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31

부산 베트남난민 18년사 Hermod Kim Shi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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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od Kim Shi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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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베트남난민 18년사
The 18 years of Vietnamese Refugees in Busan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1. 부산입항 1975년 베트남난민과 한국사회

난민은 오랫동안 베트남과 한국을 연결하는 고리였다. 양자적 관계를 설정하지 못한 전근대 시기에도 난민이 서로의 연안으로 표류해 들어가면서 문화교섭의 계기가 만들어지곤 했다. 1975년 베트남난민도 양국 간의 외교단절기에 교류의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더 중요하게는 1975년 베트남난민은 한국이 역사상 처음이자 최대 규모로 외국인 난민을 구조하고 우리사회 안으로 통합시키고 제3국으로의 이주를 알선했던 경험을 안겨주었다. 이 경험에 대한 사실적인 이해가 필요하기에 본문에서는 베트남난민의 구조・정착・재정착에 대한 정부의 정책과 이들의 정착과 이주의 추세에 초점을 맞추어 1975년 베트남난민의 제모습을 복원하고자 했다. 본문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특히 정착한 베트남난민에 대한 면밀한 추적 연구가 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1975년 베트남난민의 수용은 당시에는 아무도 의식하지 못했으나 사실상 한국의 다문화사회로의 진입을 알리는 계기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LST난민과 쌍용호난민의 성격과 특징을 세 차원에서 가름해 보았다. 첫째는 한국과의 관련성에서 보면 LST난민은 유사 이래 처음 있었던 해외교포 해상철수 작전이라는 성격을 띠는 동시에 베트남전쟁은 물론 남베트남과의 우방관계 설정에서 비롯된 유연고 베트남난민을 구조하는 작업이었다. 이에 따라 난민에 대한 구조는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며 이때 구조된 난민은 한국역사에서는 전무후무한 정착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는 1975년 베트남난민의 국제정치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맥락에서 한국에 들어온 베트남난민의 성격과 특징을 짚어내려고 했다. 한국의 베트남난민 구조는 적극적인 행위이었을지라도 독립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1975년 베트남난민의 구조는 베트남전쟁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주도하고 베트남전쟁 참전국과 국제기구가 공조하는 가운데 한국이 그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이루어졌다. 셋째는 1975년 베트남난민을 유출한 근원지인 남베트남에서 난민이 생겨나게 된 상황과 그 규모, 국내에서의 피난민의 흐름은 물론 국외 난민으로의 전화과정을 ‘준비된 난민’이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이를 통해 1975년 베트남난민의 성격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이후 발생하게 될 선상난민의 연원이나 그 방향과 규모까지도 가름하고자 했다. 이러한 특징은 상호작용이 극대화된 현대세계에서 난민문제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트랜스내셔널한 측면을 드러내준다.
1975년 베트남난민과 한국사회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모양이나 정도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먼저 정부를 비롯하여 위로부터 본다면 이는 일방적인 이해나 이용의 대상이기 쉬웠다. 냉전의 체제에서 국민국가의 메카니즘이 강력하게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에 책임을 묻고 미국의 태도를 비판하는 한편 자유・민주・인도주의 실현의 주체로서의 한국을 강조하고 자주국방이나 안보체제의 강화 내지는 사회질서의 확보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아래로부터 본다면 1975년 베트남난민으로 인해 작지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베트남난민의 삶에 대한 공감과 이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은 자원봉사, 불우이웃돕기나 베트남풍속도를 통한 기금마련 등과 같이 보이는 행동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드라마, 소설, 영화를 통해 우리의 문화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1975년 베트남난민은 한국 사회에 인도주의나 난민문제라는 커다란 과제를 안겨주었다.

