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7
14 최국태 <탈근대의 사회주의 운동은 왜 근대 조차 넘어서지 못했는가?> : 현실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
<탈근대의 사회주의 운동은 왜 근대 조차 넘어서지 못했는가?> : 현실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
16 February 2014 at 21:54
<탈근대의 사회주의 운동은 왜 근대 조차 넘어서지 못했는가?>
: 현실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
타라소프의 "초국가주의와 사회주의: 문제제기를 위해"(2012년 11월 30일, 그린빌포스트)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맑스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I.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홍익인간생태주의의 비판적 테제
레디앙 편집자는 2013년 6월 이 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련 사회성격에 대한 논쟁은 좌파진영에서는 끝나지 않은 논쟁이고, 또 과거를 향한 논쟁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논쟁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사회에 대한 것은 과거의 소련사회에 대한 분석 비판 대안과 맞물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론과 비평이 있다면 환영한다고 했기에 이 글은 레디앙에 보낼 작정이다)
확실히 소련의 소위 "사회주의체제", 그리고 중국의 "사회주의시장경제", 조선의 "주체사회"와 같은 반자본주의 사회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것은 대안사회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대안사회를 심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남는다. 그것이 맑스에 대한 근본적 부정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맑스에 대한 해석의 잘못이니 제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맑스의 제안이 문제도 있으니 그 문제를 해결하여 계승발전해야 한단 말인가?
이 세가지 노선에서 좌파들은 대체로 맑스의 유산에 대한 전체적인 부정에 대해서 반대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제안한다.
맑스는 한계도 있고 아직 유의미한 전망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맑스의 전망은 유토피아적 환상이고 잘못된 철학에 기반했으며 서구 오리엔탈리즘에 빠져서 근대를 제대로 비판할 수도 없었으며 유물론적 도식에 빠져서 진정한 의미에서 해방의 근거를 찾지도 못했고 어쩌다가 뒷발에 채이듯이 하나 둘의 대안을 제시했고, 당대의 대안적 운동이 자신의 대안보다 더욱 근본적이고 구체적이었지만 그들을 폄하했으며 그런 와중에 사회주의 운동 전체에 잘못된 환상과 전망을 만들어냈다고 나는 비판적으로 제안한다.
이제 그러면 그의 글이 주장하는 바를 정리하고 그에 대해서 비판하고자 한다.
이전에 박로자가 말하듯이 "한반도 주민들에게도 의미심장한 화두"인데 그 이유는 "북조선의 정치나 문화에서 권력과 신분의 세습 등 일부 토착적, “전통주의적” 면모도 보이지만, 국유화된 계획경제의 골간은 어디까지나 소련 모델의 차용"이엇기 때문이다.
"80년대 후반의 PD와 NL파 등은 각각 소련과 소련 모델의 “토착적 변종”인 북조선을 하나의 “이상”으로 제시하면서도, 궁극적으로 같은 소련 모델을 “대안”으로 보려고 했다. 그렇다면 그 “대안”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소련몰락과 그 과정의 원인은 1. 기본적으로 변질된 “노동자 국가”인데 친서방적 관료집단의 “배신”으로 무너진 것으로 보거나 2."혁명 직후에는 “노동자 국가” 건설을 시도했지만 어느 시점에서부터 사실상 “국가 자본주의” 형태를 취해 관료집단이 개별적 기업가들의 기능을 그대로 맡았다. 소련의 패망은, “국가적 자본”의 개인 자본화를 의미할 뿐"이라는 노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다소 비과학적이라는 느낌"이고 "익히 아는 그 무산계급 국제주의 원칙 배반을 배반한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등은 1000명의 항일의병 군대를 참살한 "자유시사변"에서 이미 시작했고, "반환경 범죄(대대적인 원전들의 개발과 이용)를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라는 측면에서 비판한다.
후자에서 국가자본주의가 노동시장이 존재했는가 상품시장은 존재했는가 아니면 이윤추구를 했는가 로자는 묻는다.
"한 마디로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해도, 이 사회는 분명히 그 어떤 형태의 “자본주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로자는 "이 해답의 일부 부분들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어도, 기본적 취지에서 타라소프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더 대담한 주장으로 간다.
"소련은 비자본주의적, 비(非)이윤추구적 산업사회를 건설하려는 과감한 시도이었고, 이 시도는 비록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사회주의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해도, 지금 파산돼 가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하나의 “대안”임에 틀림없다.
단, 타라소프도 지적하듯이, 매우 선별적으로, 비판적으로 대해야 할 대안이다. “국가화된 경제, 사회”에서는 관료집단의 힘이 절대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힘을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 즉 노동자 민주주의를 통해서 어떻게 제한시키고 상쇄시킬는지 “대안”을 꿈꾸는 혁명가들이 앞으로 고심해야 할 부분이다"
참으로 반성 않는 서구 사상에 경도된 자의 결론으로 누군가에게는 무난하게 들릴 것이다.
