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isang S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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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인에 뜨거운 토론이 오가고 있길래 작년에 쓴 글을 다시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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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있는 야드 바솀 박물관에는 놀랄만한 사진들이 있다. 나치 수용소의 유대인들이 몰래 빵을 굽는 사진, 함께 모여 하누카(유대교 축제일)를 기리는 사진, 입에 담배를 물고 미소 짓는 사진 등이다.
그 사진들은 비참하게 죽어간 유대인의 모습을 그려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가? 아니다. 그 사진들은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성을 유지하려 했던 증거다. 나치는 인종 학살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인간성 자체를 말살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진들을 보며 더 큰 슬픔과 비극을 느끼는 것이다. 이렇듯 때로는 중심 서사를 벗어나는 것이 과거의 현장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재작년에 출판된 ‘제국의 위안부’도 그런 책이다. 그 책에는 우리가 기억하는 위안부 서사와 다른 이야기가 실려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조선인은 국적상 일본인이었다. 그래서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본군에 붙잡힌 타국의 여성들과는 다른 역할을 수행했다. 성적 위안뿐 아니라 정신적 위안도 제공해야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병사들과의 유사 연애를 강요당했고 전투에 나서는 그들에게 응원과 지지를 보내야 했다. 부상병을 돌보며 치료했고 피 묻은 군복을 세탁해주어야 했다. 또한 죽은 병사의 무덤에 향을 피워 합장해야 했다. 그게 전쟁터의 조선인 위안부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그 역할이야말로 일제가 만든 위안부 제도의 본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책에는 조선인 위안부가 수행한 일을 애국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다. 거기서 ‘애국’은 몹시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되었다. 일제에 의해 동원된 애국이었다. 책의 저자가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바로 그 ‘애국’이 구조적 강제에 의한 피해라고 주장하기 위함이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위안부들이 전쟁 수행에 동원된 것을 가리켜 “애국 당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책에서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위안부들은 전쟁을 뒷바라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군업자들의 징벌은 가혹했고 거기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일본 이름을 쓰며 스스로 일본인처럼 행동해야 했던 것이다. 자, 이 이야기가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것인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위안부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한 정신적, 정서적 학대를 당했다는 증거다. 일제 파시즘은 성적 착취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애국을 강요하며 인간성 자체를 유린했다.
전쟁 뒷바라지에 동원된 위안부들의 이야기는 그 책에만 나오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자료집에도 생생하게 드러나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밝힌 ‘제국의 위안부’와 그 책의 저자인 박유하 교수는 법정에 서게 되었다. ‘애국 당한’ 위안부의 기억을 끄집어낸 것이 와전되어 “위안부를 일제에 충성한 애국자라고 했다”는 식으로 알려진 탓이다. 박유하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법원이 판단하겠지만, 재판에 묶인 탓에 그는 자신의 책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제대로 입을 열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최근 위안부 피해 보상 운동은 중대한 기점에 있다. 이 문제를 해외에 알려나가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에 마주친 것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자국 내에 위안부 소녀상과 평화비 세우는 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들은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에 속해 일본의 전쟁을 수행했다고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주에는 태국에서 처음으로 조선인 위안부 포로 명단이 발굴되었다. 기존의 위안부 인식으로는 왜 위안부들이 태국군에 포로로 잡혀 수용소로 보내진 것인지, 왜 성노예 피해자가 아닌 간호조무사로 기록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우리는 침략 당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향해 위안부들의 당시 처지를 이해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지금 박유하의 연구는 위안부에 가해진 전시 성폭력 연구만큼이나 중요하다. 그 연구는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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