2. 바다의 디아스포라, 보트피플: 한국에 들어온 2차 베트남난민(1977~1993) 연구

1977년 9월 15일 부산시 재송동에 마련된 베트남난민보호소가 개소하자마자 처음으로 입소한 베트남난민은 1989년 8월 16일을 마지막으로 13년 동안 36차례에 걸쳐 1,382명(출생자 66명 포함)에 달했다. 이는 13년간 매년 평균 106명이 넘는 베트남난민이 부산에서 임시보호를 받았음을, 1차례 들어온 규모는 평균 38명이 약간 넘었음을 뜻한다. 바로 1977년부터 1989년까지 해상에서 구조되어 한국에 들어왔던 난민, 통상 선상난민(Boat People)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들을 1975년 남베트남의 패망 바로 전후를 배경으로 발생했던 1차베트남난민과 구별하여 2차베트남난민이라 부른다. 2차베트남난민은 사망자2명을 제외하고 모두 제3국에 정착했다. 1977년 9월 23일을 시작으로 1993년 5월 17일까지 17년간 1,380명의 베트남난민이 140차례에 걸쳐 부산을 떠났다. 이는 매년 평균 81명이 넘는 난민이, 1차례에 9명 정도가 재정착을 위해 15개국으로 향했음을 의미한다.
베트남 선상난민의 참상이나 교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17년간 1,382명의 2차베트남난민이 국내에 유입되어 부산의 난민보호소에서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7년 가까이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나, 통계가 보여주는 연도별 입출소와 재정착지 관련 통계 또한 한국에서의 베트남난민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라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베트남난민보호소에 입소하게 된 이들이 어떻게 한국의 해항도시에 들어오며 그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 어디에 재정착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연구 성과는 단 하나도 없다. 게다가 베트남난민보호소 운영 책임을 맡고 있던 부산시의 자료 중 많은 부분이 문서보존기간이 지나 폐기되었으며, 베트남난민 구호업무를 담당한 대한적십자사 부산지부가 생산한 관련 문건 또한 사라져 버렸다.
본 논문은 남아있는 베트남난민 관련 부산시 기록관 자료와 1977년부터 1993년까지의 신문자료를 대조・보완하여 베트남⟶남중국해⟶동중국해⟶한국⟶서구로의 선상난민의 행로를 자료가 허용하는 한 세밀하게 복원하고자 했다. 특히 3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 번째 측면은 2차베트남난민이 구조된 시점과 지점부터 입항하는 해항도시와 부산 베트남난민보호소 입소까지이다. 두 번째는 이들이 언제 어디로 재정착하며 재정착을 결정지은 요인들은 무엇인지이다. 세 번째 측면은 한국의 해항도시에 들어오고 나간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한국 밖의 환경과 맥락이다. 이 세 가지 측면은 합하여 우리 안에 들어온 베트남난민의 모습을 다각적으로 드러내고 그 변화상과 함의를 이해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를 위해 본문은 1983년을 기준으로 두개 장으로 나뉘어 각각의 측면을 분석했다. 1983년은 13년간의 2차베트남난민 유입사의 중간 지점일 뿐만 아니라 앞 표에서 보이듯이 이전에 들어온 난민이 모두 해소되었으며 새로 유입되어 보호받던 인원도 가장 적었던 해이다. 보다 중요하게는 1983년은 1987년에 이르면 명백해지는 새로운 형태의 선상난민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문은 13년 동안 우리의 7개 해항도시로 들어와 부산베트남난민보호소에 머물렀던 베트남난민 1,382명의 여로를 추적해 보았다. 이들에 대해 UNHCR이 체제 비용은 물론 관계국과의 교섭・제3국 재정착을 책임졌던 반면, 한국은 베트남난민에 대해 제3국 송출시까지 임시 보호라는 비교적 한정된 기능을 담당했다. 게다가 베트남난민을 수용했던 부산의 보호소는 전형적인 ‘닫힌 캠프’로 베트남난민의 한국사회와의 상호작용은 최소화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베트남난민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관여는 소극적이었으며, 직접 교류의 양상도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난민을 맞이하면서 한국 사회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새로운 변화를 경험했다. 이 중에서 인도주의와 냉전은 2차베트남난민과 관련하여 한국을 변화시킨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3. 한국문학의 베트남 선상난민 형상화와 존재양태