나는 이러한 주장에 비판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가는 것이 적어도 비겁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의 주장에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1. 맑스에 기원하고 레닌에 의해서 이루어진 혁명 속에서 스탈린에 의해 체제화된 사회주의 운동은 그 근본에서부터 잘못된 것이다.
2. 근본적 잘못은 다음과 같다.
제 1테제 탈근대 대안운동을 하는 인민들이 자본주의를 보편적인 사회발전단계로 놓음으로서 서구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하지못하도록 사상적으로 봉쇄하는 반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제 2테제 자본에 의한 혁명을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담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받아들임으로서 노동만이 잉여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잘못된 사상을 만들어냄으로서 자본에 대해서 일면 적대하고 일면 의존하는 노동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서 해방의 기초가 노동자에게 있다는 잘못된 환상을 일으켰다.
제 3테제 노동중심주의적 가치론은 노동계급주의로 발전하고 프롤레타리아트독재가 민주주의라고 함으로서 공동체의 정치구조를 계급적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오류를 범하고 이후 당=관료 독재의 사상을 만들어냈다. 관료제는 맑스사상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제 4테제 노동가치설은 부르조아에 의해 정립된 자유무역과 긴밀히 연결된 제국주의의 식민화, 노예시장의 일반화와 연관된 것인데 이런 야만적 제국주의 침탈을 자본주의적 근대화과정으로 진보로 옹호하여 수탈과 착취의 사상을 외면적으로는 비판하되 내면적으로 옹호하는 일탈의 사상이었다.
제 5테제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보편화시킴으로서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착취를 전면에 내세우고 자본에 의한 사회공동체,사회공동체를 유지하여 주는 자연생태계 전체에 대한 총체적인 수탈을 정당화하였고 이것은 사회주의운동 또한 생태계에 대한 체계적 수탈을 정당한 것으로 옹호하게 하였다.
제 6테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탈근대의 대안이 자본주의 안에서 성숙할 것이고 공동체적 전통은 단지 자본주의가 만들어낼 파국 후의 새로운 사회 속에서나 재생될 것이라고 봄으로서 근본주의적 탈단계론적 대안을 내세움으로서 "지금 당장"의 대안적 탈근대운동을 부정하는 반동 사상이 되었다.
제 7테제 사회와 문화, 그리고 경제에서의 탈근대적 운동의 형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당에 의한 노동계급의 조직화와 선동 속에서 동원된 노동계급의 혁명을 통한 탈근대운동을 그렸기에 기본적으로 부르조아적 운동으로 탈근대 사회를 만들겠다는 근본적인 오류를 범했다.
제 8 테제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탈근대의 운동이어야 한다. 당과 계급 계층 조직, 정치운동 등은 처음부터 탈근대적 방식으로 탈근대적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도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다.
제 9테제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구사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서구사상의 근본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한 자들의 진보적 대안운동은 반드시 탈근대 대안 자체를 파괴한다. 맑스는 서구의 합리주의와, 서구사상의 반생태계 사상과, 서구 근대의 이성주의 한계로 인해 그의 탈근대적 기획은 근본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 이 테제는 생각날 때마다 늘어날 것이다)
이러한 테제의 관점에서 나는 타라소프, 그리고 박로자와 같은 진보적이지만 낡은 옛 반동적인 사상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들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자 한다.
http://www.redian.org/archive/56059
II. 타라소프의 문제의식에 대한 비판적 독해(1)
타라소프에게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전 세계의 좌익에게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하나는 소련의 실험이 실패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사회주의 이론을 일신하는 것이다"
현실사회주의에 대해서 올바로 비판해서 "진정한" 사회주의사회와 생산양식의 전망을 창출하자는 것이다.
"현실사회주의"라고 명명한 것을 제대로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러시아에서 ‘현실 사회주의’의 회복을 지향하는 집단이 많기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러시아의 현상황은 사적 소유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본원적 축적이 죽음같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이리" 상태이니 복고적인 자들이 많은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불신으로 인해 그의 말마따나 "두 문제에 대한 해답이 없다면 사회주의 이론의 일신은 불가능"하고 "기껏해야 ‘역사의 반복’일 뿐"일 것이다.
박노자가 요약한 내용의 반복인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두가지 관점"이 설명된다. 1. 사회주의의 본질. 2.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다.
다른 관점이 있는 "자본주의라는 토대와 봉건제 상부구조의 결합", "몰로토프의 주장처럼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기’였다는 관점"은 폐기된다. "사회주의 단계와 공산주의 단계로 나누는 스탈린주의적 분류"는 무시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동의어"로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에서 "현실사회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겠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그럼 그의 사회주의는 어떤 사회인가?
