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2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박상휘 지음

(17)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 | Facebook

<조선의 풍속은 협루(狹陋)하여 기휘(忌諱)하는 것이 많다. 문명의 교화는 오래되었으나 도리어 풍류문아(風流文雅)는 일본 사람들보다 못하다. 그런데도 가진 게 없으면서 스스로 잘난 체 하여 다른 나라를 업신여기니, 나는 이를 매우 슬퍼한다. 원현천이 "일본에는 총명하고 영수(英秀)한 사람이 많아 진정을 토로하고 심금을 비춰 보인다. 서문과 필담도 모두 귀히 여길 만하고 버릴 수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랑캐라고 여겨 무시하고 언뜻 보고 나무라며 헐뜯기를 좋아한다"라고 한 말이 참으로 옳은 말이다.> - 이덕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야만으로 여겨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거의 마음에 두지 않는데, 이는 매우 두려워할 일이다.무릇 일본 땅이 수천리에 이르니,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
나는 일찍이 삼가 사행(使行)에 동행하여 시(詩)를 수창(酬唱)하였을 때 먼 곳의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할까 봐 엉성하고 경솔한 말로서 시를 쓸 수가 없었다. 저들이 우리를 대접할 때 겉으로는 공손하지만 속으로는 깊이 관찰하고 있었다. 우리가 돌아갈 때에 우리의 글에 대해 좋고 나쁨과 장단점을 평론하고 책으로 엮어서 국중(國中)에 유포한다. 나 같은 못난이로서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까 정말로 두렵다. 지금 생각해보니 진땀이 나지 않을 수 없다.>
- 1682년 통신사 사행에 참여한 홍세태의 글.
=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박상휘 지음) 중에서
崔吉城 and 2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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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에 올려놔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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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히 들어본 얘기들이로군요. 다른 구절들도 궁금하야 당장 구입해야겠습니다. 창비가 웬일이래요? 토착왜구 반열에 올라서고 싶은 건가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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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박상휘 (지은이)창비2018-10-01

 미리보기 전자책으로 미리 읽기
정가 25,000원
판매가 22,500원 (10%, 2,500원 할인)
전자책 17,500원 

444쪽153*224mm635gISBN : 9788936482862

책소개

조선후기에 일본에 대한 지식이 축적.확대되는 과정 및 일본과의 접촉.소통이 조선 문인들의 지적 세계에 어떤 변화를 끼쳤는지 살펴본다. 1590년부터 1763년 사이에 일본에 다녀온 조선 사절들의 기록 및 조선 국내의 일본 관련 자료를 통시적으로 검토하여 일본에 대해 어떠한 지식이 추가되고 수정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실증한다. 정치, 경제, 기술, 문자, 문학, 문화의 여섯 영역을 통해 일본에 대한 지식의 확대가 조선 문인들에게 어떠한 사고의 변화를 초래했는지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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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머리에

서론
1. 이 책의 과제 / 2. 이 책의 내용과 구성 / 3. 선행연구의 문제점과 이 책의 특징

제1장 삶과 죽음
1. ‘호생오사’와 ‘낙사오생’ / 2. 죽음이 일상화된 사회 / 3. ‘경생’에서 ‘호생’으로

제2장 원한
1. 토요또미 히데요시를 원망하는 일본인 / 2. 과거를 뉘우치는 일본인 / 3. ‘구세복수’와 ‘와신상담’

제3장 제도
1. 병농분리 사회를 관찰하다 / 2. 양민과 양병 / 3. 신분제에 대한 인식

제4장 통치법
1. 어떻게 평화가 유지되는가? / 2. 세습되지 않는 관직 / 3. 구임제와 세습제

제5장 사치와 번영
1. 풍요로운 사회 / 2. 검소한 생활 / 3. 나가사끼에 대한 관심과 조선의 해외통상론

제6장 기술
1. ‘천하일’과 일본의 기술문화 / 2. 건축과 도량형 / 3. 조선술

제7장 문자생활
1. ‘카나(仮名)’와 일본식 한자 / 2. 한자와 한문의 사용 / 3. 훈독법과 한문직독법

제8장 문풍
1. 한시 수창을 둘러싼 갈등 / 2. 오규우 소라이 숭배와 일본의 문운 / 3. 타끼 카꾸다이와의 만남

제9장 교류
1. 계미년의 문학교류 / 2. 교감과 유대의식 / 3. ‘동문세계’에의 꿈

제10장 문화와 풍속
1. 신불숭배 / 2. 유풍에 대한 평가 / 3. 일본의 유교화와 동아시아의 평화

결론 위화감과 대화하며 공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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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정유재란 때 포로가 되어 1597년부터 1600년까지 일본에서 억류생활을 하던 강항은 일본의 무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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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상휘 (지은이) 

토오쿄오 외국어대학에서 학사를, 토오쿄오 대학에서 석사를 마친 후, 서울대학교에서 통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국 중산대학(中山大學) 국제번역학원 특빙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로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조선후기 비왜론의 전개양상」, 「무사사회의 도덕규범: 조선 사절이 본 일본인의 도덕의식」 등이 있다.

최근작 :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2 (큰글자도서)>,<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1 (큰글자도서)>,<18세기 통신사 필담 1> … 총 6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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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조선 문인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일본 무사사회의 파노라마

호감과 반감, 동질성과 이질성이 교차하는
조선 문인들의 에도(江戸)시대 견문기를 통해
평화적 공존의 역사적 기원을 찾는다                 

우리에게 일본은 무엇이었나? 영원한 이웃 일본과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작업은 언제나 이 질문에서 시작하게 마련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한다’(맹자·주자)고 여기던 조선 문인들은 ‘호전적’이며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무사의 나라, 에도시대 일본과 마주해 이곳을 살아가는 이들의 눈빛과 표정, 몸짓·태도에서 무엇을 읽어냈을까?
이 책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는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부터 1764년까지 170여년간의 일본 견문기 35종을 바탕으로 조선의 일본에 대한 인식 변화를 추적해 조일관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저자 박상휘는 문학교류에 치중해온 기존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딛고 이념·제도·풍습·종교·문화·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일본사회를 이루는 총체적 기반을 당대 조선의 눈을 빌려 탐험한다. 전란을 겪으며 적대와 혐오, 반감을 품고 시작한 교류는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애를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서 서서히 이해와 공감의 장으로 들어선다. 조선 문인들은 한편으로 경탄하고 한편으로 경계하는 가운데 문명세계의 일원으로서 이웃 사회와 함께 살아가기를 꿈꾼다. 이 책은 ‘우월한 유교문명의 전파자’ 조선 대 ‘선진문물의 수용자’인 낙후한 일본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이해와 교류의 상대로서 조선과 일본을 발견하도록 독자를 이끈다.
재일교포 3세로 일본과 한국에서 수학하고 현재 중국 중산(中山)대학에 몸담으며 동아시아인들의 교류상을 연구해온 저자는, 정밀한 통찰력으로 170여년에 걸친 시대의 기록을 솜씨 있게 엮어 일방적 전파가 아닌 상호 교감과 교류의 파노라마를 그려냈다.