본 논문은 베트남난민이 한국문학에서 어떻게 표상되었는가라는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선상난민(boat people)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베트남난민은 1975년부터 20여 년간 전 세계적 이슈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도 그 존재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1975년부터 18년 동안 3,000여명의 베트남난민이 한국에 들어왔으며 그 중 500여명은 우리사회에 정착했다. 해상에서의 난민의 구조와 부산 베트남난민보호소에서의 구호, 그리고 문화와 민족이 다른 이들의 수용 모두 우리사회가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다. 또한 베트남난민은 한국의 베트남전쟁에의 관여가 빚은 과거사, 그리고 남북분단 상황에서 공산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한국사회에 닥칠지도 모를 미래사와 연결되면서 우리사회에 복잡다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문학은 베트남난민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이런 현실을 마냥 비켜가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난민에 시선을 두고 그 존재를 드러낸 문학 작품은 많은 편이 아니다. 여기에 더하여 베트남난민을 다룬 한국문학의 전체상을 파악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한국문학이란 한국의 언어, 즉 글을 표현 수단으로 한 소설, 희곡, 영화 시나리오, 방송극 극본을 모두 포함한다. 이들은 모두 언어적 재현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 더하여 우리사회의 베트남난민에 대한 나름의 이해이자 해석이기에 그 형태를 불문하고 분석의 범주에 넣었다.
베트남난민을 소재로 한 한국문학 작품은(서두에 놓인 이혜선의 시 한 편을 제외하고) 6편 정도로 파악된다. 문학의 형태로 본다면 소설로는 『시간의 문』(이청준, 1982)과 「보트피플」(천금성, 1986), 영화 시나리오로는 「사랑 그리고 이별」(이희우, 1983), 「처녀 아리랑」(이종택, 1992), 희곡으로는 「제3의 신」(이청준, 1982), 방송극 극본으로는 「빨간 아오자이」(김혜린, 1992)가 있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 10년 동안 집중적으로 쓰인 이들 작품들은 형태가 다른 만큼이나, 사실 이 보다 더욱 더 다양한 시각과 수준에서 베트남난민을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난민 관련 문학작품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없는 상황에서 이들을 범주화하여 분석하기에는 곤란함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본 논문은 베트남난민을 형상화한 위 6편의 문학작품이 크게 관계로서의 베트남난민과 실존으로서의 베트남난민을 다루고 있다고 본다. 「사랑 그리고 이별」,「처녀 아리랑」 , 「빨간 아오자이」세 편의 작품을 통해서는 한국인과의 관계에서 베트남난민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이에 대한 분석이 2장의 내용을 구성한다. 반면『시간의 문』「보트피플」「제3의 신」에서는 한국사회와 직접적인 관계성은 없으나 실체와 실존적 존재로서의 베트남난민을 만날 수 있다. 이에 대한 분석은 3장의 내용을 구성한다. 본문을 통해 한국문학이 사건으로서의 베트남난민에 대해 어떤 관계와 존재를 재현해내는가라는 문제가 분명해 질 것이다. 또한 베트남난민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문학적 진실로 구현되는지도 드러날 것이다.
베트남난민을 형상화하고 있는 6편의 한국문학 작품은 관계와 존재의 차원에서 베트남난민에 접근하고 있음을 보았다. 전자는 한국 사회 적어도 한국인과의 관계 속에서 베트남난민의 초상을 반추하는 행위이며 후자는 실존적 존재로서의 베트남난민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난민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에 누락되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한 평가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베트남난민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이 성취한 성과이기도 하다. 문학이라는 공간에서 베트남난민에 관한 어떤 특정 흔적이 기억, 저장, 재구성되고 있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보다는 그 허구 쪽에서 오히려 더 깊게 개별자로서의 베트남난민과 대화를 하고 진실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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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베트남난민 18년사
The 18years of Vietnamese Refugees in Busan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gram 신진연구자지원사업(인문사회)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
Project Number 2013S1A5A8026035
Year(selected) 2013 Year
Research period 2 Year (2013년 05월 01일 ~ 2015년 04월 30일)
chief of research 노영순  [ NRF 인문사회 연구책임 3회 수행 / 공동연구 5회 수행 / 학술논문 20편 게재 / 저역서 4권 저술 / 총 피인용 40회 ] 
Executing Organization 한국해양대학교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Research Summary
Goal
본 논문은 ‘보트피플’(Boat People)로 더 잘 알려진 베트남 해상난민, 특정하게는 1975년부터 1993년까지 18년간 한국 사회에 들어와 일부는 정착하고 대다수는 제3국으로 재정착지를 찾아 떠난 2,800여명의 베트남난민을 다룬다.
전쟁사의 이면에서든 냉전사의 경험에서든 부산난민보호소에 수용되었던 베트남 해상난민에 대한 면밀한 이해는 기본적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후술하는 것으로 하고 여기에서는 본고와 같이 부산난민보호소의 베트남 해상난민에 대한 연구가 갖는 의의를 크게 세 가지로 기술하고자 한다. 부산에 들어온 베트남난민에 대해 이해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가장 큰 논문의 의의이다. 종교, 직업, 계층적 특질을 포함하여 어떤 사회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부산에 입항했으며, 어떤 경유로 해상난민화 되고 구조되어 남지나해와 동지나해를 지나왔는지에서 시작하여 부산에서의 이들의 일상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베트남 해상난민에 대한 이해를 높일 뿐만 아니라, 이를 근거로 하여 이제까지 통용되었던 베트남난민 유출과 유입에 관한 제설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베트남난민에 관한 오해를 바로 잡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베트남난민’에는 민족적으로 베트남인이 아니라 중국인(화교)이 다수였으며, 문화적으로 베트남전통에 속한 이들이 아니라 가톨릭교도들이 커다란 집단이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중국인밀항자들이 베트남난민 속에 대거 유입하게 되었다.
둘째는 연구를 통해 우리 사회와 관련하여 베트남 해상난민이 남긴 일종의 유산이나 영향을 바로 인식할 수 있다. 사실상 정착한 베트남난민은 한국사회의 다문화화를 이끈 소리 없는 주역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사람에게 음식이든 명절이든 언어이든 혼혈의 문제이든 이문화와의 면대면 접촉은 바로 이 베트남난민을 통해 보다 실제적으로 체험되었다. 인도주의라는 보편주의를 타자를 향해 의식적으로 발휘한 것도, 난민지위에 관한 국제 협약과 의정서에 조인함으로써 인도주의적 국제질서에 명시적으로 들어간 것도 모두 베트남난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거나 얻은 것들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 사회가 주로는 정치적으로 베트남난민과 행해온 상호작용을 보다 분명히 성찰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 베트남난민은 망국이라는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으로 반공이나 총화단결, 국론통일, 민족주의 강화라는 매우 정치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셋째는 베트남난민의 역사는 전세계적 규모의 베트남디아스포라의 형성 역사이기도 하다. 물론 부산의 난민보호소에 있던 베트남난민은 그 중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동북아시아만 보더라도 중국과 일본은 한국 보다 훨씬 더 많은 베트남난민을 수용하고 재정착시켰다. 규모의 차이에 더하여 한중일 삼국은 각기 베트남난민에 대응하는 기구, 장소, 의식 등도 달랐다. 부산의 베트남 해상난민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는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비교하는 틀을 제공할 수 있는 의의가 있다.

Expectation Effectiveness
본 연구의 결과는 향후 연구의 시작점으로써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본 계획에 따라 부산난민보호소를 거쳐서 한국에 정착했거나 제3국에 재정착한 베트남난민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이후의 연구 방향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베트남난민으로 인해, 더 정확히 말하면 베트남난민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예술로 창조되는지를 보고자 한다. “처녀아리랑”(이종택 감독), “사랑 그리고 이별”(변장호 감독)과 같이 스크린을 통해, “제3의 신”(이청준 작)과 같이 연극무대를 통해, 혹은 『이상한 바다』(천금성 작), 『랍스타를 먹는 시간 』(방현석 작),『강물은 모두 바다로 흐르지 않는다』(박충훈 작) 등의 소설을 통해 베트남난민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어떤 함의를 갖는지? 예술적인 표상과 문화의 교류나 교섭은 어떤 관계에서 설정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다른 하나는 본 연구를 바탕으로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일본과 중국에 기착한 베트남난민의 특징을 잡아내고 이들이 베트남난민을 다루는 방식을 연구하여, 궁극적으로는 한중일 동아시아 3국과 베트남난민과의 관계를 비교사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이상의 연구는 직간접적으로 한국에서의 다문화사회의 형성을 이해하고 그 발전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아울러 북한난민 문제에 대해서도 좀 더 심도 깊은 방향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Summary
『부산 베트남난민 18년사』라는 제목으로 신청한 연구과제는 2년간 2편의 논문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최소한 2편의 논문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국에서의 베트남난민에 대한 연구의 공백을 충실하게 채우기 위해 보다 전론적인 연구가 필요해서이다. 그리고 다음 장의 결과 활용방안에서 제시한 바처럼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향후의 연구에 활용되기 위해서는 보다 충실하고 구체적인 연구 내용이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연구에 기반하여 궁극적으로는 한중일 동아시아 3국과 베트남난민과의 관계를 비교사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부산 베트남난민 18년사』를 구성할 두 연차의 가제목과 잠정목차는 아래와 같으며, 각 논문의 주요 장에서 다룰 6가지 소주제의 내용은 바로 후술하게 된다.