"직접 민주주의(참여 민주주의)로서 계급이 없으며, 국가가 없으며, 비상품 체제이고, 착취와 소외를 극복하고, 생산수단의 공동소유에 기초하며,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 생산양식에 의해 생성된다"
이 간단한 설명에 근거해서 "현실사회주의"의 다음과 같은 존재로 비판된다.
1. 자본주의적 요소
사멸되지 않고 더욱 권위주의적이 된 국가, 상품-화폐 관계의 잔존, 부르주아 대의민주주의 제도(덧붙이자면, 현실 사회주의는 그것을 본질적으로 과두제로 축소시켰다), 착취와 소외,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 (그것은 공동소유가 아니었다.), 사회계급, 자본주의와 동일한 생산양식 (대규모 기계제 상품생산 또는, 달리 말하면 산업적 생산양식(industrial mode of production))
2. 비자본주의적 요소
1) 시장 메커니즘 부재 : "‘리베르만’ 개혁 이후에도 시장경제의 단지 일부 요소만 등장했을 뿐 시장 그 자체는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자본시장이 전혀 없었는데, 자본시장이 없다면 시장 메커니즘은 원리상 작동할 수 없다."
2) 계급 국가 부재 : 국가는 사적 소유자로 행동하지 않았고 (국가자본주의라면 그래야 하는 것처럼) 총 자본가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즉 경제의 한 주체였을 뿐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주체였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국가는 경제를 흡수했고, 사회를 흡수하고자 시도했다. 즉 국가는 시민과의 관계에서 오히려 총 영주처럼 행동했지만, 동시에 다른 생산수단과의 관계에서는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할 능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3) 시장경쟁 부재
결론으로 그는 "현실사회주의" 소련을 다른 사회주의국가처럼 "특수한 사회경제 체제, 즉 초국가주의(super-estatism)였다고 제안"한다.
그 이론적 근거가 무엇인가?
"과거 마르크스주의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은 "사회경제 체제가 생산양식과 생산수단의 소유라는 두 가지 주요한 특징에 따라 구성된다는 결론"으로 인한 것이다.
"두 가지 특징 중에서 하나만 바뀌더라도 충분히 체제 전체의 변화를 초래한다. 심지어 노예소유제에서 봉건제로 이행과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은 생산양식의 변화를 동반했지만, 소유형태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았다. 각각의 경우에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유지되었다"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가? 소유형태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았다니?? 그냥 "사적인" 것의 공통점이 변화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본질적으로는 맑스의 오리엔탈리즘의 핵심인 서구의 특수한 그래서 인류사에 존재한 적이 없는 역사발전단계론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을 재생해낸다.
"나아가 인류역사에서 하나의 생산양식 틀 내에서 두 개의 평행한 사회경제 체체가 존재했던 적이 있다. 고대에 (서양에는) 고전적 노예소유제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마르크스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고 부른 것이 존재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의심은 적절했다. 현재 우리는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고대적’ 생산양식 양자를 하나의 생산양식으로 정의할 수 있는 충분한 경험적 자료를 지니고 있다. 그 하나의 생산양식이란, 비(非)기계제, 전(前) 기계제 대규모 상품 생산양식이다"
그러면 동서양의 차이는?
"서양과 동양의 차이는 오직 소유형태였다. 서양에서 고전적인 노예소유제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함의한 반면, 동양에서는 생산수단의 국가소유가 존재했다. (동양에서는 그것이 종종 은폐된 형태를 취했다. 즉 ‘종교적’ 형태를 취하기도 했는데, 그런 형태에서 생산수단은 공식적으로 국가가 아니라 신 또는 신들에 속했다. 또한 차르 소유 형태를 취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차르(고위 성직자)는 사적 소유자가 아니라, 차르적(종교적) 소유에서 단지 경영자, 관리자였을 뿐이다.)"
그래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본질은?
"달리 말하면, 마르크스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고 부른 것은 국가주의라고 명명되어야 한다"
이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국가주의I이라면 새로운 버젼으로서의 "현실사회주의"는 "국가주의Ⅱ 또는 초국가주의"이다.
익숙한 오리엔탈리즘의 부활이다. 짜르체제는 봉건적 체제였기에 그 혁명은 처음부터 사회주의일 수 없다고 주장한 인민주의자와 플레하노프의 논쟁으로 뒷걸음친다. 이제 차이는 미르 공동체를 부활해야 한다고 하는 인민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와는 달리 그는 사회주의혁명이 짜르체제를 다시 복원했는데 그것도 다른 형태로 복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되지 않은 자가 도달하는 결론일 수 밖에 없지만 그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은 다음에 충분히 하자.
그는 이러한 자기 주장을 논증하지 않고 다음에 하겠다고 하면서 자기 주장을 정리한다.
