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9

황장엽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상)



황장엽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상)








황장엽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상)
의식을 가진 인간과 의식을 가지지 못한 객관적 조건 가운데서 어느 편이 더 발전된 존재이고 어느 편이 어느 편에 대하여 주동적으로, 능동적으로 작용하게 되겠는가 하고 문제를 세운다면 의식을 가진 인간이 주동적으로, 능동적으로 객관세계를 개조해 나가는 자기 운명의 주체로 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황장엽








*자유애국동지제현들은 잘아시겠지만 나는 자라나는 후배들과 학생들을 위해서 우리 지면을 통하여 무엇이 마르크스와 그 추종자들의 오류인지에 관한 글을 쓰려고 하다가 차라리 우리땅에서 남,북이 갈라질 시기에 구쏘련 모스크바대학까지 유학을 하시고 김정일을 어릴때부터 키우시고, 북한의 주체사상자체를 창시하신 황장엽선생의 글을 한번 소개하는것이 좋겠다 싶어 한번 소개 올리려고 합니다. 황선생님 스스로 북한최고의 철학자이셨고 그 체제와 사상의 오류를 누구보다 몸소 잘아시기에 이보다 살아있는 토종적인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이 있겠나 싶어 올립니다.

나는 이글을 읽으면서 황장엽선생께서 얼마나 북의 체제와 그 근원사상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계시며 비판하고 계시는지를 느끼고 있으며 한때 한체제의 학문의 제왕답게 그 문체가 정곡을 찌르면서도 매우 쉽게 서술되었다는 점이 선생님의 인생역량의 향기가 잘 드러나는것 같아 좋았습니다.
마치 이글을 읽으면 법학도입장에서도 무너지는 사회주의법계의 사상적 오류를 누구나 알기쉽게 그 정곡을 찌르고 있고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민법, 사법, 공법체계를 기본적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다른이에게도 도움이 될것 같았습니다. 물론 전문 법률가는 이보다 더 심도있는 이해가 따르고 독특한 체계가 있음을 알리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이글이 알기가 쉬울듯 합니다.
또 한가지 생각나는것은 이글에서 황장엽선생께서 직접 아리토스텔레스의 원본들을 읽으셨는지 모르지만 그에대한 짙은 향기가 배여있고 (사회분업론)을 이야기한 (에밀 뒤르깽)과 비슷한 생각의 향기도 배여 있는듯 합니다. 막스베버의 (윤리)적인 문제와 좀 아쉬운것은 현대의 자유주의 경제 정치 사상가들의 생각은 빠져있지만 그래도 연세가 이제 여든을 넘어가시면서 아무나 말할 수 없고 비록 잘못 되었지만 한 평생을 치열하게 자기 일에 몰두하신 근엄하게 살아계시는 한 노옹의 보석같은 진솔한 반성과 최고의 마르크스연구가로써의 비판이 돋보여 자유애국동지제현앞에 혜량을 구해 올려 봅니다.

아무쪼록 선생님께서 건안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맑은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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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상)>


글쓴이 : (황장엽, 前 조선노동당 국제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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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주의적 집단주의의 입장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집단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 경제체제 수립을 주장하였다.

1.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모순

마르크스주의 창시자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모순을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자본주의적 형태, 즉 사적 소유 간의 모순이라고 규정하였으며 이와 같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부합되게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형태를 사회주의적 소유형태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사물의 내부모순이 사물 발전의 원천이라는 견해와 사회생활의 본질이 물질생활이며 그것을 규정하는 것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인 생산방식이라는 견해에 기초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견해의 오류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관계를 내용과 형식 간의 관계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해의 타당성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사회적 생산력은 사회적 협조관계를 통하여 이용된다. 이 점에서 생산력을 내용으로 생산관계를 생산력을 이용하는 사회적 형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사회적 분업과 협업 형태가 변화되는 것은 내용과 형식간의 문제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산관계는 생산력을 사회적으로 이용하는 형식의 면과 함께 생산물을 사회적으로 분배하여 소비하는 면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생산물(물질적 재부)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문제이지 생산력을 이용하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생산의 목적은 소비에 있다. 인간은 생산물을 이용하여 자기의 경제적 요구를 실현할 목적으로 생산 활동을 진행한다. 생산력은 물질적 재부를 생산할 수 있는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다. 그것은 인간의 경제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인간의 경제적 요구와 이해관계를 떠난 생산력의 사용이란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관계는 목적과 수단 간의 관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수단을 그 특성에 맞게 이용할 뿐 아니라 자기의 목적에 맞게 이용한다. 따라서 생산력을 사회적으로 이용하는 데서도 두 면을 가지게 된다. 더구나 생산물을 소비하는 문제는 생산력을 이용하는 문제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별개의 문제이다.


인간의 자주적인 삶의 요구를 자기의 창조적 힘으로 실현해 나가는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도외시하고 무생명 물질세계에서도 다같이 적용되는 내용과 형식과 같은 추상적 범주로 인간관계를 해석하려고 한 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 받아 마땅할 것이다.