목 차

1년차: 한국의 베트남난민 수용과 베트남난민의 해상 표류와 구조 경로
I. 문제제기
II. 한국의 베트남난민 수용 배경과 수용 체제
III. 베트남의 항구에서 부산 난민보호소로의 여정
IV. 한국에서의 정착과 제3국으로의 재정착 실태와 의미
V. 맺음말

2년차: 베트남난민의 일상적, 사회적, 정치적 삶에 대한 연구
I. 문제제기
II. 부산난민보호소 난민의 사회적 계층 분석
III. 부산난민보호소에서의 생활과 민족적・종교적 갈등
IV. 베트남난민의 정치적 역할과 문화적 영향
V. 맺음말
2.2.1 한국의 베트남난민 수용 배경과 수용 체제
본 장은 한국의 베트남난민 수용 배경과 체제를 다룸에 있어서 미국과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 국제적십자가 그림을 그리고 역할한 커다란 틀과 한국정부, 한국적십자사를 비롯한 한국의 NGO단체들과의 연관성에 초점을 두어 분석하고자 한다. 이에 더하여 당시 난민보호에 관한 국제규약과 의정서에 조인하지 않은 우리 정부는 베트남난민을 법적으로 난민이라기보다는 재난상륙자 혹은 무국적자로 다루었는데, 그 함의가 무엇인지, 한국은 제1망명지(First Asylum)의 기능을 수행했지만 홍콩과 아세안 창립5개국(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과는 달리 조약법상의 자격은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한국의 난민정책・전략과 관련하여 그 함의는 무엇인지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해항도시 부산이 베트남난민을 수용하는 공간으로 결정된 이유와 부산의 역할, 부산 난민보호소의 실제적인 구조와 기능, 관리 그리고 기타 수용 체제를 분석이 이 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2.2.2 베트남의 항구에서 부산 난민보호소로의 여정
1차와 마찬가지로 2차 베트남난민의 규모와 시기별 변동, 그리고 그 성격의 변화를 규명하면서 이에 영향을 미친 베트남난민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 베트남에서의 변화, 그리고 중월전쟁의 전개 과정과의 관련성이 분석된다. 무엇보다도 이 장에서는 한국에 오게 된 베트남난민이 구조된 해상의 위치와 시기, 구조한 선박의 종류, 한국에서의 첫 입항지와 부산으로의 재집결 그리고 이들에 대한 여론의 분석에 집중한다. 1975년에서 1989년 사이 베트남난민이 구조된 해상의 위치는 점차 북상을 하게 되며 시기는 계절풍이 부는 때에 주로 발생했다. 구조한 선박의 국적지와 선박 소유자 국적지는 난민의 정착이나 제3국으로의 재정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보인다. 베트남난민은 부산뿐만 아니라 인천, 평택, 군산, 목포, 신안, 제주, 여수의 항구를 첫 기항지로 했다. 마지막으로 다룰 베트남난민에 대한 여론은 자체로도 흥미로운 주제이고 다음 장과의 연관성하에서도 의미가 깊다.
2.2.3 한국에서의 정착과 제3국으로의 재정착 실태와 의미
1980년대 말에 이르면 베트남난민에 대한 여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베트남난민의 강제추방과 입항 소식이 각계각층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제까지 제3국으로의 재정착을 움직일 수 없는 원칙으로 삼고, ‘내몰 수도 없지만 더욱이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던 정부도 베트남난민의 한국사회에서의 정착 문제를 고민했던 시점이었다. 그 과정은 충분히 의미 있었으나 결론은 제3국으로의 재정착이었다. 2차 베트남난민이 이 범주에 속했다. 이 장의 절반은 바로 2차 베트남난민의 재정착과 일부 1차 베트남난민의 재정착을 다루고 그 관련성에 주목한다.
2.2.4 부산난민보호소 난민의 사회적 계층 분석
앞으로 기술할 세 장은 2차년도의 연구내용이 되는데 기본적인 질문은 어떤 베트남난민이 우리 사회에 들어왔으며 시간의 길이에 상관없이 이들이 살았던 한국에서의 삶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한국에서 어떻게 이용 혹은 역할했는지가 연구의 주요 질문이다
Research Summary
Korean
1. 부산입항 1975년 베트남난민과 한국사회

