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9

Philo Kalia | Facebook [4] 진리

Philo Kalia | Facebook:
4 Jan 2020 
Public
 
미*진*선(美*眞*善)으로서의 기독교 신앙 새해 첫 주(1월 5일) 가나안교회 예배 후 “미*진*선(美*眞*善)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이란 제목으로 특강을 한다.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찾고 서술하는 <기독교 교의학>과 그 진리를 실천하는 <기독교 윤리>에 이어 신앙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기독교 미학>을 탐구하던 중, 벌써 오래 전 예수의 역사 2000년을 진 * 선 * 미로 푼 학자를 만나 여간 기쁜 게 아니다. 그는 유명한 교회사가인 야로슬라브 펠리칸이다. 펠리칸은 『예수의 역사 2000년』(동연, 1999)에서 2000년의 서양 문화사 속에 그려진 대표적인 예수상 17개를 뽑아 그 해당 시대상을 대변하는 그리스도 이미지를 설명한다. 그는 미국에서 이념사를 전개했던 러브조이(Arthur Lovejoy)의 말 예수의 ”본성과 가르침은 매우 다양하게 생각되었으므로 거기에 있는 단일성도 단지 이름만의 단일성“이라는 결론에 근거하여, 역사상 나타난 그리스도 상의 다양성은 그리스도의 불연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이야말로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문화사 속에 숨어 있는 보물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한국교회가 사회와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한 방편은 신앙의 다양성의 확보가 아닐까 생각한다. 기독교 복음의 문화적 확산은 신앙의 다양성의 확보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펠리칸은 다양한 예수 상(像)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해주는 개념이 바로 진*선*미(眞*善*美)라고 말한다. 펠리칸은 6세기 라벤나(Ravenna) 대주교 예배당의 인상적인 예수 상인 <승리자 그리스도>을 제시한다. 그 상은 그리스도는 양 발로 세상 권세의 상징인 사자와 뱀을 밟고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다. 그리스도는 오른 손에 승리의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왼 손으로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EGO SUM VIA VERITAS ET VITA)(요 14:6)는 말씀을 들고 계신다. 펠리칸은 길, 진리, 생명을 각각 미, 진, 선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길>은 ‘아름다움’(美)을 – 그 자신의 상과 비슷하게 우리를 새롭게 조형하였다, <진리>는 ‘참’(眞)을 – 진리로서의 그리스도는 모든 진리의 성취이며 실현이다. <생명>은 ‘착함’(善)을 나타낸다. - 모든 본래적인 善의 원천이다. 교회는 일찌감치 그리스도의 복음을 眞과 善만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美(아름다움)로 읽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인 길=美(the Beautiful), 진리=眞(the True), 생명=善(the Good), ‘참 선한 길’이고 ‘참 선한 아름다움’의 원형이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편 27:4) ================================ [안내] 푸드&아트 가나안교회 모임 안내 1. 가나안 언님 여러분, 새해 복 많이 짓고 또 하느님의 축복 많이 받으세요! 2 새해 첫 가나안 모임은 "푸드&아트가나안교회"로 모입니다. "푸드&뮤직가나안"을 새롭게 개편하여, "푸드&아트가나안"으로 시작합니다. 작년 잠시 쉬었던 아트가나안교회를 새롭게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언님들의 많은 응원과 참여바랍니다. 참고로, 부득이 장소가 이번 주엔 기독인문학연구원에서 열립니다. 착오가 없기를 바랍니다. <아래> 일시: 2020.1.5.오후3시 장소: 기독인문학연구원(대표 고재백 교수) 진행 1부: 주일예배(집례: 손원영 목사) 2부: 예술특강: "미*진*선(美*眞*善)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심광섭 박사 3부: 공동식사와 친교 가나안교회 섬김이 손원영 올림
+2
94
11 comments
28 Feb 
Public
 
…집착한다. 실증과학을 유일한 진리 탐구의 모델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암튼 성서의 관심은 물질의 기원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현실에 입각한 시작점(beginning)에 대한 관심이다. 성경에서 ‘창조주-창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곧 세계 전체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통세계’에 담긴 행위자들의 다양한 입장과 생명의 그물망을 그려보고 재구성한다. 코스모그램(cosmogramm, 브뤼노 라투르)이라 말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우주, 우주의 원리의 구체적 모습이 하늘과 땅이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에게 말씀하신다. “하늘아,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땅아,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라.”(신 32:1) 하느님의 말씀은 메마른 땅에 내리는 비요, 풀밭을 적시는 봄비다. 하느님의 교훈은 실개천 풀잎에 맺힌 이슬이요, 채소밭 위에 내리는 가랑비다. 이보다 근원적이며 기본적이고 구체적이며 감각적인 하느님의 말씀이 어디 있을까? 인간의 도덕과 윤리 이전에 자연이 있고 자연의 흐름이 있다. 주님의 말씀은 메마른 땅을 적시고 돌같이 굳어진 영혼을 녹이는 선선한 봄비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풀밭을 적시는 소나기다.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채소 위에 내리는 가랑비다.”(신 32:2) 창조론은 기독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물질성을 벗어난 영혼이나 이성 중심의 엘리트주의적 자기영성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물질성과 무관한 혹은 물질성을 탈피한 영성이 아니라 물질성, 곧 창조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 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물질성의 완성을 향해 창조를 끊임없이 유혹한다는 점이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선포할 때에, 너희는 '우리의 하나님 위대하시다' 하고 응답하여라.”(신 32:3) 천체 물리학이 알아낸 135억년 우주의 과정은 지혜와 말씀의 반석이 형성되는 헤아릴 수 없는 기나긴 과정이다. 하느님의 본성(단일성, 불변성, 영원성, 전지-전능성, 무소부재성)은 생명의 과정과 경험을 통해서 말해져야 한다. 하느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이때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말해진 본성들의 의로움, 올곧음, 진실성이 드러나 경험될 것이다. “하나님은 반석, 하시는 일마다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은 올곧다. 그는 거짓이 없고, 진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의로우시고 곧기만 하시다.”(신 32:4) [이미지] 민정기 작가의 뚝버들
+2
Hyun Ju Kim and 123 others
13 comments
6 May 2019 
Public
 
[말씀]“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21) [성찰]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1) -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언제부터(20여 년 전)인가 나는 기독교 신앙이 형상화하는 아름다운 진리의 생명적 형태를 찾는 구도자이며, 그것을 말하고 전하는 전도자임을 자처하고 싶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기독교신앙의 아름다움』이라 달기도 했다[➔이미지(1)]. 나는 <예술과 기독교 신앙>, <예술신학> 등을 신설하기도 했고, 2013년 예술목회연구원이 창립되어 활동을 함께 하기도 했다.[➔이미지(2)] 이것은 무슨 자랑거리가 아니다. 이 일은 마치 복음을 전하라고 바울에게 임한 자발적으로 강요받은 심정과 같은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고전 9:16). 여기서 바울이 말한 복음이란 나에게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는”(엡 4:13) 가멸찬 기독교 신앙의 다채롭고 풍요로운 아름다움이다.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환한 얼굴의 하나님은 아름답고 감미로운 분(dulcedo Dei)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道)와 복음의 실천(德과 仁)은 복음의 아름다움(藝)에 놀라고, 그것에 끌려 노닐고 즐거워함으로부터 나오며(脫) 다시 거기로 향(向)한다. 요컨대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생각(思)하며 행(實行)하기에 앞서 느낄(感) 수 있어야 한다. 1) 지성을 찾는 신앙 기독교 신학의 대상은 오직 삼위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알고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보다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하나님을 직접 보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앙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 사유하고 말하는 그 언어적 문법이 신학이 되었다. 신학은 중세의 신학자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가 남긴 유명한 명제에서처럼 “지성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이다. 이 명제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 뜻은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는 것이다. 안셀무스 이후, 신학과 교회는 오늘날까지 이 명제를 금과옥조로 받들면서 성서와 교회를 통해 전승된 기독교 신앙을 개념적이고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며 해석하는 데 방점을 두었다. 그 결과 신앙을 삶을 통해 함께 느끼고(共感) 서로 실천함(連帶)이 없어도 바르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만 있다면 좋은 신앙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다른 복음’, ‘다른 성령’, ‘다른 가르침’을 경계하면서(고후 11:4), 이를 이어 신앙의 바른 진리를 교회와 신학의 일차적 과제로 설정했던 고대 교회의 역사는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뿐 아니라 교회론과 구원론을 중심으로 정통(신앙의 진리)은 세우되 이단(신앙의 거짓)은 정죄하고 배제하는 데 전심전력한 역사다. 이러한 역사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분열의 시기와 이를 잇는 정통주의에서 지속되었다. 특히 개신교 신학에서는 수도원을 신학하기의 파트너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학의 생산지가 유일하게 대학이 되면서 이성의 한계 안에서 신앙을 논의하게 되었고, 역사비평을 신학방법의 근간으로 삼는 19세기의 성서학과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의 주지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신앙의 논리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태도를 좋아할 것이다. 이들은 다른 복음으로부터 명료한 개념과 일관성 있는 논리로써 “복음의 진리”(갈 2:5)를 바로 이해하고 변호하여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는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태도(눅 10:38-42)와 로마서의 “믿음은 들음에서 생긴다”(롬 10:17)는 주장을 강조한다. 물론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를 잇는 교회는 ‘말씀듣기’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선(善)한 열매로 연결되지 못하는 진리는 고원(高遠)하여 삶에 번지고 삼투되지 못하며 실천하기 어렵게 된다. 2)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논리적 진리에 더하여 신앙에서 선을 찾고 행하는 전통 또한 오래되었다. 바울은 믿음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fides Caritate formata; 갈 5:6)으로 이해하였고, 루터는 은총으로 말미암는 선인(善人)이 선행(善行)에 앞섬을 전제했지만, 그 역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결같은 사랑의 삶임을 강조했다. 유럽의 정치신학과 제3세계의 해방신학은 “바른 교리”(orthodoxy)에 더하여 “바른 행동”(orthopraxy)을 주장한다. 신앙은 신앙진리에 대한 바른 인식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좋은 일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후 8:21). 특히 복음의 자유와 해방의 진리는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심리-사회적으로 억압되고, 문화적으로 주변화 된 상황 속에서 드러나야 함을 역설한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면 입과 귀를 그리고 눈과 모든 감각을 닫아버린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랑의 실천을 당연히 강조해야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 그러나 역사 속에서 기독교 신앙은 실제로 도덕주의로 의무화되거나 계명 준수 수준으로 단순화 되었고, 그 결과 실질적 삶의 표현이 되는 소망과 기쁨의 호흡이 질식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므로 진리는 선(善)한 열매를 맺고, 선은 다시 아름다움(美)으로 활기와 자발성을 얻어 형태화(form)되고 기호화(sign) 되어야 한다. 삶보다 앞서 찾아오는 사랑의 아름다움이 영혼에 진동을 수반함으로써 진리추구와 선한 행위를 촉발하고 견지할 수 있다. 3)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최근 국내외 기독교 안팎에서 예술과 신앙, 미학적 경험, 기독교 미학에 관한 책들이 저술되거나 번역되고 있으며 ‘예술신학’과 ‘예술목회’라는 말도 활발하게 회자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선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것들을 통해 다시 표현되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 관한 대화를 기독교의 진리의 영역 안에서만 추구하지 않고, 인간이 느끼고 활동하고 짓고 창조하도록 움직이는 열정 안에 현존하고 동행하는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고 싶어 한다. 개신교회와 신학은 신앙의 참(眞)되고 선(善)한 것을 설교하고 신학화하는 일에 큰 힘을 쏟았으나 신앙의 아름다움(美)과 신비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아름다움은 편안함이나 달콤함, 보기에 예쁨과 같은 유로 보아서는 안 된다. 고전전인 미의 개념에서도 아름다움은 고통을 내포하는 삶이 더해져야 최고의 아름다움의 경지에 도달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에는 늘 고통이 배어 있다. 아름다움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경험은 진리와 선을 위한 전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없는 세계에서는 혹은 최소한 “그것을 더 이상 발견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도덕적 선도 또한 왜 그러해야 하는지의 자명성과 매력을 잃게"[빌라데서, 『신학적 미학』, 43]되기 때문이다. 먼저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 및 수반되는 감정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사물의 고유한 질서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은 명제적 진리를 추구하는 교회의 교리적 진술에 치우쳐 지나치게 논리적이 되어 반성 없는 교리의 동어반복에 머물거나, 도덕이 됨으로써 도덕적 계명으로 눌러앉게 되어 생동적인 신앙의 신비에 이르는 신앙의 감각을 소홀이 한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추구해야 할 신앙은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pulchrum, Faith seeking Beauty), 삶을 아름답게 형성하고 조형하는 신앙, 내적 아름다움(內美)을 찾는 신앙이어야 함을 힘주어 말하고 싶다. ‘지성을 찾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이해’(Undersatnding of God)하기 위해 신앙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에서는 ‘하나님의 경험’(Experience of God)과 느낌이 주된 목적이다. 헤셸은 『예언자』에서 ‘정념의 하나님’(God of Compassion)을 역설한다. 정념은 ‘선’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돌봄을 의미한다. 그는 아브라함과 예언자들이 만났던 하나님은 누멘(numen)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념, 사랑이 충만한 하나님의 보살핌이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사는 사실 미적 사건이다. 그것은 인지의 대상이라기보다 상징적 체험의 세계이다. 성경은 인간의 구체적인 예술행위를 언급한다. 시작(詩作)과 찬미뿐 아니라 수금을 타고 퉁소를 부는 모든 사람의 조상인 유발과 구리나 쇠를 가지고 온갖 기구를 만드는 사람인 두발가인도 언급한다(창 4:21-22). 또 출애굽기에는 주님께서 회막 기술자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기술을 넘치도록 주시고, 온갖 조각하는 일과 도안하는 일, 그리고 여러 가지 고안하는 창작력을 주셨다(출 31:1-11, 35: 30-35). 예술적 아름다움은 성전을 묘사하는 에스겔의 미의식(겔 40-43)과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을 묘사한 계시록(21:10-23)에도 훌륭하게 나타난다. 미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예술과 종교의 불가피한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예술은 초감성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을 감성적으로 보게 하며, 이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힘을 가졌다”[하르트만, 『미학』, 25].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생활은 예술을 늘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종교는 예술이 그 충동과 열정을 가지고 제 사상을 실현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예술과 삶, 아름다움과 신앙이 하나로 묶이는 새로운 시대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찾아왔다. 전환기의 시대에 교회와 신학은 진리와 선이 스스로를 완성하고자하는 아름다운 예술의 길을 걷고자 한다. 이 길은 말씀을 들고 이해하는 신앙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체험하는 신앙, 자득(自得)적 신앙의 길이다. 20세기의 두 거장,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영광’을 하나님의 완전성의 최종 개념으로 제시하였고,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어즈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는 신학적 미학의 근본개념으로 삼았다.[➔이미지(3)]. ‘영광’(Kabod)은 빛으로서 빛의 근원이며 동시에 빛의 발산으로서의 광휘로서 아름다움은 영광이 취하는 독특한 형식이요 설명으로서 아름다움에 대한 성경적 이름이다. 신앙의 진리(교리)를 행하는 사람(윤리)은 저절로 빛(미학)으로 나온다(요 3:21). [이미지](1)심광섭, 『기독교신앙의 아름다움』, 다산글방 2003(표지); (2)예목원창립대회 사진(2013) (3)한스 우어즈 폰 발타자르, 『신학적 미학』(3부작 전15권)
+1
53
26 comments
4 Apr 
Public
 
[聖토요일의 미학] 나는 <십자가와 부활의 미학>에서 성토요일에 관해 한 꼭지 썼다(1장 19). 그러나 미흡하고 찝찝한 마음 가시질 않아 성토요일이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시각에 글을 올린다. 이 글은 『성령과 트라우마』, 2장)에 근거한다. 성토요일은 성금요일과 부활절 사이에 끼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수난주간, 월~금까지 경건 훈련에 열을 올리다가 토요일은 쉬거나 부활절을 준비하면서 미리 부활을 맛보고 싶어한다. 벌써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마음이 가 있다. 성토요일은 완전히 생략되어 그저 부활절 전날이 되었거나, 지옥에서의 성자의 죽음과 죄에 대한 정복 활동을 당연시함으로써 이미 부활을 예견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성토요일의 신학을 전개한 신학자는 기독교 미학자로 알려진 큰 사상가 한스 우어즈 폰 발타자(Hans Urs von Balthasar)이다. 전통적으로 수난과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매끄러운 과정으로 설명되었다. 발타자는 이런 설명에 저항하는 신학을 제시한다. 교회는 성토요일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거의 도외시했는데, 이 날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죽음과 삶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현장이다. 우리는 제일 먼저, 영원한 구원의 열매를 얻을 순간을 기대하면서 잠깐의 고난을 참으라고 주장하는 신학적 성급함과 종교적 초조함을 물리쳐야 한다. 성토요일을 간과하고 부활절로 가는 것은 부활절의 의미조차 망실하게 한다. 성금요일과 부활절 사이, 중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성토요일에 그리스도는 지옥에 내려가신다(descent into hell). 고통의 독특한 측면을 드러내는 성토요일은 십자가의 관계에서만 해석될 수 없듯이 부활과의 관계 속에서만 해석될 수도 없다. 지옥에서의 하느님 경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는 죽음 경험이다. 성토요일은 죽음 너머까지 미치는 고통에 관해 증언한다. 성자는 지옥에서 지옥의 심연에 있는 죽은 자들과 함께 죽었다. 지옥은 버려진 땅과 같은 곳이다. 지옥은 삶의 흔적이 없는 곳, 가능성도, 움직임도 없는 곳이다. 성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곳이다. 여기서 성자는 자신이 성부와 완전히 분리된 환상들, 그리고 만물이 하느님과 분리되는 환상들을 경험한다. 지옥의 정복과는 무관하게 지옥에는 적극적인 승리가 없다. 예수는 부활한 자로 지옥에 내려간 것이 아니라. 죽은 자로 지옥에 내려갔다. 십자가에서 경험한 죽음은 지옥까지 이어지며, 이는 성자의 사명과 하느님의 구원 모두에 대해 다른 해석을 드러낸다. 십자가의 죽음이 능동적 죽음과 수난의 경험이라면, 죽은 자로서 지옥에 내려간 성자의 경험은 수동적 수난으로서, 죽음의 풍경과 죄의 실상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다. 이것은 극도의 암흑이자 버려짐이며 소외이다. 성자는 그곳에서 겉으로만 버려진 모습으로 세상 죄를 감당한 것이 아니라. 몸소 지옥에 내려가 버려짐을 경험한다. 성금요일과 부활 주일 사이, 그 중간에서의 삶은 죽음에서 솟아나며, 그 삶 안에는 죽음을 계속 품고 있다. 그 중간은 죽음에서 삶으로 곧장 이어지는 길을 방해하고, 나머지, 혼돈, 지친 사랑, 졸졸 흐르는 무기력 등, 그 중간의 시공간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어휘들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죽음의 고통이 콸콸 흐르는 세상의 현실임을 응시하게 한다. 그러므로 발타자는 성토요일이 가진 독특한 진실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 남아 있다는 진실임을 강조한다. 수난과 부활을 설명하는 익숙한 논리 속에서 죽음을 해석한다면 죽음의 진실이 왜곡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사이, 그곳에는 빛도, 생명도, 말도 없다. 단지 그리스도가 지옥으로 내려간 사건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자로 지옥에 내려가지 않았다. 죽음의 영역으로 내려간 그가 죄인들과 믿지 않는 이들 모두를 불러 모은 것도 아니었고, 죄인들의 사슬을 끊은 것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승리도, 어떤 행동도 없다. 지옥에 내려간 성자는 죽은 자들 중 한 명이었다. 발타자는 구원에서 지옥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독특한 시각을 발전시키기 위해 지옥에서의 죽음이라는 어두움을 적나라하게 담은 모습을 포기하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 <예술신학>, <기독교 미학>을 말했을 때 그것은 부르주아들의 신학이 아니냐는 비판이 거셌다. 예술신학은 부르주아, 부자, 권력자, 무늬와 흠과 결이 없는 매끈함을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분에게는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죽은 자로서 지옥에 내려가 죽은 자들과 함께 계신 성토요일은 <예술신학>이 꽃피는 땅이다. 성토요일의 미학은 인간이 경험하는 죽음이 강력한 실재임을 미친 듯 증언하는 일이다. 고통을 간과하는 공허한 부활절 선포보다는 아직 부활절 선포 없는 고통과의 연대가 부활의 작은 싹을 보듬고 있는 것이다. 발타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지옥의 경험이 하느님의 비극이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라고 믿는다. 그러나 지옥의 심연까지 확장된 이 사랑은 늘 외치는 승리하는 사랑이 아니다. 지옥의 혼돈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내는 기진맥진한 사랑이다. 이 점이 성토요일의 신학에 대한 발타자의 기묘한 해석이다. 그리스도가 지옥으로 내려가신 사건에 대한 고백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라는 부르심이며, 오늘날 곳곳에 숨겨져 있는 고난과 고통의 현장에 참여하며 연대하라는 부르심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는 지옥을 지나 걸어가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이는 자기 상처를 통해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죽음 이후의 공간에 계속 남아계신다. 그리스도는 길 없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발자취를 남기지도 않고, 출구도, 시간도, 존재도 없는 지옥을 통과해 간다. 길, 진리, 생명, 길 없음, 말 없음, 출구 없음, 이것은 지옥의 길을 걸어가는 하느님의 연약한 모습이다. 성토요일은 균열, 단절, 쪼개짐이다. 예수는 지옥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그는 우리가 딛고 걸어갈 길이 되었다. 성토요일은 파멸과 소생을 잇는 한가닥 실이다. 이 실은 죽음(성금요일)과 지옥(성토요일)이 가진 무시무시한 힘을 버텨낼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다. 죽음에서 부활로의 변화에 대해 발타자는 기도의 형태로 말한다. “지옥 구렁을 가로지르는 밧줄이 너무 짧기에, 우리는 둘을 연결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 손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손가락만이 우리의 깨어진 조각들을 맞추어 온전한 모양을 이룰 것입니다.” 북음에서 생명의 부활로의 전환, 이것은 승리한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남은 사랑의 이야기에 대한 증언이다. 이 사랑은 모든 혈관이 터지고 낡은 세계가 소멸했을 때 마지막까지 쏟아져 나온 사랑, 이제 사랑 그 자체를 위해 아무것도 없는 암울함을 뚫고 성부를 향해 가는 길을 만들어 가는 성자의 그 사랑이 남긴 유산이다. 죽음에서 움직이는 것은 사랑이 남긴 지친 유산이며, 이것은 이제껏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새 창조를 향해, 무기력하게, 멍한 채로, 힘겹게 졸졸 흘러간다. 성토요일의 지친 사랑은 신학적으로 아름답고 힘차게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토요일의 미학이 해야 할 과제이다.
Hyun Ju Kim and 109 others
27 comments
16 Apr 2019 
Public
 