"단일한 생산양식 내부의 이중적 체제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원시공동체에서 계급사회, 사적소유로의 이행기에 등장하며, 역으로 사적 소유에서 사회주의로 이행기에도 등장한다"
이행 "과정의 복잡성", "서로 다른 문명에서의 불균질성", "코뮨과 같은 제도의 존재 혹은 부재"가 이런 이중적 체제가 존재하는 원인일 것이라고 부언한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국가주의II=초국가주의는 어떤 것인가?
"초국가주의에서 국가는 소유주가 되며 모든 시민은 국가에 근무하는 피고용인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국가는 잉여생산물을 영유하는 착취자로 전환된다. 초국가주의에서 적대적 계급은 제거되며 계급 차이는 상부구조 영역으로 이동된다.
그런 사회는 세 부류의 주요 계급으로 구성된다. 노동자계급, 소농계급, 지적 노동자 계급. 지적 노동자 계급은 더 가까이서 살펴보면 두 개의 주요 하위계급으로 구성된 것으로 나타난다. 첫째, 행정기구의 공무원과 둘째, 지식인(인텔리겐차). 특정한 종류의 사회적 균질성이 나타나며, 그것은 ... 일차원 수준에 이른다.사회계급들 간 경계가 사라지면서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이동이 더 쉬워"진다. 이것이 "장점"이라는 것이다.
얼토당토 않는 그의 장점 열거는 계속된다.
"자본주의와 비교할 때 초국가주의의 다른 장점은 경쟁의 제거다. 경쟁의 특징은 자원과 경쟁의 수단, 특히 광고 수단의 낭비다. (알려진 바대로, 서방에서 경쟁 투쟁과 광고에 대한 지출은 기업 총수입의 3/4에 이르기도 한다.)"
놀랍게도 그는 시장이 어떤 존재인지 조차도 모른다는 것을 실토한다. 경쟁은 자본주의적 시장을 전제로 해서만 존재한다는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는 경쟁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사회에서든 경쟁은 존재한다. 경쟁의 방식과 과정, 경쟁의 목적이 달라질 뿐 한정된 자원(자연, 권위, 권력 명예 등에 대한) 경쟁은 계속 일어난다.
계획은 결코 경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경쟁 속에서 일어난다. 그 이유는 시장은 폐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은 계획이 완전할 수 없는 만큼 존재한다. 단지 시장이 그 경쟁 속에서 자원의 독과점을 향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도록 조직되는가 아니면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계획을 보완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달라질 뿐이다.
그런데도 계속 신고전파들에 의해 파훼된 "계획의 불가능성"을 부정하는 비과학적 장점을 그는 계속해서 늘어 놓는다.
"시장의 강력한 힘을 계획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중요한 장점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불가능한 논거로 계획을 옹호하고 계획의 장점을 늘어놓는다.
"계획은 이상적으로 보자면, 자원 지출에 관한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하며 과학적, 기술적 진보의 예측과 유도를 가능하게 한다"
경제는 복잡계의 성격을 띄고 있다.
경제는 무제한의 요소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며 각각의 경제를 재생산하는 주체들인 개인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전체의 경제는 개인들의 의지나 행동에 의한 것 이상의 전혀 새로운 수준의 경제구조를 만들어낸다.
단 세 사람들간의 경제적 상호행위만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푸엥카레의 삼체이론에 따르면 전혀 예상되는 행위는 정해진 답변이 없다는 것을 이미 증명했다.
개별자의 운동의 합이 전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전체의 운동이 개별자의 운동이 미치는 미시적 힘을 온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별자의 운동의 합으로 환원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개별자의 운동들이 개별자의 운동과 전혀 다른 운동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개별자의 운동의 합으로 인과를 설명하려한 서구 근대과학의 환원주의적 한계를 띄고 있다.
또한 전체 운동은 개별자의 운동을 다 포함하고 있고 개별자의 운동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환원되지 않는 "결과"이고 개별자의 운돌들의 복잡계가 새로운 운동, 전혀 새로운 구조를 생산하는 "창발적 운동"을 보여준다.
결국은 개별자의 운동의 합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개별자의 운동이 가진 자유도가 전체에 고스란히 존재하고 동시에 전혀 새로운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 복잡계의 특성이고 인간 사회의 어떤 현상도 복잡계 아닌 것이 없다.
이것은 복잡계 과학의 기본적인 인식론이자 존재론이고 운동론으로서 "현실사회주의"든 진짜 "사회주의"든 간에 그것들이 기본적으로 복잡계임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계획은 제한적이다.
계획이 완전해지려면 정보의 완전성, 정보를 생산하는 주체의 계산가능성, 에너지와 물질의 흐름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경제주체들의 활동에 대한 완전한 정보 또한 요구한다.