난민은 오랫동안 베트남과 한국을 연결하는 고리였다. 양자적 관계를 설정하지 못한 전근대 시기에도 난민이 서로의 연안으로 표류해 들어가면서 문화교섭의 계기가 만들어지곤 했다. 1975년 베트남난민도 양국 간의 외교단절기에 교류의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더 중요하게는 1975년 베트남난민은 한국이 역사상 처음이자 최대 규모로 외국인 난민을 구조하고 우리사회 안으로 통합시키고 제3국으로의 이주를 알선했던 경험을 안겨주었다. 이 경험에 대한 사실적인 이해가 필요하기에 본문에서는 베트남난민의 구조・정착・재정착에 대한 정부의 정책과 이들의 정착과 이주의 추세에 초점을 맞추어 1975년 베트남난민의 제모습을 복원하고자 했다. 본문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특히 정착한 베트남난민에 대한 면밀한 추적 연구가 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1975년 베트남난민의 수용은 당시에는 아무도 의식하지 못했으나 사실상 한국의 다문화사회로의 진입을 알리는 계기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LST난민과 쌍용호난민의 성격과 특징을 세 차원에서 가름해 보았다. 첫째는 한국과의 관련성에서 보면 LST난민은 유사 이래 처음 있었던 해외교포 해상철수 작전이라는 성격을 띠는 동시에 베트남전쟁은 물론 남베트남과의 우방관계 설정에서 비롯된 유연고 베트남난민을 구조하는 작업이었다. 이에 따라 난민에 대한 구조는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며 이때 구조된 난민은 한국역사에서는 전무후무한 정착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는 1975년 베트남난민의 국제정치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맥락에서 한국에 들어온 베트남난민의 성격과 특징을 짚어내려고 했다. 한국의 베트남난민 구조는 적극적인 행위이었을지라도 독립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1975년 베트남난민의 구조는 베트남전쟁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주도하고 베트남전쟁 참전국과 국제기구가 공조하는 가운데 한국이 그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이루어졌다. 셋째는 1975년 베트남난민을 유출한 근원지인 남베트남에서 난민이 생겨나게 된 상황과 그 규모, 국내에서의 피난민의 흐름은 물론 국외 난민으로의 전화과정을 ‘준비된 난민’이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이를 통해 1975년 베트남난민의 성격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이후 발생하게 될 선상난민의 연원이나 그 방향과 규모까지도 가름하고자 했다. 이러한 특징은 상호작용이 극대화된 현대세계에서 난민문제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트랜스내셔널한 측면을 드러내준다.
1975년 베트남난민과 한국사회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모양이나 정도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먼저 정부를 비롯하여 위로부터 본다면 이는 일방적인 이해나 이용의 대상이기 쉬웠다. 냉전의 체제에서 국민국가의 메카니즘이 강력하게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에 책임을 묻고 미국의 태도를 비판하는 한편 자유・민주・인도주의 실현의 주체로서의 한국을 강조하고 자주국방이나 안보체제의 강화 내지는 사회질서의 확보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아래로부터 본다면 1975년 베트남난민으로 인해 작지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베트남난민의 삶에 대한 공감과 이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은 자원봉사, 불우이웃돕기나 베트남풍속도를 통한 기금마련 등과 같이 보이는 행동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드라마, 소설, 영화를 통해 우리의 문화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1975년 베트남난민은 한국 사회에 인도주의나 난민문제라는 커다란 과제를 안겨주었다.


2. 바다의 디아스포라, 보트피플: 한국에 들어온 2차 베트남난민(1977~1993) 연구

1977년 9월 15일 부산시 재송동에 마련된 베트남난민보호소가 개소하자마자 처음으로 입소한 베트남난민은 1989년 8월 16일을 마지막으로 13년 동안 36차례에 걸쳐 1,382명(출생자 66명 포함)에 달했다. 이는 13년간 매년 평균 106명이 넘는 베트남난민이 부산에서 임시보호를 받았음을, 1차례 들어온 규모는 평균 38명이 약간 넘었음을 뜻한다. 바로 1977년부터 1989년까지 해상에서 구조되어 한국에 들어왔던 난민, 통상 선상난민(Boat People)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들을 1975년 남베트남의 패망 바로 전후를 배경으로 발생했던 1차베트남난민과 구별하여 2차베트남난민이라 부른다. 2차베트남난민은 사망자2명을 제외하고 모두 제3국에 정착했다. 1977년 9월 23일을 시작으로 1993년 5월 17일까지 17년간 1,380명의 베트남난민이 140차례에 걸쳐 부산을 떠났다. 이는 매년 평균 81명이 넘는 난민이, 1차례에 9명 정도가 재정착을 위해 15개국으로 향했음을 의미한다.
베트남 선상난민의 참상이나 교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17년간 1,382명의 2차베트남난민이 국내에 유입되어 부산의 난민보호소에서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7년 가까이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나, 통계가 보여주는 연도별 입출소와 재정착지 관련 통계 또한 한국에서의 베트남난민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라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베트남난민보호소에 입소하게 된 이들이 어떻게 한국의 해항도시에 들어오며 그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 어디에 재정착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연구 성과는 단 하나도 없다. 게다가 베트남난민보호소 운영 책임을 맡고 있던 부산시의 자료 중 많은 부분이 문서보존기간이 지나 폐기되었으며, 베트남난민 구호업무를 담당한 대한적십자사 부산지부가 생산한 관련 문건 또한 사라져 버렸다.
본 논문은 남아있는 베트남난민 관련 부산시 기록관 자료와 1977년부터 1993년까지의 신문자료를 대조・보완하여 베트남⟶남중국해⟶동중국해⟶한국⟶서구로의 선상난민의 행로를 자료가 허용하는 한 세밀하게 복원하고자 했다. 특히 3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 번째 측면은 2차베트남난민이 구조된 시점과 지점부터 입항하는 해항도시와 부산 베트남난민보호소 입소까지이다. 두 번째는 이들이 언제 어디로 재정착하며 재정착을 결정지은 요인들은 무엇인지이다. 세 번째 측면은 한국의 해항도시에 들어오고 나간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한국 밖의 환경과 맥락이다. 이 세 가지 측면은 합하여 우리 안에 들어온 베트남난민의 모습을 다각적으로 드러내고 그 변화상과 함의를 이해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를 위해 본문은 1983년을 기준으로 두개 장으로 나뉘어 각각의 측면을 분석했다. 1983년은 13년간의 2차베트남난민 유입사의 중간 지점일 뿐만 아니라 앞 표에서 보이듯이 이전에 들어온 난민이 모두 해소되었으며 새로 유입되어 보호받던 인원도 가장 적었던 해이다. 보다 중요하게는 1983년은 1987년에 이르면 명백해지는 새로운 형태의 선상난민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문은 13년 동안 우리의 7개 해항도시로 들어와 부산베트남난민보호소에 머물렀던 베트남난민 1,382명의 여로를 추적해 보았다. 이들에 대해 UNHCR이 체제 비용은 물론 관계국과의 교섭・제3국 재정착을 책임졌던 반면, 한국은 베트남난민에 대해 제3국 송출시까지 임시 보호라는 비교적 한정된 기능을 담당했다. 게다가 베트남난민을 수용했던 부산의 보호소는 전형적인 ‘닫힌 캠프’로 베트남난민의 한국사회와의 상호작용은 최소화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베트남난민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관여는 소극적이었으며, 직접 교류의 양상도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난민을 맞이하면서 한국 사회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새로운 변화를 경험했다. 이 중에서 인도주의와 냉전은 2차베트남난민과 관련하여 한국을 변화시킨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3. 한국문학의 베트남 선상난민 형상화와 존재양태