글 읽는 선비와 세가지 칼을 찬 무사,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세계의 만남

조선과 일본은 얼마나 다른 나라인가? 임진왜란이 있기까지 조선은 200년간 단일한 통치이념 아래 전쟁 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400년 가까이 크고 작은 내전을 거치며 만인이 만인을 경계하는 전국(戰國)시대를 살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인식에서 정반대의 관점을 낳았다(제1장 삶과 죽음). 또한 조선과 일본은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제3장 제도, 제4장 통치법)부터 생활태도와 풍속(제5장 사치와 번영, 제6장 기술, 제10장 문화와 풍속), 교육과 학습방식(제7장 문자생활, 제8장 문풍) 등 거의 모든 방면에서 상반되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근본적이고 상징적인 차이는 생명관에 나타난다. 정유재란 때 포로가 되어 1597년부터 3년간 일본에서 억류생활을 한 강항(姜沆)은 일본 무사에게 묻는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나 만물이나 같은 법인데, 일본 사람들은 어째서 죽음을 즐기고 삶을 싫어하는가?’(27면) 조선이 예와 도를 중시하는 선비–사대부의 사회였다면 일본은 죽음으로써 의를 실천하는 무사사회였다. 남자들은 상대를 죽이거나 방어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자결할 목적으로 항시 대·중·소 세가지 칼을 차고 다녔으며(28면), 싸워 얻은 흉터는 명예고 피하다 얻은 흉터는 치욕이었다(92면). 가족간에도 경계심을 풀지 않아 부자·형제도 칼을 차고 만나며, 공격당할까 두려워 잔치가 있어도 취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았다(41면). 섬기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의(義)의 근본이라는 이런 생각은 한편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로 이어져 잔혹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조선 사절이 가장 혐오한 것은 할복과 시검(試劍, 시체를 대상으로 칼날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사람다움의 근본으로 보는 유교의 관점에서 이런 일본의 풍속은 차마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천하에 일본 사람 같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200년간 평화를 유지해온 막부사회의 비결을 배우다

이토록 다른 사회를 조선 사절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조선 사절들은 일본을 부정적으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일본이라는 거대한 이질적 공간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댄 교류가 이어지자 자연스러운 감정적 유대가 생겨난 것이다. 위화감과 반감의 한편에서 싹튼 이런 정서적 공감은 일본사회에 대한 객관적 이해의 바탕이 되었고, 일본의 발전상에 비추어 조선을 성찰하게 되면서 조선 개혁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선에게 일본은 기본적으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존재(55면), 집단적 적개심의 대상이었다. 동성혼(同姓婚)과 이성양자(異姓養子), 신불숭배처럼 미개한 풍습에 천리(天理) 없는 정치를 펴는 나라였다. 극히 일부 승려와 관료 외에는 장관도 글을 아는 사람이 없고, 사대부의 나라 조선과 달리 무사 우선, 양병(養兵)이 국가운영의 기본인 사회였다. 관료는 실력에 따라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세습되었다. 천황은 이름뿐, 실권은 쇼오군이 쥐고 지방정치는 쇼오군의 위임을 받은 다이묘오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사치하기를 좋아해 비천한 사람도 힘이 있으면 한도 없이 화려하게 꾸미고, 지기를 싫어해 늘 남과 경쟁했다(154면). 그런데 이런 나라가 어떻게 200년 가까이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면서 날로 부강해지는가? 조선 사절들은 그 원인을 오랜 세월 다각도로 탐색하면서 조선의 번영에 도움이 될 점을 찾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 배움이 생겨났다.
우선 제도적으로는 군사와 농민을 분리 운영함으로써 항시 군사동원이 가능한 점, 주요 관직은 선발하여 종신토록, 심지어 대를 이어 맡김으로써 업무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높인 점, 실권을 장악한 쇼오군이 참근교대(參勤交代) 등을 통해 다이묘오를 적절히 관리하는 점, 신분제가 깊이 뿌리내려 “비록 세상을 뒤덮는 용기와 만고에 떨칠 재주가 있어도 또한 상업·공업·농업에 뜻을 굽히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조금도 분수에 넘치는 일을 바라는 마음이 없”는(122면) 점 등이 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근간임을 사절들은 통찰했다.
또한 분수를 지켜 생업에 성실하고, 절제하며 살아가는 일반 백성들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사찰과 신사, 다이묘오의 저택 등은 화려하고 사치스럽기 이를 데 없지만 그 한편에서 근면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일반 백성들이 일본 경제를 떠받치는 또다른 축임을 짚어냈던 것이다. “일찍 일어나서 늦게 자며, 열심히 자기의 힘으로 먹고산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마도 천하에 일본 사람 같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원중거, 161면). 한편, 식습관과 관련해서는 조선 사람이 하루에 먹는 양이 일본 사람의 3일치에 해당한다거나(159면) 일본의 보통 사람은 하루에 두끼를 먹는데 한끼에 밥 두어홉에 반찬도 두어가지에 불과해(157면) 조선 사람보다 식사가 훨씬 간소하고 대체로 소식한다는 기록이 여러군데 보여 흥미롭다. 물자가 풍부한데도 생활을 절제하는 민중이 국력을 밑받침하고 있다는 사절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능숙한 대외무역과 탄탄한 기술력,
조선의 개혁론자들을 자극한 일본의 경제발전