어떤 경우도 그런 정보를 제공할 가능성은 없다. 지구상의 수퍼컴퓨터를 모두 모르고 심지어 지구만한 수퍼컴퓨터를 모으고, 양자컴퓨터를 개발하고 실용화한다 하더라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모아도 열명의 사람들이 만드는 경제행위의 모든 정보를 파악할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계획은 전혀 다른 수준에서 진행된다.
계획은 복잡계에 대한 이해 속에서 끌개의 형성과 발전을 통해서 개별자의 행위의 자유도를 높히고 그 자유도가 끌개를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모아나갈 때에 비로서 "유사 계획"으로서 성공가능성을 높힌다.
정보와 에너지와 물질들을 생산하고 만들어가며 의식하는 개인들의 그 다기한 행위와 감성과 의지들은 "계획의 사각지대"의 불가피성 속에서 "시장"을 만들어내고 시장은 또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또한 하나마나한 장점을 더 열거한다.
"마지막으로, 막대한 물질적, 인적, 재정적 자원을 (국가의) 두 손에 집중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중요한 장점을 지닌다. 그것은 극단적 조건(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경우)에서 체제가 생존할 수 있는 높은 잠재력을 제공한다"
국가동원체제는 어떤 나라에서나 발생한다. 자본주의라고 해서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소련은 그 점에서 실패한 체제일 뿐이다.
하지만 러시아주의에 대한 허망한 마지막 자부심은 인정해 줄 수 있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유치원·과외교육·교육체계, 휴양체제, 저렴한 주택과 공공 운송" 말이다.
물론 이것들은 "현실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대표적인 장점이다. 하지만 그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 그대들은 자연의 막대한 낭비를 이용했다. 그 비효율적인 자원낭비는 시장의 낭비를 몇 곱절을 넘었었다. 얼마되지도 않는 인구로 세계자원의 상당한 낭비를 감행함으로서 그런 혜택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혜택의 뒤안길에서 희생당한 체제의 패배자들이 존재한다. 그 패배자들은 디아스포라 당한 한민족과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고 자기 자원의 지배권을 러시아인민을 위해서 빼앗긴 소수민족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어머니 지구 생태계 말이다.
그가 늘어놓은 그 장점은 그에 따르면 "그 자체로 초국가주의에 내재한 ‘장점’이 아니"라, "국가와 고용주 간 특수한 관계에 의해 나타"날 수 있다.
"외부 노동시장이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도 고용주이자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국가는 피고용인의 건강, 교육, 생활조건을 돌보아야만 하며, .....
초국가주의에서 높은 수준의 잉여가치는 극단적인 저임금에 의해 달성되지만, 동시에 들어오는 초과이윤의 일부분은 재분배되어야 한다. 재분배는 국가가 사회제도를 통해 사회 프로그램의 형태로 피고용인에게 수당을 제공하거나, 국내시장에서 핵심적 생산물과 상품, 주택, 공공운송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춤으로써 이뤄진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수요에 대해서 계급적 차별에 근거한 "질과 다양성"을 제공하는 대신에 "현실사회주의"는 계급적 차별이 없는 "접근성"과 안정성을 주고 대신에 '질과 다양성'을 희생했다는 것이다.
그 차이가 발생한 이유가 말이 안되지만 들어보자.
"자본주의에서 외부 노동시장은 생산수단 소유자에게 본질적으로 무제한적이지만, 초국가주의에서 이처럼 무제한적 노동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외부노동시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사회주의"는 다양성과 질을 담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의 발전과 진보가 "생산력"에 기반한 "다양성과 질적 고양"에 있다는 사실, 개인의 다양성을 고취하고 다양한 개성의 개화와 실현에 있다는 사실, 사회생태계는 자연생태계와 마찬가지로 다양성을 개화하고 있을 때에만 지속가능하고 다양성이 파괴되는 순간 곧 멸망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한다.
II. 타라소프의 문제의식에 대한 비판적 독해(2)
초국가주의 혁명은 자본주의근대화와 무엇이 다른가?
그는 먼저 동일한 지점을 이야기한다.
"a) 봉건제도의 해소, b) 산업화"
이 점에서 둘은 같다. 단지 전자는 봉건영주와 부르조아 둘 다 제거했을 뿐이다.
그러나 초국가주의는 "하나의 체제로서 그것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보유하지 못했고"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를 활용"했다.
국가이데올로기는 존재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국가는 하나의 계급이 아니다. 국가는 단지 기계일 뿐이며, 모든 계급 외부에 존재한다. 누구도 기계를 신격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창조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에게는 유고의 혁명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교 혁명이론은 국가란 민의를 천심으로 하여 천을 대리하여 나타난 왕조가 모든 계급을 넘어서 농민의 이익을 실현한다.