생산관계는 경제적 요구와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하여 맺어지는 인간관계인 만큼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관리하는 주인도 인간이고 생산관계를 개조하고 관리하는 주인도 인간이다.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주인으로서의 인간과 생산관계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의 두 면을 다 포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원래 인간은 자기의 본성적 요구에 맞게, 그리고 자기의 본질적 속성의 발전수준에 맞게 상호관계를 맺을 수 있는 법이다. 자주적인 사상의식이 발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자주성을 존중하는 방향에서, 창조성이 발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창조성을 옳게 평가하는 방향에서, 사회적 협조성이 발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사회적 협조의 우월성을 살리는 방향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게 된다.


생산력은 물질적 재부를 생산할 수 있는 인간의 창조적 힘으로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의 구성부분인 창조성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창조성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의 한 부분이지 전부가 아니다. 사회적 관계는 인간의 창조적 능력의 발전수준뿐 아니라 자주적인 삶의 요구의 발전수준, 사회적 협조성의 발전수준에 다같이 상응하게 맺어지는 것이다.


생산력이 발전하여 유족하게 살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마련되어도 사람들의 사상, 문화수준이 이에 상응하게 발전되지 못하여 그것을 술이나 마시고 마약이나 피우는 데 탕진하거나 미신을 숭배하는 데 남용한다면 사람들의 행복을 담보하는 생활수준은 높아질 수 없을 것이며 또 사회적 협조관계를 관리하는 정치가 뒤떨어져 서로 갈라져서 싸우는 데 재력을 낭비할 때, 특히 전쟁이나 내란이 일어나 많은 재부를 서로 해치고 살상하는 데 쓰게 되면 생활수준은 더욱 나빠질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비록 생산력이 발전하였다 하여도 사람들이 행복한 자주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와 자기의 창조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보장되지 않는다.


사회적 관계는 한 마디로 요약하여 사회생활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자주적인 삶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와 자기의 창조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을 규제하여 주는 인간관계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이 사회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주적인 사상문화수준과 창조적 능력과 사회적 협조성의 발전수준에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을 사회적 운동의 주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한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인간의 활동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본다. 그들은 생산력의 발전에 생산관계가 상응하는 것이 인간의 의사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작용하는 법칙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생산력의 발전에 생산관계가 적응한다는 법칙이 인간의 경제활동과 사회활동 전반을 규제하는 기본법칙으로 된다고 인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산 사람도 아니고 생명을 가진 존재도 아닌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에 상응하게 자기를 개변시켜 나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불일치가 조성되면 양자 간의 모순이 인간의 뇌수에 반영되어 낡은 생산관계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과 생산력을 대표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려는 근로계급 사이의 사상적인 대립으로 나타나게 되며 그것이 두 계급의 계급투쟁으로 전환되어 근로계급이 낡은 생산관계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낡은 생산관계를 새로운 생산관계로 교체하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주장은 본말을 전도한 그릇된 이론이라는 것이 명백하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마르크스 이전의 다른 사상가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설명이기 때문에 신기하게만 생각되었던 것이다.


비록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인간이 창조하였다 하여도 그것이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는 객관적 조건으로 될 수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도 사회적 운동에 참가하는 객관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한 객관적 존재가 인간을 규정하는 것을 주되는 면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자기가 창조한 객관적 요인을 규제하는 면을 주되는 면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세운다면 창조자와 피창조물 사이의 상호관계에서 역시 창조자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 재부를 더 많이 생산하여 유족한 물질생활을 누리기 위하여, 그리고 고되고 힘든 육체적 노동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주동적으로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기술혁명을 수행하여 생산력을 발전시켜 나가며 인간의 경제적 이익에 맞지 않고 경제발전에 지장으로 되는 불합리한 생산관계를 인간의 경제적 이익과 사회발전의 요구에 맞게 주동적으로 개조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보다 더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물론 낡은 생산관계를 유지하려는 사회의 낡은 세력과 새로운 생산관계를 수립하려는 진보적 세력 사이의 대립과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오는 충돌이다. 그것을 낡은 생산관계를 대표하는 계급과 생산력을 대표하는 근로계급과의 계급적 대립에 다 귀착시키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역사적 사실에도 다 맞지 않는 잘못된 견해이다.


