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7

14. 최국태. 조선의 경제구조의 변동 : 생태주의적 접근을 위한 스케치


조선의 경제구조의 변동 : 생태주의적 접근을 위한 스케치
17 February 2014 at 19:34
Notes by 최국태
전성호(한국학중앙연구원)의 논문을 가지고 조선시대의 생태적 경제와 그 파괴과정을 정리하여 보았음



(오늘 하루 내내 작업을 해서 지겨워서 조금 게으름을 피웠으나 다시 정리하겠슴)



1. 서론



전성호의 시각 : 서구근대화를 메카닉시스템의 확립과정으로 보고 조선의 경우 오르가닉 시스템이 현실화된 장기지속역사로 파악한다. 이것은 근대화과정의 두가지 길은 생태적 자연순환적 경제구조의 길과 반생태적 자연수탈 산업화 경제구조의 길로 나누어 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산업혁명은 자연히 서구에 특수한 역사로 이해되어야 하고 동시에 장기지속적인 인류의 생태적 자연순환 경제구조가 일반적인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21세기 기후변화는 실제로 생태주의의 길이 맞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구 온난화 등 환경재앙의 위험이 커지면서 오르가닉 시스템이 메카닉 시스템보다 더 우위를 점하게 될 것으로 전망되는 21세기 현 시점에서 조선 왕조의 역사를 오르가닉 시스템의 역사로 보면 500년이라는 시간대는 한국의 미래에 무한한 성장잠재력을 제공하는 시간대로 그 위상을 달리하게 된다”




한국의 근대화과정은 그에 따른 “수 천년 동안 개발해온 오르가닉 시스템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진행”된 것이다. 이것은 남북한 다 그런 것이다. “북한의 주체사관이나 남한의 식민지 근대화론 모두 우리 고유의 오르가닉 시스템을 버린 결과 나온 20세기 메카닉 시스템의 산물이며 그 뿌리는 모두 잘못된 맑시즘에 기원하고 있다” 이것이 다 맑시즘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틀린 것이지만 맑시즘도 그 원인 중 하나이고 그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에 따르면 인류역사는 농업을 기본으로 한 오르가닉 시스템의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는 이 점에서 틀렸다. 농업이 아니라 수렵과 유목과 농업의 각기 생태계에 맞는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대부분의 인류는 농업을 기본으로 오르가닉 시스템하에서 경제활동을 해왔다. 오르가닉 체제란 농약이나 화학비료,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체제를 말한다. 오르가닉 체제하에서 생산력의 비약은 거의 불가능 하다. 오르가닉 시스템은 흑사병(14세기) 이후부터 19세기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까지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경제발전이론 형성의 전제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르가닉 시스템의 주창자인 케네, 아담 스미스의 논리를 반박한 것이 맬더스와 리카아도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19세기 초반에 인구증가 속도가 식량생산 증가 속도보다 빠르다고 본 멜더스(Thomas Robert Malthus:1766-1834)2 리카르도(David Ricardo:1772-1823)3 가 수확체감의 법칙(Law of Diminishing return)을 강조하고 비관론에 빠져 메카닉 시스템을 열망하는 이론을 전개한 반면 18세기에 활동한 케네(Quesnay:1694-1774)4나 아담 스미스(A.D Smith:1723-1790)5는 오르가닉 체제하에서 생산성의 비약적 증가가 없더라도 노동의 분업과 완전경쟁시장의 발전, 그리고 국가에 의한 사적 소유권 보호와 막강한 군사방어체제 확립, 사회간접시설의 확충, 실용지식의 확산으로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완전경쟁시장”이 한국에 존재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국가에 의한 점유권 보호가 조선의 경제가 아니었는가? 노동의 분업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는가? 군사력과 사회간접시설, 실학의 발전은 당연한 것 아니었는가?