평화와 안정을 바탕으로 전개된 대외무역과 이를 통해 축적된 부, 장인을 존중하는 사회분위기에 힘입어 발전을 거듭한 17, 18세기 일본의 기술력은 무엇보다 사절들이 주목한 면이다. 16세기부터 일본은 활발한 대외무역을 벌였고 그 중심에는 무역항 나가사끼가 있었다. 세계 35개국과 교역하던 아란타(네덜란드)와의 무역을 통해 일본이 일찍이 선진문물을 수용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8세기 초부터 조선 사절들은 나가사끼 무역에 주목했고 1763년의 계미통신사는 일본이 중국과 직접 무역함으로써 중개무역으로 얻던 조선의 이익이 급감했음을 뚜렷이 인식하게 된다. 국제경제의 일원으로서 조선의 위치를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조선 후기 유몽인, 안정복, 이덕무 등을 거쳐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서 해외통상론으로 이어진다. “일본이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해 바다 가운데에서 세력을 떨치는 까닭은 능히 외국과 교통하기 때문”이며(170면) “우리나라는 산천이 좁고 막혀 있으며 땅에서 나오는 산물이 많지 않은데다 다른 나라와 재화를 통하지 않”아서(169면) 경제발전을 이루지 못한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이런 논의가 조선에서 힘을 얻어 실질적 조치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나라의 부와 함께 정교하고 탄탄한 기술력은 국민의 일상생활을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바탕이었다. 일찍이 조선 기술자를 데려가 선진기술을 배워야 했던 낙후한 일본은 17세기에 이르면 조선 사절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설비와 기술을 보유하게 된다. 조선 사절들은 일본의 성곽·수차·사찰·민가 등을 상세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수차(水車)였다. 17세기 초 이래 강에서 “물을 끌어올려 바로 부엌으로” 대주고 성 전체에 물을 공급하는 수차의 구조를 자세히 묘사하며 그 규모와 효율성에 감탄하는 기록이 거듭 보인다(181~83면). 전국적으로 도량형이 통일되어 민가의 집 “칸의 크기가 한자 한치도 다르지 않”고 “길가의 여러 집들이 먹줄을 친 듯이 바르게 늘어서 있”으며 “병풍과 자리(다다미)를 설사 다른 집에 옮겨놓더라도 조금도 들어맞지 않음이 없”는 점 또한 주목한 부분이다(187면).
무엇보다 괄목상대하게 발전한 것은 조선술이었다. 임진왜란의 해전에서 승리한 이래 조선은 자국 배의 견고함을 자랑하여 조선술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1655년까지 조선에서는 일본 배가 “정교하고 화려하지만 견고하기는 우리나라 배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193면)라는 인식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런 인식은 18세기에 들어 역전된다. 1748년의 사행원 홍경해는 일본 배가 “만약 병기를 싣는다면 어느 곳에 나아가든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전함의 훈련은 (…) 이것과 비교하면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195면)라고 기록했으며 조선술에서 네덜란드–중국–일본–조선 순이라는 평가를 수용하고 있다. 100년이 못 되어 기술력의 순위가 뒤바뀐 것이다. 조선 사절들은 자국 방어 차원에서 이런 상황에 크게 위기의식을 느꼈다. 원중거는 『화국지(和國志)』 「주즙(舟楫)」에서 배의 크기와 구조부터 국가가 배를 운용하는 제도, 설계의 정밀함, 기술인력에 대한 치밀한 관리 등을 기록하며 조선의 기술을 발전시키자고 주장했고, 조선 후기 이용후생론자들 또한 공통적으로 조선술에 관심을 가졌다. 일본의 높은 기술력이 조선의 개혁론자들에게 자국을 성찰도록 자극했던 것이다.


‘우리는 같은 문(文)을 공유하고 있다’
문화적 유대와 동아시아 평화공존의 꿈

일본의 발전과 부강이 조선에 자국을 성찰하는 계기로 작동했다면 일본을 같은 문화권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평화공존의 꿈을 꾸게 한 것은 일본의 유교화였다. 1603년에 들어선 토꾸가와막부는 유교를 장려했고 각지에 학교를 세워 일본 전역에서 배움에 힘쓰는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그 나라의 풍속이 원래 글을 배우지 않아 위로 천황부터 아래로 서민까지 한 사람도 문자를 아는 자가 없다”(강홍중, 216면)라는 것이 17세기 초까지의 인식이었으나, 1682년 사행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야만으로 여겨 (…) 거의 마음을 두지 않는데, 이는 매우 두려워할 일이다” “우리가 돌아갈 때에 우리의 글에 대해 좋고 나쁨과 장단점을 평론하고 책으로 엮어 국중에 유포한다. 나 같은 못난이로서는 (…) 진땀이 나지 않을 수 없다”(홍세태, 219면)라는 토로가 보인다. 불과 100년도 안되어 일본은 4, 5세 어린아이가 붓을 잡고 10여세 아이가 시를 지으며 여자들도 당시(唐詩)를 쓰는 “해중문명의 고을”(219면)이라는 평을 듣게까지 되는 것이다.
조선 사절이 왔다 하면 구름처럼 몰려들어 정성으로 시문을 구하고 글씨 한자, 말 한마디를 얻으면 소중하게 간직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에 사절들은 감동했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일본 유학은 기대감을 품게 했다. 특히 1763년의 계미통신사 일행은 일본 고문사학(古文辭學)을 계승해 사절들과 ‘성인의 도’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인 타끼 카꾸다이(瀧鶴臺)를 높이 평가했다. 그의 풍부한 학식과 온화하고 겸손한 사람됨에 깊은 인상을 받은 사절들은 논쟁의 내용과 함께 타끼 카꾸다이의 이름을 조선에 전했고, 이를 통해 조선 지식인들은 일본에 뛰어난 문인들이 등장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과 ‘문(文)을 같이하고 있다’는 의식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의식은 일본의 학문을 비웃고 폄하하던 자세를 반성하는 계기로 작용했으며, 나아가 조선 지식인들은 “일본에 문을 같이하고 마음을 같이하고 도를 공유하는 세계가 실현되기를”(307면) 꿈꾸게 되었다. 일본이 ‘인(仁)’을 근본으로 삼는 유교국가가 되었으면 하는 이런 바람은 양국의 현실적 이해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저들이 만약 인의를 알고 염치를 알아 옛것을 기뻐하고 지금을 돌이킨다면 이는 단지 그 나라의 다행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중국이 침략당할 우환이 더욱 없어”지리라(342면) 여겼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방적이고 중화중심주의적 한계가 엿보일지라도 이는 긴 세월의 반목과 대립을 넘어 어렵사리 이해와 공감에 도달한 조선의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최대치의 희망, 평화공존의 꿈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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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스타일이라 다소 딱딱한 맛이 있고 반복적인 내용이 있지만 조선 선비가 일본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한 내용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무력에 의한 평화, (조선문인이 보기에는)불합리한 구조에서 오는 번영, 그런 부분을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500miles 2018-12-28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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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우리의 선조들이 살펴본 일본인의 민족적 DNA의 근원을 찾아서... 새창으로 보기 구매
추천 권유도 8

작품은 400년 전부터 100여 년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사절들이 어떻게 일본 사회를

관찰했고, 일본의 식자층과 어떤 교류를 했는지 또 그들의 사회상을 통해 무엇을 감지했는지를

조선 사절단(?)의 시각으로 탐구 정리한 내용으로

첫째는 일본의 어느 부분에 대해 위화감을 느꼈고, 그 위화감이 어디에서 유래를 했는지

둘째는 일본의 어떤 점에 긍정적인 인식을 보였는지

셋째는 일본에서 배우고 실용화할 만한 것과 조선 후기에 사회개혁을 주장한 지식인들의 담론을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탐구하는