경제제도가 불합리하여 경제발전이 침체상태에 빠지게 되면 지배계급에게나 피지배계급에게나 다같이 불리하지만 가난하고 못사는 피지배계급의 생활이 더 어려워지게 되며 이들이 낡은 경제제도를 개변하는 데 더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 근로계급이 생산력의 발전을 실현하기 위하여 낡은 생산관계의 개변을 요구한다고 보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생산력의 발전을 위하여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일으킨다고 보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론을 교조주의적으로 신봉하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예제 경제관계를 봉건적인 경제관계로 개변시킨 주체가 노예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노예폭동이 노예제도를 약화시키는 데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노예들이 노예제도를 타도하고 봉건제도를 수립하여 봉건영주로 된 것은 아니다. 노예제로부터 봉건제도로 이행하는 데서는 노예주들이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봉건제도로부터 자본주의 제도로 이행하는 데서도 농노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신흥 상공업자들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여기에서 적지 않은 경우에 봉건계급 내부의 진보적 계층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계급사회의 한 형태로 보고 계급투쟁을 통하여 자본주의 제도를 노동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제도로 교체해야 한다는 이론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계급사회란 지배계급이 사회를 지배하는 사회이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차이를 신분제도로 고착시켜 놓은 것은 봉건사회이다. 봉건적 신분제도가 붕괴되고 사회의 모든 계층이 신분적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게 된 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통하여 계급사회의 역사적 시대는 끝나고 민주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자본가 계급이 지배하는 계급사회라고 볼 수 없다. 원래 자본가 계급이라는 것은 상공인 출신인데 상공인들은 신분적으로 지배계급이 아니었으며 놀고먹는 계급도 아니고 근로하는 인민들이었다. 그들이 오늘날 대규모적인 기업가로 발전하여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봉건적 잔재와 결부되어 일정한 특권을 누리는 점도 인정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아직 덜 발전된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결함을 근거로 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어느 한 계급이 지배하는 계급사회라고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맞게 소유형태도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형태를 사회화된 소유형태, 즉 사회주의적 소유형태로 교체하여야 하며 또 그렇게 되는 것이 필연적인 법칙이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은 사회적 운동의 주체인 인간의 변화발전을 중심으로 사고하지 않은 데서 온 이론적 오류로서 역사적 현실에도 맞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에 대하여 주장한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테두리 안에서 경제는 참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계속하여 왔으며 생산의 사회화 수준은 한 국가의 범위를 벗어나 전 세계적 범위로 확대되고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라 자본주의적 소유형태를 사회주의적 소유형태로 교체한 소련식 사회주의는 그 진보성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대대적인 선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와의 경쟁에서 참패하여 붕괴의 운명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기본모순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론적으로 근본적인 착오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발전이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인 것처럼 강조하는 나머지 인간이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자기 요구에 맞게 주동적으로, 능동적으로 개조해 나가는 사회적 운동의 주체이며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주되는 면을 응당하게 평가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인간이 개인적인 존재인 동시에 집단적인 존재의 양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발전과 인간관계 발전에서도 이 양면을 다같이 보아야 한다는 데 대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생산이 사회화될수록 생산에서 사회적 협력관계가 확대되어 생산의 사회적 통일성이 끝없이 강화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생산의 사회화가 높은 단계로 발전하게 되면 사회관계에서 개인주의적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고 완전한 집단주의적 사회가 수립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요소가 없는 순수한 집단주의적 사회적 관계란 있을 수 없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는 인간 존재의 기본특징에 기초하고 있는 만큼 영원히 대립물의 통일로 남아 있게 된다.


생산이 사회화되면 생산에서 사회적 협력에 기초한 통일성이 강화될 뿐 아니라 생산에서 개인들의 자주성과 창조성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게 된다. 즉 집단적 존재로서의 통일성이 강화되는 것과 함께 개인적 존재로서의 대립성도 또한 강화된다. 그러므로 집단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경제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통일적인 경제형태의 발전과 함께 개인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각이한 경제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경제형태의 발전도 필요하게 된다.


사회가 발전된다고 하여 집단주의에 개인주의가 다 포섭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집단적 소유형태에 개인적 소유형태가 다 포섭되어 집단적 소유형태 하나로 일원화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가 더욱 발전하여도 개인주의적 소유형태와 집단주의적 소유형태는 대립물의 통일을 이루고 다같이 발전하게 된다. 세계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집단주의적 경제형태로서는 사람들의 다양한 경제적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으며 개인들의 요구와 이해관계와 결부시켜 개인적인 자주성과 창조성을 발양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세계적 범위에서 통일적인 협동생산과 계획적인 조절이 발전하는 것과 함께 개인적인 독자성과 창조성을 살려나가는 개인적인 생산, 개인적인 기업도 계속 발전하여 나갈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중심의 민주주의를 구현한 자본주의 경제의 긍정적 부분은 앞으로도 계속 존속되어 발전할 것이며, 그것은 결코 집단주의적 경제에 흡수되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계급적 착취제도의 한 형태로 오인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에 아직 봉건적 잔재가 적지 않게 남아 있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에 구현된 민주주의가 개인중심의 민주주의의 일면성을 극복하지 못한 데로부터 발로시키고 있는 역사적 제한성을 계급적 성격의 발현인 것처럼 잘못 판단한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는 개인중심의 민주주의를 구현한 것으로서 개인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특성이 주도적 역할을 하지만 그것은 집단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특성과도 결합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상품생산이라는 점에서는 집단중심의 민주주의의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자들이 사적 이익을 목적으로 생산하며 사적 이익이 실현되지 않을 때에는 비록 사회적 수요가 있어도 생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개인주의적 측면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자본주의적 생산자들의 사적 이해관계와 사회적 집단의 이해관계 사이의 대립이 있다. 이것이 수요와 공급 간의 불일치의 근본원인으로 된다. 또한 생산된 상품이 실현되지 않는 시장 위기와 기업의 파산과 실업자들의 증대와 같은 문제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생산력이 발전하여 생산의 사회적 협력의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기업관리 면에서도 집단적 관리의 유리성만이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관리의 유리성도 제기된다. 다양한 개인들의 각이한 수요를 제때에 충족시키기 위하여 중소기업이 필요할 뿐 아니라 생산력의 발전 자체가 개인적인 생산의 유리한 점도 가져다준다. 예컨대 성능이 높은 컴퓨터 한 대가 이전의 수백 명, 수천 명의 집단적 협력을 대신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는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개인들의 독립적인 지식노동과 소규모적인 기술노동이 대규모적인 집단노동에 비하여 독특한 우월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에 상응한 개인적 관리의 필요성이 제기되게 된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생산에서의 사회적 협력의 확대와 개인들의 독자적인 창조적 역할의 발전이 동시에 진행되는 만큼 양자의 특성을 다같이 살리는 방향에서 생산력 관리형태의 집단화와 다양한 개별화를 다같이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민주화를 더욱 발전시키는 데서 어려운 문제는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본주의 생산자들의 이익과 집단적 존재로서의 사회공동의 이익의 불일치를 해소시키는 것이다.