9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학파의 맬더스 및 서구근대화론자들의 산업화론에 대한 비판



9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 캘리포니아 학파를 중심으로 멜더스의 인구론으로 중국의 인구 동태를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연구가 등장하였다. 유럽중심적 멜더시안 사고를 하는 학자들은 유럽은 생활수준이 어려워지면 가임 여성들이 결혼 연령을 늦추거나 독신 생활을 하는 신중한 행보를 하여 출생률을 조절한 반면 중국과 한국등 아시아 국가는 기근이나 전염병 그리고 전쟁과 같은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하는 방법을 통하여 인구를 조절하는 인구 동태를 보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 리와 빈 웡은 중국의 결혼 여성의 출생률(The Total Marital Fertility Rate:TMFR)이 서유럽보다 낮다는 것을 제기하면서 중국의 인구조절도 유럽과 마찬가지로 생활수준이 높은 국가의 모습을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경우도 전성호 와 제임스 루이스는 18세기 인구 증가율이 15-6세기 인구증가율보다 완만히 증가한 원인으로 여성들의 가내노동의 산물인 면포가격이 남성들의 들판노동의 산물인 쌀 가격보다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18세기 한국 여성들은 15세기에 비해 훨씬 더 신중하게 출생율을 조절하여 18세기 높은 생활수준을 영위하였다고 보았다. 이 들은 모두 미국의 캘리포니아 그룹과 함께 동아시아의 경제사 연구에 아담 스미스를 부활시킨 학자들로서 18세기 서양의 경제적 문화적 생활수준이 동양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동양에 비해 앞서기 시작한 것은 1850년 이후 약 150년 정도였다는 주장을 하면서 18세기 동아시아의 경제구조가 서구 유럽 보다도 더 아담 스미스 이론 구조에 적합하다는 것을 제기하였다. 특히 켄 포머런츠는 18세기 중국의 농업시장형태는 서유럽 보다도 훨씬 더 신고전학파의 완전경쟁적 상태에 가까운 시장형태였다는 매우 충격적인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의 연구 목적




“본 연구는 주로 서울과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관찰된 1400-1900년간 쌀값과 옷값 그리고 땅값을 조사하여 상대가격의 변화 추이를 제시하고 생산성을 검출하여 한국의 18세기 생활수준이 오르가닉 체제하에서 가장 높게 형성된 요인을 아담 스미스 이론체계로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또한 이러한 시장가격 정보와 중앙정부가 파악한 호구 수 통계를 대비하여 18세기 한국은 멜더스 함정에서 벗어나 아담 스미스가 낙관한대로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생산성과 생활수준이 동시에 증가한 시기라는 것을 제시하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캘리포니아 그룹(켄 포머란츠)이 제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18세기 멜더스 비관론과 완전히 다른 스미스적인 행복한 시대를 살았다는 것과 농촌의 토지시장과 재화시장이 발달하여 완전경쟁적 시장구조를 가졌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18세기 조선의 국제시장에의 통합과정에서 조선은 네가지 측면에서 안정적 발전을 하고 있었다. 1. 완전경쟁시장, 2. 근대시장에 대한 철학적 심성적 기초로서의 기철학적 기초 발전(북학파. 실학파), 3. 한전의 발전과 면포가내공업의 발전에 따른 여성의 지위향상과 인구의 생태계적 안정, 4. 안정된 정부와 위민정치




“18세기 한국의 실학시대를 대상으로 아담 스미스가 제기한 몇 가지 명제에 기초하여 만들어 본 모델이다. 먼저 18세기 생활수준이 올라간 배경으로 민간에서는 시장구조가 완전경쟁구조를 가지게 되어 경제의 효율성이 올라간 것과 중앙정부는 이를 뒤바침하기 위한 정책으로 신해통공이라는 교역의 자유화를 도모한 것을 반영하려고 한다. 두 번째로 실학을 중심으로 각 인간의 개성을 중시하는 氣質之性論이나 性嗜好說은 아담스미스가 제기한 『도덕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s, 1759) 에서의 동정심(Sympathy)과 自己愛(Self‐Love)와 마찬가지로 근대적인 시장성립을 위한 철학적 기초라는 점에서 주목하려고 한다. 세 번째로 정약용과 이중환등 실학자들이 강조한 밭에서 생산한 농산물이 논에서 생산한 쌀보다 수익성이 높다는 것과 면화가 한전에서 생산되고 그것을 가공하는 여성들의 경제적 지위를 면포 가격과 쌀 가격의 상대가격으로 비교하여 18세기 여성들의 경제적 지위가 남성들의 경제적 지위보다 높았다는 것을 반영하려고 한다. 네 번째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강조한 강한 정부와 18세기 정조가 추구한 강한 정부의 위상이 유사하다는 것을 壯勇衛(1783) 설치나 兵學通(1785), 武藝圖譜通志(1790) 등 편찬에서 알 수 있음을 제기하려고 한다.”