넷째는 양국 문인들 사이에 어떠한 갈등이 있었는지

다섯째 문자를 통한 인간적 교류가 조선 문인들의 정신세계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켰는지

(위의 시각은 저자의 시각으로 그대로 옮겨 보았다....작품을 읽고 느끼는 사람들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저자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고찰한 내용으로 많은 일본 관찰기를 짧은 작품으로 축약하다 보니 부분적으로 미진한 부분도

있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개인적으로는 일본인의 특질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한 작품이 아니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분명한 것은 아직까지도 서로 마주 앉아 뭔가를 논하기가 껄끄러운 이웃인 일본, 일본인에

대하여 선조들이 남긴 기록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껄끄러움이 언제부터 왜 생겼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여러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당시 일본이 시행하고 있던 관직의 ’구임제‘ 및 ’세습제‘를 비롯한 ’장인 우대정책‘이 심도깊게

논의되던 시기에 우리 선조들은 ’주자학‘과 ’파당 싸움‘으로 날을 세우고 있었다는 생각에 미치자 부끄러움은 둘째치고 그들의 정책적 혜안에 부러운 생각만 들었다.

특히, ’장인 우대정책‘의 경우 오늘날 기술 일본의 토대를 마련해 준 단초를 보는듯하였다.


오늘의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르고‘,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면을 보이고있는 전형적인

이류국가의 특성을 보이고 있는데, 작품을 읽다보니 그런 특징이 어제오늘 갑자기 생긴 특질이

아니라 수백년 전부터 그들 민족성에 내재되어 있던 DNA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문풍(文風)‘에 언급된 내용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된 사행원들은 가는 곳마다 글과 시문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수많은

일본인들을 연일 대하다보니 피로가 누적되어 사절단 고유의 업무를 추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다른 업무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 추후 이런 일만 전문으로 대응하는 ’제술관‘이라는 직책이 만들어졌을 정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행원들은 어렵게 자신들을 찾아와 시문을 간청하는 사람들에게 헛걸음을

시키고 싶지 않아 전심을 다해 대응하지만 짧은기간에 많은 양의 시문을 전하다 보니 일본인

그들에게 전해주는 일부 내용이 부실했다고 한다.

당시 사행원으로 갔었던 ’홍세태‘라는 분은

’필답집이 금세 간행되는 일본을 보면서 자신이 남긴 글이 누군가에게 비평받을 가능성을 생각

한다면 진땀이 난다‘

고 토로했지만 물리적으로 이를 막지 못했다고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일부 질이 떨어지는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사행원들의 이런 고충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던 일본의 식자층들은 관대하지 않았고 자신들

위상을 높이려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식자층 중 대표격인 ’오규우 소라이‘와 제자들은

사행원들과 주고받은 시문집을 한데 엮어 ‘문사기상’(問槎畸賞)을 간행하는데, 그의 제자 중

‘타나카 토오꼬오’라는 인물이 서문에 조선 사절단을 이렇게 언급하였다.


“지리소(支離疎)의 턱은 배꼽에 묻히고 상투는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애타타(哀駝它)는

추한 얼굴로 천하를 놀라게 한다”

‘지리소’란 불구를 ‘애타타’는 추남을, 문사(問槎)는 조선통신사를 기상(畸賞)은 기이한 글을

감상한다“(P 249)“

 

전체적인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 굳이 다른 설명은 하지 않겠다.

나는 위의 구절을 몇 번씩 읽으면서 일본인의 특질이라는 것이 어제오늘에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고래로부터 민족적 DNA에 내재되어 있는 부류들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그런 잡스런 인간들의 수준 낮은 혈기방장함에 일희

일비하지 말고 과거 일본을 다녀와 따스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려 했던 선조들의 마음으로

일본의 오늘을 알기 위해 우리 선조들이 기록하신 본 작품을 읽으며 따스한 눈길과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려 한다.

어쨌든 여기에 부분별로 정리해 보았다.

 

[삶과 죽음]

 

1) 정유재란 당시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억류 생활을 했던 ‘강항’에 의해 관찰된 일본인은

    ‘낙사오생(樂死惡生)’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인식하였으며 당시 조선이 ‘주희’의 생명관에 영향

   받은 ‘호생오사(好生惡死)’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부류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항상 세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며 긴 칼은 남을 죽이는데, 중간 것은 방어하는데, 작은

   것은 자살용으로 지니고 다녔다.(P 28)

2) 조선 문인들이 일본인을 묘사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이 ‘경생(輕生)’이다.

   이 말은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인을 묘사하는 상투적인 형용사가 되었다.(P 33)

   전국시대 일본에서 ‘삶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무사의 정체성이었다. 일본의 군기소설인

   ‘태평기’에는 ‘무사의 도는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이름을 중시하는 것을 의로 삼는다’라는 말도

   보인다.(P 31)

3) 야마모또 조오초오의 ‘하가꾸레’에서는 ‘무사도란 죽음을 깨닫는 것이다.

   생과 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죽음을 선택하면 된다 즉, 자신이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언제나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한다.(P 32)

4) 명나라 문인 ‘제갈원성’이 쓴 ‘양조평양록’에서 ‘일본인들은 흉악하고 교활하여 신의가 없고

   성질이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삶을 가볍게 여기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한다’라고 했다.(P 34)

5) 어려서부터 권력자의 집에 붙어 밥을 얻어먹기 때문에 부모와 가족에 대한 기본적인 정이

   없이 자라서 가족에 대한 유대 의식의 결여가 삶에 대한 집착의 결여로 이어지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P 38)

6) 전국시대에는 ‘과감하게 죽는 것을 칭송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구적(仇敵)을 죽이고 자결한 사람에 대해 참다운 대장부’라고 감탄하면서 애석히 여기지

   않았고 그 자손에게 ’너는 과감하게 죽은 사람의 후손이다‘라고 하여 지위 높은 사람과 혼인

   할 수 있게 하였다.(P 39)

7) 1600년대에 명절인 단오에 수 천 명의 남자들이 한 곳에 모여 두 조로 나뉘어 서로 싸우기도

   하고 평소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 복수를 행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 행사를 보며 일본의 국속

   (國俗)은 사람을 잘 죽이는 자를 대담하고 용감하다고 생각한다고 보았다. 이런 현상은 부부간,

   부자간, 형제간에도 적용이 되어 가족이라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P40)

8) 1617년 일본에 다녀온 이경직은 ’눈 한번 흘긴 것도 반드시 보복하고, 말 한마디에도 시기를

    부려 사람 죽이는 것을 능사로 삼고, 굽히지 않는 것을 장기로 여긴다‘라고 했다.(P 42)

9) 조선 문사들이 가장 큰 혐오감을 느낀 대상은 ’타메시기리‘와 ’할복‘이다.

