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9

Philo Kalia | Facebook [1] 일본

Philo Kalia | Facebook [일본]

키워드를 위안부, 박유하로 하면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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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A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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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을 끼고 다닌다. 일본 강담사에서 발행한 세계문학전집-, 워즈워즈나 브라우닝의 시의 구절을 암송하고, 슈니츨러의 희곡을 탐독한다. 집에는 끼니를 굶고, 동생들을 학교 보낼 형편이 못되어도 그들은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 호수같이 맑은 바다 위에 뜬 달을 보고 「아~」하고, 봄날 아지랑이 이는 전원에서도 「아~」하고, 가을 낙엽을 밟으면서도 「아~」한다고 해서 소위 「현실파」들은 이들을 비꼬아서 「아~ 파」라고 불렀다. 이 「아~ 파」의 선배들은 일찍 동경으로 건너가 우선 공부하기 시작했다. 돈 없이 갔으니 납일(納日) 장사(신문배달)를 하며, 학교에 적은 두었으나 대부분 공부가 되지 않는다. 고생의 과정에서 권력자에 대한 반항의 철학을 배운다. 그래서 일본의 그때 유행하던 아나키스트들의 영향 속에서 일부는 과격한 무정부주의자가 된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사람이 집을 한 채 빌린다. 그다음 줄을 이어 고향 사람이 따라 들어온다. 집세는 반년이고 일 년 분이 밀린다. 그중에 부잣집 아들이 있어 다 달 송금이 오면 7-8인이 그것으로 산다. 때마다 수제비를 쑤어 먹어야 한다. 겨울이 오면 땔감이 없어, 울타리를 뜯어 땐다. 그다음에 집을 이은 판자를, 심지어 천정의 널빤지 까지도--. 일본사람 집주인이 집세를 받으러오면, 피한다. 집세는 2년, 3년이 밀렸다. 어쩌다가 주인이 대표자가 집에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는 빨가벗고 긴 일본도(日本刀)를 옆에 놓고, 정좌를 하고 있다. 그래서 번번이 집주인은 질겁을 하고 도망을 한다. 이 무정부주의자들에게는 「죄없는 개인의 사유재산」이란 도덕이 통용하지 않는다. 「네놈들이 조선의 식민착취로 얻은 재산의 일부가 아니냐. 조선 총독부가 우리 민족으로부터 착취한 금액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이치다. 이때를 전후하여 동경에서 공부하던 통영 출신의 명사들 중에 유치진(柳致眞), 유치환(柳致環) 형제와 김용식(金容植) 전 외무부 장관이 있다. 유씨 형제는 이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신적으로, 또는 적어도 분위기적으로는 친분관계를 가지고, 또 그 영역에서 살았다. 이때 여기 속하는 사람 중에 예술 계통의 사람들이 꽤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분들이 고향에 돌아와 「아~ 파」를 형성하였거나, 그런 분위기를 조성 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아~ 파」로 불리우는 사람들은 비단 비생산적인 생활만 한 것은 아니다. 돈은 없어도 모여서 어두운 불빛 아래 시를 낭독하고 철학을 논의하였다. 때로는 스스로 각본(脚本)을 써서 엷은 반일적 연극(反日的 演劇)을 공연하였다. 이러다가 좌익운동으로 지하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 「순수성」을 고집하던 사람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여 사설도서실을 꾸몄다. 이때 나의 어린 시절 여기서 동화집을 얻어다가 탐독하였다. 이런 시절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나에게는 어떤 예술적이 소양이 형성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물론 이 「아~ 파」의 후배들이 일제 전쟁 말기에 고등경찰의 지목을 받다가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 예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 八一五해방 직후에는 이 두 파가 어떻게 되었는가? 소위 「현실파」에 속하던 사람들은 재빨리 일본사람들이 던지고 간 상점을 점령하고 경제권을 잡는 데 급급하였다. 이른바 敵産적산) 처리의 소용돌이 속에 헤엄쳐 다녔다. 그러나 「아~ 파」의 후예들은 먼저 잃었던 민족의식을, 우리말과 우리글을 찾아주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었다. 이들은 정치를 하는 것을 대개 더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교육계에 들어갔다. 