규모의 평양 조국해방단도 기동적인 기습전, 각종 형태의 군사활동을 벌였다.
조국광복회 승호리시멘트공장지회의 소부대들과 만달산노동무장대는 일본군사격장을 야간에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평양 선교리까지 진출해 전시식량수송을 파탄시키기도 했다.
평안북도 염주, 삭주, 창성지구의 항쟁 조직들도 광산, 도로부설장, 채벌장의 헌병대 등에 대한 기습전을 벌였다.
(계속)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⑥
북한은 왜? 2018-03-13 9 0
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한국에서는 광복을 ‘외세에 의해 어느 정도 주어졌다’고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토지몰수 등을 통해 친일청산을 철저하게 진행한 입장에서 북한은 일제의 패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1983년 북한에서 출간된 ‘현대조선역사’는 일제의 항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 앞에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일제의 ‘대본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이 개시된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 황급히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160쪽.)
즉, 북한 역사책은 민중들의 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났다고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역사서적들에 기초하여 그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목차]
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 현재 한국 역사책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 민족을 ‘조선’보다는 ‘한국’이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1897년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의 약칭으로 ‘한국’이라고 쓰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지역 명칭으로 불려졌고 민중들 역시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국민회’, ‘조선공산당’, ‘조선여성동우회’, ‘조선일보’ 등 조선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썼다. 대한제국이 왕조 교체 없이 1392년에 설립된 조선이라는 나라의 연장선에 불과했다는 점, 오늘날 순종 역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불려왔다는 점 등에 기초하여 이 연재글에서 당시 한반도 지역을 ‘조선’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의 ‘조선’이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계속)
4. 전민항쟁
3) 국내진공작전
1945년 8월 9일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은 일본과의 전쟁을 게시했다.
북한은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에 조선인민혁명군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과 조선인들이 함께 전쟁을 수행했다고 바라본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돼 활동하던 조선인 유격대원(빨치산)들은 1940년 역량보존을 위해 연해주 지역으로 넘어갔고, 1942년 8월 동북항일연군교도려(88특별여단)을 조직했다. 조선공작단은 해방을 앞두고 동북항일연군교도려에서 분리되어 조선인만으로 결성한 조직이었다. 중국공산당 자료에 따르면 1944년 8월 현재 연해주에 있던 조선인 유격대원은 100명이었다. 사진은 조선공작단 결성 직후 주요 간부들이 기념촬영을 한 것이다. ⓒ민족21
고태우의 “북한사 다이제스트100″에 따르면 소련군 제1원동전선군 예하의 제25군은 “소련군의 태평양함대와 합동작전으로 북한의 동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주요 항구인 원산과 청진을 접수할 것”을 목표로 하여 진군했다.
25군 예하의 제 386사단은 중국의 동북지방에 있는 훈춘과 도문 방향으로, 제 393사단은 북한의 웅기와 나진 방향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소련군 태평양 함대 사령부도 즉각 기동해 웅기와 나진항에 대한 공중폭격과 함께 상륙전을 전개했고 8월 11일 옹기에 해병상륙부대를 상륙시켰다.
8월 12일 아침 9시 상륙부대 제1진이 나진항에 상륙한 데 이어 8월 13일에는 주력부대가 나진항에 상륙했다.
일본군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지만 소련군의 상륙작전은 성공했다.

국내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리고 있는 소련군.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캡처.
나진항 상륙작전까지 소련군 7명, 37명이 전사한 데 비해 일본군은 무려 277명, 292명이 전사했다.
지상군 부대는 제393사단과 연결되어 청진을 향해 진격했다.
그리고 3일 후인 8월 16일 청진까지 점령했다. (아랫부분은 고태우, “북한사 다이제스트100”, 가람기획,2015, 12~15쪽.을 거의 인용함.)
조선인민혁명군도 북만, 동만에서 국내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전투행동을 개시했다.
8월 9일 소련군의 전면적 공격작전에 앞서 조선인민혁명군이 먼저 국경지대의 일본군 요충들을 기습했다고 한다.
8월 8일 밤 조선인민혁명군은 경흥요새의 토리와 훈춘현 남별리, 동흥진을 습격하여 일본군을 혼란시킴으로써 최후진공을 개시하는데 유리한 여건을 조성했다고 한다. (토리전투.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57쪽에서 인용.)
토리전투에 대한 기록이 있다.