   ‘타메시기리’란 칼이 얼마나 잘 드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체를 시험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P43)


[원 한]

 

1) 임진왜란 170년 후,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의 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수괴이자 역수’ 로  

   불리우는 등 당시 나라를 멸망시킨 그에 대한 원망이 일본인의 의식에 남아 있는 한 같은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으나 일본이 대륙침략의 길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토꾸가와 막부가 붕괴하고 메이지 정부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이다.(P 55~57)

 

2) 1596년 ‘코니시키 유끼나가’의 신하 ‘요시라’의 증언을 보면 히데요시가 일본에서 얼마나 원망

   을 사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고(P 59), 조헌의 ‘항의신편’을 엮은 안방준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일본의 민간에서는 ‘히데요시는 조선에는 일시의 적이나 일본에서

   는 만세의 적’이라는 이야기를 있다고 하였다.(P 61)

3) 1603년 에도막부를 개창한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재개하기 위한 국서에

   ‘평적(平賊)’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이는 히데요시를 얕잡아서 하는 말이다.(P 62)

4) 에도시대의 지식인들은 대체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정당한 행동으로 보지 않았다.(P 67)

   ‘코오자이 시게스께’라는 병법학자도 히데요시를 전쟁만 일삼는 포악한 군주로 보고 있었다.

   명분없이 조선을 침략하여 전쟁을 반복했기 때문에 결국 토요토미 일가 전체가 멸망했다는

   것은 당시 일본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P 69)

   * 토요토미가 죽은 후 쿄오또에 토요꾸니신사가 세워졌고 인근에 조선에서 가져온 조선인의

     귀를 매장한 ‘미미즈까’가 있다고 한다.

5) 어지러움이 히데요시 시대에 극에 달하여 사람들은 모두 ’염고징창(厭苦懲創)‘의 뜻이 있었다.

   ‘염고징창’의 ‘염고’는 싫어하고 괴롭게 여긴다는 뜻이고, ‘징창’은 뉘우치고 교훈을 삼는다는

   뜻이다.(P79)

 

[제 도]

 

1) 조선 문인들이 남긴 일본 견문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일본의 정치제도 및 사회

   구조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강항의 경우 ‘적중봉소’라는 상소문에서는 일본의 지리, 경제,

   정치제도를 상술하면서 수많은 조선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P 85)

2) 전통적으로 조선은 ‘병농일치제’였으니 일본의 경우 기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은

   병사가 되고, 우둔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농민이 되는 ‘병농분리제’였다.(P 86)

   --->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군사제도를 개혁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이런

          관찰 보고서가 나왔다.

3) 국가의 근간이 백성에게 있는 이상 국가운영의 목적은 ‘양민’에 있다는 것이 조선 사대부들

    기본적 정치관이다. ‘양병’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사회구조는 조선 사대부의 정치

    이념에 위배되는 것이었다.(P 97)

4) 토꾸가와 정권은 조선통신사를 ‘조공사절’로 위장하면서 일본 전국에 막부의 권위를 과시했고

    (P100), 혈기 왕성하고 적개심 충만한 매서운 무사들을 수하로 거느린 다이묘들을 통합하고

   정권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토꾸가와막부의 과제였다.(P102)

5) 백성은 병, 농, 공, 상, 승이 있는데, 오직 중과 공족(귀족)에만 문자를 해독하는 자가 있고

   그 나머지는 비록 장관의 무리라도 한 글자도 알지 못했다.(P105)

6) 일본은 과거로 인재를 뽑는 법이 없고 벼슬은 대소에 상관없이 모두 세습이어서 세습으로

   자리를 잡은 사람에 대해 제대로 실무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보았다.(P107)

7)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가 종료되며 봉건제가 자취를 감추었는데 일본이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타 국가와 전쟁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 세습제가 오래 유지되어

   사회에 정착한 결과 사람들이 그에 반감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P110)

 

[통 치 법]

 

1) 도꾸가와막부는 정치적인 불안요소가 두가지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히데요시 시대의 충성스런 부하들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둘째는 천황을 받들어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국가를 만들기를 원했다.(P 127)

2) 전통적으로 조선 사대부들은 신분제가 정착한 상태를 이상적인 사회로 보았으나 자기실현의

    욕구나 분수를 넘어 기존 계층질서를 거스르려는 욕심을 가지지 않는 일본인의 심성이

    토꾸가와체제를 밑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P 125)

3) 교묘한 법술로 다이묘오를 통치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막부의 붕괴를 예상하고 있다.

    다른 이유가 아닌 ‘심복’ 여부에 달린 것으로 보았다.

    즉, 표면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서로 의구심을 품고

    상대의 동향을 엿보는 그들의 모습을 본 것이다.(P 129)

4) 일본은 보직의 세습제를 보편적인 제도로 알았지만 중요 자리인 ‘로오주우’, ‘경도소사대’,

    ‘대판성대’ 등과 같은 주요 보직은 선별하여 등용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정치제도 중 조선의

    관심을 끈 것은 ‘구임제(久任制, 직책을 오래 맡기는 제도)’였는데, 이 제도에 대한 건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P 132)

 

[사치와 번영]

 

1) 사행원들이 묘사하는 풍요로운 일본은 과장된 부분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선 사절들은

   당시의 일본을 풍조가 오염된 나라로 보았다.(P 147)

2) 막부가 각지의 번주들에게 다이묘오 야시끼(무사들의 주거지)에서 마음대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우둔하게 만들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P 149)

3) 도꾸가와 막부의 재정은 다이묘오가 세금을 거두는 곳 외에 따로 직할지에서 세금을 거두어

    풍족하게 했고(P 151), 막부는 광산지역을 직할지로 하여 관리를 파견해 직접 지배(P 152)

    했는데 비록 왜황이라도 감히 간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사를 맡은 관료들이 각기 영지를 부여받아 그 영지에서 걷는 세금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울 조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P 152)

4) 일본인들의 식사량은 적었으며 무사계급에 속한 사람들도 평소 두끼 밖에 먹지 않았다고

    한 반면, 당시 조선인들은 하루에 먹는 식량으로 그들의 3일분 식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P 159)

5) 조선이 일본의 해외무역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인 것은 18세기 들어서로 그 때까지 조선은

    중국과 일본간의 중개무역을 통해 이익을 거두었다. 16세기부터 일본은 해외무역을 활발히

    전개해 나가사끼를 비롯한 3개 지역의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그 이익이 감소한 반면 반대로