본 논문은 베트남난민이 한국문학에서 어떻게 표상되었는가라는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선상난민(boat people)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베트남난민은 1975년부터 20여 년간 전 세계적 이슈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도 그 존재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1975년부터 18년 동안 3,000여명의 베트남난민이 한국에 들어왔으며 그 중 500여명은 우리사회에 정착했다. 해상에서의 난민의 구조와 부산 베트남난민보호소에서의 구호, 그리고 문화와 민족이 다른 이들의 수용 모두 우리사회가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다. 또한 베트남난민은 한국의 베트남전쟁에의 관여가 빚은 과거사, 그리고 남북분단 상황에서 공산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한국사회에 닥칠지도 모를 미래사와 연결되면서 우리사회에 복잡다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문학은 베트남난민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이런 현실을 마냥 비켜가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난민에 시선을 두고 그 존재를 드러낸 문학 작품은 많은 편이 아니다. 여기에 더하여 베트남난민을 다룬 한국문학의 전체상을 파악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한국문학이란 한국의 언어, 즉 글을 표현 수단으로 한 소설, 희곡, 영화 시나리오, 방송극 극본을 모두 포함한다. 이들은 모두 언어적 재현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 더하여 우리사회의 베트남난민에 대한 나름의 이해이자 해석이기에 그 형태를 불문하고 분석의 범주에 넣었다.
베트남난민을 소재로 한 한국문학 작품은(서두에 놓인 이혜선의 시 한 편을 제외하고) 6편 정도로 파악된다. 문학의 형태로 본다면 소설로는 『시간의 문』(이청준, 1982)과 「보트피플」(천금성, 1986), 영화 시나리오로는 「사랑 그리고 이별」(이희우, 1983), 「처녀 아리랑」(이종택, 1992), 희곡으로는 「제3의 신」(이청준, 1982), 방송극 극본으로는 「빨간 아오자이」(김혜린, 1992)가 있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 10년 동안 집중적으로 쓰인 이들 작품들은 형태가 다른 만큼이나, 사실 이 보다 더욱 더 다양한 시각과 수준에서 베트남난민을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난민 관련 문학작품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없는 상황에서 이들을 범주화하여 분석하기에는 곤란함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본 논문은 베트남난민을 형상화한 위 6편의 문학작품이 크게 관계로서의 베트남난민과 실존으로서의 베트남난민을 다루고 있다고 본다. 「사랑 그리고 이별」,「처녀 아리랑」 , 「빨간 아오자이」세 편의 작품을 통해서는 한국인과의 관계에서 베트남난민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이에 대한 분석이 2장의 내용을 구성한다. 반면『시간의 문』「보트피플」「제3의 신」에서는 한국사회와 직접적인 관계성은 없으나 실체와 실존적 존재로서의 베트남난민을 만날 수 있다. 이에 대한 분석은 3장의 내용을 구성한다. 본문을 통해 한국문학이 사건으로서의 베트남난민에 대해 어떤 관계와 존재를 재현해내는가라는 문제가 분명해 질 것이다. 또한 베트남난민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문학적 진실로 구현되는지도 드러날 것이다.
베트남난민을 형상화하고 있는 6편의 한국문학 작품은 관계와 존재의 차원에서 베트남난민에 접근하고 있음을 보았다. 전자는 한국 사회 적어도 한국인과의 관계 속에서 베트남난민의 초상을 반추하는 행위이며 후자는 실존적 존재로서의 베트남난민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난민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에 누락되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한 평가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베트남난민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이 성취한 성과이기도 하다. 문학이라는 공간에서 베트남난민에 관한 어떤 특정 흔적이 기억, 저장, 재구성되고 있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보다는 그 허구 쪽에서 오히려 더 깊게 개별자로서의 베트남난민과 대화를 하고 진실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English
1. A Study on the 1975 Vietnamese Refugees of Busan

Based on the Busan archive materials and newspaper information as well as published sources, this article intends to provide a comprehensive account of the 1975 Vietnamese refugees in Korea. The description and analysis are focused on the three aspects of the 1975 Vietnamese refugees in Korea; Korean government efforts to relief, settlement in Korea and resettlement in the third countries; the characteristics of the LST-refugees and Twin Dragon-refugees anchored at Busan; and interactions between the 1975 Vietnamese refugees and Korean society as a whole.
The article discovers that whereas the second Vietnamese refugees from 1977 to 1989 in Korea shared the common characteristic with "Boat People" in general, the 1975 Vietnamese refugees were very special because they were either overseas residents or Vietnamese having connections with Korean who had worked in Vietnam. It led the Korean government to rescue them by dispatching two LSTs, implemented settlement programs including job-finding, housing allowance, supplementary living allowance. Also, the article traces the origin of the 1975 Vietnamese refugees in the context of the deteriorating South Vietnam, Vietnam war and international politics, which would have revealed the symptom of the continuous flows of the Vietnamese refugees until the 1990s. Finally, the article highlights the way that this very first resettlement experience of the Vietnamese refugees with different culture transformed the Korean society.