“8월 8일 밤 11시 50분 조선사람의 한 집단 약 80여명은……퀘속정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 토리로 내습하였다. ……이상의 사실은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으로부터 사단사령부에 보고되었고 그 얼마 후 9일 오전 3시 경 웅기경찰서장에게도 연락되었다. ……서장은 …… 트럭을 토리에 보냈으나 트럭은 웅상령에서 되돌아왔다.” (모리타 요시오, “조선종전의 기억”, 암남당, 29쪽)
이후 조선인민혁명군은 소련군과 함께 일부는 동해안의 웅기, 청진, 원산으로 상륙하고 다른 일부는 동만주에서 함북방향으로, 또 다른 일부는 중국 장춘에서 신의주로 각각 진격해 들어갔다.
이 때 일본군은 소련군 제1원동전선군의 최후진공을 조금이라도 저지하기 위해 격렬한 군사적 저항과 함께 악랄하고 무자비한 산업파괴책동을 벌였다. (데이비드 콩드, 최지연 역, “한국전쟁, 또하나의 시각 (상)”, 사계절출판사, 16쪽.)
조선인민혁명군은 미리 국내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던 소부대와 조국광복회 조직들과 합세하여 일제의 이러한 저항을 분쇄했다.
데이비드 콩드의 “한국전쟁, 또하나의 시각 (상)”에 따르면 일본이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흥남대화학공장을 불태워 없애려고 할 때 조선인노동자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4시간여에 걸쳐 투쟁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동만주의 한 소부대는 수일동안 천여명의 대오를 확대편성해서 소련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락과 마을을 해방시키기도 했으며 연변지구 부대는 그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일본군 보급선을 공격하여 수많은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기도 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60쪽.)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 이후에도 8월 22일부터 8월 31일까지 평양, 철원, 해주지구 해방전투가 진행되었고 9월 2일에서야 소련의 스탈린 주석은 대일전 승리메시지를 발표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61쪽.)

선전포고 후 불과 15일만에 평양에 당도한 소련군.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캡처.
5. 조선인민혁명군,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 소련 원동군의 진주가 없었더라면?
1) 일본군의 몰락
군인들의 공급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징병제를 통해 수십만의 조선청년들을 일본군으로 무장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행동은 곧 자살행위였다.
일본군대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청년들 가운데 탈주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해 조선의용군, 광복군에 무기를 제공하는 효과를 낳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 병사들은 일본군 내에서 반일·반전투쟁을 벌였으며 이 중 진해 해병단 조선인 군인들의 반란사건, 평양 학병의거 기도사건 등은 항일무장투쟁세력에 직접 참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었다.
조선의용군 2천명, 광복군 3백명 중 상당수는 탈출 조선인 병사들로 추측되고 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37쪽. 조선의용군은 중국혁명운동의 중심지인 무한(武漢, 현재 중국 중부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최창익의 조선청년전위동맹, 김규광의 조선민족해방동맹 등이 연합하여 만든 군대. )
조선인들의 저항이 일제의 대동아전쟁 수행을 지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 각지에서 반일지하결사를 조직하며 조선인 노동자들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협화훈련대 특별청년회사건’ 등 항일무장투쟁을 지지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소부대 및 소조활동과 보조를 맞춰 조선인민혁명군의 조선침공에 내선 호응해서 봉기하려는 움직임이 많았다. (아랫부분은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36쪽.을 거의 인용함.)
재아마가사끼 조선인민족주의그룹 협화훈련대특별청년회 사건에 대해 일본경찰 측 기록 개요는 다음과 같다.
“주모인물 광전병규(창씨개명) 당 27세는….우연히 재만조선독립운동의 원흉 김일성 휘하의 고영석이라고 칭하는 자로부터 ‘곧 일·소 개전하니 이에 호응하여 조선도 일어서지 않으면 안된다. 소화20년(1945년) 8월경 만주의 김일성은 조선으로 침공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준비공작으로서 자신은 조선청년의 통일 및 식량확보를 위해 조선인 농가의 각 호에 쌀가루 석되를 준비하고 그 확보의 유무를 표시하기 위해 문표에 백색 페인트를 도포하도록 명하는 사명을 띄고 김일성으로부터 밀파된 것이다…..자신은 지금부터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각지를… 일순할 것이다…’는 선동을 받고 이를 망신하여 스스로도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의하고 당면 동지 획득에서 선내보다는 오히려 조선청년의 다수가 돈벌이하는 내지에 이입노무자로서 잠입, 그 집단생활을 통해 일대조직을 결집하고 김일성 일파의 조선침공에 내선호응하여 일제봉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소화19년(1944년) 3월 하순 오오다니중공업 아마가사끼공장에 와서 동료인 이입 조선인노무자를 목표로 민족의식을 각성·고양하고 결집·단결을 기도하는 등 책동을 추진한 것이다…” (“소화특고탄압사(下)”, 310~312쪽)
협화훈련대특별청년회사건 외에도 항일무장투쟁을 지지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진공에 호응, 대비하려는 투쟁으로는 동경 조선인 민족공산주의 ‘동맹회’사건(1941년 10월), 오사까 조선인 민족주의그룹사건(1942년 10월), 나고야 조선인 민족주의그룹 ‘조국위안회’ 사건(1944년 5월), 삿뽀로 조선인토공민족주의그룹사건(1944년 9월) 등이 있으며 이와 유사한 투쟁은 재일조선인학생들 속에서도 전개되었다.