[말씀]막 14:12-26 [성찰]“파스카 만찬 - ‘최후의 만찬’ - 성찬”(고난주간 화요일 묵상) 중세기부터 <최후의 만찬>을 그린 그림의 대부분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이 아니라 유다의 배반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였다. <최후의 만찬>이 일련의 예수님의 수난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그려질 때 유다의 배반 예고를 중심으로 그려졌고, 그 배반을 예고하는 순간의 비극은 뒤따르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와 이어지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전통에서는 다시 성찬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독일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Emil Nolde, 1867-1956)는 가톨릭은 아니지만 최후의 만찬에서 ‘성찬’의 참된 의미를 살려낸다.[➔이미지(1)] 놀데의 <최후의 만찬>은 그의 예술 작품의 결정적인 전환기를 초래한 일련의 종교화 중 첫 작품이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평면과 형식과 더불어 암시적인 표현력을 지닌 색채의 힘이다. 강렬한 붉은 색, 옷 위의 검은 붓 터치는 강조하고 싶은 그림의 내면성을 의미한다. 새로운 기법으로 그린 그림을 통해 놀데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을까? 초록빛 성찬의 식탁을 중심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팔을 잡고 있거나 어깨를 밀착하고 있어 식탁에 앉은 예수님을 에워싼 느낌이다. 그러나 이들은 옛 거장들의 그림에서처럼 聖사도들이 아니다. 이들은 화가가 당시 살았던 덴마크의 알젠(Alsen) 섬과 루테뷸(Ruttebüll) 농촌세계에서 온 투박하고 俗된 농민들이다. 그들은 모두 힘들고 모진 운명에 깊이 새겨진, 평생의 삶을 세상의 치열한 경쟁 속에 내맡긴 울퉁불퉁한 어부와 농부의 각진 얼굴들이다. 예수님의 얼굴도 다른 사람들의 얼굴처럼 거칠고 황량하며 각이 져있다. 놀데는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원색으로 격한 분노, 모진 고통, 넘치는 기쁨과 색 바랜 슬픔 등의 통렬한 정념을 직접 표현하는 표현주의의 기법으로 종교를 냉정한 머리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과 뛰는 심장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최후의 만찬>의 중심인물은 예수님이다, 그리스도의 원색적인 노란 얼굴, 붉은 머리카락과 겉옷, 흰색 상의의 강렬한 원색 대비, 특히 성배의 푸른색과 노란색 큰 손의 대조는 복잡한 한 사람의 내면과 외면의 혼종적 삶의 특성을 거침없이 표현하려는 듯하다. 예수님께서는 무겁게 그려진 크고 투박한 농부의 손으로 포도주 잔을 움켜쥐고 계시다. 그는 아직 무언가 자신에게 말하는 듯하고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이 보인다. 한국 사람처럼 옆으로 찢어진 그의 눈은 비스듬히 거의 감겨 있고, 얼굴은 약간 위를 향하고 계시다. 그의 우울한 얼굴 표정은 비장함과 굳건한 결의를 더하고 있다. 도대체 그분께서 무엇을 그리도 깊이 생각하고 계신 것일까? 이 들 중 한명이 나를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상천외의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막 14:22-24) 지금도 성찬 예문의 핵심 본문으로 사용되는 이 본문에서 <들다 = 취하다>(λαβὼν), <축복하다>(εὐλόγησεν), <떼다>(κατέκλασεν), <주다>(ἐδίδου)라는 네 개의 동사가 눈에 띈다. 이 동사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상기시킨다(막 6:41). 배고픈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 남을 수 있는 공동체가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말씀인즉 이렇다. “이 빵은 나 자신이다. 나의 역사와 삶 그대로의 나 자신이다. 나의 삶은 이 빵처럼 쪼개질 것이다. 이것을 나는 너희에게 준다. 너희가 여기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로핑크, 『예수마음코칭』).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이미지(2)]에서 ‘유다의 배반’을 초점으로 그렸다면, 놀데는 성찬을 통한 ‘한 몸이 됨’, 곧 ‘구원의 약속’에 비중을 두고 있다. 화가는 굵은 선을 따라 가운데 예수님을 중심으로 열두 명의 제자들을 좌우로 6명씩 한 선에 촘촘히 엮어 그렸다. 빈들에서 날이 저물 무렵 무리 중에 이미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한 공동체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면, 아직 서늘한 독일 북부의 봄 저녁, 그리스도에게 큰 고난의 어둑어둑한 밤이 서서히 깔리기 전에 그들은 한 작은 식탁에서 포도주 잔을 드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며 한 몸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결연히 다짐한다. 나는 여기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 Ich will hier bei dir stehen, 주여 나를 비웃지 마소서 Verachte mich doch nicht, 당신 곁을 결코 떠나지 않으리이다. Von dir will ich nicht gehen, 당신의 심장이 산산이 부수어질 때 Wenn dir dein Herze bricht 당신의 심장이 창백해질 때 Wenn dein Herz wird erblassen 죽음의 마지막 호흡이 엄습할 때 Im letzten Todesstoß 나는 당신을 품으리이다. Als dann will ich dich fassen 내 팔에, 내 품에 당신을 안으리이다. In meinen Arm und Schoß. -바흐, <마태수난곡>(Nr.17, 합창) 그리스도의 몸이다. 빵이 새로운 이름을 얻어 ‘표징’(signum)이 된다. 지체들(오케스트라와 단원들)이 모여 공명을 생산하는 마태수난곡의 합창은 그리스도의 몸의 의미를 층층 겹겹이 무한 느끼게 한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다. 포도주가 새로운 이름을 얻어 ‘상징’이 만들어진다. 이 상징을 통해 제자와 그리스도 사이 뿐 아니라 물질과도 살아 있는 관계로 들어간다. 이제 여기에 쏟아 붙는 합창 소리는 살갗에 전율을 일으켜 장엄과 숭고의 경지를 선사하고 온몸에 피가 맥동하게 한다. 단지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정신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의 변화된 물질성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 자신의 실팍한 몸 안에 고동치며 흐르는, <루터>가 말한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real presence)을 발견한다. <칼뱅>이 부연하고 <웨슬리>가 받아들인 성령의 임재하심 속에서 우리는 함께 주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맛보아 알게 된다. 우리는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눈과 코와 혀와 목구멍과 위와 내장과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이르는 실핏줄 안에서 성육신의 신비를 경험한다. 주님의 사랑의 <건넴>과 주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과 귀의를 담은 <받음>이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킨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실체의 변화(transsubstantiation)는 살과 피로 상징된 주님의 몸을 받고 주님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수반되는 삶과 존재의 변형(transformation)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이 <교회 일치적> 성찬(ecumenical Eucharist)을 통해 나타나는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이다. 주님의 살과 피, 그분의 부활한 몸, 그분의 변모된 인간성은 그분의 진리와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다. 표현주의적 신비주의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습니다”(요 6:56). 한 사람 ‘곁’에 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앞’이나 ‘옆’에만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 15:4.9).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푹 잠긴다. ‘안에 있음’의 근거는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상호 내재적 안에 있음’이고 ‘머물러 있음’이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17:23).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에서 형언할 수 없는 삼위 하나님 사이의 일치의 신비가 펼쳐진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고, 그리고 이 둘이 성령의 사랑 안에서 하나인 거룩한 ‘우리’이다. 하나의 삶, 하나의 진리, 하나의 사랑, 그러나 살아 있고 진실하고 사랑하는 세 분, 이것이 삼위 하나님의 ‘서로 안에 있음’, 즉 사랑의 존재의 신비이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몸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는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더 깊이 뿌리내리고 접목하고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눅진하게 참여하는 신앙의 신비이다. 신앙의 신비는 이론적 확신이 아니며 행위나 인위가 끝나 자기를 내어주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 속에서 열리기 시작한다.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써 우리는 삼위 하나님 안에 묵고 머무를 수 있으며, 결국 삼위 하나님의 이 사랑의 추동력으로 형제들 안에 머물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주위를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열두 제자의 모습은 심리적으로 두터운 유대감을 강조한다. 누가 스승을 배반할 것인지 서로 의심하며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주는 성찬을 받아먹으며 서로 하나가 되는 끈끈한 유대감과 뜨거운 사랑을 교환하고 있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과 포도주로 주심으로써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의 새 언약을 기념한다. 지그시 눈을 감으신 그리스도의 머리에 채색된 붉은 사랑의 빛이 예수님의 몸을 감싸 흐르고 좌우 제자들에게로 흘러가 온 제자들의 입술을 붉게 물들인다. 시간은 영원 속에 묵고 머무르며, 공간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다. 사랑을 잉태한 시간은 공간 안에서 육신이 되기를 목말라한다. 사랑의 공간은 경계가 지워진 ‘늘-서로-안에-있음’이며, 사랑의 시간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기대하는 언제나 현재다. 순색영원(純色永遠)이 우리의 덧없는 시간 속으로 사랑을 통해 들어온다. 이때가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과 도래할 시간이 비빔밥처럼 버무려지는 ‘영원한 현재’(eternal now)이며,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 되어 인간이 신성에 차지게 참여하는 순간이다. 사랑은 영원한 현재를 창조하는 예술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위대한 구원의 은혜를 선사하는 시간이다. 예수는 성배를 두 손으로 감싸고 눈을 반쯤 감고 무언가 비장한 결심을 한 듯하고, 제자들은 예수에게서 발산되는 거룩한 광채를 받으며 환상적인 경험을 하는 듯 상기되고 흥분되어 있다. 그들의 얼굴은 초월적인 신비와 흥분으로 그로테스크하게 타오르고 있다. 가면을 쓴 듯한 그로테스크한 얼굴은 현실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장면이 아니라 종교적인 비밀과 신비를 말해주는 듯하다.”(김현화, 『성서 미술을 만나다』) 종교적인 비밀과 신비란 십자가를 통해 표현될 정도로 인간에 흠씬 빠진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사랑(Philanthropia)이다. “받으시오. 내 몸입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대들을 위해 바칩니다. 나는 그대들을 위한 빵이며, 이 빵은 그대들의 양식입니다. 죽음으로 나의 몸은 그대들을 위해 부수어질 것입니다. 이는 그대들의 삶이 부수어지지 않기 위함입니다”(그륀, 『예수, 자유의 길』). 따라서 성찬에 참여한 그리스도인은 바울과 함께 이렇게 고백한다. 성찬에서 보여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고후 5:14, 가톨릭성경). 모든 것이 그물에 걸리는데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바람도 사랑과 용서의 그물에는 걸린다(김홍신).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용서의 그물을 세상에 쳐놓으심으로써 사람 잡는 거짓과 증오의 그물을 풀어 사랑과 용서의 그물에 걸리게 하신다. 교회는 성찬이 성찬배제의 차별로 인한 ‘상처’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형식화된 예전의 ‘공허함’과 의미를 모른 채 맹목적으로 예전에 참여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미신’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놀데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깊은 정신성과 종교와 내면성을 서술하고 싶은 항거할 수 없는 욕망을 따랐다. 나는 자연에서는 그 모범을 찾아볼 수 없는 작품 앞에 서 있다. 이제 나는 가장 신비하고 가장 내면적인 기독교의 복음을 그려야 한다. 나는 그리고 또 그렸다. 나는 낮인지 밤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내가 사람인지 단지 화가인지 잘 알지 못했다.” 놀데의 이 작품은 독일의 북부, 슐레스비히의 루테뷸에서 이렇게 태어났다. [이미지]에밀 놀데(Emil Nolde), <최후의 만찬>, 83 x 106cm, 1909.
songsoonhyun and 46 others
10 comments
23 Apr 2020 
Public
 
…회화 사물의 본질을 밝히는 판단의 진리 앞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바탕을 밝히는, 사랑의 진리를 밝히는 시 한편,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그림 한 점. “판결과 집행이 아니라 고투와 행복을 증언하는 당신.” 판단의 언어는 이성을 가졌고 사랑의 언어는 영혼을 가졌다. 시인은 말한다, “사랑은 인간이 신에게서 빌려온 유일한 단어,” 물의 언어라고... 사랑의 詩語만이 행복이다, 지옥을 통과해 가는 따뜻한 기쁨이다. 물의 형태는 없다면 없고, 있다면 있는 형태의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언어, 그리고 그것이 계속해서 변하는 언어, 딱딱하게 고정되지 않은 언어, ‘너는 무엇이다’ 어떤 틀을 부여하는 판단의 언어가 아니라 내가 그 안에서 자유롭고 놀고 느낄 수 있는 포근한 언어, 그래서 내가 계속 매혹될 수 있는 언어. 한 편의 시는 눈앞에 없는 것의 ‘존재 밝힘’(하이데거)이며, 화가의 시선은 눈이 보는 것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한다. 시와 회화는 사람이 자기 집에 거주하듯 존재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 오늘 밤, 세찬 빗줄기를 뚫고 건너온, 물방울 속에 뭉쳐 있는 당 신의 전언을 펼쳐 읽습니다. 안타깝게도 법과 규칙의 말들은 죄의 무릎과 무릎 사이에 놓인 순수함을 보지 못하는군요. 세계의 단단한 철판 위에 이성의 흔적을 새기는 사람들, 물의 말 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죄악의 틈새에서 잠들고 자라나는 어린 영혼을 보고는, 아이, 불결해, 눈살을 찌푸리기만 하네요. 하지만 물방울로 이루어진 당신의 말은 그 영혼을 투명하게 비 춰주는군요. 물방울로 오로지 물방울로 싸우는 당신, 물방울의 정의를 행사 하는 당신, 판결과 집행이 아니라 고투와 행복을 증언하는 당신. 당신은 말하죠. 인간은 세상의 모든 단어를 발견했어요. 사랑을 제외하고요. 사랑은 인간이 신에게서 빌려온 유일한 단어에요. 그러니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것이죠. 나는 말하죠. 오늘 밤, 당신은 나와 너무 닮아 낯설군요. 당신은 말하죠. 아니, 당신은 너무 낯설어 나를 닮았어요. 그런가요, 그래요, 그럼, 잘 자요, 당신, 내 사랑. -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 [이미지]로댕(Auguste Rodin), <시인과 詩神>The Poet and the Muse), 1905.
47
1 comment
27 Mar 2019 
Public
 
[말씀]사무엘상 25장 [성찰]“아비가일의 아름다움(美)” 성경은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아비가일을 이해심도 많은데다가 용모도 아름답다고 소개하는 반면, 그의 남편 나발은 고집이 세고 행실이 포악하다고 말한다. 나발의 성품이 어떻게 꼬였길래 그럴까. 나발은 갈멜에 아주 큰 목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많은 가축들을 치고 있었다. 다윗의 부하들은 나발의 일꾼들을 도와 외부의 적으로부터 양떼를 보호하였고 그것들을 치는데 협력하였다. 드디어 양털 깎는 날, 굉장한 잔치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잔치음식을 좀 제공해달라는 안부의 편지를 나발에게 보낸다. 그러나 나발은 음식을 제공하기는커녕 다윗을 모욕하는 말을 하고 부하들을 강도 취급하는 막말을 한다. “도대체 다윗이란 자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즈음은 종들이 모두 저마다 주인에게서 뛰쳐나가는 세상이 되었다.”(25:10). 안면몰수에 은혜를 입고도 되려 모욕하는 배은망덕한 말을 한다. 이런 나발의 언행은 포악하고 야비하다. 다윗은 나발이 선을 악으로 갚는 녀석이라고 판단했다. 다윗은 나발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태에 분기탱천한다. 다윗은 군사 400명을 인솔하여 나발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출정한다. 나발의 포악함이 다윗의 마음속에도 있던 포악함을 건드려 깨운 것이다. “내가 내일 아침까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남자들을 하나라도 남겨 둔다면, 나 다윗은 하나님께 무슨 벌이라도 받겠다.”(25:22) 다윗은 순간 치밀어 올라오는 분노로 이성을 잃은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한다. 다윗은 그동안 광야에서 배운 거룩한 아름다움을 잃은 것이다. 아비가일은 두 남자(나발과 다윗)의 포악한 행동을 직관한다. 그녀는 다윗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재빨리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긴급한 위험을 목전에 둔 위기상담이다. 과도한 행위는 위기를 초래한다. 다윗도 위기이지만 그녀도 위기를 맞았다. 그녀는 잔치 음식을 종류별로 나귀 여러 마리에 나누어 가득 싣고, 다윗을 영접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녀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과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내려 다윗의 발 앞에 엎드려 애원한다. 그녀의 애원은 24~30절까지 짧지 않은 명문장이다. 우선 그녀는 나의 몹쓸 남편에게 조금도 마음을 쓰지 마시길 바란다고 하면서, 잘못의 책임을 자신이 떠맡는다. 그리하여 “이 종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원한다. 그녀가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대접하고 무릎 꿇고 엎드려 용서를 비는 행위는 당연 아름답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이 가장 빛나는 하이라이트는 하마터면 상실할 뻔 했던 다윗의 마음을 다시 일깨워 보전(保全)한 것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당신이 누구인가를 잊지 마시라고 간언한다. “주님도 살아 계시고, 장군께서도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죽은 것으로부터 생명을 짓는 생명의 하나님이지 죽음의 하나님이 아니다. 당신은 “돌팔매로 던지듯이 팽개쳐 버리실” 쓰레기가 아니라 “주 하나님이 생명 보자기에 싸서 보존하실” 분이다. 이제 주님께서 “온갖 좋은 일을 모두 베푸셔서, 장군님을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 주실 터인데” 하찮은 일에 현혹되어 분을 참지 못해서 나발을 상대로 싸우실 분이 아님을 강력히 일깨운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간언이 아니었더라면 시시하고 좁쌀 같은 보복심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에 치명적인 흠집을 낼 뻔 했다. 다윗은 아비가일과의 만남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다시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다윗은 아비가엘의 아름다움과 슬기를 통해 자신 안에 있는 거룩한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하나님은 “오래고도 새로운 아름다움!”(Pulchritudo antiqua et nova)이다. 하나님은 아비가일을 통해 바로 이 아름다움을 다윗과 아비가일 사이에 일어나게 하셨고, 아름다움은 두 사람의 삶을 통해 형태를 부여받는다(gestalten). 빛나는 아름다움의 사건 속에서 추함과 비루함은 봄볕에 눈 녹듯이 사라진다. 성경은 나발이 술 취한 후에 “갑자기 심장이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열흘쯤 지났을 때에, 주님께서 나발을 치시니, 그가 죽었다.”(25:37-38)고 쓰고 있다. 아비가일은 처음 다윗에게 몸을 숙여 엎드렸지만[➔이미지(2) + (3)] 지금 다윗은 마음을 숙여 엎드려 아비가일에게 청혼한다. 마음이 빠진 엎드림은 굴종일 수 있지만, 마음을 담은 엎드림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 마음의 표현이다. 아비가일과 다윗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엎드림으로써 夫婦사이가 된다. 그 사이는 아름답다. 사순절기, 우리는 주님께 엎드림으로써 주님은 우리의 신랑이 될 것이다. 아비가일은 주 하나님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비추는 아이콘(Icon)이다. 빛이 어둠에 비칠 때 어둠은 사라지듯이 용서와 자비의 아름다움이 비칠 때 포악한 앙갚음의 추함은 사라진다. 아비가일은 아름다움의 아이콘이다. 동남아시아 출신 작가 레인 리린(Rain Ririn)은 바로 아비가일의 아이콘을 그렸다고 생각한다[➔이미지(1)]. 아이콘은 자신을 통해 신성한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콘은 ‘거룩한 것’(聖事)이다.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은 비루한 우리가 참 아름다운 얼굴인 주님의 환한 얼굴을 우러러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통로이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다. 교리적 진리(眞)가 구원의 길을 설계하고, 윤리적 실천(善)이 구원의 길을 닦는다면, 신앙의 아름다움(美)은 구원의 전체형태(Gestalt)이다. 그러므로 ‘미감’은 논리적 지식과 윤리적 실천이 통섭되어 융합되는 존재 자체에 대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총체적 인식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진선(眞善)한 미(美)이다. 오늘 새벽 기도회에서 부른 찬송가는 우리의 전 심령을 밝혀 진선(眞善)한 미(美)를 맛보게 하는 영적 감각을 깨우는 찬송詩이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막혀진 내 귀 여시사 주님의 음성 듣게 하소서 봉해진 내 입 여시사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찬송가 366장) [이미지](1)Rain Ririn, Abigail, 20c; (2)루벤스(Paul Rubens), David Meeting Abigail, ca. 1620s; (3)스피어링(Françoi Spiering), The Meeting between David and Abigail, 양탄자, 1620.
+1
51
17 comments
10 May 2019 
Public
 