2. Diaspora at Sea: Boat People in Korea (1977~1993)

This article is the study of the Vietnamese boat people in Korea from 1977 to 1993. Consulting primary sources housed in the Archives of Busan City and reading through various newspaper accounts, it illuminates the harsh journey of the Vietnamese boat people passing through the coast of Vietnam, the South China Sea, the East China Sea, and 7 seaport cities of Korea. Functioning as a de facto First Asylum, Korea government tried to assure the resettlement of the Vietnamese refugees in the western countries as well as provided provisional refugee camp in Busan for 1,382 Vietnamese refugees. Refugee policy and resettlement arrangement of Korea government are discussed in detail in the later part of the article.

3. A Study on Imagery and Figuration of the Vietnamese Boat People in Korean Literature

This study aims to find how Korean literature represents the Vietnamese refugees who have been known as Boat People. Among six literature dealing with Vietnamese refugee issues, "Love and Farewell", "Virgin Arirang", "Red Ao-dai" describe them in the context of relationship with Korean society and culture. Through conflict and reconciliation the Vietnamese refugees become assimilated into 'single people' society. However, these works just indifferent to the Vietnamese refugees without Korean family.
"Door of Time," "Boat People", and "Third God" figurate the Vietnamese refugee issues as the existence. These works is pursuing the literary truth about the Vietnamese refugees while questioning why and how did tragic plight happen. They also bring the light on the salvation and self-salvation. However, in these work, historical facts are not treated fairly because history without question is imposed on the existence and fate of the Vietnamese refugees.
Research result report
Abstract
『부산 베트남난민 18년사』는 ‘보트피플’(Boat People)로 더 잘 알려진 베트남 해상난민, 특정하게는 1975년부터 1993년까지 18년간 한국 사회에 들어와 일부는 정착하고 대다수는 재정착을 위해 제3국으로 떠난 2,800여명의 베트남난민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부산난민보호소에 수용되었던 베트남 해상난민에 대한 연구가 목적하고 있는 바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부산에 들어온 베트남난민에 대해 이해를 높이고자 한다. 종교, 직업, 계층적 특질을 포함하여 어떤 사회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한국에 입항했으며, 어떤 경유로 해상난민화 되고 구조되어 남지나해와 동지나해를 지나왔는지에서 시작하여 부산난민보호소에서의 이들의 일상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베트남 해상난민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했다.
둘째는 연구를 통해 우리 사회와 관련하여 베트남 해상난민이 남긴 일종의 유산이나 영향을 바로 인식할 수 있다. 사실상 정착한 베트남난민은 한국사회의 다문화화를 이끈 소리 없는 주역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사람에게 음식이든 명절이든 언어이든 혼혈의 문제이든 이문화와의 면대면 접촉은 바로 이 베트남난민을 통해 보다 실제적으로 체험되고 문학적으로 표상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 사회가 주로는 정치적으로 직접 베트남난민과 행해온 상호작용을 보다 분명히 성찰할 수 있다.
셋째는 베트남난민의 역사는 전세계적 규모의 베트남인/중국인 디아스포라 형성의 역사이기도 하다. 물론 부산의 난민보호소에 있던 베트남난민은 그 중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동북아시아만 보더라도 중국과 일본은 한국 보다 훨씬 더 많은 베트남난민을 수용하고 재정착시켰다. 부산의 베트남 해상난민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는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비교하는 틀을 제공할 수 있는 중요한 연구가 될 것이다.
이상의 연구 목적 하에서『부산 베트남난민 18년사』연구과제는 당초 2년간 연구할 내용을 1차년도와 2차년도 연구내용으로 구성했다. 1년차 연구는 대체로 당초 연구계획(I장 부분)의 목적, 방법, 내용에 기반 하여 충실히 수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연구를 구체화 시키는 과정에서 당초의 연구계획을 크게 수정한 부분이 있었다면, 1975년에 부산난민보호소에 들어온 1차 베트남난민과 1977년부터 1992년에 걸쳐 부산에 들어온 2차 베트남난민은 성격, 구조, 정착과 재정착 그리고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에서 각기 매우 다른 까닭에 두 개의 별도 논문, 즉 「부산입항 1975년 베트남난민과 한국사회」「바다의 디아스포라, 보프피플: 한국에 들어온 2차 베트남난민 (1977~1993) 연구」로 구성했다. 즉 당초의 연구계획에서 밝힌 1년차 연구의 가제목 “한국의 베트남난민 수용 그리고 베트남난민의 해상 표류와 구조 경로”는 1차 베트남난민 연구와 2차 베트남난민 연구로 세분화된 셈이다. 또한 당초 연구계획에서 밝힌 제목과 목차에도 일정한 변화가 있었다. 1차년도 연구의 결과에서 드러난 연구의 제목과 목차는 당초 연구계획에서 밝힌 연구의 목적과 내용을 반영하고 있는 데에는 변함이 없으며 당초 연구계획에서 밝힌 제목과 목차는 실제의 연구 내용으로 편입되었음은 물론이다. 연구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의 연구요약문과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
당초 연구계획에서 2차년도에는 부산 난민보호소에 수용되었던 베트남난민의 일상적, 사회적, 정치적 삶을 규명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본문을 3장으로 구성했다. 1장에서는 부산 난민보호소 난민의 사회적 계층 분석, 2장에서는 부산 난민보호소에서의 일상생활과 민족종교적 갈등, 그리고 3장에서는 베트남난민이 우리 사회에서 한 정치적 역할과 문화적 영향을 다루고자 했다.
2차년도 연구를 수행 과정에서 정치적인 영향은 물론 베트남난민으로 인해 생긴 문화적 영향력이 많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는 베트남난민 문제로 인해 한국 사회는 인도주의의 세례를 받았으며, 민족의 자긍심에 근간을 둔 민족주의를 강화시킬 수 있었다. 행동철학자 사르트르의 행동과 글을 통해 한국의 지식인들은 베트남난민을 마음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민족주의 또한 베트남난민 사태를 보면서 강화된 측면이 있다. 그 외에도 베트남난민을 통해 우리 사회는 베트남의 음식, 문화와 친숙하게 되었으며, 특히나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를 둔 혼혈아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베트남난민의 문화적 형상화에 천착하게 되면서 「한국문학의 베트남 선상난민 형상하와 존재양태」라는 논문을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전체 연구 주제인 『부산 베트남난민 18년사』에 수렴될 수 있도록 한국의 베트남난민 수용 사례를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그것들과 비교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1. 1차년도 (2013.5.1.~2014.2.28.) 연구결과