    일본은 풍요로운 삶을 구가했다고 한다.(P 163~169)      


[기 술]

 

1) 에도 시대에 일본을 다녀온 조선 사절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일본의 기술로서

    ‘일본 서기’를 보아도 일본 기술 가운데 상당수가 한반도에 기원을 갖고 있다.(P 175)      

    일본은 예부터 외국에서 숙련 기술자를 불러 일본 국내에 정착(P 177)시킨 반면, 조선은

    표류하면 그곳에서 배를 새로 만들어 돌려보냈는데, 여기에 도착하면 모두 부수어 그 법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다.(P 201)

2) 일찍이 일본에서는 뛰어난 솜씨를 가진 장인에게 ‘천하일(天下一)’의 칭호를 부여하면서

    기술을 장려했다고 하며, 비록 그의 기술이 자기보다 꼭 낫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를 찾아가서 스승으로 모신다.(P 180)

3) 사행록을 보면 일본 백성들이 사는 일반 가옥의 구조에 관심이 많았고 민가를 관찰한 경험의

    축적은 이용후생을 주장한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 도량형의 통일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P 187)

 

[문자 생활]

 

1) ‘문자’란 한자를 말하고 ‘초량의 통사’란 쓰시마의 통역을 말하는데, 중요한 사항은 한문 필담

   으로 처리하고 사소한 일은 통역을 통했는데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15세기 경에는 사절들은 구어에 의한 소통보다는 한문에 의한 소통을 선호했다.(P 205)

2) 왜인 중에서 글에 능하다는 사람도 단지 언문을 사용할 뿐 문자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했으며 오직 ‘승려’ 무리만 경서를 읽고 한자를 안다.(P 207)

3) 17세기 전반에 기록된 사행록에서 사행원들의 소통은 대개 승려가 담당했는데, 이는 중국에

   다녀온 승려들이 불교 경전을 비롯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면서 활발한 문화활동을

   전개한 결과이다.(P 213)

4) 임진왜란 때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수많은 서적과 더불어 활자인쇄에 필요한 자재와 기술을

   가져갔으며, 조선에서 가겨간 인쇄술을 토대로 많은 책이 간행되었다.(P 217)

   이 결과 일본인들은 조선 사행원들이 남긴 시와 필담집을 한 달 이내에 출판했다.(P 219)

5) 사행원들에게 가장 곤란한 것은 시도때도 찾아와 글과 시문의 평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를 대응하기 위해 ‘제술관’이라는 직책을 만들었을 정도라고 한다.(P 221)  

6) 일본은 과거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문사들에게는 영달의 길이 아예 차단되어 있었다.

   아무리 독서와 글쓰기에 힘써도 비참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조선통신사와의

   시문교류는 자신의 이름을 일본 전국에 떨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P 223)


[문 풍]

 

1) 에도시대에는 승려에 한정되었던 한문능통자가 급증, 한문으로 글을 쓰고 경서를 읽고 중국

    고전에 소양을 쌓은 지식인들이 일본에서 나타나기 시작.(P 247)

    일본의 문풍을 선도한 인물이 ‘오규오 소라이’와 ‘아라이 하꾸세이’이다.(P 248)

2) 1711년 오류오 소라이와 그의 제자들이 조선 사행원들과 주고받은 수창시를 모아 ‘문사기상’

    (問槎畸賞)이라는 문집을 발간하는데, 소라이 제자 ‘타나까 토오꼬오’가 서문 중에

 

“지리소(支離疎)의 턱은 배꼽에 묻히고 상투는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애타타(哀駝它)는 추한

 얼굴로 천하를 놀라게 한다”는 문구가 있는데,

‘지리소’란 불구를 ‘애타타’는 추남을, 문사(問槎)는 조선통신사를 기상(畸賞)은 기이한 글을 감상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P 249)

---> 조선 사절의 시를 혹평하고 자기 학파 문인들의 시를 극찬하는 것이 소라이학파 문인들의

      특징이었다.(P 252) 그들은 당시 조선 선비들이 사문난적으로 폄하하는 반주자학적 풍조를

      이끌고 있었다.(P 260)

3) 조일 양국의 문인 등이 나눈 필담 자료를 보면 주자학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조선 사절과

    주자학을 비판하는 일본 문인 사이에서 이루어진 논쟁이 도처에 기록되어 있다.(P 262)


[교 류]

  

1) 서동문(書同文)이라는 말은 조선이 중국과 문자를 공유하면서 ‘중화’의 문물을 수용했음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동문이라는 말에는 중화중심주의적 함의가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동문 의식’이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위계적 세계관을 전제로 성립된 관념.(P 278)

2) 조선 사절이 일본에 파견된 이래 가장 활발한 문학교류가 이루어진 것이 계미통신사 때로

    사행록에 많이 언급된 네 명의 문인이 ‘키무러 켄까도오’, ‘카메이 난메이’, ‘나와 로도오’,

    ‘지꾸조오 다이뗀’이다.(P 279)

3) 일본이 소라이 숭배자들을 향해 주자학의 정당성을 타이른 ‘원중거(조선 사절)’를 당연시

    했듯이, 왕세정과 이반룡의 고문사학에 경도한 소라이를 ‘해동부자’로 숭배하는 일본인의

    모습은 조선 사대부의 입장에서는 ‘가소럽게 여겼다.(P 297)  

 

[문화와 풍속]

 

1) 유교를 신봉하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불교를 믿거나 신도식 의식을 치르는 등 유교적 의례가

    하나도 없는 일본을 미개한 것으로 인식했다.(P 312)

2) 일본인의 종교생활을 묘사하는 데서 가장 중요시한 것은 신도이다.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의

    토착신앙과 연결되면서 일본인의 종교적 신앙심 위에 군림함을 확인했다.(P 317)

3)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까의 만남은 일본에 주자학이 유입되는 큰 계기가 된다.(P321)

4) 풍속 가운데 조선 사절들이 가장 혐오한 것이 ’동성혼(同姓婚)‘과 ’이성양자(異姓養子)‘

    제도였다.(P 329)

5) 일본을 유교화를 위해서 조선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이익‘이다.(P 338)

    일본은 동아시아의 유교세계에 포섭하는 것은 최선의 비왜책이었다.(P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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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일본에 관한 재미난 상식]

1) 저팬(japan)의 어원은 ’치팡구(Cipangu)’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등장한 최초의 외국어 표기다.

2) 한중일 삼국에서 ‘일본’이 통칭된 것은 8세기 초로 이전에는 달랐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왜(倭)다. '왜'에서 '일본'으로 국명이 바뀐 것이다.