가네자와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 등) 소화특고탄압사(下)에 나와있는 취조내용 중 대표적인 것 하나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민족해방을 위해서는 참정권 획득 등의 정치투쟁과 같은 미온적 운동으로는 목적 관철이 불가능하다… 내외에서 조선독립에 헌신하고 있는 동지들 중 만주지방을 본거로 해서 활동하고 있는 김일성군 ….과 연계하여 일본이 대동아전쟁에 국력을 소모하는 호기를 놓치지 말고 조선민중으로 하여금 독립혁명투쟁에 궐기시켜 일거에 목적을 완수해야 한다.” (오사까 조선인 민족주의그룹사건, 소화특고탄압사(下) 152쪽.)
북한은 민중들의 호응 덕분에 조선인민혁명군이 포함된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이 급속도로 국내로 진주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전민항쟁과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의 진주가 해방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고 바라보고 있다.
2) 해방을 바라보는 시각
한편 한국 주류 학계는 1945년 8월 9일 국내진공작전을 소련군의 진주로만 한정짓고 있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에 대해서는 크게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다만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에는 소련군이 진주할 때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이 함께 했으며 이 여단의 제1대대는 김일성 대장이 이끄는 항일연군 제1로군의 조선인 대원들이 기본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은 조선인들이 있었던 제1대대의 역할이 주로 소규모 부대를 만주로 파견해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주민들 사이에 들어가 비밀 조직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고 작성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해방을 맞이하는 순간 조선인들의 참여가 거의 없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다.
이러한 시선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국내 최후 진공작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역할을 인정하게 된다면 한국에서 해방을 바라보는 시각은 바뀔 것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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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⑦
북한은 왜? 2018-03-16 11 0
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한국에서는 광복을 ‘외세에 의해 어느 정도 주어졌다’고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토지몰수 등을 통해 친일청산을 철저하게 진행한 입장에서 북한은 일제의 패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1983년 북한에서 출간된 ‘현대조선역사’는 일제의 항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 앞에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일제의 ‘대본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이 개시된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 황급히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160쪽.)
즉, 북한 역사책은 민중들의 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났다고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역사서적들에 기초하여 그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목차]
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 현재 한국 역사책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 민족을 ‘조선’보다는 ‘한국’이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1897년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의 약칭으로 ‘한국’이라고 쓰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지역 명칭으로 불려졌고 민중들 역시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국민회’, ‘조선공산당’, ‘조선여성동우회’, ‘조선일보’ 등 조선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썼다. 대한제국이 왕조 교체 없이 1392년에 설립된 조선이라는 나라의 연장선에 불과했다는 점, 오늘날 순종 역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불려왔다는 점 등에 기초하여 이 연재글에서 당시 한반도 지역을 ‘조선’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의 ‘조선’이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계속)
5. 조선인민혁명군,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 소련 원동군의 진주가 없었더라면?
3) 일본이 한반도를 포기한 진짜 이유는?
독일이 패망한 후 1945년 7월 26일 열린 포츠담회담에서 일본은 ‘대일무조건항복권고’를 거부한다.
일본은 조선과 중국에 투입된 많은 군대와 추가 투입할 수 있는 군사력에 기대를 갖고 장기전을 획책하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 역시 아시아에서 적어도 1~2년 이상 전쟁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일본은 최후 대결전을 한반도와 일본 땅에서 진행할 결심을 갖고 있었다.
일본 방위총사령관은 1945년 2월 “결호 작전”이라는 일본 본토 방어 작전을 수립하고 제주도 및 한반도 이남 지역을 최후결전지로 두고 싸울 것을 결정했다. (한겨레, ‘1945년 해방 직전 제주도에선 무슨 일이…’, 2014/08/08)
이를 위해 일본은 제주도 내 368개 오름 중 약 120여개 오름 등지에서 일본군 동굴진지를 구축하고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등 4개 비행장을 설치하는 등 제주도민들을 동원하여 최후결전을 준비했다.