개인중심의 민주주의와 집단중심의 민주주의는 인간존재의 기본특징의 양면인 만큼 민주주의의 근본원리에서도 근본적인 공통성을 가진다. 개인중심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근본원리인 주권재민의 원리에 맞게 개선 완성해 나가려면 개인의 이익과 함께 집단의 이익을 존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자본주의 생산의 기본 병집의 원인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생산자의 이익을 위주로 하고 집단적 존재로서의 사회 공동의 이익을 소홀히 한 데 있다. 이로부터 시장에서 상품이 팔리지 않게 되어 생산자들이 생산에 필요한 인적, 물적 요인을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여 많은 생산수단들이 사장되고 실업자들이 증가되고 있다. 이러한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산자 개인의 이익과 소비자인 집단의 이익을 통일시키는 방향에서 경제 분야에서 민주주의를 더욱 개선 완성해 나가야 한다. 그것은 개인중심의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에 맞게 개선 완성해 나가는 방향에서 민주주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에 관한 이해에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그릇된 견해가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적 관계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생산관계를 대표하는 특권계급과 생산력을 대표하는 근로계급의 계급투쟁과 결부시킴으로써 그들은 또 하나의 이론적 과오를 첨가하게 되었다.


둘째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적 특성을 옳게 평가하지 못하고 그것을 계급적 지배사회의 한 형태로 그릇되게 이해하는 데로부터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계급투쟁의 대상, 계급혁명의 타도대상으로 적대시하였다.


셋째로 인간이 개인적 존재인 동시에 집단적 존재라는 인간 존재의 기본특징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데로부터 생산의 사회화에 상응한 완전한 집단주의 사회 수립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과오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잉여가치학설


엥겔스는 잉여가치학설을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착취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폭로한 학설로서 유물사관과 함께 마르크스의 2대 발견에 속한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잉여가치란 노동자가 생산한 제품의 가치 가운데서 노동자에게 노임으로 지불한 가치를 제하고 남은 가치를 말한다. 마르크스는 제품의 가치는 다 노동자가 생산하는데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노동력의 가치에 해당하는 노임만을 지불하고 나머지 가치는 다 자기가 차지하는 방법으로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것이다. 엥겔스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잉여가치학설이야말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적 과오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노동자만이 제품의 가치를 창조한다는 마르크스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를 옳게 인식하지 못한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속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적 협조관계 속에서만 생존할 수 있는 사회적 집단의 한 구성부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개인은 개인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에 속한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의 존재이다. 노동자가 노동할 때 노동자 자신이 직접 자기 몸에 지니고 있는 육체적 힘과 정신적 힘이 노동에 참가할 뿐 아니라 사회의 구성부분인 사회적 재부와 사회적 관계가 동시에 노동에 참가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재부를 생산하는 과정을 노동자만의 노동과정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연의 힘을 쟁취하여 그것을 객관대상에 체현시켜 놓고 자기 몸에 체현하고 있는 힘과 같이 이용한다. 모든 기계기술 수단들은 인간이 쟁취한 자연의 힘을 객관대상에 체현시켜 사회적으로 이용하는 사회적 재부이다. 기계기술 수단들은 인간의 산 노동을 대신할 뿐 아니라 인간이 산 노동으로서는 생산할 수 없는 물질적 재부까지 생산한다. 이러한 기계기술 수단들은 인간이 직접 몸에 체현하고 있는 노동능력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창조적 힘으로서의 귀중성을 가진다.


