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1

Young Koh 매일신보 1927년 5월 1일자에 실린 내 할아버지 고일청 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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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Koh
18 hrs ·매일신보 1927년 5월 1일자에 실린 내 할아버지 고일청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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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 인생의 중간쯤 되는 지점. 미국 프린스턴에서 일본 공사와 만나 안전을 보장받고 귀국했으나 귀국 즉시 체포, 고문으로 왼쪽어깨가 탈구되어 남은 인생 내내 왼쪽 어깨를 제대로 못 썼다. 그러니까, 저 인터뷰를 저렇게 웃으면서 했지만 한쪽 어깨가 망가져 있는 상태. 아마 아직 제대로 회복되기 전이 아닐까 싶다. 인생이라는 게 참으로 흥미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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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언문과'의 주체는 이극로 선생이다. 이극로, 김준연, 고일청 이 세 사람은 '유덕고려학우회'의 이름으로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진재 때 일어난 조선인학살사건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한다. 구미유학생 독립운동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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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운동 당시에 상해 가정부(임시정부)에서 일을 보다가 그 후 곧 구미로 건너가서 처음에 불국으로 독일로 미국으로 유학하다가 9년(20년 가을쯤에 임정을 떠났으니 햇수로는 7년, 만으로는 6년이 맞다) 만에 많은 지식을 얻어가지고 정든 고국 산천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된 의주 사는 고일청 씨를 그의 경성 우거로 방문하야 그의 감상담을 들은즉 대개 자기가 독일 백림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대학교수들 중에 조선언문에 대하야 크게 연구하는 이가 있어 세계상 문자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칭찬하며 필경 동양 전체에 사용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하며 백림대학 안에 조선언문과를 두어 독일대학생으로서 연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며 그리고 독일사람의 근검하고 활동적인 정신은 우리 조선사람의 본뜰만한 것이 많지만은 그 가정경제의 처리하는 방법 같은 것은 구미에 제일이요, 나의 생각에는 될 수 있는 데까지 우리 조선가정도 그같이 개량하야만 될 줄로 믿는 바이라고 하며 기자가 고씨에게 오늘 조선에 대한 방침을 물은즉 씨는 웃으며 대답하기를 현하 조선은 이민과 식산이 급무로 생각하는 바 현 조선사람의 환경을 변하기 전에는 구제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아 먼저 남양이나 남미 같은 부원이 가득한 천지에 집단적으로 이주하여서 조선사람의 풍기를 개량하게 하고 또 생활이 풍족하여짐을 따라 저절로 본국 식료품 같은 것을 요구하게 될 수도 있으니 이때 본국과 무역관계를 맺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또 식산으로 말하면 잠업이 매우 필요하고도 적당하니 농산국인 조선이 쌀만 가지고는 도저히 치부할 수 없을 것이요 생사를 많이 제출하지 못하면 치부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그 실례로 미국에 수출되는 일본 생사를 말하며 씨도 장차 실업계에 헌신하기로 굳게 결심하얐노라고 하더라"


134You, Park Yuha, 김희숙 and 131 others

33 comments

Hyung R Lee

거의 100년 전의 민족 비전이네요. 우와~

Young Koh

Hyung R Lee 그게 참 쉽지 않은 일이었나봐요.


Yona Kim

어머나 이런 역사를 간직한 분이 조부님이시라니 그 얘기가 더 궁금해지네요~^^*

Young Koh replied ·1 reply


김혜경

와~

Junekyu Sol

조부님을 닮으셨군요.

Young Koh

Junekyu Sol 하지만 이야기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요. ㅎㅎ

MeeWha Lee

소름이 돋았어요. 이리 멀리 보실수있는분이계셨으니. 나라만 말아먹지않고 버텼었으면...우리나라 정말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데...

MeeWha Lee

백림대학에 유학하던 한국양반님들.이모할아버지 사진중에... 맨뒷줄 네번째분과 닮았어요 ^^




Young Koh

MeeWha Lee 1922년이면 시기적으로는 맞네요. 생김새도 어딘가 비슷하고요. 근데 키가 좀 안 맞습니다. 키가 큰 편이라고 들었거든요. 어디에 걸터앉으신 건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사진 딋면에 인물 명단은 없나요? 옛날 사진들에는 간혹 그렇게 적어놓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MeeWha Lee

어디걸터 앉으셨을수도


MeeWha Lee

세상이좁지요. 새삼 예전 사진들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졌어요

Young Koh

MeeWha Lee 그러게요. 재미있네요. ㅎㅎ


MeeWha Lee

제가 가지고있는건 스켄이예요. 뒤에 있을수도 있겠네요.


Young Koh

큰 모니터에서 보니 정말 많이 닮은 것 같네요. 자세히 보니 맨 뒷줄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 올라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앞줄 사람들도 서 있는 것 같은데 차이가 많이 나는 거 보면요. 상태가 아주 좋은 사진이네요. 저희는 전쟁통에 대부분의 사진, 자료들을 다 잃어버렸다고 들었습니다.

MeeWha Lee

육촌이 가지고있으니 함 물어봐야겠어요. 많이 닮았죠? 종을 데리고 유학가셨던 이모할아버지. 그분의 백림대 동창들. 그리 많지않은 분들이 거기까지 가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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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Wha Lee

이름은 없다네요. 눈썰미가 좋은편인데 입술 , 눈 다 넘 닮았어요.귀까지 같은 사이즈예요.


Young Koh

MeeWha Lee 그러게요. 조금 크게 보니 많이 비슷합니다.