[말씀]“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 14:6) [성찰]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3) - “예수 그리스도의 참(眞) 선(善)한 아름다움(美)” 예술신학의 모토(motto)로서 “아름다움을 찿는 신앙”(fides quaerens pulchrum)을 제시한 바 있다. 이 명제는 안셀무스의 명제인 “지성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보완하고 넘어서, 신앙의 구체성과 초월성을 생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드러내려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안셀무스 연구에서 신학의 기쁨과 유용성(utilitas)을 넘어서는 아름다움(pulchritudo), 곧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는 찬란함(speciosa super intellectus hominium)을 말하고 있다.[칼 바르트,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 7ff.] 교회사가 펠리칸(Jaroslav Pelikan)은 예수님상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해 주는 개념은 진•선•미임을 역설한다. 그는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 대주교 예배당에 새겨진 인상적인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 상에 새겨진 “에고 숨 비아 베리타스 에트 비타”(EGO SUM VIA VERITAS ET VITA,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 14:6)에 주목한다. 악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 그리스도는 참 선한 아름다움이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짓밟고 다니며, 사자 새끼와 살모사를 짓이기고 다닐 것이다”(시 91;13). [➔이미지] 펠리칸은 그리스의 고전적 삼중주인 미, 진리, 선에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주가 상응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길’은 아름다운 것(미)을 지칭하며, ‘진리’는 빛을, ‘생명’은 선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표현한다고 해석한다. 라벤나의 그리스도 상은 길, 진리,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표현한다는 사실에서 신앙의 ‘진리’와 ‘선’만큼 궁리(窮理)하지 못했던 신앙의 ‘아름다움’(美)이 새롭게 화두가 될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眞) 선(善)한 아름다움(美)을 보는 것(觀)이다. 참된 삶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 선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은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유한한 표층에서 발하는 은닉된 신적 근원을 보는 것이다. 논리를 다투는 사실들의 세계보다 존재의 진실이 깃드는 세계가 더 크고, 존재의 진실이 깃드는 세계보다 존재의 감각과 감응하는 세계가 더 깊고 높다. 신앙의 진리와 신앙의 실천은 신앙의 아름다움에 대한 즐거움으로부터 나오고 다시 그곳을 지향한다. 우리는 말씀, 특히 시편을 음미하면서 체험하고 오감으로 지각하면서 노래한다. 수도자는 시편을 노래하며 부재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맛본다. 하나님이 몸과 마음에 꾹꾹 차게 현존하신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요일 1:1). ‘말씀을 들음’이 신앙의 출발점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봄’은 신앙이 도달하고 그 안에서 살아야할 안방이다.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욥의 갈망은 얼마나 치열한 것이고 얼마나 비장하고 간절한 것인가? 욥이 원하는 것은 세상의 것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 하나님 자신이다. 욥이 씨름하는 것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이며, 시비곡직(是非曲直)을 가리기 위한 신학적 쟁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 이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내 간장이 다 녹는구나! (욥 19:26-27) 하나님 자신을 보려는 욥의 갈망은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 마침내 욥은 직접 하나님을 두 눈으로 뵙는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욥 42:5) 욥은 사탄의 시험과도 싸우고 세 친구들의 고발과도 다투고 종래의 하나님 이미지와도 겨뤄 마침내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도덕적 하나님 이미지 너머의 신비한 미적 하나님을 직접 그의 눈으로 본다. 교도소 군목으로 사역하는 정영준 목사에게서 온 편지는 지금도 곤궁 가운데서도 하박국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욥처럼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는데, 바로 거기서 그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주는 귀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교도소에서 사역하면서 철창에 갇혀 힘겨워하는 이들, 웃음이 사라진 이들, 눈물 흘리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늘 깨닫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몇몇 교회의 코어멤버들의 신앙고백은 저로 하여금 한없이 작아지게 만듭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떠나고, 가진 것 하나 없는 무일푼이 되었지만 하나님 한 분만으로 감사하다는 그 고백. 누가 봐도 어렵고 힘들고 불편하고 불만과 증오가 가득한 상황에서 그런 감사를 한다는 게 제겐 큰 도전입니다. 그런 도전을 받으며 저의 어려웠을 시절을 기억하며 나도 그런 역설로 가득 찬 성령을 안다는 신앙의 되새김질을 하기도 합니다. 교도소 안에서 성령체험을 한다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부흥회 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기도하고 싶을 때 소리 질러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한국교회 안의 독특한 운동인 성령체험운동은 새벽기도, 통성기도, 카리스마적 영성 등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토양에서 영적으로 성장한 형제들은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희 형제들도 한국교회 안의 생생한 성령체험은 하지 못하지만, 다양한 방법을 통해 성령을 체험합니다.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을 통한 성령체험, 다른 하나는 죽음까지 감당한 예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섬김을 통한 성령체험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을 체험한 소수의 형제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생명력이 있어서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새싹이 돋으며, 싱그러운 열매가 열립니다. 함께 지내는 동료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한’ 일들을 거뜬히 해냅니다. 성령에 대한 체험은 그만큼 힘 있고 능력 있는 체험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성령체험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글과 말은 공허합니다.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죽은 시간이고, 그들이 하는 말은 공중에서 흩어지며,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눈을 감아버립니다. 성령은 곧 체험이라는 확신이 요즘 많이 듭니다.” [이미지] <승리자 그리스도>, 라벤나 대주교성당(6c)
60
16 comments
21 Oct 2019 
Public
 
[아름다움에 대하여] 아름다움, 신앙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생각한지 20여년이 되어간다. 처음에 지인들에게 예술신학, 미학 등의 얘기를 했더니 먹고살만한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신앙의 아름다움이란 말이 생각과 마음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간 <기독교신앙의 아름다움>(2003), <예술신학>(2011), <기독교미학의 향연>(2018)이란 책을 통해 생각을 정리했다. 최근 『아름다움』(이종건 지음, 서광사 2019)이란 책을 단숨에 읽었다. 그는 ‘예술과 미학의 세상’에 아름다움이 컴백한다고 쓰고 있다. 비난과 배척의 오랜 어둠을 떨치고 조용하게 다시 미국과 유럽에서 논의되기 시작한다고 1장을 시작한다. 같은 생각을 하는 책을 발견하고 너무 신났다. 사실 10여 년 전 미술작가들 모임에 가서 ‘아름다움’에 관해 얘기했더니 아주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취급하더라.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름다움은 심지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며 겪는 고통을 모두 겪는 데 있다”(소크라테스) “만약 이 세 그루의 나무들(진리, 선, 아름다움)의 꼭대기가 모여들 때... 진리와 선이 너무 분명하고 직접적이어서 꺾이고 잘려나가 올라갈 수 없다면, 아마 환상적이고 예측불가능하고 기대하지 않은 아름다움이라는 줄기가 바로 그 자리에 뚫고 올라갈 것이며, 그리함으로써 셋 모두의 일을 완수해낼 것이다”(솔제니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보거나 만질 수 없다. 그것들은 가슴에 느껴야 한다”(헬렌 켈러) 그 느낌의 시간에 여러분들을 귀중하게 모십니다. ========================== <예술신학 콜로키움 & 북콘서트> 여러분, 안녕하세요? 10월 예술신학 콜리키움을 안내합니다. 특히 이번 콜로키움은 예술목회연구원에서 최근 출판한 두권의 책, 박종석, <아름다움의 프락시스>(예술과영성, 2019) & 손원영편, <교회밖교회: 다섯빛깔가나안교회> (예술과영성, 2019) 북콘서트로 진행합니다.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1. 일시: 2019.10.28.월, 오후7-9시 2. 장소: 중앙루터교회 (담임: 최주훈 목사) 진행/사회: 이강선 교수(성균관대) 1부: 박종석교수, <아름다움의 프락시스> 노래: 바리톤 박혁순 목사 피아노: 피아니스트 서희정(Hee-Jeong Suh)언님 2부: <교회밖교회> 필자와의 대화 가나안교회-사진영상(박춘화 언님) 노래: 박혁순 목사 피아노: 서희정 피아니스트 * 주차가능(가급적 대중교통 이용바람) * 당일 책구입 가능 * 회비 없음 예술목회연구원장 손원영 올림
92
16 comments
27 Apr 2019 
Public
 
[말씀]“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κύριος ὁ θεός, ὁ ὢν καὶ ὁ ἦν καὶ ὁ ἐρχόμενος, ὁ παντοκράτωρ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Ἐγώ εἰμι τὸ Ἄλφα καὶ τὸ Ὦ’ 하고 말씀하십니다.”(요한계시록 1:8) [성찰]부활의 지평(6) - “시간과 역사의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간과 역사이해의 새로운 지평, 곧 <시간과 역사의 부활>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한때 한국교회에서 부활을 환생의 모델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환생의 현실이 반복되는 자연의 모습을 닮았다면, 부활은 같은 것이 늘 되돌아오는 반복(동일자의 영원회귀)이 아니라 차이를 만드는 새 창조를 의미한다. 신화는 역사의 경험을 말살한다. 신화에서 역사의 단일성, 개체성, 유일회성이 상실되고 역사의 독특성이 구조의 보편성의 원리 아래 용해된다. 신화 속에서 역사가 지양된다. 역사가 불안한 시대에는 신화 - 역사 - 신화의 재현을 고대한다. 그러나 성경적 전통에서 부활사건은 부활의 역사 없이 있을 수 없으며, 시간은 사건 없이 생각될 수 없다. 성경에서는 절대의 시간이나 균질의 시간이 아니라 복수(複數)의 시간, 여러 형태의 복수의 <때>가 나온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전도서 3:2-8) 위의 복수의 시간이해는 자연의 생성소멸에 터하여 이해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 및 성실하심과 결합되어 이해된다. 한국의 전통적 시간이해는 1년 자연의 움직임에 근거해 만들어진 24절기인 것처럼, 희랍-로마세계에서도 일 년은 태양력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역사의 목적은 운명이나 행운, 별들의 세력에 의한 것이다. 기독교는 시간을 자연의 움직임에 기초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역사란 사물과 사람을 부르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 점이 바로 성경과 기독교의 새로운 시간이해이며 역사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건과 시간의 질서라는 개념을 통해 역사는 순환한다는 그리스의 시간관을 비판한다. 역사는 동일한 시간적 사건이나 일정한 순환이나 주기에 의해 재연되는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창조와 함께 세운 언약이 시간들을 근거 지었듯이, 하나님의 새 창조 사건인 예수님의 부활이 교회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간 경험, 곧 교회력으로 나타난다. 근대 계몽주의적 역사이해는 모든 실재가 원칙적으로 합리성을 띠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한다. 여기에는 모든 것을 일반적 이성의 원리로 파악하려하기 때문에, 모든 사건은 원리상 직선적이며 동류(同類), 동질(同質)에 속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같은 것은 오직 같은 것에 의하여 인식된다”는 인식 원리가 적용된다. 그러므로 창조자와 피조물, 신앙과 사유, 역사와 이성 사이의 분리가 진행된다. 시간의 질적 체험은 사적 영역에 묻힌다. 시간은 철저하게 객관화되고 계량화된다. 근대의 계량화할 수 있는 시간이해는 경험에 의한 질이 탈락되기 때문에 결국 공허하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시간과 역사 이해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은 동류 혹은 동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에 근거한다. 신앙과 사유는 다른 종류의 진리인식의 방법이다. 계몽주의자 레싱은 ‘우연적인 역사적 사실’과 ‘필연적인 이성의 진리’ 사이에는 건널 수 없고 쿠린 냄새풍기는 넓은 시궁창이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의 진리가 역사적 진리라면 그것은 진리의 기준치에 모지란다는 주장이다. 계몽주의적 역사이해는 과거-현재 미래의 사건이 같은 종류의 사건이라는 전제하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같은 종류에 속해야 한다. 자연의 여일(如一)한 운행과 결합한 시간이해는 전도자가 말하는 것처럼 ‘같은 것의 영원한 반복’이다. “해는 여전히 뜨고, 또 여전히 져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거기에서 다시 떠오른다”(전 1:5). 역사는 특정한 경험의 때가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질적이며 따라서 이질적 경험들이 탈락된 공허한 시간이다. 자기 자신의 실재로부터 귀결된 것만을 가능하다고 여기는 세계는 객관적으로 무신론적이다. 만일 일체의 사건이 원칙적으로 이전의 것과 이후의 것이 동일하며 상호간에 비교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면, 새로운 것을 말하는 어떤 특수한 구속사의 실재는 물론 그 실재의 가능성마저 불가능하게 된다. 원리상 태양 아래 새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전 1:9-10). 그렇게 되면 일반적인 것이 특수한 것을 판단하며, 반복적인 것이 유일성을 덮어 누르고 부정하고 배제한다. 따라서 특수하고 유일하며 새로운 생명과 역사를 가져온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일반적 역사이성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고, 부활은 역사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계몽주의에서 신앙은 어떠한 인식론적 지위도 거부당한 감정으로 환원되고 부활도 역사적 권리를 기각 당한다. 칸트의 이성비판이 이성을 제한하여 신앙에 공간을 마련한다고 했지만, 결과는 이성과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로 인해 생긴 긴장은 서로 토대를 침식하고 폄하하게 되었다. 신앙은 이성이 침범할 수 없는 순수한 내면의 <감정>이나 심리세계로 파고들든가, 이성이 감히 넘볼 수 없는 <피안의 세계>로 도피했다. 근대에서는 인간학은 보편적인 것이고 그리스도론은 특수한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론은 보편적 인간학의 운반체요 그 부속기능, 암호, 상징, 해석범주, 변주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리스도론의 신비는 인간학이다’ 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공통적 전제다. 포이어바흐 이후, 신학은 보편적 인간학임에 다름 아니다, 라는 선언이 항상 이 전제 속에 웅크리고 있다. 그 첨단적 주장이 불트만의 제자 허버트 브라운(H.Braun)이나 프리츠 부리(F.Buri)에게서 나타난다[발터 카스퍼, 『예수 그리스도』, 74이하). 역사의 특수한 것, 유일한 것에 대한 일반적 이성의 승리는 이성의 자기제한이라는 자기폐쇄로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역사해석에서 유일회적인 것, 새로운 것, 연역 불가능한 것, 이질적인 것을 위한 창조적 여백과 틈을 인식해야 한다. 부활은 실증주의적 역사, 경험적 역사주의의 닫힌 한계에 구멍을 내는 틈이다. 부활은 균일한 역사이해에 질이 다른 ‘겨를’을 생성한다. 부활은 새 것이라는 범주가 진지하게 평가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역사이해를 수립한다. 이때 비로소 역사적 사유가 참으로 세계를 개방하는 역사적 사유로 전개될 수 있다. 부활의 역사는 정확하게 이러한 역사의 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를 통해 근대적 계몽주의의 <역사이해의 부활>을 생각해야 한다. 부활의 역사는 부활이 <일반 역사의 의미>(불트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부활>이 되어야 한다. 성경의 묵시-종말론적 역사이해에 따르면 부활은 종말에 보편적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그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선취적으로 일어났고 예수님 부활의 역사는 역사의 부활이 시작된 표지(Zeichen)가 된다. 이것은 근대의 역사관이 인정하고 수용해야 할 정말 매우 긴요한 포인트다. 예수님 부활의 역사를 통해 동질적, 동류적 인과(因果)의 시간 틀 안에 억류된 <역사의 부활>이라는 지점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 부활을 통해 역사의 부활이 근대이후(postmodern)의 역사이해로 수용되지 못할 경우, 부활의 역사는 교회 안에 갇힌 신자들만의 주관적 신앙의 역사라는 게토(ghetto)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모든 문화는 하나같이 특정한 시간 경험이라고 말하면서, 진정한 혁명의 본래적 과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마르크스) 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시간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변화된 시간이란 구원의 생명을 가져오는 해방적 시간 경험, 즉 카이로스의 시간을 말한다. 카이로스의 시간이란 앞서 전도서의 ‘때’에서 말한 한순간 삶을 가득 채우는 시간경험이며 무한한 양적 시간이 단박에 제압되며 현재화되는 질적 시간이다[아감벤, 『유아기와 역사』, 165-186). 부활은 바로 이런 경험이 충만하고 활력이 흘러넘치는 시간에 속하며 사실 그 시간이해의 모체이다. 우리는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라고 들어 왔다. 이 주장은 ‘그리스도의 죽음’ <과> ‘부활’이 단순히 구원의 사실들의 열거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와 같이 부활을 역사적 사실(fact)이라고만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부활과 함께 시작되는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를 가져오는 묵시-종말론적 희망을 모를 뿐 아니라 그르치게 된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역사를 균일한 역사가 아니라 이질적 역사인 부활의 전망 속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점을 얻게 된 것이다. 균일한 역사 속에서의 자기 인식은 동어반복적이며 자기애(自己愛)적인 자기 확인에 불과하다. 이질적 역사 이해 속에서 자기변화와 변혁이 시작된다. 이점이 근대적 역사이해에 던지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포인트이고 도전이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겨우 교회의 부활교리에 동의한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는 질적으로 열려 있고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에 안차게 참여한다는 것이다. “모든 하나님 인식은 다른 것에 대한 놀라운 인지와 철저한 자기변화의 경험과 함께 시작한다”(몰트만). 부활신앙은 죽음에서 생명을 일으켜 세우며, 삶의 미래와 관련하여 권력과 소유의 치명적 망상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생동적 역능이다. 따라서 성령과 희망 가운데서 열어주는 부활의 역사 없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부활은 사실(fact)을 뜻하지 않고 ‘되어감’(becoming), 곧 죽음으로부터 삶(생명)으로 넘어감(transition)을 의미한다. ①부활의 희망은 다른 삶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죽을 삶이 다르게 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②부활은 “피안의 위안”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의 옛 삶으로부터 해방된 생명의 삶이다. 생명의 환희가 찬연히 빛나는 세상이 부활의 세상이다. ③부활은 영원무궁한 삶을 이미 지금(只今, right now) 충만하고 황홀(탈아)하게 경험하게 하는 지극한 현재인 숭고한 지금(至今)이며, 이 지금은 생의 세계 구석구석에서 ‘영원한 현재’로 두루두루 향유된다. 부활의 빛이 가득한 이 아침 맑고 환(淸明)한 빛이 어디엔들 비치지 않으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인간 어둠을 우리 자신의 어둠으로 깨닫게(의식화) 하는 빛 부활의 주님은 인간의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현재의 경험으로 끌어 모아 충만한, 흘러넘치는 현재가 되게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인간의 일상을 찾아와 그 속에 머물고자 하며, 우발-발견적인 창조적 순간[세렌디피티(serendipity)]이 생겨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 밖에 존재하지 않고 우리 몸속에, 우리의 새로운 생명의 체험 속에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하루, 하루의 삶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부활은 ‘여기 보이는 삶’의 축복이며 동시에 ‘보이지 않는 삶’의 축복이다. 세계사를 종말의 역사로 규정하며, 우리 역사적 모순과 갈등의 영역들을 새 창조의 기다림의 지평 위에 세우는 용기와 믿음이 바로 부활의 역사이다. 부활은 법칙의 일반성과 생각의 균일성의 무덤 속에 갇혀 있는 시간의 역사를 살려 낸다. 예수님 부활의 역사는 인간이 세계의 주체로서 이전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새 역사’ ‘신 세계’를 만든다는 인간주체의 역사이해에 대한 심판이다. 그림은 초현실주의자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승천>이다. 일반적인 교회 도상학을 확 벗어난 아주 특이한 <승천> 이미지다. 하늘로 오르는 그리스도를 무연히 바라보는 제자들의 관점을 부각하였다. 제자들은 산 위에 올라 구름에 싸여 황금의 원 안으로 들어가 점점 시야에서 멀리 사라질 예수님의 발을 보고 있다. 예수님 부활의 역사가 역사의 부활로 넘어가면서, 예수님 부활은 역사적 사건으로 확인되지만, 역사를 초월하고 넘어서는 역사의 부활로 옮겨지면서 부활은 여전히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의 핵심에 머물러 있다. [이미지]살바도르 달리(S.Dali), <승천>, 1958.
33
10 comments
10 Dec 2019 
Public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다.……그는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44).[2482] 거짓말의 경중은 거짓말로 왜곡되는 진실의 성격에 따라, 그리고 상황과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속마음과 거짓말의 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따라 평가된다. 거짓말 자체는 소죄에 지나지 않지만, 정의와 사랑의 덕을 심각하게 해칠 때에는 죽을죄가 된다.[2484] 거짓말은 그 자체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거짓말은 알려진 진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구실을 하는 말을 악용하는 것이다. 일부러 진실에 어긋나는 말을 해서 이웃을 오류에 빠뜨리고자 하는 의도는 정의와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다. 속이려는 의도가, 진실을 알지 못하게 된 사람들에게 치명적 결과를 가져다줄 위험이 있을 때, 그 유죄성은 더욱 크다.[2485] 거짓말은 (정직의 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가한 명백한 폭력이다. 거짓말은 모든 판단과 결정의 조건인 타인의 인식 능력을 해친다. 거짓말에는 사회 불화와 그 불화로써 생긴 모든 악의 싹이 포함되어 있다. 거짓말은 어느 사회에나 다 해로운 것이다. 거짓말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뿌리째 흔들며 사회 관계의 구조를 파괴한다.[2486]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 [이미지] 샤갈, <십계명을 받는 모세>, 1960-66.
70
6 comments
7 Jul 2019 
Public
 