오늘날 완전히 자동화된 공장에서는 인간의 산 노동의 참가 없이 기계기술 수단에 의하여 사회적 재부가 생산되고 있다. 노동력과 노동이라는 개념을 종전대로 사용하여 표현한다면 기술 수단들에 체현된 창조적 힘은 객관화되고 사회화된 인간의 노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기계기술 수단들이 인간의 산 노동을 대신하여 진행하는 창조적 작업은 기술노동 또는 기술수단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기계화되고 자동화된 공장들에서 제품 생산과정을 보면 지식노동을 하는 과학기술의 전문가들이 생산해야 할 제품을 설계하고 그 설계에 따라 기술수단들이 자동적으로 제품을 생산하며 인간의 산 육체적 노동은 기계기술 수단들이 하는 창조적 작업을 약간 방조해 주는 역할만을 담당하고 있다. 이것은 제품 생산에서 지식노동과 기술(수단) 노동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인간의 육체적 노동이 제품 생산에 기여하는 비중이 보잘것없는 것으로 더욱 감소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인간의 산 노동만이 제품의 가치를 창조하며 생산과정에 직접 참가하는 노동자들만이 가치를 창조한다고 하면서 생산된 제품의 가치가 다 노동자에게 속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독단인가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학설은 노동자의 산 노동력만이 가치를 창조하고 기술수단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는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노동자가 육체적 노동으로 1시간에 1개 생산하던 것을 기계수단을 이용하여 100개를 생산하게 되었다면 99개를 더 생산한 것은 기계수단이 기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응당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립된 개인으로서는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다. 인간의 창조적 활동은 사회적 협력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상품 가치의 실체를 체화된 노동이라고 보면서 직접 상품을 만드는 데 참가하는 사람만이 제품에 노동을 체화시킬 수 있으며 가치의 창조자로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체화된 노동이니, 추상적 노동이니 하는 따위의 주장은 헤겔식 사변철학의 사고방식의 잔재라고밖에 달리 볼 수 없다. 제품의 사용가치를 만드는 데 직접 기여한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고 보는 것은 사회적 재부를 창조하는 모든 사회적 운동이 사회적 협조 속에서 진행되며 여기에 참가하는 모든 형태의 창조적 활동이 다 사회적 재부의 가치창조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사기협잡으로, 살인강도로 살아가는 자도 있고 놀고먹는 사회적 기생충도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적으로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물건을 만드는 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직접 물건 만드는 일을 담당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물건을 만드는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물건을 만드는 일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공장을 관리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군대에서 실제로 총과 검을 들고 싸우는 사람만 군인이고 군인들을 지휘하는 지휘관, 대장들은 군인이 아니며 지휘관들의 역할이 병사들의 역할만 못한다고 평가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과오를 범한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기업가는 결코 놀고먹는 사람이 아니다. 기업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생산의 성과여부가 크게 좌우된다.


그러면 공장을 관리 운영하는 사업은 전 사회에 대한 관리사업, 즉 정치를 떠나서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회를 관리하는 정치가 혼란상태에 빠지게 될 때 생산도 제대로 될 수 없고 경제생활 역시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국가관리에 참가하는 공무원들과 경찰, 군대, 사법 일꾼들도 다 놀고먹는 존재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상인들은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물건을 교환하는 중간매개자로서 부당한 이득을 차지하는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 영향 하에 있는 사람들은 상인을 천시하며 상업을 홀시한다. 지난 시기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상업이 발전하지 못한 것도 이러한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물고기를 많이 잡는 어촌에서 그것을 제때에 처리하지 못하여 썩어가는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물고기를 도시에 수송하여 비싼 값으로 팔았다고 하여 부당하다고 볼 수 있겠는가. 썩어가는 물고기를 인간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제때에 대책을 세운 상인들은 사실상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킨 것만큼 가치를 창조하였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상인들은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키도록 생산과 재부를 관리하는 노동에 참가한 사람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물건의 가치가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체화된 노동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한가 하는 것이 명백하다. 체화된 노동 자체가 있을 수 없는 허황한 가정에 불과하다. 물건의 가치를 주체인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떠나 논의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의 비현실적인 부당성이 명백하다.


노동력의 가치가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와 일치된다는 주장은 유치한 이론적 과오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를 고용하려고 하는 사람치고 그 노동자가 어떤 수준의 노동능력(노동력의 사용가치)을 소유하고 있는가, 이 노동자를 얼마나 주고 고용하면 이익을 볼 수 있겠는가를 타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노동자가 식사를 많이 하고 자기의 노동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생활수단이 필요하겠는가를 따지는 변태적인 사람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같은 높은 수준의 사상이론가가 어째서 이러한 비현실적인 이론적 과오를 범하였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그릇된 판단에 기초하다 보니 마르크스는 실업자가 증대되는 조건까지 타산하면 노동자들의 노임이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수준에도 못 미치게 되어 결국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빈궁화될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빈궁화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이론까지 내놓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의 노동가치설의 부당성을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물건의 가치란 물건의 귀중성에 대한 인간의 평가이다. 물건의 귀중성을 평가하는 주체는 인간밖에 없다. 인간의 생존과 발전에 쓸모 있는 것, 유익한 것은 가치 있고 쓸모없는 것, 이롭지 못한 것은 가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물건이 노동의 산물이든, 자연의 산물이든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의 산물이 아닌 자연의 산물은 아무리 귀중해도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궤변의 정당성을 논증하기 위하여 복잡한 논리를 동원하고 있지만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노동은 어디까지나 노동대상이 사용가치를 가지도록 개변시키는 구체적인 힘의 작용이다. 보다 더 많은 노동이 투하될 때 보다 더 많은 사용가치가 창조되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 점에서 노동이 가치창조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명백하며 이 한도에서 노동가치설은 정당한 것이다.


이러한 상식적인 판단을 떠나서 아무런 구체성도 가지지 못하는 추상적 노동이 상품에 체화된 것이 가치의 실체라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상품의 사용가치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같은 비율로 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용가치가 다 같다면 교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상품에 체화된 추상적 노동의 크기가 같기 때문에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가치는 달라도 귀중성에서는 대응하기 때문에 교환하게 되는 것이다.


사용가치가 다르다고 하여 귀중성을 비교할 수 없다는 주장은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논리의 유희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모자와 신발과 우산이 필요하지만 한 가지만 살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을 때 세 가지 물건 중 어느 것이 더 귀중한가를 비교할 수 없단 말인가.