   ‘왜’라는 이름은 ‘난쟁이’, ‘단구’라는 의미로 일본인들도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3)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 측천무후가 일본 사절에게 ‘일본’으로 개명을 지시하여

   그 때부터 일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중국 역사서 ‘사기정의(史記正義)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 황제까지 로비를 통해 설득시켜 국명까지 바꾼 나라다. 독도를 자기 것으로 우기는데는 

   다 이유가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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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2019-03-16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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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박상휘 지음, 창비

​1. 조선통신사는 일본서 무엇을 보았나 - ‘조선=문명’ ‘일본=야만’ 이분법은 없었다

[책]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박상휘 지음, 창비

일본 견문기 35종 집중 분석 - 초기에는 대일 우월의식 드러내 - 할복자살·근친결혼 등에 혐오감
첩보전과 같은 필담 대화 - 상대국에 대한 정보수집 뜨거워 - “일본의 과학발전 배워야” 조언도
유교평화론에 갇힌 조선 - 일본 무력증대 제대로 파악 못해 - 2018년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나

그 이론적 모색의 뿌리가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민주평화론’은,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는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다’는 팩트를 내세우며 민주국가들로 이뤄진 세계의 항구적인 평화를 꿈꾼다

시공을 초월해 이론은, 전쟁에서건 평화에서건 성공에 필요한 방략을 제시한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문인 일각에서는, ‘민주평화론’을 패러디해 일종의 ‘유교평화론’라고 부를 수 있는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다.

신도와 불교를 믿는 일본이 유교화되면 조선과 일본이, 나아가 중국이 포함된 동북아 전체가 평화를 구가할 수 있다는 것. ‘유교평화론’은 탁상이 아니라 현장에서 탄생했다. 조선통신사 사절단이 ‘유교평화론’의 주창자였다.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는 통신사 일원들이 남긴 일본 견문기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부터 1764년까지 170여년간 집필된 견문기 35종을 주요 1차 자료로 삼았다. 이 견문기 35종은 비교 문화론, 비교 정치학의 보고다.

재일교포 3세인 저자 박상휘 박사는 일본 도쿄외국어대와 도쿄대를 거친 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조선통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국 중산(中山)대 국제번역학원 특빙연구원이다.

이 책은 우선, 조선을 일본에 선진 유교문명을 한 수 가르쳐준 ‘시혜(施惠)’의 주체로 보는 시각을 탈피하려는 시도다. 물론 유교라는 기준으로 보면 조선은 문명, 일본은 야만이었다. 적어도 통신사 파견 초기에는 시혜의 측면이 강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의 권력 엘리트는 대부분 문맹이었다. 승려들만 글을 알았다

조선통신사와 일본 문인들이 나고야에서 필담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이 그림은 나고야 명소를 소개하기 위해 18세기 일본에서 출판된 서적에 실렸다. 필담은 우리 사절단의 주요 업무였다. 필담은 즉시 일본에서 출간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 중앙포토]

통신사가 목도한 일본은 ‘공자 왈 맹자 왈’하는 사대부가 아니라 허리에 칼을 찬 무인들이 지배하는 야만적인 사회였다. 모든 면에서 조선과 거꾸로였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호생오사(好生惡死)라는 유교 문명, 아니 모든 문명의 보편적인 대전제를 거슬러, 일본은 오히려 목숨보다 죽음을 더 숭상하는 낙사오생(樂死惡生), 인명 경시 풍조가 만연한 나라였다.

통신사는 특히 할복이나 칼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시체를 시험 삼아 베어보는 시검(試劍)을 목격하거나 전해 듣고 경악했다. 극심한 할복자살의 경우 자신의 배를 가른 다음 손으로 내장을 끄집어내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또 일본의 근친결혼 풍습, 성 풍속도 혐오스러웠다.

일본은 미스터리였다. "천하에 백성을 학대하고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는 조선 사대부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흔드는 나라가 일본이었다.

만남이 계속되면서 조선 문인들의 시각은 변하기 시작했다. 시각의 진화에는 일본 자체의 긍정적인 변화가 한몫했다. ‘왜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왜노(倭奴) 가운데도 착한 사람이 있다’라는 인식이 싹텄다. 통신사 파견을 계기로 양국에서 글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진정한 우의를 나누었다.

​의견대립으로 갈등도 있었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우리 속담처럼 양국 문인들 간에 감정적 유대의식이 깊어졌다. 헤어질 때 뭉클했다. 눈물을 삼켰다. 헤어짐에 도를 넘어 비통해하는 일본 측 인사는 알고 보니 백제의 후예였다는 기록도 있다.

양국 대표들은 필담으로 글솜씨를 겨루었다. 우리측 통역의 일본어 실력이 신통치 않아 소통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문인에게 우리 사절단과 필담을 나누는 것은 ‘가문의 영광’, 유명해지는 지름길이었다. 필담 기록은 우리 사절단이 일본에 머무는 기간에 출간됐다.

필담은 일종의 치열한 첩보전, 정보 수집 전쟁의 현장이기도 했다. 조선 문인은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 가능성은 없는지 궁금했고(귀국 후 통신사 정사는 이 문제를 조선 국왕에게 보고해야 했다), 일본 문인은 조선이 일본에 보복하지는 않을지 궁금했다.

​“조선국이 보복을 도모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식이 일본 내에 퍼져 있었다. 조선 문인들은 일본 사람들이 전쟁을 반복했던 과거를 뉘우치고 있다고 귀국 후 견문기에 남겼다.

‘일본은 언제 어떻게 한국을 앞서가기 시작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힌트를 주는 책이다. 갈수록 통신사가 접한 일본은 발전을 거듭했다. 조선의 일본 방문객들은 일본 사찰이나 권력자들 집의 화려함, 시장의 화려함에 대해 유교적 관점에서 ‘사치는 망국의 지름길이다’라는 식으로 무시하려고 했다.

​한편 일본 일반 백성, 서민의 소식(小食)을 비롯한 검약한 의식주에 대해서는 우리 사절단도 칭찬했다. 유교의 가르침과 일치했기 때문. 당시 일본인의 식사는 조선인의 2분의 1, 3분의 1에 불과했다고 우리 사절들이 기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의 문물(文物)에서 물(物)뿐만 아니라 문(文)의 발전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일본 도시의 융성함이 중국 도시에 버금간다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상당수 우리 실학자들 사이에 일본에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싹텄다. 조선 개혁안에 일본 사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통신사 초기에는 일본 승려들만 한문을 쓸 줄 알았다. 점차 일본에 한문을 구사하는 독립적인 유교 전문가 집단이 형성됐다. 통신사 초기에는 우리 사절단 일원과 필담을 나누는 것만도 일본 유교 집단에서 행세할 기회였다. 점차 우리 사절단과 대등하게 시문을 논하고 심지어는 우리측 대표들의 필력을 무시하기까지 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일본을 방문한 조선 문인들의 ‘유교평화론’은 결국 순진한 희망 사항으로 판명 났다. 일본은 결국 임진왜란의 전철을 밟아 대륙침략에 나섰다. 상당수 조선 문인들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무장평화(armed peace)’를 일본의 유교화에서 비롯된 평화로 착각했다. 국제정세가 바뀌자 ‘유교평화론’은 휴짓조각이 됐다.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는 ‘조선은 일본을 제대로 보았는가’를 묻는다. 우리 조상들이 물론 우리가 주자학 선진국이라는 관점에서 일본을 한 수 아래로 봤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보기에도 놀라운 객관성으로 일본을 파헤쳤다.

