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1

個々人照らし、切り開いた「民衆史」 色川大吉さんを悼む 歴史学者・成田龍一:朝日新聞デジタル

個々人照らし、切り開いた「民衆史」 色川大吉さんを悼む 歴史学者・成田龍一:朝日新聞デジタル



個々人照らし、切り開いた「民衆史」 色川大吉さんを悼む 歴史学者・成田龍一


会員記事2021年9月20日 5時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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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川大吉(いろかわ・だいきち)さん。7日死去、96歳=2020年撮影

 1970年前後、高度経済成長のただなか、学生反乱や公害反対運動が展開され騒然とするなかで、色川大吉の歴史学は輝いていた。学生の頃の私もまた、色川さんにいれあげた挙句(あげく)、先輩たちに連れられ、東京経済大学の色川ゼミに参加したことがある。
ここから続き

 主著『明治精神史』(64年)では、東京・多摩の民権家の体験を追い、「自由民権の地下水を汲(く)むもの」という認識が示され、華麗な文体とあいまって鮮烈な歴史の光景が提供される。「思想」として整序される以前の「精神」に着目し、自由民権運動を描き出しており、歴史書としては稀有(けう)の著作であった。なによりも、「人民」などと抽象的に語られていた人びとが、石坂公歴(まさつぐ)、平野友輔(ともすけ)と固有名詞をもち、悩み、ためらいながら歴史の現場に登場する姿が印象的であった。さらに色川さんは、民衆憲法草案(五日市憲法)を発掘し、人びとの営為の結晶として、紹介してもいく。民衆史という領域が切りひらかれ、歴史が具体的な人びとによる、生活に根ざした地域での活動――主体的な営みとして書き直されたのである。

 色川さんの歴史学の背後には、アジア太平洋戦争での軍隊経験(学徒出陣)と、敗戦後の社会運動への参画がある。1925年生まれの色川さんは戦争に翻弄(ほんろう)され、さらに社会運動での挫折という「原体験」をテコに、主体的に歴史に向き合い、現在を照らし出す営みを自らの歴史学の課題としていった。

 そして「自分の肉体に刻まれた歴史の痛覚」を手がかりに、同時代史を綴(つづ)ったのが、『ある昭和史』(75年)である。「自分史の試み」との副題をもち、自身の自分史とともに、「ふだん記」運動を展開する橋本義夫、昭和天皇の伝記とを重ね合わせ「昭和史」を構成する。自分史と対をなす「全体史」をあわせ言いながら、「国民的経験」としての「昭和」を描き、しばしば「日本丸」との比喩も用いた。

 かくして戦中と戦後、敗戦と安保を包括する「昭和史」との格闘が、民衆史家・色川大吉のいまひとつの営みとなる。これは色川さんが、天皇制との対峙(たいじ)を生涯の研究課題とすることでもあった。そして、戦時の過誤とともに、高度経済成長のなかでの過誤をあわせ言い、それらが「昭和史」の内実をなす。こうした営みは、人びとに、歴史への主体的な参加を促すとともに、歴史学をアカデミーから解き放つことにほかならない。80年代には、「自由民権百年」という運動を推進するひとりとなった。

 だが色川さんは、社会史という、あらたな潮流に対しては峻拒(しゅんきょ)の姿勢を取った。「民衆」への溢(あふ)れる思いが、歴史の分析方法に関心を集中し、社会の全体像を描く視点といったことに議論を重ねる社会史を、頭でっかちで、理論過剰と認識したのであろう。加えて、ナショナリズムへの評価の相違があったと、私は推測している。社会史は、「民衆」のもつナショナリズムに厳しかった。歴史学を芳醇(ほうじゅん)にするうえでは、なんとも不幸な民衆史と社会史の出会いそこねであった。だが、本当に両者は相容(あいい)れないのか。その検討は、後続の者の課題であろう。色川さんが、最晩年に執念のようにして自費出版した『不知火海民衆史』(2020年)には、聞き書きの重要性が示されていて、残された課題の大きさを思う。(寄稿)

     *



 なりた・りゅういち 1951年生まれ。日本女子大名誉教授。専門は日本近現代史。近著に『方法としての史学史』『〈戦後知〉を歴史化する』など岩波現代文庫の歴史論集全3冊がある。

개개인 비추어 개척 한 '민중사」色川 대길 씨를 애도 역사 학자 · 나리타 류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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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 년 전후, 고도 경제 성장 의 와중에 학생 반란과 공해 반대 운동이 전개되고 어수선한하는 가운데,色川대길의 역사학은 빛났다. 학생 시절의 나는 또한色川씨에 넣어 준 끝에 (나머지), 선배들에게 이끌려 도쿄 경제 대학의色川세미나에 참석 한 적이있다.