물론 노동력을 인간의 창조적 능력 일반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생각할 때 노동가치설은 가치의 크기를 재는 척도로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인간에게 귀중한 모든 물건이 다 인간의 창조적 노동의 산물은 아니지만 인간의 창조적 노동이 가치 있는 사회적 재부를 창조하는 기본수단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창조적 노동이 보다 더 많이 투하될수록 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 재부를 생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옳은 것이다. 값있는 다양한 구체적인 재부를 생산하는 기본수단이 인간의 창조적 노동능력인 만큼 창조적 노동능력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인 의의를 가지는 귀중한 재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가치를 가지는 인간의 창조적 노동능력을 척도로 하여 각이한 제품의 귀중성을 재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주적으로 살려는 삶의 욕망을 자기의 창조적 능력에 의거하여 해결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생존방식이다. 창조성은 자주성을 실현하는 수단으로서의 귀중성을 가진다. 재부는 인간의 자주적인 삶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목적에 맞기 때문에 가치를 가진다. 이 점에서 창조성은 인간의 자주적인 삶의 요구를 실현하는 가장 일반적 수단으로서 귀중성을 가지고 다른 모든 재부의 귀중성을 재는 척도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주성과 창조성을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삶의 목적을 체현한 존재인 동시에 삶의 수단을 체현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수요를 기준으로 하여 가치를 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가치설도 인간의 본질적 속성과 관련시켜 옳게 해석하면 인간중심의 가치평가 기준으로서의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생산이 사회화되지 않고 개인별로 진행되는 조건에서는 개인들의 각이한 실정에 의하여 물건의 귀중성 문제가 각이한 기준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인간생활의 사회화 수준이 높아지고 생산의 사회화가 진척됨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도 더욱 더 사회화될 수 있다.


만일 생산의 사회화와 경제생활의 사회화 수준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 사회가 자기의 창조적 생산능력을 사회적 수요에 맞게 합리적으로 사용한다고 가정한다면 생산된 총재부의 가치는 총생산력의 가치에 상응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제품에 투하된 생산력의 크기와 제품의 귀중성의 크기가 더욱 더 일치하는 방향으로 접근하게 되는 것이 합법칙적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총생산력에는 인간이 직접 체현하고 있는 창조적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객관화한 모든 과학기술 수단들과 생산에 필요한 자재들이 다 포괄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를 계급주의적 입장에서 비판하는 데 전력을 다 하였다. 그의 경제학은 자본주의 경제의 부정적인 면을 비판하는 이론으로 일관되었을 뿐 경제를 민주주의적으로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길을 밝혀주는 긍정적 경제학으로 되지 못하였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의 불합리성을 비판하는 측면에서 경제학 발전에 기여한 바 적지 않다고 평가할 수도 있으나 잉여가치학설 같은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이론적 오류라고밖에 평가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주저인 『자본론』을 자기들의 경전과 같이 높이 평가하고 신비화하고 있지만 과학에서 신비성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자본론』의 논리는 이 저서의 장점이 아니라 치명적인 결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본론』을 통하여 마르크스가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사상가로서 낡은 사상을 타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바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중심의 민주주의를 구현한 최초의 민주주의 경제인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도 쓸모 있는 경제학으로 되지 못하였으며 집단주의를 구현한 사회주의 경제를 관리 운영하는 데 긍정적인 지침으로도 될 수 없었다. 레닌이나 스탈린이 『자본론』에 의거하여 소련의 경제정책을 수립한 것이 아니며 모택동이 『자본론』의 이론에 따라 인민공사를 조직한 것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자기의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과 근본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대립된다고까지 바로 『자본론』에서 강조하고 있지만 『자본론』을 신비하게 만든 것은 역시 헤겔 변증법의 영향인 것같이 보인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서술을 상품이 체현하고 있는 가치와 사용가치의 내부모순 분석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상품이 자본주의의 세포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모순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다느니 뭐니 하면서 신비화하고 있지만 아무런 과학적인 근거가 있을 수 없다.


상품이 체현하고 있는 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이 원인이 되어 교환이라는 상품의 운동이 진행되게 되며 교환운동이 발전함에 따라 특수한 상품인 화폐가 출현하게 되고 화폐가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을 구입할 수 있게 됨으로써 노동자를 착취하여 화폐 자체를 증식시켜 나가는 특수한 화폐인 자본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화폐 자본이 생산 자본으로 전환되고 생산 자본이 상품 자본으로 전환되고 그것이 화폐와 교환되어 다시 화폐 자본으로 되돌아오는데 이때 그것은 처음 출발한 화폐 자본보다 노동자를 착취하여 첨가한 부분만큼 증식된 것으로 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운동을 통하여 노동자를 착취한 잉여가치를 각종 형태의 자본가들과 지주 등 착취계급들이 결국 자본의 크기에 비례하여 나눠먹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각 계층의 이해관계 분배의 내부구조를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론』의 전제로 되고 출발점으로 되는 것은 노동가치설과 잉여가치학설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전제로 되는 이론 자체가 잘못된 것을 헤겔식 논리에 따라 진리인 것처럼 설명하다 보니 『자본론』이 신비스러운 것으로 되었다. 진리를 쉽게 설명하면 신비성이 나올 수 없다. 사람들에게 신비성을 주는 것은 바로 정상적인 사고에 배치되는 허위를 진리인 것처럼 교묘하게 설명하는 데서 나오는 법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상품의 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이 자본주의 생산의 기본모순의 맹아이며 축소판인 것처럼 신비화하고 있지만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상품의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납득되지 않는다.



