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29

도산 안창호가 이광수와 관계를 단절한 이유 - 정치/사회 게시판

도산 안창호가 이광수와 관계를 단절한 이유 - 정치/사회 게시판

도산 안창호가 이광수와 관계를 단절한 이유
[Lv.29]철수랑https://www.ahnsamo.kr/1274470
이광수의 친일행각에 관계 단절



안창호는 1929년에 만 51세가 되었다. 이 해 2월 9일 흥사단의 기본 정신을 미국 동지들에게 거듭 천명하였다. 흥사단이 마치 수양단체인 것처럼 연체화되고 있는 데 대한 우려에서 나온 조처였다.

<미국내 재류하는 동지 여러분께>란 메시지를 통해 “흥사단은 수양단체가 아니라 한국의 혁명을 중심으로 하여 투사의 자격을 양성코자 하는 혁명훈련 단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필리핀으로 건너갔다. 대한인국민회 지부 설치와 필리핀 총독을 만나 한인 이주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총독 면담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마닐라에서 중국인이 발행하는 <민초보>에 <한국혁명방략>을 기고하였다. ① 혁명총역량을 집중할 것. ② 계통 조직적 진행을 실시할 것. ③ 경제협동의 운영을 촉진할 것. ④ 청년훈련운동을 제창할 것. ⑤ 일반민중으로 하여금 혁명의 이해를 마음에 감소케 할 것. 이밖에 “최후로 허용할 혁명방략은 일본의 정치ㆍ경제ㆍ군사행동을 파괴하여 일본제국의 통치를 벗어나도록 극단의 수단까지라도 써 볼 것이다”라는 요지였다.(주석 11)

3월 말에 중국으로 귀환한 안창호는 이 해 11월 23일 수양동우회의 수양 자를 빼고 ‘동우회’로 개명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재양성을 위하여 조직한 흥사단의 국내지부적 성격을 띤 단체였다.

이광수가 1922년 2월 서울에서 조직한 수양동맹회와 같은 해 7월 평양에서 조직된 동우구락부가 안창호의 지시로 1926년 1월 합동하여 수양동우회로 결성되었다. 그런데 국내 조직에서 변화가 생겼다.

귀순한 이광수는 총독부의 묵인 또는 양해 아래 흥사단의 약정을 약간 변형하여 수양동우회를 조직하고, 또 <동광(東光)>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는 등 점점 친일의 노선을 걸고 있었다. 이와 관련 1926년부터 내부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자 안창호는 1927년 9월 흥사단 단우 주요한을 중국으로 불러 흥사단의 운동방향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흥사단운동은 조선의 독립이 달성될 때까지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흥사단과 수양동우회를 혁명단체로 변혁시키는 것은 자칫 와해될 위험이 있으므로, 두 조직은 부문운동을 전개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광수는 자신의 친일행각을 위장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안창호와 연계되는 것처럼 행세하였다. 1922년 국내에서 물의를 일으킨 <민족개조론>의 글머리 ‘변언(辯言)’에서는 자신이 추진하는 ‘민족개조’의 철학이 “재외동포 중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하여,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안창호의 뜻임을 내세워 자신의 글을 합리화시키려 들었다.

나는 많은 희망과 끓는 정성으로, 이 글을 조선민족의 장래가 어떠할까, 어찌하면 이 민족을 현재의 쇠퇴에서 건져 행복과 번영의 장래에 인도할까 하는 것을 형제와 자매에게 드립니다. 이 글의 내용인 민족개조의 사상과 계획은 재외동포 중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내 것과 일치하여 내 힘과 나의 일생의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외다.
나는 조선 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전하게 된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알며 이 귀한 사상을 생각한 위대한 두뇌와 공명한 여러 선배 동지에게 이 기회에 또 한번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주석 12)

독일의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자들 그리고 각국의 제국주의세력이 다윈의 <진화론> ‘적자생존설’을 왜곡하여 인종학살과 약소민족 침략의 구실로 삼았듯이, 이광수도 안창호의 ‘민족개조’와 ‘무실역행론’을 도용 왜곡하면서 자신의 친일변절을 합리화시키고자 하였다.

도산은 일제에 투항한 이광수를 아낀 나머지 그와 1922년 1월과 1923년 10월 두 번에 걸쳐 상해와 북경에서 밀회를 하고 국내에서 흥사단운동 전개에 관한 방략을 협의했다. 이광수가 허영숙을 따라 귀국한 것도 일제 당국의 공작 결과였으며, 그러한 그가 도산과 두 번이나 밀회한 것도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성실한 도산을 속여 아직도 민족적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 자신을 위장한 것이었다. 이광수는 수양동맹회를 결성할 때 이미 사전에 총독부 당국과 긴밀히 협의하고 그들의 협조를 얻고 있었음은 총독의 고문 아베(阿部)가 남긴 서한에 밝혀져 있다.  (주석 13)

안창호는 이광수의 친일행각이 드러나면서 자칫 자신이 이광수의 수양동우회를 지지하는 것 인양 오해될 소지를 우려하여 수양동우회의 ‘수양’ 자를 빼도록 조처한 것이다. 이것은 이광수와의 관계에 대한 단절을 의미했다.


주석
11>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도산 안창호의 생애>, 253쪽.
12> 이광수, <개벽> 1922년 5월호.
13> 송건호, <안창호>, <한국현대인물사론>, 231쪽, 한길사. 1984.

- 글 :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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