여기 병행하여 문화협회를 조직하고, 음악회를 열고 야학을 열어 무산 아동을 교육하고, 연극을 하고 한글 강습회를 하고 ---, 이를테면 계몽운동에 중점을 두었다. 오늘 한국에는 “통영에서 많은 예술가가 낳다~~”고 하는 말이 정평이 되어 있다. 이 말은, 통영에서 「아~ 파」가 닦아 놓은 길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말이리라. 그리고 전 한반도를 돌아봐도 통영처럼 “민족의 양심”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많지 않으리라. 나는 고향을 떠난지 30여년! 고향에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떻게 변하였는지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 진리의 표준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나는 꿈에도 잊지 않는 나의 고향에 아직도 갈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환상(幻想) 같아서는 옛날 희랍의 철인(哲人)처럼, 눈에 돋보기를 쓰고 통영의 거리거리를 찾아다니며 소리를 외치며 물어보고 싶다, 「여기 어디에 아직은 양심이 살고 있는가 ?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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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 Ju Kim, Sung Deuk Oak and 11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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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Jul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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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과 일본 전통집 (Bauen Wohnen Denken) “같은 동양이라 하더라도 일본인과 우리 한국인의 미의식은 확연히 다르다. 

나는 이 두 그림을 통해서 형식의 의미보다는 그 형식을 낳게 한 의식을 지적코자 한다. 자의적인 절제가 언제든지 한계를 가지는 데 비하여 무의식적 절제는 그 한계를 두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숙명이다.”(승효상, <빈자의 미학>, 82) 건축가 승효상은 건축의 요건으로 세 가지를 언급한다. 합목적성, 장소성 그리고 시대성이다. 합목적성이란 건축이 적합하게 수행해야하는 목적이며, 장소성이란 건축이 놓이는 땅에 대한 관계이며 시대성이란 그 건축이 배경으로 하는 시간과 역사를 의미한다. 나는 셋 중에 특히 장소성에 이목이 쏠린다. 승효상은 장소성과 관련하여 오래된 말인 지문(地文), 즉 터무니를 모셔오기 때문이다. 터무니란 사람이 터(장소, 땅, 거주지)에 살면서 새기고 새겨진 공동체의 삶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공동체의 관습의 무늬, 공동체적 삶의 역사적 흔적이기 때문이다. 승효상은 오늘의 한국 도시가 효율성과 합리성, 기능과 속도를 중시하고 전호후랑으로 건축(아파트와 건물)을 자산 증식의 수단으로 종속시켰기 때문에 “터는 개발할 면적”으로만 계산된다고 한탄한다. 그래서 옛 도시들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죄다 터무니없이 뜯어고쳐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땅에 대한 성찰을 주장하면서 현대 도시가 메트로폴리스가 아닌 메타폴리스(metapolis, 프랑스의 도시학자 Ascher의 말), 즉 ‘성찰적 도시’를 현대도시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윤리의 건축이다. 윤리의 건축이란 땅과 건축 사이의 윤리를 따지는 것이고 건축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따지는 것이다. 그래서 선조들은 노동을 뜻하는 건축(建築)이 아니라 가꾸어서 만드는 영조(營造)라 했으며, 집은 그냥 물리적으로 세우는 게 아니라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짓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본래의 건축(집짓기)에는 터에 대한 성찰과 인간의 거주 그리고 사유의 과정이 함께 자랐던 것이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글 “Bauen Wohnen Denken”(집짓기 거주하기 사유하기)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이 글(1951년)은 『강연과 논문』에 수록되어 있는데, 대학원과 학위과정에서 이 책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도서였다. 