사람이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든가, 귀중히 여길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든가 하는 표현은 인간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물건이라는 의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용가치의 유용성(귀중성) 밖에 또 다른 귀중성(가치)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사용가치의 유용성과 모순되는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팔려는 사람은 될수록 자기 물건을 비싸게 팔려고 하고 사려는 사람은 될수록 눅게 사려고 하여 양자 간에 모순이 있을 수 있다고 하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사람도 아니고 물질도 아닌 가치와 사용가치가 어떻게 서로 모순될 수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상품의 내부모순으로서 상품운동의 원천으로 될 수 있단 말인가.


원래 내부모순이 운동, 변화, 발전의 원천이라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잘못된 변증법적 논리를 진리로 접수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으로서는 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신비롭게만 생각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상품에 대한 물신숭배의 비밀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만 상품에 대한 신비주의와 물신숭배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떠나서 상품이 자기의 내부모순으로 하여 화폐로 전환되고 그것이 다시 자본으로 전환되며 자본이 자기 자체의 객관적 법칙에 따라 자기를 증식시켜 나가는 운동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즉 상품의 내부모순의 발전의 결과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형성된 것처럼 사고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상품이 자본주의적 재부의 세포라고 주장하지만 교환은 심지어 원시공동체 사회 때부터 있었고 상품, 화폐, 시장은 고대사회의 어느 나라에서나 있었다. 이러한 상품이 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의 발전의 결과 자본으로 전환되었다는 주장은 원시세포가 인간으로 전환되었다는 주장과 같이 그 설명의 논리가 아무리 그럴듯하다 하여도 너무나 우원하고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발생에 대하여 설명할 때 가장 가까운 공동선조였던 유인원이 어떻게 하여 하나는 계속 동물상태에 남아 있는데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발전하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봉건사회 말기의 기본 생산형태였던 분산된 소생산자들의 자급자족적인 경제형태가 어떻게 대규모적인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는가를 해명하는 것이 자본주의 발생과정을 밝히는 자연스러운 길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봉건사회 말기에 농노제도가 철폐되면서 일정한 자립성을 가진 소생산자들의 생산 활동이 전면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상응하게 생산물의 교환도 발전하게 되어 상품화폐 관계가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교환을 전문업으로 하는 상인들이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상인들의 수중에 집중된 화폐가 재부를 대표하는 수단으로서 사회적으로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상인들은 소생산자들로부터 생산물을 사서 파는 것보다도 직접 상품을 생산하여 파는 것이 자기들의 경제적 자립성과 역할을 높이는 데 유리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생산수단을 구입하고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상품을 직접 생산하게 되었다. 신분의 자유를 얻은 노동자들의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입하여 생산하는 대규모적인 생산자들이 소생산자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이 사회의 지배적인 생산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상식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상품의 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을 출발점으로 하여 자본의 발전을 변증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은가를 비교해 보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논리가 쓸데없는 것이며 정확하게 따지면 그릇된 논리라는 것이 명백하게 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신비로운 논리적 매력을 가지고 많은 지식인들을 끌어 당겼지만 그들을 인민경제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데 실천적으로 이바지하도록 추동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발전의 길을 걷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부정하고 인류의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지향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역사적 과오를 범하게 하였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3.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론은 마르크스주의의 두 개의 이론적 기둥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 유물론이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구현한 것이라면 계급투쟁론은 그의 변증법을 구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이 두 가지 이론적 기둥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경제학설을 파악하는 데 원칙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 유물론은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사회적 존재는 인간의 사회생활을 제약하는 물질적 제 조건을 의미한다.


사회생활의 물질적 제 조건에서 우선 인간과 자연이 포함된다.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없이는 인간생활이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인간은 정신생활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육체적 생명을 가진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또 자연환경이 없이는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연환경이 인간생활의 물질적 조건으로 포함되어야 함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인은 인간생활의 전제로 되는 조건이지 인간의 생존활동 자체를 규정하는 내적 조건은 아니다. 인간의 생존활동 자체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물질적 조건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결합되어 생활수단을 획득하는 방법인 생산방식을 형성함으로써 인간의 사회생활이 가능하게 된다. 인간의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양식이야말로 사회생활의 기본적인 물질적 조건으로서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고 사회생활 발전을 담보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산은 생산력의 발전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은 사회적 의식의 변화 발전에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생산력의 발전에 상응하게 변화 발전하는 생산관계를 통하여 작용하게 된다. 결국 사회적 의식을 규정하는 현실적인 토대로 되는 사회적 존재는 생산관계로 인정된다. 생산관계를 반영하여 사회적 의식의 제 형태가 형성되고 사회적 의식에 기초하여 법적, 정치적 제도가 형성되어 그것들이 자기의 토대인 생산관계에 반작용하는 상부구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역사적 유물론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유물론적 명제로 출발하였지만 그것은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규정하며 생산관계가 사회적 의식과 그것을 구현한 정치, 법률적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토대와 상부구조의 이론으로 압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만큼 여기서는 유물사관이 기초하고 있는 보다 더 기본적인 이론적 오류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간단히 지적하려고 한다.