2. 국토 이용의 균형조건과 인구 규모 그리고 생활수준(1400-1900)



공전제에 기반한 균전제의 토지정책에 기반한 조선의 농업양식은 한전제 중심이었고, 그 농업방식은 모내기를 통해 집약적으로 농토를 사용하는 수전농업인 이앙법이 아니라 주로 씨앗을 뿌리는 방식의 직파법이었다. 직파법은 한전 방식이 있고 수전의 방식이 있는데 아무래도 한전 방식이 초기 조선에는 우세했다.




“ 15세기 세종실록지리지(1432)는 일종의 오늘날 국세조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군 현 단위로 경지면적에 해당되는 出稅實結數(출세실결수)와 경제활동인구 그리고 수전 한전비율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통계항목은 18세기 영조시대 『輿地圖書』(1759)에 그대로 이어져 15세기와 18세기 전국 국세 개황을 횡단면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정조대 편찬되기 시작한 『度支田賦考』를 기초로 1744‐1943년까지 수전과 한전 비율의 장기 추세를 제시한 것이다. 1744‐1885년 기간은 탁지전부고, 1918-1940년 기간은 조선총독부 통계연보를 이용하여 작성하였다. 비교 시기는 1744-1799년 18세기와 1800-1885년 19세기 1918-1943년 20세기이다. 그 추세를 선형회귀법을 이용한 수식으로 정리한 <표 1>을 보면 18세기는 한전의 경우 회귀계수의 값이 양의 값으로 19세기와 20세기 음의 값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18세기의 농업은 쌀농사만의 농사가 아니라 고추, 콩이나 목화 등의 환금작물과 감자 고구마와 같은 구황작물을 많이 길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농민들의 경제생활은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앙법 등의 수전 농업은 5월에 집중된 모내기와 추수를 위해 두레와 같은 한시적 집약노동을 위한 조직들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발전하여 대동계와 마을계가 형성발전되기 시작하였고 장시가 5일장으로 굳어져서 물산의 시장유통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경강상인과 같은 것이 정부의 조운사업을 대신해서 발전하고 왜관 신의주와 같은 조공 및 근린외교 무역이 강화되었다.




그러다가 사회경제구조의 급격한 변동이 발생했는데 이것은 외거노비를 기반으로 형성된 지주-소작관계를 악화시키기 시작하였고 이 지주-소작관계의 수탈과정을 확대하려는 양반계급들의 가렴주구가 이앙법을 급격하게 발전시켰다.




조선 “농업이 쌀을 중심으로 하는 수전농법에 매달린 것은 19세기 세도정치와 20세기 식민지 지주제에서 생겨난 것으로 한반도 본래의 오르가닉 체제와는 정반대의 농업 전략인 것이다. 20세기 식민지 시기 논 농사 지대가 갑자기 증가한 것은 수 천년 간 발전해온 한전농법 중심의 오르가닉 체제가 붕괴된 것을 의미하고 국토이용의 균형 조건이 파괴된 것을 의미한다….20세기 초 식민지 기간은 19세기 세도 정치하에 발전한 지주적 토지소유가 가장 최고조로 올라간 시기로서 수전비율이 상당히 급속한 비율로 상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은 소위 식민지하에서 양반지주-양인 및 외거노비 소작관계의 질곡이 지속되면서 동시에 일본국가지주-조선농민소작의 식민지적 모순에 부가되면서 “지주적 토지소유는 식민지 시기 경제체제의 특징인 계획경제체제로 더욱 확산되었다. 1920년대 일본에 의해서 추진된 ‘산미증식계획’은 19만 5,000정보(1정보 3,000평, 2.45에이커)의 답을 관개개선하고 90,000(2억1천만평)정보의 한전을 수전으로 지목변경하며 65,000정보를 개간 및 간척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사업의 시행으로 한반도의 국토이용의 균형은 파괴되고 ‘수전중심의 단작화(Mono‐Culture)’라는 불균형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농사직설에 기반한 생태 농법은 이렇게 지주-소작관계의 질곡 속에서 세도정치와 식민지의 단작 수전 농업으로 전환되었고 이것은 일본으로의 미곡방출을 위한 식민지농업경제구조의 생태기생적 발전을 가져왔다.




