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30

崔吉城 「国際的な紳士との出会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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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吉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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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経済日報へ寄稿文「国際的な紳士との出会い
」2021.11.26

どういう理由か、海外に出た韓国人は多い。中国が最も多かったが、今では米国のほうに多く出ている。日本に住む同胞も80余万人を超えるが、ほとんど半分ぐらいが日本の国籍を持っている。彼らにはそれぞれの事情があり、海外に住んでいるのであろう。新しい国に住んできた過程はかなり違い、詳しく聞いたらほぼ劇的と言えるだろう。
今世界に散らばっている韓国人が祖国という絆でディアスポラという連結網になっている。故郷を懐かしみながら「異郷での暮らしは、寂しい」と歌いながら多くの人は故国の山河を眺めるが、帰らない。祖国に背を向けた人もいれば、祖国を思い慕う人もいる。韓国とは距離を置く人もいる。
グローバル時代を生きる。底辺で差別される人もいれば、長い成功談を語る人もいる。ここに珍しい海外在住経験者、オーストラリア在住のSejin Pak(1948生)博士を紹介したい。この度、ユーラシア財団(理事長佐藤洋治)支援講義「アジア共同体論」で彼を遠隔講師としてお招きし、貴重な証言を聞くことができた。
1964年、15歳の朴氏一家はポーランド移民船に乗ってインド洋を回り、アフリカ南端の喜望峰を経てブラジルに到着した。彼の父親は日本で大学を出た知識人であり、日本語能力でそこの日本人社会に入り込んだ。パク氏は日系出版社に勤めながら夜学、ポルトガル語を習得した。父の物理学の勉強のため,1969年にカナダに移住し、英語の世界に参入,そして米国への移民をしたのである。
パクさんはボストンにあるハーバード大学院日本研究科で社会学を研究し、1985年から日本で参与観察などの現地調査を行い、博士号を取得した。1992年、オーストラリア·アデレードAdelaide大学教授として赴任し、日本学の教授をして定年、現在に至っている。彼の海外での逆境で真摯な人生の物語は重要なポイントが含まれており、聴講者たちを魅了した。
私は、彼に韓国を離れた理由を問わざるを得なかった。なぜ彼らは韓国を離れたのか。 一つは韓国の反共政策、もう一つは親の子供の教育のためだったと語った。家族的に北朝鮮との関係があったためだったという話に私は膝を打った。私の親友が師範大学を卒業しても就職できないことに悩み、退学せざるを得なかった当時の<反共>を思い出した。北朝鮮と少しでも関係があれば生き残れない時代であった。当時北朝鮮に親戚がいる家では就職が難かったことを私はよく知っている。
彼は韓国出身の海外同胞に違いないが、韓国に根ざした愛国主義者や国粋主義者ではない。ある国のように国境を広げるのは反国際主義である。結局、自民族や自国を基にした民族主義・国粋主義の延長にしかならないと言える。韓国を基礎にした民族主義者は、決して国際人ではない。彼は「ベースbaseがない韓国人にすぎない」と主張した。珍しく初めて国際的紳士との出会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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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민속원, 許修禎 and 18 others

1 comment


Masato Shirashima

先生、おはようございます。在日朝鮮人・韓国人と Sejin Pak博士のように朝鮮が分断されて以降のディアスポラを形成している人達は基本的に違いがあると思います。在日の朝鮮人・韓国人の人達も戦後日本に再入国した人達が殆どですが、こちらの方々は旧宗主国としての日本に生活の場を求め、日本以外の方々の多くは先生もお書きになっているように朝鮮動乱後の韓国の反共政策に翻弄された人達なのでしょう。民族としての朝鮮人は過去の中国の冊封体制から生き残る術を自然と身に着けてきたものと思います。そう言うものが現代に於いても地縁血縁を重視するものとなっていると思います。勿論、在日のディアスポラとそれ以外のディアスポラの人達とのリンクは朝鮮人と言うル-ツを一にすると言う事であるとは思います。(中国における朝鮮族も同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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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경제일보 기고문

 '국제적인 신사와의 만남' 2021.11.26

어떤 이유에서인지 해외에 나간 한국인은 많다.중국이 가장 많았지만 이제는 미국 쪽으로 많이 나오고 있다.일본 교포도 80여만 명이 넘지만 거의 절반가량이 일본 국적을 갖고 있다.그들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어 해외에 살고 있는 것이리라.새로운 나라에 살아온 과정은 많이 달랐기 때문에 자세히 들으면 거의 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들이 조국이라는 인연으로 디아스포라라는 연결망을 이루고 있다.고향을 그리워하며 타향살이 외롭다고 부르며 많은 사람이 고국의 산천을 바라보지만 돌아오지 않는다.조국에 등을 돌린 사람도 있고 조국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한국과는 거리를 두는 사람도 있다.
글로벌 시대를 살다.바닥에서 차별받는 사람도 있고 긴 성공담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여기에 보기 드문 해외 거주 경험자, 호주 거주 세진팍(1948생) 박사를 소개한다.이번에 유라시아 재단(이사장 사토 요지) 지원강의 '아시아공동체론'에서 그를 원격강사로 모시고 귀중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1964년 15세인 박 씨 가족은 폴란드 이민선을 타고 인도양을 돌아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거쳐 브라질에 도착했다.그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었으며 일본어 능력으로 그곳의 일본인 사회에 파고들었다.박 씨는 일본계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야학, 포르투갈어를 습득했다.아버지의 물리학 공부를 위해 1969년에 캐나다로 이주하여 영어세계에 진출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박씨는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대학원 일본연구과에서 사회학을 연구하고 1985년부터 일본에서 참여관찰 등 현지조사를 거쳐 박사학위를 받았다.1992년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 Adelaide 대학 교수로 부임해 일본학 교수를 하다가 정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그의 해외 역경으로 진지한 인생 이야기는 중요한 포인트를 담고 있어 청강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에게 한국을 떠난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왜 그들은 한국을 떠났을까. 하나는 한국의 반공정책, 다른 하나는 부모의 자녀교육 때문이었다고 했다.가족적으로 북한과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에 나는 무릎을 쳤다.내 가장 친한 친구가 사범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이 안 되는 고민 때문에 자퇴를 해야 했던 당시의 <반공>을 떠올렸다.북한과 조금만 관계가 있어도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였다.당시 북한에 친척이 있는 집에서는 취직이 어려웠던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는 한국 출신의 교포임에 틀림없지만 한국에 뿌리를 둔 애국주의자나 국수주의자는 아니다.어느 나라처럼 국경을 넓히는 것은 반국제주의다.결국, 자민족이나 자국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국수주의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한국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자는 결코 국제인이 아니다.그는 베이스base가 없는 한국인일 뿐이라고 주장했다.드물게 처음으로 국제적 신사와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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