나는 당시 도서관에서 해천 윤성범 선생님의 기증도서를 복사해 읽었는데, 지금 보니 이미 오래전에 우리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세 선생님에 의해 아주 말끔하게 번역되어 있다. 하이데거는 집짓기(건축)란 근원적으로 거주하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란 이 땅위에서, 하늘 아래에서, 신적인 것들 앞에 머물러 죽을 자로서 거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주함의 근본 특성은 소중히 보살핌에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건축물이란 사방(하늘-땅-신적인 것-죽을 자)을 저마다 그 나름의 방식으로 소중히 보살피는 사물들이다. “사방을 소중히 보살피는 것, 즉 땅을 구원하고 하늘을 받아들이며 신적인 것들을 기다리고 죽을 자들을 인도하는 것, 즉 이렇게 사중적으로 소중히 보살핌이 거주함의 단순하고도 소박한 본질이다.”(<강연과 논문>, 205) 그래서 하이데거는 거주의 본래적 곤경은 주택이 모자란다는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을 자로서의 인간이 거주함으로 비로소 배워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칭한다. 존재가 밝히 들어나는 장소가 인간이란 점에서 Sein(존재)의 Da(터/장소), ‘터-있음’(Da-sein)이다. 그러나 그 터-있음으로서의 인간 현존재는 거주지를 그 터로서 모으고 보살필 때 그 본래적 의미에 가닿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승효상이 말하는 지문(터무니)을 살리는 집짓기와 하이데거의 Da-sein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집짓기 거주하기 사유하기’는 크게 다르지 않고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일본 전통집의 자의적인 절제가 언제든지 한계를 가지는 데 비하여 한옥의 무의식적 절제는 그 한계를 두지 않는다”고 보는 승효상의 미의식은 한옥의 구조가 한국 사람의 삶의 방식이 있는 대로 드러난 것이며, 그것은 터-있음의 터(장소) 안에서 열린 자세로 활연(豁然)하게 살았던 삶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숙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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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Ma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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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vs 골리앗] [말씀]사무엘상 17장 [이야기 풀이]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재미있었다. 볼거리 없었던 시절 주일학교 선생님의 목소리, 눈빛 손짓과 몸짓으로 푸는 전쟁 이야기는 그 소박함과 열정으로 인해 요즘 인기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이미지(1)]. 렘브란트의 에칭은 거인 골리앗 앞에서 물맷돌을 휘돌리는 작은 소년 다윗의 영민함을 단숨에 그려낸다. 어린 시절인지라 거구 골리앗보다는 홍안의 소년 다윗 편이었다. 

다윗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였다. 가난하고 弱小한 시대를 살았던지라, 일제와 전쟁이후의 경험에서 强大한 네 나라(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의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은 한국 소년들에게 만화 같은 환상적 꿈이었다.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에게 달려가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그의 칼을 그 칼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적장의 머리를 벤다. 적장 자신의 칼로 자신의 머리를 베임 당했으니 장수로서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아무리 적장이라도 적장의 칼을 빼어 머리를 베는 행위는 적들에게 수치심과 두려움 그리고 심리적으로 강한 복수의 적개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다윗의 군대는 적장을 베는 것으로 전쟁을 끝내지 않고, 골리앗의 죽음을 보고 겁에 질린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여 섬멸했고 그 진영의 전리품을 노략한다. 