“한전 중심의 농업은 수 천년 간 내려온 우리 고유의 유기농 체제이다. 이 사실을 전국적 규모로 계량화할 수 있는 가장 앞선 자료는 15세기 『세종실록지리지』에 기재된 군현단위의 국토이용비율 통계이다. 인구와 경지면적 항목은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국토이용의 균형 비율은 농법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주지하듯이 15세기 편찬된 『農事直說(1429)』이래로 한국은 중국의 화북농법과 강남농법과도 다른 한반도 국토 조건에 적합한 독특한 농법을 탐구하고 발전시켜왔다. 이러한 농법은 한국의 지리적 조건과 기후조건을 감안한 가장 합리적인 방식의 농법이라 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재된 군현단위의 국토이용비율 통계를” 사용하여 보면 “15세기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대부분 지역이 밝게 나타나는 것은 한전비율이 전 국토에서 높다는 것을 말한다. 18세기 마찬가지로 전라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밝은 지역이 여전히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경상도 지역의 경우 밝은 지역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마찬가지로 水田이 18세기까지 매우 적은 것을 나타낸다. 18세기 실학의 시대 한반도 국토이용의 기본 형태는 한전(旱田)이 주류였으며 시장경제와 결합하여 한전 작물의 가치가 쌀보다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여 높은 수익성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한전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경지면적과 경제활동인구 분포”를 보면 “15세기 국가 조세원이자 경지면적을 나타내는 출세결실수(出稅實結數) 분포가 북한지역이 남한 지역보다 더 많은 것을 보이고 있으며 … 18세기 그것이 남한 쪽으로 옮겨진 것을 나타낸다. 15세기 전라도 지역의 경지면적이 거의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미비한 것은 일본을 거점으로 활동한 국제왜구의 전라도 침공 때문이다. 15세기 평안도와 경상도가 한반도 경지면적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18세기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고 변화는 18세기 전라도 지역의 융기이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남쪽 지역에 대한 국방의 강화가 이루어져서 전라도 지역의 경제활동 기반이 국가의 보호 속에 놓이게 되자 전라도 지역의 융기가 일어난 것이다.”




다음 설명은 경험에 의거해서 틀린 이야기다. 15세기 세종대왕이래 16세기까지 급격하게 인구도 늘어나고 있고 전라도로의 인구유입이 강화되고 있었지만 수전농업이 아직 발전되지 못하고 천수답에 의지하는 지역적 특성에 기후 불순이 점차 잦아지고 있었던 탓에 양인의 농업실패와 부채의 증가에 따른 외거노비화가 진척되어 인구의 40%가 노비로 전락하였다.

“15-16세기 조선의 생활수준이 올라가지 못하고 멜더스 트랙에서 머물게 된 근본 원인은 조광조의 개혁과 같은 내부 개혁의 실패에도 원인이 있지만 크게 보아 국제 왜구의 잦은 침공으로 전라도 지역의 풍부한 물산이 국가적 규모의 물자 순환구조에 제대로 유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성호씨는 이제 면포가격을 통해 쌀값과 옷값의 추이를 추적해내고 식량가격의 추이와 여성의 지위향상과 인구급등을 막는 출산율 안정을 찾아낸다.