1.1 학술지 게제 및 논문 발표
(1) 「부산입항 1975년 베트남난민과 한국사회」, 『사총』(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81 (2014.01.30), pp. 329-364. [본 연구지원에 대한 사사표기]
(2) 「바다의 디아스포라, 보트피플: 한국에 들어온 2차베트남난민(1977~1993) 연구」, 『디아스포라연구』(세계한상문화연구단)제7권제2호(제14집) (2013.12.15), pp. 75-108.
(3) 월례발표회,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2013년 5월
(4) 연구분과세미나,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2013년 7월, 9월

1.2. 인력양성 실적
(1) 박사과정 중국인 학생 장학금 지원, Liang Yin Jing, 한국해양대학교 박사과정(행정학) [당초 연구계획서 상에는 연구보조원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음]

1.3. 지식확산 성과
(1) 교양서 발간:「베트남난민과 부산」,『부산의 재발견』(도서출판 선인, 2014년 5월)
(2) 시민을 위한 강좌:「부산의 베트남난민」(2014년 10월 시민강좌, 또따또까)
(3) 뉴스레터 기고: 「휴머니즘으로의 초대, 부산의 베트남난민」,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제연구소, 뉴스레터 (2014.02)

2. 2차년도 (2014.3.1.~2015.4.30.) 연구수행 결과

2.1. 학술지 게제 및 논문 발표
(1) 「한국문학의 베트남 선상난민 형상화와 존재양태」, 『해항도시문화교섭학』(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10 (2014.4.30), pp. 181-211.
(2) 월례발표회,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2014년 5월

2.2. 지식확산 사업
(1) 연구공간 수이제, 인문학 강좌, 「한국문학 속에서 읽는 부산의 베트남난민」(2014년 봄)

2. 활용방안

본 연구의 결과는 향후 연구의 시작점으로써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본 계획에 따라 부산난민보호소를 거쳐서 한국에 정착했거나 제3국에 재정착한 베트남난민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이후의 연구결과 활용의 방향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본 연구를 통해 확보한 내용과 한층 발전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국, 일본,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를 포함하여 동아시아에 기착한 베트남난민의 특징을 잡아내고 이들 국가와 그 시민이 베트남난민과 대면하는 방식을 연구하여, 궁극적으로 『동아시아와 베트남난민』(가제)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을 출판할 계획이다. 이렇듯 동아시아로까지 확대된 연구를 통해 난민의 아시아적 공조 프레임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봄으로써 학문・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보인다. 즉 냉전을 비롯한 국제환경의 변화, 난민 유출국과 유입국간의 적대감 약화, 아시아 연대와 공동체 의식의 강화, 다문화에 대한 인식 변화, 문제의식의 공유 등과 같은 난민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베트남난민 수용의 경험이 앞으로의 난민에 대한 아시아적 프레임워크를 만드는 데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를 밝히게 될 것이다.
본 연구결과의 두 번째 활용방안은 난민 연구의 확장에 있다. 본 연구의 대상은 베트남난민에 한정되었지만, 본 연구에 바탕을 두고 향후에는 아시아의 난민문제 특히나 해상난민에 대한 연구에 천착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197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로힝야난민, 우리 사회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진 북한난민이 포함된다. 항상적으로 해상에는 4천만명의 난민이 존재하고 있다고 추산되듯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국제사회의 여러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지중해 난민, 시리아 난민에 대한 보도가 연일 이어지듯이, 해상난민의 수는 상당하며 발생장소도 거의 전지구적이다. 그러나 향후의 연구는 이 중에서도 아시아에서 발생하는 해상난민에 초점이 있다. 아시아적 시각에서 주체적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그러하다. 아시아 난민 문제는 아시아가 다문화성과 공생을 위한 공명공간으로 발전하는 데에 새로운 창의적인 발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울러 특정하게는 북한난민 문제에 대해서도 좀 더 심도 깊은 논의와 방향성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Index terms
부산 베트남난민 보트피플 해상난민 1975 베트남난민 2차 베트남난민 한국문학 사랑 그리고 이별 빨간 아오자이 처녀 아리랑 시간의 문 제3의 신 상륙함 쌍용호 정착 재정착(이주) 부산난민보호소 인도주의 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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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Ranking : 인문학 (358,893) > 역사학 (66,663) > 역사일반 (10,156) > 기타역사일반 (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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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Achievements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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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rticles





Vietnamese Refugees and East Asia

International Institute of Maritime Affairs | 해항도시문화교섭학 pp.73~114 문학

Source research tasks : 부산 베트남난민 18년사








2. Articles





A Study on the 1975 Vietnamese Refugees of Busan

노영순 | The Institute for the Study of History | 史叢(사총) | (81호) | pp.329~364 | 2014-01-01 | 기타역사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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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Reports





(결과보고)부산 베트남난민 18년사


노영순 | 2015-10-29 | 기타역사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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