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4

일제시대. 일본여자와 결혼한 조선남자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일제시대. 일본여자와 결혼한 조선남자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이정선, <동화와 배제-일제의 동화정책과 내선결혼>, 역사비평사, 2017

이 책은 일제 35년 각 시대별로 내선(일본과 조선) 통혼 양태와 일본 정부의 종족간 결혼정책 (제한, 장려, 방관)를 다루고 있다. 이중에서 조
선남 일본녀(일명 한남 스시녀) 커플에 대한 사연을 소개하련다.
먼저 일본남-조선녀 커플(일조커플)과 한국남-일본녀(조일커플) 중에 어느 경우가 더 많았을까? 상식이라면 제국주의 국가의 남자들이 식민
지 여자를 현지처로 삼거나, 사생아 낳고는 양육비도 안주고 본부인에게 돌아가거나, 기타 강간, 불륜, 매춘 등의 성착취를 한다. 한국여자가
미군남자하고 사귀다 임신하자 남자가 말도 없이 본국으로 도망가더라... 30-40년 전 문학작품의 뻔한 설정이었다. 일본제국과 식민지 조선의
남녀관계는 이런 상식을 배신한다. 조일커플이 일조커플보다 훨씬 많았다.
...도쿄 혼조구에 본부를 둔 상애회가 1928년에 내선결혼 소개부를 신설하자, "종래 내선결혼이라고 하면 거의 조선인 남자에게 내지인 여자가 시집가
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상애회에서는 선인여성으로 하여금 적극 내지인 남자에게 시집가게 하기 위해 힘쓴다"고 보도되었다. (pp 213-214)
내선결혼 통계 (p.345)
한국현대사
일제시대. 일본여자와 결혼한 조선남자 이야기
지킬박사
2019. 12. 9. 20:56
이웃추가
49 21
kmji98님의 블로그
조일커플의 수는 매년 천 건 이상이지만 일조커플은 200건 미만이었다.
이 책에 나온 조선남과 일본녀 커플의 사연은 이러하다.
최쇠돌은 1919년에 일본의 후지노 가문에 서양자로 입적 및 혼인하여 후지노 쇠돌로 개명하고 후지노 부인에게서 1924년까지 딸 셋을 낳았
다. 쇠돌은 조선으로 돌아와 1925년에 이모씨와 혼인신고를 하고 2년 후에 딸을 낳았다가 1927년에 후지노 가문에서 파양 및 이혼을 당했다.
쇠돌의 이중결혼과 4명의 딸에 대한 호적정리로 조일 당국은 골머리를 앓았다. 49 21
kmji98님의 블로그
내선결혼신고서 양식 - 김원철/야마카와 이와의 사례 (p112)
1926년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 성악부를 졸업한 김문보는 같은 학교 출신인 요시자와 나오코와 결혼했다. 나오코는 조선의 며느리로 살겠다
고 다짐하여 조선언론의 칭찬을 받았다.
49 21
kmji98님의 블로그
(동아일보 1926년 9월 3일자)
1912년 경성에서 광산업을 하던  김형박 (30세)은 같은 업에 종사하던 하마다씨의 딸 하마다 후쿠(16세)와 결혼했다 (p 222). 서른살 아저씨
가 고1짜리 소녀랑 결혼한 것이다
한명의는 10세 때 부친을 잃고 미장일을 배워 일본으로 건너갔다. 모시던 일본인 직인에게 솜씨를 인정받아 1932년에 그 외동딸 다치 소노에
와 결혼했다. (p225)
이건-마쓰다이라 요시코 부부
49 21
kmji98님의 블로그
(의친왕 아들인 이건은 일본여자와 결혼했는데 말로는 안좋았다. 제 자식인 줄 알고 길렀던 애가 부인이 외도해서 낳은 남의 씨라는 것을 뒤
늦게 알게 되었다)
49 21
kmji98님의 블로그
함남 단천에 살던 전시묵(69세)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매매를 하던 일본여성 야마다 스기(33세), 기미나가 다테(37세)가 러일전쟁 중에 추
방되자 이들을 거두어 10년 이상 동거했다.
함남 장진의 주병락은 러시아인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던 중 구마모토현 출신 가와사키 쓰네가 매춘부로 팔려오자 주인에게 돈을 주고 데려
와 첩을 삼았다.
(이상 p248)
1911년 경성의 지성연은 의학전문학교 유학시절 사귄 간호사 사카모토 하루요와 조선에서 결혼하고 장모까지 모셔와 함께 살았다. (p 249)
1932년 주오대학에 유학중이던 강기민은 도쿄의 찻집에서 알게 된 우스다 다마코를 함께 여행 중에 강간하여 이후 결혼했다. 강기민은 고향
에 처자식이 있었지만 다마코는 남편이 조선인이라는 것도 모르다가 결혼 5년 후에야 사실을 알게 되었다. (p 253)
1927년 메이지대학생 서원록은 도쿄역에서 무라카미 하루에게 우산을 받쳐준 인연으로 연애, 하루는 가출하여 서원록과 동거했다. 하루의
부친은 경찰에 신고하여 1년 만에 서원록을 체포하였는데, 그때서야 서원록이 조선인임이 밝혀졌다. 하루는 임신한 몸이라 부친의 반대에도
결혼을 결심하여 조선에 왔는데, 알고보니 서원록은 이미 처자식이 있었다. 하루는 충격으로 유산을 했다. 시아버지와 남편은 첩을 두는 것은
조선의 풍습이라 설득, 결국 하루는 첩이 되어 조선에서 살았다. (p 258)
1935년 청주의 윤곡채는 일본인 기다 마야코와 혼인한 상태에서 다른 일본인 미카 미요코와 내연의 관계로 두 아이를 낳은 것이 발각되었다.
마야코의 오빠가 조선에 와서 경찰서로 윤곡채를 불러내 반성하지 않으면 여동생과 조카들을 데려가겠다고 담판을 벌였다. (p 275)
전문학교 교사였다가 해방 후 문교차관까지 지낸 S씨는 도쿄 유학 중 하숙집 딸 다카하시와 사귀며 하숙비를 내기는커녕 그 집에서 학비까지
내줬는데, 졸업하자 여자를 버리고 귀국했다. (p296)
조선남자들은 일본여자를 처첩으로 거느리고 연애하고 바람피고 버리고.., 마 할 거 다했다는 이야기다. 일본정부는 처음엔 내선결혼이 조선
을 일본으로 동화시키는 역할을 할 줄 알고 좋아했었는데 일본여자가 조선남자에게 역동화되는 현상을 보고 당황했다.
...본래 지도 또는 정복 민족의 남자가 피지도 또는 피정복 민족의 여자를 처로 삼는 것이 지배관계의 원칙이지만 내지에서 이 관계는 반대... 내지에 거
주하는 조선인이 대부분 조선의 하층민임에도 불구하고 지도민족인 내지인 여자와 성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은 것은 한편으로는 내지인 여자를 처로
삼음으로써 정복감을 만족하는 데 있는 것... 내지인 여자가 조선인의 성정을 알지 못하고 그들을 내지인으로 오인하거나 또는 그 감언에 속아서 자포
자기의 상태가 되는 것을 나타낸다... 49 21
kmji98님의 블로그
(p.397, 후생성 인구문제연구소, <극비 대동아건설민족인구자료 14: 내지재주 조선인 출산력 조사연구>, 1942에서 인용)
조선인이 일본에 마냥 당하고만 살았던건 아니란 것이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