식량가격의 안정성 강화는 면포가 당시 조선의 화폐기능을 하였기에 면포가격으로 충분히 식량가격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면포생산혁명은 목화의 대량재배로부터 가능해 졌는데 면포의 기능은 매우 다양해서 당시 조선의 핵심 물자였던 셈이니 화폐기능을 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면포가격으로 따져보면 1450년에서 1480년까지만 쌀값이 잠시 폭등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세종대 쌀값은 1419-1422(세종원년‐3년)에 1kg당 은 3.9그람에서 13그람까지 치솟다가 1423(세종 5)년부터 계속 안정되어 1457(세조 2)년까지 은 0.7그람에서 1.5그람 사이로 30여 년간 안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세종 대 안정된 쌀값은 1458-60년만 제외하고 1500년대까지 장기간 안정된다. 세종의 치적이 쌀값에 그대로 반영되어 1423-1499년 약 80년 기간 동안 …오직 1450-1480년 기간 쌀값이 면포 값보다 상대적으로 열위에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쌀값 안정이 생활수준 향상의 기본 조건이 되는 것은 17세기 중 후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쌀값이 kg당 은 0.5‐1그람 사이에서 변동하는 것에서 다시 확인된다. 거시적으로 15세기 세종에서 성종까지 80년간 17-8세기 숙종 영조 정조 순조까지 약 200년간 조선왕조는 식량가격 안정이라는 태평성대의 시장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쌀값이 세종당대에서 그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높았던 가장 큰 이유는 면포의 대량재배 탓보다는 오히려 점차 쌀생산량이 점차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인구 폭증이 이어졌는데 세종당대에 약 6~700만의 인구가 임진왜란 직전 1100만에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왜구의 준동으로 쑥대밭이 되어서 인구가 초기에 경상도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고 조선 후기에 인구가 경상도를 부쩍 넘어섰다는 것, 영정조 때에는 엄청난 인구와, 판소리 등의 민중문화예술의 부흥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만큼 생산력이 늘어났다는 사실에서 보면 전라도의 토지가 급격하게 개간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가 곡창지대로서 일본과의 전쟁에서 중요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 세종 년간 쌀값은 kg당 은 1-2그람 수준인 반면 면포가격은 1meter에 1-3그람 수준에서 변동하여 상대적으로 우위를 유지하다가 1500년대 이후부터 쌀 가격 보다 뒤쳐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대가격 구조는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바뀌어 상대가격이 관찰되는 1626-1670년대, 1740-1780년대 1850-1870년대 시종일관 쌀값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면포를 여성노동의 가치로 쌀값을 남성노동의 가치로 전제하고 비교하면 조선 후기 여성 노동의 경제적 지위는 남성보다 훨씬 더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과 인구 증가율과의 상관성을 비교하여 18세기 인구 증가율이 인구 증가 시기 중 완만한 상승세를 유지한 것은 여성들이 신중하게 출생을 조절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1392-1913년간 한국의 인구 증감을 개관”하여보면 “식량가격과 인구 증가와의 관계에서 명백한 정(+)의 상관관계를 시현하는 15-16세기와 달리 17-18세기는 인구가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식량가격이 안정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여 당대의 … 물가추세와 인구 추세…을 비교해보면 15-16세기 한국은 급격한 인구 증가와 급격한 식량가격 상승이라는 전형적인 멜더스 궤도에 빠진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기록상의 인구를 보면 1419-‐1449 기간 사이에 기근과 전염병이 심하여 쌀값은 1419-1422년 기간이 1kg당 은 3.9그람에서 13그람 정리하자면 연산군 이후 한국은 임진왜란까지 전형적인 멜더스 궤도에서 기근과 전쟁이라는 포지티브 체크(Positive Check)를 통해 인구 증가 위기를 넘긴 것으로 판단된다”




인구의 급격한 증가가 당대의 정치적 안정 속에서 일어났지만 동시에 1419~1449년 사이에 대규모 기근과 전염병으로 부채 노예가 급격하게 나타난다. 연산군 당대의 상황은 세종대왕에 의해 안정된 생태적 순환농법에 의해 촉발된 폭증된 인구가 정치의 불안정과 양반계급의 계급화에 의한 가렴주구에 덧붙여 대규모 기근과 전염병이 덮쳐서 양인들의 부채노비화를 가속화시켰다.




