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uktae Oh
28 June 2018 ·
'3층 서기실의 암호'를 읽고, 간단히.
북한의 정치 혹은 경제 체제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있는 책은 아니었다. 저자가 '고위층의 권력 암투'나 '핵 협상 전략'을 직접 지켜볼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않았으며, '구걸 경제' '장마당' 등 경제에 대한 정보는 이미 다른 책들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는 결론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기대했던 바이다.
북한이 미국의 공격을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었음이 이 책 곳곳에 드러나 있다. "이라크 전쟁에서 사담 후세인이 맥없이 허물어진 것을 본 김정일은 미국이 북한에 달려들 수도 있다고 보고 대단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공격을 막는 방법 중 하나는 유럽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미국을 견제한다는 것이었다." 북한 외무성에서 유럽, 그 중에서도 '영국통'이었던 저자는 이라크 전쟁도 적극 지원한 미국의 우방국 영국이 북한 공격을 지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의 핵심 임무였고 또 그에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정말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은 것이 영국 때문이었는지, 우리 대한민국은 상대적으로 무력하게 '패싱' 당했던 것인지 궁금하다. 물론 저자가 자신의 임무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저자는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북한 사회의 조그마한 변화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체제의 비합리성을 잘 알고 있는 북한 외교관들은 북한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으로 은밀하게 노력한다." 영국 외교관의 비난을 접하고 한겨울 어린 학생들의 집단체조 훈련을 중지시킨 일, 영국의 제의를 받고 진행한 런던 장애인올림픽 참가 및 장애인예술단 영국 공연 등이다. 북한이 서유럽 여러 나라들과 수교를 한 것(=개방)이 변화를 이끈 힘으로 작용한 셈이다.
어쩌면 이 책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북한이 그래도 어느 정도 제대로 된 나라라는 점을 보여 준다는 사실이 아닐까. 평양외국어학원과 평양국제관계대학, 그리고 유학이라는 엘리트 교육을 통해 국제 사회에서 당당히 활동하는 외교관을 길러낼 수 있는 나라 말이다. 북한이 적어도 '막장 국가' 내지는 '미친놈 김씨 일가가 멋대로 통치하며 전국 곳곳에 정치범 수용소가 가득한 나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물론 이것이 출판사가 이 책을 기획한 의도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저자는 리수용, 리용호, 백순행, 김계관, 최선희 등 북한의 고위 외교관들이 다 자신의 평양외국어학원 동문임을 (자랑스럽게) 밝힌다. 어쩌면 저자가 앞으로의 남북 관계 개선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직접 대북 협상에 나서는 것은 물론 무리겠지만, 적어도 협상 파트너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 제공은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그런 역할을 이미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 본다. 보수 우파들의 단결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기에는 그가 가진 자질과 인맥이 아깝다.
(나는 '3층 서기실의 암호'가 뭐 대단한 것인 줄 알았다. 별 거 아니다. 그렇다고 굳이 스포일러를 남기고 싶지는 않다.)

149Paul Ma, Greg Kim and 147 others
10 comments4 shares
LikeComment
Share
Comments

정재웅 출판사가 기파랑이군요 ㅎㅎㅎ
3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y

김형균 반년전만 해도 이런 서평쓰시면 빨갱이로 몰리셨을지도....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y

Suktae Oh 보통 탈북자 수기와는 달리 은근한 '프라이드'가 느껴지더라는... '나는 조선의 엘리트 외교관이다!'
10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y
· Edited

Write a reply...

Jae Yeop Kim 김정은과 그 일당들을 위한 공산왕조 국가로서는 '제대로 된' 나라일지도 모르죠. 간판으로 붙인 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는 낙제 중의 낙제지만.
그런 식이면 나치 독일, 구 일본제국도 제대로 된 나라 소리 충분히 들을 수 있을 겁니다.
3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y
· Edited

Kyung-il Ryu 잘 읽었습니따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y

손명현 독해력이 영...국어 선생으로서 선생과 같은 책을 봤는데...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y
· Edited

이승훈 비약이지만 오히려 현 북한 당국에서 홍보 차원에서(?) 기획 탈북을 시킨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북한의 '국가이성'을 보여주는 내용들이 가득하죠.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y

Suktae Oh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가 바로 '사실은 친북서적'이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보수 진영 사람들만 그걸 못 보았겠지요.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y

Choong Hyun Nam Suktae Oh 5공 인사의 그 시절 회고를 들어보면 의외로 5공 정권도 생각보다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부분이 많아서 깜짝 놀랄때가 있죠. 심지어 제일 극단적인 예인 나치 독일이나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조차도 일정한 국가의 합리적 운영은 나타났구요. 독재정권이나 권위주의가 왜 나쁜가? 에 대해서 과장해서 악마화하는게 아니라 사실에 기반해서 비판을 해야 민주주의를 더 잘 옹호할 수 있는거 같습니다.
4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y
· Edited

Write a reply...

박은하 서평 재밌네요. 이 분 매력있다고 생각하는데, 뵌 적은 없지만 언론에 나온 모습들로 보면 남한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나왔으면 학생운동, 그것도 가장 급진적인 정파에 가담했을 거란 상상을 합니다. 이분의 멘탈리티는 "남한, 너네는 87년 6월항쟁 해놓고, 북한도 그런 가슴 벅찬 민주혁명을 할 기회를 달라"는 것. 박헌영과 지역만 뒤집어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에 비하면 주성하 기자는 현실적입니다. 북한의 장삼이사들을 훨씬 더 잘 안다는 느낌)
이분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남한의 87혁명의 주인공이라던가, 민주세력은 이 분을 굉장히 불편하게 여기고 심지어 발언하는 것에 눈치를 주며, 반대로 이 분을 열렬히 환영하고 알리바이로 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남한의 민주주의에도 관심이 없고, 이분이 말하는 북한 정권의 폭압성과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동시 이해할 만한 리버럴은 대부분 통일에 반대하고 북한에서 혁명이 일어나 그 비용을 남한이 감당하는 것은 더더욱 거부하는 성향인 거 같습니다.
단연, 한반도에서 제일 외로운 자일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런 구도에서 그의 재능과 인맥이란ㅜㅜ
8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y
· Edited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