[말씀]“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창세기 4:8) [성찰]“同生 아벨을 살해하는 兄 가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감질나게 불완전하다. 사건의 전개는 예외적으로 간결하고 개략적이어서 그 원인과 이유를 알기가 턱없이 부족하다. 가인의 제물은 왜 수용되지 않았는지 설명과 이유가 없다. 어떻게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수용했는지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설명도 없다. 제물은 하느님이 요구하신 것도 아닌데..., 하느님에게 무엇을 좀 드리려는 태도는 인간에게 생래적인 것인가,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것인가, 종교적 헌신의 자발적인 표현인가, 가장 지고하고 고귀하고 숭고한 인간의 인간성인가? 그러나 이야기는 종교적 감정의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형태조차도 인간을 지독히 타락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달갑게 받지 않으신다. 왜 그런 것일까? 설득 당할만한 이유가 없다. 나중에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히 11:4), 라고 증언한다. 히브리서 사가는 어떻게 아벨의 제물이 믿음의 제물인지 알 수 있었을까? 이 이야기의 이면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문제가 숨어 있다면, 이 야기의 표면에는 형제에 대한 시기와 증오의 문제가 드러나 있다. 가인과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하느님은 가인의 마음의 상태를 읽고 최악의 사태를 예견한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가인이 행한 올바르지 못한 일은 무엇인가? 도무지 본문 속에서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큰 빈 자리를 남겨 놓은 채 하느님은 가인에게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이 도덕적 자율성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인정하신다. 최종적 선택의 자유가 인간에게 달려 있다. 가인은 아우 살해를 선택한다. 2-11절까지 ‘아우’가 7회 등장한다. 가인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아벨이 가인의 ‘아우’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가인의 행동과 양심과 눈에는 아우 아벨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아벨을 어떻게 금방 잊을 수 있는가? 왜 아벨을 보지 않는가? 살해한 아벨의 유령이 가인의 심령 안팎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주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러나 가인의 답변은 의외이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죽인 자는 여전히 얼굴을 벗지 않고 心臟을 꺼내놓지 않는다 여전히 拉致 中이고 暴行 中이고 鎭壓 中이다 計劃的으로 卽興的으로 合法的으로 사람이 죽어간다 戰鬪的으로 錯亂的으로 窮極的으로, 사람이 죽어간다 -이영광, <유령 3>(부분)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다!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마 14:26) “유령” “이것은 소름끼치는 그림자, 그림자처럼 홀쭉한 몸 유령은 도처에 있다” -이영광, <유령 1>(부분) 그러나 가인은 아벨의 유령조차 애써 부인한다. 아벨이 유령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대낮에 사람을 만날 때마다 사라지는 것 같지만, “유령이 될 줄은 몰랐지만, 유령도 몸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유령의 젤로 큰 고민은 뭔지 아세요? 어떻게 하면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하는 거예요”(이영광, <유령 2> 부분). 모든 인류 살해는 동시에 형제살해임을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말해준다. 죽인 것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좋은 동기를 가진 예배, 하느님에 대한 헌신이 최악의 결과, 인간의 최초의 살인을 빚을 수 있는가? 종교사의 비극이지만 가장 심원한 진리, 불가사의한 인간의 진실을 담고 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인간이 속 깊이 똬리 틀고 눌러앉아 있는 그 알 수 없는 마음(무의식)을 가장 절실하고 긴급하게 그러면서 근본적으로 찾고 있는 비극적 생의 물음이다. 렘브란트의 이 그림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끔찍한 순간에 멈추어져 있다. 가인은 잔인하게 자기의 친동생 아벨의 목을 한 손으로 조르고, 또 발꿈치로 아벨의 몸통을 누르며, 당나귀의 턱뼈를 힘껏 들고 있는데, 그 턱뼈는 곧 아벨의 얼굴을 정면으로 빠갤 것이다. 발버둥을 치는 가련한 아벨, 필사적으로 저항해 보지만 가인의 완력에 완전히 제압당한 모습이다. 목자를 상징하는 지팡이가 머리 옆에 나둥그러져 있다.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두 손으로 가인이 든 흉기를 막아보려고 방어동작을 취하지만 헛수고일 뿐이다. 살려달라는 절규와 애원, 몸부림도 소용없이 허공 속에 묻혀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시선을 옮겨 뒤편을 보면 두 제단이 보인다. 하나는 낮은 제단이고 다른 하나는 높은 제단이다. 낮은 제단은 동생이 제물을 바쳤던 곳이고, 높은 제단은 형이 제물을 바쳤던 곳이다. 아벨의 제단에는 네발 달린 양의 형상이 그려져 있고 가인의 높은 제단 위에는 곡식더미가 얹혀있다. 아벨의 제단은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이 뭉개져 있다. 하나님이 위에서 슬픈 표정으로 인류 역사상 처음 일어난 지상의 살인사건을 주먹으로 턱을 괴고 쳐다보고 계신다. 선한 목자의 죽음은 권력 당국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거기까지 상상하기에 현실은 급박하고 인간 개인의 고통은 피가 되고 그 고통의 피가 꽃이 될 날은 너무 아뜩하다. 인간의 역사에서도 한 인간의 탐욕과 권력욕이 자유와 해방의 공간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던 사건이 비일비재하다. 김남주 시인의 다음 시는, 지난한 죽음의 고통을 겪은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물음으로 대답하는 그분의 화법을 빼닮았다(욥 38~41장).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피가 보이지 않는다 꽃은 어디에 있는가 피는 어디에 있는가 꽃 속에 피가 잠자는가 핏속에 꽃이 잠자는가 꽃이다 영혼이다 피다 육신이다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 육신이 보이지 않는다 꽃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피의 육신은 어디에 있는가 꽃 속에 영혼이 깃드는가 핏속에 육신이 흐르는가 영혼이 꽃을 키우는가 육신이 피를 흘리는가 꽃이여 영혼이여 피여 육신이여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 그대는 바다의 심연에 육신을 던져보았는가 ... 그대는 새벽을 출발하여 폐허를 가로질러 황혼을 만나보았는가 황혼의 언덕에서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 난파선의 침몰을 보았는가 승천하는 불기둥을 보았는가 ... 그대는 황혼의 언덕을 내려오다 폐허를 가로질러 또 하나의 새벽을 기다려보았는가 그때 동천에서 태양이 떠오르자 서천으로 사라지는 달을 보았는가 죽어버린 별 죽으러 가는 별 죽음을 기다리는 별 그대는 달과 별의 부활을 위해 새벽의 언덕에서 기도를 드려보았는가 그대는 겨울을 겨울답게 살아보았는가 그대는 봄다운 봄을 맞이하여 보았는가 겨울은 어떻게 피를 흘리고 동토(凍土)를 녹이던가 봄은 어떻게 폐허에서 꽃을 키우던가 겨울과 봄의 중턱에서 보리는 무엇을 위해 이마를 맞대고 눈 속에서 속삭이던가 보리는 왜 밟아줘야 더 팔팔하게 솟아나던가 잡초는 어떻게 뿌리를 박고 박토에서 군거(群居)하던가 찔레꽃은 어떻게 바위를 뚫고 가시처럼 번식하던가 곰팡이는 왜 암실에서 생명을 키우며 누룩처럼 몰래몰래 번성하던가 죽순은 땅 속에서 무엇을 준비하던가 뱀과 함께 하늘을 찌르려고 죽창을 깎고 있던가 아는가 그대는 봄을 잉태한 겨울밤의 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그대는 아는가 육신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영혼이 어떻게 꽃을 피우고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는가를 꽃이여 피여 피여 꽃이여 꽃 속에 피가 흐른다 핏속에 꽃이 보인다 꽃 속에 육신이 보인다 핏속에 영혼이 흐른다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그것이다! -김남주, 「잿더미」(중에서) [이미지]렘브란트, <아벨을 살해하는 가인>, 1650년.
63
13 comments
28 Apr 2019 
Public
 
…다 밝히신다는 의미다. 하느님의 진리 앞에서 모든 것이 밝혀진다는 것, 이것이 구원이다.”(『예수마음코칭』, 290) 교회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主님이라고 긍정하고 고백한다면 세상의 통치자 가이사는 우리의 주님이 아님을 부정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거짓 및 폭력과 협상하는 것은 부활 때문에 불가능하다. 맘몬을 위해 도모하는 것은 부활의 길이 아니다. 부활 메시지는 무력(금력)을 사용하라는 부름이 아니라 모든 불의와 폭력과 거짓에 대해 진리와 사랑의 이름이 승리한다는 약속이다.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은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의 가르침을 통해 이제 세상 만민에게 미치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치’(regum gratiae)를 가르쳤고, 기독교 정치윤리의 기초가 되는 ‘권능의 통치’(regnum potentiae)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을 말하는 ‘영광의 통치’(regnum gloriae)를 가르쳤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활성화된 종말론의 주제인 하나님 나라는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혁명에 대한 희망의 감각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영역은 소위 ‘잉여 인간’ 까지도 해방하고 용기를 주고 축하함으로써 사회 안으로 통합하는 사회의 미적 융합으로서의 정치의 부활로 확산되며 자연과 우주의 부활에서 완성된다. 국가의 권력은 나약한 백성의 고통의 경험과 기억을 과거의 무덤에 묻어두려고 한다. 반면 피안을 추구하는 교회의 권력은 고통의 기억을 미래(피안)로 밀어두려고 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체험을 현재에 재현하는 작업이며, 그래서 기억은 주체적 성찰의 시간이다. '고난의 기억'(memoria passionis)은 진실과 정의에 대한 갈망이다. 우리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하고들 말한다. 슬픔과 동정심 때문에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세월호 참사로 대변되는 거짓되고 폭력적인 사회의 전 과정을 성찰하는 작업을 통해 진실과 정의를 얻으려는 비판적 현실인식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면전에 그의 몸에 난, 아직 아물지 않았을 푸르게 부은 그의 상처를 열어 보이신다. 그분은 잘못 지나간 것을 그냥 지나가게 하지 않는다. 그는 “용서하고 잊으라,” 하고 말씀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자신에게 한 일을 잊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그들의 버림과 배신의 고통스러운 결과에, 수치스럽고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자기치부와 직면하도록 하신다.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요 20:27). 그러나 그들을 꾸짖음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 난 몸을 보여주심으로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은 “주 곧 너희를 치료하시는”(출 15:26) 분이시고 예수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헨리 나윈)이시다. 예수님은 고통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현재화하여 본디 모습을 공유함으로써 치유자가 되신다.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은 시편에서 반복된 주님만이 홀로 하나님이시고, 주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고백을 확증한다. 부활은 희생자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고난의 연대성을 표시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리”(시 61:7)의 권능을 표현한다. 주님, 주님과 같은 분이 누굽니까? 주님은 약한 사람을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며, 가난한 사람과 억압을 받는 사람을 약탈하는 자들에게서 건지십니다. 이것은 나의 뼈 속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시 35:10)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엡 6:12)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었다. “우리의 투쟁은 타락한 구체적 개인들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권력자들과 그들의 권위, 그리고 전 지구적 질서와 그것을 존속시키는 이데올로기의 신비화를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을 상대로 복수하고 승리를 거두기 위해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폭력의 죽임보다 크다는 것, 하나님의 용서가 모든 죄악과 정죄보다 넓다는 것을 온 천하에 알리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다. 사랑 안에서는 사랑하는 자만이 사랑의 대상에게서 사랑의 원인인 시차적 대상인 생명을 볼 수 있다. 이젠하임 제단화에 그려진 그림들에서 예수의 생애와 탄생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성화들을 보면, 이 부활의 그림에서 아예 전체가 빛을 조명 받아 밝아지는 것 같다. 그림 아래에 무덤을 막았던 무거운 돌 덮개가 열려 있고 중무장한 군인들은 비틀거리거나 고꾸라지거나 땅에 나자빠져 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몬 음모와 폭력의 최후의 모습니다. 이 그림에는 세 가지가 중첩되어 있다. 다볼산(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변모, 부활과 40일 후의 승천의 모습이다. 부활의 모습이 십자가 책형의 모습보다 더 크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더 이상 세상의 모든 고난이 집결한 듯한 고통의 모습이 아니다. 긴 옷이 예수님의 몸을 싸감고 있는 모양이 계란을 감싸고 있는 얇은 속껍질 같다. 제2의 탄생을 연상케 한다. 번쩍 든 그리스도의 양손은 축복의 손인데, 손 중앙에 십자가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다. 십자가의 손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하고 축복할 수 있다. 예수님 둘레에 몰려들어 넓게 빛나는 빛의 광휘는 태양빛을 방불케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서 형형하는 밝은 빛은 거짓된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광명으로서 계속 빛날 것이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모든 권위와 모든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것이다”(고전 15:24). 마침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될 것이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력은 우리 하나님의 것이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분께서 왕권을 잡으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계 19:1, 6f.) [이미지]마티아스 그뤼네발트, <부활>(이젠하임 제단화 중 오른쪽 날개), 1512-1515.
+1
38
5 comments
19 May 2019 
Public
 
[말씀]“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호 6:3) [성찰]“기독교신학(2)” 일반적으로 신학을 신론에서 시작하지만 나는 그리스도론에서부터 시작하고 싶은 마음을 오래 전부터 간직하고 있었다. 기독교의 하나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말할 때 가장 적합하고 유효하며, 무엇보다 구체적이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론적 의미는 “나는 이다”(ἐγώ εἰμι, ego eimi)에 가장 잘 집약되어 나타나며, 그 결정판은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론의 제목을 이 말씀을 본받아 지었다. 그 말씀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에서 7번 사용된 “나는 ...이다”(ego eimi)의 주장을 명백히 하고 종합한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 6:35, 48).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 9:15). “나는 양의 문이다”(요 10:7). “나는 선한 목자다”(요 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 15:1). 마지막으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이 말씀이 책의 제목이 되게 하려면 한 형용사구문이 되어야겠기에, 나(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명사로 남고 다른 명사들, 길, 진리, 생명은 명사를 꾸미는 형용사로 만들어야 했다. 결국 곰곰이 생각하다가 단어의 특성상 그렇게 되지 못해 단계적으로 생각했다. 먼저 ‘길’이란 은유가 제일 맘에 들어 예수님은 길이고, 길이신 예수님이다. 그다음 진리와 생명은 길을 꾸미는 수식어로 삼았다. 예수님은 참된 길이고 생명의 길이다. 이것들을 합쳐 예수님은 ‘참된 생명(삶)의 길’이 되었다. 이리저리 단어의 위치를 바꾸면서 결국 “참 삶(생명)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다음에 이 책을 완성해야 한다)에 이르게 되었고, 이것들은 각각 “참(眞)된 선함(善)의 아름다움(美)”과 상응함을 알게 되었다. 이 길은 끝이 없는 길, 막힌 데가 없는 길, 하늘로 인도하는 영원한 길, 아름다움 자체이신 삼위 하나님에 이르는 평생 순례의 길이다. 길은 끝이 없구나 강에 닿을 때는 다리가 있고 나룻배가 있다. 그리고 항구의 바닷가에 이르면 여객선이 있어서 바다 위를 가게 한다. 길은 막힌 데가 없구나 가로막는 벽도 없고 하늘만이 푸르고 벗이고 하늘만이 길을 인도한다. 그러니 길은 영원하다. -천상병, <길> 전문 삶을 위협하고 적대시하며, 삶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가장 큰 힘은 거짓이다. 거짓에는 사랑은 사라지고 증오가 깃들어 있다. 참삶은 참된 삶이기도 하지만 거짓과 싸우는 참이 일구어가는 사랑의 삶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랑은 거짓이 잉태한 죽음처럼 강하다(아 8:6).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완전한 사랑은 죽음의 두려움도 내쫓는다(요일 4:18). ‘생명’이란 단어가 삶이란 개념보다 더욱 포괄적이고 생태계의 시대에 시의적절한 표현인데 생물학적인 냄새가 너무 나는 것 같아 인간학적인 색채, 아니 사람냄새가 동실하게 풍기는 ‘삶’을 선호하게 되었다. 생명세계의 광활한 지평을 의식하지만 아직 인간 중심성의 여운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삶’ 자체를 진지한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은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 특히 『미니마 모랄리아』(minima moralia)의 부제가 ‘상처 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이라고 써 더욱 눈길이 감돌고 있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슬픈 학문’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철학의 본원적인 용무로 인정되었으나 철학이 방법론적으로 변질된 이후 지성의 냉대를 받거나 자의적 경구에 머물다가 끝내는 잊히게 된 영역, 즉 ‘올바른 삶’의 이론에 관한 것이다.”로 시작된다. 물론 나는 삶의 소외된 모습들을 보고 겪으면서 ‘올바른 삶’의 중요성을 상실하지 않고 신학도로서 하나님의 은총이 선물한 ‘아름다운 삶’을 꿈꾸고 싶다. 여러 생각이 있을 수 있지만 기독교 신학의 그리스도 중심성은 불변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소중한 유산이다. 슐라이어마허(19세기)와 바르트(20세기)는 이 전통의 위용을 자신의 시대적 물음 속에서 높은 산처럼 드러냈다. 참으로 심장 떨리는 믿음의 결단이고 희망의 약속이며 사랑의 초대이다. 신학공부는 작은 조가비로 망망대해 바닷물을 떠 작은 모래성에 담으려는 시도인 것 같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을 사르면서 자신과 타자의 삶, 공동체의 삶을 살리는 즐겁고 매혹적인 불놀이다. “주님의 집에 쏟은 내 열정이 내 안에서 불처럼 타고 있습니다”(시 69:9). 그림의 주제는 바닷가의 소년과 대화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히포의 주교로 알려진 분인데, 일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성인이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한 소년이 구덩이를 파고 조개껍데기에 바닷물을 떠서 구덩이에 쏟아 붓는 것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성인이 소년에게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묻자, 바닷물을 몽땅 퍼내서 그 구덩이로 옮기려고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소년의 어리석은 행위에 어이가 없어진 성인은 말도 안 되는 일을 당장 그만두라고 타일렀다. 그러자 소년은 갑자기 엄중한 목소리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지금 구상하고 16년간 집필에 몰두한 [성삼위일체론]을 상기시키면서, 성삼위일체의 가없는 신비를 털끝만큼의 작은 부분이나마 인간의 글로 옮겨 쓰는 일보다 차라리 광대한 바다를 작은 구덩이에 옮겨 담는 일이 훨씬 쉬울 것이라고 질책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성인이 자신의 자만을 크게 뉘우쳤음은 당연했다. 이 이야기는 페트루스 나탈리부스Petrus Natalibus가 쓴 [성인 행전]Catalogus Sanctorum et gestorum eorum에 실려서 널리 읽혔고 또 조형예술의 주제로도 각광을 받았는데, 앞서 나온 유비의 전형적 논리형식을 보여준다.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소년 = 아우구스티누스 바다 = 성삼위일체의 신비 구덩이 = 그의 책 [성삼위일체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닷가의 소년을 만나고 산책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시편의 시인과 욥의 고백이 그의 머리를 스치지 않았을까? 하나님,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도 심오한지요? 그 수가 어찌 그렇게도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하면 모래보다 더 많습니다.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시 139:17-18) “이것들은 그분 길의 한 조각일 뿐, 그분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작은 속삭임만 듣고 있나? 그러니 그분 권능의 천둥소리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나?” (욥기 26:14) 탁월한 인간은 많은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전문가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큰마음보다 더 위대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유한한 개념으로 알 수 없고, 인간의 언어와 생각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 둘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고 하는 여하한 시도도 결국 ‘무지의 지’(docta ignorantia)로 인도한다. 그것이 인간의 수고였다면 허망한 것이었겠지만, 자연과 하나님과 함께하는 놀이(Spiel)였다면 즐거운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놀이에 인간을 초대한다고 믿는다. 놀이의 목적은 모래성 안에 바닷물을 가두려는 허황된 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에 손을 담그고 작은 조가비로 조심스럽게 바닷물을 떠 그들이 만든 모래성 안에 붓는 반복되는 이 흥미진진한 과정에의 몰입인 창조적 사랑놀이, 그 자체가 주는 흥취와 즐거움에 있을 것이다. [이미지]피터 폴 루벤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1639. 캔버스에 유채, 263 x 175 cm, 프라하 나로드니 미술관.
49
20 comments
17 Apr 2020 
Public
 