황은주

독일 백림대학은 어디를 말하나요?
지금도 그 대학에는 한국어학과가 있겠죠?
무역을 말씀하시다니 와~엄청 혜안이 있으셨네요


Young Koh

황은주 베를린대학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 대학에 원래 동아시아학과가 있고, 이극로 선생이 거기에서 중국경제사로 박사를 받았는데, 그후에 한국어과(혹은 강좌)를 개설하게 됩니다. 그 동아시아학과에 극동언어를 하는 교수들이 두엇 있었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


Enso Yilee

Young Koh 현재 베를린 훔볼트 대학(옛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에 한국어를 가르치던 이씨가 있단 얘기를 들었고, 저도 마침 베를린 자유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던 터라 그 이씨(이극로 선생)에 대해 알아가던 중, 이극로 선생니 저희 할아버지의 삼촌뻘 되시는 친척임을 알게되었네요. 한국가서 집안 어르신들께 일화도 좀 듣고, 족보자료도 좀 확인하고 싶었는데ㅠㅠ 이 코로나 ㅠㅠ Frank Hoffmann의 Berlin Koreans and Pictured Koreans 책 읽으면서 짧게나마 ㅠ 지적 허기를 달랬습니다. 너무 제가 관심 갖고 있던 부분 역사라서 놀라서 오지랖 넓게도 답글 달아봅니다 ㅎㅎ


Young Koh

Enso Yilee 아, 그 대학에서 일하셨군요. 조손이 독일의 한 학교에서 한 학교에서 가르친 신기한 인연이 됐네요. 역사란 게 이렇게 얽혀서 재미있죠. 그 프로그램이 계속 남아있다는 것도 반갑네요. Frank Hoffmann의 책은 저도 읽었습니다. 이극로 선생에 대해서는 소명출판사에서 이극로 전집이 나온 게 있습니다. 그 중 1권이 유럽 편입니다. 반갑습니다.^^


황은주

이은서 이극로선생이 할아버지뻘 된다는 사실을 아셨을때 얼마나 가슴 뛰고 더 알아가고 싶으셨을까 싶네요
저도 갑자기 두분의 조부들이 궁금해집니다


Stone Ho

샘 글에서 틀린 거 찾았어요~ㅎㅎ 인용문 19째줄에서 “이민과 식균이 급무로“ -> “이민과 식산이 급무로” (신문이 조금 접힌 채 스캔되어 글자가 좀 접힌 듯)


Young Koh

Stone Ho 감사합니다. ^^


Stone Ho

조부님께 들은 이야기들이 궁금하네요. ^^


Young Koh

들은 얘긴 없습니다. 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이희건

자랑스러운 조부님을 두셨네요. ^^


Young Koh

이희건 ㅎㅎ 이야기가 아직 안 끝났습니다. 예,좋은 분이었단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이경란

간간이 포스팅하신 내용과 관련지어 보면 행간이 더러 보이는데요. 수호자이신 누님과 어떻게 잘...^^




Young Koh

내년이나 내후년쯤 설명회를 한 번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ㅎ


이경란

Young Koh 긴장되시겠어요. ㅎㅎ 근데 누님한테 져드릴 것 같은 예감요. 원만한 타협 이루시길요.^^


Young Koh

이경란 ㅎㅎ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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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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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일청(高一淸, 일본식 이름: 高峰一淸, 1886년 1월 14일 ~ ?)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생애[편집]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이다. 경성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의 호세이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07년 안창호를 중심으로 결성된 신민회의 평안북도 용천 지부에서 감익룡김용규 등과 더불어 활동했다. 1912년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의주헌병대에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었다. 
1913년에 조선총독부 관리로 임용되어 평안북도에서 약 5년 동안 근무했다.
1919년 3.1운동 후 이유필조봉길 등 한인관리들과 동맹퇴직을 결의하고 상해로 탈출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위원, 법제위원, 청원위원장, 비서국장 등을 지냈다. 1919년 상해대한교민단의 전신인 상해고려교민친목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1920년에는 신채호박용만김창식 등과 함께 보합단에 참여,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1]
1923년에는 독일 베를린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3년 동안 공부하였고, 1926년부터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1929년에 귀국했다.
고일청은 귀국하여 고향인 의주로 돌아왔다. 의주의 지주이자 평북 삭천의 금광주로 많은 자본을 축적하는 한편 농업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방응모의 교동금광 매매를 주선하는 등 광산 브로커로도 활동한 바 있다.[2] 1933년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할 당시 총 8,725 주 중 2,100주를 인수한 후 조선일보사 이사에 취임하여 언론인으로 재직했고, 동시에 평안북도 도회의원과 의주금융조합 조합장, 송현수리조합 조합장 등을 지내며 이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당시 고일청에게는 "학식과 포부가 특출할 뿐 아니라, 인격과 수완 또한 평안북도 지방의 제일류"라는 평이 있었다.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3][4]
중추원 참의에 발탁된 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전쟁 지원에 앞장선 행적이 있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시작으로 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에서 핵심 역할을 맡아 가담했다.
광복 후인 1949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수사 대상이 되었으나, 반민특위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나 처벌은 받지 않았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 장남 : 고봉인(高鳳人)
  • 차남 : 고봉소(高鳳韶)
  • 삼남 : 고봉우(高鳳又)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각주[편집]

  1.  임중빈 (2003년 12월 15일). 《단재 신채호 일대기》. 살림. 234쪽쪽. ISBN 89-08-03207-X.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2.  전봉관 (2005년 1월 15일). 〈희대의 장사꾼 금광 브로커〉. 《황금광시대》. 서울: 살림. ISBN 89-522-0327-5.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3.  성강현 (2004년 3월 18일).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일요시사. 2008년 6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3월 6일에 확인함.
  4.  성강현 (2004년 3월 18일).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일요시사. 2008년 6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3월 6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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