하지만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없었던 것이 러시아의 현실이었다. 절대완권의 이데올로기나 짜르의 이데올로기는 보편성이 없다는 측면에서 그의 말은 유교 혁명이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한에서 맞는 말이다.
"현실로 나타난 것처럼, 적절한 이데올로기의 부재는 소련과 다른 소비에트 블록 국가의 붕괴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조심스럽게 "하나의 이유"라고 함으로서 그는 실제로는 그의 무지를 제거한다.
스탈린주의는 "국가를 신격화하는" "초국가주의"에 맞추어 맑스레닌주의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물론 맑스레닌주의나 스탈린주의나 둘 다 동일하게 맑스의 탈근대 사상의 최종적 귀결이다. 그가 맑스나 레닌을 구제할려고 하는 한 그는 전혀 탈근대의 대안사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부르조아사상의 최종적 종합이었던 헤겔은 이미 관료제가 초계급적 화해의 궁극적 형태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관료제과 시민사회와의 모순, 시민사회의 계급적 갈등에 대해서 이성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정신적 화해와 동일화 속에서 해소하는 잔머리를 굴린 적이 있다.
그것은 오래된 지배계급의 수법이었고 또한 항상 지배계급은 자신의 지배가 보편적이라는 것을 위선을 의식하며 주장하든 위선을 넘어서 진정한 것으로 주장을 하든 간에 항상 발생한 것에 불과하다. 즉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는 부르조아 근대성의 본질적 요소의 하나다.
따라서 G. 주가노프든 절대왕정의 프랑스든, 혹은 파시즘이든 나찌즘이든 혹은 일본의 군국주의든 혹은 후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든 지배의 위기 때마다 혹은 국민적으로 조직하고 동원할 필요를 느낄 때마다 정확히 나타났다.
관료제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전혀 결여되어 있는 그의 논의는 계속된다.
"관료는 초국가주의에서 이익을 얻는 유일한 사회계층이다. 관료제에서 국가는 국가공무원 즉 관료집단에 의해 의인화된다. ....초국가주의에서 공직자, 관리는 국가에 대해서는 다른 모든 사람처럼 피고용인으로서 행동한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피고용인에 대해서는 경영자, 관리자, 권력의 대행자, 종종 모집자(즉 부분적으로는 고용주)로서 행동한다.
초국가주의에서 국가는 계급이 아니라 단지 영혼이 없는 기계일 뿐이며, 어떤 계급적 이해도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적절하게 서술한 것처럼, 관료제는 동시에 국가를 자신의 집단적 소유물로 인식한다. 이는 관료제가 국가에 기생하며, 국가 수입의 일정부분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항상 재분배하고자 시도하며, 따라서 사회 전체와 국가 그 자체에 피해를 끼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료제는 사회전체와 국가 그 자체에 피해를 끼치는 존재가 된다. 이런 극단주의적 무정부의와 극단적인 국가주의는 사실상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모른다.
관료제는 기본적으로 공공재의 배분과 유통을 위한 조직이다. 관료제는 세금을 거두고 그것을 기반으로 사회각계각층과 개인들의 활동에 대한 재분배를 결정하고, 그 재분배과정을 안정화하려는 안전과 지속성을 보장하는 조직이다.
그것은 마치 시장이 계획의 불완전성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고 발전하듯이 관료제도 자원의 재분배 속에서 사회 전체의 목적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운동이 공적인 형식으로 드러나는 공간이자 조직체계다.
따라서 관료제는 그 나라 인민들의 자유도와 비례해서 민주적이 되고, 그 자유도에 반비례해서 관료의 독립적 이해관계가 발생한다.
국가는 추상적인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관료제로 나타나며,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폭력기계화되며 계급사회에서는 시민내부의 갈등과 투쟁을 반영하게 된다.
관료제는 사회의 안정적 재생산과 재분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관료제의 효율성과 공공성은 이 기본적인 업무 수행의 목표다. 계급사회와 국가간 갈등 속에서 관료제는 군대와 경찰같은 폭력조직이 존재하게 된다.
관료들은 개별적으로 국가의 안정성이 자신의 이익에 맞다는 것을 안다. 국가의 목표는 이러한 안정성을 목표로 하면서 재분배를 수행한다. 재분배과정은 관료들의 결정에 놓여 있는 한 그들의 신분상의 이익이 주요한 고려대상이 된다. 국가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자들이나 계급들은 이들 관료제에 대해서 두가지 방식으로 맞닥뜨린다. 쓰려뜨려서 자신의 이해에 복종시키거나 그들을 협조적인 존재로 만들 동의의 힘과 그를 관철시킬 물질적 힘을 가져야 한다.
관료제는 국가 구성원의 상호견제와 직접민주적 통치를 통해서만 관료들을 제어할 수 있다. "국가기구는 다른 관리를 활용할 때만 관리의 사적 이익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은 국가관료체제의 상호견제가 없거나 직접민주제적 통제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관료의 사적 이익을 실현한다면 그는 그 사회의 지배적 생산양식 하에서 가장 이익이 되는 지배자의 계열로 들어가는 수단으로 자신의 권한을 사용할 것이다.