낭만주의 종교 & 미술 근대정신이 성장하는 19세기에는 종교미술이 전대미문의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위기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변화를 통해 새롭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그 영향력과 양적인 수자는 현격하게 줄고 있었다. 과학에서의 중세적 세계관의 전복과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이후, 이에 버금가는 정신적 변화가 1800년도에 일어난다. 낭만주의 운동이다. 낭만주의 운동 또한 계몽주의처럼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운동이다. 이 운동은 시와 문학, 철학과 음악에서 19세기 후반기까지 지속된다. 미술에 국한시켜 낭만주의의 대표자들은 들라크루아(프랑스), 터너(영국) 그리고 프리드리히(독일)이다. 독일에서 초기 낭만주의 운동은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Athenäum지를 중심으로 활성화되는데, 거기에는 신학자 슐라이어마허와 시인 노발리스도 중요한 멤버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슐레겔과 함께 플라톤을 독일어로 번역 시작했으나, 그와 헤어지는 바람에 20년 이상 걸려 평생 홀로 플라톤 전집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슐라이어마허가 낭만주의 시절 그 언어와 정신에 젖어 30세 약관에 저술한 책이 그 유명한 『종교론』이다. 그는 이 책에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들을 위한 강연”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그는 당시 교양인(계몽주의자들)이 추구하고 이해했던 종교와 전혀 다른 새로운 이해를 말하고 싶었다. 종교는 이성(ratio)이나 체계(Systematik)나 교리(Dogma)를 통해 접근해야 될 사태가 아니라 생생한 직관(Anschauung)과 감정(Gefühl)을 통해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가르침을 통해 포착되거나 지식을 통해 전달될 것이 아니라 개별적 경험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기원이 거룩한 영혼이 우주에 의하여 접촉될 때 발생하는 하늘의 불꽃에 있으며, 유한자 속에서 무한자를 직관하는 것이다. 이 기원은 우리 자신 안에 있으며, 우리들 각자의 인격 속에 있다. 종교는 개인의 주체적 지각 속에 있다.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체험의 직접성이다.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느낌과 맛”(Sinn und Geschmack für das Unendliche)이다. 1800년도를 중심으로 나타난 정신적인 특징은 “내적인 것으로의 전회”이다.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부터 실존적이고 주체적인 것(주관성)으로의 전환이다. 시인 노발리스(Novalis)는 이를 가장 명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주의 여행을 꿈꾼다. 그러나 그 우주가 우리 안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요청한다. “신비스러운 길이 안(내면)으로 열려 있다. 세계와 함께 하는 영원은 내 안에 있든가 아무데도 있지 않다. 내면성(마음)으로 향한 눈길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화가는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다. 프리드리히는 슐라이어마허와도 인연이 깊다. 프리드리히가 작품을 그릴 때 사용한 모토는 다음과 같다. ”화가는 자기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단순히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면 안에서 본 것을 그리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내면 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면 그의 눈앞에 펼쳐진 대상을 그리는 것도 포기해야 한다.” 프리드리히의 작품에서 인간의 외형은 아주 작게 나타나거나 등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풍경은 대개 크고 웅장하며 새로운 질을 얻게 된다. 풍경(자연)은 인간 영혼의 거울로서 인간의 내면의 그림이 된다. 프리드리히가 그의 작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물을 그려 넣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경건한 화가일 뿐 아니라 매우 깊이 있는 종교적인 화가임에 틀림없다. 그가 그린 근대적 인간됨은 동시에 종교적이다. 그는 과거의 중요한 종교적 물음이었던 소멸하는 유한한 것이냐 소멸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냐를 묻지 않고, “유한한 것 속에서 무한한 것의 직관”(슐라이어마허)에 대해서 묻는 “아름답고 거룩한 자연의 선포자”(노발리스)이다. 서쪽으로 기우는 햇살을 은은하게 머금고 있는 자연 풍경이나 산위에 세워진 십자가는 하나의 새로운 제단화이다. 교회의 제단 앞에 그려진 제단화가 자연이 된 것이다. <테첸의 제단화>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1807-1808) 그는 교회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고 그걸 견디어 내야만 했다. 정통 기독교(교회)에서는 낭만주의와 낭만주의적 종교 이해를 종교의 자연화라고 비판하고 거부했다. 그래서 근대 기독교 사상사에서 낭만주의와 종교의 깊은 관련성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는 다루는 반면 낭만주의는 대개 빠져있다. 예외가 있다면 폴 틸리히의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이다. 그는 낭만주의 뿐 아니라 셸링도 한 장을 할애하여 다룬다. 나는 이 책을 매우 높게 평가하며 좋아한다. 낭만주의는 미적 범주를 통해 세계를 본다. 칸트의 판단력비판, 프리드리히 실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 그리고 셸링의 예술론 등이 대표적이다. 틸리히의 낭만주의에 대한 이해는 한국에 소개된 낭만주의 저서들에서보다 매우 간결하고 탁월하며 분명하다. 그가 제시하는 많은 특징중에 낭만주의의 공헌은 자연의 성례전성의 발견이다. 틸리히는 성례전적인 사고(감정)가 계몽주의와 도덕주의에 의해 상실되었다고 본다. 특히 개신교는 성례전적인 감정이 소멸되었거나 성례전적인 사고가 매우 궁핍하다. 낭만주의는 무한이 유한 안에 현존하고 유한이 무한의 명령에 따를 뿐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치유와 구원의 능력, 곧 신적인 것의 현존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틸리히는 말한다. 자연은 신적인 현존을 태고적부터 담고 있음을 근처의 모락산을 등반하고 백운호수와 학의천을 산책할 때마다 느낀다.
+2
67
12 comments
24 Aug 2020 
Public
 
…‘아름다움’을 복음의 진리 속에서 분리하지 않고 함께 구현해내는 전통에 적잖이 매력을 느껴, 일단 정교회(비잔틴) 신학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이 말은 정교회의 수도원 영성, 전례(예배) 등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뜻이다. 그동안 한국에도 비잔틴(정교회)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도서가 많이 번역되었다. ⑴신학 입문. 『동방정교회신학』(클린데닌 저/지승민 옮김), 『비잔틴 신학』(메이엔도르프/그레고리오스 박노양 옮김), 『동방정교회의 역사와 신학』(디모데 웨어/이형기 옮김) ⑵신비신학 & 영성. 『동방교회의 신비신학에 대하여』(로스키/박노양), 『헤지카즘의 신학자 성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 정교회 헤지카즘의 역사와 신학』(메이엔도르프/박노양), 『그리스도교 동방 영성』(슈피들릭/곽승룡) ⑶예배와 역사.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알렉산더 슈메만/이종태 옮김),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김호동 지음) ⑷문화와 예술 및 미학. 『정교회의 이콘신학』(우스펜스키/박노양), 『러시아정교. 역사-신학-예술』(석영중), 『초기 그리스도교와 비잔틴 미술』(존 로텐/임산), 『비잔티움, 빛의 모자이크』(이덕형), 『이콘과 아방가르드』(이덕형) ⑸조직신학으로 두미트루 스타니올래(Fr Dumitru Staniloae)의 Orthodox Dogmatic Theology. The Experience of God, 6권을 소개하고 싶다. 얼마 전 故 박효섭 목사의 유고시집 『유리바다』를 선물 받았다. 그가 수도공동체를 인도한다는 얘기는 익히 듣고 있었으나, 이미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y Palamas: 1296~1359)의 헤시카즘(Hesychasm)을 수행하고 있었음에 놀라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수많은 교파로 나뉜 한국 개신교지만 과거 교파의 선교 및 신학의 연합의 역사를 기억하며 교회의 하나됨을 가톨릭과의 부단한 만남을 통해 확장하고, 나아가 정교회까지 알아가는 개신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국 선교 130년에 갇히거나 종교개혁 500년에 갇히지 말고, 기독교 역사 2,000년의 통시적 안목과 가톨릭과 정교회의 신학과 전례 및 영성과 교류하면서 그리스도교적 호연지기를 양성하는 넓은 가슴이 되어, 세계의 고난을 품고 위로하며 치유하는 영적 힘을 발휘하는 주님의 교회와 보편적 그리스도교의 터전 위에서 변함없이 생기는 미래를 바라보는 신나는 복음의 꿈을 말하자. 헤시카즘은 빛과 침묵의 신학이다. 헤시카즘은 “영혼의 기쁨이자 아름다운 천상의 음악”(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이다. 헤시카즘의 본보기로 현성용(顯聖容 : Transfiguration, 변모)사건, 변화산(다볼산)에서의 예수님 변모 사건을 든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다볼산에 올라가 기도 중, 신의 빛의 세례를 받아 변모한 사건을 말한다. 정교회의 수도사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문을 외우며 호흡을 멈추는 영적 수련 방법과 금욕적 실천을 통해 신성한 빛의 광채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팔라마스는 이 다볼 산의 빛이 불변의 아름다움이자, 신과 그리스도, 성령의 영광이며, 삼위일체의 모든 위격에 고유한 신적 에네르기아라고 여긴다. 변모에서 보이는 거룩한 아름다움은 비잔틴 신학의 미학적 특징의 진수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1
87
26 comments
26 Mar 2019 
Public
 
[말씀]사무엘상 24장 [성찰]“사울은 뒤를 보고, 다윗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다윗이 엔겐디 광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울은 다시 다윗의 생명을 죽이기 위해 쫓는다. 다윗에 대한 집요한 사울의 살인의지, 인간의 마음가운데 웅크리고 있는 어두운 힘의 극단적 형태이다. 그런 그도 세끼 밥 먹고 뒤를 봐야 산다. 먹는 것은 며칠 단식도 할 수 있지만, 뒤로 나오는 것을 막으면 죽는다. 그는 어슬렁어슬렁 어둡고 가려진 곳, 굴을 찾아 똥 싸러 간다. ‘굴’은 밝지도 깜깜하지도 않은 곳, 밝음과 어둠이 섞여 있는 그늘이고, 광야의 낮의 더움과 밤의 추움을 동시에 품고 있을 서늘한 곳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그러한 곳이 있다. 무의식의 세계, 원형의 세계이다. 그것은 진리(眞理)의식이 미분화된 곳이다. 선악(善惡)의 피안의 세계다. 미추(美醜)의 판단력이 형성되지 않은 세계다. 뒤가 마려울 때는 모든 근심걱정을 내려놓고 우선 그곳에 내려가야 한다. 사울王도 뒤를 보려고 굴을 향해 내려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변을 보기 위해서는 무기도 밖에 놓아야 한다. 무기가 없는 무장 해제된 몸이다. 변을 보기 위해서는 왕도 허리띠를 풀어야 한다. 바지를 내린 알몸이다. 연약한 몸이다. 그런데 사울이 의식하지 못한 굴의 안쪽 깊은 곳에 그가 그렇게도 잡으려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다. 자기가 찾는 증오의 대상이 자기 무의식의 가장 안쪽에 숨어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보통 그것을 볼 수 없다. 의식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외화(대상화)하기 때문이다. 다윗의 부하들이 사울을 보고 치려했으나 다윗은 자기 부하들에게, "내가 감히 손을 들어,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우리의 임금님을 치겠느냐? 주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나를 막아 주시기를 바란다. 왕은 바로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분이기 때문이다."(24:6)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웠다 하여 사람의 악행을 덮어두거나, 인간이 판단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다는 말로 인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의식세계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다윗은 진정한 인간의 세계, 곧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에게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신성한 현존을 읽을 줄 아는 영적 감각으로 세계를 읽는다. 이 세계는 바울의 말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롬 8:28) 세계이다. 善이 惡을 규정하고 배제하고 죽이는 세계가 아니라, 선이 악을 보듬어 담아 안고, 품고 녹여 서로 작용하여 좋은 결과를 지어나가는 세계이다. 이것은 융의 저 유명한 “대극적인 것들의 융합”(coniunctio oppositorum)이 일어나는 세계이며,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아,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세계이다. 사울은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은닉된 자기의 다른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아쉽게 놓치고 밖으로 나온다.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 가면(persona)의 일부를 그 타자에 의해 잘린다. 성경은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몰래 잘랐다”(24:4)고 기록한다. 사울이 굴 밖으로 나가자 다윗도 그를 따라 굴 밖으로 나온다. 의식의 세계, 분별지의 세계로 나온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다윗이 사울의 뒤에 대고 외친다. "임금님, 임금님!" ... "임금님은 어찌하여, 다윗이 왕을 해치려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만 들으십니까? ... 아버지,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임금님의 겉옷자락을 보십시오. 내가 이 겉옷자락만 자르고, 임금님께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시면, 나의 손에 악이나 죄가 없으며, 임금님께 반역하거나 잘못한 일이 없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임금님은 나를 죽이려고, 찾아다니십니다.(삼상 24: 8, 9b, 11)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와 약점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부분이 드러나거나 지적받을 때 몹시 당황하고 얼굴이 벌개지는 법이다. 대개는 변명하거나 상대방을 향하여 자신을 정당화하고 그 수단으로 더 거센 역공의 펀치를 날리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구스타브 모로의 그림에서처럼 무장한 군사들을 거느린 사울의 지위는 높고 장엄하며, 다윗은 낮고 그 숫자도 보잘 것 없다. 소나기 퍼붓듯 화살을 날리는 순간 전멸할 것만 같아 보인다.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을뿐더러 군사들 앞에서 자신을 망신 준 다윗에 대하여 여느 사람 같으면 자기를 꼭꼭 닫고 더 큰 증오심을 발휘했을 텐데, 성경은 사울이 일시적으로 본래의 선한 심성(本然之性)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기록한다. “나는 너를 괴롭혔는데, 너는 내게 이렇게 잘 해주었으니,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네가 오늘 내게 이렇게 잘 해주었으니, 주님께서 너에게 선으로 갚아 주시기 바란다. 나도 분명히 안다. 너는 틀림없이 왕이 될 것이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서 굳게 설 것이다.”(삼상 24:17, 19b, 20). 그러나 사울은 곧 이 본성이 혼탁해지고 만다. 시편 57편은 사울을 피하여서 동굴로 도망하였을 때 지은 다윗의 詩이다. 다윗에게 광야는 사울의 살기(殺氣)를 느끼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진실이 온 하늘과 땅에 가득한 곳이다. 「1.참으로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영혼이 주님께로 피합니다. 이 재난이 지나가기까지, 내가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합니다. 3.하늘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실을 보내시어,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나를 괴롭히는 자들을 꾸짖어 주십시오. (셀라) 오, 하나님, 주님의 사랑과 진실을 보내어 주십시오. 5.하나님, 하늘 높이 높임을 받으시고, 주님의 영광을 온 땅 위에 떨치십시오. 6.그들은 내 목숨을 노리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쳐 놓아 내 기가 꺾였습니다. 그들이 내 앞에 함정을 파 놓았지만, 오히려 그들이 그 함정에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 (셀라) 7.하나님, 나는 내 마음을 정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내가 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9.주님, 내가 만민 가운데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뭇 나라 가운데서 노래를 불러,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10.주님의 한결같은 그 사랑, 너무 높아서 하늘에 이르고, 주님의 진실하심, 구름에까지 닿습니다. 11.하나님, 주님은 하늘 높이 높임을 받으시고, 주님의 영광 온 땅 위에 떨치십시오.」 [이미지]구스타브 도레, <다윗이 사울에게 주님의 자비를 보이다>David Shows Saul How He Spared His Life.
25
4 comments
18 Aug 2020 
Public
 
참 생명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 참 선한 아름다움이신 Jesus Christ 1991년 3월부터 서리 전도사로 파송받아 30중반에 목회를 시작했다. 대학에서 강사도 시작했다. 목회자에게 예배, 설교와 기도회 인도는 기본이지만 기본은 늘 잘 하기 어려웠고, 심방, 각종 주례, 회의 주관, 교회 행정, 교회교육(특히 세례교육)등은 열심히 배우면서 익혔다. 매주 금요 심야기도회가 있었고 한 달에 한번은 삼각산에 올라 철야기도회를 하는 것이 교회의 전통이 되어 있어, 그걸 인도해야 했다. 어떤 때는 몸과 영혼에서 자발성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의무감으로 했다. 특히 새벽기도회가 어려웠다. 새벽 4시 20분쯤 일어나 몸 가지런히 하고 20분 쯤 걸어 교회에 도착, 5시에 시작하여 기도회 인도가 끝나면 계속 기도하지 못하고 졸기 일쑤였다. 나이 50이 넘으면서 새벽에 깨고 지금은 새벽 세시에도 깨지만, 그때는 정말 새벽기도회가 없었으면 했다. 처음 일 년은 강의하고 오면, 교회 분위기로 빨리 전환이 안 돼 1-2시간 사무실에 그냥 멍 때리고 앉아 있었다. 담임 목회 5년 6개월 & 부목 5년 6개월, 11년이 나의 목회 경험이다. 부목생활은 조영민 목사님과 박이섭 목사님의 친절한 배려로 부분 목회만 하고 강의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다. 11년 시간강사 했는데, 강사 5년차부터는 매 학기 5개 정도의 대학에서 보통 20~25학점 강의했다. 어느 요일은 오전, 오후, 야간 강의까지 이동하면서 진행했고, 지하철이 독서할 수 있는 짬이기도 했다. 지하철에서 독서하면 몰입이 쉽게 된다. 강의 하는 기계 같았다. 이중 직업, 양다리 걸친다는 생각에 늘 마음이 께름칙했다. 작년에 나온 책 『돈 일 교회』(2019. 08. 10 포스팅)를 내 경험처럼 읽었다. 목회 외에 다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3-40대 목회자들의 현장 경험은 나의 시간강사 경험을 되 뇌이게 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몸에 고장도 많이 났다. 안면근육마비가 두 차례 찾아왔고, 복시(複視)와 어지럼증이 불청객이 되어 나타났고, 두통은 40대 중반부터 5년은 지속되었다. 이 지독한 통증은 고단한 몸도 새벽에 깨운다. 송곳이 찌르는 듯 아프니까 통증을 분산시키기 위해 벽에 뒤통수를 들이박곤 했다. 어느 날 주님께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말씀하셨다. 네가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 넘치는 기쁨으로 신앙생활 하지 않았더냐? 그때(대학 1년) 교회 가는 게 기뻐 새벽 기도회를 자발적으로 갔고, 성경도 읽기 시작했는데 복음서 말씀이 너무 벅차, 빨리 읽고 지나가는 것이 아쉬워 노트에 쓰기 시작했지. 목사님이 우리 집에 심방오시는 날, 수업을 빼먹고 심방 예배에 참석했잖니. 그때 그렇게 즐겁고 기뻤던 예수사랑, 지금은 오로지 그것만을 하라고 하는 건데 왜 이리 힘들어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어느 날 주님의 환한 얼굴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고, 그때부터 의무감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끌려가는 힘,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후 美는 점점 신앙과 신학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 98년 여름 6주간 아름다움을 매번 설교제목에 넣어 설교했다. 이렇게 나의 『예술신학』(2011년)은 설교 강단에서 출발했다. 그리스도론에 대한 나의 첫 글은 유동식 교수님 고희 기념논문집에 기고한 “탈형이상학과 기독론의 재구성”이다. 논문집 제목이 『한국종교와 한국신학』(1993년)이었으니 내 논문은 제목에 맞지 않는 글이었다. 그래서 20개의 논문 중 20번째로 실렸다. 어느 날 한 분이 전화를 주셨다. 정양모 신부라 했다. 그 논문을 읽고 좋아 연구실(서강대학교)을 방문해주고 점심식사 같이 하자 했다. 얼마나 큰 기쁨인가? 신부님은 서공석 교수님도 소개했고, 그 다음해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셨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그리스도론 공부와 구상을 집중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일단 독일 선생님인 알프레드 예거 교수님의 조직신학 기획을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알프레드 예거(Alfred Jäger)는 “신중심적 생(삶)의 신학”(Theozentrische Lebenstheologie)으로 7학기 자신의 신학을 기획했고, 나는 운이 좋게 그 모든 기획을 다 수강할 수 있었다: ⑴방법론; ⑵신론; ⑶창조론; ⑷그리스도론; ⑸윤리 I: 교회론; ⑹윤리 II: 생의 윤리(Lebensethik); ⑺윤리 III: 사회윤리, 경제윤리, 생태윤리. 그는 각론을 5장으로 구성했고, 각 장은 4개의 절, 각 절은 10개의 명제문단으로 제시했다. 5 x 4 x 10 x 7 = 1,400개의 명제는 전체 조직신학(교의학과 윤리)의 집을 짓기 위한 사유의 벽돌들인 셈이다. 예거의 그리스도론 강의를 본보기 삼아 대여섯 차례 강의와 세미나를 하면서 2,000년에 나름 강의노트를 만들었다. 제목은 제일 귀하게 생각하는 요한복음 14:6절에서 뽑았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제목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놓이는 수식어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참 삶(生)의 길’로 해서, <참 삶(生)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정했다. 일단 전체를 5장으로 구성했다. 1장은 예수의 삶(생). 역사적 예수 연구와 예수 운동의 성과를 그리스도론적으로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예수의 신학적 본성(신성과 인성)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역사적 예수로부터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2장은 예수의 인격으로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을 해석하는 과제다. 3-5장까지는 루터와 칼뱅, 슐라이어마허와 바르트가 전개한 그리스도의 삼중의 직분론의 형식을 받아들여, 3장에서 예수의 말씀(言), 4장에서 예수의 사역(行), 5장에서 예수의 길(道)로 제목을 정하고, 3장은 진리(眞), 4장은 선(善), 마지막 5장은 미(美)의 개념을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현한 진-선-미의 의미와 실천을 그리고 싶었다. 6, 7장을 할애하여 문화/종교 그리스도론도 쓰고 싶은 영역이다. 그리스도론을 진-선-미의 개념으로 전개하는 것이 적합한가, 하는 질문을 하고 있을 때 역사신학자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의 아이디어를 만난 것이다. 펠리칸은 교리나 신학 등, 이념의 역사만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그림들도 그리스도론의 원 전라고 말한다. 펠리칸은 6세기 라벤나(Ravenna) 대주교 예배당의 인상적인 <싸우는 그리스도>(Christ Militant) 상(像)에 주목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양 발로 세상 권세의 상징인 사자와 뱀을 밟고 계신다. 그 분은 오른 손에 승리의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왼 손으로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EGO SUM VIA VERITAS ET VITA)(요 14:6)는 말씀을 들고 계신다. 펠리칸은 여기서 ‘길’은 ‘아름다움’으로서 “그 자신의 상과 비슷하게 우리를 새롭게 조형하였다”는 닛사의 그레고리를 인용하고, ‘진리’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진리의 성취이며 실현이며, ‘생명’은 ‘착함’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생명은 “모든 본래적인 善의 원천”이라고 해석한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한다. 펠리칸은 교회가 일찌감치 그리스도의 복음을 眞과 善만이 아니라 美(아름다움)로도 읽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인 길=美(the Beautiful), 진리=眞(the True), 생명=善(the Good)의 원형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생명의 길이요, 참 선한 아름다움이 되시는 분이다. 2,000년에 머물러 있는 이 초고를 다시 꺼낸다. 그동안 주요 신학자들의 그리스도론과 역사적 예수와 예수 세미나 등 예수운동과 관련된 책을 읽는데 시간을 보냈다. 가톨릭 신학자들이 쓴 예수는 너무 두껍다. 웬만하면 700쪽 분량이다.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쓰나 속으로 생각한다. 나에게는 보그, 크로싼, 펑크나 타이센의 예수보다 과르디니의 <주님>과 로핑크의 <예수마음코칭>, 에벨링의 <기독교 신앙의 교의학> 제2권 그리고 발터 카스퍼의 <예수 그리스도>가 더 좋더라. 전자가 지성적이라면 후자는 마음을 울린다. 레오나르도 보프와 혼 소브리노 그리고 엘리자베스 피오렌자의 그리스도론도 빼놓을 수 없다.
+2
이찬수 and 120 others
22 comments
8 Jun 
Public
 