“반면에 18세기 인구 증가는 15-16세기보다도 완만할 뿐만 아니라 식량가격과도 아무런 정(+)의 상관성을 보이고 있지 않다. 인구 변화 식량가격 변화 여성노동 가치인 면포가격과의 상대가격 변화 이 세 가지가 상호 연관되어 제시하는 역사적 시사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17세기를 실학의 성립으로 18세기를 실학의 발전으로 19세기 중 후반 이후 세도정치가 극치를 이루었던 시기를 실학의 와해 기간으로 본다면 쌀값의 안정과 불안을 이와 연관시켜 볼 수 있다. 더욱이 옷값과의 상대가격을 함께 고려할 경우 17-18세기는 오르가닉 농업 체제하에서 한전농법에 기초하여 생활수준이 상승된 시기이고 여성 노동의 경제적 가치가 남성노동의 그것에 비해 우위를 점하여 풍요로운 생활을 주도한 시기라는 것과 실학이라는 지식기반이 저변에 확대된 시기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8세기 한국의 실학의 시대는 인구증가와 식량안정과 생활수준 향상 그리고 여성의 경제적 지위의 상승, 일반 민중에게 필요한 지식의 확산이 모두 어긋남이 없이 조화를 이루어 태평성대의 심포니를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쌀가격의 앙등은 조선왕조의 위기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조선 왕조의 체제 위기는 쌀값 불안과 상호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도 쉽게 발견된다. …연산군(1495-1500), 중종(1506-1544) 명종(1545-1567)대에 10gram대로 상승하고 있는 것에서 임진왜란은 약 100년간 쌀값이 치솟는 불안이 누적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식민지로 전락하기 약 60년 전부터 마찬가지로 쌀값은 치솟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 전쟁과 기근이 연이은 결과라는 점이 너무나 명백한 것이다.”




19세기 초의 대기근과 인구 100만의 급감, 그리고 순조 이래의 세도정치는 이앙법을 기반으로 광작, 경영형부농, 지주-소작관계의 확대, 탐관오리들에 의한 농민수탈, 세금제도와 공역, 군역의 문란을 통한 수탈과정이 체계적으로 조선 후기의 정치적 혼란과 무기력을 강화해 나갔다.




<갑오농민혁명의 탈근대적 운동>




동학이 두레 대동계를 발전적으로 포섭한 포 접이라는 조직원리를 만들어낸 탓이겠죠. 게다가 대안사회론이 있었고.




지주-소작관계의 수탈 속에서도 농민들은 두레와 계를 통해 양반의 가렴주구 향촌사회 지배조직인 향약 서원을 이겨내고 있었다.




이앙법은 소농중심사회로 경제단위를 다시 복원했고 이들의 대동사회를 동학은 대안이념화해냈다. 인내천은 대동사회의 탈근대적 구체화였다.




혁명이 몰아내려했던 관료의 탐학적 수탈과 지주-소작관계의 수탈체제는 오히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일반화되고 심화되었다







녹색당 농민당원대회에서 백승종 선생 강연이다.

일부를 발췌해본다.




"사람은 동의하지 않으면 모이지 않는다. 농민혁명에 그 많은 농민들이 모인 것은 '동의'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리어 나빠지는(약화되는) 것이 되게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소농중심사회'이다.




18~19세기 당시의 농민들은, 적어도 제 판단에는 지금의 농민 삶보다 훨씬 나았다. 못하지가 않았다. 심지어 1894년 당시에도 소농들은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처지가 나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는 것이 '오죽이나 못 먹고 못 먹었음 들고 일어났겠는가?'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 아주 상황이 나쁠 때 사람들은 가만히 있게 된다. 굶어 죽을까봐.




문제는 그럴 때가 아니라 '기대 수준과 현실의 차이'가 혁명을 만드는 것이다. 기대 수준은 높은데 현실이 그것만 못하면 사람들은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조직이다. 조직 없이 되는 것은 없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직력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완강한 조직력이 깔려 있었다. 그 조직 중에선 마을조직이 가장 중요했고 마을조직은 노동조직과 오락조직이 결합된 '두레'와 마을의 유지들을 중심으로 결합된 것이었다. 표현은 동학조직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의 실체는 '마을조직'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조직적 기반이 아무 마을에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한국에 있었고 평야 지역을 중심으로 있었다. 마을조직은 18~19세기가 전성기였다, 그 전에는 감히 양반들과 분리된 별도의 조직을 만들지 못했지만 18~19세기에는 양반의 장악력이 떨어졌고 농민들은 집단노동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것과 함께 평민 중에도 지식인이 생겨나면서 좋은 조건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라도가 먼저였고 충청도와 경상도도 결국 그런 추세를 띄기 시작했다.