여기에서 자세히

 주요 저서 「메이지 정신사」(64 년)는 도쿄 타마의 민권 작가의 경험을 쫓아 "자유 민권의 지하수를汲(구) 넣어 줄 '이라는 인식이 나타나 화려한 문체와 함께 강렬한 역사의 광경이 제공된다. "사상"으로整序되기 이전의 "정신"에 착안하여 자유 민권 운동 을 그려 내고있어 역사 책으로는 희귀 (희유)의 저작이었다. 무엇보다도 '인민'등 추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이시자카公歴(正次), 평야 우보 (友助)와 고유 명사를 갖고, 고민하고 망설 역사의 현장에 등장하는 모습 이 인상적이었다. 또한色川씨는 민중 헌법 초안 (일장 헌법 )을 발굴하고 사람들의 영위 크리스탈로 소개하고 좋다. 민중사이라는 영역이 삭감 열렸 역사가 구체적인 사람들에 의한, 생활에 뿌리 내린 지역에서의 활동 - 주체적 인 행위로 다시 작성한 것이다.

 色川씨의 역사학의 배후에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 에서 군대 경험 (학도병)과 패전 후 사회 운동에 참여한다. 1925 년생의色川씨는 전쟁에 농락되고 또한 사회 운동의 좌절이라는 '원 체험'을 지렛대로 주체적으로 역사에 마주 현재를 비추는 행위를 스스로 역사학의 과제로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에 새겨진 역사의 통각」을 단서로 동시대 역사를 철수 즈의 것이"있는 쇼와 사」(75 년)이다. 자신의 역사 의 시도」라는 부제를 갖고, 자신의 자서전 과 함께"보통 기」운동을 전개하는 하시모토義夫, 쇼와 천황 의 전기와를 쌓고 「쇼와 사」를 구성한다. 자신의 역사 와 대를 이루는 '전체 사'를 함께 이라며 "국민적 경험"으로 "쇼"를 그려 종종 ' 닛폰 마루 '는 비유도 사용 하였다.

 이리하여 전중과 전후 패전과 안보를 포괄하는 '쇼와 사'와 격투가 민중 역사 ·色川대길의 어설픈 행위가된다. 이것은色川씨가 천황제 와의 대치를 평생의 연구 과제로하여도 있었다. 그리고 전시의 과실과 함께 고도 경제 성장 속에서의 과실을 함께 말하고 그들이 '쇼와 사」의 내실을 이룬다. 이러한 행위는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한 주체적 인 참여를 유도하고, 역사학 아카데미에서 해방 것일 뿐이다. 80 년대에는 "자유 민권 백년 '라는 운동을 추진하는 사람이되었다.

 하지만色川씨는 사회의 역사는 새로이 조류에 대해서는峻拒(しゅんきょ)의 자세를 취했다. '민중'에 아후하는 생각이 역사의 분석 방법에 관심을 집중하고 사회의 전체 상을 그리는 시점이라고 할 논의를 거듭 사회 사를 불균형, 이론 과잉 인식 한のであ왁스. 또한, 민족주의 에 대한 평가의 차이가 있었다고, 나는 추측하고있다. 사회 역사는 '민중'이 갖는 민족주의 에 엄격했다. 역사학을 향기롭고 (향기로운) 하는데서는 정말 불행한 민중 역사와 사회 역사의 만남そこね였다. 하지만 정말 둘은相容(あいい)되지 않는 것인가. 그 검토는 후속 사람의 과제 일 것이다. 色川씨가 만년에 집념과 같이하고 자비 출판 한 「시라누이 해 민중사」(2020 년)에는 듣고서 쓰기의 중요성이 나타나고 있고, 남은 과제의 크기를 생각한다.(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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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리타 · 류이치 1951 년생. 日本女子大명예 교수. 전문은 일본 근현대사. 근저에 "방법으로 사학 역사」 「<전후 지식>를 역사화하는"등 이와 나미 현대문 창고의 역사 논집 전 3 권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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