<KASA 6월 활동 안내> 1. 6월은 KASA(한국영성예술협회)에 매우 의미있는 달입니다. 왜냐하면 KASA의 모태인 <예술목회연구원>이 창립된지 만8년이 되는 해이자(2013.6.15.창립),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가 설립된지 만4년이 되기 때문입니다.(2017.6.18.창립)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응원해 주시고 동참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2. 이번달 KASA의 활동을 안내합니다. KASA와 함께 6월 한달 보람찬 여름맞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1. 예술목회연구원_예술신학콜로키움 일시: 2021.6.28.월.오후7시 접속: zoom (ID: 380-389-5679) 주제: 연극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나라 강사: 최지영 언님 2.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 주일모임 첫째주일(6/6): 홍성순례 둘째주일(6/13): 온라인예배_후마니타스특강(이강선 언님/호남대) 셋째주일(6/20): 퇴계로순례(안내: 정혜령 언님) 넷째주일(6/27): 온라인예배_현대신학특강(심광섭 언님/예목원장) 3. 종교평화원_레페스콜로키움 일시: 2021.6.14.월.오후7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_도마복음을 중심으로 강사: 구자만 언님 참고도서: 구자만, <사복음서와 도마복음으로 본 하나(one)의 진리, 예수의 가르침>(서울: 동연, 2021) 4. 이수포럼 일시: 2021.6.17.목.오후3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허원의 <세초류휘>-조선의 천문학 강사: 최승언 언님(서울대) KASA 대표 손원영 올림
43
16 comments
14 Aug 2020 
Public
 
…진리의 전제 속에서 신학적 진리 주장은 사라진다. 신학적 진리도 다 인간이, 인간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것에 불과한 것이라 여긴다. 나는 신학에서 그리스도론이 중심이고 신론과 성령론은 그리스도론의 확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늘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그리스도론은 고대 교회에서 완성(?)된 양성론의 해석에 집중하다가 ‘역사적 예수 연구’ 이후 그 틀이 무너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신약성경 안에서조차 그리스도론은 자라고 있다. 신약 신학자 제임스 던(James Dunn)의 신약성서 그리스도론은 “형성 중에 있는 그리스도론”(Christology in the Making)이다.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차정식 옮김, 상/하)으로 번역된 책의 영어 제목도 “기억된 예수. 형성 중에 있는 기독교”이다. ‘역사’의 범주가 그리스도론과 기독교의 정체성을 밝히는데 적용된 것이다. 19세기에 서로 관점이 다른 포이어바흐와 하르낙이었으나 하나의 영구불변하는 『기독교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했지만 한스 큉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역사』에서 여섯 개의 패러다임으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역사적 패러다임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던은 무려 150쪽에 걸쳐 르네상스 이후 최근까지 역사적 연구를 비평적으로 서술하고 공관복음의 예수는 “그 자체로 예수가 무엇을 행하였고 말했는가보다는 예수의 처음 제자들이 그가 무엇을 행하거나 말한 것으로 기억했는가에 대한 증거를” 토대로 알려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기억이란 “과거를 다시 현재화함으로써 정확하게 과거와 현재의 지평을 융합하는 과정”이다. 예수 탐구를 위해 우리가 가진 자료는 “처음부터 우리가 직면해 있는 대상은 예수라기보다는 그가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 자체라기보다는 그 가르침을 기억 속에 보존하고 구어 전승 과정을 시작한 개인들에게 영향을 준 결과로서의 내용이다.” 불트만 이후 신해석학자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던에게 신앙이란 역사 해석학적 신앙이다(6장). 던은 마지막 장(19장)에서 책의 제목인 “기억된 예수”(Jesus Remembered)로 정리한다. 그는 예수 전통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부활절 이전 예수와 부활절 이후 그리스도가 부활을 중심으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절 이전의 예수가 제자들에게 끼친 강력한 영향이 부활절 이후에 심화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절 이전 예수의 영향이 이미 신적인 권세와 권능의 견지에서 가늠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던의 저서가 10여 가지 이상 번역이 되었구나. 신학적 자료가 참 풍성해졌다. 조직신학에서 몰트만, 틸리히, 바르트, 본회퍼, 최근에는 판넨베르크의 저서까지 다 번역이 되었으니 한국 신학계와 교계에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다.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을 읽으면서 성서학자들의 방대한 고대 문헌에 대한 섬세하고 분석적인 연구에 존경심이 저절로 솟아난다. 하나의 새로운 의미와 진리를 밝히기 위해 엄청난 자료들을 섬세하게 주석하고 정치하게 분석 비교하는 그 치밀한 과정도 어렵겠지만, 이걸 읽는 독자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이 책에 비하면 몰트만이나 틸리히의 저서가 나에게는 훨씬 쉽더라. 이 방대한 분량(무려 1,400쪽)을 명쾌한 우리말로 옮긴 차정식 교수에게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다. 인내력 시험을 얼마나 당했을까.... 난 역사비평, 사회사적 비평이 기본으로 깔린 성서학 분야 글들에서 신학의 갈급함을 느낀다. 내 주관적 느낌이다. 문학, 역사, 정치 경제 사회학적 주석, 그쪽 분야에서 하는 지식 서술.... 신학적 목소리는 언제 나오지... 그런 갈급함과 기대감이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그것이 다른 범주들에 의해서도 언제나 해명될 수 있는 역사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고 또 살아가야 할 역사를 만들기 때문이요, 그것이 미래의 사건을 위해 길을 열어놓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 미래를 열어놓기 때문에 역사적이다.” ‘부활의 역사’를 증언하는 자는 ‘역사’의 범주로 부활을 변증하다가 역사의 뒤안길에서 역사의 지각생이 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역사’를 통해 ‘역사의 부활’을 말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취하는 보냄받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된 예수’(Jesus Remembered)를 토대로 ‘기대하는 예수’(anticipating Jesus)를 말해야 되지 않을까.
103
50 comments
4 Apr 
Public
 
심광섭 박사. 성 토요일 .
Philo Kalia's post
[聖토요일의 미학] 나는 <십자가와 부활의 미학>에서 성토요일에 관해 한 꼭지 썼다(1장 19). 그러나 미흡하고 찝찝한 마음 가시질 않아 성토요일이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시각에 글을 올린다. 이 글은 『성령과 트라우마』, 2장)에 근거한다. 성토요일은 성금요일과 부활절 사이에 끼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수난주간, 월~금까지 경건 훈련에 열을 올리다가 토요일은 쉬거나 부활절을 준비하면서 미리 부활을 맛보고 싶어한다. 벌써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마음이 가 있다. 성토요일은 완전히 생략되어 그저 부활절 전날이 되었거나, 지옥에서의 성자의 죽음과 죄에 대한 정복 활동을 당연시함으로써 이미 부활을 예견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성토요일의 신학을 전개한 신학자는 기독교 미학자로 알려진 큰 사상가 한스 우어즈 폰 발타자(Hans Urs von Balthasar)이다. 전통적으로 수난과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매끄러운 과정으로 설명되었다. 발타자는 이런 설명에 저항하는 신학을 제시한다. 교회는 성토요일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거의 도외시했는데, 이 날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죽음과 삶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현장이다. 우리는 제일 먼저, 영원한 구원의 열매를 얻을 순간을 기대하면서 잠깐의 고난을 참으라고 주장하는 신학적 성급함과 종교적 초조함을 물리쳐야 한다. 성토요일을 간과하고 부활절로 가는 것은 부활절의 의미조차 망실하게 한다. 성금요일과 부활절 사이, 중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성토요일에 그리스도는 지옥에 내려가신다(descent into hell). 고통의 독특한 측면을 드러내는 성토요일은 십자가의 관계에서만 해석될 수 없듯이 부활과의 관계 속에서만 해석될 수도 없다. 지옥에서의 하느님 경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는 죽음 경험이다. 성토요일은 죽음 너머까지 미치는 고통에 관해 증언한다. 성자는 지옥에서 지옥의 심연에 있는 죽은 자들과 함께 죽었다. 지옥은 버려진 땅과 같은 곳이다. 지옥은 삶의 흔적이 없는 곳, 가능성도, 움직임도 없는 곳이다. 성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곳이다. 여기서 성자는 자신이 성부와 완전히 분리된 환상들, 그리고 만물이 하느님과 분리되는 환상들을 경험한다. 지옥의 정복과는 무관하게 지옥에는 적극적인 승리가 없다. 예수는 부활한 자로 지옥에 내려간 것이 아니라. 죽은 자로 지옥에 내려갔다. 십자가에서 경험한 죽음은 지옥까지 이어지며, 이는 성자의 사명과 하느님의 구원 모두에 대해 다른 해석을 드러낸다. 십자가의 죽음이 능동적 죽음과 수난의 경험이라면, 죽은 자로서 지옥에 내려간 성자의 경험은 수동적 수난으로서, 죽음의 풍경과 죄의 실상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다. 이것은 극도의 암흑이자 버려짐이며 소외이다. 성자는 그곳에서 겉으로만 버려진 모습으로 세상 죄를 감당한 것이 아니라. 몸소 지옥에 내려가 버려짐을 경험한다. 성금요일과 부활 주일 사이, 그 중간에서의 삶은 죽음에서 솟아나며, 그 삶 안에는 죽음을 계속 품고 있다. 그 중간은 죽음에서 삶으로 곧장 이어지는 길을 방해하고, 나머지, 혼돈, 지친 사랑, 졸졸 흐르는 무기력 등, 그 중간의 시공간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어휘들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죽음의 고통이 콸콸 흐르는 세상의 현실임을 응시하게 한다. 그러므로 발타자는 성토요일이 가진 독특한 진실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 남아 있다는 진실임을 강조한다. 수난과 부활을 설명하는 익숙한 논리 속에서 죽음을 해석한다면 죽음의 진실이 왜곡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사이, 그곳에는 빛도, 생명도, 말도 없다. 단지 그리스도가 지옥으로 내려간 사건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자로 지옥에 내려가지 않았다. 죽음의 영역으로 내려간 그가 죄인들과 믿지 않는 이들 모두를 불러 모은 것도 아니었고, 죄인들의 사슬을 끊은 것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승리도, 어떤 행동도 없다. 지옥에 내려간 성자는 죽은 자들 중 한 명이었다. 발타자는 구원에서 지옥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독특한 시각을 발전시키기 위해 지옥에서의 죽음이라는 어두움을 적나라하게 담은 모습을 포기하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 <예술신학>, <기독교 미학>을 말했을 때 그것은 부르주아들의 신학이 아니냐는 비판이 거셌다. 예술신학은 부르주아, 부자, 권력자, 무늬와 흠과 결이 없는 매끈함을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분에게는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죽은 자로서 지옥에 내려가 죽은 자들과 함께 계신 성토요일은 <예술신학>이 꽃피는 땅이다. 성토요일의 미학은 인간이 경험하는 죽음이 강력한 실재임을 미친 듯 증언하는 일이다. 고통을 간과하는 공허한 부활절 선포보다는 아직 부활절 선포 없는 고통과의 연대가 부활의 작은 싹을 보듬고 있는 것이다. 발타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지옥의 경험이 하느님의 비극이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라고 믿는다. 그러나 지옥의 심연까지 확장된 이 사랑은 늘 외치는 승리하는 사랑이 아니다. 지옥의 혼돈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내는 기진맥진한 사랑이다. 이 점이 성토요일의 신학에 대한 발타자의 기묘한 해석이다. 그리스도가 지옥으로 내려가신 사건에 대한 고백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라는 부르심이며, 오늘날 곳곳에 숨겨져 있는 고난과 고통의 현장에 참여하며 연대하라는 부르심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는 지옥을 지나 걸어가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이는 자기 상처를 통해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죽음 이후의 공간에 계속 남아계신다. 그리스도는 길 없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발자취를 남기지도 않고, 출구도, 시간도, 존재도 없는 지옥을 통과해 간다. 길, 진리, 생명, 길 없음, 말 없음, 출구 없음, 이것은 지옥의 길을 걸어가는 하느님의 연약한 모습이다. 성토요일은 균열, 단절, 쪼개짐이다. 예수는 지옥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그는 우리가 딛고 걸어갈 길이 되었다. 성토요일은 파멸과 소생을 잇는 한가닥 실이다. 이 실은 죽음(성금요일)과 지옥(성토요일)이 가진 무시무시한 힘을 버텨낼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다. 죽음에서 부활로의 변화에 대해 발타자는 기도의 형태로 말한다. “지옥 구렁을 가로지르는 밧줄이 너무 짧기에, 우리는 둘을 연결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 손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손가락만이 우리의 깨어진 조각들을 맞추어 온전한 모양을 이룰 것입니다.” 북음에서 생명의 부활로의 전환, 이것은 승리한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남은 사랑의 이야기에 대한 증언이다. 이 사랑은 모든 혈관이 터지고 낡은 세계가 소멸했을 때 마지막까지 쏟아져 나온 사랑, 이제 사랑 그 자체를 위해 아무것도 없는 암울함을 뚫고 성부를 향해 가는 길을 만들어 가는 성자의 그 사랑이 남긴 유산이다. 죽음에서 움직이는 것은 사랑이 남긴 지친 유산이며, 이것은 이제껏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새 창조를 향해, 무기력하게, 멍한 채로, 힘겹게 졸졸 흘러간다. 성토요일의 지친 사랑은 신학적으로 아름답고 힘차게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토요일의 미학이 해야 할 과제이다.
3
8 Jun 
Public
 
<KASA 6월 활동 안내> 1. 6월은 KASA(한국영성예술협회)에 매우 의미있는 달입니다. 왜냐하면 KASA의 모태인 <예술목회연구원>이 창립된지 만8년이 되는 해이자(2013.6.15.창립),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가 설립된지 만4년이 되기 때문입니다.(2017.6.18.창립)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응원해 주시고 동참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2. 이번달 KASA의 활동을 안내합니다. KASA와 함께 6월 한달 보람찬 여름맞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1. 예술목회연구원_예술신학콜로키움 일시: 2021.6.28.월.오후7시 접속: zoom (ID: 380-389-5679) 주제: 연극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나라 강사: 최지영 언님 2.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 주일모임 첫째주일(6/6): 홍성순례 둘째주일(6/13): 온라인예배_후마니타스특강(이강선 언님/호남대) 셋째주일(6/20): 퇴계로순례(안내: 정혜령 언님) 넷째주일(6/27): 온라인예배_현대신학특강(심광섭 언님/예목원장) 3. 종교평화원_레페스콜로키움 일시: 2021.6.14.월.오후7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_도마복음을 중심으로 강사: 구자만 언님 참고도서: 구자만, <사복음서와 도마복음으로 본 하나(one)의 진리, 예수의 가르침>(서울: 동연, 2021) 4. 이수포럼 일시: 2021.6.17.목.오후3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허원의 <세초류휘>-조선의 천문학 강사: 최승언 언님(서울대) KASA 대표 손원영 올림
손원영's post
<KASA 6월 활동 안내> 1. 6월은 KASA(한국영성예술협회)에 매우 의미있는 달입니다. 왜냐하면 KASA의 모태인 <예술목회연구원>이 창립된지 만8년이 되는 해이자(2013.6.15.창립),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가 설립된지 만4년이 되기 때문입니다.(2017.6.18.창립)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응원해 주시고 동참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2. 이번달 KASA의 활동을 안내합니다. KASA와 함께 6월 한달 보람찬 여름맞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1. 예술목회연구원_예술신학콜로키움 일시: 2021.6.28.월.오후7시 접속: zoom (ID: 380-389-5679) 주제: 연극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나라 강사: 최지영 언님 2.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 주일모임 첫째주일(6/6): 홍성순례 둘째주일(6/13): 온라인예배_후마니타스특강(이강선 언님/호남대) 셋째주일(6/20): 퇴계로순례(안내: 정혜령 언님) 넷째주일(6/27): 온라인예배_현대신학특강(심광섭 언님/예목원장) 3. 종교평화원_레페스콜로키움 일시: 2021.6.14.월.오후7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_도마복음을 중심으로 강사: 구자만 언님 참고도서: 구자만, <사복음서와 도마복음으로 본 하나(one)의 진리, 예수의 가르침>(서울: 동연, 2021) 4. 이수포럼 일시: 2021.6.17.목.오후3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허원의 <세초류휘>-조선의 천문학 강사: 최승언 언님(서울대) KASA 대표 손원영 올림
1.1K like this · Religious organisation
8 Jun 
Public
 
<KASA 6월 활동 안내> 1. 6월은 KASA(한국영성예술협회)에 매우 의미있는 달입니다. 왜냐하면 KASA의 모태인 <예술목회연구원>이 창립된지 만8년이 되는 해이자(2013.6.15.창립),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가 설립된지 만4년이 되기 때문입니다.(2017.6.18.창립)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응원해 주시고 동참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2. 이번달 KASA의 활동을 안내합니다. KASA와 함께 6월 한달 보람찬 여름맞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1. 예술목회연구원_예술신학콜로키움 일시: 2021.6.28.월.오후7시 접속: zoom (ID: 380-389-5679) 주제: 연극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나라 강사: 최지영 언님 2.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 주일모임 첫째주일(6/6): 홍성순례 둘째주일(6/13): 온라인예배_후마니타스특강(이강선 언님/호남대) 셋째주일(6/20): 퇴계로순례(안내: 정혜령 언님) 넷째주일(6/27): 온라인예배_현대신학특강(심광섭 언님/예목원장) 3. 종교평화원_레페스콜로키움 일시: 2021.6.14.월.오후7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_도마복음을 중심으로 강사: 구자만 언님 참고도서: 구자만, <사복음서와 도마복음으로 본 하나(one)의 진리, 예수의 가르침>(서울: 동연, 2021) 4. 이수포럼 일시: 2021.6.17.목.오후3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허원의 <세초류휘>-조선의 천문학 강사: 최승언 언님(서울대) KASA 대표 손원영 올림
손원영's post
<KASA 6월 활동 안내> 1. 6월은 KASA(한국영성예술협회)에 매우 의미있는 달입니다. 왜냐하면 KASA의 모태인 <예술목회연구원>이 창립된지 만8년이 되는 해이자(2013.6.15.창립),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가 설립된지 만4년이 되기 때문입니다.(2017.6.18.창립)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응원해 주시고 동참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2. 이번달 KASA의 활동을 안내합니다. KASA와 함께 6월 한달 보람찬 여름맞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1. 예술목회연구원_예술신학콜로키움 일시: 2021.6.28.월.오후7시 접속: zoom (ID: 380-389-5679) 주제: 연극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나라 강사: 최지영 언님 2.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 주일모임 첫째주일(6/6): 홍성순례 둘째주일(6/13): 온라인예배_후마니타스특강(이강선 언님/호남대) 셋째주일(6/20): 퇴계로순례(안내: 정혜령 언님) 넷째주일(6/27): 온라인예배_현대신학특강(심광섭 언님/예목원장) 3. 종교평화원_레페스콜로키움 일시: 2021.6.14.월.오후7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_도마복음을 중심으로 강사: 구자만 언님 참고도서: 구자만, <사복음서와 도마복음으로 본 하나(one)의 진리, 예수의 가르침>(서울: 동연, 2021) 4. 이수포럼 일시: 2021.6.17.목.오후3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허원의 <세초류휘>-조선의 천문학 강사: 최승언 언님(서울대) KASA 대표 손원영 올림
3
8 Jun 
Public
 
<KASA 6월 활동 안내> 1. 6월은 KASA(한국영성예술협회)에 매우 의미있는 달입니다. 왜냐하면 KASA의 모태인 <예술목회연구원>이 창립된지 만8년이 되는 해이자(2013.6.15.창립),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가 설립된지 만4년이 되기 때문입니다.(2017.6.18.창립)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응원해 주시고 동참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2. 이번달 KASA의 활동을 안내합니다. KASA와 함께 6월 한달 보람찬 여름맞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1. 예술목회연구원_예술신학콜로키움 일시: 2021.6.28.월.오후7시 접속: zoom (ID: 380-389-5679) 주제: 연극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나라 강사: 최지영 언님 2.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 주일모임 첫째주일(6/6): 홍성순례 둘째주일(6/13): 온라인예배_후마니타스특강(이강선 언님/호남대) 셋째주일(6/20): 퇴계로순례(안내: 정혜령 언님) 넷째주일(6/27): 온라인예배_현대신학특강(심광섭 언님/예목원장) 3. 종교평화원_레페스콜로키움 일시: 2021.6.14.월.오후7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_도마복음을 중심으로 강사: 구자만 언님 참고도서: 구자만, <사복음서와 도마복음으로 본 하나(one)의 진리, 예수의 가르침>(서울: 동연, 2021) 4. 이수포럼 일시: 2021.6.17.목.오후3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허원의 <세초류휘>-조선의 천문학 강사: 최승언 언님(서울대) KASA 대표 손원영 올림
손원영's post
<KASA 6월 활동 안내> 1. 6월은 KASA(한국영성예술협회)에 매우 의미있는 달입니다. 왜냐하면 KASA의 모태인 <예술목회연구원>이 창립된지 만8년이 되는 해이자(2013.6.15.창립),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가 설립된지 만4년이 되기 때문입니다.(2017.6.18.창립)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응원해 주시고 동참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2. 이번달 KASA의 활동을 안내합니다. KASA와 함께 6월 한달 보람찬 여름맞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1. 예술목회연구원_예술신학콜로키움 일시: 2021.6.28.월.오후7시 접속: zoom (ID: 380-389-5679) 주제: 연극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나라 강사: 최지영 언님 2.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 주일모임 첫째주일(6/6): 홍성순례 둘째주일(6/13): 온라인예배_후마니타스특강(이강선 언님/호남대) 셋째주일(6/20): 퇴계로순례(안내: 정혜령 언님) 넷째주일(6/27): 온라인예배_현대신학특강(심광섭 언님/예목원장) 3. 종교평화원_레페스콜로키움 일시: 2021.6.14.월.오후7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_도마복음을 중심으로 강사: 구자만 언님 참고도서: 구자만, <사복음서와 도마복음으로 본 하나(one)의 진리, 예수의 가르침>(서울: 동연, 2021) 4. 이수포럼 일시: 2021.6.17.목.오후3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허원의 <세초류휘>-조선의 천문학 강사: 최승언 언님(서울대) KASA 대표 손원영 올림
Page · 157 like this · Religious organisation
8 Jun 
Public
 