죽은 골리앗의 시신을 짓밟고 적장의 칼집에서 칼을 빼내어 적장의 멱을 따는 다윗은 적장의 시신까지 모독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명장 중 그 어느 누구도 적장을 이렇게까지 모욕하지 않는다. 아무리 적장이라도 적의 장수로서 대하는 예가 있다. 죽는 순간에도 인간의 존엄을 짓밟거나 잃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 나의 인간성을 짓밟는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사울 앞에 선다. 그러나 골리앗의 멱을 딴 다윗의 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심장을 향하여 던지는 사울의 창과 자신의 머리통을 향하여 쏘는 화살이 되어 부메랑처럼 날아올 것이다. 회화에서도 특히 르네상스와 초기 근대를 중심으로 화가들은 건장한 젊은 영웅 다윗과 골리앗의 목을 베는 다윗을 많이 그렸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은 그리스의 헤르쿨레스(Hercules)를 모델로 아름다움과 정력, 강함과 확신을 마음껏 발산한다. 시스티나 천정화에 그려진 다윗과 골리앗 그림은 그리스도의 사대 덕 중에 용기를 드러내며 그의 신적 특성을 고취한다. 카라바조는 ‘다윗과 골리앗’에서 고전적 영웅상을 계속 보여주며 코르토나의 <다윗과 골리앗>과 <사자를 죽인 다윗>, 푸생의 <다윗의 승리> 그리고 렘브란트의 <요나단을 만나는 다윗>이 이러한 행렬을 이어간다. 특히 우트레히트 학파의 익명의 한 화가가 그린 <다윗과 골리앗의 머리>(c.1630)에서 다윗은 콧수염을 기른 채 그의 전리품인 골리앗의 큰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과장되게 그려진 길고 큰 칼을 어깨에 멘 모습을 통해 다윗의 영웅적 모습과 승리에 찬 확신을 드러내고 있다. 17세기의 구에르치노, 젠틀레스키, 카라바조 등의 회화는 골리앗의 시신 앞에서 명상하는 다윗의 모습을 그린다. 이 그림들은 역설적으로 적을 물리치게 한 하나님께 감사하는 다윗의 순수한 경건을 노래했고, 남성적 건강미 넘치는 모습으로 다윗을 그려왔다. 역사적 사건이 사탄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종교적 경건을 위하여 신화화된다. 이상 다윗을 이긴 골리앗의 이미지는 대중이 선망하는 다윗에 대한 지배적인 이미지임을 알 수 있다. [➔이미지(2)] 잠시 이런 상상을 해보자. 만일 다윗이 골리앗을 물매가 아니라 수금 연주를 통해 감화 감동시키고 물리쳤다면 어땠을까? 사울이 악신이 들려 번뇌할 때마다 다윗이 수금을 타,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이 그에게서 떠나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골리앗이 전쟁을 일삼는 것도 전쟁의 악신이 들려 그런 것 아닌가? 사울의 번뇌를 수금을 타 진정시켰듯이 전쟁광 골리앗의 악신을 수금을 타 물리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창과 방패 앞에 수금을 든 다윗. 무기 vs 악기, 무기의 경직된 직선 앞에서 춤을 추는 악기의 유려한 곡선! 백남준. 그는 2000년 1월 1일 0시(한국시간) 'DMZ 2000'을 판문점에서 공연했다.[➔이미지(3)] 다니엘 바렌보임. 그는 1999년에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를 시작하여 '평화의 지휘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오케스트라는 서로 반목하는 사이인 이스라엘과 시리아, 레바논 및 팔레스타인 등 중동 출신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11년 광복절에는 임진각에서 평화 콘서트를 열어 분단국가인 한반도에 화합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였다.[➔이미지(4)] 소석 유동식 선생은 죄악을 맞이하여 이기는 “예술적 방법”을 제안한 바 있다. 예술적 방법이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거나 힘의 균형이라는 정치적 타협의 길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도전하고 극복하는 미학적 실천의 길이다. 소석 선생은 처용랑의 설화에서 처용랑이 시와 춤과 노래로써 사신(邪神)을 물리친 방법을 일례로 들고 있다. 여기서 예술이란 역사 속에서의 작업이되 역사의 투쟁 속에서 함께 허우적거리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 있는 지혜, 곧 현실 속에 있으면서도 이를 또한 초월할 수 있는 내재적 초월의 행위라고 보는 것이며, 이것이 죄악을 이기는 예술적 방법이다. [이미지](1)렘브란트(Rembrandt), <다윗과 골리앗>David and Goliath, 1655; (2)젠틀레스키(Orazio Gentileschi), <다윗과 골리앗>, c.1610; (3)백남준, <DMZ 2000>; (4)바렌보임,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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