우리 조상은, 일본 병역 제도, 표준화된 도량형, 정밀한 기계 도구와 일용품 생산, 조선술의 발전,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기술자를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 다다미의 정교함 등에 대해 일본의 장점을 인지하고 칭찬하는 데 절대 인색하지 않았다.

후손인 우리는 일본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2017년 700만을 돌파한 방일 한국인은 일본을 과연 객관적으로 살피고 있는가. 앞으로도 역사는 준엄하게 물을 것이다.

유교라는 렌즈는 일본의 많은 부분을 놓치게 하였다. 물론 유교에도 보편성·객관성이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는 민주주의나 시장경제라는 현재로써는 상당한 보편성·객관성을 확보한 시각으로 한일관계를 보려고 한다. 그것으로 충분할까.
[출처] : 김환영 지식전문기자< 조선통신사는 일본서 무엇을 보았나> 중앙 Sunday, 604호







2. 에도시대의 일본은 왜 임진왜란을 수없이 사과했나




조선통신사의 日 견문기 35권 분석-"도요토미는 일본의 敵이었다"며 막부시대에 수차례 조선에 사과




10일부터 제주에서 열리는 관함식에 일본 해군이 욱일승천기를 앞세우고 참가하는 문제를 두고 우리 해군과 갈등을 빚은 끝에 불참을 통보했다. 두 나라는 위안부 동원과 조선인 강제징용 문제에서도 식민 지배의 음영을 쉽사리 걷어내지 못하고 있다.



재일교포 3세 학자로, 한·일 양국을 오가며 공부했고 현재 중국 중산대에서 동아시아 교류사를 연구하는 저자는 두 나라 관계 개선의 해답을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화해 노력에서 찾는다.



1590년부터 1764년까지 170여 년간 일본에 다녀온 조선 선비들이 남긴 견문기 35종 기록을 통해 저자는 조선 선비들의 대일(對日) 인식이 극적으로 변화했음을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양국 지식인들이 기울인 노력도 이 책에 담았다.

처음에는 적개심이 화해하려는 마음을 눌렀고 동질성보다는 차이가 두드러졌다.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가 3년간 억류됐던 강항이 그들의 야만적인 사생관(死生觀)을 질타한 것이 대표적이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好生惡死]이 사람이나 물(物)이나 같은 마음인데, 일본인들이 죽음을 좋아하고 삶을 싫어하는 것[樂死惡生]은 어쩐 일인가?" (강항 '간양록')



하지만 교류가 거듭되며 조선 선비들은 일본인들이 꼭꼭 숨겨 놓은 삶에 대한 애착을 읽어냈고, 유교적 인(仁)을 함께 이룰 이웃으로 그들을 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믿지 못해 칼을 차고 마주 앉는 것도,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만큼 취하지 않도록 술을 절제하는 것도 생명을 아끼기 때문임을 간파했다.



사무라이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것은 충성을 쌀과 바꿔야 하기 때문이었고, 전사할 때 칼을 얼굴로 맞는 것은 도망가다가 등으로 맞았다간 남은 가족이 생활고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에도(현재의 도쿄)거리를 가득 메운 일본인들이 조선통신사 일행의 방문을 환영하고 있다. /일본 고베시립박물관




1760년 방일한 선비 원중거가 접한 일본은 강항이 알던 그 일본이 아니었다. 에도(江戶) 막부는 유학(儒學)을 장려했고, 무사라 해도 공공장소에서 칼 뽑는 것을 금지했다. 일본인들은 통신사 행차를 축하하는 대포 소리에 놀라 귀를 막고 흩어질 만큼 유약해졌다.

일본은 임진왜란의 과오도 기회 있을 때마다 사과했다. 18세기 일본 문인 나와 로도는 조선통신사와 대화하는 자리에서 "히데요시 정권은 조선보다 일본에 더 큰 해를 끼쳤으니 어찌 조선의 원수에 그치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선 선비들의 대응은 '용서하되 잊지는 않는다'였다. 원중거는 '화국지'에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부대 편성, 전쟁에 참여한 장수 이름과 직책, 각 부대가 살육한 조선인 수 등을 세밀하게 기록하고서 "내가 반드시 이것을 기록하려고 한 이유는 곧 그것을 잊지 않고자 한 것" 이라고 썼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복수하려는건가" 라고 물으면 "일본에 대해선 은혜만 있고 원망은 없다" 며 양국의 화해를 역설했다. 통신사들이 조선으로 돌아갈 때면 일본 문사들이 마중 나와 석별의 눈물을 뿌렸다.

'일본에서 배우자'는 움직임도 일었다. 강항은 농민과 사무라이를 분리해 군사력을 키운 일본처럼 조선도 병농(兵農)을 분리해 직업군인을 양성하고 오랜 기간 복무하는 구임(久任)제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조선의 순환보직제가 지방관의 착취를 조장한다며 일본처럼 한 직책을 오래 맡게 하거나 종신제를 도입해 책임행정을 구현하자는 주장도 제기됐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일본이 부유하고 군사력이 강해진 것은 능히 외국과 교통하기 때문" 이라며 일본을 본받아 통상에 나서야 한다고 썼다. 저자는 이런 제안들이 실현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지적했다.

책을 읽으며 역사의 반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성 여름 전투에서 도쿠가와의 동군(東軍)에 패퇴한 도요토미 세력은 절치부심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메이지 유신을 일으켜 막부를 무너뜨렸다.

사쓰마(현재의 가고시마)와 조슈(야마구치), 두 번(藩)이 주축이 된 메이지 정부는 끝내 조선을 집어삼키고 그간의 화해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지금도 일본 정치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아베 총리도 야마구치 출신이다. 일본의 욱일승천을 외치는 그들에게 에도 시대의 화해정신을 배우라고 권하고 싶다.
[출처] :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 <에도새대의 일본은 왜 임진왜란을 수없이 사과했나>/조선일보​
2018.10.6.



[출처] [서평]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박상휘 지음, 창비] |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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