<KASA 6월 활동 안내> 1. 6월은 KASA(한국영성예술협회)에 매우 의미있는 달입니다. 왜냐하면 KASA의 모태인 <예술목회연구원>이 창립된지 만8년이 되는 해이자(2013.6.15.창립),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가 설립된지 만4년이 되기 때문입니다.(2017.6.18.창립)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응원해 주시고 동참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2. 이번달 KASA의 활동을 안내합니다. KASA와 함께 6월 한달 보람찬 여름맞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1. 예술목회연구원_예술신학콜로키움 일시: 2021.6.28.월.오후7시 접속: zoom (ID: 380-389-5679) 주제: 연극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나라 강사: 최지영 언님 2.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 주일모임 첫째주일(6/6): 홍성순례 둘째주일(6/13): 온라인예배_후마니타스특강(이강선 언님/호남대) 셋째주일(6/20): 퇴계로순례(안내: 정혜령 언님) 넷째주일(6/27): 온라인예배_현대신학특강(심광섭 언님/예목원장) 3. 종교평화원_레페스콜로키움 일시: 2021.6.14.월.오후7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_도마복음을 중심으로 강사: 구자만 언님 참고도서: 구자만, <사복음서와 도마복음으로 본 하나(one)의 진리, 예수의 가르침>(서울: 동연, 2021) 4. 이수포럼 일시: 2021.6.17.목.오후3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허원의 <세초류휘>-조선의 천문학 강사: 최승언 언님(서울대) KASA 대표 손원영 올림
손원영's post
<KASA 6월 활동 안내> 1. 6월은 KASA(한국영성예술협회)에 매우 의미있는 달입니다. 왜냐하면 KASA의 모태인 <예술목회연구원>이 창립된지 만8년이 되는 해이자(2013.6.15.창립),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가 설립된지 만4년이 되기 때문입니다.(2017.6.18.창립)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응원해 주시고 동참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2. 이번달 KASA의 활동을 안내합니다. KASA와 함께 6월 한달 보람찬 여름맞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1. 예술목회연구원_예술신학콜로키움 일시: 2021.6.28.월.오후7시 접속: zoom (ID: 380-389-5679) 주제: 연극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나라 강사: 최지영 언님 2.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 주일모임 첫째주일(6/6): 홍성순례 둘째주일(6/13): 온라인예배_후마니타스특강(이강선 언님/호남대) 셋째주일(6/20): 퇴계로순례(안내: 정혜령 언님) 넷째주일(6/27): 온라인예배_현대신학특강(심광섭 언님/예목원장) 3. 종교평화원_레페스콜로키움 일시: 2021.6.14.월.오후7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_도마복음을 중심으로 강사: 구자만 언님 참고도서: 구자만, <사복음서와 도마복음으로 본 하나(one)의 진리, 예수의 가르침>(서울: 동연, 2021) 4. 이수포럼 일시: 2021.6.17.목.오후3시 접속: zoom (ID:380-389-5679) 주제: 허원의 <세초류휘>-조선의 천문학 강사: 최승언 언님(서울대) KASA 대표 손원영 올림
24 Aug 
Public
 
For the Beauty of the Faith 어느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신앙의 아름다움(美)’이라는 말의 화살이 나의 심장에 꽂혔다. 그것은 신앙의 진리나 신앙의 행위보다 더욱 어마어마한 힘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나를 압도했다. 신앙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작업이 설레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중세 신학자 안셀름의 명제 “지성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을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pulchrum, faith seeking Beauty)으로 바꿀 것을 스스로 자신에게 명령했다. 안셀름의 명제가 지난 1,000년 동안 교회와 신학의 방향을 지배해 왔다면 앞으로 천년은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이 그러한 지위를 얻기를 바랬다. 그 후 나는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2003), 『예술신학』(2011), 『기독교 미학의 향연』(2018) 그리고 올해 『십자가와 부활의 미학』(2021)을 통해 이 작업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오래된 강력한 지원군을 만나게 되었다. 1992년에 나온 방대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읽게 되었는데, 머리말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선 시대의 오류를 단죄하기보다는, 신앙 교리의 힘과 아름다움을 명쾌하게 드러내고자 노력했습니다”는 문구를 만나 그 문장을 떠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묵상한 바가 있다. “신앙 교리의 힘과 아름다움”이라니.... 교리는 인간의 신앙과 삶을 얽어매는 족쇄처럼 여겨지지 않았던가. 나는 교의학도로서 이 말에 매우 크게 고무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안셀름 그륀의 『종교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더욱 고무되었다. 이 책은 교회에서 세례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70개의 기본 교리를 아주 쉽게 풀이한 책인데 그륀은 여는 글에서 “신앙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신앙의 아름다움”, 누가 이 말 쓰는 사람 없나, 그동안 참 외로웠는데 드디어 동지를 만난 것이다. 그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신앙은 수백 년 동안 지어진 집과 같습니다. 우리 사회는 신앙의 집으로 가는 통로가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일상에서 작은 위안조차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이 책을 편견 없이 살펴본다면 신앙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륀은 신앙의 아름다움과 신앙의 삶이 엮어내는 예술의 아름다움에 새롭게 매료되기를 바란다. 그륀은 닫는 글에서 “하느님의 감미로움을 맛보는 시간”이라고 쓴다. 그륀은 이 책에서 신앙의 아름다움이 생생하게 드러나길 바란 것이다. “신앙은 모든 충격에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우리의 눈을 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아름다운 것 안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우리를 치유하고 해방시키며, 영혼에 이롭습니다.” 그륀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감각적이며 가시적으로 표현한 예술과 익숙해지길 권한다. 마지막으로 그륀은 신앙이란 “매 식사에서 ‘하느님의 감미로움’(dulcis Dominus; 벧전 2:3)을 맛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먹고 마시고, 듣고 보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는 것들은 신앙을 통해서 다른 차원으로 고양됩니다. ”하느님을 찾는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감미로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주 게으르겠지만, 하느님의 감미로움 느끼는 사람은 기쁨 속에서 하느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3
Paul Dongwon Goh and 161 others
16 comments
7 Jun 2019 
Public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미국 초창기의 신학자이며 철학자이자 1차 대각성운동(1734년)의 주역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1703-1758)를 따로 공부한 적은 없다. 그러다가 “영적 감각”과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주제를 공부하면서 이 신학자(목회자)를 만나게 되었다. 참으로 매력적인 신학자였다. 마침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열린교회(안양시 동안구)에서 “조나단 에드워즈 컨퍼런스”가 열리는 것을 페북 알림을 통해 보았다. 가보고 싶던 차였으나 이번에도 후에 발표집을 홍순길 장로님(정동제일교회)으로부터 얻게 되어 이 자리에서 언급하고 싶은 것이다[➔이미지(1)]. 에드워즈는 개신교 신학에 “기독교 미학”을 개척한 드문 신학자로 보고 싶기 때문이다. 4개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두 개는 제목도 그렇고 짜임새도 그렇고, 일반적이고 교과서적으로 보여 끌리지 않는다. 다른 두 개 중 하나는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의 “조나단 에드워즈: 학계와 교회를 위한 신학자”이고, 다른 하나는 김남준 목사의 “에드워즈와 사랑의 목회”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이 두 개의 논문을 맥그래스의 글에 비중을 두되, 주제가 겹치는 부분에서 김남준 목사의 글을 첨가하는 식으로 요약하고, <기독교 미학>의 중요성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말할 것이다. 1.맥그래스의 논문은 크게 4부분인데, 첫째 부분에서 에드워즈의 생애와 특히 회심을 소개한다. 그의 회심은 매우 독특하다. 루터가 “나는 어떻게 은혜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물었고,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 체험으로 알려진 회심경험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고 마음이 따뜻해졌다고 했는데, 이것들은 신학적 물음과 회심의 경험이 모두 구원론적인 것이다. 이에 반해 에드워즈의 회심의 경험은 신론적이다. 1721년 5월 6일 경의 기록을 읽어보자. “내가 기억하기로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대해서 그렇게 내적이고 달콤한 기쁨을 맛본 첫 번째 경우는 디모데전서 1장 17절에 나오는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이라는 구절을 읽고 있을 때였다. (그 때 이후 나는 살아오면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 이 구절을 읽고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 즉 전에 경험했던 어떤 것과도 아주 다른 새로운 감각이 내 영혼 속에 생겼다. 그리고 내 영혼 전체에 확산되었다. ... 나는 계속 되풀이해서 이 성경 구절을 나 자신에게 말했다. 마치 그것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님과 즐겁게 교제하기 위해 기도하러 갔다. 그리고는 내가 보통 때 기도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도했다. 새로운 체험이었다” 이 고백 안에 그의 신학의 특이점들이 드러나 있다. 영원한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의 감각으로 압도되는 경험, 그것을 느끼고 교감할 수 있는 새로운 영적 감각,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기도하고 즐겁게 즐기는 삶으로서의 구원 등. 에드워즈가 유산으로 받은 청교도신앙과 경건주의는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종교와 도덕적 가르침으로서의 로서의 기독교에 대해 “마음의 종교”와 “살아 있는 신앙”을 강조한다. 단지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예수의 심장이 뛰고 있는가, 내 신앙은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가, 이것이 참된 신앙을 분별하는 기준이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과 성경의 사물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의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포함한다.” 2.삼위일체론의 중요성과 근대성의 도전 에드워즈는 전통적인 청교도 경건과 인간의지의 가능성에 대한 계몽주의의 신념과 자연적 아름다움에 대한 신비적 평가를 모두 종합했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은 에드워즈의 신학과 설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18-19세기 신학자들은 계몽주의의 이신론과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아 삼위일체론의 비합리성을 논박했거나 무관심하게 여겼다. 하나님은 도덕의 입법자이거나 시민의 삶을 증진시키는 교양 정도였다. 반면 에드워즈는 세계 안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성육신과 세계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활동과 현존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내적인 아름다움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아름다움을 가지고 계시다. 이 아름다움은 삼위일체론으로 근거된다. 하나님의 내적인 삶은 무한히 사랑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상호의 사랑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에드워즈는 아름다움으로 이해한다. 거기서부터 그는 성령을 인격 안에서의 하나님의 관계요 하나님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이해한다. 성령은 신성의 조화이며 탁월함이며 아름다움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내적인 사랑이고 기쁨이다. “성령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하나님의 행위이며, 서로 서로 무한히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 하나님의 내적인 아름다움이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생기는 사랑과 기쁨이다. 에드워즈는 당시의 종교적 실용주의를 공격했다. 종교는 인간의 성취와 성공을 지지하는 뒷배정도로 여겼던 시대적 풍조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성취하신 은혜는 간과되었고 이미 지배하는 사회적 도덕적 관습이 중시되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신자를 의롭게 하는 것은 신자의 개인적이고 사회적 성취를 평가하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성취된 그리스도의 은혜임을 강조했다. 구원이란 사회적 성취와 사회에 만연된 시민적 가치의 동화가 아님을 에드워즈는 강조하여 설교했다. 3.자연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아름다움, 도덕과 사랑 에드워즈 신학과 설교의 독특한 특징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그원이 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강조다. 에드워즈는 고대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나 20세기의 한스 우르즈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이상으로 ‘아름다움’을 강조한 신학자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영광(아름다움)을 확실하게 파악할 때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칼뱅 이후 개혁신학은 눈앞에 전개된 자연은 ‘성경’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또 하나의 책임을 강조했다. “성경은 자연의 책을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한다. 첫째, 자연세계의 구성 속에 표시되었고 유형화된 영적 신비를 선언하는 것이며, 둘째, 자연의 책에 새겨진 표시와 유형을 영적 신비의 재현으로 실제로 적용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신학적으로 긍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신성한 아름다움은 다른 모든 사물들과 구분됨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세계에 알려지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욕망이다. “우리가 꽃이 만발한 정원과 선선한 산들바람을 즐기며 기뻐할 때 우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달콤한 은혜가 발산되고 있음을 본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향기로운 장미와 백합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순결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푸르른 나무와 들판 그리고 새들의 노랫소리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기쁨과 사랑스러움이 내뿜어진 것이다. 나무와 가지들의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의 그림자이며, 유리알처럼 빛나는 강물과 속삭이는 물소리는 그리스도의 달콤한 은혜의 풍성함의 발자욱들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름다움이 알려지고 피조물이 그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향유하기를 원하신다. 자연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지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학교로서 믿음과 놀람으로 반응하게 된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위대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관문이다. 에드워즈가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신앙의 합리적 논증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논증은 간접적이요 증거는 직접적이라고 말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유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성경과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각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란 단지 합리적으로 기독교의 가르침에 설득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한번 보고 인간의 상상력이 무한히 사로잡히는 것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이나 하나님의 역사에 관한 명제와 같은 신앙의 고유한 교리를 공부하고 아는 것과 영혼에게 확증되어 나타난 신적인 것들의 거룩한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아름다움을 보고 향유하는 ‘새로운 감각’, ‘영적인 감각’, ‘인간 마음의 감각’을 성령의 선물로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부름받았으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사랑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그분과 함께하며 그분과 관계 맺으며 그분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자기를 참된 자기(self-authenticating)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끌어당기신다. 우리는 그분의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끼고 반하고 헌신한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논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정원에 핀 꽃들로서 꽃들이 햇빛을 마시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아름다운 빛을 마신다. 그것은 사랑이다. “신자의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그 아름다움을 닮은 존재가 되고 아름다운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김남준).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신중심적 개념이다.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매력이다.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미적 개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또 하나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조명하고 밝히고 기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실체이다. 거룩함은 뿌리이고 아름다움은 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서 하나님의 내적 본질인 거룩함이 찬란하게 빛난다. 4.<기독교 미학>을 위한 변명 - 도로시 세이어즈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술신학> 및 <기독교 미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만난 단비였다. 최근에는 영국의 소설가, 희곡작가 종교사상가인 도로시 세이어즈의 『도그마는 드라마다』를 만났다[➔이미지(3)]. 그의 새로운 선언은 교의학자로 이해하는 내 영혼을 다시 흔들어 용기를 주는 말이다. 세이어즈는 설교자들이 교리를 말하기 때문에 교회가 텅 비거나 지겨운 종교가 된 것이 아니라, 정 반대라고 말한다. “오히려 도그마를 무시하기 때문에 지겨움이 생기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역사상 인간의 상상력을 가장 크게 뒤흔든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그리고 그 도그마가 바로 그 드라마다”(23). 얼마나 놀랍고 멋진 말인가! 그는 또 <기독교 미학>이란 용어를 써가며(163~191), 교회와 신학에서 <기독교 미학>이 정립되기를 소망한다. 그는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예술에 관한 생각을 정립한 적이 없으며, 사실 그걸 시도한 적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미학에 관해 글을 쓰는 사람은 많지만, 자기 분야를 기독교의 중심 교리와 연계시키고자 일관되게 노력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164)고 지적한다.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고 내가 하고 싶은 분야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에 대한 이해를 분석, 그 한계를 지적하면서 예술은 도덕이나 모방 이상의 창조활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예술을 창조로 보는 관념이야말로 기독교가 미학에 기여한 중요한 공헌이라고 강조한다(179). 그는 오늘날 오락(예능, 오락성 예술)과 도덕적 마법(마법성 예술)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지만 정확한 의미에서 예술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 자신을 직면하게끔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정신적 화면에다 우리가 이미 꿈꾸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투영시켜 줄 뿐이다. 단지 좀 더 크고 좀 더 밝게”(187). 그는 교리란 “우리가 늘 말해 오지 않았던 우리 자신에 관한 그 무엇, 우리 자신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안겨주는 그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진리의 인식이다. 그것은 색다르고 놀라운 것이요, 또 어쩌면 우리를 온통 흔들어 놓는 것일 수도 있으나, 친근감 있게 우리에게 다가온다”(185)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의 미학에서 “그 교리가 완전히 사용되거나 이해된 적이 없기 때문에 예술적 표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혼란스럽고, 우상숭배적이고, 이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 그래서 우리는 이를 바로잡으려고 좀더 도덕주의적인 예술을 요구한다”(190)는 것이다. 오락성 예술과 마법성 예술, “이런 현상은 기독교 미학의 퇴보라기보다, 윤리가 아니라 교리에 기초한 진정한 기독교 미학을 찾고 검토하지 못한 잘못이다”(190). 많은 설명과 전개가 필요한 선언이지만 문제의 본질을 직관하고 있다는 느낌이 가슴으로 팍 꿰뚫고 들어오는 시원한 문장이다.
+1
66
32 comments
9 May 2020 
Public
 
*죽음을 이긴 선한 진리의 아름다움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의 대표작 <소크라테스의 죽음>The Death of Socrates (1787)이다. 소크라테스는 감옥의 침상 가운데 앉아, 차마 보지 못해 눈을 가리고 등을 돌려 손으로만 독배를 건네는 관리인의 독배 그릇을 오른 손으로 받으려 하고, 왼손으로는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늘을 가리키며 이데아의 진리를 주위의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제자들은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믿겨지지 않는 모습, 울고 애통하는 모습으로 주변에 서 있다. 쇠고랑도 있지만 그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침대 밑에 나자빠져 있다. 수석 제자 플라톤, 그는 차마 스승의 죽음을 보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고 침대 끝에 앉아 있다. 그는 스승의 대화를 모두 꼼꼼히 기록하여 방대한 대화록을 남겼다. 플라톤 밑에 잉크와 두루마리가 보인다. 소크라테스의 오른쪽에 친구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의 무릎 위에 얹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왼손에 아테네 시의 상징이 기록된 판을 보여주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는 저 멀리 문 밖의 계단을 오르기 전에 손을 들어 작별인사를 고한다. 소크라테스는 나이 70에 아테네의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국가가 신봉하는 신들을 신봉하지 않고, 다이몬이란 색다른 것을 신봉하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멜레토스에게 고발당한다. 그는 500명의 배심원들의 투표에서 2/3의 찬성표로 유배 내지는 죽음을 선고받는다. 그는 유배를 버리고 죽음을 선택한다. 그 이유는 “파이돈”에 잘 나타나 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에 가능했던 제자들의 도피 권유를 거절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변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신의 명령에 의하여 제가 지혜를 사랑하고(=철학하고) 나 자신과 남들을 검토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데, 이 자리에서 죽음이나 그 밖의 어떤 것을 두려워하여, 제가 지킬 자리를 버린다고 하면, 이것은 참으로 못마땅한 짓일 것입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예수님의 재판을 인류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오판이었다고 말한다. 둘 다 여론의 압력과 대중의 의견, 그리고 당사자에 대한 매우 잘못된 편견으로 저질러진 사건이다. 소크라테스가 왼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한 마지막 말은 무엇일까? <파이돈>에 나오지만 나는 <변명>의 마지막에 나온 멋진 말을 선택하고 싶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우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저는 죽음으로, 여러분은 삶으로, 어느 쪽이 더 좋은 선택을 했는지는 오직 신(神)만이 알고 계십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위협에서조차 자유로웠던 것은 지혜를 진실하게 사랑한자. 진리를 정직하게 인식하려고 한 사람. 아름다움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눈을 가지고 있으며, 늘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흥미를 가지고 그들에게 정신이 팔려, 다른 모든 것은 알지 못하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아요. 이게 바로 그의 자세지요.”(향연)
61
19 comments
26 May 
Public
 
[그놈의 직함] 그리스도론을 읽고 가르칠 때마다 그리스도의 인격(person)을 가리키는 신약성경의 타이틀, ‘그리스도’, ‘주’, ‘하느님의 아들’ 등은 타고 난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works)으로부터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자신이 선포의 핵심으로 삼은 것은 하느님의 나라이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직분이나 품위가 아니다”(한스 큉) 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인격이나 직분까지도 넘어서는 예수님의 선포 “하느님 나라”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다. 예수님의 인격이나 직분은 후대에 그를 따르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부여한 것이라는 현대 신학자들의 해석에 크게 감동되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지위나 직분을 스스로에게 부여한 사람이 아니라 오롯이 하느님 나라만을 생각하고 선포한 사람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회적 지위(地位)가 없는 무위인(無位人)이라 말했었다. 이름이나 자리를 탐내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감독(주교), 감리사, 목사 등의 직분이나,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바라보거나 그것 때문에 행여 흔들려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했었다. 우리 사회의 관행은 높은 지위의 직함을 너무 좋아한다. 모든 해방의 요구와 외침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장유유서의 질서, 사제지간, 선후배, 노소의 위계적 질서는 우리 사회의 모든 인간관계를 경직된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어떤 만남에서든지 한시도 관직의 상하나 사회적 신분의 상하가 아니면, 이 위계질서, 즉 이 가장 일반적인 권력의 질서를 의식하지 않는 때가 없다. 우리는 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힘의 질서를 재면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사회적인 영예스러운 직함을 넣어 부르지 않았다고 자존감에 상처를 입어 완전 틀어진 사람도 드물지 않다. 이 벽을 넘기 위해 ‘재가 수도회 가나안 공동체’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언님’이라는 칭호를 넣어 부른다. ‘언’이란 어질 ‘인(仁)’의 뜻을 담은 우리말이다. 언니의 ‘언’이 바로 그 말이다. 여기에 상대를 높여 ‘님’을 붙인 말이 곧 ‘언님’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름이나 자리 때문에 구원 사역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무위인(無位人), 이름이나 자리를 탐내지 않은 사람이었다. 진실로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않으신”(不患無位, 論語, 里仁 14) 분이시다. 그분은 한사코 자신의 이름을 숨기려 하였음에도 그의 사후에, 그의 생전에 이미 그가 하신 일로 인해 이름을 날리게 되신다. 헤브라이즘의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로부터 받아들인 예수님에게 붙여진 인격적, 무인격적인 모든 존귀한 타이틀, 명함(주님,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왕, 로고스, 길 ......)은 예수님 자신이 새긴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후대의 교회가 예수님에게 드린 존귀한 호칭(명함)이다. 그분은 영예로운 직함을 원한 적이 없다. 그분은 심지어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 8:20)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기존의 관습과 도덕률과 세계관, 요컨대 주어진 삶의 형식 전체를 거부하는 말과 행동이란 얼마나 극진한 것인가. 공중의 새처럼 살았던 순회 설교자, 당시에도 탁발 수도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의 견유주의자들처럼 자신의 독립이 목적이 아니라 다음 마을에서 그들을 받아들여 말씀을 듣고 치유할 수 있는 형제들의 환대를 믿었기 때문이다(눅 10:9 참조). 그러나 지금 나는 고향에서 영원히 추방된 사람 같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인용하여 유명하게 된 12세기의 신비주의자 겸 스콜라 신학자 성 빅토르의 휴고(Hugh of St. Victor)는 온 세상 어디에도 집을 두지 않고 사랑을 두지 않는 자만이 완벽한 자라고 했다. “그러므로 숙련된 지성을 위한 위대한 덕의 근원은 조금씩 조금씩 눈에 보이는 덧없는 사물들로부터 돌이켜 결국 그것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고향을 감미롭게 여기는 이는 미숙한 입문자이다. 모든 곳을 자신의 고향처럼 여기는 이는 이미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온 세상을 낯선 곳으로 여기는 이야말로 완벽하다. 미숙한 영혼은 세상 속의 한 지점에 자신의 사랑을 둔다. 힘을 갖춘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모든 곳으로 확장시킨다. 완벽한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세상에 두지 않는다.” 완벽한 자, 불가능한 가능성을 상상해보란 뜻인가. 인간이 막상 민달팽이처럼 온몸만이 집처럼, 직함으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 현실이라면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가 아니라 실은 가혹한 형벌로만 생각된다. 돌아갈 집 없이 돌아갈 어디도 없이 돌아간다는 말을 생의 사전에서 지워버린 집을 버린 자가 되길 바란다 매일의 온몸만이 집이며 길인, 그런 자유를…… 바란다, 나여 -김선우, <민달팽이를 보는 한 방식> 중에서 [이미지]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님의 초상화
+4
146
16 comments
11 Aug 2019 
Public
 