일제가 주민들을 동원하여 판 수백 개의 땅굴이 충북 영동, 그리고 전북 고창 일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봤을 때 사실상 일본은 조선에서 절대 ‘자발적으로’ 물러설 계획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핵무기의 위력에 항복을 선언했어도 2차 세계대전 전에 차지한 조선까지 포기할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8월 8일 대일전 참전을 선포하면서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과 소련 원동군 (제1원동전선군)이 조선으로 진군해 일본군과의 전투를 벌이게 된다.
국내 곳곳에서도 징병도피자들, 노동자, 농민들이 가세한 전민항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소련이 대일전을 선포한 후 불과 6일 만에 북부국경 주요도시들을 점령했다는 사실은 일본이 조선을 ‘포기할 결심’을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실제 일본은 8월 10일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결정했다가 지도부의 분열로 이를 번복하였다가 다시 항복선언을 했다.
그리고 8월 17일이 되서야 일본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 여운형)에게 모든 행정권을 이양했으며 9월 2일 포츠담 선언에 최종적으로 서명을 했다. (포츠담선언 제8항 “카이로 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큐슈,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
이에 대해 전 요미우리신문사 논설위원 다카키 다케오는 이런 시각을 제시한 바 있다.
“1945년 독일의 항복으로 독소전은 종결되었다. 이 시기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했으며 일본 본토에 단도를 박았다. 그리고 8월에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투하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최후발악을 하고 있었다. 일제의 최후를 결정지은 것은 북으로부터의 조선인민혁명군과 소련군의 진격이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56쪽.)
북한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주도하여 건설된 국가다.
현재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은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의 활동에 대해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에서 활동하던 최용건, 제3로군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책과 허형식 등 조선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모두 만나게 되었고, 명실상부한 조선인 대원들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는 이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의 주역이 되었고, 현재까지 북한 권력의 핵심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고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에 일본이 조선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평가해온 측면도 있을 것이다.

유격구에서 유명했던 어린
항일투사 김금녀(금순)의
모습. 북한은 수많은 혁명 열사들의 노력으로 해방을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이창기
4) 해방을 바라보는 세계적 시각 (박세길,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1”, 돌베개, 40쪽.에서 참조.)
제 2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가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 맞서 국제연합군을 구성해서 함께 공동 대응해서 싸웠던 전쟁이었다.
유럽에서는 파르티잔, 레지스탕스라고 불렸던 군대가, 아시아에서는 혁명군, 해방군, 독립군이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에 맞서 싸웠다.

레지스탕스들의 모습.
이 과정에서 주된 역할을 수행했던 나라가 바로 소련이었다.
2천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 소련은 독일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동부유럽 전체를 해방시켰다.

소련이 독일을 이김으로써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영국, 미국 역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을 통해 서부유럽 해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다면 유럽에서 해방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떨까?
동부유럽 국가들은 독일이 항복을 선언한 날인 5월 9일(모스크바 시각)을 “승리의 날”로 기념해왔다.
국제연합군과 함께 독일을 무찌른 날로 평가하는 것이다.
유럽 전체도 5월 8일을 “유럽전승기념일(Victory in Europe Day)”로 기념하고 있다.

유럽전승기념일을 약칭으로 VE-day라고 부른다.
미국과 영국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수도 파리 해방의 결정적 요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44년 8월 샤를 드 골 당시 임시정부 수반은 “파리 시민의 손으로 파리는 해방이 되었다”라고 선언한다. (파리한불통신, “70년 전 파리시 국민의 힘으로 해방”, 2014/08/26)
2차 세계대전을 파시즘 진영과 국제민주진영 간의 투쟁이었고 세계적으로 연합된 민주진영이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이긴 것으로 보는 것이다.
유럽은 각 국의 파르티잔, 즉 해방군들의 투쟁이 파시즘의 몰락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일례로 1944년 8월 1일 소련군이 진격할 시기에 맞물려 폴란드 봉기군 수만명이 바르샤바를 해방시킨 사건은 폴란드 해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한폴란드대사관, “73주년 바르샤바 봉기”)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민주진영의 성장은 결국 제국주의 진영의 지위를 급속히 약화시켰다.
전쟁의 종료와 함께 전 세계 피압박 민족들은 민족해방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정치적 독립을 획득했고 사회주의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북한 역시 일제통치 36년간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해왔던 우리 민족의 노력이 결국 해방을 이뤄낸 힘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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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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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편 http://nktoday.kr/?p=15356
④편 http://nktoday.kr/?p=15355
⑤편 http://nktoday.kr/?p=15357
⑥편 http://nktoday.kr/?p=1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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