그의 관료제에 대한 인식의 불충분함은 이 정도로 하자.
이제 그가 맑스의 오류라고 한 "초국가주의" "현실사회주의" 운동의 두번재 오류라는 것을 보자.
"두 번째 오류는 이미 마르크스 자신이 범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방법론은 혁명적 주체가 현재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그 체제 내부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함의한다. 노예제를 철폐한 자는 노예가 아니었고 봉건제를 철폐한 자는 소농이 아니었다. 부르주아의 무덤을 파게 되었던 자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었다"
즉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의 주동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에 이해관계가 가장 적은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가 해방의 계급이라고 잘못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맑스는 "1857-59년에 지식이 미래 사회의 직접적인 생산력"이 되어야 한다고 깨달았다고 하면서 뒤늦은 과학기술혁명이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혁명론이라는 오류를 만들어냈다고 암시한다.
"방법론적으로 볼 때 사회주의 혁명의 주요 주체는 반드시 과학자(또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지식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맑스의 이론적 탈근대의 도식은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한 안티테제가 상품현상에 종속되지 않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벗어났기에 프롤레타리아트주체론은 "명백한 모순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혁명의 주체가 될 상품화를 벗어난 것인가?
그에게 그것은 지식이다. 과학적 기반의 지식이고 과학적인 지식인이 형명의 주체가 된다. 지식의 어떠한 성격 때문에 그러한가?
자본주의 상품생산과정처럼 생산자와 생산물 사이, 생산물의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소외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지식이다.
"교환(매매) 과정에 있는 상품은 그 소유주로부터 소외되고 다른 소유자에게로 이전된다. 교환(매매) 과정에 있는 지식은, 심지어 구매자의 ‘소유’가 되더라도 그로 인해 판매자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식은 결코 그 완전한 가치대로 지불을 받지 않는다. 이는 지식을 창출하고 전달하는 자, 즉 과학자와 교사의 보수에 반영된다. 게다가 지식에 기초한 생산양식은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종류의 생산양식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지식은 창조자와 전달자로부터 소외될 수 없다"
소외를 극복하는 종류의 생산양식인 "지식에 기초한 생산양식"은 도대체 무엇일까?
여하튼 좀 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결국 지식은 본질적으로 이미 인류의 공동소유 하에 있다. 지식을 상품으로 전환하고 지적 재산을 사적 소유로 가두려는 모든 시도가 있었으나 전체 인류 지식의 99.95%는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객관적인 사회적 요구는 지식에 관한 접근성과 개방성이 보장되는 체제가 유지될 필요성을 요청한다.
지식의 생산과 소유는 이러한 지식의 ‘소유주’가 이러한 지식을 사회와 공유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이것은 맑스도 그렇게 말했던 내용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식은 마르크스가 공동소유를 위한 조건이라고 말한 것과 일치하는데, 지식은 동시에 개인적 소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러한 조건이 없다면 소외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적 소유의 변증법적 지양은 없을 것이다. ....개인용 컴퓨터는 이러한 수단이자, (세계 컴퓨터 네트워크가 보여주는 것처럼) 개인적 소유와 공동소유의 일부분을 동시에 형성할 수 있는 생산수단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자신의 개인용 컴퓨터로 일을 하는 과학자, 작가, 건축가, 음악가, 패션 디자이너는 이러한 세계 네트워크와 데어터베이스에 의존하며 그것들을 요구한다. 다른 한편, 이러한 네트워크와 데이터베이스는 사용자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이런 지식중심의 "생산양식"은 직접민주제를 가능하게 한다.
"거리와 시간 지출 때문에" 볼테르가 작은 나라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던 것이 "일반적인 컴퓨터화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의사결정과 그 이행에 대한 통제에 참여할 가능성을 열어 놓"음으로서 가능해 졌다는 것이다.
이제 지식기반 생산양식은 생산력 발전의 혁명을 일으킨다.
"지식은 일단 주요 생산력이 되면, 불가피하게 (전통적인) 산업적 생산양식을 파괴할 것이다. 자동화, 로봇화, 컴퓨터화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장을 불필요하게 할 것이다. 그러한 경향은 본성상 ‘소규모 형태’와 탈중심화를 지향한다. 이러한 경제적 탈중심화는 반드시 정치적 탈중심화로 이끈다. "
이제 집중된 산업적 생산양식 하의 노동자들을 로봇으로 대체될 것이며 "노동자가 지적으로 높은 수준의 창조적 노동으로 전환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그리하여 창조적 노동에서 소외는 극복되고 더군다나 "‘살아 있는’ 지식에 대항하는 기계로 물질화된 지식의 지배도 극복된다."
