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박영심의 증언 분석
글 진명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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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 박영심의 증언 분석글 진명행1. 박영심은 1921년 12월 15일생이다. 1945년 5월 미군의 쿤밍 포로심문 기록에는 당시 23세였다. 그런데 같은 기록에 등장하는 윤경애는 26세였다. 3살 차이가 난다.북한자료에 따르면, 윤경애는 1920년 8월 20일생이다. 박영심과 1살 차이가 나야 맞다. 둘 중 한명은 가공의 인물이다.2. 박영심의 증언에는 17세 되던 1938년 3월에 위안부로 연행이 되었고 한다. 그런데 쿤밍 포로심문서의 기록에는 1939년 8월에 조선을 떠났다고 되어있다.그렇다면 그 사이 박영심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니시노 류미꼬 著 『전장의 위안부-랍맹 전멸전에서 살아남은 박영심의 궤적』(이하 "전장")에 따르면, 박영심이 난징에 도착했을 당시 옷차림이 반팔셔츠를 입고 있었다고 했다. 1938년 3월에 난징에 도착했다면, 이 옷차림일 수가 없는 것이다.3. 박영심은 난징에 도착해 위안부가 된 후, 최초의 근무지가 「キンスイ楼」킨스이루(樓)라고 했다. 킨스이루는 발음상 近水樓、錦翠樓、金水樓에 가깝다. 그러나 당시 난징의 40여개 위안소 중에는 이런 비슷한 이름의 위안소는 없었다.킨스이루는 난징이 아니라, 버마의 미찌나(myitkyina)에 있던 금수루(金水樓)와 일치한다. 당시 버마 미찌나(myitkyina)에는 쿄에이(共栄)루, 킨스이(金水)루, 모모야(桃屋)루 등 4개의 위안소가 성업하고 있었다.4. 박영심은 1938년 난징에 도착하여 위안부가 되었고, 3년후인 1941년 버마로 끌려가서 위안부를 강요받았다고 증언했다. (2000년 도쿄 여성전범재판 비디오 증언) 그러나 1941년이면 일본이 버마를 점령하기 전이다. (1942년 3월 버마 수도 랑군 점령)5. 박영심은 1944년에 랍맹(중국명 송산)으로 12명의 위안부들과 함께 트럭으로 이동했다고 증언했다.(니시노 류미꼬著 『전장..』, 2000년 전범재판 증언)그러나 당시 랍맹수비대 113연대장이었던 마쓰이(松井秀治)의 회고록 『波乱回顧』에 따르면, 위안부 교환은 1943년 여름이 마지막이었다. 니시노 류미꼬는 이런 시점 불일치나 모순을 만회하기 위해 본인의 추측으로 증언을 정정하거나 첨가하는 등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6. 박영심은 포로가 된 후 수용소에서 태아가 사산되자 자궁 적출 수술도 하였다고 증언하였으나, 자궁적출 수술은 귀국후 북한에서 시행된 것으로 판명났다. (2002년 니시노 류미꼬의 박영심 2차 인터뷰) 또한 사진속 임산부의 수술은 수용소에서 한 것이 아니라, 중국 8군 야전병원에서 했다.7. 박영심의 그로테스크한 위안부 증언 예를 들어, 난징 위안소에서 동료 위안부가 임신 중에 있었는데 2명의 일본군이 폭행하고, 마당으로 끌고가 배를 가른 다음 태아를 끄집어내어 패대기쳐 죽였다는 둥, 일본군이 나눠준 고깃국이 알고보니 조선처녀의 인육으로 만든 국이었다는 등 막장으로 치달았으나, 이는 모두 거짓으로 본인이 인정하였다.(2002년 니시노 류미꼬의 2차 인터뷰)그런데 아직도 우리나라 언론들이나 학술지에서는 이것을 사실인냥 버젓이 기술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8. 실제로 박영심은 버마 어디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는지 정확하게 지명과 시기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니시노 류미꼬를 비롯, 한국의 정대협 관련자들이 역사적 사실들을 증언에 맞춰 장소와 시기를 추론하여 재술한 것을, 마치 박영심이 증언한 것처럼 소설을 써놨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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