그런 풀뿌리 자치력, 소농들의 자치력이 가장 강했던 때가 18~19세기였고 그 증거로 마을의 평민조직들이 남긴 문서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가령 마을조직이 비단으로 만들어진 마을 깃발을 마련한다거나 마을 토지와 같은 공동 재산을 마련했다는 것 등이 그 근거다. 사실 소농 중심의 마을들이 자치력을 갖게 된 것은 정부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당시엔 마을단위로 세금을 납부하다보니 국가에서도 그런 평민조직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평민도 양반들에게 무작정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세를 늘려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국가가 반칙을 할 때 발생한다. 이 국가가 세금을 슬금슬금 높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농민들도 어느 정도까진 감당하다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폭발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19세기 후반 들어, 가령 1860년대 임술민란과 같은 대규모 농민항쟁이 일어나게 된 이유다. 마을의 조직이 성장했고 처음엔 국가도 그 조직을 인정했지만 나중에 이를 국가가 착취 하려하자 마을이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후반부로 갈수록 해마다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가적 수탈을 견디는데도 한계가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고 농민조직의 전성기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조직의 전성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인 것이다.




30만 농민봉기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철저히 소농중심의 마을조직이 건재했고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항의 조직적 유지가 가능했다. 당시엔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 도와주고 없는 사람도 있는 사람 앞에서 크게 굴욕감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5. 실질토지가격 상승을 통한 생산성 증가와 후생의 증가



식민지 시대의 경제개발 과정




“어느 시대건 생산성의 향상이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은 경제학이 인류에 제시한 불변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성이 향상되었다고 해서 그대로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 생산성 향상은 독점적 시장구조 하에서 계획경제와 통제경제 체제하에서 이루어진 생산성 향상이다. 자유 시장경제체제하에서의 생산성 향상이 아니다. 동서양을 통괄하여 오르가닉 시스템하에서 생산성 향상이 인구 증가 속도를 앞지르고 그 결과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반면에 화학비료와 농약을 투입하고 품종을 개량하거나 유전자 조작을 통하고 노동을 대체하는 기계화의 진전 메카닉 시스템하에서 농업 생산성을 인구 증가 속도보다 빠르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식민체제 기간 동안 “한국 농업은 시장경제가 아니라 계획경제와 통제경제하에서 경제 자원의 할당이 이루어졌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에 의해 전 국토의 많은 부분이 밭에서 논으로 지목 변경되었다. 수 천년 내려온 오르가닉 체제가 붕괴되고 국토 이용의 균형이 파괴되었다. … 식민지기간 동안 쌀 생산성 향상만이 의미를 가지며 콩과 보리 수수류등 총곡물 생산성은 10여년 이라는 단기간 상승 끝에 하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간 쌀값은 식민지대지주라는 독점적 소유 구조하에 고도상승을 유지한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우리 고유의 내생적 경제성장을 보여준 18세기 경제구조와 전혀 다른 구조임에 틀림없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다수의 인센티브가 상실된 구조라는 점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유형




“유럽의 근대경제성장을 주도한 과학기술의 신기원의 문제는 켐브리지 대학의 니담연구소에서 중국의 과학기술과 문명이라는 연구물을 발간하면서 지식세계에서는 이미 해체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24 또한 서 유럽에 국한된 경제성장은 20세기 후반부터 비유럽지역의 경제성장 속도가 유럽지역을 앞지르면서 물질적으로도 그 토대를 상실하게 되었다. 특히 싱가포르, 한국, 홍콩, 타이완등 제국주의 지배를 경험한 지역의 경제적 성장이 세계경제의 주요 축으로 부각됨에 따라 서구유럽 우월주의 사관의 입지조건은 점차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과학기술의 기원이 동양에 있고 동양의 경제성장속도가 유럽을 앞지른다 해도 유럽의 학계 분위기는 여전히 차별성에 근거하여 아시아의 경제성장을 바라보고 있다. ‘비민주적인 정치체제하에서의 경제성장(non‐democratic regimes ’ ‘비개인주의 문화(non –individualistic culture)’에서의 자본주의라는 시각이 그것이다. 유럽은 아시아에 비해서 좀더 민주주의적인 전통과 합리적인 제도를 가지고 경제성장을 이룩한 지역이며 개인의 자유와 능력의 발휘가 훨씬 더 잘 보장된 지역이라는 것이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가져다주는 합리주의의 기반을 동양에서 찾을 수 없고 합리주의에 기반한 효율적인 경제제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비 유럽지역의 경제성장을 불안한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민주주의에 기초한 경제성장 모델로서 18세기를 제시한다.