만약 세계혁명이 불가피하고 세계혁명을 통해서만 "사회주의 혁명"이 될 것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모든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혁명은 가짜 혁명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맑스의 세계혁명론은 긍정된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세계가 지금처럼 단일한 시장으로 통합될 때까지를 기다려야 한다.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맑스와 레닌의 세계혁명론은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나라도 민족도 혁명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기회주의요 대기론이다.
"세계혁명"론은 "통일된 세계 경제 메커니즘, 즉 세계 자본주의 시장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그는 맑스나 레닌은 성급한 자들(?)이 된다.
지금은 그에게 단일한 세계시장을 형성된 세계가 아닌가?
"오직 현재에만 진정한 세계시장, 즉 일국 시장의 모든 질적 내용을 지니면서 전 세계에 걸쳐 퍼져 있는 시장이 존재하게 되었다. 세계 금융시장이 이미 형성되었고, 세계 자원시장이 거의 완성되었고 (또는 완성되기 직전이며) 우리 눈앞에서 상품, 서비스 세계시장과 세계 노동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 이제 "자본주의의 외연적 발전이 종료될" 것이라는 것이다.
생태계가 견딜 때까지 자본주의를 막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세계 정치통합"과 함께 "외연적 발전이 고갈될 때 자본주의는 내포적 발전에 집중"할 것이다.
결국은 "대중적 사회계급으로서 지식인"이 형성될 것이고 이들은 "지적 노동자 계급"이다.
이들 "새로운 계급은 지식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주의적 생산양식과 직접적으로 결합되며,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헤게모니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지식인 사이에서 혁명적 선전과 교육 활동"이고 "자본주의에서 인구의 대규모 범주이자 계급으로서 지식인"은 "지적 노동을 수행하는 피고용인의 형태로서만 존재한다는 것도 분명한 현실"이므로 "지식인의 이해관계, 요구, 가능성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미래 혁명에서 지식인의 동맹자는 (산업 프롤레타리아를 포함해) 모든 종류의 피고용인이 될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렇게 새롭게 나타나는 지식노동계급이 있다고 해서 "자본주의는 스스로 사회주의로 이행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경제적 메커니즘 내부에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발아에 현재 이미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있으며, 과학적·기술적 진보를 방해한다"
"이른바 ‘지적 재산권’이란 이름으로 지식과 정보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단지 개인과 기업의 이윤을 위해 지구 자원의 낭비와 인류의 편견을 이끌고 있다"
자본은 지식을 정보로 대체하려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는 지식 범주를 정보 범주로 대체하려고 시도한다. 양자는 같은 것이 아니다. 과학자, 예술가, 전체적으로는 사회가 소유하는 것이 지식인 반면, 정보는 상품과 같이 사적 소유자가 소유할 수 있다"
"정보의 본성과 지식의 본성, 정보와 지식의 순환 메커니즘은 서로 가까이 있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로의 단계에 있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그에 따르면 "지식의 불완전 상품으로서의 성격"으로 인한 것이다.
이제 그는 마지막으로 혁명세력의 심각한 문제를 말하려 한다.
"a) 세계시장, 세계경제와 더불어 세계 제국 체제가 형성되고 있다"
사실인가? 세계경제의 통합은 초국적금융자본이 로봇화 디지털화 자동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정치적 통합도 그러한가? 당분간 그렇게 될 이유가 없다. 서방세계의 제국주의적 식민화경험과 여전히 존재하는 파렴치한 서방의 착취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인류공통의 문제인 생태계에 대한 공동대응방안이 현실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 한 세계제국은 아직도 요원하다. 다가올 것은 명확하지만.
"b) 서방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광범위한 대중이 돈과 소유물에 의해 매수를 당했다"
익숙한 매수론이 나오지만 그것은 현대의 경제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c) 자본주의는 혁명세력에 대항해 과학기술 혁명의 성과를 활용하고 있다 군사 영역이나 대중적 정보 영역, 선전과 의식 통제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안 그런 적이 없었으니 의미 없는 말이다.
이 세가지 요소는 "이미 서로 결합하여 작동하고 있"다.
문제는 혁명세력의 문제는 저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그가 생각하는 심각한 문제는 혁명 주체의 문제가 망각되어 있는 것이다.
여하튼 좌익이 집권하지 못한다면 디스토피아가 불가피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세계 발전 시나리오를 멈출 수 없다면 지구 문명은 파국에 직면할 것이다"
"세계 제국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 신민의 사고에 대한 통제와 획일화를 위한 절대적이고 매우 철저한 수단에 의지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III.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탈근대 대안사회
1.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타라소프의 비판적 분석에 대한 비판
2.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탈근대 대안사회
17변종호, 이병욱 and 1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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