첫째로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의식을 사회적 존재의 반영으로 본 마르크스의 유물론의 오류와 결부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의식(정신)이 선차적이냐, 물질이 선차적이냐 하는 문제가 유물론과 관념론을 가르는 기본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하여 정신이 발생하기 이전에 물질세계가 존재하였다는 사실과 의식은 객관적 물질세계를 반영한 주관적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유물론의 정당성을 논증하고 있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역사적 유물론의 출발적인 명제도 역시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존재에 의하여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반영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정신)과 물질세계를 대립시켜 놓고 어느 편이 어느 편을 규정하는가, 어느 편이 1차적이고 어느 편이 2차적인가를 논의하는 것은 정신에 대한 물질의 선차성과 규정적 역할을 논증하는 데 유리하지만 의식을 가진 인간의 우월성을 밝히는 데는 장애로 된다.


인간의 의식(정신)은 객관세계를 반영(인식)하는 기능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며 반영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 객관세계를 반영하는 것은 반영한(인식한) 지식을 참고로 하여 자기의 이해관계를 타산하고 객관대상과의 역량관계를 타산하여 객관대상을 자기 이해관계에 맞게 개조하는 창조적 활동을 계획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목적의식적으로 세운 행동계획에 따라 객관세계를 목적의식적으로 개조하는 창조적 활동을 진행한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이 인간에게 고유한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생존활동, 생명활동을 보장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의식의 본질은 객관세계를 반영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생존활동을 보장하는 인간 생명 자체의 가장 고급한 주동적이며 능동적인 특징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의식의 본질은 인간의 생존활동을 관리하는 최고 지휘기능을 수행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식은 인간 생명의 본질적 속성이다. 바로 인간은 가장 발전된 존재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인간은 의식을 가지게 됨으로써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만일 의식의 본질을 객관세계의 반영으로 보고 그것이 객관세계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보면 목적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의 활동도 결국 객관세계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결론에 떨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사회적 운동의 주체로서 자기 운명을 주동적으로,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간다는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운명을 생산력과 생산관계, 토대와 상부구조의 변화 발전이 규정한다는 역사관을 주장하는 데로 나가게 된다.


객관적 조건이 인간의 활동을 제약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의식을 가진 인간과 의식을 가지지 못한 객관적 조건 가운데서 어느 편이 더 발전된 존재이고 어느 편이 어느 편에 대하여 주동적으로, 능동적으로 작용하게 되겠는가 하고 문제를 세운다면 의식을 가진 인간이 주동적으로, 능동적으로 객관세계를 개조해 나가는 자기 운명의 주체로 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마르크스주의는 반영론에 의거하여 인간이 사회역사적 운동의 주체라는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운명이 객관적 조건의 변화 발전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처럼 유물사관을 정립하는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사회적 현상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두 부분으로 갈라놓고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인정함으로써 정치, 경제, 사상문화의 3대 생활의 상대적 독자성과 균형적 발전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생활을 유일한 물질생활로 간주하는 데로부터 정치생활이나 사상문화생활을 경제생활로부터 파생되고 경제생활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으로 인정한다. 물론 인간은 자연을 개조하여 생활수단을 생산하지 않고서는 생존하고 발전할 수 없다. 자연개조사업에 기초한 경제생활이 인간의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필수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자연을 개조하여 물질적 재부를 창조하는 것도 인간이며 인간의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인간을 생산하고 인간의 사상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한 인간개조사업과 이에 기초한 사상문화생활을 떠나서는 자연개조사업과 경제생활을 발전시키는 문제 자체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다.


자연개조사업도 인간개조사업도 다 사회적 협조 속에서만 가능하다. 고립된 개인으로서는 사회적 존재로 될 수 없으며 그 어떠한 창조적 활동도 할 수 없다. 사회적 관계는 인간이 목적의식적으로 관리하고 발전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적 관계를 관리하고 개조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정치사업이 자연개조사업이나 인간개조사업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자연개조사업과 인간개조사업, 사회관계개조사업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상호 의존되고 제약되는 관계에 있지만 어느 하나로부터 다른 것이 파생된 것이 아니며 또 어느것은 순수한 물질적 생활이고 어느것은 순수한 정신적 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상문화의 3대 생활의 주체는 다 인간이다. 인간 자체가 정신을 가진 물질적 존재인 만큼 인간의 생활 치고 순수한 물질생활이나 순수한 정신생활이란 있을 수 없다.


사회발전수준이 낮을수록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먹고 입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수준이 낮은 옛날로 올라갈수록 먹고 입고 사는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인간생활에서 주되는 문제로 되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정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여 과학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이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고 짧은 시간에 많은 물질적 재부를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의 정신문화적 수요와 사회정치적 수요가 크게 장성하게 된다. 앞으로 사회가 더욱 발전함에 따라 정치, 경제, 사상문화의 3대 생활은 더욱 균형적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며 어느 한 부분 생활이 다른 부분 생활에 예속되는 일이 없이 각각 자체의 사명을 원만히 수행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을 저해하고 있는 주되는 요인의 하나는 경제발전에 비하여 정치와 사상문화가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역사적 제한성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개선 완성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제발전에 비한 정치와 사상문화의 상대적 낙후성을 퇴치하고 정치, 경제, 문화의 3대 생활을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계속)....................




[ 2006-09-27, 2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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