“18세기 실학의 시대가 오늘날 우리에게 제공하는 희망은 바로 전 세계인이 공유하는 민주주의에 기초한 경제성장 모델이다. 17-18세기 경제가 효율적인 시장구조 하에 생산성이 향상되고 그 결과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




“여기서 노동생산성은 일인당 경지면적과 토지생산성과의 함수관계로 놓고 볼 때 18세기 인구증가가 완만한 속도로 진행된 것과 여성 노동의 경제적 가치가 남성 노동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점 여성 노동은 가내 공업의 형태로 집안 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경지면적의 크기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과 오르가닉 체제하에서 생산성의 급격한 증가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19세기까지 생산성을 규정하는 요인은 토지생산성임을 알 수 있다. … 15-19세기 500년기간 동안 삼남지방에서 관찰된 토지매매명문 약 10,000여점을 분석한 결과… 쌀 40kg 벼 50kg을 한 석으로 계산하여 1500년대 논의 실질적 가치는 벼 2-3가마 가치를 가지다가 18세기에 이르러 벼 5-6가마 가치로 그 실질적 가치가 상승한 것을 나타낸다”



효율적인 경제 가설




“만약 경제가 효율적이라면 토지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 수중으로 분할되어 각자가 자기 토지의 비옥도에 대한 인센티브를 가지게 되며 그 결과 토지 생산물인 식량이나 공업원료가 불특정 다수의 공급자에 의해서 공급되지만 그들은 가격을 결정하지 못하고(No Price Maker) 수용자(Price Taker)의 위치에서 공급하게 된다. 수요자도 마찬가지로 다수의 수요자가 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하게 되어 가격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하여 완전경쟁적 시장구조하에서 결정된다. 이 경우 투입요소의 가격보다 산출물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게 된다. …… 18세기 쌀 가격은 500년 구간 중 가장 낮은 수준을 형성하고 있었다. 결국 18세기 쌀 가격이 낮게 형성된 것은 당시 한국의 시장구조가 완전경쟁적 시장구조였음을 의미한다. 이 기간 마찬가지로 토지 생산성을 반영하는 실질토지가치가전 구간 중 가장 높은 수준을 형성한 시기이다.



결론적으로 18세기 생활수준 향상의 원인은 오르가닉 체제하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아담 스미스 신념이 모두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성 노동의 경제적 가치가 남성 노동에 비해 우위를 점함에 따라 여성들이 신중한 출생을 선택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고 그 결과 인구증가가 완만한 속도로 나타났으며 국가에 의한 사적 소유권 보호와 개체 노동에 의한 소유의 기원이 장려되면서 다수의 사람들이 근면과 성실이라는 건강한 노동에 대한 인센티브를 갖게 되고 그 결과 완만한 토지생산성 증가가 나타났으며 완전경쟁적 시장구조의 효율성을 통해 낮은 식량가격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18세기 실학이 꽃피운 것이다”




제임스 루이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와 전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다니엘 쉬베켄디엑 성균관대 교수는 이번 학술대회에서 공동논문 ‘조선후기 삶의 질에 관해서: 인체치수 자료를 중심으로’를 발표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키 변동 추이를 통해 조선 후기 경제적 상황과 삶의 질을 고찰한 결과 1679년부터 1798년까지 조선 군인들의 키는 3.62~4.25척으로 측정됐다. 이는 임진왜란을 겪은 뒤 회복기에 있던 17세기 중반 초기에 태어난 조선 사람들의 영양상태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18세기까지 키가 대체로 크다가 노론이 장기집권하는 19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다시 줄어들었다.”며 “17~18세기만 해도 조선의 내재적 역량이 컸다.”고 설명했다.




에도시대 동래성 사람들 163.6평균/ 일본 155.09~156.49




경향신문




http://blog.naver.com/nada5582?Redirect=Log&logNo=10116028456




개성상인의 현대식복식부기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3103015403997091&outlink=1




http://news.donga.com/3/all/20131029/58553481/1


11정용식, 변종호 and 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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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국태 이거 너무 힘들군. 식민지근대화론과 자본주의맹아론을 둘다 비판할려고 하니까 이리도 읽을 것이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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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규 다 읽지는 못하였읍니다 반은 읽었는데 좋은글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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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국태 무슨 말씀을 저도 기진맥진해서 다 정리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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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식 소중히 모셔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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