이 책, 『돈 일 교회』(이야기books)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책이다. 편집자(interviewer) 김문선 목사가 10명의 목회자들을 인터뷰해 정리하고 요약한 서술방식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목회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요지(要地)에 응당 들어가야 할 “예수 그리스도”란 말 대신 ‘돈’과 ‘일(노동)’을 놓았기 때문이다. ‘돈과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돈’의 절박함과 ‘일’의 중요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돈과 일’이 기독교 신앙의 한 복판에 들어온 것이다. 당연하지라~~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돈과 일’은 그동안 교회에서 숨기거나 기피하거나 꺼려하거나 얘기하더라도 숨어서 저녁 먹고 말했던 것을, 그들은 대낮에 까놓고, 그러나 대상화시키지 않고 몸소 체험한 것을 통해 말하기 때문이다. 이 포스팅이 길지만 한번 읽어주시길 정중하게 부탁드린다. 편집자는 책표지에 10명의 목회자들이 세상의 직업 경험 속에서 새로 얻게 된 처절한 실패의 경험, 당혹, 새로운 도전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다는 취지로 썼다. 세상의 직업을 가지게 된 배경은 크게 두 가지인데,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자와 부목으로 목회를 하다가 교회의 본질, 교회의 교회됨을 다시 근본적으로 묻게 되면서 목회지를 나온 경우, 그러나 양자 모두 목회자 가정의 경제적인 독립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직업을 가지게 된다. 이들에게 지속 가능한 목회와 가족의 생계를 위한 노동과 목회의 병행은 교회의 교회됨(본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나는 이들의 새로운 교회실험이 혼동 속에 있는 한국교회안의 새로운 ‘교회의 탄생’ (Ecclesiogenesis - 레오나르도 보프의 초기저작)이라고 믿는다. 이 책을 거울로 삼아 목사를 자처했던 나 자신을 비추어보게 된다. 시간강사를 11년 하면서 목회를 겸직하다가 새로운 교회로 나가지 못하고, 기회가 왔을 때 기존 체제에 편승한 본인의 소심함이 크게 보여, 용기 있게 나간 실험들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이다. 1.교회 안에 목공소를 차린 오경천 목사는 교회공간에 대해서 묻는다. 교회란 “더 많은 것을 채우며 욕망을 자극하는 공간인가? 새로운 물음을 던지며 위로하고 창조적 삶의 동력을 제공하는 미학적 공간인가?” 목수 노동의 치열함 속에서 느꼈던 존재의 비루함 속에서 오 목사는 목수 예수님을 다시 경험한다. “목수로 살아가니 목수로 살아갔던 예수의 아픔과 고뇌를 새롭게 깨닫는다.” 예수라는 관념이 목수의 삶의 현실을 통해 인식의 각성이 일어났다는 말도 쓴다. 오 목사는 목수노동을 통해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욕망을 성찰해야 하고, 그러나 이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목회와 직업이 서로 다른 일이 아니라 일상의 일을 통해 예배를 배우는 자리임을 말한다. 오 목사는 목수 일을 통해 얻는 가장 큰 유익은 성육신 신앙의 현실화라고 말한다. “살아야 하기에 낮아지는 아픔, 낮아짐의 그늘에서 발견되는 이웃의 아픔, 그렇게 누군가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나의 아픔이 그들의 아픔이 된다.” 그에게 성육신 신앙은 고난과 고통의 사귐과 나눔이다. 오 목사는 생활에 필요한 돈이 벌려고 목수를 시작했지만 세상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이 있음을 깨닫게 했다고 말한다. 노동은 일상을 예배하는 자리이며, 교회는 수직적 문화가 아닌, 수평적 문화를 지향하는 모임이다. 2.이동환 목사는 평화교회연구소를 차려 목회와 일을 겸직한다. 평화연구소는 가장 먼저 ‘개인 내면의 평화’를 추구한다. 내면의 평화가 부재한 사회적 평화추구는 교조화되기 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둘째 연구소는 교회의 평화감수성의 진작을 모색한다. 이 목사는 작은 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건물 대여비를 탈피하는 대안으로 교회를 지역에만 국한시키지 말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그는 지역을 초월해 가치와 신학 중심으로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예배 공동체를 이끌어 나간다. 이 목사에게 예배는 길 위의 예배이며 길 위의 공동체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길 위의 예배가 이어질수록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시지 않음을 느낀다. 굴뚝 위에도 계시고 천막 안에도 계심을 경험 한다. ... 성찬을 함께 나누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따스한 온기를 나눌 때면 성령의 역사를 누린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신학에서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아니 계신 데가 없다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부터 먼저 익힌다. 그러니 길 위의 예배를 통해 얼마나 하나님이 교회 안에 갇혀진 분으로 가르쳐 왔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느끼면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지를 묻고 반성하는 새로운 깨달음으로 여겨진다. 여기 인터뷰에 응한 10명의 목회자는 하나같이 목회 앞에 붙는 ‘이중직’ 이라는 판단 때문에 고민한다. 이중직이란 말은 이중국적이라든가, 저 사람은 이중적이야 라는 말의 쓰임새에서 보듯이 그리 긍정적인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이중직은 “물질이 신앙을 지배하는 한국교회 현실을 탈피하고 신앙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191)되었으며, 교회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과 세상의 직업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을 증언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중직이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루터는 모든 직업은 모두 하나님의 소명이라 했다. 3.커피 트럭을 준비하면서까지 커피를 통해 세상 사람들과 만나고 복음을 전하는 안준호 목사가 있다. 그는 일산의 한 마을 골목을 중심으로 예배당(참포도나무교회)과 카페, 목공소와 청년들의 작업공간을 마련했다. 그는 여러 번의 전도실패 경험을 거친 후 커피마을을 기획한다. 안 목사에게 커피는 생존을 위한 노동의 의미를 넘어 삶의 친구다. 이동커피를 통해 다양한 만남을 선물받기 때문이다. 그는 “달려라 커피”(이동커피)를 “사회적 심방”이라고 표현한다. 안 목사는 설교는 어떻게 준비하느냐는 물음에 대해, 노동 그 자체가 설교를 준비하는 자리라고 말한다. 설교 본문을 삶의 현실로 끌어와 실현하기 위해 애쓴다고 말한다. 그는 노동에 대해서 노동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노동은 목사의 신앙의 확장이며 창조주의 뜻에 순응하는 일이라고... 창조하는 하나님은 노동하는 신이다(창 1:1,27,31; 창 2:7-8). 안 목사는 교회다운 교회로서 생활신앙공동체를 실현할 수 있는 골목교회를 꿈꾼다. 그는 골목에서 사람을 만난다. 길거리에 나가서 예수가 만났던 길 위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흔들리는 발걸음을 붙잡아 준다. 그들의 고된 삶의 동반자가 되어 준다. 4.오재호 목사는 디자인 회사, 나믕과 이음을 운영하고 있다. 오 목사는 부목사로 목회하던 시절 그를 떠나지 않았던 고민은 늘어나는 교회와 목사의 수, 그에 비해 감소하는 종교인구, 이런 교회 구조 안에서 도태된 목사들이 현실적으로 너무 많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현실은 믿음이 부족하고 기도를 많이 하지 않아서 생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오 목사는 처음 회사를 차리고 밤을 새우며 한 달 동안 열심히 일을 했지만 그 달 수익은 50만원 이었다. 허탈했다. 노동의 대한 대가가 너무 적었디 때문이었다. 동시에 십일조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그는 십일조의 신학을 곰곰이 생각한다. “교회 안에서 십일조는 만사형통의 통로였다. 그러나 현실 경제 앞에서 십일조는 부담스런 종교행위였다... 십일조가 주는 복은 채움보다 비움에 가깝다. 욕망과 물질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과 의지.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과 고난에 동참하는 자비의 실천이다” 오 목사는, 예배는 오감(五感)을 다 사용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를 묵상하고 오감을 사용해 하나님과 상호 교감을 합니다. 시각을 통해 말씀을 읽고 하나님과 이웃을 바라본다. 같이 모여 밥을 먹으며 미각의 기쁨을 누린다. 후각을 통해 공간의 향취를 느낀다. 살갗의 스침을 통해 촉각의 살아있음을 경험한다.” 그는 감각을 통해 초월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곧 예배의 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 목사에게 디자인 회사는 곧 예배터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사랑에 근거해 사원들과 함께 노동의 가치와 대가, 부의 재분배 문제를 고민한다. 그는 사람의 자리가 다양해지고 경험의 폭이 넓어질수록 진리는 모호해진다고 말한다. 존재와 삶의 이야기는 불명확해진다. 인생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원인과 그물처럼 엮인 생명의 그물망은 이해와 분석이 불가능한 대상이다. 모호함, 불명확함, 이해와 분석의 어려움 앞에서 명료했던 신앙의 언어와 교리적 관념은 무너지고 새로운 하나님 신앙을 마주하게 된다. 오 목사에게 이러한 흐릿함이란 구별(차별)의 장벽을 명확하게 구분 짓던 언어와 관념을 허무는 영적 성숙을 의미한다. 5.황정현 목사는 정말 용기 있게 “제자도연구소”를 운영을 시작했다. 치열한 생존 경쟁의 현실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삶이란 무엇이며 또 그렇게 살기 위해서이다. 그는 다양한 실험과 실천, 만남을 통해 제자로서의 삶을 구체화시킨다. 그는 평일에는 노동과 신학연구소를 병행하고 주일에는 도시공동체교회를 인도한다. 황 목사의 제자도연구소는 수익이 없는 기관이기 때문에 건강한 사역과 생존을 위해 그는 ‘노동’을 병행한다. 노동현장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반추한다. “스스로 못 견딜 정도로 몸에서 땀 냄새가 나고 먼지로 뒤덮인 모습을 바라보며 일상을 살아가는 교인들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세상을 보았습니다.” 사회를 향한 황 목사의 관심을 더욱 갖게 만든 사건은 바로 “세월호”였다. 그는 수년간 세월호 아픔의 현장에 참여하면서 교회에 나오라는 권면만이 복음이 아니라, 아무 소리 없이 고난받는 자들과 함께 우는 행위도 복음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황 목사는 큰 사회적 사건에는 이슈와 이벤트를 통해 광장의 권력을 소유하려는 이들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역설도 보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의 욕망을 성찰하지 않으며, 더 큰 악은 자신들의 욕망을 정의라는 높은 가치로 위장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들에게서 또 다른 방식으로 ‘생명’이 억압되고 고통당하는 현실을 보게 된다. 하나님 나라 복음의 중심 메시지는 더불어 잘 사는 ‘생명’이며 제자도의 핵심은 생명이다. 6.디제잉으로 예배하는 한진호 전도사도 있다. 현란한 조명, 긴박한 비트, 자유로운 몸짓으로 대변되는 클럽음악을 워십에 적용한다. 황 정도사는 클럽, 파티 기획과 음향, 디제이 장비 렌털 업체인 스톰프(Stomp)를 운영한다. 한 대표는 디제잉 워십의 문화화를 위해 찬양과 문화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따졌다. 그가 내린 결론은 “악한 음악이 따로 있거나, 영적으로 더러운 음악 장르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장르와 음악, 악기보다 내용과 내면의 중심이 우선이다” 그는 사업을 위해 부동산(거주할 집과 일할 공간)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고 부동산은 회사의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투자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고 새로운 창조와 노동을 위한 공간임을 힘주어 강조한다. 한 대표는 사업에 일정정도 성공하자 부러움과 동시에 아는 이들로부터 자본에 물든 인생을 살아간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돈이 주는 안락함과 희열, 내면의 풍요 또한 일찍이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황 대표는 냉정하고 치열한 자본의 현실, 단호한 소비자의 선택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투명한 가격과 운영, 소신 있는 원칙으로 속고 소기는 거래가 아닌, 정직하고 당당한 거래, 말하자면 상생을 위해 노력한다. 한 대표는 모두가 좋기 위해 예수님처럼 자발적 “자기의 내어줌 ”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한 이유는 그게 옳다는 신념과 동시에 그 삶이 주는 끼쁨을 맛보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확신에 차서 말한다. 그는 노동의 현장에서 교회가지 못하는 이들의 삶을 살피면서, 노동의 순간과 노동의 현장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마당이고 노동시간은 단순한 노동을 넘어 감사의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황 대표는 그의 사업이 종교의 이름을 쓴 세속 사업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사업이 곧 순수종교라고 말한다. 삶이 곧 신앙이고 신앙은 삶이어야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이 모토가 사업장이라는 집단적 차원에서 실현되길 바라마지않는다. 7.정민재 목사는 부목으로 일하다가 교회를 나온 경우이다. 이유는 성서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 방식대로 작동되지 않는 교회의 문화를 견딜 수 없어 자유에 대한 갈망을 찾아 교회를 나왔다고 말한다. 그 후 몇 개월 실직자 생활을 하다가 단기 알바도 하고 생계를 위해 식당 창업을 했다. 정 목사는 노동을 통해 고통의 깊이를 알게 되었고 공감능력을 배웠다. 성서가 전하는 공감능력이란 일방적 가르침과 훈계, 위로를 가장한 설교나 분석과 판단이 아니라 함께 느끼고 이해하는 것, 그렇게 아파하는 이의 자리에 함께 서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는 누군가의 삶을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재단하려 드는 도덕 계율로 세뇌된 종교인들을 많이 발견한다. 정 목사는 교회 안과 교회 밖으로 신앙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가르침과 현실에 불만이다. 그는 이 문제의 원인을 세상에 적용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교회의 선언적 가르침에서 찾는다. 그래서 그는 삶을 위한 신학, 삶을 위한 가르침을 찾게 되었다. 정 목사는 식당운영의 마당(場)에서 거룩을 고민한다. 예수님의 삶이 거룩한 삶의 원형이라면, 예수는 혼자 있는 고독의 시간을 즐기며, 사람들과 함께 부대기며 울고 웃는 식탁 교제도 즐겼다. 그렇게 골방과 광장, 회당과 시장을 오가며 홀로,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삶 속에서 때로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의 고통 앞에 절망하면서도 하나님과 조화로운 일치의 삶을 사셨고 그것이 거룩한 삶이라고 본다. 정 목사는 돈이 어떻게 벌리고 유통되며 소비되는 과정, 즉 돈의 흐름을 잘 알아야 기독교 신앙이 맘몬 숭배로 전락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그의 목회 자리는 식당이다. 그는 거기서 사람과 존재 중심의 목회를 꿈꾸고 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 힘쓰는 삶, 그 자체가 목회이기 때문이다. 8.장부 목사는 세종시 이음교회에서 목회를 한다. 그는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이음의 신비를 경험하게 한다고 말한다. 너와 나를 잇고, 교회와 세상을 이으며 하나님과 개인의 하나 됨을 지향하며 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면서 그는 생계를 위해 여러 종류의 아르바이트(떡집, 헬스장, 카페, 대리운전기사 등)를 하고 있는 중이다. 장 목사는 노동을 통해 노동이 사투이면서 동시에 즐거움을 선물해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알바를 통해 얻는 수입이 현실에 비해 상당히 적은 액수였지만 행복했다고 말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많이 벌면서 왜 힘들어할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부자는 결국 나의 것을 남에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도행전에서 나의 것과 소유의 개념을 넘어서 공유하고 나눴듯이 말이다. 교회와 세상이 이어지는 길은 나눔이며, 이 길만이 성서가 고백하는 물질에 대한 해방과 자유로 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9.주원규 목사는 글쓰는 일(작가)을 또 하나의 업으로 행하고 있는 목사이다. 주 목사는 믿음의 본질은 존재의 어둠까지 끌어안는 자기초월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존재의 ‘흔들림’ 자리하고 있다. 타락한 종교는 흔들림의 신비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흔들리며 걷는 믿음의 징표 중 하나가 ‘성찰하는 능력’이며, 주 목사는 글쓰기를 통해 신학과 목회를 성찰한다. 주 목사는 30대 중반 무렵 시간제 알바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던 중 모신문사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분에서 수상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작가로서의 일을 하면서 신학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목사가 되어 건물 없는 교회로 교인의 가정이나 카페, 야외 공원 등 다양한 장소에 모여 함께 성서를 읽고 삶을 나눈다. 주 목사는 세속 사회를 계몽시키고 구원해야 한다는 외침을 기독교의 자기 우월주의고 교만이라고 비판한다. 구원받은 자라는 믿음 안에서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는 교만이라는 것이다.변화와 구원을 외치면서 막상 교회는 세상보다 더 병들어 교회의 모순을 직시한다. 주 목사가 본 세상을 교회와 달랐다. 세상에서는 사랑과 정의의 균형을 위한 성찰과 성숙의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타락한 정치와 돈에 분노했으며 불의에 저항하기 위해 정의를 외쳤다. 여전히 악과 부패는 존재하지만 사람의 얼굴을 한 세상을 말했다. 세상은 교회보다 열린 공간이었다. 주 목사는 세상에서 교회를 통하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 목사는 세상의 개혁적인 활동 속에도 우월주의와 폭력성이 은닉되어 있음을 간파한다. 그들은 옛 구조 안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고충과 치열함을 정죄의 눈으로만 바라본다. 그래서 주 목사는 사랑 위에 세워지지 못한 정의는 또 다른 폭력과 상처를 일으킨다고 경고한다. 주 목사는 자기 우월주의에 빠진 개혁보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본질을 묻는 신학적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10.서정훈 목사는 강화의 일벗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기업인 콩세알의 대표이기도 하다. 일벗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벗 삼응 이들의 모임이다.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살아간다. 서 목사는 함께 사는 삶의 공동체를 촉진하고 실현하기 위해 필수적인 생산 기반으로 사회적 기업을 만들었다. 이 기업은 예수 경제학 실천의 장이기도 하다. 사회적 기업 ‘콩세알’은 “생명, 나눔, 순환”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기업이다. 어려움은 사회적 기업에 속한 구성원의 대다수가 취약계층의 사람, 장애, 나이, 사회 부적응자들이다. 당연히 생산성이 떨어진다. 시장은 냉정하다. 소비자는 선한 마음으로 몇 번의 선행은 베풀 수 있지만 품질 좋은 착한 가격의 제품을 구매하고자 한다. 이것이 사회적 공동선을 구현하기 위한 과정에서 현실과 부딪히는 딜레마이다. 그러나 서 목사는 이상을 실현해나간다는 것은 현실과의 끝없는 불가피한 마찰이며, 이를 예수를 따르는 일이라 여기며 극복해 나간다.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기에 서 목사의 다음 결론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예수를 위시한 성서 속 대다수의 인물들은 존재적 삶을 지향했다. 존재하기 위해 소유했다는 뜻이다. 이들에게 소유는 하늘의 은총을 경험하게 하는 영성의 통로였다. ... 물질세계는 정신세계로 나가는 디딤돌이었으며, 감각은 초월을 경험하게 하는 매개였다” 물질은 은총의 수단이며 초월의 창인 것이다. *나가는 말 종교개혁 교회는 “교회는 복음이 순수하게 가르쳐지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되는 성도들의 모임이다”라고 정의했다. 보이는 교회건물을 전제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10명의 목회자들에게서 이런 정의를 찾을 수 없다. “교회는 수직적 문화가 아닌, 수평적 문화를 지향하는 모임이다.” “교회는 다양한 사회 공동체와 더불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축이다.” “교회는 생활공동체다.” “교회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이어가는 징검다리이다.” “교회는 열린 대화의 자리이다.” “교회는 생명의 영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이다.” 이러한 교회의 정의들에서 말씀과 성례전은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말씀과 성례전을 무시한 게 아닌가하는 의심도 든다. 그러나 사용된 낱말이 아니라 행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의 새로운 실험들에서는 세상의 노동을 통해 성육신된 ‘말씀’과 세상의 일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체험 속에서 맛보는 ‘성찬’으로 말씀과 성례전이 변형되어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다. 편집자 김문선 목사는 책을 시작하면서 “진리 실험 이야기”라는 화두로 시작한다. 새로운 교회 실험이 아니라 진리, 신앙의 진리를 실험하는 이야기들인 것이라고, 교회의 본질 추구는 결국 진리추구에 달린 것이라고, 더 근원적으로 문제를 접근한다. 진리를 실험하는 정신은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한 '세상의 실험'(Experimentum Mundi)과 통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생각과 말과 행위와 감정으로서의 삶의 실험장이다. 이 책이 널리 읽혀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12
33 comments
End of results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